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거룩한 독서

 

 

1절 거룩한(Lectio divina) 독서의 과정

 

거룩한 독서는 수도원의 환경에서 발전된 관상기도의 방법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성경을 경청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특히 수도원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성경적 환경이다. 이것이 또한 공동체의 성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도원은 수도자가 언제나 성경적 환경에 몰입하는 장소이며, 하루 동안 시간에 따라 성경을 읽고 고독과 침묵을 지키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성례 때와 개인적인 독서 때에 성경을 경청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어떤 힘과 같은 것이 있어서 수도자를 점차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의 믿음으로 움직여나가게 하는 것 같다.

중세기의 수도승들은 이러한 다른 수준들을 '성경의 네 가지 의미'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경의 의미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적수준에서 어떤 특정한 내용을 논의하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구절을 네 가지 다른 수준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이 신비로운 역동을 내포하고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깊은 수준에서 이해하도록 경청하는 사람을 이끌어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것에는 자의적(字意的, literal), 도덕적(moral), 유의적(喩意的, allegorical). 일치적(unitive, 때로는 anagogical) 의미들이다. 현대 주석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자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말씀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하여 말씀의 문헌적 의미와 문화적 배경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성경 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는가를 찾아내는 데 아주 가치가 있다. 그러나 거룩한 독서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다. 수도승들은 거룩한 독서를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통찰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성경 필사본은 그 수가 적었다. 수도승들은 성경 중 하나의 책, 예를 들면 이사야나 어느 복음서를 일년 동안 읽곤 했다. 그들은 시편을 암기하여 언제나 성경들을 여러 장을 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거룩한 독서를 할 때면 그것은 좀 특수한 경우였다. 그들이 성경을 읽다가(사실은 암송하다가) 어느 구절이 마음에 와 닿으면 읽기를 중단하고 그 내용을 묵상하고는 그 내용에 대하여 좋은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논리적 묵상에서부터 정감적 기도 혹은 의지의 열망으로 넘어가서는 그 열망을 계속해서 수없이 반복하고, 마침내는 하나님 안에 쉼을 체험을 했다. 이것이 거룩한 독서 모든 과정의 목표였다. 어떤 수도승은 단지 하나나 두 단어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렀다. 전 수도원의 환경은 성경 속에 온전히 파묻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관상으로 옮겨 가는 것이 권장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고 있다면 평정의 상태로 다시 자극을 받기 위해서나, 아니면 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그들의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생활 구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 속에 여하간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거룩한 독서는 단지 정신적인, 그리고 순수한 영적인 활동만은 아니었다. 중세기의 수도승들은 말씀들을 중얼거림으로써 그들의 신체도 대화에 참여했다. 그들은 또한 말씀을 아주 천천히 읽음으로써 때로는 전 과정이 두어 시간 걸리기도 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거룩한 독서에 대하여 아주 무감각해졌는데 그 이유는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것, 그리고 속독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치 읽어 치워야 할 하나의 책을 읽듯이 하는 경향이 있다. 거룩한 독서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내용을 음미해 가면서 여유 있게 하나님의 계시에 잠기는 것이다.

이 독서 과정의 아주 기막히게 훌륭한 점은 기도 기간 중에 예수님과 한 수준의 관계에서 다음 수준의 단계로 옮아갈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데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응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로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성경의 네 가지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역동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다. 그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의 동상처럼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이다.

 

이러한 역사(役事)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첫 번째 성경의 자의적 의미는 역사적 메시지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표본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독서로 복음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실천에 옳기고 복음으로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도덕적 의미에 도달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문헌 연구가 매우 가치 있기는 하지만, 말씀의 문헌적인 의미에 대하여 읽고 사색하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온전하게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도덕적인 의미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 새로운 현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말씀을 읽어 가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친구들을 새로운 수준의 믿음으로 이끌어 가는 성경 속의 사건들을 우리 안에 내면화하면서, 우리는 성경의 도덕적인 의미를 넘어서 유의적인 의미로 움직여 간다. 그것은 서서히 복음이 우리에 관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솟아오르고, 페이지마다 우리의 삶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은총에 의해, 지금 성령의 신비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하나님의 체험은 그 당시에 예수님과 접촉을 가지고 그분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비추어 보는 의미는 신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의 개인적인 영적 여정을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의 어떤 사건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주는데, 노아의 홍수, 홍해를 건너감, 요르단 강을 건너감 등과 같은 고전적 성경의 사건들이 성사(聖事: sacrament)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성사들과 만난다. 구원의 역사는 지금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는 은총과 같다. 유의적 수준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지금 성례 중에 독서를 통하여 듣고 있으며, 거룩한 독서로 그 맛을 보며,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알아보게 된다. 그것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같은 은총이 작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체험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성경을 경청하게 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역사적 문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적 여정의 체험에 관한 것이 된다.

성경의 네 번째 수준은 일치적(anagogical) 수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깊이 잠길 때에 나타나며, 이때에는 계시가 계속되는 것처럼 당신에게서부터 그 말씀이 나온다. 당신은 그 말씀에 동화되었고 말씀은 당신에게 동화된 것이다.

 

성경의 유의적 의미에 대하여 다른 한 가지 측면을 말하고 지나가야 하겠다. 이것은 바로 무의식을 덜어 내는 과정 혹은 정화의 과정이다. 정화는 우리 인격의 어둔 면을 직면할 때에 일어나는데 이것은 성경의 내용과 자신을 생생하게 동일시하는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정직함이 발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적 사막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성경적 사막은 어떠한 장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지나간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성경상의 사건들이 외적으로 상징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적으로 경험하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의 유의적인 수준의 의미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폐물들을 덜어 내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 폐물들이란 우리가 잉태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끼친 정서적 손상들을 말한다. 우리가 일단 관상기도의 도움을 받아 일상적인 심리적 인식 수준의 껍질이 깨어지고 나면, 우리는 정서적 쓰레기들을 비우는 자발적인 과정을 지나면서 이것을 견뎌 내야 한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고, 지나친 요구와 숨겨진 동기들을 가지고 있는 거짓 자아 대신 참 자아가 우리의 행동 동기가 되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비워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하나님께 투신한다고 하면서도, 유의적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무의식의 치유가 정말로 일어나지 못한다. 관상기도는 우리의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촉진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프로그램과 계획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훈련을 통하지 않고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금욕주의는 금욕 수련에만 열중할 때에 자신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오히려 키워 주고 그 병적인 요소를 더해 갈 뿐이다. 진정한 금욕 수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오는 동기에 대하여 어떤 처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경청의 과정을 깊어지게 하며 이것은 두 가지 경험으로 일어난다. 그 하나는 우리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는데, 이것은 마음의 평화와 영적인 위로에서 오는 것으로서 우리의 전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게 만든다. 깊은 기도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향상시켜 주어 우리가 어떠한 것도 인정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정한다고 하여 우리가 파멸에 이르게까지 되지는 않게 한다. 그러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심리적 방어 기제를 계속 가지고 있게 된다. 반면에 자신의 어두운 면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제거된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서 치워 버리신다. 관상기도의 과정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풀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의 육체가 배설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심령도 배설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관상기도로 깊이 쉬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새로운 수준의 믿음으로 옮겨 갈 때마다, 처음에는 분열과 비탄과 혼동과 암흑을 경험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현재 수준의 태도에서, 우리의 삶이 그 수준에서 더 이상 잘 작용하지 않는다고 경험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이때에 우리는 사실 더욱 깊은 수준으로 가도록 도전과 압력을 받은 것이다. 과도적인 단계에서는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위치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특히 여정의 초기 단계에 있을 때에는 무지의 세계로 옮겨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좋다. 우리는 창조적인 변화의 순간이 왔을 때에 저항하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옮겨 가게 만드는가? 그것이 의문이다. 거룩한 독서의 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그저 성경을 계속해서 읽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경청을 하다 보면 신뢰가 자라고 어떤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자라난다. 성경을 쓰게 만드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그 말씀은 결국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 말씀은 가장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가장 내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여 우리 안에 머물러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성경의 일치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 외적으로 경청한 말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내적인 것을 확인시켜 준다.

거룩한 독서의 이러한 역사(役事) 안에서 관상기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수도원에서 하는 고전적인 거룩한 독서의 수련 -말씀에 대한 논리적 묵상에서 정감적 응답으로 그리고 관상 안에 쉼으로 옮겨 가는- 에서는 거룩한 독서의 한 기간 중에 일어나는 움직임은, 성경의 네 가지 의미를 통하여 가는 더 큰 움직임 안에서 신비로운 '구동축(驅動軸)' 역할을 하면서, 특히 유의적 수준과 일치적 수준으로 향하여 가게 해준다. 이 유의적 수준과 일치적 수준에서 무의식의 정화와 일치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거룩한 독서가 정상적으로 진전할 때에는, 여러 가지 기도의 단계를, 그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영적인 여정에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생각조차하지 않으면서 지나간다. 이러한 단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종교 개혁 때에 '정신기도'라는 말이 생겨나면서 기도의 전통에 끼어들게 되었는데 '정신기도'라는 말은 16세기 이전의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영적인 움직임에 대하여 다루는 역사적 과정에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범주화하는 경향에 묶여 버렸다. 학구적 풍토가 조성되고 있던 중세 후기의 특징인 분석하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영적 여정의 자발성이 상실되었고, 더구나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부분인 하나님 안에 쉼-그것이야말로 모든 이전의 단계를 거치는 목적이었는데도-은 아주 빼어 버렸다. 그들은 몇 년이고 영적 독서를 하고 논리적 묵상을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아주 오래 살았거나 임종을 앞두고서야 관상의 체험을 했으면 하고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그렇게 희망하도록 기대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준비하는 행동조차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관상은 봉쇄 수도원 같은 곳에서나 하는 하나의 기도의 형태로 더욱더 간주되었는데 실상은 그곳에서도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거룩한 독서와 관상을 이어 주는 중요한 결속은 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결속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수련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전에는 하나로서 성장해 왔고 구조적으로 서로를 풍요롭게 해주어 왔다. 거룩한 독서가 관상으로 옮겨 가서 하나님 안에 쉼을 경험을 하면,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올라오면서 치유가 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우리 존재의 더욱 깊은 수준에서 복음을 경청하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2절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단계

 

전통적인 거룩한 독서에는 읽기(Lectio), 묵상(Medita- 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가지 단계가 있다.

 

1. 읽기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

 

거룩한 독서의 첫째 단계는 독서 혹은 읽기이다. 재료나 방법에 있어, 이것은 평범한 독서가 아니다. 그 재료는 "하나님 말씀" 또는 성경이며, 독서 방법은 좀 더 정확하게는 "들음"이나 "귀 기울임"으로, 영감 받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하시는 분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독서를 준비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내 인격 전체를 한 초점에 맞추기 시작한다. 몸에 관하여 동서양의 모든 기도 수련에서 공통되는 일관된 원리는 등을 똑바로 세우지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접거나 포개서, 마루나 방석에 앉든, 혹은 똑바로 의자에 앉든 간에, 그 기본 의도는 혈액순환이나 호흡을 방해하지 않고, 반면에 충분히 집중하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준비들은 나와 친밀하게 현존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깨닫도록 돕는 수단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성경말씀을 선택하는데, 짧은 성경 구절이 더 좋다. 그리고 '천천히' 읽으면서,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마음으로 듣는다. 이것은 이미 정신과 마음을 당신께로 열도록 나를 부르시는 그분께 대한 내 응답의 시작이다. 때때로 나를 사로잡는 성경구절은 이미 나의 가슴에 충격을 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최근에 성례에서 제시된 구절일 수도 있다. 또는 "주제별 성경구절"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내 목표는 말씀들을 인격화하고 현실화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들을' ,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을 받아들이고 단어 자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 너머를 듣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면 단순한 상투어에 불과한 구절에 사랑하는 사람은 무게를 싣듯이, 단어들을 살아있게 하는 성령은 그 단어들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 이상의 의미 그 자체이다. 똑같은 성경구절을 듣는 각 사람들이 저마다 완전히 고유한 자기 방식으로 듣는다.

성경 한 구절을 택하여 나의 의식 속에서 계속 되뇌이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사랑과 신뢰의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 흡족할 것이며, 특별히 이 때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 깨달음은 이 기도 시간의 참된 열매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구절을 끌어내어, 나에게 그 의미를 성찰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다음 단계인 묵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2. 묵상 : 말씀을 묵상함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언어'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한한 지성과 이해로는 그분의 완전함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인간의 삶을 가능한 한 가장 깊이까지 살고 체험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살과 피로 나에게 드러나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고 단지 역사 속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 세계에, 내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내가 알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드러난 계시이다. 또한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 선물은 이미 주어졌다. 그분은 참으로 나에게 말씀하신다.

 

주님과 각 사람의 기도 관계는 고유하다. 개인 은사들이 다양하다는 것이 하나의 근거이다. 상상력이 잘 발달되고 활성화된 사람들일 경우, 상상을 이용하면 그들의 묵상을 생생하게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관상(Contemplatio)"이라 부르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고전적 의미(주부적 관상)와는 다른 의미로 습득적 관상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복음서의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보고, 듣고, 주위 환경을 만지고, 냄새 맡는다고 상상한다.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들과 나를 동일시하거나, 내 자신이 거기에 머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냐시오식 관상기도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고려수도원과 저자는 추천하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공적 사상에 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상력은 정화되지 못한 우리의 비이성적인 내면세계에 대한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상상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이냐시오식으로 상상력이 활성화되거나 잘 발달되지 않은 대신 좀 더 직관적인 사람은 그 구절에서 진리나 내적 통찰을 음미함으로써 더욱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확고한 사랑이 심저를 깊이 꿰뚫을 때까지,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말씀을 천천히 거듭거듭 되풀이함으로써 예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내용을 깊이 내면화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된다.

 

기도 기본원리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라.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말라." 는 것이다. 참되고 진실할 때, 가장 단순한 말은 -혹은 너무 가슴이 벅차면 전혀 말이 없다- 날조되고 빌려온 최고로 과장된 웅변술보다 확실히 더 웅변적이다. 그리고 가장 명백한 것은, 그러나 분명하기에 아마도 쉽게 간과될 수 있지만, 성령께서 내게 기도를 가르치시도록 자주 '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묵상은 내적 움직임이고 우리 존재의 자발성과 실제성에 따라 그것의 모든 진정성이 좌우되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궁극적으로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성령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뿐이다. 성령은 어떠한 객관적인 방법에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다음 단계인 기도로 끌려 들어간다. 이전의 모든 것들은 준비 과정이며, 이 단계가 진정한 기도의 시작이다.

 

3. 기도 : 말씀이 마음을 건드림

 

우리는 묵상을 통해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묵상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친밀함,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풍요롭게 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되는지를 성찰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믿음과 신념의 본질적인 기초를 확립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묵상은 주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적 활동과 상상이므로, 만약 묵상이 지성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참된 기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표는, 비록 최고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관한' 사고나 개념, 혹은 지식이 아니라, 내 가장 깊은 곳, 참 자아 안에 신비스럽게 숨어계시는 그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라.

이 가장 깊은 중심은 관상의 영역인데 거기에 이르는 길은 우리 자신의 계획에 따라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지침"이나 "단계"를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할 때 마침내 마음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성인들의 인용구 중에서 ",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이다!" 라는 성 어거스틴의 말보다 더 널리 잘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자명한 진리처럼 인정받고 있으며, 또 우리의 표면의식 아래 가까이 있는 내적 갈망을 되울려준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방어기제와 가면을 벗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적나라한 궁핍과 피조물 상태로서 있을 때, 본래부터 있던 이 갈망은 기도 안에서 일깨워진다. 시간이 지나면 이 갈망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갈망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온다. 반면에, 기도(0ratio)는 우리 활동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길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그분께 열고, 성령의 처분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적극적인 노력이다.

우리는 묵상과 이 마음의 기도 사이에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지만, 마침내는 점차적으로 단순하게 된다.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들고, 마음은 단순하게 솟아나는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 차며, 이것은 친밀한 내적 대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주 가까운, 그러나 아직 너무 멀게" 느끼면서 우리 마음의 갈망이 자발적으로 그분을 소리쳐 부르거나, 혹은 마음의 불신과 무가치함을 깨닫고서 치유와 자비를 청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온갖 어리석은 약속을 다 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은밀해진다.

이 기도 중에 우리 마음은 그분께로 그리고 그분에 의해 열려지고, 그래서 그분의 빛이 들어올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가는 데 장애가 되는 우리의 환상 속에 우리를 남겨두지 않으신다. 빠르든 늦든 간에 그 환상들은 우리에게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곧 자율권, 자만심, 통제, 교만, 역할극, 관대함의 한계 등을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주장하는 거짓 자아가 그것이다. 이 목록들은 각 개인마다 제각기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은사와 은총의 삶을 저해하는 그 효과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여기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길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 시작한 "환상에서 깨어남"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지만, 이것은 그분 사랑의 더 큰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큰 사랑의 은총에 협력할 때, 우리는 거짓 자아의 지배에서 풀려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닮은꼴"인 참 자아에 우리의 중심을 둘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거나 요청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면,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진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분에게 완전하게 응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응답하는 우리의 지향과 노력이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지의 구름의 다음 구절은 위안과 용기를 준다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 가득한 눈으로 네가 누구이거나 또는 무엇을 했느냐를 보시지 않고, 네가 열망하는 상태를 보신다.

 

이 기도 단계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인내롭게 기다리며 마음을 평온하게 하기를 배울 때까지는, 결국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줄 터인데, 가끔씩 아주 간단한 성경구절 읽기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를 기도로 대치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Oratio)단계에서 점차적으로 우리는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하나님을 더 민감하고 더 직관적으로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제한된 지적 기능이라는 덜 밝은 빛을 성급하게 추구하여 그 깨달음이 가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실제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우리는 온전히 내어주고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갈망, 즉 사랑하는 이들의 일치하고자 하는 갈망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우리 매일의 삶은, 그 기도가 참되다면 우리의 기도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서 요청받은 것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매일의 관계 속에서도 그만큼 확장시켜야 한다. 이 일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진실해야 한다.

 

4. 관상 : 침묵으로 들어감, "말씀에 깊이 잠김"

 

관상은 이상한 신천지로, 그곳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모든 것들이 뒤집혀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언어인 침묵과, 새로운 존재방식인 '무엇을 함'이 아니라 단순히 '그냥 있음'을 배우고, 우리의 사고와 개념, 상상, 감각과 느낌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믿음을 위하여 버리게 되며,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의 부재가 하나님의 현존'이고' 우리의 일상 인식으로는 침묵이 그분의 언어'이다.' 이것은 무지로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매달리는 친숙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또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3:17). 은총이 우리에게 드러내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인정하기조차 두려운 존재에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쁨의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 자아를 아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자아는 환상이므로 이 여정에서 버려야만 한다. 거짓 자아는 하나님 현존 의식을 소유하고 잡으려고 애쓰지만 결코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움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야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직관적인 사랑으로만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알기' 원하는 것은 거짓 자아이다. 또한 자율권, 통제, 자기에게 의미의 중심을 두기라는, 실재처럼 가장한 환상을 옹호함으로써 거짓 실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자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연민어린 목적은 오로지 우리에게 실망과 슬픔을 줄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관상의 시초에서 체험하는 어두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그리고 간헐적으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관상기도에 관하여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또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라' 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자신 너머로, 예컨대 그분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이 신비스러운 여정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의 피상적인 자아 너머로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관상은 하나님께서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방해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사랑의 영으로 태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불은 대체로 처음부터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해가 부족한 영혼은 그 자신 안에 사랑을 위한 평화로운 자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반성이나 의지의 힘이라는 매개물을 사용하고 거기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다만 흘러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37:7).

 

점차적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가는 데 우리가 놓는 장애들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치우기에 충분할 만큼 사랑하는 것(혹은 그것들을 치우도록 허용하는 것),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 사랑에 승복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매일의 삶 안에서 병행되어야만 한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천천히, 반복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얻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자신을 내어주는 쪽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23)

 

그러므로 관상가가 되는 것은 봉쇄 수도자나 활동 수도자 같은 어느 특정한 생활양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덜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더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 안에서 성장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날마다 기도 중에 내적 고요와 침묵을 위한 실질적인 시간을 마련하고, 진실로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충실하게 머물러야 한다. 유연할 필요는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랑의 관계를 유연성의 원칙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연인들은 서로 혼자 있기 위한 시간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한다. 그런 시간 없이는 어떠한 깊은 관계도 가능하거나 지속할 수 없으며 성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인 하나님은 발견될 수도 있으나, 초월적인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충실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충실성과 항구함 안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한 분께 주의를 다하여 깨어 있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일", 우리가 빛 안에 있든 어두움 속에 있든지 간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신비가의 핵심 직관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 all)이 일치하고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의 은혜로운 효과로서, 현실을 보는 우리의 눈을 점차적으로 변형시킨다. 이 신비적 비전은 비밀스럽거나 '몽롱한' 꿈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우리 지구의 생존은, 하나의 사랑 곧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것이 일치하고 상호 연대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실현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 칼 라너의 심원한 진술이다.

 

 

 

 

 

3절 거룩한 영적 독서

 

 

1. 영적 독서에 대한 이해

 

기독교의 기도의 전통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들 중 하나는 Lectio divina라는 리틴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직역하면 "거룩한 독서"라는 뜻이다. 즉 성경을 우리의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기도의 전통은 하가다(hαggadah)라는 히브리 성경공부 방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내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 본문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 인들의 경건한 관습이었다. 유대인들은 성경구절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삶이 변화될 때까지 반복하여 그 구절을 읽고 암송하곤 했다. 말씀을 반복하여 읽는 것이 사람의 존재 전체, 특히 마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성경에 접근하는 기독교의 방식은 히브리 방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나름의 형태를 취한다.

이에 대해 설명해 보자. 거룩한 영적 독서에는 두 가지 전통적인 방법이 있다. 즉 수도원적 방법과 스콜라적 방법이 있다. 수도원적 방법의 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종일 혼자 기도하는 특별한 방법에 적용된다. 수도사들이 모여 공동체와 함께 성무일과에 따라 기도할 때에, 특별한 성경 구절이 수도사의 관심을 끌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는 종일 그 구절을 생각하고 반추한다. 그러다 보면 자발적으로 기도하거나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쉼을 얻기도 한다. 기도에는 여러 "순간들"(moments)이 있는데, 그것들이 일정한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유동적이다. 기도는 수용적인 방법으로 성령의 흐름을 따른다. 말씀이 수도사의 일부가 되어, 종일 활동할 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으로 수도원적 영적 독서에서의 다양한 움직임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기도의 네 순간(moments)이라 언급하겠다.

영적 독서의 또 다른 방법은 스콜라적인 방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12세기의 카르투지오회 수사인 귀고(Guigo)의 저술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 시대의 교회에서는 영적인 일에 대한 저술에서 다소 분석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귀고는 네 순간을 분석하여 순서를 부여하고, 수도원적 영적 독서의 각 순간에 진행되는 것들을 묘사했다. 그것은 다소 집중적인(concentrative) 방법이다. 솔직히 말해서, 귀고는 이 네 순간이 영적 독서를 구성하는 분리된 요소로 여기지 않았지만, 수세기가 지나면서 그것들은 분리된 요소로 간주되게 되었다. 스콜라적 영적 독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네 단계(steps)를 언급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영적 독서 방법은 동일한 목표를 갖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의 보다 깊고 심오한 만남을 목표로 한다. 성경을 읽을 때에, 수도원적 방법은 보다 수용적인데 비해, 스콜라적 방법은 보다 집중적이고, 전자는 다소 유동적이고 후자는 보다 계획적이다. 전자는 성령의 움직임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며, 후자는 실천의 단계에 집중한다. 두 가지 방법 모두가 복음의 관상적 차원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스콜라적인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의 다양한 순간과 단계를 학습할 수 있다. 그 관습은 개인기도 시간을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공동기도 때에 사용될 수 있다.

 

1) 스콜라적인 방법

기도의 단계들을 이해하고 나면 순간들을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독서는 성경을 읽는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네 단계의 훈련이다. 영적 독서의 전통은 실망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카르투지오회원인 귀고는 이 기도의 네 단계를 단순화하는 직관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통찰은 "실용적인" 방법을 좋아하는 이 시대에 큰 의미를 갖는다.

귀고는 그 수련을 야곱의 사다리처럼 세상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데 사용되는 수도사들의 사다리라고 불렀다. 그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고, 몇 단계를 건너 될 수도 있고, 우회할 수도 있고, 대체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네 개의 단계는 이 전통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독서는 정신을 이끌어 성경을 주의 깊게 보게 해준다.

묵상은 이성의 지도 아래 감추인 진리의 지식을 깊이 생 각하는 정신의 주의 깊은 활동이다.

기도는 병든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을 얻기 위해서 마음 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관상은 정신이 하나님 안에서 정지되어 영원한 달콤함을 맛보는 정신의 고양이다.

 

첫 단계는 독서이다. 그것은 우리를 이끌어 성경을 주의 깊게 경청하게 한다. 이것은 동방 교회에서 복음서를 낭독하기 전에 부르는 찬송을 상기시켜 준다 : "주의를 집중하라." 회중은 깊이 있고 집중하여 경청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두 번째 단계는 묵상이다. 이것은 정신의 세심한 활동으로서, 우리의 지성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추론적 묵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라고 불린다. 귀고는 기도란 병든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은 중보기도, 또는 감성기도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관상이다. 귀고는 관상이 란 "하나님 안에 정지되어 영원한 감미의 기쁨을 맛보는 정신의 고양"이라고 묘사한다.

관상에는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이 있다. 습득적 관상일 경우에는 우리가 주도하여 쉼을 얻는다. 주부적 관상의 경우에는 성령의 은사가 보다 깊은 쉼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 능력을 초월하는 쉼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의 쉼에 대해 말하려 한다.

스콜라적 독서는 귀고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귀고는 네 단계 모두에 충실해야 한다고 경고 한다 :

 

묵상이 없는 독서는 무미건조하다. 독서가 없는 묵상은 잘못된 것이다. 묵상이 없는 기도는 열의가 없다. 기도가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다. 헌신적인 기도는 관상에 이르지만, 기도가 없이 관상에 이르는 것은 기적이며 지극히 드문 일이다.

 

이 수련의 목적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네 단계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양육해 주려는 목적을 지닌 하나의 연속체이다.

전통적으로 영적 독서는 개인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분야에서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다. 집중기도 모임에서는 점차 영적 독서를 중시하여 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집중기도를 한 후에 영적 독서를 행하는 일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침묵할 때에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보다 개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단계를 마친 후, 또는 기도를 마친 후에 성경을 서너 번 읽고 간단하게 전체적인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 공동체 경험은 무척 귀중하다. 물론 그것은 전통적으로 제시되어온 것과 동일한 독서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의 발전된 형태로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독서라고 부른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독서가 장려되었고,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기도하려 했으며, 묵상은 주로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관상은 오해되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정상적인 기도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처럼 스콜라적인 영적 독서의 단계는, 독서, 묵상, 기도(반응), 그리고 관상(휴식)이다. 오랫동안 독서와 묵상이 강조되어 왔고, 최근에 와서야 기도와 관상이 일반인의 기도생활에 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

 

2) 수도원적 영적 독서

두 분야를 제외하고는 스콜라적 방법과 매우 흡사하다. 첫째, 그것은 하나의 기도 형태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경험되는 순간들로 간주된다. 일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하나의 단어나 구절을 취하여 이따금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것을 놓고 기도하거나, 그 말씀의 능력 안에 쉰다. 그것은 수용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서. 하루 종일 그 사람에게 작용한다. 두번째 차이점은 두번째 단계에 있다. 스콜라적 방법에서의 두 번째, 단계는 묵상(meditatio), 지력을 동원하여 하나의 단어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적 방법에서는 그것은 반추(ruminatio), 그 단어나 구절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지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포착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보다는 마음을 향하여 움직이게 함으로써 복음의 관상적 차원으로 보다 깊이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의 순간은 다른 순간들에게 양분은 공급한다. 우리는 성경본문을 펼쳐서 한 구절을 택하여 하룻동안 활동하면서 그 구절을 생각하고 그 구절을 놓고 기도한다. 그 성경구절이 우리 존재 속에 깊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종일 그 구절을 지니고 다니며, 그 구절과 함께 한다. 그것은 우리의 호흡처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기도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영적 독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2. 일상생활에서의 기도

 

수도원적 전통에 대해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네 단계의 영적 독서 훈련을 하면서, 우리는 결국 침묵으로 들어가며, 침묵의 에너지가 세상에서의 활동(operatio)으로 폭발한다. 일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수단에 의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를 의지한다.

처음에는 침묵이 있고, 침묵에서 독서가 나온다. 독서에서 경청이나 묵상이 나오며, 거기서 기도가 나온다. 우리는 기도에서 관상으로 이동한다. 그는 관상은 자연스럽게 활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순서가 규칙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기도 시간은 고립된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기도할 작정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기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와 같은 순환하는 순서와 훌륭하게 통합된다. 기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에너지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특징인 비조직적인 일과 통합될 수 있다.

 

3. 영적독서 전통으로의 복귀

 

기도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잃어버렸는가? 역사적으로 이 전통을 상실한 것은 네 가지 상황 때문이다. 첫째,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로 하여금 감성적인 차원과 관상적인 차원에서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태도는 이냐시오에 의해 강화된 것이 아니라, 이냐시오의 영성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느낀 공동체 내의 다른 권위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들은 감성적인 측면과 관상적인 측면을 가볍게 다루었다. 최근에 와서야 이냐시오의 영성훈련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행해졌다.

그 다음에 정적주의(Quietism)가 발생했다. 이 운동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이 운동에서는 마음만 옳은 장소에 있으면 다른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서 보살펴 준다는 뜻을 함축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경청과 묵상과 독서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면,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 후에 얀센주의(Jansenism)이 등장했다. 이 운동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 운동은 인간의 선함을 의심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학문, 올바른 생각, 금욕주의가 한층 더 강조되었다. 감정과 본능이 의심스러운 때에, 사람들이 어찌 지도자가 없이 관상의 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독서, 묵상, 그리고 결단을 강조했다. 이 무렵, 성인 숭배가 성행했고, 숫자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면, 영적 독서는 어떻게 되살아났는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카리스마 운동에서는 감성 기도를 크게 강조했다. 사람들은 기도 안에 마음, 느낌, 감정 등이 차지할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카리스마 운동은 교회의 경계를 초월하여 퍼져가면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자신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전통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상실했던 것, 감성기도, 기도(oratio)를 다시 발견했다.

이들 외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학자들은, 우리가 사다리 중에서 두 개의 가로장(감성적인 것과 관상적인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과 아빌라의 테레사의 글에 접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깔멜 수도회에서는 16세기에 종교재판을 통과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서들을 잘라내고 편집하고 수정해야 했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완전한 깔멜 수도회의 문서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편집되지 않는 원문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만에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말하고 의도했던 것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교회 교부들 및 우리 전통에 속한 위인들을 발견했다.

이제 우리는 관상기도는 소수의 특수한 수도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전통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보편교회의 전통은 관상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 문화 안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관상에 대한 갈망이 무척 강력했기 때문에, 수십 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와 영성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떠나 동방으로 가고 있었다. 교회는 한 번도 그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기도문은 배웠지만, 기도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교구 생활에서의 기도는 도덕적인 권면과 종교개혁 이후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들을 초월명상, 불교, 선 등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사람들에게로 몰려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전통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검증된 놀라운 명상 수행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구도자들에게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라킨, 메인, 페닝튼, 메닝거, 키팅 등이 관상에 대한 워크샵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 사방에서 여러 종파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힌두교와 불교 신자들과 대화하면서, 청중들의 절반이 로마 카톨릭 신자이고, 40퍼센트가 유대교 신자이고, 나머지 10퍼센트가 기타 종교의 신자임을 깨달았다.

가톨릭 전통과 유대교 전통은 신자들의 내면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갈망을 일으켜 놓았지만, 그러한 연합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관상의 경험을 원했다. 그리하여 이 주제에 대한 서적과 테이프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독서 안에서 구하십시오. 그러면 묵상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관상 안에서 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베네딕트 회 수도사 마르미온(Marmi- on)"우리는 마음이 감화를 받아 불이 붙을 때까지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읽는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meditatio), 읽고(lectio), 마음이 감화를 받아(oratio). 불이 붙는다(contemp- latio).

 

4. 집중기도의 역할

 

집중기도는 영적 독서(lectio)와는 구분되며, 기도의 부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동시에 훈련이다. 집중기도는 우리가 지나친 개념화, 지나친 활동, 지나친 자아 의존 등에서 이탈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관상의 은총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어준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지나친 염려,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활동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욕구,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태도 등을 버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시간을 가지고 영적 독서를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실 장소가 우리 안에 만들어진다. 영적 독서는 집중기도의 침묵 안에서 우리와 함께 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5. 실질적인 제안

 

영적 독서는 적절한 때에 개인적으로 행하는 사적인 기도 수행이다. 그것은 훈련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성령의 활동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룹에서 행할 의도로 고안된 스콜라적 / 수도원적 영적 독서의 본보기이다. 이것은 이 방법으로 성경을 알려는 갈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향한 성령의 새로운 운동이라고 생각된다.

스콜라적 방법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독서, 묵상, 반응,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쉼 등을 생각할 것이다. 수도적 방법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독서, 반추, 반응, , 하나님의 말씀이 됨 등을 생각할 것이다.

 

6. 공동 기도를 위한 스콜라적인 영적 독서 방법

 

1) 독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경청함)

*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당신의 관심을 사로잡 는 단어나 구절이 무엇인지 알아내라.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일 분 동안 침묵하면서 묵상하라.

* 만일 듣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들이 읽으면서 관심을 갖게 된 단어나 구절을 큰 소리로 발표하게 하라.

* 그 후에는, 들은 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하라.

 

2)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함)

*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나 고찰이 무엇인지 확인해보라.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일 분 동안 침묵하면서 깊이 생각하라.

* 만일 모든 사람들이 원한다면, 말씀을 들으면서 의식하게 된 생각을 소리 내어 발표하게 하라.

* 그 후, 들은 말이 내면에 깊이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 안 침묵하라.

 

3) 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 감성기도)

*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 주는 기도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지 의식하라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일 분 동안 침묵하면서 묵상하라

* 만일 모든 사람들이 원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말 씀 안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 주는 기도를 소리 내어 말하게 하라

* 그 후에, 들은 것이 내면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하라.

 

4) 관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쉼)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마음의 침묵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게 하라.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는 침묵이다.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3-4분 동안 침묵하라.

 

마무리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말씀의 은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말한 단어나 구절, 우리가 의식하게 된 생각, 마음에 떠오른 기도를 행동으로 옮겨, 당신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데 동의하고픈 참된 갈망을 상기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택사항

마무리 기도를 한 후에,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간단한 신앙의 나눔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그 후에, 들은 것을 내면에 깊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한다.

 

7. 공동기도를 위한 수도원적 영적독서방법

 

수도원적 방법은 체계적이지 못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이 방법을 시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은 후에는 오직 성령의 이끄심을 따른다.

 

예를 들어보자

* 말씀을 읽는 동안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의식하게 될 수도 있다. (독서)

* 또는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함 께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그것을 반복할 수도 있다. (반추)

*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 해주는 기도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의식할 수도 있 다. (반응)

*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고찰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함께 쉬면서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 안에 쉰다. ()

 

그 구절을 여러 번 천천히 읽어라.

한 번 읽은 후에는 130초 동안 침묵하라.

 

마무리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말씀의 은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말한 단어나 구절, 우리가 의식하게 된 생각, 마음에 떠오른 기도를 행동으로 옮겨, 당신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데 동의하고픈 참된 갈망을 상기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택사항

마무리 기도를 한 후에,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간단한 신앙의 나눔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그 후에, 들은 것을 내면에 깊이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한다.

 

8. 개인적인 영적 독서

 

1) 첫 번째로 성경 구절을 읽는다. (소리를 내어 읽는 것도 유익하다) 특히 마음이 끌리는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되풀이하여, 그것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게 만든다. 이 때 어떤 통찰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러한 통찰을 확대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음미하면서 한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반복하라.

2) 그 말씀을 즐기라. 그 말씀이 마음속에 올려 퍼지게 하라. 원할 때마다 계속 그 구절을 읽어, 암송하라.

3) 기도 시간 내내 고요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라.

4) 이 단어나 구절이나 구절을 계속 경청하면, 무의식적으로 기도가 솟아날 것이다. 그러면 기도를 하고, 다시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반복하라.

5) 당신이 그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씀의 거룩한 임재의 은사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 임재가 머물러있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쉬라.

 

주의사항

이 단계들은 각기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서로에게로 흘러들어간다. 한 구절이나 장을 읽는 일을 서둘러 마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는 것이다.

 

확대실천

휴식한 뒤에는 그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일상생활의 활동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것에 경청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그 안에서 쉬라.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게 하라.

 

 

 

 

 

 

 

 

 

 

4절 수도원 전통에 따른 거룩한 독서

 

 

고대 수도 전통과 동양의 정신에 근거해서 우리는 성경독서와 성경 묵상(반추기도) 수행을 아래 방법에 따라 시도해 볼 수 있다. 여기 제시되는 것은 하나의 가능한 수행 방법이므로 꼭 이것만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수행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연히 깨닫게 해 줄 것이다.

 

1. 개인 독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인간은 심신 상관적 존재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양의 사고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분리시켰으며, 그 결과 철학 · 종교 · 윤리 모든 면에서 수세기 동안 이원론이 지배해 왔다. 다행히 오늘날 서양에서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인식하여 동양의 심오한 정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양은 언제나 육체와 영혼의 가치를 모두 존중해 왔으며, 특별히 몸에 관심을 쏟았다. 몸과 더불어 모든 것이 시작된다. 명상도 눈과 폐와 복부와 척추의 작용을 가르치는 예술이다. 예컨대 힌두교의 요가나 선불교 등이 이에 속한다.

서양인들의 기도는 이지적이고 지성적인 경향이 짙다. 이것은 머리로 하는 기도일 뿐 영적 에너지가 발생하는 몸의 더 깊은 단계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니다. 서양은 이성과 추리, 논리를 강조하지만 동양은 직관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몸의 역할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 월리엄 존스턴 신부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가 말하듯 몸은 결코 묵상이나 기도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 깊고 근원적인 차원으로 인도한다. 그는 더 나아가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동양정신에 입각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세(調身)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시작하기 앞서 몸의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호흡이 깊지 못하고, 호흡이 깊지 못하면 마음 역시 고요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월리엄 존스턴은 자세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토마스 머튼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긴 시간을 기도하거나, 장소에 구애 받지 않으려면 좌선이 좋다. 어느 자세를 취하든 자신에게 가장편한 자세가 가장 좋다. 기도 자세는 어느 자세를 취하던 공통점은 자세를 취할 때 중요한 것은 척추를 곧게 세워 귀와 어깨가 수직이 되게 하고, 머리끝으로는 천장을 밀어 올리듯 하고, 턱은 안쪽으로 당기는 것이다. 턱이 들리면 자세에 힘이 빠지고 쉽게 졸음이 온다. 눈은 반쯤 살며시 감거나 뜨는 게 좋고 완전히 뜨거나 감지는 말아야 한다. 눈을 가볍게 뜰 때는 앞에 모셔진 십자가 등 적당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된다. 에바그리오 역시 기도할 때는 눈을 살며시 뜬 상태에서 아래를 보라고 권고했다. 필자는 경험상 눈을 살며시 감는 것을 권한다. 이때 양팔은 자유롭고 편하게 두되 팔 밑에는 계란을 하나 끼워 들 것처럼 가볍게 뗀다. 이렇게 자세가 잡히면 천천히 몸을 전후좌우로 움직여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지점을 찾아 몸의 중심을 잡는다. 그곳이 바로중심점이다. 이런 자세가 현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 척추를 곧추세우면, 내장의 압박이 그만큼 줄고 복 압력이 생겨 호흡이 편해지고 정신도 안정된다.

* 온몸의 긴장이 사라지면 마음이 집중되고 스스로 초연해지므로, 피로가 가시고 평온이 유지된다.

* 자세가 안정되면 마음도 따라 바르게 된다. 이때 혈액순환이 원 활해져 생기 충만해질 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찾는 즐거움 도 맛볼 수 있다.

 

바른 자세는 그래서 중요한데,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 때는 꼭 이런 자세가 아니어도 각자 편한 자세로 바르게 앉으면 된다. 그러므로 성경독서나 성경 묵상 때는 가급적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를 취하면 좋다. 위의 다양한 자세 가운데 각자 자기 신체에 맞는 자세를 골라 수행에 적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호흡(調息)

자세를 바르게 했으면, 이제 호흡을 고르게 할 차례다. 그래야 마음도 가지런해진다. 호흡과 마음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호흡이 고르지 못하면 마음도 흔들리고, 마음이 동요되면 호흡도 흩어진다. 그러므로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르게 하여 자율신경을 조절하면 감정의 움직임도 조절되고 마음의 안정도 가능해진다. 호흡에서 복식호흡 등을 강조하나 필자는 호흡에 대해 관심 갖지 말라고 말한다. 기도 시작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로 시작하면 자연적으로 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調心)

인간의 마음은 거대한 대양과 같다.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혼재해 있다. 이런 마음을 잘 다스려야 고요와 평화를 간직할 수 있다. 작은 감정의 파고에 쉼 없이 마음이 끌려 다니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황폐해져 깊은 내적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깊은 내적 생활이나 정신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예배나 묵상 중에 우리 마음은 온갖 걱정 · 근심 · 분노 · 미움으로 요동친다. 더욱이 현대인은 많은 생각과 걱정들로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자기 본래의 마음을 잃고 거짓마음에 휩싸여 있는 한, 존재의 중심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고요하고 순수한 마음을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교회의 많은 영성가들은 한결같이 이 마음의 심저(心底)에 깊이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거하시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교회사를 보면 마음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극단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래도 앞서 말한 중요성 때문에 동양의 전통이나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는 한결같이 마음의 고요를 강조한다.

지금까지 성경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한국인은 동양의 유산이 각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했으면 이제 깊은 호흡과 함께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타종교나 뉴에이지 운동과 렉시오 디비나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알지만 한계도 분명히 깨닫고 있기에 더욱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실 좌선, 요가, 단전호흡, 초월명상 등, 인간 잠재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많은 수행법들은, 자칫 인간 능력을 절대적으로 맹신한 나머지 신을 도외시하는 뉴에이지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 종교적 흐름은 건전한 신앙생활보다 환시 · 기적 · 예언 등의 기이한 현상을 중시하고 이에 집착하며,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들을 시도하는 초보자들은 되도록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실제로 그러한 수행을 깊이 하다 보면 신비 현상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부차적인 것에 관심 두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시작할 때 하나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자주 의식하고 오래 수행하다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늘 하나님께로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나님 현존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 최소한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라도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17:28). 그런데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니 유감스럽다.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시작할 때 조용히 앉아 몸과 마음을 다스린 후,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받아들임은 그래서 필요하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아무리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더라도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열매 맺게 해주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성령이시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분만이 거룩한 말씀의 의미를 계시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 삶을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영성생활이 빗나가지 않고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예수님도 공생활 시작 전, 사막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기에 사탄을 물리치실 수 있었다. 초기 수도자들 역시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갔지만, 그들을 인도했던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령만이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한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5:22~23)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어 당신의 심오한 말씀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 안에서 열매 맺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도움을 청할 때에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4) 성경 말씀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고 듣는다.

유의 할 점

* 빨리 읽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 전 존재로 읽는다. 손으로는(촉각) 성경을 들고 읽을 곳을 편다. 눈으로는(시각) 성경의 말씀을 보고, 입으로는 그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읽는다. 귀로는(청각) 그 말씀을 듣고, 기억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다.

* 가능하면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는다.

 

5) 성경 말씀 중에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무 른다.

유의 할 점

* 마음에 닿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표시해 둔다.

* 그 구절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6)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간다.

 

7)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끝마친다.

유의할 점

* 일어나기 전에 고요히 감사기도를 바친다.

* 일어나기 전에 마음에 닿았던 성경 구절들 중 하나를 택하여 기 억이나 쪽지에 간직한다.

* 일어나면서 그 구절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 선택한 성경 구절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되뇐다.

 

2. 공동 독서

 

1) ~ 3) 개인 독서와 같다. 개인독서를 다시 읽으면 된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4) 성경 말음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고 듣는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첫 번째 독제)

유의할 점

* 한 사람이 선택된 성경 구절을 천천히 소리 내어읽는다.

* 성경 구절의 선택은 모임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되도록이면 그날의 독서와 복음 중에서 골라 읽기를 권한다.

* 각자 잠시 침묵하면서 봉독된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되새겨 본다.

* 지도자는 서둘러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말고 적당한 침묵의 시 간을 가진 후에 다음 독서를 하도록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며 듣는다(두 번째 독서)

유의 할 점

* 다른 한 사람이 같은 성경 구절을 소리 내어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다.

* 잠시 침묵하면서 마음에 닿는 성경 구절을 택해 기억 속에 간직 한다.

* 지도자는 서두르지 말고, 반드시 적당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 에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세 번재 독서)

유의 할 점

* 셋째 사람이 똑같은 성경 구절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다.

* 각자는 침묵 중에 자신이 선택한 말씀을 믿음 · 소망 · 사랑 안에서 천천히 반추한다.

* 마찬가지로 지도자는 서두르지 말고, 반드시 적당한 침묵의 시 간을 가진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5) 나눔

유의 할 점

* 자기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성경 구절이나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서로 자유롭게 나눈다.

* 나눔은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지 않으면 조용히 다음 사람에게 차례를 넘긴다.

 

6)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끝마친다.

유의할 점

* 지도자는 공동체를 대표해서 자유롭게 감사 기도나 주님의 기도 를 바칠 수 있다.

* 각자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선택된 하나의 성경구절을 기 억 속에 간직한다.

* 공동 독서가 끝나면 선택된 그 성경 구절을 가지고 각자 일상으 로 되돌아간다.

* 일상에서 선택된 성경 구절을 끊임없이 되뇐다.

 

3. 반추기도

 

1) ~ 3) 개인 독서와 같음

4) 성경 말씀을 천천히 반추한다.

(1) 선택한 성경 구절을 떠올린다.

씹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반추기도에는 반드시 재료가 될 성경 구절이 필요하다. 이런 성경 구절은 성경 독서에서 선택하는데, 되도록 아침 시간에 그날 하루 동안 반추할 성경 구절을 선택하여 기억하거나 쪽지에 적어 간직한다. 그리고 그 구절을 종일 되씹을 양식으로 삼아 일할 때나 쉴 떼, 차를 기다리거나 걸어가면서, 가능한 한 자주 천천히 되뇌어 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히 어려울 경우도 있다. 업무를 급히 처리해야 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말씀을 평화로이 되뇐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녁에 묵상 시간을 따로 정해 놓고 집중적으로 성경 말씀을 반추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해 둔 성경 말씀을 떠올려야 한다. 평소에 성경 독서를 소홀히 했다면, 성경 묵상에 필요한 성경 구절을 떠올릴 수도 없다. 토출하기 위해서는 성경 독서 시간에 선택된 성구를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해야 한다.

 

(2) 성경 구절을 되씹는다.

이렇게 선택된 하나의 성경 구절을 천천히 호흡이나 심장에 맞추어 되씹는다. 단순히 되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 소망 · 사랑의 마음으로 성경 말씀이 머리에서 마음에로 각인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되뇐다. 이때 절대로 추리나 상상 혹은 공상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특히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그간 많은 묵상법들이 상상과 추리를 강조해 왔으며, 조던 오먼은 "추리 작용이 없으면 묵상이 아니다"기까지 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묵상에 도움 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성령의 움직임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너무 인위적인 추리나 상상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되풀이하다보면 어느덧 저절로 새로운 영감들이 떠오르게 되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묵상에서 인위적인 상상과 감정은 자칫 자기 충족감이나 자기만족이라는 헛된 길로 오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추기도에서 진정한 깨달음이나 열매를 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닌 성령이다. 반추기도는 성령을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

상상과 추리에 의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불완전한 것들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충고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기존의 묵상법들과는 달리, 반추기도는 상상과 추리 작용을 거부한다. 그냥 단순히 믿음 · 소망 ·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말씀을 천천히 되뇌는 수도자들의 전통적인 방법이 반추기도다. 여기에는 어떤 기교도 필요 없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부담 없이 시도해 볼 만한 독특한 성경 묵상 방법이다. 그 때문에 반추기도는 고요하고 단순하고 열렬하게 말씀을 되씹어 그 맛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3) 성경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다.

되씹은 음식물은 소화 계통을 통해 살과 피로 흡수된다. 반추기도에서도 되씹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요로운 맛과 함께 우리 마음에 흡수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은 이 영적 양식으로 살찌고, 분망함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말씀이 완전히 내 안에 녹아 들어가면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된다. 말씀과 나 사이에 거리도 없어져 말씀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말씀이 되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

우리의 영적 여정의 처음에는 말씀과 내가 분리된 단계에서 시작하지만, 어느덧 수행이 깊어지면 말씀과 내가 하나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면 말씀이 나이고, 내가 말씀인 경지에 다다른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한 변형일치의 단계다. 이를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몸과 피로 완전히 소화되어 나와 하나 되면 더 이상 말씀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던 상징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타볼 산의 예수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말씀과 완전히 하나가 된 영혼에게는 장소가 문제되지 않는다. 시장 한복판이든, 사막이든, 수도원 울타리 안이든 밖이든, 장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거기에 하나님 말씀과 하나 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성경을 가까이하고 되새기며, 마음 깊이 간직하여 참된 양식이 되도록 애써야겠다.

 

4)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칠 시간이 되면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지도자는 신호를 보낸다. 신호가 울리면 바로 일어서지 말고 고요한 분위기를 지속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이 시간 함께해 주시고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깨달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3~4분 정도 지난 후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주님을 찬미한다. 일어설 때 무슨 말씀을 되뇌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분명 반추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반추기도를 오래하면 성경 말씀의 표상적 의미를 넘어 깊은 영적의미를 꿰뚫어 알게 된다. 세상의 온전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경지에서이다.

 

 

  cp13제13장.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