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일치의 길


1. 전부(全部)와 전무(全無) 박노열, 나아간 이들을 위한 관상기도 (나됨, 2013) pp.117-133. 이 글 제목 ‘전부와 전무’의 본문 및 주석을 동일하게 인용하였다.


   모든 것(全部: Todo: 긍정)과 아무것도 아님(全無: Nada : 부정) 십자가의 요한은 자신의 작품들에서 전무(nada)는 374번, 전부(todo)는 274번을 사용하고 있다. 참조: Diccionaho de San Juan de la Cmz 1164-1171.
은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자기부정, 즉 겸손(낮춤)은 물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들에 대한 애착과 욕구에서 벗어남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의 모든 작품들에서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의 일(기도)과 인간의 일(욕구), 낮과 밤,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징들이 있다. 이런 상징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전부-전무라는 작용어다. 전부-전무는 십자가의 요한의 고유한 역설적이며 변증법적이고, 역동적인 동일성을 말해주는 짝 용어다. 전부와 전무의 개념은 인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심리적이며 영성적이고, 신비신학적인 입장에서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개념이다. 그 기본 원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려면 모두 버리고, 모든 것에서 떠나라.’라는 간단한 말이다(‘산길’, I,13,11). 그런데 십자가의 요한의 고민 가운데 대단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그의 영적 자녀들(수도자들)이 자신의 이러한 신비체험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산길’, 서론, 8). 그래서 신비체험가인 십자가의 요한이 당대의 철학적이며 고도의 논증을 요구하는 신학적 설명 방식을 피해가면서도 실존적이며 체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역설적인 용어를 찾아낸 것이 바로 전부-전무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요한이 전부를 말하기 위해 전무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전무(nada)는 ‘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하면서 절대적인 부정을 표현한다. 당시 스콜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십자가의 요한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무’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능동적인 의미인데,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라는 인간의 수덕적 노력을 지칭한다. 다른 하나는 수동적인 의미인데, 영혼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직접 영혼에게서 그것을 모두 없애버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감각의 밤으로 들어가려는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는 아무것도 남겨놓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는 절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동시적 역동성을 말하는 상호 관계적 표현이다. 이것은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하나님 자신이 전무이며, 광야이고,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범주에 대한 부정이다.’라는 부정신학적 표현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무는  베네딕토 성인이 수도규칙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5장)의 영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아무것도 하나님의 일(기도)보다 낫게(우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43장)고 했던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자세이며 전통적인 수덕적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십자가의 요한은 “완덕의 산”에 적어놓은 대로 “모든 것에서 만족하려면 아무것도 만족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려면 기쁨이 없는 곳으로 가라. 알지 못한 것을 알려면 아는 것이 없는 곳으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면 가진 것이 없는 곳으로 가라. 네가 아닌 것이 되려면 네가 없는 곳으로 가라.”(‘산길’, I,13,11)고 서술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산길’, I,4,3)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근본주의적인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부-전무’를 몇 가지로 분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세 가지 성경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매우 복음적인 개념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산길’, III,2,4)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산길’, I,11,5)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산길’, I,7,6)라는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한눈을 파는 인간을 향해 질투하시는 분이시라는 참조 : 출 20:5; 34:14; 신 4:24)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다(‘산길’, I,4,2; ‘밤’, I,4,7). 결국 하나님과 인간을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골 3:14) 때문에 끌어들인 용어다. 기도하는 영혼은 “자기 삶을 그리스도께 맞추면서 매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일상적인 욕구를 지니고”(‘산길’, I,13,3)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에게 전부(모든 것)인 그리스도(전부)께만 눈을 돌리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산길’, II,22,4-5; ‘노래’,14-15, 5). 이렇게 그리스도는 영혼에게 전부이기 때문에(‘산길’, I,13,11) “감각들이 가져다주는 어떤 기쁨일지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비운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산길’, I,13,4).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하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어떻게 다른 것에 전부가 될 수 있는가?”(‘편지’, 17)라고 반문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며(‘노래’, 2,7) “영혼이 여기에서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속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 감관의 능력을 사용하고 피조물에 대한 기쁨과 욕구를 지니고 있는 모든 낡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낡은 삶의 움직임이며 새로운 영적인 삶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낡은 인간에서 완벽하게 죽지 않는다면 영적이며 새로운 살을 완전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사도는 이에 대하여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엡 4:22-24)고 훈계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루는 일치의 완전함에 이르렀을 때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는 것처럼 영혼의 모든 욕구들과 자신의 움직임과 경향에 따르는 감관의 움직임이 그 자체로는 죽음의 움직임이었으며, 영적인 삶의 빼앗음이었으나 모두 거룩한 것으로 바뀐다는 것이다”(‘불꽃’, 2,33).
 기도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어떻게 죽게 되는 것인지 가르쳐주고 싶다.”(‘산길’, I,7,9)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근본주의적이며 절대적인 전무(아무것도 아님)를 말한다고 해서 인간 존재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는 패쇄적이며, 비관적이고,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주하는 인간 존재의 양태(樣態), 즉 어떤 목적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희망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이 영혼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전무를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전무는 반드시 전부를 지향하고, 또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서 ‘의로움과 불법’, ‘빛과 어둠’, ‘신자와 불신자’(고후 6:14-15; 요 1:5),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롬 7:25), ‘죽음과 부활’(고전 15:22; 롬 5,10),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고후 3:6), ‘현세적 인간과 영적인 사람’(고전 2:14-15), ‘옛 인간과 새 인간’(골 3:9-10; 엡 4:22-23), 그리고 ‘약함과 강함’(고후 12:10)과 같은 이율배반적인 많은 표현들을 자신의 영성생활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다. 현세적인 사람(동물적인 사람)은 오직 감각만을 이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고, 영적인 사람이란 감각에 의존하거나 따라가지 않는 것은 물론 감각에 주어진 초자연적인 지각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귀려고 무모하게 대드는 사람이 아니다(‘산길’, II,19,11). 이렇게 십자가의 요한의 작품들에서 바울 사도의 영향을 받는 표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약할 때에 오히려 더 강하다는 것(고후 12:10)을 절실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고 한 바울 사도처럼 영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열매가 주는 맛과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에 육체, 즉 감각으로 느끼는 기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산길’, II,17,5).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충만함을 체험했기 때문에(엡 4:13)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된 뒤에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터득한(빌 4:12) 바울 사도의 체험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온갖 사물에 대한 욕구의 기쁨을 없애버리는”(‘산길’, I,3,1)  과정인 어두운 밤으로 들어간 영혼은 전에는 결코 하지 못했던 새로움을 체험하면서 무엇을 얻거나 확인하면서가 아니라 잃어버리면서 가는 것이다(‘밤’, II.16,8).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 선명하게 보려고 한다면 어두움 속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영혼 안에서 ‘의로움과 불법’, ‘빛과 어두움’이 짝을 이를 수 없다(고후 6:14)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더욱 결정적인 표현은 조금 열심히 기도를 했기 때문에 연속적인 환청을 체험하는 사람들, 혹은 환청이나 환시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문자나 환청, 혹은 감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현시의 형상이나 초상에 매달리는 사람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것이며, 현시들 안에서 감각에 따라 이끌렸기 때문에, 그리고 감각을 벗어난 영(정신)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것만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 바울은 문자는 사람을 죽이며 영(정신)은 사람을 살린다고 한다(고후 3:6). 이런 경우에는 감각의 문자를 떠나서 영(정신)이라고 하는 신앙의 어두움에 머물러야 한다. 영(정신)은 감각이 이해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산길’, II,19,5)
 “이들이 하는 짓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산길’, II,29,5)  “겸손과 애덕, 극기와 거룩한 단순함, 그리고 침묵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내가 말하지만, 이 환청은 영혼이 거룩한 일치로 가는 길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만일 영혼이 자꾸 이런 환청에 관여하게 된다면 영혼을 신앙의 심연으로부터 대단히 벗어나게 한다. 지성은 신앙 안에서 어두운 상태로 있어야 하며, 많은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움 속에서 신앙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 가야 한다”(‘산길’, I,29,5).
라고 한다. 바울 사도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기”(빌 1:21) 때문에 무엇에 마음이 머물게 될 때는 하나님 안에 있는 순수한 보물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산길’, I,13,12). 결국 하나님과 일치를 위해서라면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역시 전부를 위한 전무를 실천하기 위해 오로지 신앙에 의지해서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이다.
   셋째,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무는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가 말하듯이 관상기도란 기도하는 영혼이 거룩하게 변화되지만 가장 어두운 암흑 속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뵙게 되는 것이며,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무지를 통해서만 가능한 하나님께 관한 참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인간의 지성에게 암흑일 뿐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부정하면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노래’, 7,9). 참조: 방효익, 관상과 사적계시, 86-97.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참조: 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262-263.
 이러한 십자가의 요한의 부정, 혹은 아무것도 아님(전무)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4)의 어두움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최익철(역), 모세의 한평생, 가톨릭다이제스트, 1993, III-112(제2부,162-164); 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127-150.
과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에서 비롯되는 부정신학(어둠의 신비신학) “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황홀경에 이른 영혼은 지성을 초월하고, 또한 초월함으로써 지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지성은 더 이상 쓰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부되는 것이지 지성이 전혀 소용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단계는 오직 지성에 의하여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기 동안, 영혼의 신비적 기관은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니라 정적인 것이라는 관념이 싹트고 발전하게 되었다. 영혼이 하나님과 접촉하게 됨은 지성(정신)의 첨단인 제1의 정감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앤드루 라우스, 앞의 책, 254) 참조: AA. W., Expehencia y pensamiento en San Juan de la Cruz,97-99.
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아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은총을 받기 위해서 신부인 영혼이 자신의 감각들에 의한 모든 기쁨을 즉시 비우고 없애야 하며(‘산길’, I,13, 4), “겸손한 사랑으로 포기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의지”(‘산길’, I,16,10)를 갖추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면서 내외적으로 진정한 자기부정을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뿐이며”(‘산길’, II,7,8), “영혼의 의지에 즐거운 것들과 육체에 감미로운 것들, 그리고 세상의 외적인 것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모든 감각적 욕구들을 끊어버림과 정화이다”(‘산길’, I,1,4). 또한 전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버림과 비움, 가난함”(‘산길’, I,13,6; ‘밤’, II.9,4)과 자유(‘산길’, III,20,3), 그리고 경멸과 벗어남이라는 신비적 회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삶의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개인적인 특별한 변화의 체험이 있는데 이것을 영성가들은 신비적 회개 혹은 두 번째 회개라는 말로 표현한다. 두 번째 회개라고 하는 이 표현은 사랑을 통한 그리스도와 충만한 일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예수회의 Rossignoli, Le Gaudier, Lallemant에 의해 본격적으로 신비신학의 한 용어로 정착된다.
를 표현하는 용어와 함께 이해하거나 동의어로 알아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따라 나서기 위해, 그리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CA : ‘영가’의 초판본 1,11). “이러한 벗어버림에서 열심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요함과 쉼을 (빨리) 찾는다.”(‘산길’, I,13,13)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경멸과 그것들로부터 벗어남이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뛰어들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눅 9:23, 16:13). 이것은 “기쁨 ․ 희망 ․ 두려움 ․ 아픔이라는 네 가지 자연적 감정을 다스리고 가라앉히기 위한 완전한 처방이다. 감정들이 가라않고 다스려지면 조화와 차분함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른 많은 보화들이 흘러나온다.”(‘산길’, I,13,5)는 것, 즉 신비적 회개를 말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부-전무의 도식은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덕적 행위에 대한 변증법적이며 역설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말했듯이 영혼이 영적인 은총들과 함께 주어지는 저 형상들과 영상들과 초상들의 얼룩들에 의한 지각들의 효과를 의지적으로 떨쳐버리면 버릴수록 이 은총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영적 보화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것들을 더욱 풍요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지각들을 멀리 던져버리고 순수함과 영(정신)의 자유와 밝음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서 형상들과 영상들과 초상들의 얼룩들에 의한 지각들은 영적인 것들을 덮어버리는 너울들과 가리개들이며, 만일 영혼이 이것들에 의해 성숙되기를 원한다면 즉시 영(정신)과 감각이 이들의 포로가 될 것이고, 그때에는 영(정신)이 단순하고 자유롭게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지성이 껍질일 뿐인 이것들에게 점령되어 있다면 알맹이라고 하는 영적인 은총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에 영혼이 형상과 영상과 부분적인 지식이라는 지각들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이 알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고 거기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이 지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하고 영적인 것인데 영혼은 어떻게 감지하고, 알아들어야 할지 모른다. 또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며, 그것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줄도 모른다. 이 지각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영혼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감각을 통해서 형상들 안에 있는 최소한의 것뿐이며, 그것도 자신의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만 알아들을 뿐이다. 그래서 말하지만, 영혼이 무엇을 알아차리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그리고 애쓸 줄도 모르면서 영혼이 알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저 현시들이 수동적으로 주어질 뿐이다”(‘산길’, II,16,11). 참조, 방효익, 갈멜의 산길: 인간의 능동적 정화, 359-361.
 전무는 전부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동시에 목적이다. 전무의 끝에는 전부이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산길’, II,22,4).
   넷째, 전무는 전부를 진실하게 사랑하기 위한 선택이며, 오로지 전부를 소유하려는 의미에서 바꾸어야 할 자신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학적 특성으로서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이 피조물에 대한 애착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사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대상과 같게 되거나 얽매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자신의 초월적 변화는 물론 ‘전부’이신 하나님과 순수한 일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산길’, I,4,3). 그래서 ‘나’를 비운다는 것은 반드시 ‘너’로써 ‘나’를 채우기 위한 것이듯이 ‘전무-전부’는 구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요구되는 복음적 희생(자기포기)을 말하는 것이며, 복음적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 즉 복음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잣대 역할을 하는 용어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기 위해 나를 변화시키는 동력을 말하는 짝 용어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무는 전부인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전제하는 부정이지 절대로 부정하기 위한 단순한 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전무라는 표현은 어떤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단순한 용어가 아니라 복음적 근본주의를 말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척도로 인간을 하나님과 비교하는 가운데 세상과 인간의 상대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즉 전무는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분 앞에서 유한한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산길’, I,4,3-4) 상대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신비신학적 용어이며, 두 용어가 함께 하나처럼 작용하면서 인간을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좁은 길로 이끌어주고 자신을 비우게 하는 향주덕의 역할과 그 결과를 표현하는 영성신학적 용어이다(‘산길’, II,24,8). 이 말(전부-전무)은 하나님이신 ‘너’로 나를 채우려면, 즉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려면”(벧후 1:4) 우선 나를 비워야 하고, 부정해야 한다는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전무는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이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심’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방법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강생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 정점이 드러나는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서(빌 2:6-11)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하나님이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죽음)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다.’(고후 8:9)는 구원의 핵심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고통의 형상(십자가에서의 모습)으로 바뀌신 것은 ‘죄가 주는 값’(롬 6:23)을 갚아주시기 위함이었다. 이토록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정 넘치는 자기 낮추심’이라는 표현은 모든 신비체험가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할 때 항상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방효익, 예수의 데레사 입문, 248-249.

   다섯째, ‘전무-전부’는 당대의 신학과 철학에서 말하듯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의 주체 안에 있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보나벤투라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형이상학적인 특성으로서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하나님 사이에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전무-전부’라는 용어로 비교하고자 했던 것이다(‘산길’, I,4,4).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피조물)이 지니고 있는 차이 때문에 이러한 비교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전무-전부’라는 용어는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표현이지만 십자가의 요한에게는 오히려 지극히 인간학적이며 영성적인 용어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이며 실체적 특성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비교할 때 피조물의 모든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보다 더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는 영혼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용어이다(‘산길’, I,4,4).
   십자가의 요한이 전무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뵙기를 간절히 원했을 때 나는 당신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했고, 저것에 기대지도 못하면서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당신께는 물론 내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영가’, 1,21)라고 고백했듯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영혼의 감각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 파멸을 혹독하게 겪을수록 하나님과 더욱 일치하게 되고 더욱 커다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영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영적인 부분에)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을 때, 이때가 바로 최고의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영적인 일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산길’, I,7,11)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영혼에게는 모든 사물들이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 스스로도 자신의 비천함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해 역시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전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불꽃’, 1,32).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시기를 원하는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모두 넘겨드려야 한다.”고 하며, “영혼이 사랑과 의지를 통하여 완전하게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 모든 욕구를 없애야 한다.”(‘산길’, I,11,3)고 강조한다. 이런 이유에서 십자가의 요한은 여러 번 반복해서 지성과 기억과 의지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남기지 말고 모두 비워버려야 하며, 감관의 능력을 모두 묶어놓아야 한다(전무)고 수덕적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완덕의 산”(‘산길’, I,13,10)에 오르는 여정이기도 한 전무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방식’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방식’(‘산길’, II,4,5)인 전부이기 때문에, 그리고 시작과 끝이며, 동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전무가 신비신학의 총체적인 개념인 듯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비신학에서 끌어들이는 부정(전무)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나누시는 친교, 즉 하나님의 무한성과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인 십자가의 길의 죽음과 삶의 역동성에서 비롯되는 초월적 친교를 말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비관적 의미에서의 무주의자가 아니며,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위한 전무(nada)가 아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묵상기도에서 관상기도로 이어지는 상태에서 자기 스스로 혹은 다른 이들이 객관화시킨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런 개념을 비우라는 것이지 하나님께 대한 집중까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산길’, II,13,4). 또한 현대의 성격심리학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인간 유형이기 때문에 전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전무의 성인이 아니라 오히려 전부의 성인이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전무)라는 말은 항상 모두(전부)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마 16:16)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지향하고 있는 신앙적 용어이다. 또한 영혼의 사랑의 짝, 즉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절정의 순간에 신부가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일 것이다. “ ‘예’로 향하는 길은 ‘아니오’를 통과한다. 우리는 다시 일치하기 위해 분리되어야 하며, 본래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한다. 그곳에서 부정적 요소가 생명의 작동 안으로 들어가며, 새로운 도로 위에서 모든 처절한 이별은 수고와 갈등, 의심과 고통을 통과한다. 그러므로 신비체험가들이 정화의 길에 포함시킨 많은 것, 즉 악과의 힘겨운 투쟁, 스트레스와 소란, 비참과 절망에서 그들의 의식이 새 생명을 위해 다시 태어난다.” 결국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전무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말로 이야기해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마는 것이며, 동시에 “그분은 나의 전부이시다.”, 즉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  Obras Completas, Monte Carmelo, Burgos 1984, 1688-1689 (Poesía, IX). 테레사 성녀가 죽은 뒤에 성녀의 성무일도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시(Nada te espante 아무도 너를 놀라게 하지 않으리라 / Todo se pasa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 Dios no se muda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니 / la paciencia 인내가 / todo lo alcanza  모든 것을 것을 알게 하리니 / quien a Dios tiene 하나님을 소유하는 이는 / nada le falta  아무런 부족함 없고 / sólo Dios basta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성녀의 자작시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이 그분의 사랑을 맛본 뒤에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놓는다면(갈 5:24)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6:14)고 할 것이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린다면(골 2:14)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약 1:4).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에(빌 1:21)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전무-전부’는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뜨거운 사랑에 젖어 있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후 6:10)고 자랑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2. 일치의 길(全과 無)  원 저자의 책을 역자 가르멜회의 이종욱(안셀모) 신부께서 1997년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라는 책으로 번역한 곳에서 옮긴다. 이 책 자체가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를 가장 잘 정리하였으며 본 저서도 이를 바탕으로 하여 개신교 성도에게 읽기 편하도록, 그리고 작가의 판단에 따라 약간 수정하고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깔바리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었던 때에 ‘완덕의 산’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시 그려졌고, 하나님과의 일치에로 영혼들을 이끄는 여정의 전체 모습을 영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의 지도를 받던 영혼들에게 이 그림을 나누어주었다.
   이 귀중한 도움이 독자들에게 더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의 그림을 그 내용은 충실히 보존하면서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 산의 정상은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이는 영혼이 갈망하는 목표이고, 영혼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목표인데, 특히 등반이 더 엄한 희생을 요구하는 때에 그러하다.

   산의 기슭에서 세 갈래의 길이 시작된다. 
   ① 오른쪽의 길은 지상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이다. 이 길은 산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산을 벗어나 길을 잃게 된다. 여기에 두 가지 말씀이 적혀 있다. 그 첫째는 ‘네가 그것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들을 더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네가 이 길을 통해서는 그 산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② 왼쪽의 길은 천상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인데, 그들은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넘을 수 없는 어떤 바위로 인해 멈춰버린다. 여기도 역시 두 개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 표지판들은 영혼의 즐거움들을 찾거나 그런 것들로 만족해하는 자는 누구나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과의 일치의 정상에 도달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③ 가운데의 길은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길인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완덕의 좁은 길이다(마 7:13). 이 길은 순수한 하나님 사랑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무(無)’로 표시되어 있다. 영예도, 휴식도, 맛도, 자유도, 재능도, 영광도, 안전도, 기쁨도, 위로도, 지식도… 아니고, 이 길은 산의 정상에로 영혼을 직접 인도하는데, 거기서 영혼은 자신이 걸어온 전체 여정 안에서 체험한 무보다도 더한 무의 심연에 삼켜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하나님으로 부유해지는 것은 분명히 이 ‘무’ 안에서이다.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원함 없이 이 모든 것이 내게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여기서는 무의 길은 자신의 한계를 잃고 그 산과 혼합된다. “여기에는 더 이상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법이 없고, 그 자신이 자신의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영혼은 하나님의 힘에 내맡겨지고,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만 이끌리게 된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행하고, 영혼을 마지막 찌꺼기들로부터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고요한 기운들과 하나님의 선물들 덕택으로 영혼의 마지막 한 올까지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아름다운 영혼을 바라보시고 그 영혼을 마치 당신의 정배처럼 사랑하시면서, 당신 자신 안에서 그를 변모시키심으로써 그 영혼을 영원한 잔치에로, 거룩한 침묵과 거룩한 지혜가 다스리는 영원한 잔치에로 들어가게 하신다.
   성인은, 용기를 가지고 무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영혼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산의 밑 부분에 다음과 같은 몇 구절들을 놓고 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라….”  산길, 1,13,11. 참조: 방효익 역 p.95를 보면 더 자세히 나와 있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정상을 향하는 영혼 안에서, 영혼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더욱 변모된다.

하나님

   이 길의 출발점(A)에서는, 영혼 안에 ‘나’는 최고도에 달해 있고, (세례로 인한) 하나님의 실체적 현존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실체적 현존은 영혼의 활동 밖으로 밀려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 소망 ․ 사랑을 훈련함으로써 영혼이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애착들로부터 비워진 자리를 확장시킬수록, 하나님께서는 이 빈 자리를 채워주시고(B), 결국 영혼이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무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하나님으로 완전히 채워지고, 하나님 안에서 변화된다(C).
   이제 우리는 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무(無)와 전(全)’, ‘Nada와 Todo’의 박사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 ‘전’을 소유하는 데에 다다르기를 원하는 영혼에게 있어서, 해야 할 과제는 한 가지뿐이다: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무’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주신다.
   “마치 태양처럼 하나님께서는 영혼들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 계신다.” 그리고 영혼이 비어 있고 정화되어 있음을 발견하시면, “하나님은 그 영혼이 모르는 방식으로 영혼의 발걸음을 초자연적인 선물로 이끄신다.” 불꽃, 3,46-47. pp.136-137.

   따라서 일치의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점진적인 포기를 통해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영혼에 대한 점진적인 지배이고 장악이다. 이것은 결국, “영혼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무), 이때가 바로 최고의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영적인 일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일치는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높은 상태이다.” 산길, 2,7,11. p.145.



1장 일치의 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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