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영 분별, 영적지도

 

 

1절 영 분별

 

1. 영 분별하기

 

관상은 선물로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기보다는 주님께서 내안에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은총이다. 반면에 분별은 하나님의 은총이긴 하지만 일종의 기술과 같아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분별의 기술을 배우는 데 도움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영 분별' 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구분해야 한다.

 

1) 영 분별의 은사

'영 분별' 이라는 말은 어떤 은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평상적인 기독교의 어떤 실천사항을 뜻하기도 한다. 때로 이 말은 영 분별의 은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그리고 이어서 여러 은사들을 열거합니다.

은사란 무엇입니까? 은사란 특별한 선물 혹은 은총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은사는 모든 이가 아닌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은사는 기독교 공동체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며 "공동이익"(고전 12:7)을 위한 목회와 봉사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입니다.

영 분별의 은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특별한 선물로서,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말씀이고 어떤 현시들인지를 알고, 또 성령에게서 오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분별의 은사는 악령의 현존을 분별해 축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은사를 매우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은 영 분별의 은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 삶 속에서 무엇이 성령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위해 영 분별의 지혜를 사용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2) 모든 이를 위한 선물인 영 분별

신약성서는 영 분별이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영 분별에 있어서 더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지를 분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요 분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고전 12:3; 23:3).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영 분별에 대한 기독교 전통은 신약성서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 전통 중에서 특별히 16세기의 관상가이며 예수회를 창립한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고전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규칙들은 분별에 관한 실천적 지침으로서 그 어느 것보다 뛰어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3) 영들을 분별함

영 분별이란 사랑과 신앙의 빛 아래 자기가 한 체험의 성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이나 충동, 혹은 이런저런 계획이나 작전, 혹은 말들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인가? 어느 특정한 생각이나 계획, 혹은 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 실천하고, 그렇지 않으면 피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영 분별을 위한 규범들"(영신수련 313-336)에서 '성령''악령'을 구분합니다. '성령'이란 성령과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양상으로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성령' 이라고 부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악마적인 것들로서 전통적으로 유혹의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오는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악령'이라고 부릅니다. 영 분별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별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상념, 생각, 계획, 충동, 내적 이끌림 등이 과연 성령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지를 판단해야한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주관적 규범과 객관적 규범이 있습니다. 객관적 규범은 나를 넘어서 내 밖에 있습니다. 주관적 규범은 나의 양심과 내적 느낌들, 생각들, 충동들입니다.

객관적으로 주님께서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교의, 내가 따라야만 하는 교회의 권위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며 삶의 지침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생각이나 충동들이 객관적인 규범들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면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서나 교회를 통해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나의 마음 속에선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모순을 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종종, 나의 생각이나 느낌들을 판단하기엔 객관적 규범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많은 경우에 주관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혹시 내 양심이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충동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종종 나의 양심이 거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것이 선하고 죄가 아니며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생각이나 충동이 과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생각 또는 충동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내적 혹은 '주관적' 규범은 임의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주관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 분별에 대한 기독교 전통의 객관적 지평에 뿌리를 둔 신뢰할 만한 규범이어야 합니다.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첫째 규범은 혹시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심각한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분명 악령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그래서 내가 이미 나아가고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생각이나 충동에서 특정한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접근해서, 양심에 고통과 가책을 일으켜 부정적 느낌들과 불편함 혹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나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에 '거슬러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내가 기독교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고, 주님의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악령은 오히려 슬픔과 불편함, 장애물에 대한 두려움 등을 일으켜 기독교적인 삶을 따르려는 나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은 나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죄에 대한 슬픔과 눈물, 영감, 주님을 섬기는 일이 쉬워짐, 평화스런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무엇이 성령에게서 오고 무엇이 악령에게서 오는지를 알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결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선에서 좀 더 나은 선으로 전진하는 자들의 경우, 성령이 이런 영혼을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마른 행주나 스펀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부드럽고 가볍고 달콤하지만, 악령이 그를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돌 위에 떨어질 때처럼 우악스럽고, 요란하며, 불안하다. 그러나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타락하는 영혼에게는, 성령도 악령도 그 반대되는 모양으로 접촉한다. 그 까닭은 이러하니 성령이나 악령이나 간에 자기와 반대되는 상태의 영혼과 접촉할 때에는, 그가 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소리를 내면서 요란스럽게 들어오고, 자기와 비슷한 상태의 영혼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 집에 들어가듯이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간다"(영신수련 335).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영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있는가?

 

4) 위안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하고픈 행동, 혹은 내적 충동의 기원을 판단하는 데 최상의 기준은 이냐시오 성인이 "위안"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위안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오를 때, 창조주이신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이 지상의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 및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 나는 위안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주님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신뢰와 사랑의 덕이 자라고, 영적인 사물로 마음을 끌리게 하며 주님 안에서 내적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모든 내적 즐거움이 커갈 때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생각이나 계획, 느낌, 혹은 내적 충동이 나를 주님과 더 가까이 이끌어 주고, 주님과 더 순조롭게 관계를 맺도록 해 주고, 그분을 알아보고 일치시켜 준다면 그것은 위안입니다. 주님에게서 나를 멀리 떼어 놓는 것을 "고독"이라고 합니다. 고독이란 위안과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5) 분별을 위한 몇 가지 규칙

먼저 영적고독의 시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위안의 시간에 정했던 목적이나 결정을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혹시 자신이 지닌 선량한 지향을 바꾸도록 유혹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 유혹과 반대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위안의 시기에는 다가올 고독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서 힘을 모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분의 위안 없이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식하면서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위안은 주님과의 더 깊은 일치와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고독은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악마로부터 오는 것인데,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나쁜지 생각하게 해서 악마가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고독을 허락하실까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냐시오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영신수련 322). 첫째는 내가 주님과의 관계와 기도 생활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기에 나의 잘못으로 위안이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나를 시험하시고, 마치 달리기 선수를 계속 훈련시키는 감독처럼 나에게 시련을 주셔서 원수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나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께 의존되어 있는지, 나 혼자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겸손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고독은 나로 하여금 나로의 덕과 의로움, 선함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게 해주고, 오히려 내 삶의 바위이신 주님 위에 견고하게 집을 짓도록 이끌어 줍니다.

 

6) 가능한 속임수에 대한 문제

분별에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별 자체를 다시 심사하고, 검토하고, 평가해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종종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악령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처음에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후 차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거기에 숨겨진 거짓과 죄를 향하여 나를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떠오른 생각의 시작뿐 아니라 전개 과정 및 그 끝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완전히 선해서 올바른 것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선한 생각이 그 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악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덜 선한 모습으로 끝맺는다면, 혹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주님 안에서의 평화를 앗아가 버린다면, 그것은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악령도 그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처음에 주님에게서 오는 듯한 좋은 생각과 계획을 불러일으켜서 점차로 자신의 목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위안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령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을 심어주지는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위안이 갑자기 나에게 생기고, 혹시 같이 떠오르는 생각이나 인식이 그러한 큰 위안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같지도 않아 도무지 그 위안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으면, 나는 확실히 그 위안이 성령에게서나 혹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쇄신 모임에 참여해서 성령을 넘치게 받을 때('성령세례' 받을 때) 커다란 위안과 기쁨, 강렬한 평화. 주님과의 친밀함을 체험합니다. 혹시 이 위안이 그 순간의 기쁨과 그 상황의 기도를 넘어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에게서 오는 위안이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혹은 기도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그분에게서 온다고 확신하는 강한 사랑의 열정이 일어나고, 때로는 이와 더불어 어떤 인식이나 행동에 대한 계획이 떠오르거나, 혹은 그 '손길'이 기도하는 그 순간을 넘어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에게서 오는 위안입니다. 악령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 안에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나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악령은 먼저 떠오른 생각을 약간 수정해서 선하게 보이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짓으로 나를 속이고,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특별히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분별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고 미리 있을 원인이 없는 위안이 있더라도, 후에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감안해서 그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작에서 뿐 아니라 중간과 끝을 조심스럽게 평가해야 합니다. 분별 자체를 분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분별 할 때, 특별히 분별 자체를 분별할 때는 기도의 동반자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목회자, 혹은 영성지도자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영 분별의 결정하기

 

이냐시오 로욜라는 영 분별의 규범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 적용합니다. 중요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영 분별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 결정을 내리기

예수께서는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그분께 나의 결정을 가져가 그분의 주권 앞에 그 결정을 펼쳐 놓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아주 짧은 관상의 시간에 그분과 함께 그 문제를 검토합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담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치 그분을 관상하고 바라보는 눈으로 주어진 여러 대안들을 바라보고, 내가 선택한 결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내릴 수 있는 다양한 결정들을 예수님께 들어 올립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 주님과 나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십시오.

이것을 어느 정도 하면, 때로는 처음부터 그 결정에 대한 위안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그 가능한 선택에 관해 주님의 눈을 바라보면, 일관성 있게 옳다는 확신이 듭니다. 혹은 꾸준한 평화와 조화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혹시는 마음속에서 기쁨과 참다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 특정한 가능성이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2) 결정과정에서의 핵심적 열쇠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각각의 가능성들에 대해 얼마나 바르고 편안한가? 하지만 얼마나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렸어야만 하는 그 특정하고 가능한 결정을 결론으로 며칠 동안 지내며 시험해 보고, 그것이 진실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주님께서 확인해 주시도록 기다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위안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얼마 동안 나의 분별을 조사해 봅니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을 실행에 옮깁니다.

만일 나의 결정에 다른 사람이 관여되는 것이라면, 그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과 부인이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각자가 식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고, 함께 기도하면서 각자 기도 중에 식별한 결과를 모아야 합니다. 단체가 결정하는 것인 경우에도 구성원 각자가 식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 공동식별의 과정은 다음과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기도하며 식별합니다. 이제 함께 모여, 토론이 아니라 함께 모으기 위하여 돌아가며 각자가 기도 중에 내린 결론을 듣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합니다. 만장일치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혹은 어떤 종류의 투표에 다다를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3) 분별과 결정의 기반

주님께서는 나의 내적 체험 속에서 무엇이 성령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분별에 기반을 두고 당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부르십니다. 하지만 영 분별을 위해서 나의 삶에서 성취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특별한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상적 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 분별은 아주 강한 관상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 분별의 과정에서 근본이 되는 관계는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관상적 관계입니다. 당신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정기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영 분별과 분별에 기반을 둔 결정과정에 꼭 필요한 주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 습관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고 있다면, 나의 내적 체험들을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영 분별을 통해 올바른 결정에 다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 분별은 삶 전체 속으로 스며들고 그것을 넓혀 줄 것입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내 마음 속에서 활동하는 영들을 분별하고 성령에게서 오는 것을 분별해서 행동한다면, 오랜 시간 후에는 내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선택하건 나는 늘 성령이 이끄는 삶을 따르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이끄시는 방법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나는 관상적으로 살고, 내 눈은 늘 주님을 향하고, 당신의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전체는 예수님을 위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4) 성령과 함께 걸어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5:25, 참조 5:16).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새 생명을 지닌다는 것, 새 창조물로서 새로운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특정한 양식으로 행동한다는 것, 그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과 함께 거닌다는 것은 매일의 행동 속에서 영 분별을 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따라 살게 되면, 나는 정말 자유롭습니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은 결코 나의 행동을 규정하고 나를 얽매는 규칙이나 법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법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8:3). 법이 나를 강요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힘을 주셨기에 나는 법이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나의 선택은 무엇이 옳다는 지식에 바탕을 둔 '머리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부르시는 그것을 사랑으로 아는 것에 기반을 둔 '마음에서의 선택'입니다.

나는 성령의 내적 법에 따라 행동합니다(8:2). 그래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5~6). 성령께서는 기도할 수 있게 나를 도와주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나는 주님께 나의 선택을 이끌어 주시도록 청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시길 청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8:14)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에 의해 새로워지고 "새로 태어났기에"(벧전 1;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10) 생긴 새로운 창조물이기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신비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에,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향해 조율되었습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놓여졌기에, 나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즉각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지를 알게 되고, 언제 성령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5:22) 등 성령의 열매인 위안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3. 영적 전쟁

 

기독교적 삶을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것은 아마 전쟁의 은유일 것입니다. 기독교적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벌이는 이 비전은 전쟁의 은유를 통해 주님께 대한 충성심, 관대하게 희생을 바침, 자기를 아끼지 않는 봉사, 어둠과 어려운 시기에 지니는 용기와 신실함 등 기독교적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은유는 악마의 존재와 흉계를 실제적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마는, 대화의 주제가 악마나 악마적인 것으로 옮겨갈 때, 나는 악마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그들은 악마나 악령들을 중세시대의 유물로 여기고, 단지 세상의 악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죄와 악을 분명히 만났습니다만, 죄악의 신비 그 핵심에 자리 잡은 개인적 악의 힘을 체험하진 못했습니다. 반면에, 악마의 활동을 무시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위험합니다. 그들은 마치 적의 존재도 모른 채 아무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6:12).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충고를 따라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6:11). 이것은 기독교 전통의 일상적인 목회 실천들로 구성됩니다. 이 전통에 있는 중요한 요소로서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축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에 익숙해져 우리의 삶에서 악의 현존에 대항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1) 악령의 존재

예수께서는 성령의 힘이 당신과 함께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악령을 몰아내셨고, 그분께서 행하신 축사의 기적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알리는 행적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더욱이 예수께서는 악마를 물아 내도록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압도적인 성서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그동안 사탄과 악령의 존재와 인격화된 악의 존재를 등한시했지만, 교회의 가르침은 악마 혹은 악마들의 존재에 대해 줄곧 언급해 왔습니다.

악령은 세상에서 약간 애매하긴 하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자' 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주로 개개인 안에서 행사합니다. 그는 유혹자이고, 농락꾼이며, 악을 권하는 자이고, 악한 일을 꾸미는 자입니다. 그는 속이고 눈을 멀게 하며 타락시킵니다. 그는 거짓말장이의 '아비' 이며 살인자로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개인에게 미치는 악마의 영향에 관해 귀신들림, 압박, 유혹 등으로 구분합니다.

귀신들림에 관해서는 전에 배우지 않은 언어를 알아듣거나 말하는 것, 미래나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힘 등으로서 이것들이 합쳐서 나타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귀신 들리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압박은 한 악마 혹은 여러 악마가 한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여 조종하는 것을 말하는데, 때로는 괴롭히고 때로는 엄청난 힘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완전히 혹은 거의 완전하게 빼앗지는 못하는 경우입니다. 드물지만 이 압박이 심한 경우는 귀신들린 상태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조금 덜 심한 경우는 흔한데, 증오심이나 분노, 후회심 , 탐욕, 성욕 등의 습관적 죄의 경우에 나타나는 명백한 충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유혹이 갑작스럽거나 강하고 견고해서 자연적 방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악마가 특별히 간섭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악마의 간섭을 '압박' 이라고 합니다.

유혹은 세상에서 올 수도 있고, 육적인 것에서 혹은 악마에게서 올 수도 있습니다. 악의 행위에서 오는 부분적 혹은 전폭적 유혹은 일시적인 방법으로 왔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혹은 압박과 비슷한 양상으로 짜증날 정도로 꾸준하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질성이라든가 비합리성 혹은 이상함 등이 섞인 충동적 힘으로 나타나기에 유혹의 악마적 기원(부분 혹은 전부)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정신질환과 악령의 영향은 분명히 다릅니다. 모든 악마적 영향을 정신질환으로 축소해서도 안 되고, 모든 정신질환을 악마의 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실제적으로 문제의 기원을 정확히 알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정신질환과 악마적 영향은 서로 엉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목회적으로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해야 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듯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심리치료에도, 정신치료에도, 악령을 향해 권위를 행사할 때에도 적용됩니다.

 

2) 악령을 제어하는 권위

악마와 그 앞잡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예수 부활의 승리가 보여준 빛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공생활 기간을 통해서 뿐 아니라 특별히 부활을 통해서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압도적 승리를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셨고, 악마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나눕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 지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분의 승리가 가져다준 은총을 나누어 받고 있기에, 악령을 제어하는 권한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권한을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악마와 악령들을 제어하는 이 권한은 그 권한을 주신 바로 그분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권한을 치장해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악령과 대면하기위해 이것저것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권한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차분하고 조용하고 간단하게 사용하면 됩니다.

기독교와 가톨릭 전통은 좋은 취향에 따라서가 아니라, 경험에 입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지니신 권위에 대한 믿음의 입장에서, 늘 온건한 형태를 취해 왔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한을 치장할 필요가 없고, 그분께 대한 신앙으로 그 권한을 확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3) 악마를 좇아냄

악령이 인간을 공격하는 가장 평범한 방법은 유혹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혹들이 다 악마에게서 오는 것은 분명히 아니고, 어떤 유혹들이 그렇습니다. 악마에게서 오는 듯한 유혹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냐시오 로욜라가 영신수련에 제시한 "영 분별의 규범들"의 충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는 악마를 "인간 본성의 원수"라고 부릅니다. 이냐시오는 결코 악마와 그 앞잡이들에 대해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시한 악령을 다루는 규범들은 그 자신의 체험과 교회의 목회적 전통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는 "영 분별을 위한 규범들"에서 "인간 본성의 원수"가 군대의 사령관처럼 행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모든 덕행 즉 믿음, 소망, 사랑의 삼덕, 슬기로움과 의로움과 용감함과 절제함 및 일반 윤리덕을 차례대로 조사해서, 어느 부분이 제일 약하고 또 어느 부분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보다 필요한지를 발견하면, 그 부분을 공격해서 우리를 정복하려고하는 것이다"(영신수련 327). 우리는 약한 부분에서 유혹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인류의 원수도 착한 영혼에게 음모와 유혹을 꾀할 때 그것이 비밀로 받아져서 간직되기를 원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혼은 경험이 풍부한 목회자나 혹은 귀신의 엉큼한 꾀와 나쁜 마음보를 잘 아는 영적 지도자에게 자기 사정을 밝히 알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의 흉계가 드러나게 되면 계획했던 나쁜 뜻을 이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영신수련 326)

이냐시오는 우리의 목적에 가장 잘 들어맞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원수의 귀신이 행동할 때는, 여인과 비슷한 점이 있으니, 즉 힘은 약하지만 발악을 쓰는 데는 강하다. 귀신도, 영신 수련을 하는 사람이 원수의 유혹에 대하여 정면에서 반대하면서 용감한 기색을 보이면, 용기를 잃고 도주한다. 그러나, 반대로 수련하는 이가 겁을 내고 또 유감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용기를 잃기 시작하면, 인류의 원수는 세상에도 없을 맹수처럼 사나와져서 비열한 수법으로 흉악한 의도를 추진시키는 것이다"(영신수련 325). 기독교 전통에서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은 오늘날에도 예전처럼 유효하고 쓸모 있습니다. 간단히 기도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거기에 어떤 형태의 악마 혹은 악령이 있건 단순하게 명령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나에게서 떠나가라", 또는 "두려움의 영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나에게서 떠나가라", 혹은 "분노(혹은 탐욕 등등)의 영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떠나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은 효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악마에게서 오는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권한을 사용해야 합니다.

개개인 혹은 어느 단체나 특정한 장소에서 악령의 현존을 느낄 때 또는 악령의 영향이 예측되는 이유가 있으면, 그것이 유혹의 양상이건 압박의 양상이건 간에, 언제라도 예수께서 주신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 간단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고는 "악령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떠나가라" 하고 명령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나에게 혹은 유혹을 당했거나 압박을 당한 그 사람에게 성령의 넘치는 은총이 새로이 부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악령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당신이 이미 그들을 제어해 승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안에서 당신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4. 사랑과 분별

 

사랑은 지식보다 중요하며, 가장 높은 지식은 사랑을 통한 관상적 지식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 육화되어 드러났던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은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1) 예수님의 사랑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고, 또 그 사랑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묘사를 통해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분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고 훌륭한 표현입니다. 사랑에 대한 바울의 묘사에서 '사랑' 대신에 '예수님'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모습이고 특성입니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속에 성령을 담아 보내 주십니다.

 

2) 성령

성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육화되시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부와 예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5:5).

예수님과 성부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머무시면서, 성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성부의 사랑 속에 나를 사로잡으십니다. 하나님의 내적 삶 속으로 나를 데려가시고, 성삼위가 이루시는 사랑의 공동체적 삶 속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성삼위의 신비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성부와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기에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랑 안에서 성부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나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기에 사랑과 신뢰심을 지니고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을 통한 분별

영 분별은 항상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부와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의 마음속에 주시는 선물인 사랑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도록 힘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이 사랑의 선물은 관상 속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신앙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의 눈이 예수님을 향해 집중되도록 나를 이끌어 줍니다. 관상이란 사랑을 통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영 분별이란 사랑을 통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관상의 맥락에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분별은 관상적 판단이고 관상적 평가입니다. 그러기에 늘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사랑과 분별에 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바울 사도는 편지를 쓰셨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기에 분별력이 없어졌고, 분별력이 없어졌기에 그릇되게 내린 평가나 판단에 의해 더 어려운 문제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은 아마 기독교다운 지식은 사랑을 통한 지식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다운 지식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졌기에, 불행하게도 재난을 초래하는 행동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바울 사도가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핵심은 바로 이 13장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들이 바로 4절부터 7절의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들은 불친절했고, 인내심이 없고, 시기심에 빠져 있고, 교만함에 빠져 무례했으며 앙심을 품었으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부족했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은사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을 위해 기도하라고 그들을 격려합니다. 사랑은 은사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길이며 삶의 방식이고 생명으로 가는 통로입니다(고전 12:31). 사랑이 없이는 은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편지의 첫머리에서 찬양한 바와 같이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함양하고 사용하길 원하였습니다. 사랑을 통해 형성되지 않은 지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을 지니지 않은 지혜는 세속적 지혜일뿐입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을 통해 형성되고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참다운 지식이 없었기에 그들은 기독교적인 영 분별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영 분별은 사랑을 통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분별력이 부족했기에 그릇된 것을 선택했고, 그래서 바울 사도가 편지에서 지적하는 그러한 문제들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4) 예수께 귀를 기울임

'예수님을 아는 것'은 단지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뜻합니다. '예수께 귀를 기울인다' 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또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여러 소음들로부터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 즉 분별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어떻게 예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그분을 압니까? 성부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께서 성부를 아시는 것처럼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27- 30).

예수께서는 당신 손으로 나를 감싸 주십니다. 나는 그분께 속합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아시고,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하고 인식하도록 나를 인식을 향해 이끌어 주십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통해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분별의 은사를 주십니다. 내가 성부의 손 안에 있고 성부께서 나를 예수께 주셨기에, 나는 예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습니다.

 

 

 

 

 

 

 

 

 

 

 

 

 

 

2절 영적 지도

 

학문적인 교육과정을 밟는 것만으로는, 그 과정이 영적 지도를 해주는 데 대하여 관념적 배경으로서 아무리 쓸모가 있다 하더라도,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인 배경이 매우 쓸모가 있기는 하지만, 일차적으로 이것은 단지 좋은 심리 상담가가 되기 위한 것이다. 영적 지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관상기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 대하여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때로 기독교의 관상 전통에 대한 문헌으로 훈련받은 영적 지도자나 피정지도자들이 관상기도에 관하여 몇 개의 책을 읽고서 관상기도를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훈련과 오랜 동안의 수련을 필요로 하는데, 그 훈련과 수련 없이는, 그 섬세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어서 그것을 남에게 적절하게 전수해 줄 수가 없다. 관상기도는 수용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에 따르면 심리적인 효과들을 지도자가 미리 내다보고 있어야 한다. 어둔 밤이 이 수련 중에 아주 일찍 올 수도 있는데, 이러한 때에는 지도자는 잘 듣는 이가 되고 확신을 많이 줄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관상기도의 지도자는 특수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감수성 중에 하나는 내적, 외적 활동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대한 특수한 민감성이다. 순수한 심층적 기도는 영적 독서, 전례, 아니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의 기도의 상태를 대상으로 하는 강론이나 강의를 듣는 것 등을 통하여 관념적인 지식을 얻지 않는다면 아마도 침체될 수도 있다. 이 기도에는 지적, 정감적 그리고 직관적 요소들의 균형이 필요하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로 가는데 우리의 기능을 이용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기능의 이용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것들을 올바르게 이용하면 지혜, 이해, 지식의 은사를 온전히 얻도록 해주며, 이것들은 관상기도가 온전하게 되도록 도와준다.

그레고리오 성인에 따르면 관상기도는 하나님 안의 휴식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기도가 휴식을 준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휴식만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쉬는 동안에 얻어진 믿음과 사랑의 태도로 생겨난 활동이 따라야 한다. 관상기도로 얻는 휴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기도든지, 특히 위안을 주거나 평화를 주는 것이면, 고도의 신경안정제 역할로 퇴보하고 만다. , 자기중심적 목표에 집착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형편에 무감각했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과 기도의 상호작용은 우리를 복음의 관상적 차원에 동화하게 만드는데, 복음의 관상적 차원은 기도는 물론 좋은 행실도 함께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선생이시다. 하나님을 아빠,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그분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관상기도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것을 향하게 하는 것이 영적인 지도자가 하는 일이다.

우리가 관상기도와 행동으로 더 준비가 잘 될수록 사람들 가운데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와 닿을 것이고 우리를 각 수준에서 변형시켜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근거를 두지 않는 한, 관상기도는 변형하는 일치로 향하는 길의 일부분만 얻게 할 뿐이다.

 

관상기도 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기도하고 싶은 열망뿐이고 때로는 내적 정화의 시작과 겹쳐서 일상생활의 굉장한 어려움 속에 묻혀 버리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기도하고 싶은 열망 자체도 기도라는 사실을 거듭 되새겨 줄 필요가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위대한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어떤 굉장한 것을 느끼느냐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상당히 초연해지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선택의 문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둔 밤이라고 부른 동안에 시험을 받는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원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그가 자신의 기도와 일상생활 중에 거룩한 치료자에게 자신을 계속 내어 드리는 한 그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무기력하고 메말라 있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 힘겨운 여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힘 있게 그리고 끊임없이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일들은 진전의 표시이지, 퇴보의 표시가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현존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으로 아주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 우리가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우울증에 빠졌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병적인 우울증과 우울한 느낌의 차이를 분간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감각적인 위로를 경험해 온 사람으로서 지금은 이익, 도움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등의 결핍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는 느낌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오는 결과이다.

어둔 밤과 우울증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어둔 밤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시험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에게 대하여 무비판적인 태도가 자라고,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더욱 초연해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과 같은 면들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둔 밤의 열매를 알아 볼 수 있다. 병적인 우울증에서는 아무 진전 없이 한 곳을 맴돌며 어떠한 수준에서도 아무런 이익을 발견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이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 사람은 우울증에 대하여 심리학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단순히 어둔 밤에 있는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수면제나 안정제를 투여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은총의 진전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특별한 분별을 하려면 판단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야 한다.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믿을 만한 지표는 정상적인 기능의 수준에 관한 것이다. 어둔 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내적으로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직업이나 대인관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일반적인 성향은 때로 심각할 정도로 자기 몰입을 하는 병적인 우울증과 아주 대조를 이루는데, 이 우울증에서는 세상과 접촉하는 삶의 기능들이 정지되어있는 것이다.

 

기독교 정화의 핵심은 무의식적 동기들과의 투쟁에 있는데, 기도 그 자체는 이전에 억압한 무의식 속의 내용들이 솟아오르도록 격려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신치료자의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때를 알아서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어려움이 생길 때에, 지도를 받는 사람은 그 수련에 계속 정진하도록 격려되어야 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그 수련의 기본으로서 사고와 감정을 떠나보내도록 되어 있어서, 감각의 밤이 와도 충격적인 부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이익을 보게 해준다. 관상기도의 경험을 쌓은 지도자는 피지도자가 나아지는 대신에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도 겁먹는 일이 없이, 그 피지도자에게 이 과정에 대해 마음을 편히 갖고 신뢰를 갖도록 하는데 필요하고 중요한 격려를 해줄 수가 있다.

 

아주 드물게 위험 신호가 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 밑에 깔린 정서적 취약성이나 이 과정을 떠맡고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는 거짓 자아에 의해 동기가 된 고집의 결과로 온다. 정신은 건강에 대해 엄청난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보편적으로는 그 사람이 심리적으로 대할 수 있는 이상으로 덜어 내지 않는다. 덜어 내는 과정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면 기도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심각한 우울증이나 정신병 전기(前期)의 증상들이 있을 때에만 기도를 완전히 중단하게 한다.

영적 지도자는 어두운 면과 거기에 대해 필요한 것들과 함께, 자신의 성격에 대하여, 그 역동을 잘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에 관하여 더 알기 위하여, 혹은 이것들로부터 자신의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심리적인 카운셀링을 시작한다. 관상기도 자를 영적으로 지도하려면 스스로가 섬세하게 균형을 유지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자신의 심리적인 역동이 작용하고 있거나, 자신에게 충족되지 않은 정서적 욕구가 있으면, 영적 지도자는 자신이 지나치게 관여하게 되거나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영적 지도를 받고 있던 사람이 다른 지도자를 찾아가기로 결정했을 때에 우리가 상처를 받으면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그 영적 여정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신호다.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도 지도를 사양할 때가 되었거나 자신이 심리적인 도움을 받아야 될 때가 되었다는 확실한 신호다. 때로 지나친 개입은 우리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성적인 감정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아니면, 지도를 받으러 오는 젊은 사람을 우리가 가져 보지 못했던 아들과 딸로 여길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피지도자의 경우를 보면, 만일 지도자가 어느 시점에서 피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하여 개인적인 책임을 갖게 하도록 강조하지 않을 때에, 전이의 관계가 의존의 관계로 변할 수 있다. 지도자는 피지도자의 영적인 온전성을 존중해야 하며, 피지도자에게 정서적, 지적 그리고 훈육적인 짐들을 지워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책임감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피지도자는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갈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로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양육에도 주의를 주어야한다. 우리 자신은 관상기도를 성심껏 하고, 자신의 여정의 경험을 깊게 하기 위하여 여러 날의 연중 피정을 정규적으로 하면서 지도 자격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 시간을 냄으로써 자신이 자격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여정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의 여정을 더욱 잘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히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난 경우에, 자신의 뿌리로 돌아오고자 하는 욕망를 느낀다. 동양의 수련으로 그들의 정서가 평정을 찾고 어릴 적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가졌을지도 모르는 울분들이 잠잠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면들에 대한 욕구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때로 아주 능력도 있고 동양의 묵상에 대해 집중적인 수련의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좋은 선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많은 시간을 내어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개념적 배경에 동화하고 전통을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이에, 그들이 깊이 관여했던 이전의 전통으로부터 몇 가지원칙과 태도들을 인용하거나, 관상기도 방법을 온전하게 가르치기보다는 이전의 묵상 방법들의 요소들과 혼동을 일으키게도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혼자서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경험을 많이 가진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영적인 지도는 지도받는 사람의 현재 처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수련의 초보자들에게는 수련을 정기적으로 할 것, 간단한 생활 수칙, 영적 독서 등과 같이 확고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기도 수련이 정착된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독서나 공부 그리고 매일 기도할 것 등과 같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목표는 관상 중에 동의하는 태도들을 갖도록 격려하고 일상 중에 괴로운 정서가 일어나면 그것들을 즉시 떠나보내게 하는 것들이다. 물론, 어둔 밤이 전개될 때에 용기를 돋워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영적인 여정에서 많이 앞서간 사람들에게는 우정으로 하는 지원과 이해가 우리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우리는 어둔 밤과 수동적 정화의 경험에 대한 자신의 경험 범위 안에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도정을 지나가 본 사람이 주는 용기와 확신, 그리고 자신의 경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타당성은 경험 있는 지도자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아주 커다란 선물이다. 가장 좋은 지도는 피지도자가 종래에 가서 모든 문제에서 성령의 더욱 세련되고 섬세한 지도에 따를 수 있게 성장하도록 도와 주고 힘을 주도록 목표를 두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여정에서 동료 여행자이며 친구가 되고, 지도자와 피지도자는 서로 사랑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서로를 지탱해 준다.

 

cp10제10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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