머리말에 대한 영적 해설

 

 

이 시점에서 안티레티코스 본문을 그 안에 배치하는 본질적 그림이 청사진으로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독자에게 에바그리우스 본문 자체를 소개하기 전에 저자의 본래 의도에 걸맞게 수도승적으로 다시 읽는 방식으로 해설하면서 머리말의 내용에 더 깊이 다가가도록 독자를 초대하고 싶다. 사실 에바그리우스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오로지 '거룩한 교부들의 발자취를 따를 때, 다시 말해 자신의 영성생활을 위해 여기서 말하는 방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결실을 맺을 때 자신의 독서가 완성되리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에바그리우스의 저술 목적이다. 이제 작품을 한 구절 한 구절 분석하면서 작품 전체의 교의적 · 영적 토대를 살펴보자.

 

 

사람들, 천사들과 악령들, 그리고 하나님 인식을 위한 싸움

하늘 아래(코헬 1,13) 있는 이성적 본성의 한 부분은 싸움을 하고, 한 부분은 싸우고 있는 자를 도우리 오고, 한 부분은 싸우는 자를 거슬러 용기 있게 전투를 일으키고 북돋우며 그를 대적해 싸운다. 싸우는 자는 사람이고, 그를 돕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이며, 그의 적대자는 악령이다. 그러나 사람들 안에 하나님 인식이 줄어들고 사라진다면(17:2), 그것은 악령들의 강력한 힘이나 조력자들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싸우는 자들의 느슨함 때문이다.

 

현대의 감성에는 유일한 '이성적 본성(phýsis toghike) 안에 천사, 사람, 악령을 한데 모으는 것이 낯설다. 반면 악령은 타락한 천사이므로 천사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사실 에바그리우스에게 천사, 인간, 악령은 '이성적 본성이 발견되는 좋거나 나쁜 '상태'(katástasis)의 표현일 뿐이다. '차이'(diaίresis)는 본성상 이차적이고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통하여 극복되도록 예정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지상적 존제 안에서는 바꿀 수 없다.

이 세 가지 주요 계층 중 인간은 '실제적 육체' 덕분에 자기 '상태'를 더 좋게도 더 나쁘게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천사'로 바뀔 수 있을 뿐 아니라 '악령'으로도 바뀔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제한에 따라 이 세상에서 인간은 고도의 순수함에 힘입어 '천사'와 같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거의 천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욕정, 특히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인간은 '뱀과 같이' 되고 '악령'으로 바꿔다.

사실 인간 육체 조직은 덕을 실천하라고 그에게 부여된 '도구'. 그러나 반대로, 인간의 '자유의지'(proaίresis) '자신에 대한 권한'(autexoúsion)은 악을 선택하고 악습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도 열려 있다.

따라서 인간의 지상 실존은 싸움과 결정으로 정해진다. 이 과정에서 천사들이, 특별히 개인의 수호천사가 그를 도우리 온다. 반대로 그의 '적대자들'(antikeimenoi)인 악령은 그를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짓을 자행한다. 이 싸움은 '생각'의 차원에서, 주로 인간 내면에서 전개된다. 천사들은 선한 생각을 일으키는 반면, 악령들은 악한 생각으로 그에게 교묘히 접근한다. 인간은 창조 때 인간 본성의 ''에 심기고, 따라서 제거될 수 없는 덕의 '씨앗'에서 분출하는 그 생각들 덕분에 이것과 저것 가운데 전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양심의 움직임'(moti di coscienza)이라 부르려 하는 이것은 심지어 지옥에 있는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조차 있다.

그렇듯 선을 행하고 악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이 싸움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자기 탓일 뿐이다. 에바그리우스가 안티레티코스 여덟째 담화에서 많은 예를들어 설명하듯이, 이 개인의 책임에 대한 부정은 가장 위험한 유혹 가운데 하나인 교만이다. 교만은 신성모독의 한 형태로, 간음의 경우에조차 인간 고유의 책임을 거부하며 천사들의 도움이나 하나님 섭리도 거부한다. 논리적으로 이런 견해는 선과 악의 보상에 있어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첫 단락의 결론은 에바그리우스 가르침의 핵심을 언급하고 있다. , 하나님 인식, 무엇보다도 '피조물에 대한 관상'(physiké)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 인식이다. 이 피조물에 대한 관상에서 하나님은 당신 작품들을 통하여 드러나신다. 그 다음은 세 신적 위격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한 '하나님 자체에 대한 인식'(theologhiké)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직접적 인식은 여기 이 지상에서 '영과 진리 안에서'의 기도로 실현되기 때문에 에바그리우스는 우리와 악령들 간의 모든 싸움은 전적으로 '참된 기도'를 중심으로 행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 이전, 시간이 없던 '시초'에 일어났던 일이 그렇게 매일의 삶의 영역에서 반복된다. 사실상 창조된 영들은 그들 소홀함(améleia)의 결과 하나님과의 초기 일치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와 더불어 원래 그들에게 속해 있던 하나님 인식도 박탈당했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바는 인간의 고유 운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유혹을 거스른 싸움에서 그리스도의 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속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셨고, 우리가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게 하셨다카(10:19). 당신의 모든 가르침에 더하여 사탄의 유혹을 당하셨을 때 그분 자신이 했던 바를 우리에게 주셨다(참조: 4:1-11; 4:1-13). 전투할 때처럼 악령들이 우리와 싸우고 우리에게 화살을 쏠 때(6:16) 우리는 성경에서 시작하여 그들에게 대응한다. 이는 우리 안에 불순한 생각이 남아 있지 않게 하고, 행위로 실현되는 죄로써 영혼이 노예가 되지 않게 하며, 영혼을 더럽혀 죄의 죽음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죄짓는 자는 죽을 것이다(18:4). 사실, 악에 한마디 말로 응답할 수 있는 확고한 생각이 정신 안에 없을 때, 정신은 쉽고 빠르게 죄를 범하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자력 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 곧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다. 지금까지 에바그리우스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과소평가되어 왔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부분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특성을 띠고 있음이 확실하다 안티레티코스 머리말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천사의 도움에만 맡겨져 있지 않다. 이 하나님 섭리의 표시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선행된다. 그리스도는 개인적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뱀과 전갈을 밟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싸우는 자에게 욕정에서의 궁극적 자유(apátheia)를 허락하시는 분도 그분이다. 오직 신성 모독적 교만만이 감히 이것을 부정한다.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결합된다. 여러 구절에서 '생각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프락티코스에는 이미

첫 장부터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프락티케와 퓌시케, 그리고 데올로기케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 중 프락터계(praktike)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계명 준수와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특히 악령, 그들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유혹의 생각들, 최종적으로는 욕정(páthe)의 문제다. 욕정을 일으키는 것은 악령인데, 우리가 악령에게 굴복할 때 욕정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

결국 에바그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언급한다. 사실 에바그리우스에게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모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단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본받을 모범을 남겨 주기 위해서 탐식, 탐욕, 헛된 영광이라는 세 가지 주요 생각에 대적했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유혹자와 '논쟁'하지 않고 악마의 말에 하나님 말씀 하나로 단순하게 대적하고 있음을 매우 예리하게 관찰했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행위의 죄를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에바그리우스는 유혹의 생각들을 이렇게 구분 한다: 우리가 벗어나기 힘들지만 죄가 되지는 않는 생각으로 짓는 죄와 우리 동의만으로 실현되고 '행위로 짓는 참되고 고유한 죄'. 오직 행위로 짓는 죄만이 영혼의 영적 죽음을 초래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그에 따르는 부할'만이 영혼을 죄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죄로 들어가는 문을 닫으려면 '반론'(antίrrhesis)라는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향하기 위하여 유혹자의 논리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 유혹의 생각들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방해하면서 '적의 불화살'을 끄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다만, 유혹의 생각들이 우리 안에 뿌리내릴 때 상황에 따라서는 행위의 죄로 건너가는 경우도 잦다.

 

 

방법의 적용

코헬렛이 "악한 행동에 대한 판결이 곧바로 집행되지 않는다"(코헬 8,11)고 말할 때, 우리에게 그것을 현명하게 보여 준다. 솔로몬도 잠언에서 말한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26:4-5). 사실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그의 어리석음에 맞추어 우둔한 자에게 대답하고 악령들과 비슷해진다. 그의 분노는 독사의 분노다(32:33). 반대로 잘 참는 사람은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37:8)라고 쓰여 있다고 말한다. 그는 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했고, 그 어리석음의 악령을 반박했으며, 그 악령에게 이렇게 지적했다. "보라, 너는 성경에 반대되는 어떤 음모를 꾸몄다."

 

여기서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예증된 그 방법의 구체적 적용을 다루고 있다. 성경은 생각에 대한 반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악령의 장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서문에서 인용한 본문이 말하듯이, 악령이 항상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들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점을 분노의 유혹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통해 보여 준다. 성 잘 내는 비이성적 능력(thymikόn)의 본래 역할은 '악령들과 싸우는 것'이다. 진리의 온갖 반대자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영혼의 본래 목적에서 영혼의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형제들을 거슬러 고의로 이 분노의 힘을 사용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히 금지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인 누군가를 거스른 정당한 분노란 결단코 없기 때문이다.

악령의 '어리석음'에 이런 식으로 동의(pròs tèn ekeínou aphrosýnen)하거나 형제를 거슬러 분노의 유혹에 떨어지는 자는 그 자신이 악령이 된다. 그런 사람의 본질은 분노다. 따라서 에바그리우스가 지치지 않고 반복하듯이 정신을 '눈멀게 하고' 그렇게 관상적 인식을 빼앗은 분노와 원한은 영성생활의 가장 큰 적이다. 하나님께 축성된 나지르인, 혹은 수도승은 이 충격적인 '용들의 포도주'를 절대적으로 자제해야 한다.

반대로 유혹자가 드러낼 어리석음에 상응한 방식으로 응수하고(katà tèn aphrosýnen autoû) 적절한 성경 말씀을 통해 유혹자가 일으킨 분노와 증오의 생각들을 가라앉히는 사람은 이 반박 덕분에 악령을 다시 어리석게 만들어 생각과 행위의 죄를 피한다.

성 잘 내는 이 사악한 충동이 '순수한' 기도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면 정확하게 적용된 반론 방법은 이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방법은 성 잘 내는 비이성적 능력(thymikόn)이 자기 본성에 따라 악령들을 대적해 싸우도록 돕는다. 그리고 충만한 겸손의 덕을 통하여 영혼을 그 본래의 '건강' 상태인 내적 균형 상태로 유지시킨다.

 

 

성경 말씀의 역할

우리는 싸움의 순간에 기만하는 악령인 우리 적에게 대응할 적합한 말을 신속히 찾지 못한다. 그 말들은 성경 안에 흩어져 있고 그것들을 개별화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말들을 뽑았는데, 이는 우리 승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전사이자 투사로서 전투에서 그것들로 무장하여 용맹스럽게 블레셋 사람들에 맞서 나아가기 위해서다(13:17 참조).

 

에바그리우스에게 영성생활은 본질적으로 구원 역사의 개인적 내면화다. 이를 위해 에바그리우스는 교회가 이미 새 계약 안에서 그 완성과 관련하여 예형론적으로 읽었던 구약의 구원 역사를 수도승의 내적 여정에 예형론적으로 적용한다. 이집트는 악 혹은 이 세상의 상징이다. 파라오는 사탄의 전형. 이집트 탈출은 악과 무지에서 벗어남을 상징한다. 사막 시기는 수행의 상징이고, 약속된 땅으로 들어감은 덕과 인식으로 들어감을 상징한다.

그러나 먼저 약속된 땅이 정복되어야 한다. 이방인 '블레셋인들', 혹은 악령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약해질 때 그것을 재점령하려 계속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승은 이 끊임없는 전투에서 홀로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저 용맹한 투사인 참된 '여호수아', 그의 승리의 ''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

에바그리우스가 분명히 강조하듯이, 그는 안티레티코스로 순수하게 수행적 목적을 추구한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의 병기고를 준비했다. 수도승은 원수가 공격할 때 매번 거기서 힘들이지 않고 적합한 무기를 발견한다. 에바그리우스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가 이로써 그들의 가난한 사막의 독방에 신구약 성경 전체를 비치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수도승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수도승들은 적어도, 구약성경 가운데는 그들 대부분이 읽고 쓸 수 있었을 만큼 많이 사용된 책인 시편과, 신약성경 정도는 전체든 일부든 지니고 있어야 했다.

처음에 지적한 대로 현대의 독자는 무엇보다 에바그리우스가 각 성경 인용에 앞서 묘사하는 다양한 '생각'의 특성들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이 특성들이 본문의 절반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전 단락 끝에 단순히 암시하고 있다.

 

 

신앙과 계명 준수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 우리가 악령들에 저항하고 그들에게 대응하면 할수록 그들은 우리를 거슬러 더욱 거칠어집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그것을 배웁니다. 욥은 "내가 말하려하면 그들은 나를 치네"(4:4)라고 말합니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120:7)라고 말한 다윗에게서도 배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 의해 동요되지 말고 오히려 우리 구속주의 권능으로 굳건히 그들에게 논박합시다. 만일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14:1)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면(15:10) 요르단을 건너 말마의 도시(34:3)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악령들의 저항에 더 단호하게 대항할수록 그들은 더 맹렬하게 우리를 공격한다는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는 바다. 게다가 에바그리우스는 앞서 인용한 시편 1207절을 상세히 주해했다.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악령들은 누군가 생각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대응할 때 더욱 악하게 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이 유혹을 당했을 때 이렇게 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단연코 단식의 정신으로 생각들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적들은 전투 증에 우리가 단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거슬러 제시하는 생각들을 마주하여 우리가 생각들에 대해 충분히 자제하지 못하는바와 같다. 사실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는 한, 즉 그들의 생각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영혼을 소외시킨다. 그래서 잠언은 다음과 같은 탁월한 말씀을 한다. "앞으로 나아가라. 이곳에 머물지 마라. 네 눈을 그녀 위에 두지 마라"(9:18) 혹은 적대적인 힘이나 사악함에도 두지 마라. 알다시피 지혜는 그런 것들이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반대자들과 영적 전투를 할 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계명들을 준수해야 한다. 영성생활은 사실 초기 신앙 행위의 점진적 전개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인식에서 완성된다.

이 문맥에서 에바그리우스는 탈출기의 예형론으로 되돌아가 '새 이스라엘'이 참된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실현하는 요르단 횡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르단은 수행(praktiké)이라는 사막과 관상(theoretiké) 즉 인식이라는 약속된 땅 사이의 경계다. 이 강은 욕정의 부재(不在)나 거기서 분출하는 사랑에 대한 상징과도 같다. , 수행의 결정적 도착점을 나타낸다. 그렇더라도 에바그리우스가 여기서 '팔마의 도시'(34:3), 곧 여리고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는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다. 오리게네스에게 여리고는 지나갈 이 유한한 세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도시다. 반면 에바그리우스는 여리고에 관해서보다 오히려 '팔마의 도시'라는 표현에 관해 특별히 강조하며 여리고를 긍정적 의미로 분명하게 해석한다. 이 점에서 에바그리우스가 우리가 불순한 생각에서 갑자기 해방된 이유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성에 관해 논의한 후에 유사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 우리가 실제로 요르단을 횡단하여 팔마의 도시에 가까이 다가왔는지 아니면 여전히 사막에 머물며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는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팔마의 도시''의인들의 도시'를 말하는 것이리라. 성경에도 '의인은 팔마처럼 돋아난다'(92:13)고 쓰여 있다. 그러나 에바그리우스는 정의는 조절하는 덕이며, 그것 없이 인식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 금욕수행에서 기도와 신앙

이 전투에서 우리는 영적 갑옷이 필요하다(6:11,13). , 올바른 신앙, 완전한 단식으로 이루어지는 가르침, 영웅들의 용맹한 몸짓, 겸손, 거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방해받지 않는 고요,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살전 5:17). 그러나 만일 빵과 물로 배불리고 쉽게 성을 내고 기도를 경멸하고 소홀히 하며, 이단자들과 친하면서 영직 싸움을 견디고 정의의 월계관을 얻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정말 놀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견뎌야 할 싸움을 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스스로 절제하고(고전 9:25) 모든 이를 항상 온유하게 대한다(3:2). 그는 어디서나 성을 내지도 악한 생각을 하지도 않고 손을 들어 기도한다(딤전 2:8).

 

 

'올바른 신앙', 곧 정통 신앙(ortodossia)은 영성생활에 속한다. 그것은 또한 영적 가르침인데, 이 경우에는 무엇보다 수행과도 같다. 에바그리우스는 시편 주해의 두 구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수행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가르침이다.

 

주님의 목소리는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한"(6:16). [목소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올바른 행위(pohteía)로 부르는 영적 가르침이다.

 

'현세적인 것들을 죽게'(3:5) 하는 것은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사부들을 통하여, 아니면 직접 천사들을 통하여 수도승에게 전해진다. 게다가 본문에 언급된 금욕적 작품들 이외에 이 가르침은 악한 생각들과 그 행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네 아이들을 붙잡아 바위에 메어치는 이는 복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악한 생각들을 근절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바빌로니아의 아이들을 바위에 메어친다.

 

'바위'라는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 자신이다. 혹은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바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 금욕수행으로만 실현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다면 금욕수행은 '불 꺼진 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금욕수행은 오직 육체만 굴복시키는 반면,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자 '인식의 어머니'인 온유는 '정신을 관상적이게'하고, 하나님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참된 빛을 보는' 자가 되게 한다. 따라서 에바그리우스가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인 겸손까지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육체의 욕정들을 진정시키는 외적 금욕수행(특히 사막에서 유혹당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치신 단식)은 내적 수행을 동반한다. 영혼의 욕정들은 내적 수행 없이 치유될 수 없다.

에바그리우스는 '가르침'의 일부로서 '끊임없는 기도'도 분명히 언급한다. 그는 그것을 사도 바울의 권고(살전 5:17), 아니 주님 자신의 권고(18:1)로 되돌리고 있다. 끊임없는 기도는 초기 수도승생활보다 더 고대의 수행에 속하는 동시에 반론의 긍정적 측면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그것을 실제적으로 언급한다. 이 기도는 단순히 '자주', '중단 없이', '부단히' 암송되어서는 안 되고, '간결하게' '짧게' 그리고 동시에 '열렬하게', '심도 있게' 암송되어야 한다. '이집트 수도승들'의 이 수행에 대해서 전해들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빠르게 창을 던지는 것'(raptim quodam modo iacutatas)과 같은 짧은 기도에 대해 말한 바있다. 에바그리우스와 같은 환경에서 양성을 받았던 요한 카시아누스는 이 전통을 서방 수도승생활에 전달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동방에서와 같은 의미를 띠지는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교 금욕수행의 토대는 '올바른 신앙'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의 접근, 그리고 '흠숭하올 거룩한 삼위일체'께 대한 신앙, 곧 신학(theologhia)이다. 이 점에서 에바그리우스가 '이단자들과의 친숙함을 경고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자기 작품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로 자서전적 형태로_ 이단자들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심지어 충돌에 대해서까지 말하기에 이른다. 이단자들의 일부가 이미 동방정교회 공동체들 내부에 침투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들과의 논박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위험을 분명히 강조했다. 그 주된 이유는 논박이 분노의 악습을 불러일으켜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비록 온갖 이단의 배후에 있는 악령들이 종종 그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다툼을 피하였다.

 

 

순수한 기도와 성삼위의 빛에 대한 관상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일에 전념할 때, 영의 갑옷으로 무장하여 죄에 맞서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게 될(12:4) 필리스터아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 인식에 맞서 올라오는 악한 생각들과 온갖 요새를 부수면서(고후 5:10) 그리고 '인간-수도승'(I'uomo-monaco)으로뿐 아니라 '정신-수도승'(I'intelletto-monaco)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인간-수도승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죄에서 멀어지는 자다. 반면 정신-수도승은 생각들이 우리 마음 안에 불러일으킨 죄에서 멀어진 자이며 기도 중에 성삼위의 빛을 보는 자다.

 

에바그리우스는 둘째 단락에서 행한 생각의 죄와 행위의 죄의 구분을 다시 취한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보다 생각의 죄다. 그의 목표는 항상 '정신의 한 상태''순수한 기도'. 이것은 온갖 지상적 생각을 몰아낼' 뿐 아니라 결국에는 모든 생각을 몰아낸다. 실제로 '기도는 생각들의 포기'. 반론의 역할은, 물질적 현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생각들이 먼저 유혹하는 '생각들'이 되고, 환경이 그것들에 기회를 줄 때 결국 참되고 고유한 행위의 죄가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여기서 에바그리우스가 행한 '인간-수도승''정신-수도승' 간의 특별한 구분은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그 구분은 영성생활의 주요 두 단계, 즉 프락티케와 데오레터케에 상응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정신은 '세속인(kosmikos)으로 혹은 완전함에 이른 도승으로'(hes monachos)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인간-수행자(ánthropos praktikόs)는 하나님의 선물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정신-수행자(noûs praktikόs)는 이 세상의 개념적 표상들을 계속해서 욕정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여기서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정신-수행자''기도 중에 성삼위의 빛을 보는 '관상가'(theoretikós). 에바그리우스는 그의 신비신학에서 자주 다룬 이 중심 주제를 안티레티코스에서도 암시한다. '복된 빛'의 환시는 그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은총으로 당신 피조물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 순간이다.

 

악한 생각들(loghίsmoί)은 피조물에 대한 관상에 전념하는 영혼의 왼쪽 눈을 멀게 한다. 우리 정신을 조각하여 형태를 만드는(heghemonίkόn) 개념적 표상들(noémata)은 기도 중에 성삼위의 복된 빛을 보는 우리 오른쪽 눈을 어둡게 한다. 그 눈을 통해 아가의 신부는 신랑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4:9 참조)

 

정신은 영혼의 이성적인 눈으로 이 '복된 빛'을 본다. 정확하게는 '자기 자신 안에서' 본다. 자기 자신 밖에서 지각할 수 있는 감각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다. 에바그리우스에게 '''보다'는 흔히 '인식''인식하다'와 동의어다. 그럼에도 더 깊고 차별성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에바그리우스가 아가에서 뽑은 인용이 이 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가는 에바그리우스가 매우 드물게 인용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 인용에 어떤 변화가 발견되었다. 그 변화는 에바그리우스에 의해 대화의 형태로, 높은 신비적 영감의 형태로 행해졌다. 여기서도 ''의 주제가 나타난다. , 신랑의 모습(eîdos)은 빛의 형상과도 같다.

오직 '기도 중에'만 정신에 빛나는 '이 빛'에 대해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빛이 하나님의 처소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410절의 빛나는 신적 현현(顯現)의 토대위에서 영혼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 은총의 현존을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영혼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 따라서 이승에서 가장높은 신비체험이 인간에게 가능하다.

 

 

안티레티코스 원전: 다윗과 거룩한 교부들의 전통

이제 내 입을 열어(119:131; 참조; 6:19)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과 시험받은 내 영혼에게 말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고전 5:4) 내가 수도승생활에 관한 이 책의 서두에서 연속적으로 열거했던 탐식의 악령,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다른 일곱 가지 악령에 맞서 싸울 때다. 그리고 나는 성령께서 시편을 통해서 다윗에게 가르쳐 주셨고, 우리의 복된 교부들도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수도승생활의 온갖 싸움을 공개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반론의 방법을 위해 다윗, 특히 그의 시편들과 거룩한 교부들의 전통에 의지한다. 서두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모범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에바그리우스가 여기서 교부들의 옛 가르침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독수도승들에 대한 첫 작품'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악령의 유혹들에 맞선 '반박'으로서 시편을 적절히 사용하는 많은 예들을 인용할 수 있다. 안터레티코스의 여덟 장들에서 에바그리우스는 자주 안토니우스의 예를 참고한다. 뿐만 아니라 사부 대() 마카리우의와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도 언급한다. 게다가 리코폴리스의 요한에 대한 언급은 더 잦다. 에바그리우스는 특별히 영성생활과 관련된 몇몇 어려운 질문을 그에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이 방법의 진정한 '창안자'는 다윗이다. 한 편지에서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복된 다윗이 보여 주듯이 [정신은] 악령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재생한 [] 그 말들을 반박하면서 자기 적대자 앞에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실제로 악령들이 "저자가 언제 죽어 그 이름이 사라질까?"(41:6)라고 말할 때, 다윗은 "나는 죽지 않고 살리라.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118:17)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악령들이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 머물라"(11:1)고 말할 때, 다윗은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러라"(62:3)고 말합니다. 그러니 서로 반대되는 목소리를 듣고 승리를 사랑하십시오. 다윗을 본받아 당신 자신에게 주의하십시오.

 

이 아름다운 본문은 초기 수도승들이 어떻게 성경을 읽고, 특히 시편과 관련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았는지, 그 방식을 생생히 묘사한다. 게다가 에바그리우스는 사막에서 이미, 예수의 유혹 이야기부터 악령들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 계략은 다른 데서도 언급된다.

앞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안티레티코스를 읽으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반론의 방법은 단지 '[악령들에게] 성경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대답을 주는 것'으로만, 즉 유혹의 생각들에 직접 반대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종종 영혼에 새로운 용기를 불어녈기 위해 비참한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도 말해야한다.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질 때 우리는 눈물과 더불어 우리 영혼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위로하는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위로받는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좋은 희망을 심고 거룩한 다윗과 함께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나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에게 말하는 것', 적대자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봉사자들과)의 대화, 즉 기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악령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제안하면서 기도를 방해하려 애쓴다. 그러한 짧은 기도에 대해 안티레티코스는 여러 예를 제시한다. 시편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그러한 공격을 위한 기도의 원천, 구약성경 중 가장 많이 읽힌 책이다.

 

생각과의 싸움으로서 수도승적 금욕수행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 [싸움]은 우리에게는 여덟 가지 악령들 각각이 우리 안에 일으킨 생각들과의 전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들 각각에 맞서 성경으로부터 그것을 쳐부술 수 있는 하나의 반론을 썼다.

 

생각과의 싸움은 수도승적 금욕수행의 본질이다. 사실 인간이 세상에 사는 한- '세속인'(kosmikós), 악령들은 대개 물질적 대상 뒤로 숨는 것에 만족한다. 반면 고독 속에 사는 수도승들은 통상 이 대상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관련된 대상에 대한 '생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악령들은 공동체 안에 살지 않고 자기 암자(kéllíon)에 홀로 사는 독수도승들에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직접 드러낸다. ,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어떤 충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힘든 싸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세속인, 회수도승, 독수도승 모두에게 유일하고 동일한 싸움이다. 악령들은 오직 상황과 나타나는 모습만 바꿀 뿐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유혹의 생각들에 맞설 병기고를 준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인간 또한 생각들이 어떤 식으로든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 몫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바그리우스도 앞서 인용한 편지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당신 마음의 '문지기'가 되고 심문 없이 어떤 생각도 들어오게 하지 마십시오. 각각의 생각에 "너는 우리 편이나? 적의 편이냐?"(5:13)라고 물으십시오. 그가 가족 중 하나라면 당신을 평화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원수 중 하나라면 당신을 분노로 동요시키거나 욕망을 자극할 것입니다. 사실 악령들의 생각들은 이런 유헝을 지닙니다.

 

이런 식으로 항상 계속해서 자기 영혼의 상태를 검사하는 사람은 악령들이 우리를 유혹하는 절호의 기회를 빼앗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면 사실 어떤 녀석들은 매우 잽싸다- 그때 그들의 입을 닫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 바로 반론이다.

 

 

결론: 영성생활에서 반론의 의미

영성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인 "약속된 땅"을 소유하기 위한 불굴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우리 마음의 ""에서 전개된다. 영적 '이스라엘'의 옛 적이기도 한 이방인 '필리스터아인들'은 그 점령을 방해하려고 애쓴다. 이 목적에 기여하는 욕정들의 무리를, 에바그리우스가 처음으로 여덟 가지 악덕 목록으로 요약하여 상세히 분석한다.

악령들은 우리 안에 욕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부단히 우리에게 그들의 유혹하는 '생각들'이라는 '불화살'(6:16)을 쏘아 댄다. 그것들은 감각적 · 물질적 세계와의 관계에서 마치 봉인 '자국'처럼 우리 정신 안에 남아 있는 저 희미한 잔재들의 죄스러운 왜곡이다. 이 모든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정신에 각인되어 정신을 양육하고 형성하며 그런 식으로 정신을 대상들에 연결한다. 그것은 또한 피조물의 '존재 이유들(lόgoί)과 관계되는 가장 높은 개념적 표상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각인된) '인상들은' 오직 인간이 그것들을 욕정으로, 즉 욕망과 분노로 받아들일 때만 경멸적인 의미에서 '생각들'이 된다.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이나 그것들을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예정된 우리 정신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인간이 일상생활의 동요를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이모든 '인상'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영혼의 근저에서 소위 정신의 영적인 ''앞에 떠오른다. 각자 경험으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무엇보다도 분노의 본성, 즉 증오 · · 격노에 맞서는 움직임을 위해 유익하다. 증오 · · 격노는 기도 생활에 가장 나쁜 적들이다.

신학과 영성생활에서 이 분노의 충동이 낳는 파괴적 결과들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의 충동은 정신을 눈멀게 하고, 분노의 공격을 받은 사람은 전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바로 에바그리우스가 안티레티코스에서도 지치지 않고 분노의 생각들을 경계하라고 하는 이유다.

'표상들'로 가득 채워진 인간은 하나님 대신 그것들과 '대화'를 시작하며, 순수한 방식으로 자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온갖 욕정과 결국 온갖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순간부터 그렇게 '정신의 천상적 상태를 파괴한다' 하나님은 영적이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사람은 그렇게 '영적인 분께 영적으로 다가가며' 그 자신이 '영적이 되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은 정신에 어떤 '인상'을 남기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은 절대 위격적 존재로서 '어떤 중개 없이' 창조된 영에게 다가가신다. 이 위격적 존재는 '기도의 상태' 중에 있는 창조된 '하나님 형상'인 정신 안에서 그 '복된 빛'을 거울처럼 비춘다.

이제 기도하는 것이 '생각들을 버리는 것'이라 한다면, 이 기도는 얼마나 더 '온갖 욕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하겠는가! 우리는 사실 이 욕정적인 생각들을 통해 바로 천국에서 우리 원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유혹자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반대로 '진정한 기도'란 하나님과 정신의 대화이자, '영과 진리 안에서, 곧 성령과 독생 성자 안에서 성부께 드리는 경배'. 이런 식으로 '신학자가 된 사람은 더 이상 피조물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찬미가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따라서 최초의 아담을 희생자가 되게 했던 그 유혹자의 이 끊임없는 제안들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지키는 데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악령들이 모두 함께 우리를 유혹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들을 한꺼번에 우리 안에 밀어 넣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아는 것이 유익하다. 사실 정신은 보통 동시에 두 가지 감각적 대상의 개념적 표상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직접 반대되는 욕정적인 생각들을 위해서도 유효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악령에 반대되는 생각들을 인위적으로 자신 안에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못으로 못 빼내기'라는 방법이다. 위험이 전혀 없지는 않다. 확실히 특정한 악습을 대적하는 수단으로서 반대되는 덕을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반론도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 자신이 사막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하와가 무분별하게 그랬던 것처럼 적과 '논쟁하지' 않았고, 단순히 악마의 말에 하나님 말씀으로 대적하셨다. 그렇게 유혹자의 입을 막으셨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순수한 하나님 말씀을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모법에 따라 찾는다. 수도승들은 성경을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읽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 말씀을 기억한 후, 노동 중에 그 말씀을 관상적 방법으로 반복했고, 그런 다음 '기도'로 바꾸었다. '화살기도들'은 종종매우 짧았고, 내용상 그 당시 수도승의 영적 성향에 부합했다. 강한 유혹을 받을 때 '청원', '찬미', '중재에 종종 솔직한 도움의 절규가 부가된다. 그때 반론은 '온갖 지상적 생각을 몰아내는 저 '짧고 열렬한 기도'가 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수도승''정신-수도승'으로 변화시킨다. '정신-수도승'은 기도 중에 성삼위의 빛을 본다. 영적인 의미로 '기도'는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 신비와의 인격적 만남이며, '오로지 성삼위의 빛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상태'.

하나님이 스스로 행하시는 이 빛나는 계시를 그 고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포착하게 하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 계시는 순수하고 예기치 못한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어떤식으로든 이 은총에 합당하게 되는 목적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다. 예를 들어 그는 반론을 통하여 유혹하는 생각들의 혼탁한 흐름을 멈출 수 있고, '계명들을 통해 회개하여 자기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 이로써 자기 정신을 오직 하나님 생각에 연결하게 된다. 기도와 반론 간에 이렇듯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의 권고는 매우 구체적이다.

 

그대가 유혹받을 때 그대를 괴롭힌 놈에게 분노에 찬 말을 하기 전에는 기도하지 마라. 사실 그대 영혼은 생각들에게 영향 받았다. 결과적으로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그러나 그대가 적에게 분노에 찬 말을 한다면, 그대는 그가 제시한 표상을 깨뜨려 사라지게 한다. 이것이 분노의 자연적 효과이기 때문이다. 좋은 표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반론의 부정적 측면인 유혹의 생각들에 대한 직접적 대립이다. 긍정적 측면은 이미 언급한 대로 거룩한 천사들과,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짧은 호소로 이루어진다. 이 호소는 우리 정신을 악령의 제안들에 강박적으로 매이지 않게 하고, 기도 자체를 위해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에바그리우스는 다시 한 번 매우 '체계적인' 방법으로 나아간다.

 

유혹의 순간에 정신을 불순한 생각에서 또 다를 [중립적인] 생각으로 향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이 생각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방범으로 그 사악한 선동자(3:7)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정신이 한 대상에 붙들려 그것을 건너가지 못하면 욕정에 떨어지고, 행위의 죄로 나아갈 위험에 빠진다. 그러면 [다시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화와 철야, 그리고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반론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과 더불어 프락티케를 실천하기를 원할 때 영성생활에서 우리가 호소해야 할 도움들 중 하나일 뿐이다. 생각들에 대한 수많은 반박이 사실상 짧은 기도이기 때문에, '방법'은 점차 더 고차원적 의미의 '기도'로 이끈다. 에바그리우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대상들을 본다는 것을 아래의 '반박'이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 결론을 짓고자 한다.

 

근심 중일 때 기도에서 영적인 말들을 찾고 싶은 영혼에게: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나님"(38:22).

 

에바그리우스는 같은 구절을 다른 문맥에서는 이렇게 주해한다.

 

기도에 대한 훌륭한 소개(prooίmion)는 이것이다.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나님, 제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주님, 저의 구원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38:22-23). 사실 [이 구절은] 그 자체 안에 직접 성삼위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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