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1. 프락티코스 와의 관계

 

그노스티코스(Gnostikos)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 목록

에서 프락티코스(Praktikos) 바로 다음에 나온다. 이 작품은 프락티코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Kephala-ia gnostics 와 함께 삼부작을 이룬다.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코스'아나톨리우스에게 보딘 편지'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행적 가르침은 100개의 장으로, 영지적 가르침은 50개의 장과 다시 600개의 장으로 짧게 나누어 요약했습니다" (머리말9). 5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0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프락티코스600개의 장으로 구성된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사이에 일종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 특히 프락티코스그노스티코스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두 작품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프락티코스의 최초 편집본에서 결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90장은 수행의 눈물과 노고의 결실인 인식이 관상가에게 가져다줄 기쁨을 전한다. 한편 그노스티코스 첫 세장은 수행자와 관상가를 정의하고 있다. 앞 책 프락티코스에서 언급한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수행자이고, 수행을 통해 얻은 아파데이아에 힘입어 인식에 접근한 사람은 관상가라는 것이다.

내용상으로도 두 작품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수행자의 유혹과 죄를 정의하고 있는 프락티코스 74장과 75장이 관상가의 유혹과 죄를 정의하고 있는 그노스티코스 42장과 43장에 반영되어 있다. 그노스티코스 44장도 프락티코스 89장에 상응한다. 두 장 모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프락티코스 89장은 수행자의 덕을, 그노스티코스 44장은 관상가의 덕을 정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두 작품 사이에 구조적 · 내용적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프락티코스를 편집한 후 그노스티코스를 편집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2. 관상가의 정의와 역할

 

에바그리우스는 수행(praktiké)"영혼의 욕정부(欲情部)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프락티코스 78)이라고 정의한

. 수행은 영혼을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여 아파테이아를 얻게 한다. 그리고 아파테이아(평정)는 영지적 삶, 곧 관상(gnostike)생활로 들어가 영적 인식(vnosis)을 맛보게 한다. 이처럼 수행자(praktikos)는 수행을 통해 관상가(gnostikos)가 된다.

에바그리우스의 '관상가'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맨스에게서 유래한다. 그노스티코스(gnostikos)란 말은 클레맨스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노스티코스는 덕행 실천과 공부를 통해 영적 인식에 도달한 그리스도인을 뜻했다. 에바그리우스가 이 용어를 받아들였고, 이후 수도승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클레맨스의 관상가처럼, 에바그리우스도 가르침을 관상가의 고유 역할로 여겼다. 관상가가 된 수도승은 더 이상 수행자처럼 자기 자신이나 자기 정화에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고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욕정에서 정화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그는 충분히 정화되어 합당한 자격을 갖출 사람을 영적 인식의 신비로 안내해야 한다. 에바그리우스가 그노스티코스 3장에서 말하는 바처럼 관상가는 수행 중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소금의 역할을, 정화된 사람을 위해서는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관상가는 스승이자 교사다. 이 작품의 주제는 정확히 '관상가를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면 관상가는 어떤 조건에서 가르칠 수 있는가?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민가? 가르침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노스티코스는 바로 이에 대해 답하고 있다.

 

 

3. 가르침의 조건

 

관상생활은 아파테이아 혹은 어느 정도의 아파테이아 획득을 전제한다. 아파테이아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개념은 매우 미묘하다. 그는 아파테이아에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먼저 영혼의 욕망부(慾望部)에서 오는 욕정 혹은 '육체의 욕정'을 극복했을 때 이르게 되는 '작은 아파테이아' 또는 '불완전한 아파테이아'가 있다. 이것 이후에 정념부(情念部)에서 오는 욕정 혹은 '영혼의 욕정'을 포함한 모든 욕정을 극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완친한 아파테이아'가 있다. 관상생활은 우리가 불완전한 아파테이아에 이르렀을 때 시작되며,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향해 나아간다. 실제로 관상생활은 천사적인 삶이기 때문에 결코 민간 조건에서는 충만히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 즉 영혼의 정화는 관상생활에서도 어느 정도 계속된다. 관상가는 수행의 덕을 계속 실천하면서 부단히 덕에 나아가야 한다. 에바그리우스가 수도승생활의 원리(Hypotyposis)에서 수행자에게 한 권고는 관상가에 게도 유익하다.

관상가는 여러 사람과의 잦은 교제에서 오는 분심(11), 음식과 의복에 대한 온갖 걱정(38)과 근심(10)을 경계해야 한다. 성 바오로가 그랬듯이 엄격한 규율로 자기 육체를 다스려야 한다. 모든 덕이 관상가의 길을 평탄하게 해 준다면(5), 관상가는 관상생활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영혼의 정념부에서 오는 욕정들, 우선 영적 인식의 주된 장애물인 분노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오류가 밖에서 오는 인식에 장애가 되듯 분노는 영적 인식에 장애가 된다(4). 관상가는 또 분노와 증오와 슬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10). 슬픔은 분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영혼의 욕정이다. 이 영혼의 욕정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관상가는 특히 소송을 피하고 모욕(불의)을 감수해야 한다(8). 또 험담과 비난이 악령에게서 오는 유혹임을 알고 그러한 것들에 초연해야 한다. 악령들은 인식을 맛보지 못하게 하려고 관상가에게 증오와 원한을 불러일으키고자 애쓴다(32). 따라서 관상가는 온갖 분노를 없애야 한다(5). 에바그리우스는 영혼의 정념부가 평온한 이 상태를 '온유'라고 부른다. '아파데이아의 딸''인식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온유는 관상가의 탁월한 덕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에바그리우스에게 아파테이아, 애덕, 인식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애덕은 우선 자선이다(7). 관상가는 가르치면서, 이익이나 편의나 헛된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이 가르치면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과 같을 것이다(24). 관상가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지만, 모든 덕을 균형 있게 실천하려면 너무 관대해서도 안 된다(6). 관상가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22). 어떤 욕정에 영감을 받은 탐구라든지 선을 향하지 않는 모든 탐구는 '관상가의 죄'인 그릇된 인식으로 이끌 수 있다(43).

 

 

4. 가르침의 내용

 

앞서 본 바와 같이 관상가는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욕정에서 정화되는 법을 가르친다(30, 31). 하지만 관상가의 주된 역할은 자기가 얻은 영적 인식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를 통해 이 영적 인식에 접근(45)하게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또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피조물들을 이해하게 된다. , 피조물의 로고이(logoi, 존재 이유들)를 알게 된다. 로고스(logos)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론적 원리를 나타낸다. 한 피조물의 로고스를 관상하는 것은 그 피조물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던 개념으로 관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을 그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다. '로고이' 중에는 에바그리우스가 '신적 섭리와 심판의 이유'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세계의 구성과 모든 이성적 존재의 구원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취하신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36, 48).

영적 인식에서 성경 해석 또한 이루어진다. 성경 해석은 관상가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의 여러 장이 성경 해석에 할애된다. 피조물에 대한 인식은 그것의 감각적 모습을 넘어 그 존재 이유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제자 에바그리우스가 관상가에게 권고하는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문자를 넘어 그 영적 혹은 우의적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관상가는 오리게네스가 권고한 바처럼 성경의 '관습들'을 설명하면서(19) 본문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또 에바그리우스의 삼중 구분(수행, 자연학, 신학)에 따라(18) 수행이나 윤리에 관한 것이든, 피조물에 대한 인식(자연학)이나 하나님께 대한 인식(신학)에 관한 것이든 자기가 끄집어내는 그 가르침의 순서를 정하려고 한다. 그는 한 본문의 우의적 의미가 반드시 문자적 의미와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20). 에바그리우스는 우의적 해석에 어떤 제한을 두고 있다. 그는 성경 본문에 언급된 모든 말씀의 영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한다(21). 또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것들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권고한다(34).

 

 

5. 가르침의 방법

 

관상가는 오로지 자기 제자의 구원을 위하여 가르칠뿐이다. 따라서 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가르침의 방법은 각 사람의 영적 진보 상태에 따라 다양하다. 누구에게나 매번 모든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각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야한다. 이를 위해 관상가는 먼저 듣는 이의 상황과 생활방식과 직업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각자에게 유익한 것을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15).

에바그리우스는 자기 스승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배운 바에 따라 관상가에게 고유한 덕을 열거하면서 정의(定義)를 각 사람의 수준에 맞게 가르침을 주는 덕으로 정의(定義)한다. 이 때문에 관상가는 영성생활 초심자에게 유익한 것은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충분히 진보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교의는 모호하게 말해야 한다(44). 영혼의 정화와 욕정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윤리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에게 적합하다. 특히 세속인과 젊은 수도승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단계가 있다. 관상가는 젊은이에게는 영혼의 욕망부에서 올라오는 욕정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나이 든 이에게는 영혼의 정념부에서 올라오는 욕정에 맞서 싸우는 방범을 가르친다(31). 초심자와 젊은이와 세속인의 경우, 자연학과 신학에 관해서는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12, 13). 이 영역에 대한 가르침은 욕정에서 충분히 해방되어 그런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유보된다. 신적 섭리나 심판의 이유와 관련된 교리, 즉 에바그리우스의 형이상학과 우주론과 종말론에 관한 주제들은 세속인과 젊은이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단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인식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무지가 단죄된 이성적 영혼이 당하는 고통임을 이해할 수 없다(36). 관상가는 이런 교리를 젊은이에게 설명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이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25). 따라서 관상가는 자기 가르침에서 수준을 너무 쉽게 높이지 말고 항상 듣는 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을 듣는 이의 수준보다 약간 위에 두고, 듣는 이가 요구하면 수준을 더 높여야한다(29).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을 경우에는 모르는 체해야 한다(23). 관상가는 설명의 때와 토론의 때 두 시기로 자기 가르침을 계획한다. 토론은 충분히 진보한 사람에게만 허락된다(26).

따라서 관상가는 현명하게 자기 가르침에서 영적 인식이라는 보다 고차원적인 주제에 관해 침묵하거나 그것을 능력 있는 사람에게 유보한다. 그리고 성경 자체가 비유라는 베일에 감춰진, 더욱 고차원적인 진리를 계시하는 것처럼 이 주제를 애매모호한 용어로 설명한다. 어떤 주제는 특정인에게 유보된다. , 성체성사 거행의 상징적 의미는 원칙적으로 관상가인 사제들과 오로지 질문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이들에게만 유보된다(14). 하나님께 대한 인식(신학)은 자연에 대한 인식(자연학)의 경우보다 더 큰 주의가 요구된다.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정의(定義)에 의존해야 한다면(17), 그것이 하나님과 관계될 경우 그분을 정의하려 해서도 안 되며, 그분에 대해 경솔히 말하려 해서도 안 된다(27). 사실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것이 그분께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형언할 수 없는 분에 관해서는 침묵이 요구된다(41). 관상가 자신은 피조물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어 제일원인(第一原因)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신학에 어느 정도 다가가야 한다(49, 50).

 

6. 작품의 구성

 

그노스티코스의 구성은 매우 자유로워 보이며 프락티코스의 장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순서나 전개 과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금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50개의 장을 다음과 같이 주제별로 구분할 수 있다.

 

1-3 도입부(관상가의 고유 역할로서의 가르침)

4-11 관상가의 조건과 덕(스승으로서의 역할수행 에 필요한)

12-15 대기설법(듣는 이에게 수준을 맞출)

16-21 성경 해석(가르침의 주된 내용)

21-36 관상가의 자세(가르침에서 취해야할 태도)

37-43 관상가의 유혹과 죄(빠질 수 있는 유혹과 죄 에 대한 경계)

44-48 교부들의 가르침(이 작품에 권위를 부여하는 증언들)

49-50 맺음말

 

장들 자체는 서로 독립적이다. 그 길이도 두 줄에서 열 두 줄까지 일정하지 않다. 장의 형식이나 내용의 성격도 매우 다양하다. 교부들의 증연들(44-48), 정의(定義)(2-3, 30, 42-43, 49)과 교훈적인 가르침들(1, 4-5, 8-9, 33, 39, 41)도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비 인칭이나 3인칭 단수 형태로 되었거나(6-7, 10, 12-13, 17-20, 22-23, 25-26, 36) 2인칭 단수 형태로 된(11, 14-16, 21, 24, 27-29, 31-32, 34-35, 37-38, 40, 50)장들도 보인다.

 


2-0 해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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