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상기도"란 무엇인가?

 

 

1절 관상기도(觀想祈禱)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영성의 핵심적인 단어인 관상의 완전한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것이 두 개의 독특한 원천, 성경그리스의 철학에서 나왔음을 알 필요가 있다.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용어를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의 da'ath를 번역하면서 gnosis(靈智)를 사용하였다.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139:1~6).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3:2~12; 1:25~28)하였다. 그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전한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인 것으로 자신의 제자들이 이것을 갖추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했다(3:14~21; 1:9)

사도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지식을 말할 때 gnosis의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하고 있다(14:7; 요일 4:8; 2:3~4;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밀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5:19,30; 14:10; 6:12; 9:28~29; 14:36; 4:1; 14:13; 22:42).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테오리아(θεωρία, theoria)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데오레인(θεωρείν)이라는 동사에서 유래 되었다.- theoria의 원뜻은 '진리(지식)에 대한 지적 시각(視角)'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동방교부들 중에는 이 용어를 관상의 가장 높은 차원의 형태요,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인식 즉 하나님과의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θεολογία) 라고 했다. 교부들은 기술적인 용어인 theoria 에다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다. da'ath의 뜻을 가미한 것으로 확대 이해한 theoria를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contemplation)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적인 하나님 경험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

관상기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도의 단계들을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구송기도(Vocal Prayer). 이 기도는 입술의 기도라고도 하며, 말을 강조하고, 읽거나 노래로 한다. 기도의 내용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보통으로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것이다. 자유로이 하는 구송기도도 있다.

 

2) 묵상기도(Meditative) 또는 명상(Meditation). 이 기도는 정신이 중심이 되어 하는 기도이다. 정신은 하나님과 그의 경이로우심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성찰하고 숙고한다. 정신은 이해와 통찰을 추구한다. 묵상에서는 입술은 조용하고 정신은 활동적이다.

 

3) 관상기도(Contemplative) 또는 관상(Contemplation). 이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이다.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현존(임재)을 향하여 나아간다. 입술과 정신은 쉰다.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

 

묵상기도가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관상기도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구송기도와 비교해 보면, 관상기도는 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실제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이 말을 초월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우리 안의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말 자체는 하나의 종소리처럼 우리를 잠에서 깨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임재를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묵상기도와 비교한다면,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묵상기도 대신에,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임재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관상적 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화가가 묘사한 화가의 생각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들으면서 그림 전체를 바라보며 관조하는 것이다.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습득적 관상이라 하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주부적 관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습득적 관상(習得的 觀想, acquired contemplation)

믿음과 소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임재(현존)를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注賦的 觀想, ifused contemplation)

주부란 "부어 넣어줌"이란 의미이다. 말 그대로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5:22)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임재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각하게 해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7~11; 11:5-13).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 하리

로다" (116:2).

 

 

2. 관상(Contemplation)의 정의

 

1)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이란?

무지의 구름의 저자(원저자가 저자를 숨김)는 저서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은 천계(天界)의 일몰을 감상하는 유쾌한 신선놀이가 아니요. 끝임 없이 지저귀는 천상의 새소리도 아니다. 관상은 결코 강렬한 정서가 아니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

이같이 깨달음에는 아름다운 색조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고, 만족스러운 응답 같은 것도 전혀 없을 수 있다. 적어도 어떤 영성생활 단계들에서는 그렇다. 이 깨달음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넋을 잃고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는가 하면, 오랜 기간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할 수도 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네 감정을 통해 전달된 경우에 두려움에 젖고 겸손해지는가 하면 무아경에 빠져 들뜨기도 하고 위압당해서 어리벙벙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고 환희 밝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때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유는 실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발적인 영혼을 단단히 거머쥐어서 삶 전체를 형용할 수 없고 필요불가결한 자질로 가득 채우며, 그리하여 영혼은 자신의 참된 목적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언제나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향하듯이 향하는 이 '타자(他者)' 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것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상에서 오는 황홀한 기쁨은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본성상 말로 묘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설령 이 기쁨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한다 하더라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대체로 이 환희를 암시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관상의 환희가 인간의 표현 능력을 철저히 넘어서는 것이라면 관상생활은 그렇지 않아서 무지의 구름 68-70장을 보면, "전부(all)"이신 "(nothing)"가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신적 존재이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창조된 존재로서 온전히 영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상 창조된 인간 조건 속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 달리 사고하기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 모든 조건을 한편으로 걷어치우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정화되고 준비된 상태에서 우리가 여행 끝에 마주치게 된 '''어디도 아닌 곳'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현존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렇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무엇도 아닌 분'이요. '어디도 아닌 곳'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보이지 않고 완전히 어둠 컴컴한' 바로 그 '무지'야말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앎이요. '풍성한 신적 빛'에서 비롯되는 무엇이다. 그리고 관상생활은 바로 무지의 앎, 보이지 않는 봄, 감지되지 않는 현존으로써 장차 도달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환희의 전조(前兆)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으로 이 선물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얻어 누릴 것이다!"

 

2) 관상의 여러 가지 견해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고 밝혔다.

 

십자가의 요한하나님의 은밀하고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영감이라서 일단 정착을 하기만 한다면 영혼을 불살라 버린다. 관상에서 "하나님은 영혼을 정화시켜 주고 비추어 주면서 영혼의 능력과 필요성에 따라 사랑과 지혜를 부어 주신다." 또한 관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혼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교통(交統)를 시작하는 높은 곳에 (영혼이) 놓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관상의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조차 은밀하고 감춰진 것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관상이란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 주시고 완성 시키시고자 우리 영혼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하시는 일"이라고 한다. 표현을 바꾸면 우리의 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선물인 지혜와 이해를 통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관상이라 한다.

 

리차드 포스트(Richard J. Foster)"무언의 기도"라 했고,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한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이거나 신비로운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 관상은 기독교적 체험의 모든 평범한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극치이며, 다른 영성생활과 묵상과도 구별된다.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정의 하였으나 대부분 비슷한 견해들이다. 우리가 관상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 것같이 관상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 견해들을 정리해보면, 관상은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 중심에서 기도하고 계신다(8:26).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기도자가 성령에 완전히 몰입되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 어린 정신집중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등이다.

 

이제 부족하지만 관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서 하나님과 일치(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3. 관상 기도 (Contemplation Prayer)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감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것은 무한으로 여는 것이므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는 것이다. 나 개인의, 자기가 만든 세상은 끝나고,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매일 매일의 경험으로 된다. 그러면서도 기도가 나타내는 세계는 평범한 생활의 사건들 속에서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장은 하나님께서 초월 가능성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의 기본적인 선(), 즉 존재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 존재라는 선물은 우리의 참 자아인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우리의 동의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태어나시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참 자아는 하나가 된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시는 현존과 성령의 활동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과 그분이 중단 없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 데에 바탕을 둔다. 이러한 뜻에서 보면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그렇지만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는 용어는, 우리 자신의 성찰에 따른 중재나 우리 의지의 행위 없이,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뜻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가 관상(觀想, contemplation) 이다.

 

우리는 관상기도관상생활과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생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1) 기도의 뿌리는 내적 침묵이다.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과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도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 의하면 "기도란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기도 속에 생각들이 끼어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라기보다는 사고로부터 이탈이다. 그것은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정서와 같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과 정서를,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 의식(意識) 속에 있는 것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너머로 가는 것이다.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들어 올리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도에서는 우리는 그저 들어 올리는 움직임에 우리를 맡겨 드리고 모든 성찰을 떨쳐 버린다. 성찰이란 기도의 중요한 전제 요소이기는 하지만 기도 자체는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내적 행위를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수련은 성령께서 인도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함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부정은 우리가 자신의 지력과 의지의 기능에 의존하는 습관으로부터의 결별(訣別)도 뜻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중에 일어나는 평범한 생각은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께로 가는 데에 필수라고 여겼던 깊은 성찰과 영감조차도 떨쳐버릴 것을 요구한다.

 

2) 관상기도는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관상기도는 전략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동시에 그의 기도와 삶의 방식에 어느 정도 적당한 양의 조직적 요소를 가미하면 그 과정을 진전시킨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가 잘 배합된 음식과 운동을 통하여 육신이 성숙해 가는 것과 같다.

관상기도의 첫 번째 효과는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의 방출이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다른 심리 상태를 유발하는데 그 하나는 영적 위안, 성령 은사, 심령 능력에서 오는 개인의 발전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서(자아 지식)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부터 오는 인간적 약함의 경험이다. 자아 지식은 자신의 인격의 어두운 면을 의식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전통적 용어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무의식 에너지를 방출할 때에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오랜 신앙 습관이 있어야 안전하게 보호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만일 영적 위안이나 발전을 체험하게 되면 자만심으로 들뜨게 되며, 만일 영적으로 피폐한 자신을 깨달아 처참함을 느끼게 되면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절망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계발해가는 것은, 자기 현양(顯揚)이나 자기 비하와 같은 정서적 생각에 부딪칠 때에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법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자신의 영적 수련을 오로지 하나님께 바치도록 함으로써 발전된다.

하나님께 헌신하며 다른 이를 위하여 봉사하는 습관은 우리가 정서적 혼란에 빠질 때, 우리의 정신이 그 홍수 속에 빠지지 않으면서 무의식의 에너지를 방출하도록 도와주는 두 가지 둑이다. 그리고 이러한 에너지가 헌신과 봉사라는 두 둑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흐를 때 그 에너지는 영적 지각, 이해, 비이기적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 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안정화 요소(헌신과 봉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빛을 신경 조직과 신체가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이것들은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나 그것들에 집착이 되고 강박적으로 되기 전에, 이 생각과 정서를 분별하게 해준다. 습관적 생각과 욕망의 속박에서부터 독립할수록 우리는 더욱 고요한 마음으로 관상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

 

3) 이탈(離脫)은 자기 부정의 목표이다.

이것은 모든 현실에 대하여 무소유(無所有)의 태도인데 거짓자아 체제의 뿌리를 꺾어 주는 속성이다. 거짓자아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착각으로서, 뇌나 신경 조직 속에 저장되어 있는 습관적 행동 형태와 정서적 습관들이 쌓인 것이다. 그것들은 인생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칠 때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거짓자아는 자기의 반응이 신앙적 동기를 가진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기도 한다. 진정한 신앙적 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거짓자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관상기도로 성령은 자아 중심적성향의 뿌리를 치유해 주며 우리의 의식 활동의 원천이 된다. 거짓자아가 아니라 성령의 영향 아래 자발적으로 행동하려면 과거의 정서적 프로그램은 지워지고 대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낡은 프로그램을 지우고 복음적 가치에 따라 새 프로그램을 만들어 넣는 것을 지칭하는 전통적 용어가 덕의 수련이다.

 

4) 예수의 신성이 관상의 원천이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이 감싸 주시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내면으로 관상하도록 이끌린다. 이것은 예수의 인성을 통하여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타볼 산에서 본 제자들이 겪은 상황과 같다(17:1~8).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러나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체험이 아니다. 하나님 스스로는 경험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영적으로 체험될 수 없다. 그분은 어떠한 종류의 체험들을 초월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각(知覺)도 단지 그분의 현존의 섬광을 지각할 뿐, 결코 그분 자신을 지각할 수는 없다. 거룩하신 빛이 인간의 마음에 부딪치면, 하나의 빛이 프리즘에 부딪쳐서 여러 색깔로 나뉘듯이, 여러 가지 많은 양상을 뛴다. 그러므로 절대 신비이신 분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을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볼 수 없는 빛이신 분 자신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유로 활동하시도록 받아들이기 위해, 영적 위안을 털어 버리도록 마음이 끌리는 것은 성령의 끊임없는 끌어들이심이다. 더욱더 털어 버릴수록 더욱더 성령의 현존이 강해진다. 이리하여 절대 신비이신 분은 절대 현존이신 분이 된다.

 

5) 성령은 성경과 일상생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 양심에 말씀하신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부딪치는 이 두 가지 원천을 묵상하며 과거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더욱 세련된 수준에서 듣게 해준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의 참 자아인 내면의 깊은 원천에서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이것을 적절히 말하자면 관상이다.

이러한 형태가 거룩한 변모에서 예로 제시되었다. 예수는 관상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되어 있는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는데 이들은 내심의 변화에 가장 앞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산에서 환시라는 감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셨다. 처음에 그들은 위압당하였으면서도 또 매우 기뻐했다. 베드로는 그곳에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랐다. 갑자기 구름이 덮이더니 그들의 환시가 감춰지고 감각에 공백이 오고 고요해졌지만 아직 주의 집중과 감각의 민감성은 살아 있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은 실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경배와 감사와 사랑이 한데 어우러진 자세였다. 하늘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성령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이 성령은 언제나 그들 안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때까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내면의 공간은 신성의 빛으로 오신 현존으로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자 그들은 정상적 지각 상태로 돌아와 예수를 그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의식이 변형된 믿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인간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다. 그들의 수동적인 그리고 능동적인 지각 능력들은 성령으로 일치하여 하나님의 내적 말씀과 외적 말씀이 이제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의식을 얻은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은 계속적이고도 증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그들이 성경과 예배에서 듣는 말씀들은 관상이라는 기도를 통하여 배운 것을 확인해 준다.

 

"당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셨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현존을 주실 때까지, 우리는 관상기도 중에 애타는 사랑으로 그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가득 채우시도록 해드린다. 또한 관상기도와 성령은사 쇄신운동(Charismatic Renewal Movernent) 사이의 밀접한 연관도 지적할 수 있다. 성령은사 쇄신 기도 그룹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묵의 기도 안에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성령께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관상기도들 속에는 다 같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게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열어 주는 개방성이 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의 실체이다. 관상적 기도가 성령과 그분의 행동과 그분의 은총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한 우리 영의 정화와 치유로 우리를 남김없이 열어 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영적'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관상기도를 성령기도(pentecostal prayer)라 부르고, 성령기도를 관상기도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로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를 성령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14:16),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산()을 향할 뿐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자신의 두 발로 순례를 시작해야 한다.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것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를 정말로 앞으로, 위로 이끌어 주는 것은 성령의 숨결이다. 우리를 계속해서 앞으로, 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비록 흐릿하게 보이지만 목적지에서 빛나는 주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때때로 안내서를 읽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르멜의 전통에서는, 이 기도의 첫 단계를 '습득적 관상'이라고 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노력하는 어떤 선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 기도를 '잠심의 기도(거둠의 기도)'라고 했다.

보수에는 이 기도를 단순성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일반화시켰고, 탕퀘리(A. Tanquerey)도 이 이름을 채택했다.

이 기도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침묵의 기도”, “쉬는 기도”, “단순한 하나님 현존의 기도”, “사랑의 집중기도그리고 마음의 기도등이다.

방언(Glossolalia), 입신, 거룩한 웃음, 사랑의 반응 등도 넓은 의미에서 관상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의 속마음은 하나님을 보는 관신기도(觀神祈禱)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이미 사용하는 이름 따라서 관상기도(觀想祈禱)라고 한다.

 

 

 

 

 

 

 

 

 

 

 

 

 

 

2절 관상이 아닌 것

 

사람들 마음속에는 관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이 많다. 그러므로 관상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무엇이 관상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관상기도는 긴장 해소 훈련이 아니다.

관상을 통해 긴장이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수 효과인 것이다. 관상은 일차적으로 관계성이므로 지향(指向)성을 갖는다. 관상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고 기도이다.

관상기도는 발전하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한 믿음의 수준으로 옮겨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순수한 믿음이란 정신적 자아 수준에서 하는 논리적 묵상의 수준을 넘어서 직관적 수준의 관상으로까지 옮겨 가게 하는 믿음이다.

 

2) 관상기도는 (카리스마적) 은사가 아니다.

관상기도와 은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관상기도는 믿음, 소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은사는 관상의 길을 가는 데에서 우발적으로 혹은 이차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만일 이 은사를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은사들을 자신의 영적여정에 잘 조화시켜 넣어야 한다.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영적인 여정이 진보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변형의 과정은 믿음, 소망, 사랑의 성장에 의존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그 성장의 열매이며 또 그 성장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다. 지금은 바로 성령 쇄신 운동이 관상기도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 기도 그룹들이 그들의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갈 것을 크게 요구하고 있다. 그들의 기도 모임에 침묵하는 기간을 도입하여 기도의 나눔이 내적 침묵과 관상에 기초를 두도록 하여야 한다. 영적인 여정에서는 머물러 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룹들은 관상기도의 수련이 가져다주는 진보적인 성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3) 관상기도는 초감각 심리현상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그 현상을 미리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든지, 심장 박동이나 호흡과 같은 신체 과정을 조종한다든지, 육체 이탈(肉體離脫)경험이나, 몸이 떠오른다든지(공중 부양), 기타 등의 초감각 심리현상 또는 의사(疑似) 심리현상이 아니다. 의식의 심령 수준은 정신적 자아 단계보다 한 수준 위에 있고 이 정신 자아 단계는 현재 인간 발달의 일반적인 수준인 것이다.

근래에 와서 심령 선물을 경험한 사람들이 눈에 뜨이게 늘어나고 있다. 육체 이탈 경험을 한 사람 즉, 그들은 잠을 자거나 기도 중에 자신의 몸을 떠나서 집안을 떠다니는 경험을 하였다. 이러한 의사 심리 현상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여도 우리 자신이 이것들로 해서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리거나 우리의 기도 시간이 산란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이 현상들은 지나가 버린다. 만일 관상기도 중에 이러한 일이 생기면 즉시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비상한 심리적 혹은 심령의 힘은 어떤 규율을 따라 수련함으로써 개발될 수 있는 인간적인 능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무슨 커다란 영성 발전의 표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4) 관상은 신비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비적 현상이라고 하면 신체 탈혼, 외적 혹은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시는 음성이나 사람의 영() 안에 새겨 주시는 말씀 등과 같이 그 사람에게 특별히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말한다. '가르멜의 산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극단적으로 외적(가시적)인 것에서부터 극단적으로 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영적 현상을 거부하도록 제자들에게 훈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믿음만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지름길인 것이다.

외적 음성이나 환상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성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지적 내용들을 가진 하나님의 의사 전달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심리와 문화적 조건을 통하여 여과되기 마련이다. 만일 누가 사려 깊은 분별을 거치지 않고 이것을 따르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어떤 사람이 받은 어느 특정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는 보장이 없다. 만일에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상상, 선입견, 정서 체계에 의해 왜곡될 것이 거의 확실한데, 상상이나 선입견이나 정서 체계는 그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상당히 바꾸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메시지를 받는 사람의 자구(字句)적 해석에 얽매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해한 것이 바로 하늘에서 들려 온 소리가 분명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을 속일 가능성을 그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관상기도 중이었다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서 문제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에 그 메시지가 무엇을 하라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중요하므로 제일먼저 경험을 가진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분별을 하도록 해야 한다.

환시나 음성이나 유추의 과정보다는 기도 중에 성령이 암시하는 내적 인상이 더 신뢰성이 높은데, 이 암시는 부드러우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이 끌리는 그러한 것이다. 그 상황이 더욱 중요할수록 우리는 더욱 타당한 이치에 귀를 기울이고 또 영적 지도자와 상의해야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관련된 모든 표지들을 살펴본 다음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확실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걸림이 되는 자신의 내적 장애가 무엇인가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된다.

 

5) 위 외에도 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관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다. 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여러 저자들이 말한 것의 목록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관상은 "영적 황홀경"(spiritual high)이 아니다.

특별한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관상은 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실체를 차단하는 것 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기대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비 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포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성령께서 행하실 것이다.

관상은 덕이나 탁월함에 대해 주어지는 진기한 상이 아니다.

관상은 우리의 업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선물이며, 누구에게나 임할 수 있다.

관상은 우리가 관상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 의 특별한 사랑이나 승인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관상은 영성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호화로운 대안이 아니 다. 그것은 여행의 일부이다.

관상은 어떤 공허함 속에 합병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동방의 묵상 형태에 대한 지식을 대충 알고 있으며, 너무 오랫동안 묵상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완화해 준다.

관상은 물 한 방울이 하나님의 존재의 바다에 떨어지는 것처 럼 우리의 인격이 와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흡수되어 인격을 상실하지 않는다.

관상은 변화된 의식 상태를 소유하기 위해서 영을 몸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 아니다.

관상은 고차원의 의식이 아니다.

관상은 고통이나 욕구의 부재가 아니다.

관상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

관상은 하나님을 닮은 선한 상태가 아니다.

 

이제 신비적 은총의 문제를 살펴보자. 그것들은 우리의 심리와 너무 복합되어 있어서 가장 분별하기 힘들다.

신비적 은총이란 우리의 기능들 안으로 하나님의 현존이 유입되거나 그분의 현존의 광채가 우리를 감싸는 것을 말한다. 신비적 기도의 수준에 관하여서는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이 잘 기술하였다. 여기에는 주입된 평정, 정적의 기도, 일치(주님과)하는 기도, 온전한 일치의 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형으로 이루어지는 일치(transforming unirnl)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관상''신비주의'라는 용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신비적 은총을 신비적 기도의 요소와 분간하고자 한다. 관상기도의 체험을 관상기도 그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순수한 믿음이란 그 영혼에게 하나의 어둠의 빛줄기이다. 그것을 감지할 인간의 기능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감지할 인간 기능들을 넘어선 아주 깊은 곳에서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삶 안에 맺어진 열매를 보고 그 현존을 짐작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빛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분의 어둠의 빛을 비춰 주시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기본은 무엇인가? 순수한 믿음의 길이다. 그 외 아무것도 없다. 당신이 꼭 그렇다고 느낄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을 수련해야만 한다.

 

 

 

 

 

 

 

 

 

 

 

 

 

 

 

 

 

3절 무지의 구름과 관상

 

14세기 말의 고전인 저자 미상의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에서는 침묵기도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하며, 그 기도의 기초를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안에 둔다. 바젤 페닝턴(Basil Pennington)무지의 구름의 주요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은 모두 잊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이것이 바로 관상의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하나님 체험을 하게 하신다.

활동적인 봉사 생활의 소명을 받은 신자들도 이따금 활동을 중지하고 묵상과 하나님의 교제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무지의 구름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랑 안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 사랑은 다른 모든 소원과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만들만큼 강해야 한다.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당신이나 현재의 당신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장차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신다.

우리 영의 굶주림과 동경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변화된 영은 사랑에 의해 하나님을 포용할 수 있다.

 

1) 간단한 단어 사용과 이탈(detachment)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기도하는 동안에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생각과 개념과 심상을 "망각의 구름" (cloud of forgetting) 밑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당신의 모든 소원을 정신이 보유할 수 있는 하나의 간단한 단어 안에 모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긴 단어보다는 짧은 단어, 한 음절로 된 단어를 선택하라. 하나님이나 사랑 등의 단어가 적절하다.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정신 속에 담아두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곳에 머물게 하라. 당신이 갈등할 때나 평화로울 때에, 그 단어가 방어물이 되어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어두움의 구름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 단어를 사용하라. 모든 분심을 억제하며, 그것들을 당신 밑에 있는 망각의 구름에게 맡기라.

 

그 단어가 분명한 생각이나 현실적인 소리가 없는 완전히 내면적인 것이면 좋다.

 

그 단어로 기도할 때에는, 그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며, 그 단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 다만 그 단어와 함께 거하라. 저자는 무지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 속에 집어넣는 것을 구분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거나, 그것들이 처한 상황이거나 행동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모두 망각의 구름 밑에 묻어야 한다.

 

이것이 관상적인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요구되는 이탈의 정신이다.

 

어떤 생각이 계속 당신을 괴롭히면서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오직 한 단어로 대답하라. 만일 당신의 정신이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 단어의 가치는 단순성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렇게 하면, 그러한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생각들을 발전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즉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침묵기도와 관련하여 크게 도움이 될 놀라운 통찰들이다. 침묵기도의 세번째 지침은 "어떤 생각을 의식하게 될 때마다 부드럽게 가만히 그 거룩한 단어를 상기하라"이다. 여기에서의 통찰은 부드러움, 하나의 단어, 그리고 이탈의 중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 만일 내가 방 안에 있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정중하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나는 그저 대화를 추진한다. 거룩한 단어의 역할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를 하나의 일에 집중시켜주며, 다른 모든 것을 지나치거나 당분간 한쪽으로 밀어두게 한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기도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쳤었고, 그 방법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기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된 방법론을 알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 관습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을 대한다. 저자는 독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워크샵이나 개인적인 발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2) 자아의 상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의식

'자아의 상실'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 될 수 있다.

 

우리는 관상 작업과 그것들의 모조품들. 예를 들면 백일몽이나 환상의 차이점을 다루려 한다. 이것들은 호기심이나 낭만적인 정신에서 생겨나는 데 반해, 사랑의 동요는 성실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솟아난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대답하려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만일 의도가 호기심, 또는 하나님 안에 쉬는 것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최종 결과는 진정한 관상이 아니라 모조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도가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생겨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요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참된 관상이다. 우리는 어떤 메시지나 사상이나 개념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이제 저자는 우리의 감정들과 접촉하는 것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슬픔의 깊고 보편적인 이유를 이해한다. 이 외에 다른 동기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정한 슬픔을 느낀다. 이러한 슬픔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진심으로 울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참 모습을 경험할 때, 자신의 피조성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이 자의식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막연한 느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독, 우울, 분노 등은 대체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느낌에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떨어져 계시다는 강력한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리는 종종 건조함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이러한 분리를 경험할 때, 그리고 그 건조함과 슬픔과 시련을 하나님 부재로 해석할 때, 우리는 매우 강렬하게 이러한 정상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고아가 된 것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다소 적대적인 우주에서 고독함을 느끼며, 보살펴 줄 사람을 원한다. 우리의 여행의 일부는 우리의 내면에 이 작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 전에는 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여행의 목적지가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야하며, 현재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예리한 분리를 느낀다.

자아의 상실은 거짓자아의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완전함에 대한 욕구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상실은 결코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존재가 되어간다.

3) 그리스도의 위치

여행하는 도중에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지의 구름에서 유익한 예를 들어보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이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움직이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으로 예수를 의지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과 소음을 무시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에 개의치 않았다. 마리아는 마르다를 제어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있는 동안에 마르다의 비방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마음의 비밀, 그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지의 구름에 몰두하는 즐거운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에서 지극히 순수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관상에 깊이 몰입하여 고귀하고 놀라운 무지의 구름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 구름 속에서 마리아는 사랑하는 마음의 숨겨진 동경을 하나님께 보냈다." 마리아는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하고, 주님과 함께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관상적 여행을 시작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용어나 이름을 초월하는 신에게로 부르신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무시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이름을 망각하며, 하나님에 대한 광대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에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갔다가 돌아올 길이 필요하다. 이 움직임을 일으키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요 모범이시다. 이 여행에서 예수가 우리의 동료요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지도를 가지고 계시다.

 

관상을 갈망하는 사람은 연구와 깊은 성찰과 기도에 힘써야 한다.

 

저자는 기초를 확립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영적 독서는 이 여행을 위한 틀을 마련해 준다. 우리는 그저 "복종하며" 관상의 상태로 흘러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문다. 영적 독서의 순환 리듬은 우리가 터를 잡고 머무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는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성경은 우리가 이 여행 안에 머물게 해준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 및 삶에서 발생하는 것을 분별하는 과정에 필요한 지혜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보다 완전한 이해와 책임감에 이르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한다.

 

4) 사랑의 우월성

마지막 차원은 사랑의 우월성이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부드러운 사랑의 동요를 가지고 마음을 주님께로 들어올리며, 하나님의 선물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바라라.

 

이것은 순수한 믿음으로 기도하기 위해 필요한 깨끗한 의도이다.

 

우리 참 사랑 안에서 피조물보다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 한다.

 

관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사랑을 받는다. 이 일의 중심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는 꾸밈없는 의도이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의 소원이라는 화살로 두꺼운 무지의 구름을 공격하라. 어떤 일이 닥쳐도 쉬지 말라.

 

그리하여 우리가 기도 안으로 이동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주의 집중의 중심적 단계이다. 관계의 초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관계가 성숙해지면 행동보다 사랑이 우선적인 것이 된다.

결혼한 사람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즐긴다. 천정에 금이 갈 것에 대해 상대방에게 말할 시간이 없다. 그 시간은 서로 함께 지내는 시간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적용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 분을 신뢰하라. 해야 할 것들의 시키는 일은 다른 기도 시간에도 넉넉히 할 수 있다. 지금은 단순히 주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무지의 구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견고히 서려면, 당신이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 당신의 갈망으로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무지의 구름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라.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정복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날카로운 사랑의 화살로 그 구름을 꿰뚫으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을 걷어차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을 포기하지 말라.

 

관상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치유를 행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관상기도는 죄의 근원을 제거하며, 보다 깊은 치유의 과정을 시작한다. 우리는 병의 근원을 그대로 둔 채 증상들만 다루면서 표면적인 일에 평생을 보낼 수 있다. 그것은 잔디밭에서 잡초를 뿌리채 제거하는 것과 잔디를 깎아 주는 것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비유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뿌리채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하신 정원사가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신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관상을 시작하면, 우리는 무지의 구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며, 동시에 내면적으로 거듭 치료를 받는다.

 

  cp01제1장.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