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관상 생활

 

 

1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한 시간 동안의 침묵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는 삶으로 불린 것이라고 체험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삶을 약속하신 것으로 안다.

 

한 시간의 관상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삶을 약속하신대로 이 약속을 지켜 주시도록 준비하는 방법이다. 이런 은총을 위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 마음과 정신의 비폭력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기로 굳은 결심을 해야만 한다. 이 결심이야말로 이 관상기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고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를 움켜잡고 있는 악한 성향과 죄의 근원(교만, 질투, 분노, 폭식, 육욕, 태만, 탐욕 등)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그 중에서도 분노의 열기가 우리의 평화를 방해하는 주요 요소라고 말했다.

분노(원한, 의심, 반감, 쓰라림, 역정, 비장함)에 이끌리거나 굴복하면 기도할 때에 그 값을 치러야만 한다. 분노의 뿌리에는 세속적인 것과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애착과 욕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그분의 성령이 증거 해 주시고, 복음에 계시되고, 산상 설교에 선포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폭력과 증오와 악한 욕망과 비판이라고는 전혀 없는 예수님의 마음, 관대하며 연민으로 가득 차 있고, 주고 싶어 하고 나누고 싶어 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

우리는 폭력적인 것으로부터 비폭력적인 것과 평화로운 길로, 모든 종류의 거짓으로부터 참된 진실과 내적인 조화로, 자기주장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권리와 느낌으로, 자기 관용으로부터 마음과 정신의 순결에 대한 직감으로, 소유와 욕심으로부터 주기와 나눔으로 그리고 진지함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옮겨감으로써 우리의 지속적인 자기 봉헌과 순종(수사는 순명)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한 사랑, 성령 안의 기쁨, 마음속의 평화, 인내하는 태도, 모든 이에게 대한 친절, 지향의 선함, 모든 일을 진실하게 처리함, 내적이거나 외적인 행동의 부드러움, 마음과 정신의 자기 통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환영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예수님의 성령께로 열어 드리는 그 만큼 이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 만큼 우리는 지속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자유롭게 지켜 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박하고도 착실한 생활을 하고, 소설이나 책을 충동적으로 읽거나 텔레비전과 영화를 보는 등의 현실 도피적인 습관을 버려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자유롭게 지키면, 우리는 때때로 좋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거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관상기도는 정신에 과중한 부담을 주고 마음을 묶어 버리는 현실 도피적인 습관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키우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처음부터 그분이 약속해 주신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런 말로도 묘사할 수 없고, 어떤 책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다만 체험으로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당신이 내 마음을 찾아오실 때,

내 마음은 진리의 광채로 목욕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맛을 잃어버리고,

내 안에서는 사랑이 불타오릅니다.

 

당신을 맛본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굶주리고

당신을 마셔 본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목말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내가 받을 상이오니,

지금 벌써 나의 기쁨이 되어 주소서.

당신의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히 내 안에 거하소서. 아멘.

 

하나님께 대한 이런 매력과 열망을 키우고 강화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말씀묵상(Lectio Divina)'이다

이 묵상법은 영적 독서를 통한 묵상법의 일종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과 기도로 이끌어 주리라고 우리가 느끼는 성경의 구절들을 영성적으로 읽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의미를 깨우치며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께 다가가게 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비록 짧은 부분만 읽어도 말씀이 우리 정신과 마음을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열망으로 채워 준다.

 

이런 영적 독서는 우리를 관상으로 인도하면서 우리 정신이 경건한 묵상에 잠기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관상하고 싶은 열망으로 타고 있다면, 경건하고 지속적인 묵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거룩한 성경이 모든 것의 첫째가는 그리고 가장 순수한 원천이다. 또한 진실로 잠심하는 독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이제 이런 평온한 상태에서 영혼은 많은 빛을 받게 되고, 전에는 감추어져있던 의미들과 미세한 변화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감미로운 체험이 되는 실체로서 일종의 비추심과 같이 힘들이지 않고 명백해진다. 그러면 영혼은 이 빛을 주시는 현존이 바로 성령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 대한 더 높은 사랑의 지식이며, 그분의 성경에 대한 더 깊은 믿음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기도의 은사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로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성령을 제 안에 넘치도록 채워 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성령께서 저를 온전히 차지하시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제 안에서 다스리시고, 저를 통하여 다스리시게 해주십시오.‥‥"

 

첫째,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청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이 기도로 청하는 것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경건한 노래를 경솔하게 부르지 말 것이다. 말을 경솔하게 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도는 경솔하게 시작하지 말 것이다. 기도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기도를 시작하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필요로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 올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이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절대로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주께서 당신을 사용하실 것이며, 당신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아멘!

 

 

 

 

 

 

2절 관상과 활동

 

 

1. 관상에서 활동으로

 

사회적 관심 없이는 아무도 크리스찬이 될 수 없다. 누구든 하루라도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 자원이 있는데 왜 수백만이 굶주려야 하는가? 그것은 탐욕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바른 질문을 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세계관을 묻지 않는다는 고정 관념에서 나온 무의식적 탐욕 때문인 것이다. 정신 자아의 의식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대화와 조화, 협력과 용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자각한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에 비추어서 우리의 윤리적 원칙을 재조명하는 내적 자유를 가지고 우리 시대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억눌린 자들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은 정신 자아 기간 동안에 심어진 씨가 완전히 자라난 직관적 의식의 열매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평균적 의식 수준은 신화적 회원의 수준에서 성숙한 정신 자아 수준의 의식으로 아직 넘어가지 못한 상태이다. 관상의 여정은 그 성격 자체가 성령의 은사의 감동를 받아 온전한 인간적 방법으로 행동하도록 나아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은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함은 물론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바꾸도록 은총의 신성한 에너지를 준다. 용기의 은사는 정의에 대해 배고픔과 목마름이 생기게 한다. 이러한 성향이 우리의 퇴행적 경향의 끌어내림과 문화적 조건화의 지나친 영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인간 가족은 아직 기원전 3000년경에 일어난 부계적 문화에 머물러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현대의 세계적 문화에서 동등하게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문화의 진보 과정에서 어느 정도에 있는가에 따라서 차별이 더욱 심하다. 진복에 대하여 구조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신하는 것만이 중독성을 가진 사회의 특징인 착취에 대한 조직적인 투신을 상쇄할 수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의 가치가 이 지구의 누구에게나 도달하게 하려는 성령의 움직임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정신 자아의식에 맞추어진 구조를 통하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메시지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말로써는 아무 소용이 없는 실제적 관심의 실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크리스찬의 의식 속에 섬세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한 생활 방식, 내적 성덕, 권위에 대한 무조건의 순명 등 나사렛의 이상은 4세기 순교 시대의 종지부와 함께 크리스찬 거룩함의 기본적 모델이 되어 왔다. 전 인간 가족의 의식 수준이 정신 자아와 직관적 수준으로 옮겨 가면서 이러한 거룩함의 모델이 바뀌고 있다. 중요한 일에 있어서 단순한 순명만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적 상황, 전문적인 조언, 다른 사람들의 욕구, 은총의 내적 이끌림, 영적 지도, 시대의 징표 등 다른 요인들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개인적 책임을 지도록 정신 자아적 의식이 우리를 촉구한다. 전통에 대한 존경이 진실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책임감은 특히 관상적 차원과 복음의 사회적 적용 등과 같은 복음적 도전을 더 잘 알려지게 하고, 더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시작하라고 재촉한다.

 

2. 활동 안에서의 관상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다루어 온 자신의 고정관념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배고픔과 억압과 평화 등등의 세상 문제가 중대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내가 단지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할 수도 있다. "내가 더 많은 쾌락과 더 많은 안전과 같은 이기적인 욕구들에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그리고 내 인생을 컨트롤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영향을 받고 살면서, 내가 어떻게 평화와 정의 같은 일에 공헌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자. "내가 완전히 정화될 때를 기다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자비의 활동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 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 이 말씀에서 보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큰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한 잔의 물, 웃음,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우리는 유엔에 가서 연설하거나 정상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로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서든지(바로 이웃집에, 우리 가족 안에, 버스 안에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그들이 아주 먼 곳으로 가서 활동하기 전에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가르치라고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성공을 감당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여행에서 돌아와 기쁨에 차서 이렇게 외쳤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17). 그들은 예수가 등을 두드려 주리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예수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너희가 사랑하고, 그리고 내가 보내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달할 사명을 가졌다."

봉사하려는 노력에 실패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3. 일상생활의 영성

 

일차적인 영성수련은 일상생활 중에 자신의 투신(投身)에 충실하는 것이다. 고루한 반복, 실패, 어려움, 그리고 유혹들이 끝없이 일어나서 아무 진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을 통해서 여행시키신 것은 일상생활에서 하는 우리 영적 여정의 거울이 된다.

우리가 관상기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서 성경적 사막을 알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에 투신하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와 활동 안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초석이다. 우리 영혼의 토양은 딱딱한 지반 같아서 정서적 잡초를 뽑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은총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 해로운 물질을 배출시키는 자연적인 능력을 우리 육신에 재충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육체적, 정신적 쉼이 필요하다.

관상기도는 인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접근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 조건의 결과를 치유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 결과란 기본적으로 신성한 현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 병(신성한 현존의 결핍)을 앓고 있다. 만일 우리가 심각한 병세를 가지고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영적 여정을 출발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병세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한 채 완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버티어 주고,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아픔을 방어해주는 다른 방법들을 우리의 연약한 자아는 절망적으로 찾는다. 관상기도는 이 질병을 고쳐 주는 신성한 치료법이다.

이집트의 안토니오는 관상 생활에 네 가지 기본 요소를 구성하였다. 그것은 고독, 침묵, 단순성, 기도와 활동의 훈련이다. 관상생활이란 영적건강을 위한 이러한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수련을 지원하는 환경이다.

관상기도의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 조건의 정신적 독소를 치유한다. 관상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 속에 작용하게 하여 기도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얻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림

인간 조건의 질병은 앞서 보았듯이 거짓 자아이다. 그것이 충분히 좌절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욕구는 물론 자신의 참된 선함까지도 짓밟으면서 자신의 아픔을 덜고 또 얻고 싶은 것을 가지려 든다. 거짓 자아를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는 단지 증세가 아닌, 질병 자체를 치유한다. 정서프로그램은 행동이 반복하여 생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서 무너진다. 일상생활에서의 좋은 수련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주된 정서 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를 자주 혼란케 하는 정서를 알아내고 또 정서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사건이나 기억 등을 주의해 봄으로써 우리는 원인이 되는 프로그램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피하고 싶거나 무엇을 갖길 원하는 욕망을 고의적으로 떠나보내면, 이것은 우리가 습관적 정서 반응들을 파헤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련은 죽은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의 뿌리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이며, 그 뿌리란 바로 우리의 행동 동기를 뜻한다.

만일 흥분하는 어떤 정서가 일상 중에 반복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에 대해 분석하거나 반성하지 말고 그 정서가 무엇인지 알아내라. 그리고 그 정서를 일으킨 사건을 알아보라. 이러한 방법으로 좌절된 정서 프로그램을 추적해 낼 수 있다. 때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관계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라. "나는 통제하려는 욕망을 포기한다‥‥. 나는 인정과 애정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나는 안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물론 이러한 수련이 거짓 자아를 단번에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쉬지 않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것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의 반응, 판단,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 결과 어떤 정서가 일어나면 즉시 그것을 떠나보내려는 깊은 동기를 갖게 된다.

정서가 일어나서 거기에 따른 어떤 습관적인 비평이 동작하기 전에 그 정서를 떠나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비평이 시작되면 그것은 고통스런 정서를 강화시키고, 일단 정서의 주전자가 끓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이 식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고통스런 정서는 우리 몸에 화학 물질을 분비하게 하는데, 몇 시간이 걸려야만 간()이 이 화학 물질을 청소할 수 있다.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교정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의 정서가 가라앉은 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당장 해주어야 하는 긴급한 경우가 아니고는, 흥분된 상태는 상황을 교정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다. 이런 상태는 친구를 질타하거나 아동에게 소리쳐서 우리의 나쁜 습관을 강화할 뿐이다.

 

집단 충성을 초월하기

우리가 받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충성을 느끼거나 특별한 연관이 있는 문화적 조건화에 대하여 과잉 동일시하는 데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 또 다른 수련이다. 이러한 성향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내적 자유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더 많은 책임을 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보듯이, 정신 자아의식의 특징은 자신의 정서생활에 개인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며, 남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핑계대지 않는 것이며, 어렸을 적에 무조건 받아들인 부모와 또래 그룹의 가치들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능동적 기도 문장

일상생활에서 하는 또 다른 수련은, 우리가 주의 집중을 요하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여섯 내지 열두 음절(한국어로는 아홉 내지 열다섯 음절 정도) 정도의 능동적인 문장으로 기도하여 우리의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이것을 넣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거나 우리가 선택한 어떤 기도어 일 수 있다. 동방교회의 "예수기도"로 하는 특유한 영적 기도의 수련은 이 훈련의 한 표본이다. '순례자의 길'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예수기도"를 매일매일 긴 시간 되풀이하면 그것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혼자서 그 기도가 자연히 되풀이된다고 한다. 사막의 교부들은 시편의 구절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것들 중에 몇은 매일의 일과에 들어 있다. ", 하나님! 오시어 도와주소서! 주여, 빨리 오시어 구해 주소서" 혹은 '나의 도움은 주의 이름에 있노라" 등이다. 이 문장을 반복해서 함으로써 우리의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저장하려면 큰 결단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꼭 하려고 마음먹으면 시간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워한다든지, 접시를 닦는다든지, 차를 운전한다든지, 일하러 걸어간다든지, 버스나 전화를 기다리면서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별 생각하지 않으면서 보낸다.

일단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저장되면, 이 새로운 저장이 이전에 저장된 것을 지워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서 프로그램이 좌절될 때마다 아픈 정서는 그 사실을 즉시 저장하고 우리의 이전에 저장된 것에서 적절한 비평이 나온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잔혹하게 구는 거야‥‥! 나는 좋지 않아" 등등 우리 비평의 평균적인 길이와 비슷한 길이의 문장을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넣어 두면 이것은 먼저 저장된 것들을 지워서 흥분시키는 정서의 힘을 삭혀 준다. 이렇게 비평이 사라지면 정서적 소란이 쌓이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중립 지대가 형성되고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우리의 정서가 결정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이성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능동적 기도 문장의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어떤 여인이 시골길을 운전하고 있었는데 앞의 자전거를 탄 소년을 치지 않으려고 길 가운데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몹시 급한 남자가 운전하며 그녀를 추월하길 원하였다. 그는 자전거를 탄 소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왜 가운데로만 가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길 좀 비켜주세요!" 하는 뜻으로 계속 경적을 울려 댔다. 그 여자가 비켜 주지 않자 그에게 격분의 프로그램이 비평과 함께 일어났다. 패달을 있는 대로 밟고 그 여자 옆으로 확 지나가면서, 그는 창문을 내리고 그 여자에게 속된 욕을 퍼붓고 그 여자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그녀에게 분노와 부끄러움과 상한 기분과 슬픈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동시에 저장된 비평도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실까? 남자들은 모두 짐승이야!"

이 여인이 억제력을 잃게 될 즈음에 그녀에게 능동적 기도 문장이 떠올랐다. "일치를 이루며 함께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달고 기쁜가!" 그러자 새로운 생각은 낡은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의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은 중립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 비어 있는 공간 안으로 성령이 급히 들어와 말하였다. "그 자를 사랑하라!" 평화의 파도가 그녀의 전 존재로 흘러 들어왔다. 그녀의 마음은 사랑과 기쁨과 다른 모든 성령의 열매로 찼다. 그녀는 그 남자를 가슴속에서부터 용서하고 마치 장미 한 다발을 받은 기분으로 그 길을 계속 달려갔다.

이것은 관상기도의 효과가 일상생활에 가져오는 모든 여러 가지 방법들의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중립 지역 혹은 공간을 만들어 주어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 중립 지역은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모든 성령의 열매(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신다.

 

자기 수용

일상생활 중에서 하는 다른 수련은 자신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다. 어떠한 손실로 고통을 받거나, 우리의 행동이 아동을 손상시켰다고 느끼거나 아주 중요한 관계가 깨어진다는 경험을 하면 커다란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내가 이것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경험을 통해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말할 때이다. 자주 그렇듯이 우리가 그 손상을 고칠 만한 길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고 고통의 결과를 줄여 달라고 청해야 한다. 그러면 그 비극의 원인이었던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발생한 잘못을 옳게 만드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 자신 안에 변화를 가져오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보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장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그대로 감수할 필요가 있다. 죄의식, 외로움, 그 외로움과 함께 아마 지루함도 경험할 것이다. 만일 고통스런 정서를 감수해야 한다면 그 정서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들을 느끼고, "그래,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분노를 느낀다. 고통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끌어안는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여라. 그러면 우리의 정서를 가라앉힐 수 있다. 우리가 이 고통스런 정서를 끌어안을 때에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닥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끌어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총이 흘러나와 아픔을 줄여 주기 시작한다. 우리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나눌 친구가 필요할 것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약이나 정신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모든 종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급진적인 치유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그 이유는 거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서 나올 길을 제공하신다. 우리가 조용히 앉으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에서 나오려고 감정을 발산하면, 우리는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인간의 비참함 속에 악마는 살아 있다. 우리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관련된 사람들을 용서하면 그 즉시 악마는 손을 든다. 악마와 그의 영향은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용서하려 들지 않을 때에 존재하고 더 커진다.

 

내심을 보호하기

관상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로 가져오는 다른 수련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내심의 보호"이다. 이것은 어떤 정서적 혼란이든지 그것이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기 전에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복잡한 방법인데 그것은 전 인생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심의 보호는 지향에 의해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때에 오는 내적 평화의 감각에 그 기초를 둔다. 평화의 기초적인 감각이 혼란을 겪으면, 즉시 어떤 단순하고 적절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겠다는 지향을 재확인한다. 이렇게 뜻의 일치 속에 머물러 있겠다는 주의(注意)성은 비행기를 유도하는 전파와도 같다.

다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관상적 삶 안에 머물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이다.

첫째는 혼란한 사고들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하나님의 품에 던지거나 아니면 예수께 선물로 드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혼란스런 생각이 올라옴을 알아차리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즉 지금이 순간에 하고 있는 활동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혼란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면 책을 집어 들거나, 하려고 계획하였던 일로 돌아가, 흥분하게 하는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면서 내적 혼란을 일으키거나 혼란을 강화하게 만드는 비평의 시작을 피한다.

 

거룩한 독서

또 다른 수련은 '거룩한 독서' 로서 사색적인 수준과 자발적 기도의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매일 하는 '거룩한 독서'는 하나님 안에 쉬는 관상 수련으로 이끌어 주고 관상기도의 개념을 계속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교회의 교부들은 관상기도를 전통적으로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관상은 듣는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서 오는 자연적인 결과이다. 다른 형태의 영적 독서도 여정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고 또 여정을 지속하려는 동기에 공헌한다.

 

기도회에 참여

매주 하는 기도회나 기도단체는 어떤 형태의 관상기도를 수련하여 침묵을 한데 모아주고, 서로 간에 용기를 북돋아 준다. 이러한 단체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지 기도를 빼먹는 경우에 기도에 항구하도록 우리의 결단을 새롭게 해준다. 특히 침묵 속에서 기도를 나누면 믿음을 증가시킨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상태에 있든지 관계없이 복음의 관상적 차원에 대한 투신은 우리의 전 존재와 전 활동에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인 여정에 온전히 승복하는 것이 요구된다. 일상생활의 부분으로서 메우는 정도의 훈련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침투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관상으로 가는 여정의 길을 진지하게 시작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과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役事)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기도와 함께 이러한 수련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를 따르라"고 하신 초대에 전 인격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평신도나 목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관상에 투신하는 것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이다. 순교의 시대가 끝날 무렵에 안토니오에게 수도원 생활의 비전을 일깨워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신 성령께서, 이제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관상가가 되게 하고, 이기심의 제한된 세계를 초월하여 공동체에 봉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라고 부르신다.

 

 

 

 

 

3절 성령쇄신과 관상

 

 

성령쇄신의 영성과 관상기도와 신비생활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시작하시는 성령세례가 카리스마적인 경험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분명한 준비 없이도 이 은혜를 받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저 우연히 참가했다가 처음 모임에서 성령의 임재와 예수님의 임재에 부딪치면서, 많은 경우에 혼란과 당혹감을 겪는다. 이러한 경험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즉각적인 회심을 생각나게 한다. 성령세례는 이전에 예수님과 성령께 가졌던 관계에 극적인 변화를 분명히 가져왔다. 개개인의 회심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들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강한 인상(印象), 자신의 죄가 완전하게 용서받았다는 확신, 예수님이 옛날의 역사 속에 남아있는 추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진정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 덕을 실천하기가 더 쉬워졌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전례를 더욱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절실한 욕망,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싶은 열정 등이다. 이것들과 유사한 다른 징조들은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영성으로, 신비적인 은총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특별히 두드러진 성향에 이르는 데에 점진적으로 가는 길도 있다. 이러한 회개의 중요한 징조는, 그것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즉각적으로 왔든, 아니면 꾸준히 덕을 수련해서 왔든, 영성수련이 추구해야 할 목표에 대하여 심오한 직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라는 계기이다. 성령 안에서 세례가 영성 발전에서 진전된 상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오라는 부르심을 나타낸다. 만일 방언의 은사를 성령세례 때에 받는다면, 관상기도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이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 드린다는 것을 인식할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단순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를 드리는 것이 바로 관상기도의 시작이다.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하는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진전이다.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읽으며 묵상하는 것들은 자연히 내적인 침묵과 기도로 이끌어 간다. 기도 모임이나 개인도 이러한 진전을 경험한다. 어떤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투신한 후에 처음 경험하는 열정과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로 흘러 들어오는 처음의 열정이 점차 자리를 잡아 가면 기도와 헌신의 수련들이 차츰 메말라 가는 경향이 있다. 논리적 묵상이 어려워지고, 영적인 수련이 지루해지고,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나 기도 모임의 기도에 대해 안절부절한 마음이 눈에 띄게 된다. 이러한 징조들은 으레 감각의 어둔 밤으로 들어간다는 표시이며, 이것에 관하여 십자가의 요한은어둔 밤에서 고전적인 묘사를 했다.

영적 여정의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죄의 뿌리로부터의 정화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기도 모임의 회원들에게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도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렇게 마냥 건조한 시기를 경험할 때에는, 그들이 자신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는 데에 이러한 시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메마름의 기간은 무의식을 정화하는 여정의 부분이다. 이러한 정화가 없으면 우리가 회심했을 때에 처음 겪은 경험들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은 운명을 겪어야 한다. 이러한 메마름의 시기를 바라보는 다른 방법은 신비를 더욱 가깝게 나눈다는 것이다. 바울이 묘사한 그리스도의 비우심(2:5~10)이 그들 안에도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의 비유와 같다. 겸손이 자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께 대한 복종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자라면서 자아포기로 이끌어 준다.

영적인 발전에서 이와 같이 중대한 시기에는 방언과 예언과 치유 등과 같은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과 직임(고전 12: 8~30) 사이에 있는 구별을 명백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전 12:1~31, 신령한 것에 대하여) 바울에 따르면 은사들은 (방언의 은사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쓰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거룩하다거나 그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거룩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집착하면 은사들은 오히려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하나나 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화시키시겠다는 하나님 계획의 일부인 것이 분명하므로 여기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연해지고 자신들이 이러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자만을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인간적인 성향을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외적인 시험을 주신다. 예언자나 치유자나 전도자들은 반대에 부딪치면서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은사를 황홀하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신을 겸손하게 지키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변형은 믿음, 소망, 사랑의 힘 아래에서 일어난다. 성령의 선물은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하나님께서 보고 느끼고 분별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보고 느끼고 분별하고 사랑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의식적 생활과 활동의 원천이 된다. ''는 더 이상 동기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변형된 우리의 인간 속성 안에서 그리고 그 속성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신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주어진 성령 은사와 하나님 사랑의 풍부한 선물 사이의 구분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했다. 그러므로 성령기도를 하거나 은사를 행사하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 성장하도록 지향해야 한다. 성령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과의 일치로 부르시는 분명한 초대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영적 발전의 이차적인 표현들로 말미암아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가장 진실된 성령은사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분별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나 공동체의 대표 혹은 각급 지도자들은 이러한 은사들이 은혜에서 왔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무의식의 자연적인 에너지에서 나왔는가를 분별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선한 이익을 위하여 이러한 분별에 기쁘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사를 행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이를 파괴할 수도 있을 것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적인 발전의 수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성령은사 외에, 소위 '신비현상' 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투시, 말씀을 듣는 것, 환시, 부양, 황홀경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존재론적인 무의식 상태에서 하나님과 접촉하면서 영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부차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이것들은 내적 변형의 은총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비적' 현상이 비상하고 때때로 남의 눈에 띄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그 사람들을 미성숙한 신비가로 만들 위험이 있다. 영적 성장에 앞선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현상에서 어떤 자기만족을 갖기를 피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성령쇄신도 영적인 길에서 무엇이 필수적이며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를 구분하기 위하여, 관상기도의 지식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철저히 자격을 갖춘 영적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 영적 지도자들은 누가 내적 침묵과 고독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는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며, 고독에서 나와 어느 특정한 활동이나 봉사를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때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내적 침묵으로 기도하라는 이끄심에 따르도록 격려해 주어야 하는데, 비록 이것이 어느 기간 동안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않음을 뜻하는 경우라도 말이다. 자신의 삶의 의무 때문에 기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관상기도를 수련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특히 더 필요한 것이다. 기도회원의 기도가 성장하고 있는 모임에서는 기도 중에 침묵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간에 복음의 관상적 차원이 발달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투신하는데 긴요한 부분이다.

 

현대 교회의 영성의 쇄신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헌의 하나는 성경에 대한 열성이다. 성경 읽기는 쇄신과 관상기도의 고대 전통사이에 다리를 놓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교 관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깊은 주의의 수준에서 경청하는 것이 관상기도의 전통적인 수련 방법이다. 거룩한 독서의 고전적인 수련에서, 주의 깊고 유순한 태도로 성경을 읽으면 거룩한 말씀에 깊이 침투하도록 만들고, 믿는 이의 가슴을 움직여 자발적인 기도로 응답할 수 있게 만든다. 정기적인 수련을 통해 적극적인 자세(주의, attention)에서 수용적인 자세(지향, intention)로 기도의 자세가 변해 가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색의 흐름과 특정한 헌신과 같은 행위들을 하나님 안에서 쉬는 하나의 단순한 행위로 대치해 주시는 경향이 있다. 거룩한 독서에서 하나님 안에서 쉼으로 옮겨 가는 움직임은 깊은 기도생활의 역동의 하나이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성령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경으로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더 깊게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말씀이 자신 안에도 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과 내적인 말씀 사이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확인해 주고 강화시켜 준다. 내적 말씀은 고요 속에서 사랑의 지시를 받아 말씀하신다. 복음 선포나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외적으로 표현된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침묵에서 울려와 나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 현존하는 그 말씀과 같은 말씀이며, 그 존재 안에서 그분은 성경이 가르키고자 하는 거룩한 신비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현존에 잠기라는 이끄심에 따라 사고를 넘어서 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초연해지는 것인데,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은 이해할 수도 없고 무한하시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40:18)

십자가의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지나치게 관념에 의존하면 인간적인 투사(投射)에 빠질 것이며,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단죄를 하셨던 우상을 만들기와 같은 잘못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떠한 개념에 대한 집착에서 정화된 믿음, 그리고 가장 영적인 위안이라 하더라도 그 위안에 대한 집착에서 정화된 사랑만이 하나님을 신적인 일치의 즉시성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신적인 일치로 가는 데 가장 좋은 수련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떠나가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으로 증명하는 순수한 믿음, 순수한 신뢰, 순수한 사랑의 훈련이다. 이것은 바울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전 사람'을 떠나보내고 '새 사람'을 건설하는 일이다.

 

관상적 삶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뿐 아니라 현존 밖에서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루어지는 변형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우리의 존재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cp12제12장.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