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도와 관상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갈망을 일으켜 주고, 그 갈망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갈망을 실현해 가는 동기로 기도가 일어난다. 그러한 갈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성향도 달라진다. 만일 그 갈망이 외적인 어떤 성취를 통해서 만족될 수 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틀림없이 외향적인 성취를 지향할 것이다. 반면에 그 갈망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 기도의 지향도 내향적이 될 것이다.

 

 

 

1. 기도란 무엇인가?

 

필자가 조사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 교인들 중 60% 이상이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다. 기도를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기도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절반도 자신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 불만족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내적인 성장이나 하나님과 관계 형성에 있어서 진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동일한 내용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 그들의 기도 생활의 효용성을 의심케 하였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도의 목적은 매우 단순하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청원적인 성격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청원의 내용이 변화되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나 건강 등의 개인적인 안녕이나 욕구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내적 교제나 평화로운 관계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통성 기도에 익숙하고 그것을 선호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기도 형태를 물었을 때 침묵 기도를 압도적으로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다(설문자의 76.3%). 예상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 추론해 보건대 통성 기도는 공동 기도 모임에서 인도자와 함께 기도할 때 주로 선호하는 기도 형해이며, 개인 기도에서는 거의 침묵 기도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고 개인적인 취향도 포함되어있다.

통성 기도의 습성은 성령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익숙해졌다. 한국의 성령 운동은 갑작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사회와 경제 구조에 대처하지 못한 채, 고통 받고 억압받았던 사람들을 지탱해 주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라났다. 이 때 기도 내용은 주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기도 형태도 통성 기도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러한 성향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기도 내용 자체도 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고, 기도의 형태도 보다 내면적이고 침묵적인 분위기를 선호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표면적으로는 열심이 줄어들고 영적인 욕구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 기도의 성향이나 양태가 변화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서 기도에 대한 보다 다양한 이해와 다양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보다 성숙한 기도 생활과 신앙 생활로 발돋움을 기약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기도가 가져다주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통로다.

(3) 기도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통로다.

(4) 기도는 관점을 변화시키는 통로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의 요소를 가장 무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정의는 예수님께서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고 가르쳐 주셨음("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하고 그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내가 응답하리라", 65:24; 6:8) 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근거를 제시해 주는 정의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필요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성경의 하나님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기도를 하게 하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미리 아신다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순처럼 보이는 기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이미 그분이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신뢰를 가지게 하며, 동시에 더욱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극을 받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더욱 강력하게 드러내신다.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와 중첩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보다 세분하여 기도를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보편적으로 잘 받아들이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왜 우리의 많은 기도가 천재지변이나 비참한 전쟁을 막을 수 없는가? 그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 안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기도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막을 수 없는 천계지변이나 비참한 전쟁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변개할 수는 없으나 그 뜻을 이루는 방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기에 기도가 결코 무기력하게 되지 않는다.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과 질병, 그리고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실행하시는 동안에도 인간에게 저항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저항도 하나님의 뜻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인간의 투쟁 가운데서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건을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인간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복종 등이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포함하여 마침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결말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받으신 기도로 완성된다.

회의론자는 끊임없이 ''라고 묻는다. 일관성 없는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인간사에 과연 개입하시는가? 개입하신다면 그분은 신뢰할 수 없는 분,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시편,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특히 욥기 등에는 회의론자가 갖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뒤죽박죽 엉키고 설킨 세상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의문을 표출하고 있다. 상처와 배신,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인생사의 문제와 불의한 힘 앞에서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묻는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같이 느껴지는 상황 앞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회의론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그저 고민과 불만과 원망 외에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갈등과 의문을 기도로 드러내고 있다. 언제까지입니까? 왜입니까? 그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와 함께 한다. 너는 내 것이다." 끝까지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음성을 받아들일 때 사실 그들의 물음과 불평과 답답함 그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신뢰로부터 이미 답을 얻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고 한다. 여기에 인내와 믿음을 요구한다.

세 번째 정의에 있어서도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기도 안에서 변화하도록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무슨 내용의 기도를 했을지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가? 아니면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심리적인 효과인가? 기도가 하나님의 현존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결코 자의적인 결단이나 심리적인 효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정직해진다. 기도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어 둔 수치심과 후회스러운 일들을 열어 가는 통로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여기서부터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갈 용기를 얻게된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역할이란 바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하는 말이다.

네 번째, 기도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흐트러진 인간의 관점과 질서를 계조정해 가는 과정을 제공한다. 우주적 관점의 시야를 열어 가게 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얻게 해 준다. 주변 환경에 의해서 왜곡된 진리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42:1-4).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기도와 응답사이에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기도 자체가 신뢰의 표현이며, 그리고 믿음과 희망 가운데서 응답을 이미 받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미 그 곳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23). 그것이 곧 응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응답에는 언제나 "이미 그러나 아직도"(already but not yet)가 적용된다. 이것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1) 기도와 욕구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인간의 욕구이다. 이 욕구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러한 내면적인 욕구가 기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심리학자 울라노브(Ulanov)는 기도는 제일의 언어(Primary spee -ch) 라고 했다. 이 말은 기도가 인간 실존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는 정직한 언어라는 의미이다. 제일의 언어는 명료화된 언어로 출발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겪는 본능과 감정과 표상(images)의 언어와 같다. 때로 그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언어와 표상과 감정의 언어로 섞여나타난다.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경험하는 세련되지 못한 감정에 대한 일련의 반응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보통 기도를 시작할 때 자신의 어두운 부분, 거짖된 모습, 가장된 모습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아를 경험한다. 제일의 언어를 향하여 흘러가는 기도 속에서 자기 자신이 흘러가도록 그대로두면서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기도는 우리 존재로부터 들어주기를 바라는 솟구치는 욕구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제일의 언어에 도달하게 된다. 이 제일의 언어는 세련된 언어가 아니기에 외적인 언어가 제일 언어에다가 옷을 입힌다. 그러므로 기도가 우리의 욕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우리는 그러한 욕구로부터 출발된 기도를 자주 환상으로 물들여 버린다. 즉 자기 만족과 자기도취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으로 잘못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우리 자신의 거짖된 욕망이나 어리석음, 게으름 등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왜곡된 모습을 배우기 전에, 어떤 마술 같은 인물이 무슨 방법으로 뜻하지 않은 선물을 안겨 주리라는 엉뚱한 기대로 우리의 욕구를 분출함으로써 기도의 진실성을 상실케 한다. 기도 속에서 쉽사리 그리고 속히 그 욕구에 대한 만족감과 안위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욕구가 될 것이다. 맹목적인 욕구란 비인격적인 간구에 불과하다. 그 맹목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도 추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을 개의하지 않는 자기 욕구에 대한 성취에 집착하기에 그것을 ㅋㅋㅋ비인격적이라고 한다.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집착은 자기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오히려 그 약한 부분을 보완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는 또 다른 교만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기도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나타냄으로써 역설적인 강함을 체험하게 된다. 신뢰와 순종이 없는 자기 욕구에 집착한 기도는 자기 암시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에 때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인식하든지 못 하든지 스스로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구상하여 그것을 하나님으로 인격화시킨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욕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고 보장해 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욕구의 분출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러한 자기 투사(Projection)적인 기도는 영성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도는 표면적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표현처럼 보이나, 실상은 원초적인 언어를 발설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 듣는 동안 우리 내면에 있는 소리나 심지어 잠재의식 속에 있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욕구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신의 충동적인 욕구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넘쳐나는 욕구에 직면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끊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떠오르는 환상이 아무리 우리를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그것을 무시하지 말고 용기 있게 직면하면 우리는 정직한 자기 자신 앞에 서게 된다. 동시에 그 환상을 직시하면서 그 환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속에 깊이 빠져들어가지 말고 그 환상을 그대로 허락한다. 그러고 그 환상이 우리를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 영혼은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처리하는 가장 현명한 길은 기도 속에서 그 환상을 하나님께로 가져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처리하시도록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한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추구해야 할 중요한 과정은 환상을 어떻게 소유하고(기도의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함), 또 그것들로부터 어떻게 초연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환상과 자아와의 탈동일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감)이다.

그렇게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욕구를 따라 기도하노라면 그 곳에서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그 욕구를 우리 안에서 드러내고 충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을 더듬어 찾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기도를 따라가노라면 하나님이 깊고 강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느낀다(2:13).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들을 필요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우리 내면의 욕구를 주의해 보고,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서,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주목해 보도록 하신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기도 속에서 드러난 우리의 욕구가 어떻게 진전되고, 개방되고, 설명되고, 채워져 가는가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 원하는 것이 폐기되기도 한다. 우리의 욕구는 또 다른 욕구로 확장되고 승화되어 간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자아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용납하고, 사랑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기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욕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의 욕구를 넓혀가는 능력이다. 우리의 욕구가 하나님 자신에게 도달될 때까지 우리의 욕구는 계속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그것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는 욕구와 함께 시작되지만, 그 욕구 자체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기도가 발전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욕구를 만난다면 그 순간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다른 대체적인 요소로 만족시키고 그 욕구를 감소시킨다면(예를 들면 물질적인 만족이나 쾌락적인 만족), 우리의 기도는 죽어 가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기도의 역할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하나는 청원응답의 효과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 형성의 효과이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제임스 프래트(James Pratt)는 전자를 가리켜서 '주관적 기도', 후자를 가리켜서 '객관적 기도'라고 불렀다. 객관적인 기도는 기도의 초점이 기도드리는 그분에게 맞추어져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궁극적인 존재로 믿고, 그분의 뜻을 찾아 그분의 뜻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주관적인 기도란 그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을 빚으면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주 자기 암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자기 환상으로 그 기도를 물들여 놓는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도는 내적으로 혼란과 모순과 충돌이 일어날 때 그분을 향한 하나의 핵심적인 목적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건강하게 통합되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고 역동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일수록 주관적인 기도에서 객관적인 기도로 음겨 가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욕구에 따라 시작된 기도가 점차로 그 욕구를 하나님이 취하시도록 함으로써 그 욕구는 보다 건강하게 승화되어 간다. 그래서 그 기도는 욕구충족의 결과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결과로 발전되어 간다.

 

 

2) 기도는 누구의 일인가?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이 이미 경험하고 맛보지 못한 하나님을 결코 갈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 기도가 단순히 종교적인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로의 초청이라고 한다면, 이미 알려진 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출발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은 기도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도록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기 전에 이미 갖가지 은혜를 경험한다. 그 중에서 기도의 결정적인 동기는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당신 자신을 내주셨다. 그 희생으로 하나님의 양자 된 우리를 하나님은 다시 기도에로 초대하신다.

시나이의 그레고리(St. Gregory of Sinai)"기도는 하니님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미 기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말함이다. 고백자 맥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인간의 본질이 신성화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이다. 그 성육신 사건(Incarnation)은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하나님의 사건이다."라고 했다. 기도를 통해서 신의성품에 참여한다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두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의 참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그의 신성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 이상과 같은 성육신에 대한 통찰력으로부터 기도는 성육신을 내면화하는 내적인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운동 즉 만남의 행위이다. 이렇게 기도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인 성육신의 원리에 대한 역으로 반응하는 운동이다. 즉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포사이스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실 때 기뻐 진동하는 영혼의 선율이다."라고 했다. 만일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되어 그를 움직이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시어 우리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권면하실 때, 기도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기도는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는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갈망을 일으켜 주웠고, 그 갈망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갈망을 실현해 가는 동기로 기도가 일어난다. 그러한 갈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성향이 달라진다. 만일 내적인 갈망이 외적인 어떤 성취를 통해서 만족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틀림없이 외향적인 성취를 지향할 것이다. 반면에 그 갈망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기도의 지향도 내향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대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적인 갈망의 근본적인 지향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이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삶에 포함시키려는 몸부림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도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보다도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수단이기에 앞서, 자발적이고 수동적인 본능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총이다.

 

 

3) 기도와 응답

외적인 결핍으로 인하여 시작된 기도는 우리의 내적 의식을 타오르게 하며 기도에 대한 완전한 응답은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게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고 또한 하나님을 수용한다. 여기서 '수용'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힘은 고갈되기에 끈질기게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수용을 말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한 능력의 에너지를 공급받게 된다.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수용하는 기도는 결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도는 자기 과장이라는 긴장을 완화시키고, 분명한 영적 비전(vision)을 보게 한다. 기도를 통해 어리석음이 깨우침을 받고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며,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문제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자신은 홀로가 아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이 부르심에 정직하게 반응할 때 하나님과 참된 교제는 이루어진다. 기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할지라도, 그 기도는 자신을 초월하여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과 타인에게로 인도한다. 이처럼 사적인 기도가 점점 공동의 기도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마침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기도하는 사람은 깨닫게 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오시고 있다는 증거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도사려 있는 이기주의를 극복하게 되고,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고 타인을 외인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형제를 위한 선행과 희생을 가능케 하므로 기도는 사랑의 교제 행위가 된다.

인간 편에서 기도를 볼 때 기도는 강렬한 욕구 혹은 체념과 탄원으로써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굴복하게 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주 직면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기도가 어찌할 수 없는 수동성과 의존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인간은 기도하면서 언제나 패배감을 맛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꺾으려 하시는 듯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로운 의지에 기초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안에서 인간의 불순한 탄원도 허락하신다. 그러한 탄원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대처를 하도록 인도받게 되고, 처음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비롯된 기도는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역할이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기도의 응답에 대한 회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질서 잡힌 규칙성"을 중지하거나 방해함이 없이, 어떤 방향으로도 사물을 움직이도록 영향을 미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일정한 질서 안에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변개시키지 않으시면서도 인간의 의향에 맞추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즉 인간의 탄원은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와 구원의 의지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세한 의향을 바꿀 수 있다.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은 또 다른 기도이다.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들음의 기회, 듣기 위한 더 많은 노력 등이 수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끌려 기도하게 되고, 갖가지 훈련의 요청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전통적인 신비주의자는 기도 응답의 유형을 정화, 조명, 연합이라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기도에 헌신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정화의 단계에서는 기도를 하는 동안 악의 실체를 만나고, 그것과 투쟁을 겪으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조명의 단계에서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영혼의 정체성의 항구에 다다르는 내적인 평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고양된 정신으로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게 되고, 내적인 소동이나 격정으로부터 해방을 얻는다. 이 과정적인 응답의 결과로 더 많은 기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연합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현저하게 자아가 고양되고 확장되는 것을 느끼며, 사랑의 의식이 충만하게 된다. 여기서 기도자는 언어를 초월하여 영이라는 언어에 도달하게 되고, 복잡다단한 논리와의 싸움을 멈추게 된다. 탄원 기도 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고통의 제거보다는 고통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장소임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자신의 고통을 포착하고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러한 의미의 기도를 말한다. "저의 기도는 당신의 뜻이옵니다. 당신께서는 내 안에 기도를 창조하셨나이다. 기도는 내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것이옵나이다. 당신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려고 하는 의지도 당신의 뜻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의 간구를 당신께서 성취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하옵소서."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자들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과 응답의 소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너의 구원자이다."라는 말씀이다. 밀러(Patrick D. Miller)는 이 하나님의 응답의 언어를 '구원의 신탁' 이라고 부른다. 이 구원의 신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절망과 불평 속에 포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졌던 이사야의 예언(40-55)이다. 직접적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구원의 신탁으로서 하나님의 응답이 갖는 성격을 잘 보여 준 내용이다. 구약 전반에 드러난 구원의 신탁이 일관된 틀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밀러는 구원의 신탁의 일반적인 특성을 이사야 41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신탁의 내용은 구약의 전반에 걸처 나타난다.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 등에 걸쳐서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응답으로서 구원의 신탁은 창세기로부터 출발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6) 앞으로 전개되는 어떠한 일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구원의 신탁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아브라함에게 전달되었고,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와 미래에 대한 약속을 견고하게 한다. 출애굽 시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로 인해 두려워하고 불평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4:13). 이 신탁의 말씀 안에는 이미 부르짖는 이들의 비탄과 불평에 대한 어떤 내용을 암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과거 어느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다(5:22 참고). 또한 그들이 다시 하나님에 의해서 치유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원의 신탁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내가 너와 함께 한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고 구원할 의도가 있다(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신탁이 그들에게 응답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자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요청한다.

미래적 약속으로 주어진 이러한 구원의 신탁이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는가? 성경은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자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모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임신이 불가능했던 부모는 아이를 갖게 되었으며(아브라함, 사라, 한나), 심한 갈증으로 죽어 가던 이들이 구원하는 생수를 얻었다(하갈, 삼손, 광야의 백성들). 돌림병이 창궐할 때 히스기야와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으며, 적들을 격파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아사, 여호사밧, 이스라엘 백성들). 병든자는 고침을 받았고(미리암, 히스기야, 엘리야를 돌본 과부의 아들, 시편의 탄원자),죽은 자는 살아났으며(수넴 여인의 아들, 다비다),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했던 이들은 생명을 보존했다(기드온, 바룩, 시편 기자). 이렇게 기도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행동은 인간을 통해 중재되기도 한다. 삼손이 힘을 되찾자 다곤 신전을 단숨에 무너뜨렸고,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슬기롭게 다스렸다. 하나님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신적인 섭리를 보이셨으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용서를 위하며 심판을 보류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밀러가 이 구원 신탁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구원 신탁에 대한 실제적인 증언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와 신적인 응답 사이의 진밀한 연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 신탁은 특정한 사건과 개인의 사정과 연결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행동이라는 입장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응답하기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적 상황에 개입하신다. 인간적인 상식과 지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으로 제시하신 이 보편적인 구원 신탁이 사유화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하심에 대해 철저한 신뢰가 일어난다면, 이미 그 신탁은 미래적 사건이 아니고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응답이 된다. 그리고 부르짖음의 환경에서 이미 그분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신탁의 말씀이며 그것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다. 그 절대적 신뢰는 기도 안에서 그 구원 신탁을 계속적으로 듣고, 그것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응답으로서 기도란 기도의 응답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4) 기도와 성령

바울 서신에서는 기도와 성령은 불가분리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서신서 몇 군데에서 그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는데, 에베소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한다(6:18). 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현존을 전제한다. 만일 성령과 상관없는 단순한 종교적 욕구로부터 비롯된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기독교 안에서의 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보여 주는 대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감사와 찬송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15-16). 다른 하나는 로마서 8장에서 보여 주는 대로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6-27 ) 즉 성령은 "우리 연약함"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이해하건대,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든지, 외부의 유혹에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이든지 성령께서는 탄식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

아직 완전히 구속받지 못한 인간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마땅한 간구가 되는지 모른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에게 알려야 하는 모든 것을 말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기도가 가능하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셔야 한다. 그래서 로마서 8:26"성령이 우리를 돕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변하신다. "고 말한다. 이렇게 성령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매여 있다.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개인적인 욕구나 종교적 동기가 결코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기도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심으로 우리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가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종교적인 욕구나 개인적인 욕구가 동기가 되어 열심을 내는 기도라면 그것을 반드시 기독교적 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기도한다는 행위 이전에 기도하는 사람의 존재 방식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일이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서술하고 있다. 로마서 8장은 기도자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8:14-15). 즉 기도할 때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성령인데, 그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자가 성령과 깊은 관계적 존재일 때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은 기도자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4:6). 성령은 우리의 기도 안에서 그분 스스로가 말함으로써 그의 현존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성령이 현존한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자신의 현존을 알린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현존에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찾아야 하고 또 찾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구속받지 못한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우리의 일이기 전에 성령의 일이며,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기도 가운데서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실존임을 고백하는 순간이다.

 

 

5) 성경과 기도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해 살펴봄으로 기도와 성경의 관계를 알아보자.

먼저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 보세요. 특히 4복음서(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복음)를 천천히 읽으면 말씀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순서와 기도 사이의 연결 고리를 설명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우선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6장을 보세요. 그리고 5-8절을 정독하십시오."

연필로 이 구절을 적어 보세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5~8)

 

"여기서 우리는 요란하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장소에서 고요하게 기도를 시작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해서, 또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방인들처럼 세상의 일에 대해서 불필요하고 많은 청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장 9-13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기도의 형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위대한 지혜들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9~13)

 

그다음에 14-15절을 보세요. 그러면 기도의 효과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6:14~15)

 

, 이번에는 마태복음 7장으로 넘어가봅시다. 7절에서 12절을 읽어 보면 기도의 방법과 희망 속에서 담대해지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와 같은 강력한 표현들은, 기도할 때 절박함을 가지고 행해야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로써 기도는 행동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행동보다 기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기도의 주된 특성이지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7~12)

 

마가복음 1432-42절은 기도의 실행에 대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같은 기도를 되풀이하십니다.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14:32~42)

 

그리고 누가복음 115-8절에 나오는 한밤중에 친구에게 찾아가 빵을 얻으려는 사람의 비유와 누가복음 181-8절에 나오는 끈질긴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제판관의 비유는 끊임없이 간청하여 원하는 바를 얻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11:5~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 1~8)

 

이 구절들은 우리가 언제나, 어떠한 장소에서도 늘 기도해야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설명하는 것이지요.

요한 복음서에서는 주님 안에 머무는 기도인, 내적인 기도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먼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신 심오한 대화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되고 영적인 내적 예배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는 마치 영원한 생명으로 흐르는 물과 같기에, 진실한 기도는 끊임이 없는 것입니다(4:1-42 참조).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4:1~42)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 154-8절은 우리가 훨씬 더 분명하게 내적인 기도의 필요성과 그러한 기도의 힘과 능력을 깨닫도록 이끌어 줍니다. 즉 내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계속 기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현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15:4~8)

 

끝으로 요한복음 1623-24절을 읽어 보세요.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신비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 또는 '예수 기도'로 알려진,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의 문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 기도를 자주 되풀이할 때 기도의 위대한 힘을 알게 되고, 아주 쉽게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3~24)

 

이 기도의 힘은 사도들의 행적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주님의 기도'를 배웠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기도의 신비를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기도가 성공적인 단계로 나아가도록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3-24)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운 이후,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경에 나온 기도에 대한 가르침들이 이토록 넘치는 지혜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잘 읽는다면, 서로 연결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들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기도의 특성들을 설명해 주는 구절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기도의 실행에 대해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 쉬지 않고 부지런히 기도를 드린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믿음으로 기도를 통달하게 된 것입니다(4:23-31 참조).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령이 넘치도록 충만해지면, 기도의 열매로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이는 사도행전 16장을읽어 보시면 잘 이해될 것입니다. 특히 25-26절을 읽어 보십시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16:25~26)

 

그런 후에 사도들의 서간 순서에 따라서 기도를 하시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 기도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5:13~16 참조)

-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신다(1:20-21; 8:26 참조)

-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아주 절실하다(6:18 참조)

- 기도는 고요함과 내적 평화를 준다(4:6-7 참조)

- 끊임없이 기도해야한다(5:17 참조).

-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한다(딤전 2:1-5 참조).

 

그리고 우리가 성경에서 기도의 깊은 의미를 알아내고 주의 깊게 오랫동안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숨은 신비한 계시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급하게 대충 읽어 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지금까지 일러 준 바와 같이 성경이 어떠한 지혜와 체계를 갖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도를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밝혀 왔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4복음서에는 주님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기도에 대한소개, 기도의 실제적인 형식, 기도의 조건, 마가복음에는 기도의 사례들, 누가복음에는 비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내적인 기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사도행전에는 기도의 실행과 그 결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서간과 요한계시록에는 기도의 실행과 밀접하게 관련된 많은 특성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형제님도 오직 성경만이 구원을 위한 유일한 스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관상 기도란 무엇인가?

 

 

1) 관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상 기도를 말하기 전에 관상이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관상이란 말은 어떤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기보다는 어떤 상태나 태도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관상'이라는 명사적 형태보다는 '관상적'(contemplative)이라는 형용사적 형태를 먼저 이해할 때 관상 기도, 관상수도회, 관상적 태도라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관상적'이라는 말은 관계적인 용어이다. 즉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정도가 자기 몰입적인가 혹은 자기 초월적인가에 따라서 관상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늠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관계에는 나와 너(그것)의 관계를 말한다. 즉 나와 사물의 관계,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나와 하나님의 관계 등으로 확대해 갈 수 있다. 내가 자연을 감상하거나 음악을 감상한다고 할 때 관상적 태도로 접근할 수도 있고, 이 태도와 정반대로 자기 몰입적 태도로 접근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기 몰입적 태도로 자연을 감상한다고 하자. 이 때 자연을 감상하는 자신은 감상하는 주체가 되고, 자연은 감상을 당하는 객체가 된다. 여기에서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대상을 분석하고 판단함으로써 이해한다. 음악을 감상할 때도 음악을 감상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고, 감상의 대상인 음악이 있다. 여기서도 음악 감상자는 음악을 대상으로 접근하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지식을 통해서 그 음악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에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을 결코 극복할 수 없기에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은 자주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관상적 태도로 자연과 음악에 접근한다면 나와 자연, 나와 음악이라는 이원론적 태도로부터 자기를 대상에게 넘겨주어 주체와 대상이 하나 되는 자기 초월적 태도를 지니게 된다. 내가 자연이나 음악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주체자가 아니고, 자연이나 음악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어느 시점에서는 나와 자연, 나와 음악이 하나 되는 단계에 이른다. 내가 대상을 통제하는 주체자로 머물러 있는 동안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뿐 결코 하나 됨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넘겨주는 초월적 태도를 취한다면 대상을 이성적으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즐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식을 경험론적 지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극복된 하나 됨의 결과이다. 우리는 엘리엇(T. S. Eliot)의 작품인 '사중주'의 드라이설베이지즈(The Dry Salvages)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난다. "음악이 깊게 들리네, 더 이상 음악이 들리지 않네, 음악이 곧 나인걸."(Musicheard so deeply/ That it is not heard at all, but you are the music)이라는 구절이 있다. 첫 구절에서는 나와 음악이라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점점 음악을 통제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감상자와 음악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극복됨으로 관상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 음악을 듣는 자의 입장에서 관상적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전혀 다른 대상으로 접근해 갈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기존에 알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누구와 같다."든지 "누구처럼 생겼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말하기보다 내가 먼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접근해 간다. 이러한 태도를 자기 몰입형적 태도라고 한다. 그러한 태도로는 다른 사람과 진실한 만남이 가능하지 않다.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중심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워도 주체와 객체라는 거리는 좁힐 수 없다. 반면에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면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일 때는 판단 없이 상대방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상대방을 누구와 같은 사람으로 접근하지 않고, 그 사람 자신에게로 다가간다. 이러한 상태를 관상적 태도라고 한다. 나라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가 하나 되는 것을 지향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가 원숙하게 될 때 비로소 관상적 체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관상적 태도를 하나님과 관계로 확장시켜 간다면 관상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와 하나님을 주체와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의 대상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리감으로 표현한다. 물론 하나님의 초월적 속성을 말할 때 하나님은 절대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과 간격을 좁힐래야 좁힐 수가 없다. 그저 인식 차원에서 가깝다 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에는 내재적 속성이 있다. 이 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이루고 계신다. 결코 주체와 객체로 분리해낼 수 없는 분이다. 분리된다고 할 때 벌써 나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사에 나타난 탁월한 영성가들은 하나님과 하나됨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의식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남으로 자기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그들은 자주 신부와 신랑으로 비유하면서 둘이면서 둘일 수 없는 상태로 설명하였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경험도 전통적인 영성가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예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상적 체험의 극치이다.

 

 

2) 관상 기도라는 말의 회자 배경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관상 기도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말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기도에 있어서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혹시 비성경적인 어떤 방법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둘 모두는 오해로부터 비롯된 관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기도는 다 관상 기도라고 말해야 한다. 기도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만남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형성을 제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 친밀성을 이루어 가는 동안 주체와 객체의 간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기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태도를 지닌다면 그것이 관상적 태도이고 그것이 또한 관상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가 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한 기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형식상의 기도일 뿐이지,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관상적이 아닌 기도 행위는 엄밀히 말해서 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오늘 교회 지도자뿐만 아니라 평신도 가운데서도 관상 기도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높아 가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 생활에 대한 열정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도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많이 떨어지고 있다. 그 불만족의 원인이 예상과는 달리 기복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을 설문에서 보여 주고 있다. 반복되는 자신들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소통과 친밀한 관계 형성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즉 이 연구 보고서는 그들이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를 이어 가고 있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적 변화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독백적 기도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해 깊은 의혹과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왜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라고 하는데 독백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기도자의 태도와 드리는 기도 내용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드리는 기도의 일반적인 주제는 현안 문제나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집중되어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도를 하는 동안 그 현안 문제나 내면의 욕구가 어떻게 해소되느냐에 집종할 수밖에 없다. 이 때 기도자의 일차적인 초점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자. 그는 하나님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방보다는 자신의 현안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그러한 문제 해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적 소통을 모색하기는 하지만, 그 기도에 있어서 그 관계 모색이 직접적인 관심거리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맛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지속적인 기도 생활 가운데서도 답답함과 영적인 메마름을 해소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관상 기도라는 말이 기도에 대한 새로운 해법처럼 등장했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방법의 문제보다는 태도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그 다음에 방법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관상기도란 새로운 방법의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기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도 쇄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관상 기도라는 용어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상 기도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사건(10:38-42)에서 관상적 전통을 찾곤 한다. 전통적으로 마리아를 관상적 사람의 대표적 유형으로 꼽는다. 그 이유는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주변의 일거리나 당면한 문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현존하시는 예수님 그 자신에게 전적으로 관심을 쏟아부음으로써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러한 태도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관상 기도의 태도이며 목적이다. 관상 기도는 주장하지 않고 순종하는 태도이다. 관상 기도는 서둘러 말하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며 듣고자 하며 정직하게 반응하고자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갈망한다. 그러한 과정이 거듭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 자신의 의지가 하나로 일치되는 경험을 하며, 보다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발돋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는 오늘 현재 행해지고 있는 기도 생활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이며, 자기 몰입적 신앙 태도로부터 자기 초월을 향한 하나님 자신에게로 다가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3. 관상의 역사적 전통

 

 

1) 플라톤 철학의 관상

영성사에서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치 경험을 말한다. 관상이라는 말은 기독교 영성에서 사용되기 전에 헬라 철학에서 이미 사용되기 시작했다.

플라톤 철학에서도 관상이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를 지닌 인간은 늘 불안하고 방황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아름답게 하는 절대선을 항구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절대선은 관상(theoria)을 통해서 항구적으로 성취된다. 즉 관상은 사랑과 지식을 통한 고양된 정화의 열매이며, 영혼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인 이성(nous)이 고귀한 원천과 동화될 때 비로소 그 관상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의 관상 이해 뒤에는 현상 세계와 이데아 세계, 표면적인 지식과 진정한 지식, 한시적인 것과 불변하는 영원성 등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관상이란 덧없는 세상에서 유리 방황하는 인간 이성(nous)이 절대자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현상 세계에 숨겨진 이데아의 세계를 발견하고 마침내 이두 영역이 하나로 연합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철학적 관상은 필로(Phillo, B.C. 20-A.D. 50), 플로터누스(Plotinus 205-270), 프로클루스(Proklos, 410- 485)에게 전승되면서 철학으로부터 종교적 차원이 현저하게 강조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은 후기 교부 시대와 서방기독교의 관상적 전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시작된 관상적 경건이라는 이상은 프로클루스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플라톤이나 플로티누스처럼 프로클루스는 인간이 신으로 복귀가 가능한 것은 영혼에 있는 신적인 것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로티누스와는 달리 그는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일자(一者)의 영역에 조금도 참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참여 불가능한 일자에 대한 지식과 관련해서 부정의 길(apophatic way)을 선택한다. 영혼은 불가능한 그 탁월한 지식을 향하여 올라간다. 인간의 영혼은 그 본성을 향하여 열망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그 일자에로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자와 공존해야 한다. 일자와의 공존하는 길로서 우리는 다른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를 일종의 관상이라고 지칭하는데 그것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도달한다. "이러므로 파르메니데스는 하나의 부정에 의해서 모든 부정을 제거하였다. 그는 일자에 대한 관상을 침묵으로 마친다." 이러한 부정의 길은 그 이후 기독교의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관상적 신비주의에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헬라 철학에서는 활동(Pra- xis)과 관상(theoria)의 관계를 논할 때 관상을 활동에 대해서 더 탁월한 위치에 두곤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완성을 영의 완성 혹은 삶의 비물질화와 영성화 안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활동(Praxis)이란 육체적인 일이든 정신적 인 일이든 외적 활동과 관련된 일을 의미한다. 반면에 관상(theoria)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지적 인지를 말한다. 이 둘의 영역은 실제적으로는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기독교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활동은 비실재하는 감각적인 세계를 향하고 있지만, 이데아의 비전은 순전히 영적 세계와 지고선(至高善) 자체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지고의 지적 비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비실재적인 감각적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한 무정넘(apatheia)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금욕 수련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초기 교부들에게 기독교적 금욕 수련의 이론적 원척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활동(Praxis)은 더 이상 외적인 활동을 의미하기보다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인추구, 그리고 덕성과 완덕을 이루고자 하는 투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덕목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 활동은 관상을 위한 필요한 선결 조건이라고 믿었다.

 

 

2) 동방교회의 활동과 관상

로마 가톨릭적인 입장에서 활동적인 생활이란 가르침이나 설교 혹은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삶을 의미하며, 관상 생활이란 카르투시오 수도회와 같은 봉쇄 수도자들을 의미했다. 초기 동방 교부들의 저서에서 이 두 영역의 의미는 서방교회와 조금 달랐다. 활동적인 생활이란 덕을 획득하고 정욕을 극복하기 위한 금욕적인 노력을 의미하며, 관상 생활이란 하나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방 교부들의 견해에 따르면 봉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활동적 삶에 종사할 수 있으며, 세상에서 완전히 외적인 봉사에 헌신하고 있는 의사나 사회사업가도 내적인 기도를 실천하며 마음의 침묵을 획득했다면 관상 생활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동방 교부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기독교 플라톤주의자이면서 기독교적 관상 전통을 세워 주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은 오리겐(Origen)과 그의 영향을 받은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관상과 활동의 조화로운 관계를 발전시킨 사람은 역시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주의자인 폰타쿠스의 에바그리우스(Evagirus of Ponticus, 346-399)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은 닛사의 그레고리의 관상의 길을 앞서 열어 놓은 선구자라고할 수 있다. 오리겐은 창세기 말씀인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모양(likeness, 1:26)을 언급하면서, 타락이란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의 모양을 회복하는 것이며, 관상의 원래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완전한 관상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점차적인 진보를 세 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점차적인 진보를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이 도덕적 정화를 통해 새로운 단계의 영적 진보를 준비한다. 오리겐은 이러한 기독교적 덕목을 실천하고 죄악과의 투쟁을 활동(Praxis)이라고 말한다. 다음 단계로는 그 덕목이 실현되고 그래서 변화를 겪은 영혼은 하나님 안에 있는 피조 세계를 보게 된다. 헬라 철학적인 용어로 지적인 관상(theoria)에 이른다. 그러나 오리겐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로 들어가는 관상을 말한다. 그것을 신학(theologia)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신학이란 교부들에게 있어서는 사변적 반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랑으로 가득 찬 정서적 응시 혹은 일치를 말한다. 그래서 오리겐은 가장 차원 높은 관상적 상태를 아가서에서 찾고 있다. 오리겐은 활동적인 참에 비해서 관상적인 삶에 더 우선권을 부여한다. 그에게 있어서 활동적인 삶이란 정화적 활동이며 관상을 위한 준비 작업이다. 어떤 측면에서 관상은 영혼에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비전이기 때문에 관상이 활동에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모세의 생애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 차원에서 관상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로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의 빛을 경험한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위해서 두 번의 시내산을 오를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고자 하지만 깊은 어두움으로 휩싸인다. 그레고리는 이 모세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부분적인 하나님 경험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받을 수 없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을 봄으로써 더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타오른다. 하나님께 오르는 그 열망은 끝이 없다. 오리겐과 그레고리의 관상의 경험은 무엇인가 본 것으로 시작하여 아무것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진행해 가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영적 여정을 활동적인 생활(Praxis, Prakti -ke)과 관상 생활(theoria)로 나누어 구분했다. 에바그리스우스는 이 구조를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즉 활동적인 생활, 자연에 대한 관상(Physike), 하나님에 대한 관상(theoria)으로 보다 세분화한다. 그에게 있어서 관상 생활은 소위 활동적인 생활인 회개와 더불어 시작된다. 회개란 단지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 즉 근본적인 회심, 삶 전체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 두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에서 구도자는 자신의 인간적 본성을 왜곡시키는 뿌리 깊은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정욕'(pathos)이란 질투, 육욕, 억제되지 않는 분노 등처럼 영혼을 거세게 지배하는 무질서한 충동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욕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죄악이다. 영적 구도자는 자기 마음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동안 자각이 증대되면서 절제와 분별력을 획득한다. 활동적인 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정넘(apatheia)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무관심(apathy)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욕망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롭고 보다 선한 에너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감정의 부재 상태가 아니라 재통합과 영적 자유의 상태이다. 이러한 사상이 서방교회에 전달되면서 카시안(369-435)은 무정념(apatheia)을 마음의 청결(Puhtas Cor -dis)이라고 번역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무정념을 사랑과 연결시키면서 "아가페(Agape)는 무정념(apatheia)의 소산이다."라고 했다.

두 번째 관상 생활로 자연적 관상(Physike)을 말한다.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사물을 하나의 성례로 취급하는 것이며, 자연 전체를 하나님의 책으로 보는 것이다. 그 시대의 한 지혜자로부터 사막의 안토니가 "당신은 책으로부터 위로를 박탈당하고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질문을 받았을 때, 안토니는 "철학자여, 피조된 자연이 나의 책이며,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어할 때마다 그 책은 바로 내 옆에 있다오."라고 대답했다. 이 자연적 관상을 '첫 번째 자연적 관상''두 번째 자연적 관상'으로 나눈다. 전자는 육체의 감각에 의해서 감지되는 물질 세계이고, 후자는 영적 실재인 신적인 영역을 지향한다. 즉 자연적 관상의 중요한 목적은 성경의 내적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다.

세 번째 관상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관상(Theoria)이다. 더 이상 피조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매개적인 사랑의 연합 안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직접 하나님을 만난다. 신성은 말과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이므로 이러한 관상을 하는 동안 인간의 정신은 단순히 응시하거나 접촉에 의해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개념과 말과 형상을(추론적인 사유의 차원) 초월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러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기도할 때, 당신의 내면에 신성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당신의 마음에 어떤 형태의 인상도 남기지 말며, 비물질적인 방법으로 비물질적인 분에게 다가가라‥‥ 기도는 모든 생각을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동안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지성은 복되도다. " 이것은 관상이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의식은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통일성에 대한 의식은 고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모세의 생애에서 구름에 둘러싸인 시내산에 오른 모세의 관상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여기에서는(구름에 둘러싸인 산 정상) 더 이상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 낸 형상이나 개념으로 하나님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만들며, 하나님 자신을 선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념과 형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재보다는 신성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형상적이고 비추론적인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그리스어 원전에서는 종종 평정과 내면의 고요를 의미하는 헤지키아(hesychia)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것은 경청하는 태도라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침묵을 의미한다. 더 자세한 것은 후에 더 논의하겠다.

이상과 같은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하고 있는 세 단계 영적 여정의 구도는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이 단계는 마치 연속적인 단계인 듯하지만, 사실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존하는 세 개의 심화되어 가는 차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영혼의 정욕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첫째 단계 또는 활동적 단계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에바그리우스의 구조에서 사랑은 지식(gnosis)보다 낮은 차원에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닛사의 그레고리가 이 관점을 뒤집어 "지식은 변형되어 사랑이 된다."고 했다.

 

 

3) 서방교회의 활동과 관상

서방교회에서는 베네덕도 수도회가 관상과 활동의 관계성을 정립해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수도적 삶의 총체적인 특징인 '하나님의 일'(Opus Dei)이라는 표어와 '기도하고 노동하라'(Ora et Labora)는 표어를 통해서 베네덕도 수도회의 관상과 활동의 이상적인 조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말은 기도와 일을 동일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이 수도자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심정으로 기도에 참여했기에 그것을 성무일도라고 했다. 반면에 노동이 수도 생활에 맞도록 선택되고 조정되면서 관상적 생활에 일부가 된다는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기도와 일은 수도 생활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을 이루고 있다.

베네덕도 수도회는 수도자들의 하루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즉 성무일도,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육체 노동이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시간을 정해 놓았지만, 기후와 계절에 따라서 유연성을 허락하기도 했다. 예를들면 겨울에는 들일이 적기 때문에 독서 시간을 더 많게 하고, 여름에는 그 반대로 행하기도 했다. 형식상 베네딕도 수도 생활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매우 소중히 여긴 것처럼 보이나 실제적으로 기도를 하든지 노동을 하든지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봄(vision)에 있었다. 베네택도 수도 생활 규칙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도를 하든지 노동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 즉 활동(Praxis)이고, 그 활동이 지향하는 목표는 더 이상 일이 아닌 관상(theoria)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볼 때는 활동이 관상의 선행 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베네딕도 수도회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유형은 활동의 결과로 얻은 관상이 다시 활동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활동 중의 관상 생활에 이르는 것이다. 그 관상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관상을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활동 중의 관상을 누리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그것을 하나님의 일(Opus Dei)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세상과 유리된 소위 관상 수도회에서 보여 주고 있는 활동과 관상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후기 증세에 이르러 탁발 수도회 즉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라는 계속 수도회가 탄생하면서 활동과 관상의 유형이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관상과 활동의 통합적 유형인 사도적 활동이다. 도미니코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대 헬라 철학과 교부 시대의 이상을 통합하고 있다. 즉 활동이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외적인 활동을 지칭할뿐만 아니라, 도덕적 정화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에 관상이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며, 하나님 그 자신을 바라보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관상은 헬라적 관상 이해와는 달리 순전히 지성적(혹은 철학적) 관상이 아니고, 개인의 믿음과 사랑의 행위와 관련된 신앙적 관상이다. 기독교적 관상이 순전히 지성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몰가치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관상과 활동은 자연스럽게 완덕을 추구한다. 사랑이 관상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의 동기요 원천이다. 사랑과 관련하여 관상적 삶과 활동적인 삶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관상적인 삶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면 그것은 활동적인 삶이다. 여기서 관상과 활동이란 그들이 서로 완덕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더 높은 상호활동으로 발전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탁발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기도와 성무일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고, 제한된 수도원의 공간을 뛰어넘어 낮에는 이웃 사랑과 복음 선포 등의 사도적 활동을 실천했다.

 

 

 

 

 

 

 

 

 

 

 

 

 

 

 

4. 다양한 관상의 길

 

 

1) 관상의 단계

기도를 보다 심도 깊게 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오늘날 명상 기도(meditation), 관상 기도(contemplation)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 기도의 주체자인 자기 자신이 기도를 끌어가지 않고, 기도를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기도의 주체자가 되시도록 하는 기도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나온 용어이다. 이 용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관상 기도를 명상 기도의 한 부류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관상이라는 라틴어인 'contemplatio''meditatio'라는 말과 동일하게 '명상'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관상이나 명상이 음성(vocal prayer)기도와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적인 전통에 따르면 명상과 관상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그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시킬 수 있다. 명상 기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를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음성 기도와 명상 기도와 관상 기도는 그 심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우르반 홈즈(Urban Holms)는 기도의 종류는 기도 하는자 편에서 볼 때 집중하고 있는 그 지향성의 연속체(a continuum of focused intentionality)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성숙한 기도의 성향은 집중하는 농도의 정도가 점점 희박해진다는 의미이다. 고전적으로 관상 및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기도가 그렇다. 성 빅토르 리처드 (RichardofVictor, 1173년 사망)는 관상을 "지혜의 나타남에 대해 놀라움으로 정지된, 마음의 자유롭고 보다 통찰적인 응시"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시 명상과 대조하여 "관상은 지각된 사물 안으로 확장된 통찰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응시인 반면에, 명상은 사물에 대해서 열심히 추구하는 마음(지성)의 주목이며,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영혼의 주의 깊은 응시"라고 정의한다. 교회사에 나타난 영성가들이 자주 하나님과의 영성적인 관계를 결혼의 유비로 설명하고 있는데, 기도의 심도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초기신랑과 신부와의 만남은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서로 간에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기 위하여 많은 말이 오간다. 그러나 점차 관계가 무르익으면서 많은 말이 하나의 표정이나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서 그 표정이나 느낌이나 상징적인 행동 안에 그만큼 많은 말과 의미가 담겨지게 된다. 결국 오랜 결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교제의 수단은 주로 침묵과 느낌이다. 기도의 성숙도를 이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성 속에서 침묵은 매우 풍부한 마음의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성숙한 기도에 이를수록 그 희구하는 의도성의 농도가 점점 희박한 쪽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이유는 주장하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상대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 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써 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 경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랭함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heartfelt) 경험이요, 정감적인(affective)인 경험이요, 분석적인 경험이 아니요, 직관적인 경험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체험의 상태에 대해서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고 은총이요, 이해가 아니고 열망이요, 부지런한 독서가 아니라 열렬한 기도요, 선생이 아니고 배우자요, 명료함이 아니고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요 불"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영성가들은 관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즉 영적 여정의 극치 즉 하나님과의 관계적 일치의 정도에 따라서 그 상태를 다양하게 나누어 묘사하곤 했다. 신비신학을 최초로 종합시킨 알바레즈 데 파즈(Alvarez de Paz)는 묵상 기도를 네 가지 기본형으로 나눈다. 즉 추리적 묵상(discursive me -ditation), 정감 기도(affective prayer), 불완전한 관상(in -choat contemplation), 완전 관상(perfect contemplation) 등이다.

추리적 묵상은 초자연적 진리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리가 끝나면 묵상은 끝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정감적 기도나 명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묵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성이 제시하는 초자연진리에 대한 의지적 사랑의 행위이다.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는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의지가 사랑의 행위로 부풀어 오를 때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그 때 비로소 영혼은 참으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추리 작용은 단순히 사랑을 일으킬 준비에 불과하다.

정감의 기도란 의지 작용이 지성의 추리 작용보다 우세한 형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지성보다 사랑이 우세한 단순화된 묵상이다. 추리에서 의지의 활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추리적 묵상과 영적 독서는 정감 기도 실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여기서 의지의 행위를 자극하는 자료를 얻게 된다. 정감 기도의 실천은 묵상 재료를 하나하나 고찰해 나가다가 의지의 정감이 유발되는 매순간 추리 묵상을 잠시 멈춤으로써 가장 잘 수행되어 나간다. 정감의 기도를 적절히 활용하면 많은 영적 유익을 얻는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정감 기도는 추리적 묵상에서 오는 무미건조함에서 잠시 벗어나 쉬게 한다. 정감 기도는 지나친 내적 성찰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의 노력에 너무 의탁하지 않게 한다. 정감 기도는 본질상 의지의 작용이고 따라서 사랑의 행위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갖게 도와준다. 그것이 주는 마음의 위로와 감미로움 때문에 기독교적인 실천에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불완전 관상은 지극히 단순화된 수덕적 기도의 한 형태이다. 먼저 묵상에서 사용된 추리는 이제 단순한 지적 응시로 바뀌고, 정감 기도에서 체험한 정감은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애정 어린 관심과 합일된다. 이 기도는수덕 기도와 신비적 기도 간의 다리 노릇을 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가 수동적으로 영혼 안에 작용하기 직전의 최종적 단계이다. 그렇기에 이 단순함의 기도에서는 습득적(active) 요소와 주부적(infused) 요소가 혼합됨을 흔히 체험하게 된다. 습득적 관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도자가 충실하면, 주부적 요소는 점차 증가되어 마침내 기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관상 기도에 있어서 습득적 요소가 점차로 줄어들어 가고 주부적 요소가 확대되어 가면서 기도자는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기도자는 추리적 지식이나 탐구적 지식보다는, 직관적이면서 사랑에 찬 지식을 맛보게 된다. 그 맛은 즐거움과 찬탄과 감격이다. 특별히 지성적인 활동보다는 사랑의 정감이 활발하게 작용하는데, 그 사랑의 활동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사랑은 집착에서 자유롭고 오히려 사랑하는 분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활동이다. 이러한 관상의 좋은 본보기로는 자연에서 경험되는 미적 경험이다. 자연을 바라볼 때 자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기적인 혜택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 그것을 바로 관상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의 일치 체험과 자연에서 경험하는 관상 체험이 매우 유사하다. 오먼(Jordan Aumann)은 주부적 관상(완전 관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1) 하나님 현존의 체험이 현저하다.

(2)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하는 느낌을 받는 다.

(3) 본성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 있 다.

(4) 능동적이기 보다 훨씬 수동적이다.

(5)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잡스러울 수 있다.

(6) 관상자는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 을 받는다.

(7) 관상자는 은총 상태에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8) 그 체험의 서술이 매우 어렵다.

(9)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과 동시에 존재적 변화를 가 져온다.

(10)실천적 삶에 대한 큰 충동을 느낀다.

 

 

2) 두 종류의 관상의 길

교회는 전통적으로 관상에 이르는 두 종류의 모형을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는 일체의 영상이나 이미지를 부정하고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 체험을 보다 진정성 있는 일치라고 믿는 모형이다. 관상 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게 된다.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게체가 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 이러한 두 가지 모형의 관상의 길을 태동시키는 데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위 디오니시우스(Pseudo- Diony -sius)이다. 그는 5세기 후반에 시리아 기독교와 신플라톤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바울의 측근 중한 사람인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 17:34)라는 아명으로 저술 활동을 한 동방교회의 한 수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플라톤적인 형이상학과 성경의 가르침과 구도자의 내면세계를 잘 통합시켜 영적 여정의 한 패러다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신플라톤적 창조론과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래로의 산출'(the procession downward)'위로의 복귀'(the return upward)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신플라톤적 창조론인 산출과 복귀의 형태를 받아들이면서 전자를 긍정의 길(via affirmativa)이라고 하고, 후자를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하는 관상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적 방법론으로 받아들여서 전자를 '긍정신학'(affirmative theology), 후자를 '부정신학' (negative theology)이라고 칭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차원 높은 고상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고상한 개념이나 이미지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그만큼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반면에 그분에게만 속한 무한한 속성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사성을 접촉점으로 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길을 추구하는 것을 긍정신학 혹은 유념의 길(kataphatic way)이라고 한다. 인간의 것과는 전혀 접촉점을 찾을 수 없는 비유사성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을 부정신학 혹은 무념의 길(apophatic way)이라고 한다. 전자를 선택 할 때 그 이론적 기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일지라도 그것을 깊이 관상한다면 그 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본다.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 가장 하찮은 속성으로부터 한 단계 한 단계씩 상승하면서 관상해 간다면 피조물이 지닌 가장 고상한 속성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이 지닌 거룩하고 가장 고상한 속성을 맛보게 된다. 단순히 생명을 보존하려고 꿈틀거리는 벌레에게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자연을 아름답게 수놓는 갖가지 수목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희생적인 사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다. 모든 만물을 변함없이 보존하시고 보호하심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그 선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유념의 길로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이나 인간이 지닌 가장 고상한 이미지나 속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고, 조화할 수 없는 비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사성을 제거할 때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피조물과 인간의 개념이나 이미지 안에서 도저히 유추해 낼 수 없는 그 곳에 이르기 위해서 유추 가능한 모든 이미지나 속성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을 무념적 방법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 가장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속성이나 개념으로부터 부정하면서 위로 올라가게 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 '태양 같은 하나님의 의()' 등의 가장 고상한 속성처럼 보이는 이미지까지도 부적합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한다.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달려갈 때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이 깊은 심연은 결코 감각적으로도 지적인 인식 작용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전한 영의 세계요 절대적인 세계이다. 이 순수한 세계 속에서 개념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맛본다.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에 대한 넘을 수 없는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느낌이나 감각 기관으로도 순수한 하나님 체험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은 인간이 지닌 일체의 개념이나 느낌이나 이미지 등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함으로써 순수한 영혼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순수한 하나님 체험 이전에 인간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 변화의 과정을 위 디오니시우스는 정화, 조명, 일치라는 삼중적인 단계로 제시한다.

정화의 단계란 우리가 자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 존재의 정화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5:8)고 하셨다. 회심 자체가 매우 급작스럽게 혹은 매우 감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화의 작업은 지속적인 의지적 노력으로 수행해 가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기를 힘쓴다. 정화의 단계에서는 외적 감각의 정화, 내적 감각의 정화, 정욕의 정화, 지성의 정화, 의지의 정화 등이 있다. 인간의 욕망과 유혹은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영성 생활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면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알려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조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조명의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게 자각한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총의 능력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죄악의 길로 다시 빠질 수도 없고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밝고 밝은 내적인 평화 상태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인 내적 소동을 경험하게 된다. 전에는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던 범죄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눈을 뜨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적인 비전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며 여전히 그 길을 걷는 데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기 부인과 자기 포기를 요구받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곧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더욱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정화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정화가 능동적인 것이라면, 이 조명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정화는 수동적인 것이라할 수 있다. 기도자들은 그들의 내면에서 자신의 존재보다 더욱 큰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힘이 그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 상태는 구름한 점 없는 여름철이라기보다 취약하지만 생동력이 넘치는 폭풍우 후에 피어나는 봄날 아침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조명의 단계를 거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의 삶으로 나아간다. 조명의 단계를 지나는 자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거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자신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비로소 일치의 단계(union)혹은 완성의 단계(Perfection)에 이른다. 완성의 단계에 대한 위 디오니시우스의 원래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기 중세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연합 관계의 의미로 발전되어 사용되었다. 후기중세의 영성가들이 이어받은 완성의 단계 혹은 일치의 단계는 '관상 체험'에서 성취되는데, 이 때 얻는 영적 지식이란 모든 감각과 인식 작용이 멈춘 침묵의 심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3) 관상적 체험의 다양성

관상적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일치 체험의 주체는 누구인가? 관상적 체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신 하나님의 일인가? 혹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일인가? 이 논란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라면 양쪽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동시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그분 앞에 먼저 나아가지 않을 때, 그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야 한다. 예레미야 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쪽도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할지라도 그분이 먼저 그 곳에서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의 나아감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다림이 우리의 나아감보다 우선이다. 요한복음 6: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20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다"고 한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은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동시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경험적 차원에서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의 장소가 있다고 해도 좋을듯하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다. 영성사에서는 이 만남의 장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세 영성가의 대표자로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의 유형이다. 그는 그 만남의 장소를 다른 무엇보다 자연에 두기를 좋아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이나 루터는 그 만남의 장소를 성경에 두고 있다. 세 번째로 종교개혁 당시의 또 다른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장소를 '어두운 밤'이라고 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자연을 자신의 한 부분처럼 사랑했다.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우정과 사랑에 찬 자연의 관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에게 자연은 자신의 형제요, 자매요, 친구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만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면, 자연 안에서 역시 '형상'(imago)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흔적' (vestigo) 혹은 하나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 사랑의 마음을 담은 '해양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가장 고귀하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

모든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축복이

지극히 높으신 오직 당신 한 분께만 합당하나이다!

또한 어떤 인간도 당신을 논할 가치가 없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 특히 매양 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해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하루의 빛을 주셨으니

그는 커다란 광채와 더불어 눈부시도록 빛나고 아름답도다!

오 가장 높으신 주님, 그는 곧 당신의 상징이십니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달과 별 자매들을 인하여!

당신께서 지으신 그들은 하늘에서 밝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바람 형제를 인하여!

또한 대기와 구름과 모든 날씨를 인하여!

이들에 의하여 당신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음식물을 주시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물 자매를 인하여!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사랑스럽고 정숙하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불 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해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빛과 열을 주시나니

그는 매우 아름답고 명랑하며, 힘이 세고 강하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를 인하여!

그는 우리를 지배하고 유지해 주며

아름다운 꽃과 잎과 열매를 맺나이다.

 

………

 

나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과 축복을 돌릴지어다.

또한 거룩한 순종과 겸손으로 그를 섬길지어다!

 

이 해양의 노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은 자연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웠다는 것이다. 즉 겸손과 사랑과 정의와 정숙과 기쁨과 순종과 찬양을 배웠다. 프란체스코는 끊임없이 가난을 강조했다. 자기 자신은 '가난'(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선언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도 철저히 가난을 강조했다. 그것은 감상적인 고행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비울 때만이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부요를 맛볼 수 있으며, 부유하신 그분과의 풍성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지극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곧 풍요였다. 그렇게 프란체스코가 자연에서 경험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각성된 심령의 노래가 곧 '평화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었는 곳에 기쁨을

주여,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이 아름다운 노래는 성 프란체스코의 내면의 영성이 자연으로 인해서 얼마나 풍성해지고, 또 그 안에서 얼마나 풍요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맛보고 있었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생각해 보자. 칼뱅은 프란체스코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만남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 장소이므로 그 곳에서 하나님이 계심과 그의 엄위하심과 지혜를 알 수 있는 곳으로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그는 자연의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모든 인간은 "창조된 세계의 관객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토록 아름다운 연출을 감상하고 나면, 그 작가에게로 이끌리지 않을 수 없는 눈이 주어져 있다."고 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작품을 통해 그 작가에게 도달함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을 즐기는 것보다 우리의 눈을 빼내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 나타난 명백한 하나님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자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자리가 이성인데, "우리 정신 속의 모든 것들은 부패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자연을 보는 데 심각한 제한성과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며, 확실하고 견고한 어떠한 지식도 주기 어렵다는 것이 칼뱅의 또 다른 입장이다. 심지어 인간은 그 자연 속에서 스며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을 느끼고 맛보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연 자체를 하나의 ''으로 왜곡시키는 어리석음과 무지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철학자 중에서 종교성이 가장 풍요로운 플라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는 만물을 하나님과 혼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헬라의 시인 버질의 시를 인용하면서 자연을 보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부패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이 시의 어리석음은 여기에 있다. 우주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 그 능력에 대해서 초월적인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경건을 범신론적인 속성으로 바꾸어 마치 인간도 그 한 부분인 양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자연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보는 것에 대해서 인색해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칼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 구원에 관한 문제였다. 어느 정도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 체험이 가능하다할지라도 그곳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이 물음을 제기한다. 물롬 칼뱅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절대 불가이다. 성경은 이미 자연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자취를 오해 없이 계시하고 있으며,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확실한 지식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만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라는 것이 칼뱅의 입장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 성 요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어둔 밤'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성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사랑의 사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속삭임은 '고요한 밤, 새벽이 떠오르는 때, 소리 없는 음악, 우렁찬 적막'에서 이루어진다. 소리 없는 침묵과 적막으로 우리 자신이 인도될 때 비로소 진리의 빛, 사랑의 불꽃과 부딪히게 된다. ''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잠든 상태를 의미한다. 감각은 언제나 제한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상상하게 하고, 그 결과 불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감각의 세계에서 구성된 하나님의 이미지란 그분 자신에게 이르기에 너무나 큰 간격이 있다. 인간의 감각적인 세계로 하나님을 그려보고 이해한 것이 아무리 최상의 것일지라도 하나님 그 자신과 비교할 매 유사성보다는 비유사성이 훨씬 더 많다. 모든 피조된 존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그 존재에 비할 때 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사랑의 사귐에 이르려면 감각의 세계는 닫혀야한다. 이것이 '어둔 밤'이다. 즉 감각이 닫힌 영혼의 세계이다. 이 어두움의 세계를 성 요한은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것에서 만족하려면 아무것도 만족하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려면 기쁨이 없는 곳으로 가라.

알지 못한 것을 알려면 아는 것이 없는 곳으로 가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면 가진 것이 없는 곳으로 가라.

네가 아닌 것이 되려면 네가 없는 곳으로 가라.

모든 것에서 방해를 받지 않는 방법

 

무엇에 마음이 머물게 될 때는 모든 것에 덤벼들기를 포기하라.

모든 것을 다 가지려면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것 안에서 다 부정하라.

모든 것을 다 갖게 될 때는 아무것도 원하지지 않으면서 가져라.

모든 것에서 무엇을 가지려면 하나님 안에 있는 너의 순수한 보물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각각 다른 세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 다른 장소를 서로 상충된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강조점이 다르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세 영의 사람들은 결코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보기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세 가지의 다른 길을 통해 보다 조화로운 영성 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온 세계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신다. 어디에도 제외될 수는 없다. 동방교회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온 피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본질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 그 에너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칼뱅이 주장한 대로 성경이 바로 그러한 눈을 가지도록 인도하며, 성경으로 말미암아 정화된 영혼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다. 프란체스코는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피조물의 세계를 맛보기 위해서 스스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 철저히 가난한 사람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과의 풍요로운 교제를 누릴 수 있다. 동시에 그 풍요로움을 맛보는 자는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정화된 영혼의 과정과 상태를 어두운 밤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왜곡된 감각이 정화될 때 감각의 밤을 맞이하게 되고, 영혼의 기능인 기억, 이해, 의지 등이 정화되어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영혼의 밤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과 영혼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정화되어 있다면 자연은 우리의 영성을 일깨워 주는 가장 훌륭한 장소가 될 수 있다.

 


2장 기도와 관상.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