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관상기도의 핵심 요소

 

 

1절 믿음

 

관상기도의 전제조건이요 핵심요소는 수수한 믿음이다.

우리 시대엔 특히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들이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기도의 단계들, 그리고 여정 중에 일어나는 함정들에 온전히 익숙해야 감각의 밤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 이처럼 영의 밤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미 관상 기도를 체험한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그들은 또한 심령이나 신비적 현상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도록 영적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주의를 받을 필요가 있다. 관상 기도의 핵심 요소는 외적이거나 내적인 현상에 있지 않고 순수한 믿음에 있다. 이것이 생명으로 이르는 좁고도 어려운 길이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온전한 일치의 기도가 변형하는 일치로 가는 지름길이라 했다. 그것이 이 기도의 참 목표인 것이다. 그 기도가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보통의 과정을 촉진하는 특별한 길일지도 모른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숨은 계단으로 이끌리는 대부분의 관상 기도자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관상의 여러 단계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렇듯 필요한 심리적 경험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 같다.

이는 결국 관상 기도는 근본적으로 어둠의 빛이라고 한 십자가의 요한의 훌륭한 성찰로 이르게 한다. 거듭거듭 그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데에는 순수한 믿음이 첩경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즐기는 어떠한 신성함의 경험에서 느끼는 것도,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거나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빛을 발산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믿음만이 모든 인간적인 경험을 초월하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에게 접근하게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만일 한줄기의 빛이 완전한 진공 속을 통과할 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빛으로 지나가는 물리적 에너지를 반사할 먼지가 완전한 진공 속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신성한 빛을 우리의 전 존재(몸과 영혼)로 계속해서 비춰 들어온다. 영적인 감각들마저도 그 핵심인 신성한 에너지의 헤아릴 수 없는 순수성과 힘을 감지하지 못한다.

 

요한의 첫번째 편지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어둠 속에서 그분을 아는 것에 동의할 수 있으며, 그 어둠 속에서 신성한 현존에 대한 보이지 않는 확신을 가진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의 요한의 성찰을 이해할 수 있으면,우리는 여정 중에 일어나는 커다란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우리 문제의 대부분은 비현실적이고 충족될 수 없는 기대를 하는 데서 온다.

순수한 믿음의 좁은 길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십자가의 요한의 이러한 가르침은 마천루에서 급행 승강기를 타는 것과 완행 승강기를 타는 것 사이에 있는 차이를 묵상함으로써 예증될 수 있을 것이다. 완행 승강기는 층마다 서기 때문에 한층 한층 멈추어 서서 보면 경치가 더 좋아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경치에 매혹되다 보면 승강기에 다시 올라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심령 현상을 받아들이거나 실제적인 체험을 바라는 것을 금하였다. 실제적인 체험은 신성한 일치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지는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음성을 듣거나 향기를 내거나 내적 외적 환시 등을 경험하면, 그것에 저항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그 은사가 높은 것일수록, 우리의 거짓 자아의 잔재와 영적 자부심의 잔재에서 보호받기 위해 감각의 밤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다. 우리가 영적자부심의 낚시에 물리면 영적 여정의 진전은 갑작스럽게 정지한다. 맨 위층에 도달하기 위하여 급행 승강기(즉 순수한 믿음의 길)를 타는 지혜가 무의식을 덜어 내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기는 신비 현상을 피하는 길이다. 순수한 믿음의 길은 우리의 영적 여점이 어디쯤 와 있는가를 염려하지 않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선물이 나의 것보다 더 좋다고 판단하지 않는 마음으로 관상 기도에 전념하게 만드는 길이다. 우리의 기도에 어떤 심리적인 내용이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신성한 활동에 승복하면 이 모든 넌센스를 절약할 수 있다. 순수한 믿음 속에서는 완전히 성장한 사람들에게도 여정의 결과들이 감추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변형하는 일치로 이끄는 것은 영적인 체험이 아니라 여정에 투신하면서 수련을 충실히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체험들이 우리를 투신하도록 도와준다. 때때로 우리의 상처와 어릴 적의 정서적 고통이 치유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 치유가 일어난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어른처럼 다루며 일하시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리는 좁은 길, 즉 순수한 믿음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우리가 동의하고 승복할 수 있도록 이제 믿음의 신성한 빛이 온전히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깊은 상처들을 치유해 주고 또 다른 이와 치유를 나눔으로써 전() 생애에 있었던 상처들을 치유하고 변형하는 빛으로 우리를 이끌며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2절 관상기도 시간에

 

관상기도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핵심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기도시간에 초보자의 경우 일어나는 분심이나 잡념과 묵상주제가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아간 이들에게는 묵상을 버리고 관상으로 나아감으로 분심과 잠심이 반복된다. 둘째로 기도시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듣는 주관적인 자세 즉,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객관화 시키는 것이다. 셋째로 기도시간에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 맡기는 것이다.

 

1) 기도는 분심(잡념)과 묵상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지만, 아무리 앉아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생각이 흐트러지고 집중이 안 됩니다. 이럴 때 흔히 분심 또는 잡념이 든다고 합니다. 분심이나 잡념이란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려 할 때 그것과 관계없는 생각이 나타나서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분심을 없애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심이나 잡념들을 멈추거나 없애려고 애쓰지 않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저절로 멈춰지게 됩니다. 즉 그것들이 그대로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면 본심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지나가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그러한 생각들을 "나무나 풀 보듯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객관적으로 보게 될 때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보게 됩니다. 결국 분심이나 잡념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 안에 무엇인가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집착을 버리면 그런 분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거룩한 생각과 감정까지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항아리에 가득 채워진 물건을 내어 버리면 버릴수록 다른 것을 더 담을 수 있듯이, 우리도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께서 내 안에 더 많이 머무실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면 드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비워지고, 그 비워진 곳에 하나님을 받아들일 여지가 커져서 하나님의 현존이 더 크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매달리고 붙잡는 태도야말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그것을 모두 버릴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나중에는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완전한 기도를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성인은 "완전한 기도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하는 기도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강에서 고기를 낚는 낚시꾼이 찌를 바라보지 않고 강을 따라 흘러오는 다른 것을 처다 보고 있다면 고기는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찌를 바라보면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강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것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분심이나 잡념을 흘려보내어 머리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가슴과 머리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머리의 생각이 커질 때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 가슴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머리의 생각이 작아질수록 내면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에 가득 차 있는 관념들을 비워야, 그 빈 공간을 하나님-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자신이 내면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머리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머리로 찾는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리' 입니다. 정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정리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에 계신 하나님 가슴속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생각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의 머리를 휘어잡고 그 생각의 줄기를 따라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그와 관련된 갖가지 기묘한 생각이나 추억 또는 궁리를 하게 되면 그것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기도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잡다한 사념들에 빠져들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은 낚시꾼과 같이 강물위에 나룻배가 지나가듯이 그런 생각들을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주의를 집중시킬 대상은 오직 찌뿐입니다. 정신이 어떤 소리나 생각, 어떤 계획, 또 수천 가지 생각 중의 어느 하나에 쓸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낚시와 찌로 생각을 되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묵상 주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초보자들의 기도시간은 분심과 잡념, 묵상 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이랄 수 있습니다. 분심이나 잡념이 들면 묵상주제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묵상주제로 돌아간다는 것은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주 속에 정련제를 넣어 정련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정련제는 포도주 표면에 막을 형성하여 포도주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점차적으로 가라앉힙니다. 이와 같이 분심과 잡념이 들면 다시 정련제 구실을 하는 묵상주제로 돌아가 분심과 잡념이 흘러가케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초보자는 묵상에서 출발하지만 나아간 이들은 묵상을 버리고 관상으로 나아갑니다. 이 경우에도 분심과 잠심의 상태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때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2) 기도는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는 시간

두 번째로 기도시간은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는 시간입니다. 시야의 독재성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주관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마음은 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상에 이끌려 순순히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청각은 소리를 넘지 못하고 시각은 모양을 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서는 시야의 독재성을 없애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도 중에 갑자기 매미가 허물을 벗고 날아가듯 내가 내 속에서 공중으로 날아가며 저 아래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한 초라한 모습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제 삼자가 되어 바라본 바로 나였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내가 초라한 나 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정을 나와 동일시해 버리거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 속에 있는 '거짓된 나' 만 볼 뿐 '참 나' 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동정적으로 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하게 판단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빛을 때 두 개의 자루를 목에 걸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앞에 건 자루는 타인의 결점으로 채우고, 뒤에 건 자루는 자신의 결점으로 채우도록 한 그 때부터, 인간은 타인의 결점은 십리 밖에서도 잘 볼 수 있지만 자기 결점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은 쉽게 보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3).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입니다. 나의 태도가 바뀔 때 세상이 변하는 것이지 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주관적으로 보는 나'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나' 로 전환되어야 새로운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객관화' 의 시각입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아래 곳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고차원의 사람이 되면 내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이론적이고 사고적인 데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느끼며, 생각으로 문제를 푸는 삶에서 가슴으로 느끼는 삶으로 서서히 변화되고 전환되어 갑니다. 이처럼 '저차원의 삶에서 고차원의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 삶의 전환이며, 사고의 전환이고 자기객관화이자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즉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이 잔잔해지면 물 속을 올바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생각들을 천천히 흘려보내거나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 '참 나'를 자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현존을 더 잘 체험하게 됩니다.

다시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보십시오. 여전히 대상에게 핑계를 대면 아직도 저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 대상에 핑계를 대지 않고 받아들이면 고차원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3) 기도는 하나님께 내맡기는 시간

끝으로 기도 시간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맡기는 것입니다. '내맡김' 안에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사고방식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부잣집 자녀가 반드시 학문의 세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도 낮은 자가 받아들입니다. 무엇인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그 가능성이 점점 적어지는 것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처음 할 때는 "내가 무엇인가 얻었다"라는 생각이 없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무엇인가 성취했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 잡게 되어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잃게 됩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에 근거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얻으려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얻으려는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는 염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어떠한 물체도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뜨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갈 때 지켜야 하는 안전수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력이 높아서 일단 바닷물에 들어가 힘을 빼고 가만히 눕거나 엎드리면 저절로 몸이 뜨지만, 혹시라도 물에 빠질까봐 걱정하면서 몸에 힘을 주면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따라서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자신이나 또는 옆 사람의 눈에 몹시 짠 사해의 바닷물이 들어가 매우 쓰리고 아파서 오히려 위험해지기 때문에 수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아이가 어머니 품에 가만히 안기듯이 그저 바닷물에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사해에서는 사해 물에 자신을 맡기듯이, 우리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에서 행하는 것 역시 내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중에 이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면,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단지 기도에서 행하는 것은 내 생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내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하나님께 내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어떤 이상이나 목표를 두어서도 안 됩니다. 목표가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맡겨드리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정신적, 신체적인 기쁨이나 좋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쁨의 감정에 휩싸여 하는 것이 좋은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할 때는 어떤 생각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곤란함을 발견해도 포기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려는 생각도 없고, 성취에 대한 고정관념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내맡기는 것에 전념하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만 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입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을 억제하기보다 흘려보내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단순해집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의 마음은 바쁘고 복잡합니다. 우리가 단순하고 밝은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하면 그 행동은 강하고 직선적이지만. 복잡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우리 행동도 복잡해집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행동이 복잡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조정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나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복잡한 생각이 생기고 그 생각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얻게 되면 그냥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취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얻고자 노력할 때 우리의 기도 자세는 틀어집니다. 처음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체득되어 내면화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노력하다 보면 노력이 사라지고, 호흡하다보면 호흡도 사라지듯, 묵상에 집중하다 보면 묵상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내적 침묵이고 내적 평화입니다. 내적 침묵은 지나가는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않는 상태, 즉 이러한 것들이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리라는 기대 또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놓아두면 그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목표를 세우고 은총을 청하는 일도 처음에는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내 바람이나 목표가 사라져야' 하나님과 더욱 일치하게 됩니다.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을 성취하려는 것에서 성취하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기 자신까지 잊을 떼가 하나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실 때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때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대로 내맡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정화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각을 흘려보내어 생각을 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체험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생각(의식)의 정화

대상을 아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드나들게 하려면 기도를 통해서 생각을 정화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은 '생각(관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자신에 대한 의식에 매여 있는 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바깥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으려면 우리의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모든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절로 오십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며 기도에 잠길 것입니다. 성서를 묵상하면서 열정과 헌신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선행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흔히 하는 '묵상 기도'는 추리와 사고로 나타나는 기억, 이해, 의지라는 영혼의 세 가지 힘이 행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다 기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일부러 애써 하던 노력을 멈추어야만 할 때가옵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 둘 때가 오게 됩니다. 노력하더라도 꼭 얻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결실을 전혀 원하지 않고 초연해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성적 추론은 줄어지고 산만한 지적인 노력이 없어지면서 하나님과 함께 고요히 머무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때에는 머리로 생각하는 모든 추론과 사고와 노력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면 하나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추론과 생각으로 이해하고자 애쓰지 말고, 실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고통 속에서만 하나님과 하나 되는 부활이 찾아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지식과 개념과 사유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기도에서 얻는 위안이나 황홀경과 같은 일체의 모든 욕구나 욕망까지도 단호히 버린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대로 머물기 위해 내가 행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30)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10:19)는 태도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8) 하고 말한 마리아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맡김의 흐름 속으로 합류되어 가는 태도는 오랜 시련과 시행착오, 성공과 실패를 겪은 후에만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과 집착과 이기심을 떨쳐 버리려고 애쓸 때, 추론적 방법으로 대상을 분석하기 위해 그 대상을 향해 의식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을 관상하고 그 대상과 동일시할 때 가능한 태도입니다. 이것만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참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마음입니다. 기도를 통해 생각을 정화하여 이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이성과 사고, 주관과 객관적 판단에서 초월하게 되고, 모든 이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물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편견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10:20)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 경험(무의식)의 정화

무의식 속에는 억압된 기억. 과거의 추한 경험, 상처 그리고 공포와 고통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형성된 좋지 않은 무의식적인 것들을 정화함으로써 과거의 잘못된 경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 기도가 잠심상태로 이어지면서 깊어지게 되면, 보통 때는 무의식에 있어 자각하지 못하던 많은 상(), 곧 과거의 체험과 감정들이 마음의 표면인 의식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무의식에 가두어 놓았던 증오, 질투, 두려움, 노여움, 불안, 자기중심적 욕망 좌절, 투사 등이 의식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의식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의식의 지평을 확대하며 무의식의 요소를 의식에 통합시키는 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무의식의 상이 의식으로 끌어 올려지면 그것을 정화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릅니다. 일단 그 고통을 이겨내어 "감각이 정화되면 그 영혼은 혹독한 감옥 생활에서 벗어난 자와 같이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방되어도 "처음에는 평화와 기쁨을 주는가 싶다가 다음순간 두렵고 공포스러울 정도의 무미건조함을 또는 걷잡을 수 없는 내면의 사나운 폭동을 초래하다가 다시 평화를 안겨다" 줍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무의식을 올바로 이해하고 행동 습관의 질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행동 방향을 설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정신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도와주는 정화 기도는 무의식을 의식으로 떠올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갈등을 없애고, "우리를 단절하는 무의식의 장벽들을 허물도록 이끌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또 과거의 경험들을 정화함으로써 대상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사는 일과 죽는 일, 건강과 질병,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아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아픔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잊어버렸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계속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미래까지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정화시키지 않으면 왜곡된 나의 모습을 강화시키는 격이 됩니다. 그것은 '참나'가 아닙니다. 볼록거울이나 오목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왜곡된 모습은 어떤 때는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 상상력 그리고 자아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을 정화시켜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색안경을 끼면 다른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지만 색안경을 벗으면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색깔을 구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과거 경험이 정화되면 영혼의 기능이 자유롭고 순수해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결국 과거 경험의 정화로 우리의 마음은 오감에 끌리지 않게 됩니다. 사고활동이 정지된 밝고 고요한 마음에서 사물을 관찰하면 마음을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외부 지향적이고 대상을 향해 흐릅니다. 우리의 정신 활동은 욕심과 집착 때문에 대상을 찾아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물을 볼 때 그 바라봄이 외형적인 것에 끌리게 되면 진실은 왜곡됩니다.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영혼의 내적 눈이고, 그것이 눈의 진정한 기능입니다. 영혼의 외적 눈은 피조물을 향하고 있으며, 그 피조물의 외면적 형태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으로 눈을 돌려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과거의 경험들을 온전히 정화한다면, 마침내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며 진정한 내적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눈을 가질 때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내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참 나'를 인식하게 되고, 바로그때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과 과거의 경험이 정화되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즉 일을 하면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결과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됩니다. 생각과 과거의 경험이 정화되면 될수록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어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이러한 삶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이 기도 단계에 이른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빼앗길 수 있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로 결합하게 됩니다. 어떤 곳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니, 그 마음은 하나님과 일치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결국 자기 사랑, 자기 의지, 자기 이권에서 멀어질수록 생각과 과거의 경험은 정화되고, 이것이 온전히 정화될 때가 바로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때입니다.

 

 

 

 

 

 

 

 

 

 

 

 

 

 

 

 

 

 

3절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

 

매일 한 시간씩 하는 관상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그 필요성을 제시해 주는 실질적인 이유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는 좋은 지향을 가지고도 극복할 수 없는 습관적인 결점들과 약점들을(예를 들면, 조급한 비판, 화내기, 심한 말들, 적대감, 우울증에 빠지기)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결점들은 우리 자신과 이웃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침묵과 승복 중에 성실하게 하나님을 추구한다면, 이런 결점들의 영향력이점차로 약화되고, 결점들 자체도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지의 구름에서 말하는 대로 "관상에서는 영혼이 제아무리 성스러운 일에 열성인 사람일지라도 고백이후까지 반드시 남게 되는 죄의 뿌리와 근원을 제거하게 됩니다."(무지의 구름 28)

 

둘째, 관상기도는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을 크게 줄여 준다. 특히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대비하고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공동체 생활에서는 이런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런 관상기도의 실천이 진정한 공동체 생활의 건설을 위해서 아마 잦은 대화(물론 대화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화에서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침묵의 기도에서는 사랑과 평화의 추구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문제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할 때일지라도 우리는 충돌하는 일이 없이 잘 진행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셋째, 우리는 잠을 자고 깨어 있기, 일하고 쉬기,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기를 매일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치유'와 사랑의 움직임을 점검하기 위해서도 매일 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활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의 균형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넷째, 많은 목회자들과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처음 소명을 느꼈을 때와 수련소나 신학교에서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상적인 의무와 영신 수련이 지속적인 개인 기도를 밀쳐 버리고 말았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좀 더 철저한 개인 기도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반길 것이며, 이 철저한 개인 기도를 자신들의 소명과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끝으로, 이 관상기도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행한 다음, 이 관상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아주 개인적인 계약을 맺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 계약의 외적 표지는 매일 행하는 한 시간의 기도이다. 이 계약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계약은 우리가 세례 때에 한 약속의 완성된 열매이고, 주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새로운 계약의 성체성사에서 영원히 거행되고 쇄신된다.

 

 

  cp11제11장.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