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침묵기도

 

 

이 기도는 번역하는 작가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중심을 향한다 해서 향심기도, 중심으로 쏠려 들어간다 해서 구심기도라 하나 이는 불교에서 참된 마음을 찾아 참선(參禪)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적절치 않다. 단순하게 하는 기도라 해서 단순기도, 마음으로 한다 해서 마음의 기도, 침묵한다 해서 침묵기도, 일부에서는 관조기도라고 하나 관조는 자연이나 사물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하며, 이 용어를 하나님에 대하여는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불러지며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많은 이름들 중에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침묵기도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고 고전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기도들이 다 관상이 아니다. 다만 관상에 들어가는 혹은 관상으로 안내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관상기도라고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 문제로 관상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으나 관상(觀想)이라는 말 이상 더 적절한 말이 없다. 저자의 판단으로 가장 옳은 명칭은 관신기도(觀神祈禱) 혹은 관상에 이르는 기도가 옳다고 본다. 그러나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는 부담 혹은

표현이 길고 또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있으니 관상기도(觀想祈禱)라 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본 장에서는 관상으로 들어가는 사다리의 첫 층으로 보아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침묵기도라 하는 관상기도라고 말하고 싶다.

 

침묵기도는 14세기 무명의 작가가 쓴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요한 등과 같은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나온 하나의 기도 방법이다. 침묵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게 하여 듣고 받아들이는(受容的) 관상적 태도를 길러 준다. 이것은 전통에서 언제나 성령의 순수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온 것과 같은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너무나 바쁜 마음과 삶 때문에 오는 장벽을 줄여 줌으로써 관상을 준비하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침묵기도의 첫 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중요한 몇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할 일이 있다.

 

관상으로의 변형

관상으로의 변형, 또는 관상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움직이는 반면에, 일종의 어두움이나 ''이 덮쳐오고, 우리의 길이 불분명해질 때 겪는 우리의 '체험'은 이것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성과 상상이란 우리의 본능적 기능들을 '폐쇄' 시키고 만족과 열정의 정감적 느낌을 박탈함으로써, 그분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하여 뚜렷하게 사고하거나 추리할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열성과 느낌이 말라버린다. 광야가 시작된다. 이 위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계속 나가야 하는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위대하나 분간할 수 없는 약속의 출발점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유혹받지 않으려면, 현명한 지도를 받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밤에서 새로운 새벽으로 가는 이 여정을 이끌 정평 있는 스승은 십자가의 요한이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사랑의 산 불꽃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계속 다룬다. 그러므로 텔마 홀은 간략하게 요점을 정리하고 관련되는 주요사항들을 함께 제시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시한 세 개의 "표지"

어둔 밤과 무미건조함의 체험이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의 확실한 지표인지, 혹은 단지 우리의 방종과 싫증 같은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인지를 식별하는 세 가지 표지를 제시한다.

 

전처럼 추리적인 묵상을 할 수 없거나, 묵상에서 만족이나 위안을 얻지 못하는 현실. (주의: 할 수 있는 한 묵상을 계속하고 중지하지 말 것)

하나님께 관한 다른 상세한 점에 상상이나 감각을 집중하기가 싫어짐. 예를 들어, 더 이상 하나님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정신적 이미지나 개념에 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의 현존과 관련된 모든 감각적인 위안이 소멸된다. 엄청난 고통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가 퇴보하거나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이 따르며, 전혀 기도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혐오뿐이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미지근함'으로 받아 들여진다. 그러나, 어떤 해박한 영적 조언자에게는 명백한 것처럼, 바로 이 고통이 참된 관심을 무심코 드러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미지근하다면 그런 관심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의 확실한 표지가 결정적이다. 첫째와 두번째 표지는 침체되거나 소진된 경우, 단지 진지함이 부족한 경우에도 체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가지 표지가 함께 드러날 때, 십자가의 요한은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이 표지는 묵상을 할 수도 없고, 그 외의 어느 것에서도 만족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이해, 또는 지적인 활동, 기억과 의지 없이도,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사랑의 깨달음에서, 내적 평화와 고요와 쉼 안에 홀로 머물도록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사랑의 깨달음과 앎 속에서만 머물기를 좋아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그런 다음, 십자가의 요한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특유의 조언을 하는데,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일이 그릇되어 망가지는지를 주시하고, 우리의 노력은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계속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음에 더하여, 필연적으로 그는 목적지로부터 떠나갈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비록 우리가 "할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다소 잘못된 것 같아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 자신을 고요함 속에 머물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심, 노력, 그리고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열망 없이, 사랑스럽고 평화로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단순히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망들은 우리를 소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에게 은밀하게 교통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흩어놓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수용적인 수동"을 위하여 받아들이는 시간이며, 이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그렇게 보일지라도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다.

 

비록 우리가 활동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은총은 제 갈 길을 가고, 우리의 탁월한 지식이 없어도 성령의 일은 진행된다.

그리고 나서 성 요한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랑의 지식을 지니게 되는 초심자들이 '항상' 묵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명백히 밝힌다. 왜냐하면 이 변형은 즉각적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일반적으로 관상이 습관으로될 때까지 상당한 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 조금씩 조금씩, "놀랍고도 장엄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지닌 성스러운 고요와 평화가 신성한 사랑에 둘러싸여 우리 영혼에 불어넣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활동하지 않고 무심해지는 동안 이 관상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우리 손에 붙잡으려 할 때 사라져버리는 공기와 같다." 이 시간에 사람의 노력은 소용이 없을뿐더러, 내적 평화와 감각의 무미건조함을 통하여 영 안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일에 장애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세 가지 표지

전에 하던 묵상을 할 수 없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 흥미를 잃음. 대개 길을 잃어버렸다거나 퇴 보한다는 두려움이 따름. 감각이 무미건조함

(1, 2번과 함께 드러날 때 결정적임) 고독한 기도로 이끌림

주의를 기울이고, 전반적이면서 사랑 가득함, 그러나 모호함 : "수동적 으로 주의를 기울임"

 

해야 할 것

'받아들이기', 그리고 성령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내적 침묵으로 이끌림에 따르고 사랑에 찬 주의를 기울이면서 머물 기.

모든 활동을 버리고, 자기를 잊은 채, 하나님 사랑의 어두움 속으로 끌려가도록 내버려두기

묵상을 다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것, 내적 침묵이 습관으로 될 때 까지.

 

관상으로 변형되어 가는 영역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좋은 지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대로 따르기보다 그 이끄심을 반대할 수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망치밖에 모르고 그 연장으로(이성과 상상 등) 두드려대는 대장장이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그래서 그들이 알아챌 수 없는 성령의 움직임에 역행한다고 했다. "지도자들은 이 일에서 그들 자신이 주요 대리인, 안내인 영혼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된 안내자는 성령이라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

둘째, 관상(Contemplatio)으로 변형되어 가는 이 영역은 16세기경에 가르치기 시작하였던 기도의 영성에서 자라지 못한 "끊겨진 지점"이 되었다. 그 결과 관상은 정상적인 기도 밖으로 고립되었고, 오직 드물게 '선택된 영혼들' 만을 위한 범주로 따로 떼어졌다.

오늘날 그러한 외부 제도나 교회의 강요는 주된 요소가 아닌 반면에, 현대 서구 사회에 지배적인 사조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관상을 저지하고 배제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현실적인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 기술의 시대에서 실용적으로 머리를 써서 거둔 모든 업적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기 위해 종종 직관 기능의 발달을 희생시키는데, 그 기능이야말로 관상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이지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판단하고, 일반적으로 "책임을 맡으려는" 후천적인 고집 센 경향 때문에 관상의 자발적인 성장을 막거나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통제하려는 어떤 노력이라도 떠나보내길 요구하는 관상의 내적움직임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관상에는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요구된다. 그것이 실제적인 창조이고 응답인데도,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순전히 시간 낭비로 보인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도에서 관상으로 변형되어 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체험하고 필요로 할 것인지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1. 침묵기도의 첫 단계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크리스찬 생활을 하도록 권장하여 왔다. 이것은 평신도들도 봉쇄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생활화할 수 있는 어떤 구조적 삶을 각자가 찾을 창의력과 책임을 가지라는 것을 뜻한다. 봉쇄 생활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사는 수도자 수녀들에게도 결점들도 있고 허점들도 있다.

수도 생활이란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들을 갖고 있는 특수한 생활방식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모든 인간관계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아주 세밀해진다. 세속에서와 같은 시험은 없다고 하겠지만 그들이 부딪치는 시험은 더욱 굴욕적인 것들이다. 수도자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게 되며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알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므로 저자는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가야만 수도사이겠는가! 마음이 시장이면 거기도 시장바닥인 것을!" 분주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많은 성도들이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이 세상 시장 바닥에 있어도 마음이 수도원이면 거기가 수도원이고 그가 수도사 아니겠는가" 하며 마음의 수도원을 주창하여 재가 수도원 운동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일치(신적 일치)는 모든 기독교인의 목표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례를 행하며, 인간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삶의 방식만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침묵기도는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데에 일어나는 장애를 줄여준다. 이 신중하게 마련된 방법은 관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공한다. 침묵기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오르는 관상기도의 사다리에서 제일 첫 번째 다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침묵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직관력을 세련시켜 관상기도로 쉽게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침묵기도는 이렇게 가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매우 좋은 길이다." 방법으로 말하자면 침묵기도는 수도 영성의 하나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관상기도로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과 신경 조직에 어느 수준의 내적침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수련으로서의 침묵기도는 우리의 정신집중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의 흐름에서부터 빠져 나오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그 사고의 흐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 보다 더 깊은 자아의 부분이 있는 것이다. 침묵기도는 우리의 의식을 우리 존재의 영적 수준에 열도록 하는 것이다." 이 수준을 "우리의 기억, 상상, 감정, 내적 체험, 외부 사물의 인식 등과 같은 것이 떠 있는 큰 강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열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思考)가 우리 의식의 후면으로 물러나게 하여서 우리가 그 사고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의 의식이라는 강 위를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고, 그리고는 우리의 의식의 강 자체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데 있다.

이 방법에서는 우리의 내적 의식에 비춰지는 어떠한 지각(知覺)도 사고라고 본다. 정서, 영상, 기억, 계획, 외부에서 오는 소음, 평화스런 감정, 심지어 영적 교감까지도 '사고'라고 간주한다. 침묵기도의 방법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고, 심지어 아주 신앙심 깊은 사고라 할지라도 떠내려 보내는 것으로 되어져 있다.

이렇게 떠내려 보내기 위하여서는 비교적 편안한 자세를 가져서 자신의 몸에 대한 사고(思考)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혈액 순환을 방해하는 자세도 피해야 한다. 이래야 도중에 몸의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렇게 편하게 느낄 적절한 시간, 장소, 자세들을 선택하였으면 눈을 감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의향을 표시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여 그 단어를 상상의 수준에 도입한다. 이 단어를 입술로나 목소리로 나타내지 않는다. 편하게 느끼는 한두 음절이나 한 단어라야 한다. 당신이 기도 중에 무슨 사고가 의식 속에 들어왔을 때마다 그 단어를 가볍게 의식 속에 떠올린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 싶은 어떤 곳으로 가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당신의 지향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영적 성향이 이끌리는 그 무엇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의식을 갖도록 개발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침묵기도는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며, 그 결과를 결정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거룩한 단어는 일단 잘 습관화되면, 보통 떠오르는 일상적 사고들의 수를 줄이는 방법이 되며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사고들 중에서 관심을 끄는 사고들을 막아 주는 방법이 된다. 이것은 그 사고들과 직접 부딪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현존하시며 내 안에서 활동하시게 하는 당신의 지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당신 의지가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동의를 거듭하고 이것이 습관이 됨으로써, 당신은 불요불급한 사고의 흐름들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침묵기도를 매일 수련함으로써 당신 존재의 영적 차원에 대한 감수성이 개발되면서 일상 활동을 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과거에도 하나님은 현존하셨지만 이 현존을 감지할 적절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나 존재하였고 또 참여하도록 초대되어 왔던 실재의 더 충만한 수준으로 자신을 조율하는 방법이 관상기도이다. 이와 같은 확장된 의식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줄이기 위하여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 길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일상적 사고가 흐르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사고들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사고의 저변에 있는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하게 된다.

침묵기도에서 가장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수련은 인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인내란 무제한의 시간 동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며,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루함이나 절망으로 빠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것은 자정이 지나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마음가짐과 같다. 주인이 마침내 집에 돌아오면 그 종은 그 때에 집안일을 맡아서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당신이 만일 참고 기다린다면 하나님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2. 기도에서 의지와 지향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원으로부터 한 말씀을 하시며 이 말씀을 침묵 속에서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그 말씀을 듣는다."라고 했다. 이러한 말을 빌리면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치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침묵기도나 다른 전통적인 수련의 방법들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아주 순수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게 아주 단순하게 하시는 말씀을 더욱 잘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침묵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에 관상기도가 아니고 관상을 준비하는 기도이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침묵기도가 어느 때에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수련을 통하여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를 향하여 움직여 오신다는 것을 알뿐이다(그림 : 침묵기도의 역동 참조).

우리의 수련이 더욱 습관화되어 감에 따라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가 더욱 강해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떠맡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습관적으로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꼭 기도 중에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 중에 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침묵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면 우리의 내적 침묵의 능력이 향상되고 일상생활 중에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에 대하여 민감해지면서 우리를 정화와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이 수련 중에 우리의 활동이 한 몫을 하기는 하지만 아주 부드러운 활동이다. 우리의 활동이 아주 최소한으로 될 때에 우리의 도움(기도에 대한)이 시작되고, 우리의 활동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때에 도움이 끝난다. 침묵기도의 기본적인 수련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 -예를 들면, "아빠", "예수님", "평화" "주님" 혹은 이와 유사한 다른 단어들- 를 선택하는 것과 우리의 지향이 점점 흐려져 갈 때-사고가 가득할 때-에 선택한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침묵기도는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움직임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련 중에서 가장 수용적(소극적)인 방법일 것이다. '수용적'이란 말로 무엇을 뜻하려고 하는가? 다음 그림(관상을 준비시켜 주는 기도의 방법들)에서 보듯이, 다양한 수용적인 그리고 주의 집중적인 수련들을 눈금으로 나타낸 선상에서 침묵기도는 한 쪽 끝을 나타낸다.

 

침묵기도는 주의(注意, attention)를 집중하는 수련도 아니다. 주의를 연습하는 수련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志向, intention)의 훈련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 즉 우리의 선택의 기능을 계발하려는 것이다. 또 의지는 우리의 영적인 사랑이 하는 기능이며 기본적으로 의지는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하는 자아포기의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생명체에게 가지시는 것과 같은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갖겠다는 의향과 태도이다.

 

침묵기도는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도기간 중에(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기간 중에라도) 갖는 경험은 성령과 우리가 갖는 관계, 그리고 성령은 기본적으로 치유적이라는 특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우리가 환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성령의 의료적인 활동(고전적으로 이것을 정화적이라고 부른다)에 부딪히면 우리는 아마 대단히 놀랄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쉴 때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행복한 고요를 경험하는 대신에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강한 정서나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거친 움직임에 부딪치기도 한다. 우리의 신뢰가 자라면서 이러한 일들을 기도 과정의 일부로 보고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진료는 매우 고통스러울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의사가 우리의 고통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이 심각해서 그러한 심각한 치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지는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습관을 길러 준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기도 안에 성령의 영향도 증가한다. 위의 그림(침묵기도의 역동)을 보면 성령이 우리를 향하여 오는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침묵기도의 수련이 깊어 갈수록 상호 작용이 생겨서 때로는 우리의 부드러운 활동이 우세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령이 기도를 떠맡기도 한다.

성령이 기도를 떠맡는 기도의 경험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내면의 성에서 주입된 평정, 고도의 기도, 일치의 기도, 온전한 일치의 기도라고 부른 기도의 상태들에 대해 기술한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기능들이 침잠하는 수준이며 동시에 이 상태를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현존의 활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을 다소간에 인식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깊은 친밀의 수준에 들어갔을 때에는 단지 현존하심뿐일 수가 있는데, 너무 친밀한 상태에서는 사실상 우리의 여러 기능들은 그것들을 해석하거나 어떤 경험으로 나타내 보일 수도 없는 것이다.

 

고요의 기도라는 영적인 위안을 받았다거나 일치의 기도로 하나님 안에 완전히 잠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활동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너무나 병들어 있어서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로 우쭐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이 우리의 치유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깊은 치료 중에 치료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치유자와 전이(轉移: transference)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정서적 과정으로서 우리가 치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우리가 어릴 적에 있었던 권위적인 인물과 가졌던 관계를 그 치유자에게 전이하는 과정이다. 그러면 그 치유자는 우리가 아동기에 느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받아들임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가 있다. 이 받아들임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정서적 결함을 치유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서적 수준에서 온전히 받아 주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자아 동일시를 갖거나, 영적 여정에 중요한 자산으로서, 심리학자들이 부르는 튼튼한 자아를 갖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어린 시기부터 많은 상처를 지금까지 가지고 온 바로 이 자아를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결핍되어 왔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심지어 잘못 태어났다는 정서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대 우리 문화에 전염병처럼 번진 자기혐오라는 질병의 원천이다. 이 질병은 영적여정이 발달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치유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 여정은 우리 자신과 자아 동일시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자아 동일시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영적인 위안을 확인받거나 어느 기간 동안 평화와 새로워지는 기분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갖는 일종의 전이와 같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들이 자신들이 어릴 적부터 가져온 상처들 때문에 알게 모르게 우리를 거부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확인해 주신다. 우리가 만일 자아 혐오와 어렸을 적의 상처들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음 세대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다 자라기 전에 자신의 잘못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슬픈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여기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올바른 반응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루어 그것에서 나와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주 현실적인 과정이 영적여정에서 중요한 측면인 것이다. 진단적인 관점에서, 현대 심리학자들의 발견이 인간 조건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 조건은 병()적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의 기도에서 우세하게 되면 침묵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을 쓰는 일이 점점 덜 필요하게 되며 덜 중요하게 된다. 우리의 기억이나 상상의 수준에서 어떤 사고들이나 감정에 우리가 집착해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자유로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며, 이것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한다는 우리의 원래의 지향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더 적응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팔에 안겨 자신이 쉬고 있다는 영상이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눈빛 안에 머물고 있다는 영상을 쓰기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침묵기도 중에 이러한 상징에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징은 단지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려고 사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룩한 단어도 지향에 초점을 맞추려고 사용하는 것이지, 주의의 대상으로서나 주의집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은 카메라에서 초점을 조절하는 기구와 같은 것이다. 거룩한 단어가 가져다주는 초점 맞추기는 어느 얼굴이나, 물체나, 상징들을 상상 속의 초점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향이 흐려질 때에 이 지향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지향은 어떠한 관상기도 수련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침묵기도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유일한 활동은, 기도시간 중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동의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지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사고나 감정이나 인상에 이끌려서 일상적인 인식의 수준으로 다시 떠오르면 우리의 지향은 흐려진다. 이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고가 무의식에 있는 정서 프로그램 중의 어느 하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동기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비록 복음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아동기의 태도나 행동을 의식적으로는 거부했다 하더라도 정서적 프로그램은 아직도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자신이 속한 특정한 문화 속에 있는 안전의 상징에 정서적으로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릴적에 가졌던 불안감에서 오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면 그 결핍의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해 넣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정서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억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신체 속에 저장되어있다. 신체는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은 정서적 에너지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은 신체와 신경계통에 에너지가 건강하게 흐르는 것을 막아 버린다. 이것은 다시 그 아픔을 감추기 위하여 보상적 활동을 할 필요를 더 강하게 한다. 중독이란 자신이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 정서적 아픔에서 자신의 의식을 분산 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영적 여정은 인격 성장의 한 과정이며, 그리고 어른으로서 생활을 파멸시키거나 우리의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아동기의 정서 수준에 고착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정은 신성한 정신치료의 한 형태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보통 신체와 정서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수준에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강한 각각의 수준에는 우리의 기억 저장소에 미리 녹음된 끝없는 비평이 그것과 상응하게 저장되어 있다. 강한 정서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즉시 솟구치는 비평에 사로잡혀서 그 비평들은 평화와 고요와 초연함에서 더욱 멀어지고 그래서 관상을 요구하게 된다. 인식의 표면에 지나가는 사고들이 무의식에 있는 정서 프로그램을 자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동의가 점점 흐려질 때에,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기구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침묵기도의 용어상, 이러한 사고들을 강의 표면을 지나는 배로 비교한다.

조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가 아니다. 주의는 침묵기도에서 2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사고나 사물 혹은 만트라와 같은 기도에서 하는 것처럼 거룩한 단어에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는 일반적이며 하나님의 현존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침묵기도가 하는 실제의 일은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리적인 내용과 함께 현재의 순간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고나 감정이 비평과 함께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을 휘저어 일으키면, 우리가 그 '배에 오르기' 전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시간과 인내와 많은 실수를 통하여 우리는 사고들을 즉시 떠나보내는 습관을 기르게 되는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감으로써 한다. 만일 당신이 배에 오른 것을 알게 되거든 그저 단순히 내려라. 거기에 당신이 생각을 가졌다는 자책감이나, 한숨이나, 혹은 괴로운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어떠한 반성도 또 다른 사고, 즉 배인 것이다.

침묵기도는 그 자체가 아주 단순한 기도 -어린이의 특징인 단순성, 이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잊어버리고 지금 현재의 순간에 몰두하는 것과 같이- 이다. 어린이의 기분이 아주 쉽게 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눈물에서 웃음으로 바뀐다.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를 동의하는 것이 침묵기도에서 요구되는 활동의 전부이다. 어떠한 분석이나 비평이나, 죄악감이나 자책감은 원래의 사고보다 더욱 산만하게 하는 것이다. 원래의 사고는 아마도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이거나 하나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래의 사고는 감정이나 부끄러움이나 죄악감같이 정서를 동반하는 사고처럼 내적 침묵에서부터 당신을 끌어내 오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침묵기도에서 우리의 사고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습관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고들을 전부 피할 도리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관상에서 완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여정은 기도 중에 일어난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정화과정의 연속이 되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부침(浮沈, 물 위에 떠올랐다 물속에 잠겼다 함)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죽음, 있는 그대로 우리와 결속을 하신다. 완덕이란 우리가 온전하다고 느끼거나 완전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으면서도 하는 데 있다. 어떠한 점수도 바라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냥 행할 뿐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우리의 지향을 온전히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취약하며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때이고 원래의 지향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 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어떤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수련을 하면, 우리는 즉시 떠나보내는 것이 수월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는데 이 무지의 구름은 조그만 동의의 행동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발전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충분하게 정서적 프로그램을 무너뜨렸으므로, 그것들이 다시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민감해져서 우리의 원래의 지향에 즉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며, 때로는 거룩한 단어나 상징으로 돌아올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우리를 열어 드린다는 우리의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어떠한 움직임으로, 우리의 존재의 영적인 수준에 조금씩 다가간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지향성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선택해야 하는 단어도 없고 더 좋고 나쁜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떤 단어는 아이디어의 연상을 불러오고 다른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단어는 피하는 것이 좋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의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사랑으로 한다는 것의 특징은 수련에 충실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수련을 하는 동안 인내를 가지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침묵기도의 지침

1)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 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2)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간단한 기도를 드리고 침 묵하라.

3) 어떤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조용히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가라.

4)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 반 추하라. (기도 안에서 있었던 일)

5) 평소의 하던 기도(간구, 중보 등)를 하고 마쳐라.

 

3.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관상기도는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실재를 각성하는 하나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지만 공기는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있다. 그와 같은 모양으로 하나님의 현존은 언제나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우리주변에 계시며, 또 우리를 감싸 주고 계신다. 우리의 인식은 이러한 실재의 차원에 대하여서 불행하게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도와 성찬과 영적 수련의 목적은 우리가 이것을 각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 순간순간에 현존하시지만 우리는 세상을 보는 우리의 관점 때문에 우리 안에 커다란 장애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의 마음, 바로 그분의 말씀의 차원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우리 것으로 하려면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발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문을 여는 데에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들에는 우리의 무의식적 가치관들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사고들은 우리의 마음을 끈다.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어렸을 때에 형성된 정서적 프로그램에 이 사고와 관련하여 저장되었던 그 무엇이 의식 속으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들이 의식 속을 지나갈 때 거기에 심하게 정서적으로 연결된 가치관들이 자극하고 위협을 주기 때문에 우리 의식 속에서 신호등이 빤짝거리며 켜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사고와 사고 형태들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함으로써 우리의 정서적 속박과 강박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게 된다.

관상기도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휴식할 수 있고 영적 다툼을 하지 않을 위치에 우리를 놓아 주신다. 성령께서는 은밀한 도유(塗油 : 기름 발라 주심)를 통하여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심적 수준에서, 우리 인간의 연약한 성질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그것은 마치 마취된 사람이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깨어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내적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게 하는 완전한 온상이다.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의 상징으로 겨자씨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엄청나게 크게 자랄 여지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 우리를 변형시킬 힘을 가지고 계신다. 관상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내적 변형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음절이나 두 음절의 단어의 거룩한 단어로 그들의 사고들을 떠나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였든지 관계없이 거룩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의 뜻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향이 거룩한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절대 신비이며 당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 속에 지나가는 어떤 사고에 당신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되돌아가야 하는 초점이 된다.

그 단어에 편한 느낌이 들면 그 단어에 머물러라.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단어로 옮기고 싶으면 옮겨도 좋다. 그러나 한 기도 시간 안에 이 단어 저 단어로 계속 옮겨 다니지 말라. 한 기도시간에는 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나 화살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고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당신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다른 시간에 다른 형태의 기도를 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침묵기도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림으로써 당신은 의미상으로는 과거의,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모든 창조를 끌어안는 것이다. 이로써 당신은 모든 실재(實在, reality)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를 비롯하여, 당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당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실재, 말하자면 당신 존재의 영적 수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당신의 원천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무한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았을 때에 우리 자신을 그 방향으로 밀고 갈 필요는 없다. 어려운 점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거짓자아가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그 거짓자아를 자극하고 강화시키는 세속적인 것들과도 동일시한다.

거룩한 단어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강의 표면에서 강 밑으로 우리의 의식을 옮겨 주는 방법이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하나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들고 있는 공을 그냥 놓아 주기만하면 그 공은 제 스스로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던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거룩한 단어는 공을 놓아 주듯 모든 생각을 그냥 떠나보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내적 침묵으로 이끌려 있는 영적 기능들이 자동적으로 그 방향으로 끌려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영적 움직임은 어떠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사를 떠나보내려는 뜻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향하고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진리로 향하도록 만들어진 만큼, 아무 것도 이것을 막지 않는다면 의지와 마음은 사랑과 진리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의지와 마음이 향하는 자유가 제한된 것은 이것들이 다른 방향으로 돌려졌기 때문이다. 침묵기도 중에 이러한 기능들이 자유를 도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는 여러 가지 사고들을 줄여서 하나님께 열어 드린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번잡한 상상을 침묵으로 옮겨 주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은총의 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곳, 즉 영적인 영역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조건이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바로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면 우리의 문제는 상당히 줄어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이 모든 실재의 부분이시라는 믿음을 갖는데 실패한다. 현재의 순간순간,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들, 우리 존재의 근저(根底)가 모두 그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는 개인적 체험을 갖게 될 때까지는 이것을 잘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진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서로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이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내적 체험을 갖고 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 모든 사건들, 그리고 모든 자연들 속에 계신 그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때에 우리는 어떠한 외적인 감각으로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체험을 갖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시각적 영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반드시 사고를 깨달았을 때 즉시 그 영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추천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호흡을 따라가는 것이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사고를 떠나보내는 방법이 있으나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권하고 싶지도 않다. 이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아의 존재의 근저와의 접촉을 더욱 깊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갖는 지향이 이 기도의 근본이다. 침묵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어떤 단어나 영상이나 혹은 호흡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자세나, 만트라나, 만다라 같은 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승복하도록 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인으로서 당신이 당신의 사고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지금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려는 동기를 가지고 해 보라. 이 기도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훈련이다.

 

4. 동의한다는 표시로서의 거룩한 단어

 

의식의 흐름은 바다로 흘러가는 강과 닮았다. 강의 표면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의식의 수준을 말한다. 감각적 지각, 감정, 형상, 기억, 성찰 그리고 비평들이 강위를 떠내려가는 배처럼 우리의 인식의 표면을 흘러간다. 이것이 평상 수준의 인식이다. 강 자체는 영적인 의식수준을 말한다.

이 비유에서 우리의 의식을 강에 비유하고, 사고들을 강의 표면에 지나가는 배로 견주어 보자. 강의 표면은 평상시의 심리적 인식수준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강에는 깊이도 있듯이 우리의 인식에도 깊이가 있다. 인식의 일상적인 심리적 수준이 있듯이, 인식의 영적인 수준 또한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지력과 의지가 영적인 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더 깊은 수준 혹은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내재하고 계시면서 거기에서 현존하고 있는 신성한 에너지가 매순간 우리의 존재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그림 : 인식의 수준).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 혹은 가장 내면에 인간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데 그것을 신비가들은 '존재의 바탕' 혹은 '영의 정상'이라고 부른다.

 

많은 묵상의 방법들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인식의 다른 수준에 표적을 두고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장 내적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을 우리의 영인 의지가 동의한다는 표식이다. 그 단어는 상상 속에 나타나지만 일상적 의식의 흐름의 수준에 직접적이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지향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지향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현존에 나를 열어 드리고 맡기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침묵기도와 다른 수련, 즉 촛불을 바라본다든지, 만트라를 반복한다든지, 어떤 영상을 상상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이 어떤 형태의 주의(注意)를 사용하는 방법들과 다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지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한다. 강 위에 배가 지나가듯이 사고들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갖는 지향의 방향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향을 나타내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할 때에, 우리의 의지의 움직임이 상상 속에 아주 섬세하게 나타난다.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완전하게 발음할 필요도 없다. 단어에 대하여 사색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단지 표식이거나 상징일 뿐이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와 상상 속에 다만 순간적으로 반향하는 반면에, 만트라나 주의집중을 하는 과정은 사고의 흐름을 느려지도록 만든 것이다.

거룩한 단어의 일차적인 기능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거나 서서히 사라지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고, 기도시간 동안에 성령의 활동에 우리를 맡겨 드린다는 지향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보트(사고)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우리를 밀치려고 할 때에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고에 끌려 들어갈 때에는 하나님의 현존에 머문다는 우리의 일반적 사랑의 지향이 순수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카메라에서 초점을 맞추는 기구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영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향에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의 지향을 하나님께 향한다. 그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에 편하게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고라도 예외 없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그것들이 즐거운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것들이 영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든, 아니면 사고와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지든 관계없이 그냥 보낸다. 때로는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사고들의 폭풍 속에 휘말려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그것을 감수하면, 그 고통 자체가 거룩한 단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포기도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하심에 대하여 깊은 동의를 하는 것과 같다.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모든 방법들은 다소간에 사고과정을 지나쳐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고 과정이 우리의 중독적인 과정 -강박적인 사고에 기름을 붓거나 고통에 가면을 씌우기 위하여 외부 세계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마음- 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 없이 20분에서 30분간 정기적으로 휴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자기의 사고와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우리의 사고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가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며, 만일 자기의 사고가 흥분하게 하거나 기죽이게 하거나 불길한 것일 때에 그것에 얽매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의 훈련으로서 매일 잠시 동안 그저 생각하기를 중단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에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침묵기도의 설명에서 '사고'라는 말은 단지 관념이나 영상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감정들, 우리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오는 감각적 인상들, 그리고 영적인 감각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지각(知覺) 내용들도 모두 '사고'라는 포괄적인 개념에 들어간다.

관상을 준비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정신에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준비 방법들을 하나의 스펙트럼 상에 놓는다면 이것들은 수용적(受容的)인 방법에서부터 주의집중적인 방법까지 다양하다. 주의집중적인 방법에서는 우리가 많은 일을 혹은 모든 일을 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만트라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 우리의 호흡에 초점을 맞추는 것, 촛불이나 그와 유사한 물체를 바라보는 것, 어떤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 혹은 참선 중에 관(: 화두를 사색함)하는 것 등이다. 침묵기도와 같이 수용적인 방법에서는 주의에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은 극히 최소한에 머문다.

비교해보면 어떤 방법은 더 수용적이고 어떤 방법은 더 주의 집중적이다(그림 : 관상을 준비시켜 주는 기도의 방법들 참조).

 

침묵기도와 다른 수련들을 구별하는 것은 침묵기도의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y)이다. 침묵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의성과 지향성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한 사람들은 침묵기도와 다른 기도 사이에 외적으로는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침묵기도에서는 지나가는 사고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가 영적인 인식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전체의 심리적 인식 수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포로 삶을 시작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개인적인 빅 뱅(Big Bang ; 우주 형성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는 하나의 창조이론)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세포 속에는 나머지 삶을 지탱해 줄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이제 우리의 가장 심층의 존재 혹은 존재의 신적인 바탕을 살펴보자(그림 : 인식의 수준 참조).

 

그 중심에서부터 참 자아가 전개되고 그 에너지가 적절하게 표출된다. 우리가 왜 인간 조건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이유는 우리가 참 자아와 접촉을 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아기 때, 출생 때, 아니면 어떤 현대 정신 치료자들이 말하듯, 출생 이전에 가졌던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주 어릴 적에 우리는 거짓자아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이 거짓자아는 참 자아를 억누르고 참 자아의 잠재력을 감추어 버린다. 이 거짓자아는 우리의 아픔과 자기 보호 노력에 영향을 받아 우리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그 결과로 대부분의 경우 외적 사건이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지배되는 상태를 경험한다. 거짓자아는 우리가 내적인 자유로 행동하기보다는 외적인 사건에 지배를 받을 때에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적 의식은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완전히 그 영화에 사로잡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외적 사건이나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지배를 받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아주 좋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영화의 줄거리나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이 지금 영화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우리 자신의 영적인 수준과 접촉을 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외부 사건에 대하여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그 사건에 스스로 지배를 받도록 허용한다. 우리가 침묵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관점을 다루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역동을 인정하게 되면서 우리의 영적인 기능과 참 자아가 해방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거짓자아가 정서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적 평화를 경험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행복이야말로 참으로 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기도의 수련 중에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정서적 반응에 직면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보지 못하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거짓자아의 경향을 인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을 알아봄으로써만 그것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면서 그대로 떠나보내면 되는 것이다.

내적 자유가 발달되면, 우리는 마치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서 언제고 일어나 영화관을 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계속 관람해도 된다는 것도 안다. 이것이 영적 수련을 한 사람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과정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이나, 어릴 적에 형성된 우리의 내적 역동 -그 역동에 대하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이 나를 계속해서 지배하도록 허용 한다. 기도 수련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러한 역동에 대하여 자율적인 힘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참 자아를 찾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성장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행동하기 시작한다. 침묵기도의 가장 큰 효과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렇다고 우리가 외부 세상과 상호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전보다 상호관계를 더 잘 맺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서 현실이 보여 주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묵기도는 단지 하나의 기도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가 복음과 그 가치에 응답하도록 만들어 주는 과정을 시작하는 기도이다.

 


5. 침묵기도의 개요

 

1) 신학적 배경

오순절의 은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각성을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으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사시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며, 기도와 활동 중에 성령의 열매와 참된 행복(5)을 경험하고 또 나타내도록 힘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증거 하게 하셨다.

 

2) 거룩한 독서

거룩한 독서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키우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화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대화의 주제를 알려 주시듯 성서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사색하면, 그저 안다고 하는 관계를 넘어 우정과 신뢰와 사랑의 태도로 발전시켜 준다. 대화는 단순해지고, 6세기의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크리스찬 관상기도의 전통을 요약하면서 말한 "하나님 안에서 쉼"이라는 교통(합일, communion)의 상태로 이른다. 이것이 16세기까지 관상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의미였다.

 

3) 관상기도

관상기도는 성령세례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가 사고와 감정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의 표현일 뿐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사고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어 줄 수 있게 우리를 내적으로 정화시켜 주는 과정이다.

 

4) 침묵기도의 방법

침묵기도는 거룩한 독서로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게 해 주도록 만들어진 것이며, 관상기도의 은총에 우리의 기능들을 준비시켜 줌으로써 관상기도를 촉진시키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전의 가르침(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uknowing)을 현대적 형태로 제시하면서 거기에 어떤 순서와 규칙을 부여하여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다른 기도를 대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도들을 새롭고도 완전한 각도에서 조명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기도 중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또 활동하시도록 동의한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는 우리의 주의가 나의 밖으로 옮겨 가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침묵기도의 방법은 관상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줄이는 방법이며 인간의 기능들을 이 은총에 협조하도록 준비시키는 방법이다. 이 기도 시간에는 내면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를 향하게 한다. 다른 기도에서는 주의를 외부 세계로 돌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침묵기도는 거기에서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시작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체험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기도이다.

침묵기도의 방법은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흐름을 꺼버리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고의 흐름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습관적인 방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적 방법을 강화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라디오를 장파에서 단파로 돌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장파 라디오로 장파 방송을 듣는 데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오는 방송을 들으려면 다른 파장으로 돌려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의 일상적인 사고와 정서적 패턴을 꺼버리면, 당신 앞에 새로운 현실 세계가 열린다.

 

5) 침묵기도의 실행

침묵기도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보통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감음으로써 이 세상의 반은 사라진 셈이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라.

당신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기 위해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이것이 효과적이기 위하여서는 자주 열심히 이 단어를 되풀이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시작할 때에 당신의 상상에 얼마나 부드럽게 이 단어를 떠올리는가,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을 때에 어떻게 즉시 이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는가에 달렸다.

침묵기도 중에 사고들은 불가피한 부분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들은 강 위에 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떠내려 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강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사고(思考)"라 하는 것은 의식의 스크린을 지나가는 어떠한 지각 내용을 뜻한다. 우리는 보통 의식의 내적 스크린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상상, 기억, 감정, 외적 인상 등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고의 흐름을 얼마간 늦추면 그 배들 사이로 공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현실이 떠오른다.

침묵기도는 당신의 주의(注意)를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구체적 형상에서 무형의 것으로 옮겨 주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배에 주의를 빼앗긴다. 그 다음에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것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면, 당신의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바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거룩한 단어는 당신의 지각이 더욱 깊어지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당신 안에 올라오든지 간에 그 거룩한 단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입술에 떠올리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어서 이 기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상상 안에서의 사고는 내적인 것이며,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는 더욱더 내적이다. 당신이 단어를 넘어서 순수한 인식으로 가는 것만이 내면화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듣는 말씀을 넘어 말씀하시는 분에게로 나가고 그와의 일치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앉아서 침묵기도를 하면서 하는 것이 바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넘어서 그 단어가 가리키는 분, 즉 궁극적 신비, 하나님의 현존(임재)-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어떠한 지각도 넘어서- 일치하는 것이다.

 

6) 침묵기도 중의 사고들(분심)

우리가 정신을 가라앉히려고 할 때 의식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이 떠오른다. 이때는 거룩한 단어로 처음상태로 돌아가라.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고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반응이 따르게 되므로 이를 설명한다.

 

(1) 상상으로 하는 공상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사고들은 우리의 상상력의 끊임없는 활동으로 만들어 내는 피상적 사고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주의를 주지 않으면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에 창을 통해 들려오는 길거리의 소음과 같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밖에서 나는 소음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대화를 하다보면 그 소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순간적으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합당한 반응은 그 소음을 받아들이고 가급적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상황에서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수도원은 길 주위에 있어서 기도를 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잡상인들의 차에서 틀어놓은 방송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기도하기가 어렵지만 자주 출입하는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그러하듯 잠시 후면 지나가고 조용해지기 때문이다.

 

(2) 떠오르는 사고들

두 번째의 사고는 길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흥미를 느낄 때 일어나는 사고들이다. 예를 들면 말다툼이 벌어져서 호기심을 끈다. 이러한 사고는 어떤 대응을 요구하는 사고이다. 이때에는 하나님께 드리고 있던 사랑의 주의로 돌아가는 뜻으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려야 한다. 이러한 흥미를 끄는 사고들에 빠졌을 때에 자신에게 짜증 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짜증도 또 다른 하나의 사고이기 때문에 당신을 내적 침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내적 침묵이 이 기도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목표에 집중하라.

 

(3) 내적 성찰

우리가 깊은 평화와 내적 침묵에 잠길 때에 세 번째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우리 정신 안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눈부신 신학적 성찰이나 엄청난 심리적 개안처럼 보이는 것이 맛있는 미끼같이 우리 눈앞에 어른거려서 "잠시 시간을 내어서 이 기막힌 성찰을 잘 파악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기억에 넣을 만큼 오랫동안 이러한 성질의 사고를 묵인하면 당신은 내적 침묵의 깊고도 신선한 물에서 건져 올라오게 된다. 고의적으로 하는 사고는 당신을 침묵에서 올라오게 한다.

침묵기도에서는 아주 밀접한 종류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영적인 행복의 시간인 피로 회복과 같은 경험이 기도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이 목적은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우리의 깊은 사고들과 감정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 즉 거짓자아를 부정하는 데 있다.

이러한 종류의 금욕수련은 우리의 거짓자아의 정서적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그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철저하고도 기쁨을 주는 자기 부정인데 이것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시달릴 필요는 없는 자기 부정이다. 문제는 가장 유용하고 적절한 종류의 자기 부정을 선택하느냐와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인 것이다.

 

(4) 자아 성찰

깊은 평화에 들고 어떤 특정한 사고들로부터 해방하고 나면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당신은 "마침내 나는 해냈다."라든가, "이 기분은 참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 경지에 도달했는지 정신적으로 기록해 두어 내가 원할 때마다 이렇게 한다면!"하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성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체험을 떠나보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일 떠나보내면 당신은 더 깊은 내적 침묵으로 들어간다. 만일 성찰하면, 당신은 거기에서 나오게 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일이 빈번할 것이다.

성찰은 체험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사진일 뿐이다. 당신이 체험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체험은 끝났다. 즐거움에 대한 성찰은 그 즐거움을 가지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면 즐거움은 잃어버린다. 관상기도에서 성찰하려는 경향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순수한 즐거움, 순수한 체험, 순수한 인식의 순간을 저장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에 다시 그곳에 이를 수 있도록 어떻게 거기에 이르렀는지를 기억하려고, 깊은 평화와 일치의 순간을 성찰하기 원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 유혹을 지나가도록 버려두면, 당신은 새로운 자유의 수준을 지나면서 더욱 세련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다. 당신이 그것들에 매달려서 그것을 소유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

침묵기도는 사랑이며 은총인 하나님의 성령과 교통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유 본능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즐거운 삶에 매달리게 만드는데, 하나님의 현존보다 더 기쁜 것은 없고 이것은 깊은 안정과 평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탐욕에는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온전히 손에 닿을 수 있는데 그것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면서도 소유하려고 들지 않을 때에 그럴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기도는 자아 승복을 배우는 기도이다. 그것은 많은 실수를 통하여 소유하려 들지 말고 떠나보내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만일 당신이 이 기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성찰하려는 뿌리 깊은 습관을 극복하면, 당신은 평화를 얻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생각을 안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5) 내적 정화

어떤 형태의 묵상이나 기도든,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면 내적 정화의 작업을 갖게 한다. 이 작업은 하나님이 하시는 정신 치료의 학교이다. 이것은 깊이 뿌리박고 있는 긴장을 사고라는 형태로 표출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도와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치료에서 오는 사고들은 그것들이 어디서 그리고 왜 오는지 본인은 알지 못한다. 그 사고들은 어떤 힘을 가지거나 정서적으로 충전된 채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최근의 어떤 사건과 관련지을 수 없는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을 느낀다.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일생 동안의 해결되지 못했던 심리적 문제들이 점차로 해소되고, 본능적 욕구에 기초를 두고 행복해지려고 어렸을 적에 마련하였던 정서적 반응 체제들이 무너지면서 거짓자아는 참 자아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일단 당신이 이 사고들이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치유와 성장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만 하면, 그것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을 고통스러운 주의 산만으로 보는 대신에, 내적 침묵과 사고 두 가지를 포용하는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는데, 이 사고들은 비록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깊은 평정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정화에 아주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7) 하나님 안에서 쉼

당신이 평온히 앉아서 깊이 들어가면 당신은 사고는 물론이고 그 거룩한 단어도 사라지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자주 의식의 정지라는 어떤 공간처럼 경험하게 된다. 다음에 당신이 자각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었나? 나는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지도 않았고 사고들도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다. 혹은 시간 밖()에 있었다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시간은 동작을 재는 자(). 만일 일상적 사고가 줄어들어 아주 적은 수의 사고 밖에 없게 되면 기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내적 침묵이나 "하나님 안에서 쉼"은 사고와 상상과 정서의 저편의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신에게, 당신의 존재의 핵심은 내적이어서 파괴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고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분명한 경험을 즐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고요, 평정과 동시에 간헐적인 사고들이 떠오름을 늘 체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 어떠한 형태와 정도의 내적 침묵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되 바라지는 말라. 바람은 또 다른 사고이기 때문이다.

 

8) 침묵기도의 지침과 설명

지침들

(1)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 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2)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 동의하는 지향의 표시로 그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떠올려라.

(3) 어떤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조용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4)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3분간 침묵 속에 머 물러 반추하라.

(5) 평소의 하던 기도를 하고 마쳐라.

 

지침에 대한 설명

(1)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머물겠다는 지향과 하나 님의 활동에 동의하겠다는 지향을 나타낸다.

거룩한 단어는 간단한 기도 중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합한 단어를 주십사고 청하여서 선택한다.

: 주님, 예수, 아빠, 아버지, 사랑, 평화, 샬롬 등

일단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였으면, 그 기도 시간 중에는 바꾸지 않는 다. 왜냐하면, 그리하면 또 다른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단어보다 하나님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듯 나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함을 나타낸다. 거룩한 단어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바라봄도 같은 지침 으로 한다.

(2)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는 것을 동의하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떠올려라"

"편안히 앉는다"는 말은 상대적인 편안함을 말하는데, 즉 너무 편안 하여 잠이 오지 않을 정도며, 아니면 조금 불편하여서 기도 중에 몸 의 불편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를 말한다.

어떻게 앉든 등은 곧게 세운다.

잠이 들었으면, 깨어났을 때 시간 여유가 있으면 잠시 기도를 계속한 다.

식사를 마친 뒤에 이 기도를 하면 졸리게 된다. 적어도 한 시간쯤 기 다렸다가 침묵기도를 하라. 잠자기 직전에 이 기도를 하면 잠자는 습 관을 해칠 수도 있다.

우리 주변과 내면에서 돌아가는 것들을 떠나보내기 위하여 눈을 감 는다.

가벼운 솜 위에 깃털 하나를 얹듯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를 떠올 린다.

(3)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사고'란 감각적 지각, 감정, 영상, 기억, 성찰, 해설 등과 같은 것 모 두를 망라하는 단어다.

사고는 침묵기도의 정상적 부분이다.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는 것은 최소의 노력으로 하 라는 말이다. 이것이 침묵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기도 시간 도중에 이 거룩한 단어는 아주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4)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 반추하라."

이 기도를 그룹으로 할 때에는 인도자가 2~3분 후 신호를 보내어 알리거나 주님의 기도를 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듣는다.

2~3분은 우리의 정신이 외적 감각 세계로 되돌아오는 데 적응하 는 필요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주의할 일은 기도를 마치는 즉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 경우 넘 어져 심한 상처나 고통을 당할 수 있다.

2~3분 동안 조용히 반추하는 시간을 가져라. 또 일상생활에 이 침묵의 영적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게 하라.

(5) "평소의 하던 기도를 하고 마쳐라."

이 기도 중에 혹 반추하는 도중에 필요한 기도가 있다면 이 시간에 기도하도록 한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은 평소에 하던 기도를 이 시간에 충분히 하 도록 한다. 단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중요한 기도의 제목만이라도 아 래도록 하라. 이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상생활로 전이되도록 하라. 그러하지 않는 기도는 울리는 괭가리 에 불과하다.

 

9) 몇 가지 실행점들

 

(1) 이 기도의 적당한 시간은 전통적으로 한 시간이다.

충분한 시간이 부족하면 두 번 나누어 하도록 권고한다. 나누어도 이 기도의 최소 시간은 20분 이상이다.

긴 기도의 시간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유익하지 못하다. 그것까지도 버려라.

수련이 깊어지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작할 때와 마칠 때를 알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시간을 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더 유 익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로 가져가는 것이다.

(2) 기도가 끝나는 시간을 알려면 너무 요란하게 울리지 않는 자명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단체의 경우는 다른 수련자가 놀라지 않도록 더욱 유의하여야 한다.

(3) 침묵기도의 주된 효과는 기도 중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된다.

(4) 신체적 증세 :

기도 중 신체의 여러 부분에 약간의 통증, 가려움, 뒤틀림을 느끼거 나 그저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체 속에서 정서적 매듭들이 풀어지는 데서 온다.

또한 사지가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짐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영적주의(注意)가 깊어져서 나타난다.

어떠한 경우(감각적 혹은 영적), 관심을 가지지 말 것이며, 아니면 그 감각에 잠간 머물렀다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도록 한다.

(5) 거룩한 독서는 침묵기도의 발전의 관념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6) 정기적으로 혹은 1주일에 한 번씩 교회나 기도모임에서 같이 참여해서 기도하고 나눔을 하면 이 기도에 계속 헌신하도록 도움과 용기를 얻는다.

(7) 침묵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로 확대하도록 노력한다.

(8) 이 기도 중에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거나, 기대를 걸거나, 다음 과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것을 피하라.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한다.

아무런 사고도 갖지 않는다.

마음을 공백으로 만든다.

평화를 느끼거나 위안을 받는다.

영적인 경험을 성취한다.

이와 같은 목표를 피하지 않으면 침묵기도가 아니다.

 

결론

침묵기도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평화와 감사로 받아라. 그리고 거기에 어떠한 판단도 하지 말라. 비록 당신이 하나님 현존을 감격스레 경험한다 할지라도 이 시간은 그것을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다. 어떠한 사고든 오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두라. 이 기도에서 떠오르는 사고들을 다루는 기본 원칙은 이것이다. 사고에 저항하지 말 것이며, 거기에 매달리지 말 것이며, 감정을 가지고 사고에 반응하지 말라. 어떤 상상이나, 감정이나, 성찰이나, 경험들이 당신의 주의를 끌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얼마나 많은 사고들이 이 기도 중에 있었나. 혹은 얼마나 평화를 즐겼는가로 이 기도를 판단하지 말라. 이 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일상생활에서 당신이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기도의 열매이다. 곧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내적 침묵을 맛봄으로써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인종이나, 국가, 종교, 개인적 성격과 같은 표면적 특성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다른 모든 실재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 관상기도로 익은 열매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사고나 기타 모든 것을 넘어서 늘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존재이신 분 - 무한하고, 알 수 없으며, 신성하신 분은 순수한 믿음의 하나님이시다.

 

6. 침묵기도가 깊어지는 체험

 

1) 무의식

무의식은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무의식은 '심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두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다.

심리적인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전 역사, 특히 주로 생존해야 한다는 동기로 어렸을 적에 억압해 넣었던 정서적 충격들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적인 것은 존재에는 수준이 있고, 존재의 수준에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영적 발달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잠재력(잠재의식이 아님)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 자연적인 에너지와 은총의 에너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계신다. 자연적인 에너지는 생명의 힘, 우주적 에너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자연적인 에너지들을 통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이 생겨나고 그 어떤 창조적인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1:4)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에너지인 빛은 만일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잉태에서부터 육체적으로 온전히 성숙할 때까지, 점차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동시에 두뇌와 신경계통을 통하여 정신적이고 영적인 발전의 기초를 이루어 준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접촉하지 못한 선천적이고 거룩한 에너지와 더불어, 거기에는 태초부터 삼위의 하나님께서 현존하셨다(1:1~2). 거룩한 생명(1:4)이 우리의 세례 때에 혹은 영적 여정에 투신할 뜻을 진지하게 표시하면서 세례에 대한 열망을 가질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자연적인 에너지와 은총의 에너지로 이 거룩한 생명의 빛에 참여하며 나눈다. 이러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신화(神化 : divinized, 초대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말)의 잠재력을 실재화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탐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탐험에 우리가 어느 정도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존재적 힘이 우리의 특정한 삶 속에서 얼마나 활성화될 것이냐 하는 정도를 결정짓는다.

 

2) 침묵기도

침묵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관상에 이르게 하면서, 우리의 삶 중에서 인정하지 않고 지나온 문제들을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부드럽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부른다. 때로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때로는 정서 프로그램처럼 그 문제들이 무의식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그 문제의 어떤 측면을 우리는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벽에 부딪히면,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그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맡겨 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상황아래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행동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 이것은 오랜 기다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침묵기도를 매일 지속하면 은총에 대항하는 우리의 내적 저항이 끊임없이 줄어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어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주려고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대로 기다리면서 침묵기도를 매일 지속하면 적절한 때에 저항의 둑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성을 갖기 시작하는 연령쯤에 정상적으로 사색적 자아의식을 온전하게 갖게 되면서, 우리 안에 계신 신성한 에너지와의 접촉을 완전히 상실한다. 침묵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는 움직임이다. 침묵기도를 오래 수련할수록 우리가 언제 깊은 곳으로 가는지를 더욱 잘 모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잘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하나님의 현존에 강하게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나 깊은 휴식에 아주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곤 한다. 그렇다고 은총이 우리 안에서 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랜 수련자는 처음에 평정의 기도를 체험했을 때에 가졌던 인상을 이제는 갖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가는 사고들을 인식하고 나서는 일어나 일상 사무로 돌아가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3) 휴식 ()

사실 정화의 과정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지금 휴식하고 있다. 나는 지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다."는 등과 같은 신호들이 옛날처럼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지 않다. 휴식한다는 감각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깊이 잠입했다는 것을 다른 신호를 통하여 짐작해야 한다. 이러한 것 중에 하나는 시간의 흐름이다. 앉아 기도를 하면 사고들이 계속 지나간다. 이럴 때 "오늘은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도 시간이 다 되어서 기도 시간의 끝을 알리는 신호 소리가 들릴 때에 금방 기도를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거나 시간이 매우 짧았던 것처럼 보이면 분명히 깊은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많았을 때에는 기도가 긴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많은 사고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짧은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단단히 침묵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커다란 체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 여기에서 은총의 씨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참여하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게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실제로 깊어질수록, 그것은 더욱 습관적으로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의 밖으로 떠나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경험의 해석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기질과 개인적 역사에 의해 조건화된 것이다.

은총의 경험이 더욱 섬세해지고 영적으로 되면 우리는 그것을 덜 알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위안이라든지, 내적인 감미로움이라든지, 아니면 사랑의 물결과 같은 형태로 오는 영적인 경험에 저항해야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각각 다른 시기에 우리의 다른 의식 수준에게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이성의 수준 너머 직관의 수준으로 가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아이디어는 확장되고, 다른 수준에서 하시던 의사소통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하시지 않으신다.

 

많은 관상기도자들이 논리적 묵상이나 어떤 특정한 소망을 아뢸 수 없게 됨을 경험한다. 그것들은 그저 마비되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 시간에는 이와 같은 정신적인 일들을 잘할 수 있지만, 그들이 기도를 하려고 하자마자, 하나님이 흡수해버린 것처럼 무기력한 상태로 들어가고 만다. 성령께서 그들의 기도를 떠맡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성찰에 대해 성령께서 관심을 덜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과 같은 정신활동들은 사실상 기도의 예비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성령께서 뛰어난 생각들을 원하신다면, 천사를 불러 시킬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재를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천재들을 더 많이 창조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깊은 휴식()이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는 단순히 신비한 이끌림이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관상기도에서 진전되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의 하나이다. 평상적인 인식의 강에 눈에 뜨이는 보트가 지나가면서 우리의 무의식에 뿌리박고 있는 정서 프로그램 중의 하나를 건드렸기 때문에 우리의 동의가 약간 흐릿해질 때면, 언제나 성령은 우리의 동의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움직이신다. 정서 프로그램과 그에 따라 고통스럽게 만드는 욕망들을 가진 거짓자아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는, 지나가는 사고들은 계속해서 마음을 끌거나 혐오감을 자아낼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무의식 안에 자극받을 그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안에 자극받을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 내적 자유는 완성되고 평화는 습관적으로 찾아온다.

처음 몇 년 동안에 경험했던 휴식에 대한 영적인 감각은 늘 휴식하고 있는 상태로 순수해지기 시작한다. 이 휴식의 영적 상태는 '평화'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으로서 감각되지 않는, 즉 감각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그러한 평화를 말한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선 것인데 하나님의 현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항구한 사랑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그렇지만 아직도 완전히 부숴지지 않은 거짓자아가 남아 있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정서 프로그램의 하나에서 오는 욕망을 일깨워 주는 자극에 우리가 아직도 민감하다면 우리의 평화는 아직 어떤 주의를 요한다고 보아야 한다.

휴식은 평화로 이끈다. 평화란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무엇에 대해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평화로운 것이다. 시편 작가는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아주 잘 표현을 하고 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31: 2)

엄마의 젖 먹으려고 안달하기를 마침내 끝내고 젖 때문에 보채는 일 없이 엄마가 그냥 엄마이기를 받아들인 아기의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진전인가, 아닌가?

우리가 감정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기도의 심리적인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내용에 대해 만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쉴 수 있다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가끔 우리가 어떤 무의식적인 내용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극적인 것은 되지 않는다. 어릴 적에 가졌던 원시적인 정서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여러 번 정신적 역겨움을 경험하고 난 뒤에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경험이 새롭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처음 대할 때에는 충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생 쌓여 온 정서적인 내용들을 아직 계속해서 덜어 내지만, 무의식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 이제는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인 기도 중에 일어난다.

이 기간은 한 수준의 무의식 혹은 한 수준의 믿음에서 다음 수준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영적 여정의 봄 기간 후에, 특히 정서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활동으로 뿌리 뽑히는 감각의 밤이 거듭될 때에, 이성과 감각으로 가졌던 믿음은 사라진다. 우리 자신의 활동으로 우리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점차로 하나님의 활동에 -특히 위안이라는 모유에서 이유(離乳)하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고, 느껴지는 위안 대신에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주는 안정된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치유는 우리에게 일어난다. 순수한 믿음은 어떠한 종류의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특히 '영적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 위안을 바라지 않는다. 영적인 여정의 단단한 음식은 순수한 믿음이다. 이것은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길'이며 어떤 특별한 심리적인 느낌이나 경험 없이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림으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4) 지향성 (관상기도의 초점)

그러므로 지향성이 어두움에 떠오르는 별과 같다. 그것이 관상기도의 '초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우리의 지향이 순수하게 남아 있는 한, 어떠한 종류의 사고를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들은 우리 기도의 순수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意志)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에 자신을 맡겨 드리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지향이 확고하면, 신성한 치료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적 여정이 잘 진전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에 거짓자아가 끼어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거짓자아는 착각을 주는 데에 아주 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에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영적인 자만에 아주 미묘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영적 자만에 대한 마지막 정화가 전통적으로 영의 어둔 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무의식에 있는 거짓자아의 잔재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변형적 일치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정화가 진행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지향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면서, 섬세하게 일어나는 집착들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것을 인정하고 끊어 버린다. 우리가 그 거짓자아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그 거짓자아를 관상기도에 언제까지나 가져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의 성질이 그 거짓자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하시는 주파수가 높을수록, 신적 전달은 더욱 잘된다. 가장 높은 수준을 해석할 만한 인간의 기능은 없다. 믿음만으로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동의로. 이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처음에는 이처럼 극히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현존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현존을 놓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재하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을 용해시키기 위한 영적훈련을 하면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앞으로 나간다.

 

5) 무의식을 덜어 냄

무의식을 덜어 냄은 보통 정서적으로 부하된 사고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기도가 자리 잡고 나면, 덜어 내는 과정은 어둔 밤이 극렬하게 진행되는 때와 같이 어떤 정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눈에 덜 뜨이게 된다. 다음그림(침묵기도의 4순간)에서 보듯이 사고와 휴식은 같은 원형과정에 있는 다른 두 개의 순간이다. 사고에 저항하거나 그것들을 자신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하면, 우리는 덜어 내는 과정에도 저항하는 것이며, 우리의 치유를 지연시킨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으면 그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수련은 그저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침묵기도가 우리에게 좋은지를 아는 좋은 방법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영향을 보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영향을 말하는 것인가? 거룩한 단어로 계속 다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점차로 거짓자아의 껍질들을 사라지게 하며 마침내는 그것들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지향은 더 이상 도전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 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동기로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렸을 적에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만든 자기중심적 우주나 자신이 만든 자아에서 동기를 얻는 것이 아니다.

 

 

6) 거룩한 단어

이러한 수련에 '경험이 있는' 이란 말은 그것을 몇 년간 매일 수련해 온 사람들을 말한다. 당신이 기도를 시작하여 휴식이나 평화로 옮겨가고 있다고 치자.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라."

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사고에 이끌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초심자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거룩한 단어는 지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의 움직임이다. 우리가 평화에 도달하면 이중의 인식 수준이 나타난다. 2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나, 내일 일어날 일들, 아니면 다음 여름휴가에 대한 계획 등과 같은 사고들이 지나간다고 하자.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음도 안다. 이럴 때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가 우리를 가도록 촉진하고 있는 그곳에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평화의 장소에 와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바로 깊은 평화에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기도 중에 때로 우리는 두 가지 의식의 수준을 동시에 경험한다. 하나는 우리가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고와 감정의 인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섬세한 현존의 인식이다. 이러한 경우에 많은 사고가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주의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나 슈퍼마켓에서 들려주는 음악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참아 낸다. 만일 우리가 그 소음을 없애기 위하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려고 애쓴다면, 우리의 평화를 불필요하게 깨뜨리고 만다. 어떤 마음을 끄는 사고가 우리를 일상적인 인식의 수준(강의 표면)으로 끌어 올린다고 알아차렸을 때에만 우리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아주 순수해진 곳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를 분명하게 떠올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의 일이 아마도 내적 평화로 향하는 움직임을 다시 찾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섬세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의 순수성이 도전을 받을 때에는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아주 덜어 냄을 심하게 하는 기간에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치 지하의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흡사하다. 아니면 밀려오는 파도처럼 사고와 지각과 정서들이 거룩한 단어를 파묻어 버리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단어를 찾을 수 없거나 찾는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어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단어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식 안에 원시적인 정서나 괴롭히는 사고들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소나기였던 것이다. 비록 폭풍우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고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7) 평화

평화란 우리가 모든 것, 즉 하나님,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우주에 대하여 갖는 올바른 관계이다. 이것은 평형을 유지하는 행동이다. 그 경험이 아주 섬세하여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경험이지만,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와 같다. 그것이 아주 작기는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두면 나중에 큰 나무로 자란다. 우리의 시야를 일상적인 삶의 흐름 안에 유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진정으로 있는 곳이다. 평상적인 삶의 흐름 밖으로 나온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이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인가를 의심해야 한다.

경험상 무의식을 덜어 내는 것보다는 환시(환상)나 환청 같은 경험들이 우려가 된다. 이것이 직접 하나님으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종의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상담자들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버리라고 해도 말은 하지만 쉽게 수긍하려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움켜쥐려고 한다. 그것은 그것이 선악간 자신에게 너무 좋아 보이고 또 바라는 것이라서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실수하기가 쉽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결함이라 다루기 어렵다. 그러나 무조건 버리면 절대 실수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이라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다방면으로 전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길 바랍니다.

 

8) 믿음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가장 안전하게, 확실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한 믿음이다. 그의 표현으로는 이것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첩경'이다. 이 가르침은 훌륭하며 아주 순수하다. 그렇지만 보상적인 만족에 대한 욕망을 가질 희망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보상적 욕망은 하나님과의 일치가 오는 것을 늦추게 한다. 보상에 대한 욕망은 영적인 여정의 관점에서 볼 때에, 영적인 군것질이나 정크 음식을 찾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따위의 모든 것들을 정화하셔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음식이며,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히브리의 저자들은 인간의 기본요소로서 육체와 영혼과 영을 구분했다. 신체적인 육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인 육신을 말한다. 영혼은 자체의 특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 표현 중의 하나가 우리의 정서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다. 그 예로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거나 즉각 친밀감을 느낀다. 그 사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삶이나 욕망 같은 것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그 사람과 반향을 일으켜서, 그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이 하신 일이 나를 깊이 감동(touch)시켰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 사람을 만지거나(touch) 하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정서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9)

''은 아마도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말하는 것일 터인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존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단순히 다르게 묘사한 방법이다. 심리적인 인식의 표면적인 수준 아래에는 더 깊은 영적인 수준이 있어서, 거기에서 사고와 감정의 일상적인 기능들보다 더 깊은 수준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이 침묵기도로 지향(志向)하고자 하는 수준이다. 우리 존재의 핵심 안에서는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대한 인식이 더 친밀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에너지가 활성화되고(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우리가 더욱 민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것들의 온전한 잠재력에 실제로 접촉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낮은 수준에서 그것들을 덜 지각한다. 그리고 감각적 위안과 성찰은 관심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것들이 아직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거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육신과 영혼과 영의 세 수준에서 우리를 양육하신다. 개인적인 발전이 진전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더욱 확장되고 심오해진다. 성령은 우리 자신 안에 경험하고 있는 모든 질병을 재정비하셔서 우리 존재의 각 수준에 알맞게 우리의 거룩한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게 하신다.

 

10) 신적 에너지

신적인 에너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여러 수준에서 일하실 수 있다. 그것은 이 에너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든가 존재하더라도 현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은총의 수준에서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에는 디딤돌이 되어 주기 때문에 좋았지만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이 온전하게 나타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한, 집착이나 지나친 의존들에게서 믿음이 정화된다. 영적인 여정은 이렇게 하여 우리의 즉각적인 인식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신적인 에너지는 우리의 기능들이 그 에너지를 가장 지각하지 못하는 때에 가장 힘을 발휘하신다. 우리가 침묵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우리의 지향을 정하고 나면, 하나님의 현존이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 현존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이란 그저 동의하는 것이다. 신성한 에너지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통하여 흐른다. 가장 순수한 형태 안에서는 그것이 최대의 힘으로 24시간 열려 있다.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그대로에게 우리를 열어 드린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나, 문화적 조건화나, 성격상의 편견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또 해석하는 매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조건하에서 자신을 전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동의이다. 환시나 위안이나 체험이나 심리적인 성취 등은 모두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겠지만, 순수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전부라는 최대의 가치를 우리에게 가리키는 극히 제한된 가치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믿음이 일단 확신으로 형성되고 나면,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관점에 변화를 준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현실과 일과들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하고, 평범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 에너지가 아직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다음 삶을 위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Beatific Vsion (천국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본다는 신학적 용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신체적 육신의 한계에서 자유를 얻을 것이 요구된다. 이 에너지는 아주 강력해서 만일 일상생활의 사건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 신적인 에너지와 우리가 계속해서 접촉하는 것을 분산시켜 주지 않고 그 에너지에 우리가 그대로 노출되었더라면 우리의 존재는 아마도 그 강한 힘 때문에 순식간에 승화되어 흔적만 남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 에너지가 성운(星雲)을 형성하는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한 번에 조금씩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자면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야 우리의 육신은 영광을 받고 이 에너지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cp14제14장.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