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영적여정의 관념적 배경

 

 

관상기도의 수련과 영적 여정의 관념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인간적 성장을 하고 나아가 영적 여정의 성숙을 도모하기 위하여 도움을 받고자 한다.

영적 성장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의 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숨은 동기를 지각(知覺)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가져왔던 우리의 무의식적 동기와 이성으로 판단할 능력을 갖는 시기(이성기, 理性期) 이전에 형성된 정서 프로그램과, 어느 집단 혹은 집단들에게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것들이 우리의 거짓자아가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원천이다. 거짓자아의 영향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과 활동들로 확대되어 간다.

관상기도는 인간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기도는 전() 생애에 있었던 정서적 상처를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로 변형하는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우리는 이미 구축된 가치관과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아주 깨끗한 과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들과 부딪쳐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언젠가는 우리의 여정을 침몰시켜 가라앉게 하거나, 우리를 바리세인들과 같이 되어져 종교적이고 영적인 사람들이 갖는 직업적인 위험에 빠지고 말 것이다.

1. 정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8:8~9)

 

인간의 생애에 발달 과정이 있다는 것은 지난 100년 동안 아주 잘 알려져 왔고, 이것은 영적 여정에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비유를 든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는 우리의 뇌나 신경 세포의 생물적 컴퓨터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의 기억 저장소에는 우리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특히 강한 정서적인 성격을 띠는 것들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우리 생애의 초년기에는 자아에 대한 의식이 없지만, 인간의 기본 욕구와 그것에 대한 반응들은 우리 뇌의 생물적 컴퓨터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이 컴퓨터는 이미 행복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이 단계에서 행복이란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즉시 충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성(理性)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사색적인 자아의식이 완전히 발달하게 되는 12, 13세경에는 아동기 또는 그 이전에 유아기 때의 판단에 기초를 둔 정서 프로그램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모든 새로 태어나는 포유동물들은 모든 종류의 유용한 본능을 지니고 있지만, 유아만은 부모로부터 받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유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기의 욕구를 알리기 위해 무기력하게 큰소리로 우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생애의 첫해에 가장 중요한 본능적 욕구는 생존과 안전감이다. 유아는 태중에 있을 때, 그 환경이 매우 훌륭하여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완전한 안전을 느꼈었다. 새로운 환경은 그 태중의 훌륭한 환경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기의 첫 번째 욕구는 엄마와 유대를 갖는 것이다. 아기의 전 세계는 엄마의 얼굴, 웃음, 심장 고동이며 이것들은 안전했던 태중의 환경을 되살려 준다. 유아의 전 관심은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며 음식과 더불어 가장 큰 욕구는 애정이다. 아기는 붙잡아 주고 입 맞추어 주고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자주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주기 위해 들어 올리는 등의 행동은 어머니와의 유대를 강화시켜 준다. 이 우주를 묶어 주는(즉 유대를 맺어 주는) 힘은 사랑이다. 아기가 안전하게 느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애정이 필요한가는 결코 과장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안전감으로 인해 아기의 정서생활은 건강한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된다.

아기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는 환경으로 들어가게 되거나, 그의 출생을 주저하는 것을 경험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 아기는 삶이 주는 모험을 받아들이는데 대해 정서적으로 주저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그 아기의 가장 중요한 욕구인 안전에 대한 생물적인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째에 접어들면서 아기는 다양한 정서가 발전되어 즐거움과 애정, 자기 존중에 대한 욕구들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욕구가 그 이전에도 나타나지만, 이제는 아기가 자신을 주위 환경과 구별하고, 마루를 기어 다니는 다른 동물들과 자신이 다른 몸체를 가지고 있음을 구별한다. 이때에 아기는 부모나 다른 식구들로부터 그 이전보다도 더욱 따뜻한 사랑과 감싸줌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신체적 자아가 발달함에 따라 힘과 통제(control)에 대한 본능적 욕구들이 나타나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려들기 시작한다.

생물적인 생존에 필요한 이러한 욕구 중의 어느 하나가 다른 형제들과의 경쟁이나 위험한 환경에 부딪쳐서 충족되지 않음을 아기가 지각(知覺)하였다고 상상해 보자. 이러한 아기들이 인생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정서적으로 동의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어떤 아동은 형제간의 경쟁으로 인해 혹은 자기는 원치 않는 아이라는 애매한 느낌을 가질 때 열등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거기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때에는, 그 아이의 연약한 정서적 삶은 이러한 본능적 욕구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보상적 욕구를 발전시키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무의식 속으로 눌러 넣어 버린다. 우리는 어릴 적의 이러한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우리의 정서는 기억한다. 이전에 위험하거나 또는 손상을 받을 위험이 있거나 거부당했다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부딪치면, 그 이전에 가졌던 정서와 비슷한 정서가 표면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정서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비록 심각한 상처를 경험하지 않았을 경우라도, 우리는 모두 어릴 적에 정서적 연약함을 경험하였고, 그 결과로 인해 받은 상처 중 어떤 것들은 나이가 들어도 남아 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몰이해나 실수, 혹은 부모 결손으로 인해 아주 큰 상처를 갖게 된다.

만일 아이가 유아기 때, 특히 첫해나 두 번째 해에, 극심한 애정 결핍을 가지면 그 아이는 그 원인을 분별할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아이는 다만 그에 따른 어떤 감정만 갖게 된다. 그가 아는 것은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뿐이며, 이러한 결핍은 마음 깊은 곳에 적대감이나 두려움을 갖게 만들 수도 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결핍된 것을 느꼈을 경우에는, 우리가 자라난 그 문화에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안전의 상징이 아주 커다란 매력을 갖게 만든다. 우리의 이성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기 훨씬 이전에 정서 프로그램이 발전되었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의 안전에 대한 욕구가 어떤 사건 때문에 좌절되었을 때에, 우리가 만약 원하는 안전의 상징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비탄, 분노, 질투 등의 괴로운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다루기 위해 유아기에 발전시킨 가치관을 이 정서는 그대로 충실히 반영한다. 정서 프로그램은 처음에 욕구(need)의 모양으로 시작하여 요구(demand)의 형태로 진전하고 마침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should)의 것으로 발전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이 환상적인 요구를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기대한다. 사람들이 비록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성장하면서도 그들의 정서적 생활은 유아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발전하는 자아의 다른 가치관에 자신의 정서를 잘 조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힘과 통제의 정서적 욕구가 행동 동기의 중심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려 든다. 아마 당신도 이러한 사람을 당신가족 중에, 직장에서 혹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만났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 자신이 그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행한 인간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나 사람들을 통제하려 드는 사람은 세계 60억의 인류와 경쟁하여야 하는 것이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와 똑같이 불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통계 자료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4세에서 8 사이의 사회화과정 중에, 부모와 선생과 동료 그룹의 가치관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특정 그룹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따라 우리의 집단동일시나 자아 가치관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이미 3, 4세에 형성된 정서 프로그램은 이제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가 이성(理性)과 완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의 연령에 이르면 우리의 성장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의 내심은 무한한 행복(즉 무한한 진리와 무한한 사랑)을 갖도록 만들어졌으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대한 절망적이고도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을 억제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길을 가 보지만 그것들은 극히 부분적으로만 좋은 것이어서 결코 그 행복을 줄 수 없다. 어렸을 때 만들어진 정서 프로그램이 이미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성인으로서의 행복의 추구도, 결코 이룰 수 없는 어린애 같은 기대를 가지고 계획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에 1조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서울에서 성공을 했지만 1조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하루에 1백억원을 벌어도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이미 1조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욱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했기 때문에 마침내 사기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욕구는 결코 만족되지 않는 욕구였다(즉 아무리 많아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욕구). 이러한 정서적 프로그램의 속성은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 더 크고 좋은 즐거움을 얻어내며,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여, 할 수만 있다면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통제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프로그램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언제나 완전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평소의 그들의 판단과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인간 조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보자. 예수님은 이 문제를 복음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이 공생활을 시작했을 때 제일먼저 쓰신 단어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회개 하여라"이다. 이 회개는 금식이나, 철야기도나, 채찍질, 등을 통한 회개와는 다르다. 이 회개는 '우리가 행복을 찾고자 하는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문제의 뿌리에 도전하는 것이며 어느 정서적 프로그램의 하나나 둘을 붕대로 감싸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회개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면 몇 달 혹은 일이 년 동안 커다란 자유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전의 생활방식은 어느 정도 청소가 되고 어떤 관계는 치유도 된다. 그런데, 우리의 회개로 일으켜진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낡은 유혹이 다시 솟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처음 열정은 희미해진다.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는데 이 문제란, 우리가 복음적 삶을 살기로 선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무의식적인 동기가 아직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거짓자아(falseself)란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이 우리의 행동 동기의 원천으로 자라나고 사회화 과정에서 더욱 복잡하게 되었고, 사회의 문화적 조건화에 과잉 동일시함으로써 아주 강화되어 버린 바로 그 프로그램의 증세이다. 우리의 모든 수준의 행동에서 그 거짓자아는 일상적 사고, 반응, 그리고 감정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회개하여 모든 덕을 수련하려고 한다는 것을 거짓자아가 알아차리면, 그 거짓자아는 크게 웃으면서 우리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우리가 하기 원하는 것을 하려고 애쓰고, 몸부림쳐도, 그것을 도무지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인해 생기는 전면적인 영적 투쟁을 경험한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5-24).

 

이렇게 성찰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여정의 시작이다. 이 여정은 긴 여정임을 인식한다. 우리가 강력하고도 완전하게 발휘하고 있는 어떤 미묘한 힘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기위해 이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몇 번의 높은 고상한 영적경험을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거짓자아를 무너뜨리고 덕을 수련하기 위하여 애쓰지 않으면, 이러한 경험들은 단지 흥분을 가라앉히는 진정제로만 남아 버린다. 영적으로 원기 왕성한 상태는 일시적인 위로를 줄 뿐이며, 이것이 사라지면 우리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은 직후에 예수님은 악령에게 유혹받기 위하여 같은 성령에 의해 사막으로 인도된다. 사순절은 그와 같은 유혹과 우리가 싸우는 시기이다. 성경의 사막이란 우리가 우리의 거짓자아를 만나고 내적정화를 이루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는 각각의 본능적 욕구에 대하여 유혹을 받으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예수께서 몹시 배고프셨을 때 악마는 간교하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하고 유혹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대답하셨다. 그 다음에 악마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천사들이 와서 보호하여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될 테니, 뛰어내려 보라고 말하였다. 예수는 이 제안을 일축하셨다. 마침내 악마는 예수를 산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고 하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답하셨다. 이처럼 정서 프로그램의 과장된 모습의 요구들을 거절하시고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초대하신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찾는 방향을 바꾸어라. 그 행복은 너의 정서 프로그램 속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너의 어른들아 어린이와 같은 동기들을 버리라. 그것들은 어른들에게 맞지 않는다."

예수님의 날카로운 말씀은 거짓자아에게도 강한 빛을 던지신다. 예를 들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혹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물론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히브리말에서는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쓰거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 경우에 강조하고자 하신 것은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분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표현할 수 있다 "만일 생존/안전, 애정/존중 그리고 권력/통제에 대한 욕구가 너의 눈이나 발, 혹은 손과 같이 중요하다면 그것을 잘라 버려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

 

기독교 금욕의 핵심은 우리의 무의식적 동기와의 투쟁이다. 만일 우리가 정서 프로그램의 숨은 영향을 인정하면서 부딪치지 않으면, 당신의 거짓자아는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바꿔지지 않는다. 우리가 교회 봉사를 시작하면, 새로운 환경에서 찾아지는 안전, 성공, 권력의 상징들이 멀지 않아 우리 욕구의 새로운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거짓자아는 우리가 선택하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 안으로 끈질기게 따라 들어온다. 우리는 거짓자아가 원하는 것을 가짐으로써 얻는 만족은 어떠한 것이라도 잠시 뿐이다.

요한이 "세상을 떠나자"(14:31)고 한 말은 절망적으로 구원을 호소하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한 것은 안전과 즐거움과 존중과 권력에 대한 자아 중심적 프로젝트와 프로그램과 요구(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나아가서 미화시킨)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이 완전하게 인격자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한다. 자신의 정서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스런 정서를 다른 이들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사실 상 다른 사람들과 상황들을 우리가 좋아하는 방향대로 조절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문제의 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2. 거짓자아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거기에 있든지 그것들은 모두 올라오게 되어 있다. 종교적 회두의 열정적인 기간이 지나고 먼지들이 가라앉고 나면 우리의 낡은 유혹들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이러한 때에는 우리가 이전보다 더 솔직하고, 더 열려 있으며, 더 위험에 약해진 때이므로 그 유혹들은 그전보다 더욱 나빠질지도 모른다. 큰 싸움이란 하나님의 위로가 사라져 갈 때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은 그동안의 우리 생애에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베푸셨는가를 우리 스스로의 경험으로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그분은 우리가 이 정보를 질책으로서가 아니라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신다. 그것은 마치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대부분 걷어차고 나가 버린다.

영적 여정 동안에는 보통, 가족 중에나 사업상으로 혹은 공동체 안에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서 가장 나쁜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관계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결국, 나에게 가장 골칫거리로 보이는 사람이 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일 수 있다.

 

수도자들 사이에 거룩한 정화의 과정을 "밖으로는 얻어터지고 안으로는 진절머리 나는" 것이라고 하는 상투적 문구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쌓인 나쁜 덩어리들을 찾아내어 일종의 압착기 같은 것으로 우리의 심리방어체제를 뚫어 파내기 시작하시고는, 마침내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의 숨겨져 있는 비밀 장소를 들추어 보여주신다. 이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운 깊이로 가지라고 부르시는 초대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고귀한 말씀에 응답하려면 비움과 치유가 많이 일어나야 한다. 거짓자아의 잡음이 너무 높으면, 하나님 생명이 온전히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없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시작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 편이 되신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익을 위하여 함께 작용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절약할 수 있다. 무의식의 정화는 여정의 매우 중요한부분이다.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해도 3, 4세에 단단히 박히고 이성의 연령에 달했을 때에 굳어 버린 우리의 무의식적인 동기에는 그것이 미치지 못한다. 정서 프로그램과 함께 거짓자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여정 중에 있는 어떤 진전도 우리 자신의 거짓자아와 정서 프로그램에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사랑의 경험과 우리 자신의 약점을 경험하는 것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관련지어 온 유치한 방법에서 우리를 점차로 해방시켜 주는 데 사용하는 2개의 극과 같다. 하나님의 치유가 절망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험은 우리가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를 경험하게 하는 자()와 같다.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깊이 경험할수록,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더 많은 동정심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작업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정신병 치료자와 일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적 성장의 바로 그 시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바로 그곳에, 믿지 못할 정도로 정확성을 가지고 당신의 손가락을 넣어 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은 소유욕에 매달려 있을 때,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시켜 "그것을 나에게 주지 않겠니?"하고 말씀하신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단련시키시는 것을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에 비유하였다. 옛날에 사람들은 어미 독수리가 벼랑에 있는 둥지에서 새끼를 밀어내어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게 했다고 믿어 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에 우리를 밀어 넣으시는 것 같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가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분은 우리가 들어 있는 둥지에서 우리를 밀어내신다. 마치 새끼 독수리가 절망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듯, 우리도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미 독수리처럼 날쌔게 내려오시어 우리가 돌에 부딪히기 직전에 우리의 몸을 붙잡아주신다. 마침내 새끼 독수리가 날게 될 때까지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된다.

우리도 이처럼 여러 번 다루어진 다음에야, 우리가 처음 믿었던 것처럼 이것이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심리적인 경험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어두운 구석을 대면하고, 떠나보내는 용기를 더욱 강하게 갖게 되면서, 우리가 이성의 시기 이전에 구축하였던 정서적 프로그램을 부수는 일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인정하고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행동 동기가 자아중심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변형하는 일치(transforming union)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3. 쓰라린 정서

 

우리 자신의 무의식적 동기에 부딪치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면서 정서는 우리의 최상의 동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보여지지 않고 우리의 가치 체계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정서는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정서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진정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는 열쇠가 된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방 농부들이 바나나 농장을 습격하는 원숭이들을 잡는 방법을 말한다. 농부들은 코코넛을 반으로 조개고 그 속을 오려 낸 다음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사탕과자를 그 안에 넣고는 코코넛을 다시 봉하면서 우체통의 구멍처럼 한쪽에 틈을 내어두어 원숭이가 손을 넣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사냥꾼들은 덤불에 숨어서 원숭이들이 올 때를 기다린다. 때가 되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 달콤한 냄새를 맡고는 ", 이게 웬 떡이냐!" 소리 지른다. 뛰어와서 코코넛을 집어 들고 그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사탕 과자를 잡는다.

그러나 그 사탕 과자는 주먹을 쥔 채로는 아무리 애써도 꺼낼 수 없다. 사냥꾼들이 덤불에서 나와 원숭이에게 접근한다. 원숭이는 더욱 힘을 주어서 손을 빼내려고 애쓰지만 빠지지 않는다. 원숭이는 사냥꾼들이 다가오고, 그 사탕 과자를 내버려 두지 않으면 잡히고 만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한다. 그러나 원숭이는 발견한 재물을 가지려는 욕망이 너무 커서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결국 사냥꾼들은 원숭이를 잡아서 구워 먹는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비유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모욕을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혹은 어떤 욕망을 조금만 더 품고 있으면 우리가 쓰라린 정서에 붙잡히고 말리라는 것을 희미하게 인식한다. 우리는 그것에 잡히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조금 더 그 특정 욕망이나 혹은 복수하려는 생각을 품고 싶어 한다. 그러면 사냥꾼들(쓰라린 정서들)은 원숭이(우리)를 잡아서 구워 먹는다. 그 원숭이가 해야 할 일은 손을 풀어서 그것을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시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할일은 그저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열고 그것들을 놓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쓰라린 정서를 보면서 우리의 정서프로그램을 알아보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정서들을 요약하면, 분노, 슬픔, 두려움, 자부심, 탐욕, 부러움, 허영심, 무감정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생존(안전), 애정(존중) 혹은 권력(통제)에 대한 본능적 욕구에 어떤 감정이 채색되어 있으면, 이러한 욕망을 좌절시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앞서 말한 하나나 둘의 쓰라린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상과 정서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정서적으로 좌절하면 우리의 과거 역사나 혹은 기질에 따라 비평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을 통해 우리의 감정은 더욱 강해지고 비평은 격렬해진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줄 알면서도 사탕과자를 잡은 원숭이처럼 멈출 수가 없다. 육체는 우리 핏줄에 화학 물질을 주입하여 우리가 행동할 준비를 갖추게 한다. 톱니의 각 바퀴가 서로 맞물려 계속 돌아가면 속도가 가속되는 것처럼 마침내 정서들이 사육제를 열고 그것이 몇 시간, 몇 일, 몇 주, 아니면 몇 년까지 끌고 간다.

 

, 그러면 이제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거짓자아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하나의 주된 정서나 혼합된 여러 정서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우리는 좋은 것을 얻기 힘들거나 악한 것을 피하기 어려울 때 분노가 일어난다. 이렇게 감지한 어떤 것이 우리를 휩쌀 때 우리는 분노를 경험하는 것이다.

 

무심은 반복해서 생긴 좌절로 인해 지속되는 지치거나 쓰라린 마음의 표현이다. 이것은 인생과 친구와 공동체로부터 후퇴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나는 이 공동체에 20년이나 봉사해 왔지만 당신들은 결코 내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의견을 들었다 해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내 방으로 가서 방문을 닫아걸겠다. 아무도 내 문을 두드리지 말라. 당신들은 당신들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겠다." 그 의도는 "지옥으로나 꺼져라!" 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도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그 사람은 상처받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옳다는 감정은 자기만족의 감각을 키워 주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물러남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결국 그들은 복수를 한 셈이 된다. 무심이란 실제이건 상상이건 간에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기 위해, 삶의 흐름 밖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정서 프로그램의 좌절이라는 문제로 볼 때에 색욕은 성적 이상 행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무리한 요구들을 들어 주지 않음으로써 나에게 쓰라림을 안겨 준 사람들로 인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보상하기 위하여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만족을 구하려는 강한 욕망이다. 우리가 본 것처럼 정서적 프로그램은 점차 우리 행동 동기의 중심이 되어 사고와 감정과 행동들이 마치 태양을 도는 위성들처럼 그 주변을 돈다.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자부심은 두 가지로 경험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과장 대신에 자기 거부를 경험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 자신에게 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감정을 다치게 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대신에 자신을 향하여 "나는 좋지 못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 그 감정이 지나치게 강하면 자신을 해하는 행동도 할 것이다. 자신이 실패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자부심이 자신에게 유죄를 평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상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자부심이 자신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떠한 흥분의 정서도 정서 프로그램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경고하는 표시이다. 그 원인은 누구의 잘못된 행동이나 혹은 불쾌한 사건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일로 흥분하는 건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문제의 뿌리를 바꾸지 않는 한 계속해서 정서적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문제란 바로 우리의 무의식속에 있는 정서 프로그램이다. 이 변화를 위한 노력을 우리는 덕의 수련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비판을 하거나 심하게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욕망이나 싫어하는 마음을 메마른 상태로 내버려 두면, 물이 마른 사막에서 풀이 말라버리듯 말라 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가 흥분해도 된다는 계명은 없다. 우리가 흥분하는 것은 우리에게 "누가 나에게 못되게 굴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고 내 자신에게 좋은 기분이 들 수 없다"라고 말하는 정서 프로그램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인간으로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할 때에 심리적, 때로는 육체적인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모욕을 느끼면서 그것을 변상하려는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강박적으로 반응하고 복수하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면서 흥분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적인 여정에 들어서면,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욕구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기애적(自己愛的)욕망의 세계에 파묻혀 버릴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찾을 때에 그들의 욕구에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분명하게 보면서 그들의 욕구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자유와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4. 인간의 조건

 

개인적인 죄는 정서 프로그램에서 열린 열매이다. 그것은 주된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주된 증상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분명히 보편적이다. 그것은 전 인간 조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실 그것 자체가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 조건이라고 말하는 단어는, 처음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제시한 것처럼, 크리스찬 전통의 교리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원죄와 그 결과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어떠한 신학자도 원죄를 우리 자신의 개인적 잘못으로 간주한 사람은 없다. 원죄는 우리의 첫 부모의 죄만으로 간주하여 왔다(아담, 이브). 실락의 교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 속성에 질병이 만연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신학자들이 설명하려고 애쓴 결과이다. 도교나 힌두교나 불교 혹은 다른 종교에서도, 시초부터 인간 가족을 고통스럽게 만든 보편적 질병의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질병이 만연하는 것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분명히 내리고 있다. 사실 상 현대 심리학의 위대한 공로의 하나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 조건들의 성격과 원인에 관하여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는데 있다. 프로이드가 약 100년 전에 발견한 무의식은 영적 여정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 최근에 나온 결손 가정과의 상호 의존에 관한 학설들은 우리가 교리에서 배웠던 원죄의 결과와 육체적 죄의 교리가 가르치는 것보다, 인간 조건에 대한 진단을 더욱 자세히 제공하고 있다. 과학과 심리학의 응용으로 인간 행동동기의 역사(役事)에 관하여 이전에 이해해 왔고 그리하여 도덕적 판단의 기본이었던 것들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신학의 새로운 시녀"가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시에 관한 신학적 사색을 통하여 그리고 관상기도를 통하여 얻어 온 이전의 성찰들에게 새로운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개개인의 발달 단계 모델은 인류 진화 모델의 작은 복제 모델이다. 유아는 전 인류가 경험한 것과 똑같은 발달 패턴과 가치 체계를 경험한다. 다른 말로하면, 각 각의 인간은 전 인류가 지나온 길, 앞으로 나아갈 길의 축소판이다. 진화론적인 모델로서 켄 월버(Ken Wither) 존재의 거대한 고리라고 부른 모델을 따르기로 한다.

 

"파충류적 의식(reptile consciousness)"

5백만 년 전에 가장 원시적인 인류는 완전히 자연 속에 묻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분리된 자아의 의식이 없었다. 그들의 생활은 음식을 찾고 잘 곳을 찾는 것 그리고 본능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것과 같은 매일 매일의 생존을 중심으로 하였다. 인류가 발달함에 따라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 사이에 겨우 알아볼 만한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 차이를 지금 "파충류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이 의식을 신화적으로 뱀이 그 꼬리를 먹는 것으로 상징하였다. 이것은 자연 과정의 반복성, 즉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출생과 사망, 욕망과 그 만족을 의미하였다.

1년 동안 유아는 파충류적 의식을 경험하여 물질과 쾌락 감각에 완전히 빠져 있는 생활을 한다. 첫해에는 엄마와 하나인 경험을 하며 모체 자궁에서 즐기던 삶의 연속이다. 만일 엄마와의 연대가 올바르게 자리를 잡으면, 유아는 인간의 모험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길에 들어선다.

 

"타이폰적 의식(typhonic consciousness)"

20만 년쯤 전에 동물적인 삶과 원시적 본능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인간이 주변 환경에 있는 다른 대상물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종류의 의식은 파충류 의식에서 반인 반수(半人半獸)"타이폰적 의식"으로 넘어갔다. 이 의식을 신화적으로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인 타이폰으로 상징하였다. 이 의식은 신체 자아적 인식으로서 아직은 생i존의 본능과 음식 섭취와 그리고 재생산(종족 보존)을 우선으로 하는 인식이다. 이 타이폰적 문화는 사냥을 하면서 어머니인 대지(大地)를 섭생 제공자와 보호자로 숭배하는 생활을 중심으로 하였다.

2살에서 4의 아동에게서 타이폰 의식의 특징들이 나타난다. 아동은 환경에 있는 사물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분리된 신체 자아를 경험한다. 아동은 감각으로 오는 정보를 급속도로 처리하도록 뇌의 기능들이 새로이 발달하는 데 힘입어 자신의 세계를 탐색하고 또 무엇인가 시도하려든다. 아동의 의식은 반인 반수인 타이폰적 의식에 참여한다. 그들의 꿈은 동물이나 의인화시킨 동물의 영상이 주를 이룬다. 꿈과 같은 성질의 타이폰적 인식은 아동들의 놀이나 상상에 나타나고 있다. 나무토막을 자동차로 여기고, 옷장은 다른 별이나 지구 중심으로 향하는 우주선이 된다. 어린아동들은 상상과 현실, 부분과 전체를 구별할 수 없고, 그들이 상상하는 것은 존재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긴다. 어린이들은 타이폰적 조상들이 가졌던 것과 비슷한 두려움으로 고생한다. 즉 어둠, 낯 설음, 자연의 힘, 상상으로 만들어 낸 괴물 등이 그것이다.

 

"신화적 회원(mythic membership) 의식"

기원전 12000년경에 언어가 생겨나면서 타이폰적 의식에서 "신화적 회원 의식"으로 가속적으로 옮겨 갔다. 농업 기술이 만들어지면서 예술, 사색, 의식(意識), 그리고 정치를 할 여가 시간이 생겨나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켰다. 도시 국가 형태로 계층화가 진행되어 땅과 소유물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끌어졌고, 점점 더 전쟁에 의한 방어와 확장의 투쟁이 생겨났다. 신화적 회원의 의식 수준에서, 그 공동체와의 동일시는 소속감, 적으로부터의 보호, 출산을 통한 생명의 연장이라는 감각을 갖게 하였다. 특정한 도시 국가나 가족 집단과 동일시하는 사회적 자아는 의식(意識)적 희생, 왕과 귀족의 권위, 전쟁의 승리로 얻어서 문화적 확장에 종사하는 노예 등과 같은 계층의 형성 등을 발전시켰다. 사람들의 자아의식이 발전하면서 죽음을 예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커 가는 두려움을 감추는 길을 찾았다. 실제로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서도 생명을 미래에로 투영하였다. 어떤 인류학자에 의하면, 닥쳐오는 죽음을 잊는 방법들이 문화를 형성하게 하는 주된 추진력의 하나라고 한다.

4살에서 8 사이에, 아동은 사회화와 신화적 회원 수준의 의식에 접하는 기간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소유, 경쟁, 성공, 집단소속, 구조적 사회의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일들을 매일 겪는다. 이 연령에서는 부모, 선생, 같은 연령 그룹, 아동이 키워지고 있는 주된 사회의 가르침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정신 자아적(mental egoic) 의식"

기원전 3000년경에 가장 극적인 인간의 의식의 도약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출현이다. 인류학자는 이 수준의 의식을 "정신 자아적" 이라고 부르며 제우스가 용을 죽이는 그리스 신화로 상징된다. 제우스는 이성을 대표하며, 용은 정서의 지배와 원시적 의식 수준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이 표본을 계속해서 설명하자면, 정신 자아적인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고 보고, 이 의식의 수준은 정상적인 인간 발전 단계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8살 이후에 얻어진다고 본다. 이렇게만 되었다면 마음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 조건은 만연하는 질병이 아니라 생명의 가능성에 더욱더 참여해 나가는 올바른 진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완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이 생겨나고 개인적 자아 동일시가 생겨나면서, 그에 따라 하나님과의 격리감도 자라났다.

만일 인류가 의식의 수준이 진전하면서 그대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인식을 향유하였다면 완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의식 수준이 발달하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주와 결별하였다는 의식도 자라게 되었다.

정신 자아적 의식이란 자기중심적인 본능적 욕구와 선 이성적 본능(prerational instinct: 이성으로 판단하는 시기 이전에 가졌던 본능)들을 만족시키는 수준을 초월하여 온전한 인격체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임은 물론, 나아가 가족들, 국가, 인류 그리고 다음 세대에 오는 후손들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욕구에 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수준의 의식에 대부분의 인간들이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파충류적 의식 수준의 안전, 타이폰적 수준에서 오는 애정(존중)과 권력(통제) 등과 같이 원시적 수준의 의식 단계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진 정서 프로그램을 가진 거짓자아의 지배하에 아직도 우리 인간 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그 의식은 여러 가지로 어린아이와 같다. 그리고 현재의 문화 전체는 아직도 신화적 회원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은, 특히 이러한 가치관에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가족의 진화적 여정 기간에서 파충류적인 그리고 타이폰적인 기간에, 대지인 어머니는 우리 모든 인간의 원형으로서 천상적인 무 죄인으로 의인화되었다. 각 인류 진화의 단계가 우리 각자에게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에 묻혀 사는 것과 아무런 책임 없이 먹고 재생산하는 동물적 기능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일이었는지 우리는 희미하게 회상할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태중에 있었던 기쁨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있다. 즉 우리는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낯선 곳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익숙한 곳으로 되돌아가기를 선호한다.

인간이 성장하려고 나아가는 모든 움직임은 우리가 처하는 각각의 신체적, 정서적, 영적 발달 수준에 상응하는 위기를 만나게 된다. 성장하면서 부딪치는 중요한 위기에서 우리에게는 그때까지 우리를 길러 준 신체적 영적 음식을 떠나보내고 더욱 성숙한 관계로 나아갈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위기에서 우리는 안전의 감정을 찾으려고 한다. 파충류적인 그리고 타이폰적인 의식은 좌절을 당하면 가장 저항이 낮은 길을 선택하게 하고, 또 가장 쉬운 안전의 담요로 자신을 감싸려 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인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나아가려는 능력은 더 낮은 수준의 의식과 행동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으로 도전을 받는다. 인간의 성장은 어느 수준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의식을 더욱 진화된 의식의 수준으로 응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류 발달이 온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으로 성장해 가는 것은 이와 같이 본능적 수준에 고착된 정서를 해방시켜 주는 데 달렸다. 복음은 인간 인격체를 온전한 발달로 부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더 나아간 성장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즉 성숙한 믿음과 사랑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직관적이고 일치적인 수준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화적 회원 단계에서 정신 자아적 단계로 옮겨 가는 동안, 우리는 원시적인 본능이 역류해 오는 것을 느낀다. 정서 프로그램의 영향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감각과 영의 정화에 의해 완전히 융화될 때까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파충류적 기간 동안 어느 시점에서 모든 것이 하나였다는 희미한 기억을 갖는다. 그 기간 동안에는 참으로, 격리되었다는 의식도 없고 아무런 책임감도 없었다. 거기에는 신비적인 전체성이 있었다. 이것이 에덴동산으로 상징되는 무죄성의 경험이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비자아 의식적 일치를 그리워하는데, 이 일치는 처음 1-2세 때에 가지고 있었지만, 후에 분리되었다는 자아 감각의 발달로 인해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변형하는 일치 중에 다시 고도의 형태로 재발견될 것이다.

 

5. 신화적 회원 의식

 

"과잉 동일시"

소속 집단에 과잉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은 신화적 회원 의식의 주된 특징이다. 우리가 회원으로 있는 사회적 단위 조직체에 동일시를 하면 우리는 그 단체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한다. 어떤 중요한 것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은 안전감과 즐거움과 위력감을 준다. 아동은 이렇게 자신을 부추길 것이다. "내 아버지는 네 아버지보다 낫다"라고. 자기 아버지가 그 동네의 누구라도 쳐 이길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동네 안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안전감을 가지게 된다.

일단 집단이 형성되면 그 회원들의 과잉 동일시 때문에 어떠한 건설적인 변화에도 막대한 힘으로 저항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처음으로 접촉하는 집단은 가족이다. 자신의 뿌리에 충성하는 것에 잘못된 것은 없지만, 정서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적절한 정도 이상으로 충성을 과장한다. 아동기의 동료 집단은 자신이 행하는 일을 자신의 의식이 인정하든지 안하든지에 관계없이 그 집단에 동조하도록 그 아동에게 압력을 가한다. 우리가 그 집단의 가치 체계에 일단 동일시하면 우리는 더 쉽게 동조를 하게 되고, 그 집단에 도전하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저항한다. 이리하여 동조하는 패턴이 구축되는 것이다.

이 신화적 회원 의식의 수준에서 권위가 작용할 때 그 권위는 쉽게 독재로 옮겨간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아이디어는 정신 자아적 수준에 속한다. 권위란 그가 이끄는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권위는 기독교 공동체 회원들의 창의성을 이끌어 내고 용기를 북돋기 위해 행사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권위는 자아 중심적인 행동 동기의 늪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자신이 책임지는 자유로운 인격체를 형성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세포가 되어 전 신비체의 복지에 한 몫의 책임을 맡는다.

 

예수님은 신화적 회원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갖는 힘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분이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지 말고 돌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시대에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는 대신 성전에 헌금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맹렬히 단죄하셨다. 이 문맥으로 보면,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따르지 못하도록 막는 사회적 동조의 행동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이웃에 대한 관계가 변한다. 우리는 부모에 의존하는 관계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동등한 관계로 바뀐다. 그동안 의지하던 우리의 관계는 끝나고 새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가치에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사랑해요. 그렇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더 넓은 집단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더 이상 회원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해야 될지도 모른다. 만일 가족이나 국가나 혹은 어느 집단이라도, 우리의 진정한 성장(전 인류 가족의 이익을 위하는 것)을 가로막으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삶의 방식을 바꾼 것으로 인해 몇몇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화가 그들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적 여정은 처음에는 외로운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에 우리에게 새 친구를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경우가 아니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지는 않는다.

 

"초자아"

초자아는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이고 어떤 것이 그른 행동이라고 하는 정서적인 판단을 말한다. 이 초자아는 발달하고 있는 인류의 삶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들이나 선생들은 아동에게 "하라""하지 마라"라고 지시하며 이와 함께 처벌이나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 이 훈계에 진정한 도덕적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자아는 그것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뒤에 그것들은 죄악감의 근원이 된다. 후에 이성의 연령에서 진정한 양심이 형성된 후에 우리는 부모들의 금지령과, 특히 그것들이 제재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들일 경우, 마음으로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도덕적 발달을 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은 이 초자아의 독재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모든 가치를 거부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다시 평가하고 도덕적 금지령을 하나님과의 폭넓은 관계의 측면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춘기 청소년들은 자신이 자라온 도덕적 틀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종교적 가치가 이 독선적인 초자아에 끼여들면, 지나치게 도덕적인 방법으로 제시되었던 그 종교에 대해서도 반항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종교를 버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단지, 종교적 가치관에 대하여 자신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 무거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항이 사라지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흐를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생각들이 올바른 양심의 결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북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아동들은 개신교도들을 미워하도록 가르침 받고, 개신교도 아이들은 가톨릭을 미워하도록 배운다.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들, 아버지들, 조부모들, 또 그 부모들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미움을 가지고 자라난다. 어느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느낄 죄의식을 상상해 보라. 이러한 커플은 자신들의 종교와 가족을 배반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을 정서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초자아의 작용이다. 진정한 양심은 이성과 믿음의 기초위에 작용하는 양심이다.

 

상당한 부분의 영적인 여정은 초자아의 영향을 떨쳐 버리는 일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한번 죄를 지으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는 소리처럼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아동은 종교적 교육을 부모와 선생들로부터 무조건 받아들인다. 그 아이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평가하지도 않으며 정보를 받는 방법에 대해서도 평가하지 않는다. 만일 평가를 한다 하더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새 정보에 접하면 거기에 대응할 방법을 강구하려고 노력한다.

어느 집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무슨 질문을 해도 "모른다"라고만 대답했다.

", 이 닦았니?" "몰라요."

"아침은 먹었니?" "몰라요."

"엄마에게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키스했니?"

"기억이 안 나요."

처음에 집안 식구들은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자 아이의 이런 행동이 그들의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할머니가 나섰다.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구나.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가 보자."

그 의사는 그 아이의 보모가 "거짓말은 죄야. 한번 거짓말하면 너는 지옥에 간다"라고 말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아이는 자신이 말한 것이 정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예 거짓말할 기회를 갖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리고는 점점 신경 질환적인 상태로 발전해 가고 있없던 것이다. 이 보모(保姆)는 자신이 종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겠지만, 만일 그 보모의 훈계를 중단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그 보모는 아이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함으로써 그 아이에게 영구한 정서적 손상을 입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동의 영적인 성장은 상당히 지연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혹은 고용인으로서 적절하다고 믿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또 자신의 교회 공동체, 혹은 수도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적절한 길이라고 느끼는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선입견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일하도록 속박한다. 이것이 자신이 소속된 단체의 가치에 과잉 동일시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입견과 고식적(전통적)인 가치관은 우리가 은총으로 나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관상기도는 우리의 내적인 자유가 늘어나서 그 선입견과 가치관들을 복음에 비추어 다시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공포의 정서"

가족과 나라와 종교에 충성하고 그것들로부터 받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덕이기는 하지만, 충성이 곧 절대적 가치는 아니다. 그것은 정신 자아적 의식에 의해 깨우쳐져야 한다. 더 성숙된 수준의 의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선익(善益)을 가져오도록 개인적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국가들 사이에 관계를 해치게 만드는 큰 요인들 중에 하나는 공포의 정서다. 이것은 또한 우리와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해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면 우리는 방어적이 된다. 하나님의 경우는 우리의 상황이나 우리의 체면이 요구하는 한 그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경우에 우리는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어느 한계 내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써 우리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하려 한다.

성경 상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란 말은 정서적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뜻하는 성경상의 기술적인 용어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의 초월적이심 그리고 무한하심에 대한 존경과 경외를 품는 것과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신뢰를 품는 것이다. 성경상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속에 그려보기 위해 크리스마스 때에 커다란 백화점에 들어간 어린아이를 상상해 보자. 도시의 한 블록만큼이나 큰 건물의 맨 윗층이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이 좋은 물건들로 꽉 찬 곳을 보면서 그 아이의 눈은 점점 커진다. 마음속으로 그리던 모든 것이 아이의 눈에 들어오고 이쪽저쪽을 살펴본다. 스키, 티셔츠, 인형 집, 장난감, 썰매, 전기 기관차, 컴퓨터 등 등. 그 아이는 한꺼번에 이곳저곳을 모두 가 보고 싶다. 그렇지만 너무 흥분하여 어떻게 시작하여야 할 바를 모른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을 집어 가지고 집으로 가고 싶어 한다.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두려움은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마음속에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신비 안으로 우리가 초대받았다고 느낀다. 이때에 우리는 무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궁극적 신비'(하나님)에 대한 황홀경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사방으로 끝없이 열려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사로잡거나 아니면 그 현존에 사로잡히기를 원하게 된다.

 

여기에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이것은 영국의 대주교 바실 흄 추기경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엄격한 영국의 집안에서 자랐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모든 아이들을 불러 놓고 선반에 있는 작은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이 항아리가 보이지? 나는 너희들이 식사 시간 사이에 이 항아리에 손을 넣기를 원치 않는단다. 이것은 침례 때에 후식으로 먹을 거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는 그들을 단단히 제재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너희들을 보고 계신단다." 자연히 그 아이들은 무서워 움칫하였다. 그때까지 매우 신뢰해 왔던 어린 바실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때부터 언제나 자신의 잘못을 감시하는 순경과 같은 분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러한 건전치 못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의 영적 성장은 20년 내지 30년이 늦추어졌다.

좋은 의도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선생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제재를 때때로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나님은 열 가지 계명 밖에 주시지 않으셨다. 더 이상 추가하지 말자. 누가 만일 그 이상의 계명을 추가하려면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묻고,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후에 젊은 바실은 베네딕토 수도회에 들어갔다. 거기엔 어머니가 주었던 규칙들보다 더 많은 규칙들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같은 이유로 잘 지켰으리라고 본다. 즉 아주 작은 잘못도 잡아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만일 그가 수도원에 왔을 때, 내가 그의 상담을 맡은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질문하도록 유혹 받았을 것이다. "여기에 온 동기가 무엇인가? 너는 너의 가족과 친구와 전문직의 생애, 그리고 너의 그 좋은 머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려 하고 있다. 네가 어려서 순경이나, 독재자나, 혹은 인정 없는 판사로 생각해 온 그 하나님과 회유하려는 것이 가장 큰 동기는 아니겠지?"라고 말이다.

어느 날, 그 추기경은 그의 이야기 결론을 맺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태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내가 어린아이로서 식사 시간 사이에 그 과자 항아리에 손을 넣었을 때, 만일 정말로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더라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가야 하나 더 집으렴'."

나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와 다른 하나님을 모르며, 또 알고 싶지도 않다. 이러한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풍자화일 뿐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라고 부른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이 부르신 하나님은 모든 이를 무한히 돌보시며,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러한 말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6. 정신 자아적 의식

 

연약한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생존하기 위해 필요했지만 지금은 완전한 성인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아동기적 정서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와서, 이제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라고 복음이 우리를 부르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또한 민족적, 국가적 혹은 종교적인 것이라도 이렇게 조건화된 문화적 가치관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가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데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이 가치관들에 대한 동일시를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아기부터 고정 관념화된 가치관들이 강력히 구축되고 나면, 이성의 나이가 들어 정신 자아적 의식이 일어나도 이 전에 가졌던 정서적, 사회적인 태도들을 자유로이 재평가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새로이 발견한 지적인 힘을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이나 그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미화하는 데까지 사용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모든 현실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도록 발전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이성적 의식의 창조적인 힘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조정하는, 더욱 복잡한 방법들을 발전시키고 삶에서 더 큰 쾌락을 얻으며 더욱 많은 안전의 상징을 쌓으려 한다. 그리하여 어린이에게는 적합하였으나 성인에게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자기중심적 행동 동기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병리(病理)는 단순히 말하면, 우리는 신성한 일치를 즐기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한 인식도 전혀 없으면서 자각적인 자아의식을 온전히 갖게 된다는 것이다.경험으로 얻어지는 그러한 확신(신성한 일치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자아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괴로운 감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게 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다는 감각이 주는 해독적인 성향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원죄의 결과라고 기술하였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는 선선한 저녁에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와 말씀을 나누시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살아 있는 이미지 그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낙원은 어느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상태를 나타낸다.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향유하는 동안에는 모든 피조물과도 친했었다. 그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리자마자, 곡식 대신에 가시나무가 돋아나고 실락한 인간 본성이 갖는 모든 질병들이 찾아 들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우리의 심리적인 인식의 경험을 반영한다.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가 즐겼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갖지 못한 채, 우리는 온전히 자각적인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주와 하나라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불완전함과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자아 아이덴티티를 부추겨 세우기 위해 안전과 애정, 힘에 대한 상징을 찾으려 든다.

 

요한복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말할 때, 복음사가는 하나님이 실락 이전의 이상적인 상태의 인간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고난과 죄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간 모습으로 오셨음을 말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인간이 정신 자아적 의식 상태에 도달했을 때 인간 조건을 보여주는 철저한 예이다. 우리는 동물 상태의 원시적인 무죄상태나 무책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고,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더 높은 수준의 의식 상태로 올라갈 수도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처럼 우리는 땅에서도 그리고 하늘에서도 거부당했다.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전의 의식 상태로 되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온전한 인격의 상태로 나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관계에 완전한 책임을 지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궁극적 진실'에게 자신을 열라고 촉구하신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는 우리가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고 내적 자유와 자아초월로 열려진 새로운 인간성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하신다. 현재의 진화적 발전 단계에서 인간 가족이 당면한 일차적인 문제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았듯이, 어렸을 때에 억압되었던 우리의 하나님과의 연대성을 재발견함을 뜻한다.

정신 자아적 의식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는 변화하는 특징을 갖는다. 단순한 자기 관심에서 벗어나 가족, 나라, 세상과 같은 더 큰 것에 대한 관심이 동기를 이룬다. 신화적 회원 의식 수준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 존중, 그리고 힘의 구축이 동기가 된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동일시는 우리가 소속하는 집단과 그들의 반응과 연관되어 있다.

정신 자아적 수준은 뇌의 기능이 생물적으로 발달하여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때인 12살에서 14살 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새로운 수준에서 관계를 맺는 일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루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낮은 가치관과 자기중심적 행동동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성장하는 데 저항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정신 자아적 수준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모세의 첫 번째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재확인하시면서 두 번째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덧붙이셨을 때, 모든 이를 그리로 초대하신 것이다(22:37~40; 12:29~31). 철학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이 첫 번째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욕구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출발점이었다. 그분이 덧붙인 두 번째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는 더 앞으로 나아가 더 높은 행동 동기로 옮겨 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신약에 있는 그리스어의 두 단어 SarxSoma는 기독교 계시에 매우 의미 깊다. Sarx는 인간의 현재 발달 단계에서 육신과 정신이 생존하는 것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는 '옛 아담'이며, 바울 사도에 따르면 거짓자아로서, 이것은 남의 권리와 욕구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아를 말한다. Soma는 초월로 열려진 육신을 말한다. 초월적인 요소를 가진 새로운 아담으로서, 이 초월적 요소란 그리스도 자신이 온 인류를 자신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가족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것으로 인간 가족이 완전함과 신성한 일치로 결정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Soma는 온전한 정신 자아의식의 출현이며 인간이 앞으로 더 발달하는 길을 열어 준다.

정신 자아적 수준은 우리의 행동과 관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이 온전하게 출현하는 수준이다. 이것이 진정한 양심의 수준이며, 옳고 그름을 관념적인 정도가 아닌 올바르게 구별하는 능력을 갖춘 진정한 양심의 수준이다. 그러므로 이제 개인적인 죄는 더욱 심각해진다. 기본적으로 개인적 죄란 자신의 정서 프로그램과 문화적 조건화의 가치들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욕구 그리고 자신의 참다운 선함을 도외시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 자아적 수준에 알맞는 성향들은, 나와 다른 인간들이 동등하다는 감각이 자라고, 지구와 거기에 사는 생명들과 무기질들을 돌보고 보존하는 책임을 지고, 하나님과 더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자라면서 그들을 조정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은 줄어든다. 무한정의 경쟁은 협조로 바뀐다. 융통성 없는 가치관을 조화로 대치한다. 절대적인 자기 이익 혹은 국가 이익의 주장 대신에 타협을 찾게 한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데, 물론 어떠한 대가를 치르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정신 자아적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일치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중대한 모험으로 이끌어 가는 문이다.

 

이러한 모험을 받아들이는 사이에, 인간은 더욱 직관적 의식의 수준으로 나가는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정신 자아 단계에 심어진 좋은 성향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자신이 우주에 속해 있다는 감각과 다른 사람들과 하나라는 감각이 뿌리를 내린다. 동정심은 다른 이들의 권리와 욕구에 대한 존중 이상으로 초월하며 나간다. 직관적인 뇌의 활동이 증가하고, 성찰과 영적 위안, 그리고 심령 선물들이 많아진다. 그러나 거짓자아는 아직도 이러한 선물을 자신의 자아로 끌어들여 영적 자만심의 동기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섬세하게 작용하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프로그램을 성령의 움직임과 분별하기 위하여 무의식의 정화와 자아 지식의 성장이 필요한 것이다.

 

 

7. 네 가지 동의

 

우리의 본능적 욕구는 점점 정서적 프로그램으로 자라난다. 그 이유는 진정한 안전, 우리의 기본적인 선함에 대한 가장 심오한 확인,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주는 신 현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현존(임재)하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현존만이 줄 수 있는 안전과 확인과 자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영적인 여정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실재에 대하여 동의를 하는 훈련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진정한 겸손의 의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 때문에 아동기와 그 후에 자라면서도 할 수 없었던 동의(同意)를 성장하는 과정 중에 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은총의 긍정적면에 커다란 빛을 비춰 주는 영적 여정의 표본으로 안내한다. 그 은총은 전 생애에 있었던 정서적 손상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회두를 시작하는 시초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의 길로 들어서도록 힘을 준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신성한 일치를 이루는 이 방법을 강조하신 것이다.

신학자 존 둔(John S. Dunne)은 영적여정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는 삶의 과정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발달의 중요한 각 단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연령에 맞는 동의를 하도록 요구하신다. 존 둔이 제시한 것을 살펴보자.

 

1) 아동기

아동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이 갖는 기본적으로 선한 것 모두에 대해 동의하도록 요구하신다. 아동기에 우리는 자신의 기능들을 체험하고, 상상과 기억과 언어를 발전시키고, 우리 가족과 또래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배운다. 이러한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해 감사하라고 요구하신다. 우리의 선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또 남보다 더 무엇을 잘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아동기의 환경이 공포와 거부로 싸여 있고 부모들이 정서적으로 상반적인 태도를 계속 보여주거나, 아니면 신체적 장애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우리는 삶이 선하다는 사실에 온전히 동의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생존하기 위한 생물적 욕구로 인해 우리는 보통 이러한 주저함을 거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자아상을 떠받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는 원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거나,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싫어하는 것과 같은 상반적 태도를 그냥 간직한 채 다음 단계의 삶으로 넘어간다.

 

2) 초기 청소년기

초기 청소년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창조적 에너지를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발달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신다. 초기 사춘기에는 더 폭넓은 신체적인 에너지를 발휘하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 자라고 아동기의 고립된 세계에서 탈피하여 자신에 대해,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조건이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므로 어떤 청소년들에게는 그들의 정서가 이것을 다룰 힘이 생기기 전에 성적 에너지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성적인 에너지와 그 표현에 대한 태도가 왜곡될 수도 있다. 인간관계는 더욱 어렵고, 나아가 우리의 성적인 그리고 창조적인 잠재력이 선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온전히 동의하기를 주저한다.

위험하다고 느끼는 어떤 정서가 일어나면, 두려움 때문에 그 정서를 무의식 속에 억압해 넣으며, 거기서부터 그 정서는 신체적인 질병이나 아니면 불건전한 행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영적 여정에서 우리는 거짓자아를 무너뜨리도록 초대된다. 그 과정의 일부가 자신을 억압하는 심리기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자라면, 심리적 방어기제는 더 이상 생존하는 데에 기본적인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억압되었던 것들은 우리의 무의식의 비밀 장소로부터 떠올라 온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이 생기도록 허용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모든 선한 것들(우리가 선하지 않은 것이라고 잘못 알아온 것들을 포함하여)을 우리의 계속해 가는 발달에 융합시킬 또 다른 기회를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적 여정에 오른 사람들 중에, 자신의 성적인 감정을 억압하고 거부함으로써 고통 받은 사람들에게서 정서적 발달이 왜곡된 것을 많이 본다. 이렇게 일단 억압시키고 나면,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성적인 에너지는 다른 사람에게 애정과 온정을 가지고 봉사하게 하는 동기를 지탱해 준다. 그러므로 성적인 감정이나 이와 관련된 정서를 억압시킨 사람들은 모든 정서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고 인정하면서 대해 주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성적인 에너지를 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방어적이 되고, 어떠한 친밀한 관계의 표현도 즉시 불안감을 주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기를 피한다. 그 이후의 삶에서 이러한 성적인 에너지는 그 방어 기제를 뚫고 나와 사춘기 때보다 두 배나 강한 힘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중년기에 격정적인 성적 감정에 부딪치면 몹시 해롭다는 것은 이것을 보아 분명하다.

 

3) 성년기 초기

성년기 초기에 질병과 노령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의 비존재(인간의 존재는 결국 보잘 것 없음)와 자아소멸(자신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 가며 결국 죽어 없어짐)에 대해 세 번째 동의를 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친구나 친척의 죽음과 혹은 사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숙고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위장법을 동원하여 죽음을 덮어두려 한다.

우리의 비존재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죽음이 가져오는 사멸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으로 오는 결과,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모든 것(사람이나 장소나 사물 등)을 떠나보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릴 적에 부모의 사망 같은 극단적인 손실로 고통을 받았으면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에 동의하기를 주저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앞 단계에서 해야할 동의들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4) 변형(transform)

네 번째 동의는 변형에 대한 동의이다. 이것만큼은 누구나 바라는 동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거룩한 사람들까지도 "너무 서둘지 맙시다"라고 말하곤 한다. 변형하는 일치(transforming union)는 거짓자아의 죽음에 우리가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거짓자아가 우리가 아는 유일한 자아인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싫은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거짓자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인 죽음보다도 거짓자아의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

 

이러한 네 가지 동의는 삶과 죽음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환영하라는 초대이며, 무한한 아름다움과 잠재력을 가진 이 우주 안에 인간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된 거룩한 직분에 대해 감사하라는 초대이다. 그러나 우리의 동의는 삶의 좋은 것들 자체를 위하여 하는 것도 아니고 동의하는 것에서 끝나도록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같다. 생존(안전), 애정(존중), 그리고 힘(통제)의 상징을 찾는 정서 프로그램은 그 상징을 찾는 것이 그 목적이다. 우리가 행복을 위한 프로그램의 어떤 것에 지나치게 고착하면, 위와 같은 상징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데, 말하자면 이 상징을 하나님 대신으로 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안전과 쾌락과 독립을 얻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한계를 가진 좋은 것에서 절대적인 행복을 쥐어짜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즉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한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동의해 가는 훈련이 바로 하나님 사랑을 배우는 학교이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가 인간의 상상으로 내다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신성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려는 신성한 계획을 받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우리가 동의하는 것은 동의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즐기면서 또 이것을 바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다. 각 각의 동의에는 일종의 죽음이 있다. 아동이 사춘기로 가기 위해서는 아동기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사춘기는 성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죽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성장한다는 원칙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신체적으로, 또 지적으로 성장하면서도 아동기 때의 가치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나온 삶 어느 때의 가치관을 전면으로 거부하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가진 한계를 뒤로 남기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단순성, 무죄성, 대상을 매혹적으로 감각하는 것, 감각적 경험의 즉각성 같은 것들은 우리 전 생애를 통하여 지녀야할 자질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화내는 것과 무지성은 뒤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춘기의 모험 정신, 개인적인 주체성과 관계의 추구 같은 가치들은 전 생애를 통해서 가지고 가야 할 가치들이며, 사춘기의 정서적 혼란과 개인적 주체성의 확립에 따르는 불안감만은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뒤로 남겨야 할 것들이다.

진정한 금욕주의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능들을 활용하는 것을 배우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이기심의 표현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 이것들을 잘 활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기본적인 금욕은 우리인간 발달 단계에 있는 선한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각 수준에서의 진정한 가치를 다음 수준으로 융합해 가는 것이다. 융합이란 경험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과의 관계성을 새로운 시점에서 바라보면서 그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합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융합의 형태는 정신 자아적 의식 수준을 지나, 그 이상의 인간 발달 단계까지 지속된다. 우리의 영적 여정을 시작할 때에 적절했던 좋은 것들이 의미 있는 가치를 가지지만, 우리가 좀 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때에는 그것들을 떠나보내도록 요구된다. 초기에 있었던 영적 위안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되며 그 위안이 없어지더라도 그 이전에 했던 것처럼 반응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가 만일 아동기, 사춘기, 이른 성년기에 적합했던 동의를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후에 하나님의 은총의 영감 아래 그렇게 하도록 초대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동기나 사춘기, 혹은 우리가 회두한 초기에 하였던 판단(자신이 받은 선물이 선하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판단들)을 다시 고려하라고 초대하신다. 그분은 또 우리가 가졌던 주저함을 다시 바라보도록 초대하시고,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경직한 태도는 정서적으로 충격적이었던 사건이나 관계를 우리가 다룰 수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도록 초대하신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삶이 주는 합당한 쾌락, 친우관계의 가치, 우리 재능의 발휘, 자연의 사랑스러움, 예술의 아름다움, 활동과 휴식을 즐기는 것들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신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특히 생명을 가진 것에 대해 대단한 지원자이시다.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고 말씀하실 때, 이 점을 강조하셨다. 풍성한 생명은 신성한 일치이며 그 일치에는 모든 것을,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이용할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로 도달하려면 처음의 세 가지 동의를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에 동의하고, 인간으로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함에 동의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떠나보내는 것에 동의하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굴복의 단계에 도달한다. 즉 우리의 거짓자아가 죽고 참 자아가 태어나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참 자아는 각자의 독특성 안에 나타나는 신성한 생명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점에 도달하는 데 여러 가지 길을 쓰신다. 이것이 초기 성년기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연적인 삶의 다음 단계들에서 이렇게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중년기 위기 중에는 매우 성공한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무엇을 성취했는가에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 후에 우리는 신체적으로 쇠퇴함, 질병, 그리고 노년기의 쇠약함을 경험한다. 이렇게 죽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전의 삶에서 저질렀던 모든 실수를 교정하고, 또 우리가 놓쳤던 기회를 다시 잡도록 해주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의하라는 가장 큰 기회인 것인지도 모른다.

 

  cp03제3장.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