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잠심과 분심

 

 

1. 정신구조에 떠오르는 사고

 

관상기도를 인간의 의식 수준과 비교하여 언급할 수 있다. 의식 수준에서 하는 기도를 구송기도와 명상기도라고 한다면, 관상기도는 무의식 상태에서 드려지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그림에서 무의식의 수준에서 드리는 기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정신구조에 떠오르는 생각들.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49pixel, 세로 606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6년 01월 07일 오후 6:21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7.0

 

위 그림에서 보면 개인무의식의 영역에서 떠오르는 좌우측의 거품은 기도 중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들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대체적으로 무의식의 영역인 개인의 삶의 경험에서 유래한다. 기도 중에 경험하는 내용이 과거의 기억에서 유래된 경우 더욱 강화시켜 주거나 혹 나쁜 기억은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하는 정화의 과정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외의 다른 생각이나 이미지도 있을 수 있다. 그림의 점선 아래 부분에서 떠올라오는 가운데의 거품으로 표시된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은 특정 인종이나 문화에는 그 문화의 유구한 역사 속에 형성된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융은 이해한다. , 인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적 특성이나 아시아 아프리카 등 특정 대륙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신화적 이미지나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관상기도 중에 매우 강력한 감정적 체험이 있는 경우, 그 경험이 집단 무의식적 이미지가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중에 경험하는 모든 강력한 체험이 집단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기도 중에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다만 그대로 바라보면서 마음의 동요 없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주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관상기도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체험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관상기도의 실천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관상기도는 체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효과적인 관상기도의 실천에 매우 중요하다.

관상기도의 어려움은 기도의 침묵 가운데 내면에서 사정없이 떠오르는 생각 이미지 느낌 같은 분심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상기도 중에는 끝임 없이 떠오르는 분심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방편들이 있다. 그 방편들은 무수히 많다. 여기서는 몇 가지만 제시하고 다음에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먼저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또는 주시(응시)한다. 이때 주의할 것은 분심에 관심을 가지든지 관찰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관찰하는 동안에는 그기에 머룰 수밖에 없다. 그저 바라보고 있으면 지나간다.

이것은 마치 강가에 앉아 낚시를 하는 낚시꾼이 지나가는 배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강에는 배가 지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강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저 바라보면 곧 사라진다. 그러나 그 배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동안에는 그 배(잡념)를 따라가게 되고 낚시는 할 수 없다. 다행히 그 배를 떠나보내었다 하더라도 다른 배가 또 올 것이다. 결국 낚시는 못하고 미끼만 빼앗기고 말게 된다.

관상기도 하는 이도 똑같다. 분심은 항상 있다. 그것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분심이 있으려니 하고 보고 지나든지 아니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 상태로 돌아가라. 그것은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더욱 수도하여 언덕에 올라 강도 배도 산도 낚시를 하는 자신도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라보라. 그때 강도 산도 배도 나도 사라지고 관상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집중하여 보지 말고, 정신을 놓아 허리멍텅하지도 말아라. 깨어 있어라.

이것은 관상기도의 핵심이다.

 

 

 

 

 

 

 

2. 영적인식과 작용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영적인식과 작용.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104pixel, 세로 2179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6년 01월 07일 오후 5:43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7.0

 

마음은 인간행위의 선악을 결정한다.

(7:21-23; 15:18-20)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1-23).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15:18-20).

 

1) 마음은 인간 이성의 근원이다.
* 사고(2:6), 깨달음(13:15), 생각(9:4)

2) 마음은 인간 감성의 근원이다.

* 기쁨(16:22; 5:19), 애정(24:32), 욕망(5:28)

3) 마음은 인간 영혼의 근원이다.

* 양심(2:37), 의지(6:17), 믿음(11:23; 10:10),

(15:18; 7:21-23)

 

어떤 사람들은 관상기도가 침묵기도라는 말을 듣고, 이와 같은 침묵기도에서 그 사람의 영혼의 역할은 침체하고, 활력을 잃은, 활동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침묵기도에서는 그 영혼이 소리를 내어 입으로 하는 기도에서보다 더 높고 포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어떻게 그것(보다 더 높고 포괄적인 역할)이 가능한가?

 

영혼은 활동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고요한 침묵 가운데 머무를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그 영혼을 움직이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영혼은 성령님의 움직이심에 반응하여 활동하게 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

 

그러므로 침묵기도에 들어가는 것은 당신이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혼(soul)이 당신의 영(spirit)의 움직임에 의하여 활동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는 에스겔서(1:19-21)가 도움이 될 것이다.

 

침묵기도는 활동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영의 거룩한 활동을 촉진시키고 격려한다. 또한 침묵기도는 당신이 영혼의 낮은 차원의 활동을 억제시킨다. 그러므로 침묵기도는 하나님의 영에 절대 의존적이어야만 한다. 당신 자신의 활동의 자리를 대신하여 성령님이 활동하도록 내어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자리바꿈은 당신의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당신은 성령님과 자리바꿈에 동의를 하는 동시에 당신 자신의 활동을 중지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활동이 조금씩, 조금씩, 결국에는 완전히 당신의 영혼의 활동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되어가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한 아주 좋은 예가 있다. 당신은 마르다가 주님을 위하여 매우 옳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마르다를 꾸짖으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10:41-42).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마르다는 그녀 자신의 생각과 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움직이심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자연적으로는 안식이 없이 분요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10:41-42)고 하셨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생명이 되시도록 자신의 일을 중단하고 예수님의 발치에서 평온하고 조용한 안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마리아의 예는 누구든지 마리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의 모든 활동을 중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활동을 중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때에는 당신의 생명이 자리를 비키고 내 드려야 한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고 말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의 영혼이 스스로, 즉 성령의 활동과는 달리 별도로 활동하게 되면, 그 영혼의 활동은 타자에 의하여 강요되어 긴장에 싸이게 된다. 실제로 기도 속에서의 영혼의 노력은 언제나 염려와 애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혼이 움직이고 있는 때를 쉽게 구별해 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존재의 더 깊은 어떤 것(성령님)에 반응하여 움직이게 된다면, 그러한 활동은 마치 당신이 전혀 노력을 하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고 쉬우며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내면세계로 향하여 성령님께로 고정되어지면, 바로 그 순간부터 주님의 영이 내적으로 이끄시는 힘은 매우 강력해진다. 사실 당신의 영(spirit)이 당신의 혼(soul)을 이끄는 힘은, 다른 어떤 힘보다 강해진다. 특히 당신을 다시 표면으로 돌아가도록 잡아끄는 어떤 것들보다도 훨씬 강력하다. 실제로 중심으로 돌아가는 속도에 있어서 영혼이 성령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침묵 속에서도 영혼은 활동하는가? 그렇다. 그때의 영혼의 활동은 아주 승화되고 자연스러우며 평온하고 자발적이기 때문에, 마치 영혼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돌아가는 바퀴와도 같다. 당신은 돌아가는 바퀴를 관찰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바퀴가 천천히 돌아갈 때에는 바퀴의 모든 부분이 잘 보인다. 그러나 바퀴가 점점 더 빨리 돌아감에 따라 거의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영혼의 모습이다.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있을 때에는 그 활동이 영적이며 매우 고양되어 있다. 그 영혼은 평온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혼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수록 영혼의 중심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혼(soul)이 영(spirit)에게 복종하고, 움직이며 지시를 하는 존재는 성령(the Spirit)이시기 때문이다.

 

당신을 당신의 내적인 부분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끌어당기시는 행위(섭리)로 당신이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게 한다. 이끌림을 받아 나가는 것은 영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주님만이 친히 거하시는 곳인 당신의 중심을 이끌어 당기시는 것으로써 주님을 따르도록 당신을 부르신다. 따라서 당신의 영이 가장 먼저 이끄심을 받게 된다. 그 다음에 당신은 그 중심으로부터의 이끄심을 따르게 된다. 당신은 의식의 방향과 당신의 영혼의 모든 힘을 주님께로 집중시킴으로써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령께 전적으로 의지하라. 이것이 언제나 당신의 주된 관심사여야만 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17:28)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복잡하다. 우리의 영혼들은 아주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떠나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통일성으로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침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의 다양한 면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때 하나님과의 그러한 연합의 상태를 떠날 필요는 없다. 하나님과의 하나 됨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뜻의 다양한 면들이 수행될 수가 있는 것이다.

간단한 침묵의 기도가 당신을 어떠한 자리로까지 인도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잠심과 분심

 

 

1. 잠심(내적 침묵)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곧 기도이다. 하나님 현존을 인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잠심뿐이다. 잠심하여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 가슴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새겨지면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참된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면서 살아가는가?

예수님이 내 옆에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우리도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은 예수님이 얼마나 깊이 내 안에 현존해 계시는가를 느끼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1)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음

좋은 통치자가 되려면 들리지 않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상인으로 성공하려면 들리지 않는 소비자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 신앙인으로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가능하다. 이 말은 우리가 가슴속에 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더욱 깊은 수준에서 경청할 때 더 잘 듣고 더 잘 볼 수 있으며, 더욱 깊은 수준에서 침묵할 때 하나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소리 없는 소리, 그것은 풀포기에서 듣는 소리, 산과 강과 하늘에서 나는 소리이다. 아무 소리가 없는 그 속에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 잠심 상태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생각과 고민에서 벗어나 내부의식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2) 하나님의 현존 체험을 위한 잠심

생각이 너무 많으면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생각을 멈추어야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TV로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는 없다. TVFMAM 방송의 주파수 영역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뇌 파

심신의 상태

22Hz 이상

14-21Hz

 

 

7-14Hz

 

4-7Hz

1-4Hz

불안 및 흥분

깨어 있는 평상시의 뇌파 외계와 대응하여 긴장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의식적인 활동 상태. 물질계(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시간공간)를 인식함.

주의 집중과 약간의 긴장(14Hz근처). 정신통일 상태 자연의 소리 청취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기도할 때.

깊은 명상 또는 졸음 상태 (4Hz 근처)

깊은 수면(무의식)

: 뇌파에 다른 심신의 상태

 

기독교방송은 93.9MHz, 98.1MHz 교통방송은 95.1MHz로 주파수를 맞춰야 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주파수로 맞추어야 한다. 그 주파수가 바로 잠심상태이다. 바로 위 뇌파에 따른 심신의 상태 표와 아래의 상태별 뇌파비교 그림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상태별 뇌파비교 800n.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00pixel, 세로 243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6년 01월 07일 오후 13:08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7.0

 

잠심상태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 수준의 뇌파에 머물면 잠심 상태의 뇌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리를 느끼기 위해서는 잠심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림 상태별 뇌파 비교 그림과 뇌파와 기도 상태 비교 그림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뇌파와 기도상태 800n.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00pixel, 세로 338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6년 01월 07일 오후 12:49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7.0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각촉각미각청각후각 등 다섯 가지 감각(오감)이 있다. 물질세계를 판단하는 기능으로 볼 때 이 다섯 감각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감각기능 망에 하나님이 잡히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려고 한다.

 

인간의 미각은 맛밖에 모르고, 청각은 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듣지 못한다. 수신기가 있어야 먼 곳에서 날아오는 전파를 잡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실존을 감지하려면 이 다섯 감각기능이 아닌 잠심 상태에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힘들다. 뇌파와 기도상태 그림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다. 미흡하지만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잠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잔잔한 호수 같은 그런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한 것뿐이고, 비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밝게 보일 뿐이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고 비가 쏟아지면 그런 평안은 사라진다. 진정한 잠심은 목포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잠심을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잠심 상태에 지속적으로 잘 머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조건을 살펴보겠다.

 

3) 잠심을 위한 외적 조건

잠심 상태에 잘 머물러 있기 위한 외적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이다.

 

인 내

우리에게는 한두 번 기도하고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너무나 급한 성향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솟구쳐 오르면 몇 번 기도해 보고, 아무 느낌이 없으면 그 열망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뜻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게으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8:18)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가야 한다. 인내는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리며 땀 흘려 밭을 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역할 혼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할 역할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잠심 상태에 머무는 데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

 

여 유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여유이다.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기도하면서도 수만 가지 일을 떠올리게 되어 머리로 생각하고 정리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멈추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둘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가볍게 허공을 나는 깃털처럼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때 진정한 침묵의 상태에 머무르게 될 수 있다.

 

갈 망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세 번째 요소가 갈망이다. 부모들도 자녀들의 울음소리를 식별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우리의 간절한 소리를 얼마나 잘 구별하시겠는가! 누구든 간절한 열망이 있으면 쉽게 잠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울음소리와 같이 건성으로 임한다면 잠심에 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잠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할 때 여유를 가지고 되도록 천천히 잠심에 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갈망이다.

 

이 세 가지를 가슴에 간직하여 기도에 임한다면 날로 깊은 잠심에 이를 수가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 현존 체험이 깊어질 것이다. 하나님 현존 체험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과의 관계가 더 친밀하게 변화된다.

 

결국 잠심을 위한 외적인 조건은 인내여유갈망인데,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체득해야 한다. 체득할 때 더 이상 우리는 인내할 필요도 없고, 여유를 가질 필요도, 갈망할 필요도 없다. 체득하면 내가 하는 행위 자체에서 인내와 여유와 갈망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버려라고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는 사라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체득하느냐에 달려 있다. 체득할 때 잠심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자연스럽게 체험될 수 있다.

 

4) 잠심을 위한 내적 조건

침묵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인데, 그것은 심리적인 것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적 사고(思考)와 소음이 일어날 때 그것에 대꾸하거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고 나의 감정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해야 한다. 또한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기도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와 여유와 갈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내적 사고와 소음이 줄어든 내적 침묵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 중에 흥미를 끄는 것들이 생겨난다. 이것들이 기도 중에는 아주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 같아서 그것을 좇아서 생각하고 상상하게 되는데, 끝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 보이는 것들도 흘려보내야 한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 현존을 체험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침묵하면서 어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생각과 상상이 끊임없이 나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도 중에는 하나님의 현존만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가 애쓸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고 애쓰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생각이나 상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 현존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렇게 되는지를 걱정한다. 이 걱정을 놓아버려야 한다. 걱정은 기도를 못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케 한다. 우리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면 하나님의 현존이 체험되는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思考)나 상상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대로 일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과의 일치도 한층 완전하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기대도 집착도 욕망도 전혀 없다.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영적인 위안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그것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영적인 위안이란 없을 것이다. 집착과 욕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위안이 당신에게로 밀려옴을 느끼고, 그때가 바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순간이다.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완전하게 하나님과 일치하게 된다.

 

 

2. 잠심의 걸림돌 - 욕심

 

우리의 잠심 상태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은 우리의 내부의식을 분리시켜 우리가 잠심에 있지 못하게 한다.

 

궁수가 재미로 활을 쓸 때 그의 온 기술을 다해서 쏜다. 만일 금메달을 얻기 위해 쓴다면, 신경과민 증세가 일어날지 모른다. 금메달에 마음을 쏟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기술은 변함없으나 금메달이라는 상 때문에 그는 활을 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에 신경을 더 써서 스스로 분열된다. 그래서 이겨야 할 필요성이 그의 힘을 고갈시켜 버린다. 이처럼 욕심은 우리 자신을 분열시킨다. 만일 사람이 돈이나 명예 등을 위해 경쟁한다면, 또 성취해야 할 어떤 결과에 지나친 욕망을 갖게 된다면, 그는 어느새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들을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잠심하려면 걸림돌이 되는 이 욕심을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가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욕심이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일단 욕심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욕심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뿌리를 알게 된다.

그 뿌리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과거의 경험이다. 과거의 경험이 한()으로 바뀌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된다.

두 번째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난다.

세 번째는 경쟁과 비교인데, 비교 대상이 아닌 인간을 서로 비교하려는 마음에서 온다.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겠다.

 

1) 과거 경험

과거 경험이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형성된 자신의 틀이나 관념을 말한다. 이렇게 형성된 틀 안으로 대상이 들어오기 때문에,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들어올 수 없다.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려면 내 틀을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형성시킨 틀 즉 과거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화치유, 또는 용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껍데기만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라. 상대의 속을 보아야 하는데, 겉에 나타나는 껍데기에 신경을 쓰고 껍데기를 보고 껍데기만을 판단하면, ‘참다운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과거 경험에서 해방되어 선입견을 버리고 그 속에 있는 알맹이를 보아야 한다. 그 껍데기를 알아차리면 우리의 유리창에 있는 얼룩이 닦이는데, 그때에 바로 정화되고 치유된 상태인 참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대상이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고, 사랑이 시작되며,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하였듯이, 우리 자신을 먼저 버려야 한다. 즉 우리 행동에서 얼마만큼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도는 완전한 자아포기(kenosis)이다. 이 자아포기는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 같은 인간적인 기능을 넘어서 단순히 하나님 안에 머무름을 의미하며, 욕심이 사라지는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 그 자체가 중요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많은 활동으로 말미암아 기도 안에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버리는 것이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또한 정보사회에서 발생되는 관념화 때문에 우리는 관념에 의존하게 되어 인간적인 투사(投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관념화나 투사는 하나님을 하나님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이나 개념이나 상상에 비추어 보는 위험이 따른다. 이러한 과거 경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관념화 등은 우리와 대상 사이에서 필터(유리창의 얼룩)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들어오고, 있는 그대로 대상 쪽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바로 과거 경험을 통해 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2)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

욕심이 생기는 두 번째 뿌리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자신의 신체조건능력재능본능문화전통종교 등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말한다.

사회의 요구와 내가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월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자신을 형성한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감이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고,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것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에게 맞는 땅을 찾고 거기에 맞는 식물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나(껍데기)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알맹이)를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미소하다 할지라도 감사하게 된다. 누구에게도 없는,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고유함을 찾을 때 더 이상 환경으로부터 오는 욕심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3) 경쟁과 비교

세 번째 뿌리는 경쟁과 비교로, 나와 다른 것을 비교하는 데서 생겨난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남을 비교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비교하고, 행복과 불행을 비교하고, 슬픔과 기쁨을 비교한다. 이러한 비교로 물질적인 진보나 어느 정도의 영적인 향상을 이를 수도 있지만, 한층 깊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지나가는 것을 잡거나 흘러가는 것을 멈추게 하지 않고 나를 투과해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연한 태도가 비교와 경쟁을 없앨 수 있다. 물결이 없는 고요한 물처럼, 또는 물 위에 나무토막을 띄워 놓고 그냥 그 물결에 맡기듯이, 그렇게 내 가슴속에서 나오는 것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욕심은 더 이상 내 안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삶에서 그 욕심을 다스리는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욕심을 없애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욕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태풍에 비유한다면, 욕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마음을 밖으로 향해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는 것이다.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음을 안으로 향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태풍의 눈, 즉 고요함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두어 욕심을 없애야 한다. 태풍의 중심에는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 고요한 중심이 있어야 태풍이 존재할 수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 지어내는 온갖 생각도 그것들의 중심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욕심이 일어날 때 욕심을 억눌러서 없애려고 한다면, 그것은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욕심이 존재하도록 그냥 놔두는 것이다. 거기에 휩싸이지도 말고, 그것을 억압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 즉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모욕할 때 그 말을 듣고 있는 당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단지 듣기만 하라. 그 사람은 당신을 욕하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당신을 칭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욕이든, 칭찬이든, 명예나 불명예든 단지 듣기만 하라. 그것이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이 안으로 향하는 것이며, 고요함을 만나게 되는 길이다. 어쩌면 당신의 주변은 반응을 일으키며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것 역시 바라보기만 하라. 그 상태를 바꾸지 말고, 그저 바라보라. 태풍의 중심에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의 중심에 깊이 들어앉아서 말이다. 아무리 모욕적인 일을 당한 순간이라도 거기에 개입하지 말고 사람들이 당신에게 모욕을 주는 장면을 느긋하게 구경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객관화시키는 것이고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태풍의 안에서 상승기류가 일어나듯이, 홀로 존재하는 의식을 깨닫게 되면 초월이 일어난다. 모든 욕심들이 사라지는 그때가 기도의 진정한 맛을 들이는 때이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도에 맛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욕심을 먼저 없애야 한다.

 

 

3. 분심(다양한 사고)

 

1) 보통 종류의 사고들

관상의 이 초기 단계에서 사고(思考)들 때문에 큰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과 그 사고들의 형태들을 분간하는 것이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하여 중요하게 된다.

 

(1) 가장 쉽게 분간되는 것은 보통의 산만한 상상들이다.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으려고 목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내적 침묵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상대적 침묵을 말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적 침묵을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에 정진하다보면 당신은 새로운 습관 새로운 능력이 개발될 것인데 그중의 하나가 동시에 두 개의 의식 수준에서 의식하는 능력이다. 당신은 주위의 소음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주의가 어떤 깊은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터인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곤란하겠지만 결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은 머지않아 외부의 소음에 대하여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둘레에 벽을 쌓을 수 있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소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소음은 당신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이것들과 싸우고 씨름하고 혹은 그 소음들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면 당신은 어떤 특정한 소음에 사로잡히고 말게 된다. 당신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겠지만 점차로 당신 주변에서 소음이 일더라도 깊은 수준에서 즐거운 침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상상들에 대한 가장 좋은 반응은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짜증이나 불쾌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감정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응답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순간에 실제로 있는 일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만한 상상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당신이 평정으로 들어가기를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사고들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결책은 마음을 완전히 공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관상기도의 전 기간 중에 우리는 내적 침묵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한다. 기도자의 내적 주의(注意)는 바람이 자는 날에 풍선이 땅에 닿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오고 그러면 풍선은 다시 떠오른다. 이와 비슷하게 침묵기도 중에는 가장 즐거운 침묵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에 감질나게 튀어나오는 순간을 맛보는 경우들이 있다. 이때가 바로 어떤 원치 않는 사고들이 의식 속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이때에 침묵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언짢게 생각하지 말고 사고를 받아들이는 데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 그저 단순히 다시 시작하라. 이와 같은 끊임없는 인내와 평정과 받아들임은 우리 전 인생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 만든다.

 

(2) 침묵기도 중에 의식의 흐름 속으로 두 번째 종류의 사고가 끼어드는데, 그것은 당신의 산만한 상상 중에 어떤 특정한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침묵기도 중에, 당신이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단순히 그 주의를 하나님께로 돌린다. 이러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표시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거룩한 단어가 마치 마음을 비워 주는 요술이나 되는 것처럼 이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거나 이 단어를 당신의 의식 속에 강제로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옴으로써 당신은 하나님과의 대화로 돌아오고 그분과의 일치를 바란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복(承服)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어떤 기능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임을 명심하라. 이 기도에서 침묵으로 당신을 준비시켜라. 그러면 기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당신의 문제로 삼으면 당신은 즉각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무엇보다도 순수한 믿음이 당신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체험에 매달리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인 것이다. 관상기도 시간은 당신의 모든 사고 -심지어 아주 좋은 사고라도 그것을 떠나보내는 시간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좋은 사고였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2)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의지의 행위 중에 가장 으뜸가는 행위는 노력이 아니라 동의(同意)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비결은 그 어려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지란 유효성이라기보다는 정서성이다. 어떤 일을 의지의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적절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기적인 습관들이 의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자유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심에, 그리고 은총이 흘러 들어옴에 대해 더욱 동의하도록 의지는 활동한다. 하나님이 더 활동하시고 당신이 덜 활동할수록 기도는 더 잘된다. 처음에는 거룩한 단어를 자꾸만 반복해야 함을 의식할 것이다. 이것을 더 잘 표현하려면, 이러한 의지의 황동은 단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 혹은 인식 속에 거룩한 단어를 살짝 얹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의지가 섬세하게 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상징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에 계속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이미 내 안에 현존하시므로 그분을 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상징이다. 결국에 가서, 의지는 그 상징이 없이도 동의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기도 중에 의지가 하는 일은 정말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을 받아들임, 이것이 관상 기도 중에 하는 으뜸가는 일인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승복시키는 일은 동의 중에서도 더욱 발전된 동의라 할 수 있다. 변형(變形)은 완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변형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변형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은 할 수 있다.

이 기도가 습관화되면, 신비스러우며 분간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평화스런 하나님의 현존이 당신 내면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 일단 한번 형성되면 그 고요한 현존은 항상 거기 머물러 계시며 그 현존이 바로 기도의 방법이 된다.

이것은 절대 신비이신 분을 기다린다는 단순한 태도이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믿음이 순수해지면 이것을 알려고 들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인간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그분을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무엇을 기대하는 일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여정은 무지(無知, unknown)로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모든 정신 구조와 심리적 안전장치와 심지어 지주(支柱) 노릇을 하던 영적 수련도 떠나서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이다. 거짓 자아 체제를 구성하는 것 모두를 뒤로 남겨 두고 떠나는 여정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하셨다.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가셨다. 거기서 그분은 자신의 신인적 자아(Divine-Human Self)마저 희생하셨다.

그리스도와 개인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나머지 여정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우리의 영적 훈련은 먼저 거짓 자아를 부숴 버리려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진지한지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화(淨化)를 손수 다루시고, 깊이 뿌리박은 우리의 거짓 자아를 불러내시어 우리가 그것을 버리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들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덕()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당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그와 비슷하게 다루신다.

가나안 여인의 경우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감각의 어두운 밤을 거치는 사람의 훌륭한 예()이다.(15:26-27를 찾아 읽으라)

어떤 때는 아무런 사고도 없다. 다만 나의 자각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 사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그 인식이 곧 사고이다. 그때에 당신이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그 인식마저도 잊어야 한다. 순수한 의식(pure comsciousness)에서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당신은 잠을 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일상적인 심리적 기능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평화로운 기쁨의 감각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이 자고 있지 않았다는 좋은 표시이다.

그곳에서는 인식(awareness)만 남는다. 인식하는 자는 사라지고 이와 함께 의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일치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이 경험이 당신을 관상상태로 이끌어 간다. 당신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어떤 사고가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다라는 인식을 갖고 싶어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 자신을 떠나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어떠한 사고도 떠나보내려고 하지 않고는 떠나보냄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 우리는 관상에서 떠나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떠나보내는 수련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어떤 사고든지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한번 하나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영적인 소통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 신적 일치가 사라지게 된다.

환시탈혼내적 음성영적 교감심령 선물 등에 매달리지 말라. 이것들은 순수한 의식보다 가치가 덜한 것들이다.

영적 위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기란 매우 힘들다. 특히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을 때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내적 침묵에 접근하고 충분한 시간 수련하면 당신은 매달리는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점차로 당신은 내적 침묵에 익숙해질 것이다. 관상 기도의 초기단계에서 당신이 느꼈던 기쁜 평화는 점차 정상적인 경험이 된다. 인생의 어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관상 기도에 익숙해져서 당신이 받은 커다란 선물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만일 사고들이 지나가는데도 당신이 그것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침묵의 기도 속에 들어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모든 기능들이 하나님에게 맡겨졌을 때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적 여정의 끝은 아니다.

 

3) 더 섬세한 종류의 사고들

 

(1) 관상기도에 들어가려고 할 때 처음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오르는 첫번째 종류의 사고는 시시한 공상들이다. 이것들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하던 일이나 하고 있던 일에 관한 것들일 수도 있다. 혹은 외부의 소음이나, 분명한 기억들, 혹은 앞으로의 계획들이 나의 주의를 끌어당길 수 있다. 키딩은 비유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오는 배들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이것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 안에 들어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사고로부터 그 단어가 재확인시키는 대로 일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여 나가라. 그래서 그 보트를 떠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리고 다른 보트가 와도 또 떠내려 보내라. 한 무리의 보트가 떠 내려와도 그것들을 또 떠나보내라.

당신은 고요함을 원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것들이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조금씩 당신에게 두 가지의 주의(注意)가 형성되어 갈 것이다. 당신은 표면적인 사고를 의식한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동시에 당신을 끌어당기는 신비적이며 분간할 수 없는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깊은 내면의 의식이며 영이 갖는 주의성이다. 당신은 동시에 두 가지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다. 표면의 사고들을 걱정하는 것보다 내면의 깊은 의식이 발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표면적인 사고들은 얼마 안 가 당신의 마음을 끌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두 번째로 당신의 의식을 타고 내려오는 사고는 눈에 뜨이는 보트로서 당신의 주의를 끌어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 배 위에 오르고 싶게 한다. 거기에 끌리어 배에 오르면 당신은 그 배와 함께 떠내려가게 된다. 당신은 어떤 정도든 그 사고와 동일시한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에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원래의 지향으로 돌아가라. 거룩한 단어는 마음에 끌리는 사고에 집착하는 경향에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당신이 거기에 말려들었거나 막 말려들려고 함을 알아차리면 즉시, 그러나 부드러운 내심의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떠나보내라. 어떤 종류이건 저항하는 것도 일종의 사고이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을 수반하는 사고이다. 감정이 수반된 사고는 하나님의 신비하신 현존을 기다리는 당신의 의향에 방해가 된다. 모든 사고들을 떠나보내라. 그리고 어떤 사고에 끌리는 유혹이 생기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당신이 조용히 자리 잡고 어떤 평화를 누리고자 할 때, 당신은 어떠한 사고도 원치 않는다. 당신은 단지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러면 다른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 여정에 대한 아주 밝은 아이디어이거나 당신의 과거 삶에 대한 심리적 반성일 수도 있다. 당신이 가족과 가지고 있던 문제에 대해 갑자기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친구와의 논쟁에서 완벽한 논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물론 당신이 기도에서 나왔을 때에 그 밝은 아이디어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침묵의 깊은 물속이라는 어둠에서 볼 때에는 놀랄 만하게 보였던 것들도 밝은 빛 속에서 볼 때에 그것들은 당신에게 던져진 미끼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당신은 누구를 위해 아주 긴급하게 기도할 마음이 솟구쳐 올라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때는 그러한 기도를 할 때가 아니다. 이때에는 어떠한 노력도 역생산적이다. 이때는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시는 기회이다. 이것은 당신께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과 같다. 당신의 친구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 기도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의 침묵을 듣는 것이다. 이때에 당신이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고를 떠나보냄으로써 내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든지, 아니면 외적으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일이다.

 

설교자나 신학자들은 좋은 생각들 때문에 특히 문제를 안고 있다. 침묵을 지키고 앉기만 하면 어떤 기막힌 영감이 떠오른다. 여러 해 동안 씨름하던 신학적 문제들이 갑자기 수정(水晶)을 보듯 명백해진다. 그 사람들은 이때에 이 문제를 몇 초만 더 생각해 보자. 그래야 내가 기도를 끝냈을 때 이것을 잊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야말로 그들의 내적 침묵이 끝나 버리는 때이다. 그들이 기도를 끝내고 난 다음에 그 명석한 아이디어들을 기억조차 못한다. 사람이 깊은 침묵에 들어가면, 아주 밝은 지적 빛을 받기가 쉬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착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서 우리와 가장 잘 소통하실 수 있다. 이 수준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 안에 흔적이 없다. 우리의 심적 기능으로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 적절하게 그분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만 그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신비가들이 무지(無知, unknowing) 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금 그분을 우리가 아는 대로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다. 환시내적 음성황홀경 등은 케이크에 얹어 놓은 장식 크림과 같을 뿐이다. 영적 여정의 본질은 순수한 믿음이다.

관상 기도에는 인식의 즉시성(卽時性, immediacy)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어린이의 단순성을 재발견하는 하나의 경로이다. 어린 아기가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어린이는 자기가 본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본다는 행동 때문에 기쁨을 갖는다.

성장하면서 우리가 분석적인 판단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있는 대로 즐기는 것, 즉 단순히 존재하는 것과 단순히 행하는 것의 가치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관상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심리적 체험을 무시하면서 일어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신이 평화를 느끼면 그대로 좋다. 그것에 대해 생각지 말라. 그것을 그대로 즐기면서 그것을 성찰하지 말라.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당신은 거기에 대해 더욱 말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관념화하려 들면 당신은 상상과 기억과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깊이나 즉시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이와 같은 태도가 더 의미 있다.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예수의 팔에 안겨 쉬어라. 이것은 행위(doing)하는 수련이 아니라 존재(being)하는 수련이다. 그러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더 큰 효과와 기쁨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게 만든다. 관상 기도는 성령의 힘에 자신을 열어 드린다. 그러면 당신을 내어 줄 능력이 하루 종일 유지할 수 있게 늘어난다. 당신은 어려운 삼황에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며, 때로는 불가능한 상황도 견디어 낼 것이다.

 

(3)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당신이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그래서 그 사고가 아무리 멋지고 좋아 보이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잊어야 한다. 그 밝은 생각은 나중에 다루라. 그러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동기의 순수함을 계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려는 태도, 심지어 자신의 사고와 감정 같은 것들도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본능적 태도는 털어 버려야 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영적인 체험에 굶주려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해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체험을 잡으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쓰라리게 체험하면서 그것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깊은 평화를 갈구하는 태도에 집착하는 것을 떠나보내고 나면, 더 이상 영적 체험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게 되면서 내적 자유와 정련된 기쁨을 얻는 체험으로 옮겨 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제야 우리는 그것을 얻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즉시 떠나가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마음 없이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의식을 흘러 내려가는 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하나님의 체험도 모두 지나가 버리도록 떠나보내야 한다. 일단 우리의 목표가 어떠한 영적인 체험 이상의 것임을 안 이상 우리가 여정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것에도 매달려서는 안 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기어가면서도 여정을 계속하면 마침내 성령께 순종하는 데서 오는 열매인 내적 자유에 도달할 것이다.

영적인 위안은 그 현존에서 나오는 빛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현존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알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직접 아는 일은 다음 세상에서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그래도 좀 더 가깝게 아는 것은 순수한 믿음에 의해서이며, 순수한 믿음은 사고와, 감정과 자아 성찰 저 너머의 것이다. 순수한 믿음은 심리적 체험이 없는 곳에서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감각과 관념적 체험 너머의 분이시다. 순수한 믿음의 상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것 너머에 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현존이 어디에나 계심을 깨닫는다. 단지 그뿐이다. 우리 자신을 충분히 활짝 열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임을 인식하게 된다.

 

(4) 네 번째 종류의 사고도 우리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일종의 빛나는 어둠과 같은 신비한 충만감이 우리를 감싸 주고 우리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에는 비록 원하지 않는 일상적 사고들을 희미하게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깊은 고요를 즐길 수 있다. 이 사고들에 붙잡히면 즐기던 평화에서 빠져 나오게 되기 때문에 이때의 사고들은 기분 나쁘게 만든다. 때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마음조차 없다. 이때에 우리는 나의 깊은 존재를 부드럽게 도유하는 것 같은 빛과 사랑에 잠기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가운데 커다란 입맞춤을 하고 계시며, 이와 동시에 모든 상처와 의혹과 죄악감을 송두리째 치유하시는 것과 같다. 궁극적 신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체험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수와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말끔히 용서받고 잊혀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 침묵 속에서, 그 무사고(無思考)와 무념(無念)과 무한한 평화의 상태 속에서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마침내 내가 어느 곳에 도달하였구나!’, ‘이 평화는 아주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잠시 시간을 내어서 기억해 두면, 내일은 지체 없이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 텐데.’와 같은 사고(思考) 말이다. 이런 사고가 들면 마치 번개처럼 당신은 그 속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당신은 하나님 맙소사! 뭐가 잘못된 거야!’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4)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가끔 분심이 문제가 된다. 우리가 편히 긴장을 풀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을 드릴 수도 없을 때가 있다. 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곤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이런 약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을 위해서 쏟아 붓는 희생 제물로 생각하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전부이고 자신은 아무것도아니라는 사실에 전적인 신뢰와 기쁨을 느낄 때에, 진정하고 유일한 평화를 향유하게 된다.

 

여기에 분심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의식을 최대한으로 그분의 현존에 계속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분심들은 묵상자가 즉시 물리쳐버리는 것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는 지성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게으름을 부리는 반면에 상상력은 혼자서 방황하며, 의지는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 이런 분심은 무해한 것이다. 둘째 번 종류의 분심이 기도 동안에 내내 계속되었다 해도, 그 기도는 잘된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더 좋은 기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지는 하나님께 일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불만을 느끼고 더욱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께 고정되어 있는 동안 무해하게방황하는 우리의 공상이다. 여기서 이 공상은 방안에 있는 우리의 애완용 신상(神像)과 같다. 우리는 이 신상이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를 바라지만, 이 신상은 계속 돌아다닌다. 규칙적인 숨쉬기와 반복기도, 이 두 가지가 개목걸이처럼 공상이 너무 심하게 또는 너무 멀리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막아 줄 것이다!

 

규칙적인 숨쉬기나 반복기도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기도 중에 숨쉬기나 반복기도를 위해서 마음 쓰는 것 또한 분심거리가 된다. 애서 노력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중에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라. 분심이 아주 심해서 도저히 더 이상 기도하기 힘들 경우에는 규칙적인 숨쉬기나 반복기도를 도구로 사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

 

 

4. 무지의 구름의 분심과 이탈

 

14세기 말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에서는 집중기도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하며, 그 기도의 기초를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안에 둔다. 버질 페닝턴(Basil Pennington)무지의 구름의 주요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은 모두 잊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이것이 바로 관상의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하나님 체험을 하게 하신다.

* 활동적인 봉사 생활의 소명을 받은 신자들도 이따금 활동을 중지하고 묵상과 하나님의 교제에 힘써야 한다.

*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무지의 구름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 사랑 안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 사랑은 다른 모든 소원과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만들 만큼 강해야 한다.

*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당신이나 현재의 당신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장차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신다.

* 우리 영의 굶주림과 동경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변화된 영은 사랑에 의해 하나님을 포용할 수 있다.

 

 

1). 무지의 구름에서의 분심

 

그대가 내게 "내가 하나님만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물을 터이나,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나도 모릅니다."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런 물음으로 내가 그대를 이끌고자 하는 바로 그 어둠 바로 그 무지의 구름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다른 모든 것들을 온전히 알 수 있고, 또 그들에 관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들까지도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을 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그분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자비와 진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보는 것도 선익할 수 있고 교화작용도 할 수 있으며 관상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놓인 일에 있어서는 그것마저도 끌어내려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타오르는 사랑으로 이것들을 단호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짓밟고 올라서서 그대 위에 드리워진 그 어둠을 꿰뚫어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간절한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두꺼운 무지의 구름을 맞추되, 결코 포기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마십시오.

 

(1) 잡념을 물리치는 법

자신의 생각, 특히 호기심이나 본능적인 지식욕에서 비롯되는 생각들을 잡념이라 한다. 이 잡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대와 어둠 사이에서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참견하며 그대에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거든, 그대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이요, 찾는 것도 그분이다.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생각)가 반드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고 물을 터인즉. 그분은 그대를 만들고 그대를 구원하고 은총으로 그대를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너는 그분에 대해 털끝만큼도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십시오.

이어 "그러니 물러서라." 이르고 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위해 그를 짓밟고 넘어가십시오. 설령 그 같은 생각들이 거룩해 보이고 그대가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 될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친절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놀랍고 멋진 생각들을 그대의 마음속에 불어넣는가 하면 하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 은총과 자비를 일깨워 줄 공산도 아주 큽니다. 하지만 그대가 하나님께만 향할 뿐이라면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갈수록 심하게 수다를 떨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도록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그대에게 보여줄 터인즉,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대가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의 지난날 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 시절의 사악한 참상을 생각함에 따라 그대의 마음이 멀리 벗어나서 지난날 노상 드나들던 그 소굴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그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고 맙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대가 자유로이 그 생각에 귀를 기울이기로 동의했고, 그 생각에 응답했으며, 그 생각을 받아들였고, 그 생각이 제멋대로 굴러가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물론 그 생각은 선익하고 성스러웠고 실로 필요한 것이었으니,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사악한 참상과 우리 주님의 수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과 진가를 주제로 하는 지극히 매혹적인 수많은 묵상들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관상을 실현하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숙련된 일꾼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무지의 구름을 꿰뚫고자 할진대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멀찍이 밀어내어 망각의 구름 속에 깊숙하게 파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이 그대를 이 일로 부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고 그대 자신도 응답을 해드릴 작정이라면 겸허한 사랑으로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 그리고 그대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고, 은혜로이 이 생활로 불러주신 하나님만을 착실히 생각하십시오. 그분에 대한 그 밖의 생각은 일체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그대의 열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의향이면 충분합니다.

만일 그대가 이 의향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 한마디로 요약하고자한다면 짤막한 낱말(거룩한 단어)을 택하되 가급적이면 한 음절로 된 낱말을 택하십시오. 낱말(단어)은 짧을수록 그만큼 더 성령의 역사(役事)를 닮아서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나 '사랑' 같은 낱말 말입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낱말을 선택하되, 한 음절로 된 것이라면 다른 낱말을 택해도 됩니다. 그리고 택한 낱말(단어)을 마음속에 단단히 간직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늘 머물게 하십시오. 그것은 평화시나 전쟁시나 마찬가지로 그대의 방패와 창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그대 위에서 맴도는 구름과 어둠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온갖 생각을 망각의 구름 아래로 내리누르게 됩니다. 자주 그렇듯이 만일 그대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경우, 이 낱말 하나가 충분한 답변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이어서 바로 이 낱말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려 들거든, 그대 자신에게 이 낱말을 조각이나 부스러기가 아닌 통째로 간직하려 한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대가 그 점을 확실히 하면 그 생각은 틀림없이 물러갑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그 생각이 앞서 이야기한 유익한 묵상들을 먹이삼아 자라나지 못하도록 그대가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삶의 두 가지 방식

삶의 방식에는 활동생활과 관상생활의 두 방식이 있고 두 방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지적 호기심과 본능적인 지식욕으로 솟구치는 의문들에 대한 해명이다.

 

그대는 당연히 그대의 생각 속으로 계속 밀고 들어와 참견하는 그것이 선익한 것인지 사악한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악하다고는 하지만 놀랍게도 신심을 엄청나게 키워준다는 점입니다. 내가 익히 아는 바지만 그것은 때때로 대단한 영감을 불어넣어 대단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나를 감동시켜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내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연민을 느끼도록 만드는가 하면, 어떤 때는 성스럽고 유익한 여타의 이유들로 진심 어린 눈물이 흐르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나로서는 그런 생각들이 다 사악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만일 이런 생각들이 그처럼 선익하고 유익하다면 당신이 나더러 그것을 망각의 구름 아래에다 파묻어 버리도록 지시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를 참으로 좋은 지적이라고 받아들이고,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대답해 보도록 노력할까 합니다. 우선, 만일 그대에게 덤벼들어서 도움을 주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나한테 묻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코 그대의 평상적인 마음의 표현, 곧 그대 영혼의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또 그대가 그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묻고 있는 것이라면 이성(理性)은 존엄한 것인만큼 기본적으로 그것은 항상 선할 수밖에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는 목적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가 은총에 힘입어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는다든지, 우리 주님의 수난이나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께서 당신의 창조계 안에서 영육 간에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에 눈길을 돌린다면, 그것은 선하고 유익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라면 그대 말마따나 그것이 신심을 크게 키워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이, 아니면 일례로 일부 성직자들 경우처럼대단한 학식이나 지식이 이성을 우쭐거리게 만들고 있다면 그 이성은 악한 것이 됩니다! 이는 그들을 하나님과 신심에 관계되는 일들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오만한 학자들 -악마에게 속한!- 이나 대가들 -허영과 거짓에!- 로 알려지고 싶어 안달하도록 만듭니다. 수도자거나 속세인이거나 모든 남녀들의 경우 평상적인 이성이 그들의 세속적 업적을 자랑하도록 만들 때, 그러니까 그들이 이 현세에서 지위와 소유 · 허영 · 인기를 탐할 때 그것은 악이 됩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는 선할 뿐 아니라 올바로 사용하면 대단히 요긴하고 유익하다면서 왜 망각의 구름 속에다 파묻어 버려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는 활동생활이요, 다른 하나는 관상생활입니다. 활동은 낮은 단계에 해당하고, 관상은 높은 단계에 해당합니다. 활동생활도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관상생활 역시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들 두 가지 생활방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비록 다르기는 해도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활동생활의 높은 단계라고 일컫는 것은 관상생활의 낮은 단계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분적으로나마 관상적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활동가가 될 수 없으며(적어도 지상에서는), 부분적으로나마 활동적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관상가가가 되지 못합니다. 활동생활은 이승에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러나 관상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상생활은 이승에서 시작하여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그 몫은 "빼앗기지 않을"(10:42)것 입니다. 활동생활은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관상생활은 평화로이 앉아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활동생활의 낮은 단계는 선하고 올바른 자비와 사랑의 행위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높은 단계(관상생활의 낮은 단계)는 예를 들어 영적 묵상이나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우쳐 아는 깨달음, 애통과 참회,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분의 종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성찰,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계 모든 부문에서 영육 간에 이루시는 일들과 자비와 놀라운 선물들을 두고 그분을 현양하는 감사 등으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관상의 높은 단계는 -적어도 우리가 이승에서 알기로는- 어둠 속에, 이 무지의 구름 속에 온전히 감싸인 채 사랑의 손길을 내뻗고 계시는 그대로의 하나님이라는 존재, 하나님만을 맹목적으로 더듬어 찾는 단계입니다.

활동생활의 낮은 단계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 바깥에, 즉 그 사람 아래에 자리합니다. 하지만 높은 단계(관상생활의 낮은 단계)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내면으로 향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자리하고,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과 같은 높이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의 높은 단계에 들어가면 사람은 명확히 자신을 초월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빼고는 그 무엇에도 뒤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까닭은 그가 본성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은총으로 성취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것 사랑과 의지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이 그의 지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활동생활의 낮은 단계를 일시 벗어나지 않고서는 높은 단계를 실천하는 일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관상생활에서도 낮은 단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묵상에 매진하는 사람이 '바깥일들' -그가 했던 일이나 해야 할 일로서, 제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할지라도- 에 골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요 불이익이 되듯이, 이 무지의 구름이요 신성한 어둠 속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 자신께로 흐르도록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이나 자비 또는 창조물들을 생각이나 묵상 속에 끌어들여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게 만드는 것은 -제 아무리 유쾌하고 고무적인 생각들이라 할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이런 미덥잖은 생각들을, 이들이 성스러우며 그대의 목적을 실현시켜 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할 때조차도, 억제하고 두꺼운 망각의 구름 아래다 묻어버리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상 사랑은 이승에서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은 그렇지 못합니다. 영혼이 이 썩어 부패할 육체 속에 거처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우리네 맑은 영적 이해력은 특히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할 때 이런저런 왜곡에 부대끼기 마련인데, 이런 왜곡은 우리가 하는 일들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제쳐놓고 수많은 오류를 유발합니다.

 

(3) 관상기도와 잡념(기억)

관상에서는 모든 기억, 심지어는 더없이 성스러운 일들 에 대한 기억까지도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맹목적 관상에 돌입할 때면 언제고 상상력의 왕성한 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는 만큼, 그대도 이를 자주자주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대가 그것을 억누르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를 억누르고 맙니다. 그대가 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 그대의 마음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그대 자신을 자세히 살펴볼라치면, 그대의 마음이 어둠에 휩싸이기는커녕 하나님보다 못한 어떤 것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그것은 일시적이나마 그대의 머리 위에 자리 잡고 그대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성스럽고 매혹적인 생각들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아래로 끌어내리겠다고 마음을 굳히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그대가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을 응시하며 관상하고 복된 이들의 행복한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도, 오직 하나님 그분께 내뻗는 이 맹목적 사랑, 무지의 구름 위로 밀어 올리는 이 은밀한 사랑을 간직하되 이를 그대의 영적 품성으로 굳히는 것이 그대 영혼 건강에 더 유익하고, 하나님과 천상 만군에게 더 기쁨이 되고,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대의 영육간의 친구에게 더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놀라지는 마십시오. 일단 그것을 알아보고 (그대는 은총 덕분에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하고 느끼십시오. 그러면 늘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승에서는 하나님의 맑은 영상을 결코 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흔연하게 허락하시면 그분에 대한 깨달음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사랑을 이 구름으로 들어 올리십시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대의 사랑을 이 구름으로 끌어올리시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그 밖의 모든 것은 잊도록 노력하십시오.

만일 그대의 마음에 저절로 떠오르는 전혀 별 볼일 없는 간단한 생각이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 그대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떼어놓는 구실을 한다면 (이것은 그대의 길을 가로막고 그대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체험을 방해합니다.) 고의로 반갑게 맞아들이고 부추기는 생각은 얼마나 지독한 장애물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대가 성인들이나 다른 손색없는 영적 대상을 생각할 때도 사정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이 비참한 세상에 몸담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나 그 밖의 물질적 · 세속적 사물들을 생각할 때는 얼마나 더 심한 지장이 있겠습니까?

내 말은, 그대의 의지와 마음에 주의를 끄는 선익한 영적 사물과 관련해서 저절로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나, 그대가 신심을 강화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떠올린 생각이 방해물이 되는 까닭에 사악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내 말을 그렇게 이해하지 말도록 금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더없이 선익하고 성스러운 생각일지라도 관상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천상의 어떤 성인이나 천사에 관한 생각에 전적으로 안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릇된 생각과 치명적 죄악

자신의 생각이 죄가 되는 것인지 아닌지, 만약 죄가 된다면 그 죄가 용서 받을 수 잇는 죄인지 어떤 죄인지를 알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아래 주석을 꼭 읽어보길 바랍니다)

 

어떤 살아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생각 하나 하나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청하지 않았음에도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자연스런 생각은 죄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대의 온갖 생각을 지배하는 힘을 앗아가는 원죄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죄가 된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세례를 받으면서 원죄의 죄과는 이미 씻겨나갔습니다.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갑작스런 충동을 재빨리 가라앉히지 않을 경우뿐인데, 이유는 그러다 보면 사람의 자연스런 관심은 그것에 미혹 당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그것이란 그대가 좋아하는 무엇 또는 그대를 즐겁게 해주거나 과거에 즐겁게 해주었던 어떤 것일 수도 있고, 그대를 슬프게 하거나 과거에 슬프게 했던 무엇에 대한 불평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대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이같은 관심은 치명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를 위시하여 속세를 진정으로 버리고 교회(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물질에 매이지 않는)에 복종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의지나 지식이 아닌 수도장상이나 속세 어른들의 의지나 지식에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자연스런 기호(嗜好)나 불평은 기껏해야 소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대가 지금처럼 분별있는 어떤 목회자의 지식과 지도에 부응하는 그런 상태에 처음 진입했을 때에는 그대의 의향이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뿌리내리기 마련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천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불평하는 이런 일에 여지를 허락하고 견책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내 그대의 의지가 동의하는 가운데 그대의 가장 내밀한 존재와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대죄입니다. 이런 일은 그대나 내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어떤 사랑이나 사물 또는 그 밖의 것에 대한 기억을 고의로 떠올릴 때마다 발생합니다. 만약 이것이 그대를 가슴 아프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했던 일에 분통을 터뜨리며 복수를 할 생각이 있다면 이는 다름 아닌 '분노'입니다. 또는 그것을 경멸하고 지긋지긋해하면서 냉혹하고 악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이는 '질투'입니다. 또는 정신과 육체를 선하게 간직하는 일에 피로와 싫증을 느낀다면 이는 곧 '나태'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현재나 과거에 겪은 즐거운 일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대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일시적인 기쁨을 맛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곰곰이 되새기게 되고, 끝내는 그대의 마음과 의지를 거기에다 얽어매며 먹을거리로 삼기에 이릅니다. 그대는 그럴 때마다 이런 기쁜 일로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대가 고의로 떠올리거나 품거나 애착심을 가지고 매달리는 이 생각이 천부적인 가치나 지식, 매력이나 지위, 호의 또는 아름다움이라면 이는 '교만'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속세의 재물이나 부. 재산, 소유권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이는 곧 '탐욕'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최고급 음식과 음료나 여타의 맛 좋은 요리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는 곧 '폭식'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하는 아첨과 아양, 희희덕거림, 쾌락 또는 애정이라면 이는 곧 '정욕'이 됩니다.

 

(5) 생각의 분별

생각과 충동은 하나하나 평가해야 하고,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무모함도 피해야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대나 내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이 같은 죄들을 범했고 그리하여 이런 죄들로 족쇄가 채워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쪼록 그대가 이런 생각과 충동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어 죄를 범할 기회를 제공하는 그 즉시 이를 분쇄하기 위해 힘껏 노력해 주기 바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맨 처음 생각이 떠오를 때 이를 저울질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은, 설령 그것들이 죄 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소죄를 범하는 경거망동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이 사멸할 인생에서 소죄를 완전히 모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완덕을 추구하는 참된 제자들은 누구나 항상 소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가는 그들이 이내 대죄를 범하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6) 관상기도 수련은 죄를 물리치고 덕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그대의 확고한 의지를 절대 꺾지 마십시오. 그대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하는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리십시오. 하나님보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고, 그대를 이 목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십시오. 그래야만 그대는 죄의 토대와 뿌리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그대가 그야말로 자주 단식하고, 오래도록 철야기도를 바치고,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고, 널빤지에서 잠자며 쇠사슬로 몸을 칭칭 감는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대가 합법적으로(물론 합법적이지 않지만!) 그대 자신의 눈알을 빼내고, 혀를 뽑고, 코와 귀를 틀어막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등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그대의 육신을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 자극과 충동은 여전히 그대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대가 자신의 죄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슬퍼하며 제아무리 크게 통곡한다 한들, 아니면 그대가 천상의 환희들을 제아무리 많이 생각한다 한들 그것이 과연 그대에게 무슨 선익이 되겠습니까? 물론 상당한 선익이 되고, 상당한 도움이 되고, 상당한 이익이 되고, 상당한 은총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사랑의 발산에 비하면, 사랑이 없이는 그런 것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너무나 보잘것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마리아가 선택한 '가장 좋은 몫'입니다(5:48). 이것 없이 나머지는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점에서는 죄의 토대와 뿌리를 파괴하며, 적극적인 점에서는 성덕을 거두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진실로 존재하는 곳에는 다른 모든 성덕도 진실로, 온전히 그리고 충만히 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확고한 의지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물론 사람은 이것 없이도 자신이 바라는 만큼 많은 성덕을 지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덕들은 하나하나가 때 묻고 뒤틀리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만큼 불완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덕이란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정돈되고 분별 있는 애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냐고요? 하나님 스스로가 곧 모든 성덕의 고결한 대의(大義)이신 까닭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복합적인 동기에서 특정한 성덕을 추구하고 나선다면, 비록 그의 주된 동기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 성덕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본보기로 한두 가지 성덕을 택해서 살펴보면 이 점을 알게 됩니다. 사랑과 겸손이라는 두 가지 성덕을 꼽아보는 것이 아주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덕들을 확실하게 갖춘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입니다.

 

 

2). 간단한 단어 사용과 이탈(detachment)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기도하는 동안에는 간단한 단어(거룩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생각, 모든 개념, 모든 심상을 망각의 구름(cloud of forgetting)’ 밑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로 앞 무지의 구름에서의 분심 (1)잡념을 제거하는 법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천히 읽어 이해가 될 때 이곳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만일 당신의 모든 소원을 정신이 보유할 수 있는 하나의 간단한 단어 안에 모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긴 단어보다는 짧은 단어, 한 음절로 된 단어를 선택하라. 하나님이나 사랑 등의 단어가 적절하다.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정신 속에 담아두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곳에 머물게 하라. 당신이 갈등할 때나 평화로울 때에, 그 단어가 방어물이 되어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어두움의 구름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 단어를 사용하라. 모든 분심을 억제하며, 그것들을 당신 밑에 있는 망각의 구름에게 맡기라.

 

그 단어가 분명한 생각이나 현실적인 소리가 없는 완전히 내면적인 것이면 좋다.

 

그 단어로 기도할 때에는, 그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며, 그 단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 다만 그 단어와 함께 거하라. 저자는 무지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 속에 집어넣는 것을 구분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거나, 그것들이 처한 상황이거나 행동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모두 망각의 구름 밑에 묻어야 한다.

 

이것이 관상적인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요구되는 이탈의 정신이다.

 

어떤 생각이 계속 당신을 괴롭히면서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오직 한 단어로 대답하라. 만일 당신의 정신이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 단어의 가치는 단순성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렇게 하면, 그러한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생각들을 발전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즉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집중기도와 관련하여 크게 도움이 될 놀라운 통찰들이다. 집중기도의 세 번째 지침은 어떤 생각을 의식하게 될 때마다 부드럽게 가만히 그 거룩한 단어를 상기하라이다. 여기에서의 통찰은 부드러움, 하나의 단어, 그리고 이탈의 중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만일 내가 방 안에 있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정중하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나는 그저 대화를 추진한다. 거룩한 단어의 역할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를 하나의 일에 집중시켜주며, 다른 모든 것을 지나치거나 당분간 한쪽으로 밀어두게 한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기도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쳤었고, 그 방법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기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된 방법론을 알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 관습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을 대한다. 저자는 독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워크숍이나 개인적인 발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다음 그림은 기도의 주기(네 순간)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fig_cando3.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543pixel, 세로 3543pixel

사진 찍은 날짜: 2009년 05월 08일 오후 4:29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7.0

 

위 그림에서 보면 기도를 시작할 때는 평온한 상태이나 곧 사고(분심)가 의식의 강을 타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고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나타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한번 나타나는 과정을 표로 표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한 번의 사고뿐만 아니라 기도의 전 과정 중에 연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할 때마다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간다. 이 일이 반복되는 동안에 우리의 의식은 정화의 과정을 거치며 내적치유가 일어난다. 이러한 기도의 한 주기를 거칠 때마다 중심(신적임재)에 더 가까워진다. 그것은 억압된 장애들이 배설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의 주기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적일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무의식의 정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사고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사고는 처리의 대상이지 매달릴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고(분심)가 떠오르는 것을 인식하거든 즉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감으로 더욱 하나님의 현존에 다가가야 한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기듯이 말이다. 이 길은 그저 수도하는 것뿐이다. 지름길이 없다 차분히 수도하며 신적일치를 사모하자.

 

 

 

5. 정신집중과 기도 방법

 

정신 집중과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들에 의해서 영혼이 들려 올려지고 앞으로 움직이거나, 버림을 받고 죽는다. 이 세 가지 방법을 제 때에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옳지 못한 때에 지혜롭지 못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는다. 몸이 영혼에 연결되듯이, 정신집중도 기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정신집중이 마치 정탐꾼처럼 앞에서 나아가면서 원수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영혼 안에 들어오는 악한 생각들을 대적하는 데 우선적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그 결과는 기도로서, 전부터 정신집중이 대적해온 악한 생각들을 근절하고 죽인다. 정신집중만으로는 그것들을 죽일 수 없다. 정신집중과 기도에 의해서 생각들을 대적하는 이 싸움에 영혼의 생사가 달려 있다. 우리가 정신집중에 의해서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하면 우리는 진보할 것이며,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는 상태로 버려둔다면 기도는 악한 생각으로 더럽혀지고 우리는 실패한 상태에 머물 것이다. 기도와 정신집중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므로, 구원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각 방법의 특징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1) 첫째 방법

첫째 방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서서 기도하면서, 두 손과 눈과 정신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며, 하늘의 축복과 천사들의 계급들과 성도들의 거처를 상상하며, 성경에서 배운 모든 것을 정신 안에 모아들이며, 기도하는 동안에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경하게 만들며, 이따금 눈물을 흘리며 운다면, 이것이 정신집중과 기도의 첫째 방법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방법만 선택한다면, 그는 점차 무의식중에 마음속으로 자신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그가 행하는 것은 그에게 주는 위로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항상 이러한 행동 안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이것(, 이러한 기도 방법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방심과 기만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선한 것이라도 바르게 행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 선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완전한 침묵에 자신을 바친다면(, 헤시카스트가 된다면), 미치는 것을 간신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정신이 나간다면, 그는 덕이나 무정념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방법에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이 눈으로 빛을 보거나 달콤한 냄새를 맡거나 어떤 소리를 듣거나 그 밖에 이와 비슷한 현상들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그것에 도취되어서 미친 상태에서 이리저리 방황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게 가장하고서 나타난 마귀를 빛의 사자로 알고서 길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끝까지 그런 상태에 머문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마귀의 부추김을 받아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목을 매 자살을 한 사람들도 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심과 기만의 형태는 다양하고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정신집중과 기도의 첫 번째 방법으로부터 어떤 해로움이 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살기 때문에 첫째 방법을 실천하는 동안에 이러한 악을 유발하는 일을 피한다 해도, 그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평생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2) 두 번째 방법

두 번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모든 지각된 대상들로부터 정신을 떼어 내어 자신의 내면으로 인도하며, 자신의 감각을 지키고 생각을 집중시켜 이 세상의 헛된 것들 사이를 배회하지 못하게 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각들을 성찰하고, 자신이 입으로 하는 기도의 표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마귀에게 강탈되어 악하고 헛된 것을 향해 날아가는 생각들을 거두어들이며, 어떤 정념에게 사로잡히고 정복된 후에 크게 수고하고 노력하여 정신을 차린다. 이 방법의 특징은 머릿속에서 발생하며, 생각이 생각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며, 진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덕을 실천할 시간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어두운 밤에 원수들과 싸우는 사람과 같다. 그는 원수들의 음성을 듣고 그들의 공격을 받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오는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공격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악한 생각들은 마음에서 발생하는데, 그는 머릿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보지도 못한다. 그 원인은 그의 정신을 덮고 있는 어둠과 그의 생각에서 사납게 날뛰는 폭풍우이다(그것들은 그가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자기의 원수인 귀신들에게서 빠져 나오거나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이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자신이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불쌍한 사람은 헛수고를 하는 것이며, 영원히 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교만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판하며, 자신이 사람들을 먹이고 인도하는 목자의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는 소경들을 인도하는 일을 맡은 소경과 같다. 이것이 정신집중과 기도의 두 번째 방법이다.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은 이것이 영혼에게 주는 해로움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달이 없는 어두운 밤보다는 달빛이 비추는 밤이 낫듯이, 이 방법은 첫째 방법보다 좋은 방법이다.

 

3) 셋째 방법

세 번째 방법은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방법이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천해보지 않은 사람은 믿기도 어렵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으려 한다. 실제로 우리 시대에는 이 방법을 경험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 이 축복은 순종과 함께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것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영적 아버지에게 완전히 순종한다면, 그는 그분의 어깨에 자신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모든 염려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심과 기만에 예속되지 않은 참된 영적 아버지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적인 애착을 멀리하고, 부지런히 세 번째 방법을 실천하려 할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여 모든 염려를 하나님과 영적 아버지에게 맡긴 사람,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거나 자기의 의지를 따르지 않으며 세상적인 애착과 자기의 몸에 대해서 죽은 사람을 이 세상의 비본질적인 것이 정복하여 노예로 삼을 수 있겠는가? 또 그런 사람에게 무슨 걱정이나 염려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유혹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귀신들이 사용하는 궤계와 전력들은 이 세 번째 방법에 의해서 파괴되고 와해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의 정신은 방해를 받지 않고서 귀신들이 도입한 생각들을 조사할 시간이 있으며, 그것들을 쉽게 배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된 영성생활의 시작이다! 이런 방법으로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방법의 출발점은 두 손을 들거나 정신을 하늘의 것들에게 집중하고서 하늘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첫째 방법의 속성들이며, 방심이나 기만과 상관이 없지 않다. 또 그것은 정신으로 감각을 지키는 일에 집중하여 내면에서 영혼을 공격하는 귀신들의 공격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니다(그런 사람들은 머릿속에서만 노력하기 때문에 방심하게 된다). 이것은 둘째 방법의 속성이며, 그것들 실천하는 사람들은 귀신들의 노예가 되며, 복수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원수들이 공개적으로든 비밀리에든 항상 그들을 공격하여 교만하고 허영심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시작하라. 마음으로 영적 아버지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깨끗한 양심으로 행동하라. 순종하지 않고서는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이웃에 대한 관계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영적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그분이 말하는 것만 행하며, 그보다 더 많이 하거나 덜 하지도 않고, 오직 그분의 뜻과 의도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당신이 싫은 것을 그들에게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들과의 관계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며, 당신이 제대로 행하지 못하여 양심이 상처를 입거나 당신을 비난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당신 스스로 세 번째 방법으로 가는 참된 지름길을 평탄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의 특징은 정신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기도하는 동안에 정신은 마음을 지켜야 하며, 항상 내면에 머물면서 마음속을 맴돌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보내야 한다.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주님을 맛보는 것이 허락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일하라.) 정신이 마음 안에서 마침내 주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보고 기뻐할 때(수고는 우리가 하지만, 이것을 맛보는 것은 겸손한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작용이다.), 정신은 마음 안에 있는 이 장소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정신은 마태복음 174절의 베드로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것이다.), 항상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머물면서 마귀가 심어놓은 로든 악한 생각을 쫓아낼 것이다(이것이 세 번째 방법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볼 때에, 이것은 어렵고 답답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의 사랑스러움을 맛본 사람은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8:35)라고 외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한 교부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15:19, 20)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3:26)는 가르침을 들으면서 모든 다른 영적인 일들을 포기하고 온전히 마음을 지키는 일에 집중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모든 덕을 쉽게 획득할 수 있지만 이것이 없으면 단 한 가지의 덕도 굳게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을 마음의 침묵이라고 부른 교부도 있고, 정신집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또 냉정과 생각들을 대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생각을 살피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그것을 탁월하게 실천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 전도자는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깨끗한) 마음에 원하는 길로 좇아 행하며”(11:9), 모든 악한 생각을 마음에서 몰아내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10:4). 여기에서 자리는 마음을 의미한다. 복음서에서 주님도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12:29)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당신의 정신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진하지 말라는 말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5:3)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마음으로 세상에 애착하지 않고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는 말이다. 거룩한 교부들은 이것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다.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글을 읽고 성 마가(St. Mark the Wrestler)나 사다리의 요한,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Hesychius), 시나이의 필로테우스(Philotheus of Sinai), 사부 이사야(Abba Isaiah), 대 바르사누피우스(Barsanuphius the Great) 등의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해 말해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자기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할 수 없으며, 눈물을 흘리고 통회할 수 없고, 온유하고 관대할 수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없고, 긍휼할 수 없고, 화평하게 할 수도 없고,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집중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덕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을 경험하여 알려면, 무엇보다도 이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앞으로 이야기해 주겠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세 가지를 준수해야 한다.

첫째, 좋지 않고 헛된 것에 대한 염려뿐만 아니라 선한 것에 대한 염려 등 모든 염려로부터의 자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둘째, 모든 일에 있어서 양심이 깨끗하여 어떤 일에 있어서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정욕적인 애착이 전혀 없어야 하며, 그리하여 생각이 세상적인 것으로 기울이 않아야 한다. 내면에 정신을 집중하라(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집중하라). 정신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정신이 항상 마음에 거하기 위해서 마음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노력하라. 이렇게 씨름하는 동안, 정신은 마음이 있는 장소를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기도 안에서 은혜가 사랑스러움과 따뜻함을 만들어낼 때에 발생한다. 그 순간부터는 어떤 측면에서 생각이 등장하든지 간에, 정신은 그것이 들어와서 하나의 생각이나 영상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여 몰아낸다. 또 그 순간부터 귀신들을 미워하고 항상 그것들과 싸워 이긴다. 이 활동에서 비롯되는 다른 결과들에 대해서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이 직접 경험하여 배우게 될 것이다. 어느 거룩한 교부는 당신의 수실에 앉아 있으면 이 기도가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질문: 기도와 정신 집중의 첫째 방법과 둘째 방법이 이러한 결과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우리가 그 두 가지 방법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 방법들은 네 개의 가로장을 가진 사다리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은 정념들을 억눌러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 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인 기도를 실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관상기도를 행한다. 이 가로장들에 의해서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첫째 가로장에 첫 걸음을 딛고, 다음에 둘째 가로장, 그 다음에 세 번째 가로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가로장을 딛어야 한다. 사다리에 의해서 세상에서부터 천국으로 올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정신과 씨름하고 정념들을 정복해야 한다.

둘째, 시편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 즉 입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념들이 정복되면, 자연히 기도는 혀에까지도 달콤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다.

셋째, 정신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넷째, 관상기도를 실천해야 한다. 첫 단계는 초심자들에게 적절하며, 둘째 단계는 어느 정도 기도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고, 셋째 단계는 마지막 가로장에 가까이 간 사람들에게 적절하고, 넷째 단계는 완전한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은 정념들을 줄이고 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지키고 정신을 집중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 주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 마음이 정념들을 대적하여 완전히 정복하면, 정신은 하나님을 갈망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는데 보낸다. 이렇게 하나님을 동경하고 기도함으로써, 정신은 힘을 얻어 마음의 주위를 돌면서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생각들을 몰아내며, 기도로 그것들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전쟁이 시작된다. 악한 귀신들은 사납게 소리치며 일어나고, 정념들을 통해서 마음에 폭풍과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서 마치 불길 속의 밀랍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마음에서 추방되어 쫓겨난 귀신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감각을 통해서 외부에서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정신은 곧 회복되며, 원래의 고요함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정신의 깊은 곳을 어지럽게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에 표면만 뒤흔든다. 그러나 정신은 자신을 전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거나 악한 귀신들의 공격에 의해 동요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완전한 사람들, 모든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마음에서 쉬지 않고 집중하는 사람들만의 특성 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각기 정해진 시기에 순서대로 실천하여 마음이 정념들로부터 정화된다면, 그는 완전히 시편 찬송에 전념하고 생각들과 싸우고 육신의 눈으로 천국을 올려다보거나 영혼의 눈으로 천국을 보고 순수하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공중에서 발견되는 악한 마귀들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천국을 응시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다양한 형태의 방심과 기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공중의 영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오직 한 가지, 즉 정신집중에 의해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만 요구하신다.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을 것이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1:16).

 

그러나 눈과 정신을 들어올려 천국을 응시하며 위에서 말한 순서대로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사람의 마음은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을 볼 것이다. 정신집중과 기도의 첫째 방법과 둘째 방법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지 않는다. 집을 지을 때에는 먼저 기초를 쌓고 나서 지붕을 덮어야 한다. 먼저 기초를 쌓고 건물을 지은 후에 지붕을 덮는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행해야 한다. 먼저 기초를 쌓아야 한다. 즉 마음을 지키고 모든 정념들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그 다음에 영적인 집을 짓는다. 다시 말해서 악한 영들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며,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러한 공격을 근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후에 지붕을 덮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집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6. 내심 기도

 

 

이 글은 이름 없는 순례자의 이야기 중에서 순례자의 기도방법으로 내심기도와 심장으로 하는 기도를 소개한다. 이는 정신집중 기도 원리는 같으므로 참고하여 각자의 방식대로 개발하여 사용하면 유익할 것이다.

 

 

1) 내심 기도

 

그렇게 해서 저(이름 없는 순례자)와 노인은 토블스크로 길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걷고 더러는 쉬면서 자애록을 읽었습니다. 노인은 옆에서 제가 읽어주는 구절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행복에 젖었고, 감동의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스승님이 일러 주신 대로 니체포로 복자의 장과 시나이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장을 차례대로 읽으며 심장으로 하는 기도의 원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노인은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있으면 그때마다 질문하면서 자기도 심장으로 하는 기도에 하루빨리 익숙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에 되도록 친절히 서령을 해 주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육체의 눈으로 사물을 보실 수가 없으시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보실 수가 있으십니다. 심장으로 하는 기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라도, 마음의 눈으로는 훤히 볼 수 있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지요. 어르신께서 이런 이치만 바로 깨달을 수 있다면 심장으로 하는 기도 역시 비교적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꿰뚫어 심장을 보듯이 그 속으로 정신을 온톤 집중시켜 보세요. 그렇게 하면 심장이 뛰는 맥박을 정확히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맥박에 다라 기도문을 천천히 외우는 것입니다.

우선 한 번 똑딱하고 맥박이 뛸 때, 그에 따라 입으로는 라고 외칩니다. 두 번째 똑딱하고 뛰는 순간을 잡아 예수라고 외칩니다. 세 번째 뛸 때 그리스도님’, 네 번째에는 저에게’, 다섯 번째 뛸 때에 자비를 베푸소서.’ 이런 식으로 심장의 고동에 맞춰 기도문을 외워 나가면 어렵지 않게 심장으로 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어르신께서 기도를 자주 하셨을 테니 이 정도는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 단계로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에 맞춰 예수기도를 바칩니다. 즉 숨을 들이쉴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님하고, 숨을 내쉴 때에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방법을 오래 지속하면 심장에 다소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그 고비를 넘어서면 차츰 가슴에서 훈훈한 열기가 솟아올라 기분이 몹시 유쾌해질 것입니다.

이때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기도하는 동안 분심과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심과 잡념을 없애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기도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교부들도 다 이런 분심과 잡념을 어떤 형태로든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노인은 제 말에 열심히 기를 기울이더니 제가 말한 대로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노인은 사흘도 목 가서 심장으로 하는 기도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행복감에 도취되었습니다.

 

 

2) 심장으로 하는 기도

 

잠시 후 저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대지는 아직도 어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자리에 누운 채, 꿈에서 본 기억을 더듬으며 스승님이 하신 말씀을 되새겼습니다.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밤 꿈에 나타난 사람이 정말 돌아가신 스승님의 영혼인지 아니면 제가 환상 속에서 그분을 뵌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동안 줄곧 자애록을 손에 쥘 때마다 스승님에 대해 생각해 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스승님의 환상을 열심히 좇으며 머리맡에 둔 책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간밤에 덮어 두었던 그 책이 펼쳐져 있었고, 꿈속에서 스승님이 말씀하신 그 구절 옆에 숯으로 그은 검은 자국이 선명하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적이다! 이건 기적이야"

저는 한동안 이러한 사실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스승님이 실제로 발현하신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덕분에 저는 다시 자애록을 열심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스승님이 지적해 주신 내용을 거듭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불현듯 힘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죄다 실천에 옮겨 보고 싶다는 의욕으로 가슴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심으로 하는 기도의 의미와 그 기도 방법까지 저절로 터득하는 지혜도 함께 얻게 되었습니다. , 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기쁨을 얻어 누릴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기도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확실히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시메온 성인의 교훈에 따라 심장의 자리를 발견하려고 애썼습니다. 눈을 감고 제 시선을 심장 쪽으로 향하게 하며, 심장의 고동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처음에는 암흑과 같았던 제 마음의 눈이 서서히 열려 희미하게나마 심장이 보였고, 점차 그 심장의 움직임이 크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저는 시나이의 그레고리오 성인과 갈리스토 성인과 이냐시오 성인의 가르침대로 호흡에 맞춰서 심장 안에 '예수 기도'를 넣었다 빼줬다 하는 방법도 쉽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저는 의식적으로 제 심장을 들여다보면서 숨을 들이쉬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고 외치고는 숨을 그대로 가슴에 머물게 했으며, 잠시 뒤에"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면서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러한 동작을 처음에는 한두 시간 동안 되풀이하다가 그 동작이 익숙해지자, 나중에는 거의 온종일 되풀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피로하고 권태로운 생각이 아예 없지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즉시 자애록을 펴 들고 심장의 작용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읽을 때마다 저의 마음은 기도하는 열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러다보니 처음 3주가 지나기 전까지는 심장에 다소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 후부터는 차차 고통도 사라지고, 마음은 더없이 평온하고 아늑해졌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점점 더 기도에 열을 올렸으며,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마음속에는 새로운 감각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어떤 때에는 심장이 크게 뛰는 느낌이 들었고, 그럴 때마다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황홀한 기쁨은 주님을 향한 감사로 변해 저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습니다. 감사가 눈물로 변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옷깃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가을 하늘처럼 밝아져서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까지 낱낱이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불러도 알 수 없는 기쁨이 턱에 와 닿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느니라."(17:21)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은총 가운데 끊임없이 내심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그 기도의 효험이 이성과 감각과 지각을 통해서 두루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컨대,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감미로움, 마을의 안정, 정신의 황홀함, 생각의 순결함,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찬란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감각을 통해서는 심장의 유쾌한 열기와 기쁜 소용돌이, 온몸을 꽉 채우는 아늑함, 생명의 경쾌함과 활달함 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각을 통해서는 이성의 깨우침, 성경과 모든 창조물의 언어의 이해, 감미로운 의식의 일깨움, 하나님의 현존과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사랑 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 수업을 통해서 얻은 무한한 행복 속에서 홀로 다섯 달을 보내며, 심장으로 하는 기도에 완전히 자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의식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이 들었을 때에도 제 정신과 마음을 움직여, 끊임없이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기도는 제 생활의 한부분이 된 셈이지요. 이러한 경지에 이른 저는 온통 솟구치는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벌목할 때가 왔습니다. 벌목꾼들이 한꺼번에 이 숲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에 저는 할 수 없이 조용하고 아늑했던 거처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지기에게 그동안 신세를 진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주님이 제게 마련해 주셨던 이 땅에도 감사의 입맞춤을 한 다음, 서둘러 배낭을 메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저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까지 꽤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심장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 익힌 덕분에 제 마음은 언제나 평온하고 즐거웠습니다. 어떠한 고통이나 시련도 제 마음을 약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설령 어떤 일에 얽매어 있더라도, 기도는 제 심장 안에서 스스로 작동했고, 그로 인해 저는 어떤 일이든지 더 능률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에게 말을 건네거나 마음을 다해서 책을 읽을 때도 저의 기도는 조금도 방해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을 갖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란 얼마나 신비롭고 위대합니까?"

 

 

 

7. 핵심은 주시(응시)이다

 

바알 셈(Baal shem)이라는 신비주의자는 강에 나갔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이것이 그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한밤중의 강가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으며, 그는 아무것도하지 않고 앉아 있곤 했다. 다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관찰자를 관조하면서.

그날 밤도 그는 강에서 돌아오다가 대부호의 저택 앞을 지나게 되었다. 커다란 대문 옆에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경비원은 매우 궁금했다. 이 사내는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경비원이 밖으로 나와 말했다.

"쓸데없이 참견해서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요. 낮이나 밤이나 당신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분인지요? 날마다 강가에 나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차례 당신 뒤를 밟아 미행을 했습니다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밤중이 되면 돌아오곤 했지요."

바알 셈이 말했다.

"당신이 내 뒤를 밟은 것은 나도 알고 있소. 적막한 밤이라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이 날마다 대문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 본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궁금한 것은 당신만이 아니오. 나 역시 당신에 대해 궁금하오. 그래서 묻는데, 당신은 무엇 하는 분이오?'

경비원이 말했다.

"저는 그저 경비원(watchman)일 뿐입니다."

바알 셈이 말했다.

", 저런! 당신은 핵심적인 단어를 말했소. 내가 하는 일도 바로 그것이오."

경비원이 물었다.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경비원이라면 집이나 궁전을 지켜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강가 모래펄에 앉아서 무엇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까?

바알 셈이 말했다.

"우리 사이엔 약간 다른 점이 있소. 당신은 외부 인물이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지키지만, 나는 다만 이 '보는 자'를 관찰하고 있소. 이 보는 자는 누구인가? 이것을 아는 게 내 평생의 과업이오. 나는 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소."

경비원이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그러면 보수는 누구에게서 받습니까?"

바알 셈이 말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지복(至福)과 기쁨, 이 엄청난 은총 자체가 그 대가요. 단 한순간만 이것을 맛본다 해도 세상의 어떤 보물도 이에 비교할 바가 못 되지요."

경비원이 말했다.

"그것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평생 동안 지켜보는 일을 해왔습니다만,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험은 한 적이 없습니다. 내일 밤에는 당신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제게 당신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 역시 지켜보는 법을 압니다. 다만 방향전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켜보는 방식은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다만 방향과 차원이 다를 뿐이다. 외부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또는 외부에 대해서는 눈을 닫고 모든 의식을 내면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내면에 초점을 맞출 때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는 자' 이며 각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한순간도 거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다만 그대의 각성된 의식이 수천 갈래로 분산되어 있을 뿐이다. 그대의 의식을 외부로부터 거두어들여라. 그리고 내면에 들어가 릴랙스(relax)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미 존재의 집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명상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 내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관상기도이다.

 

"관상기도"에서 기도자는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10)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 앞에 마리아처럼(10:39)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엔 아무 행위도 없다. 사념(思念)도 없고 감정도 없다. 관상상태 속에서 그대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다. 아무런 행위도 없이 존재할 때 이 순수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이 기쁨은 그분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관상기도 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행위가 중단되고 단순히 그분을 응시(주시)한다. 이때 그분께서 기도자와 하나 되어 주신다. 이것이 주부적 관상기도이다. 관상은 행할 수도 없고 연습할 수도 없다. 그대가할 일은 다만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단순히 그분 앞으로 나아가 존재하라. 생각 또한 행위이다. 관찰이나 숙고(熟考)도 행위이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 자신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그분 앞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분께서 하나 되어 주실 것이다. 완벽하게 릴랙스(relax)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면 기도자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다. 이제부터 기도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제는 오직 그분이 기도자인 그대와 하나 되어 주실 수 있는 상태이다. 그분이 하나(일치)되어 주신 상태, 그것이 바로 관상상태이다.

일단 관상상태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연후에는 서서히 행위를 시작할 수 있다. 물론, 그대의 존재가 동요하지 않도록 주의 깊은 의식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관상의 일상생활로의 전화의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가 단순히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약간의 행위를 배우는 것이다. 마루를 청소하거나 샤워를 하면서도 그대 존재의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더 복잡한 행위까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그대들을 상대로 말(대화, 강의, 설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존재의 중심부에 잔물결 하나 일으키지 않고도 말을 계속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중심에는 철저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관상은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관상은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관상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르친다. 태풍의 중심에 존재하는 삶.

관상기도 중에도 그대의 삶은 계속된다. 오히려 더 강렬하고 기쁨에 충만한 삶, 더 분명한 시각과 창조적인 삶을 얻는다. 그래서 수도원에서는 "노동은 기도이다"는 말을 한다. 그렇지만 "관상상태" 속에서 그대는 '방관자'이다. 그대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다.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라 주시자(注視者)이다. 주시자가 되는 것, 이것이 관상의 핵심이다. 행위는 제 나름대로의 차원에서 계속 진행된다.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다. 그대는 장작을 팰 수도 있고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도 있다. 사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아무것이나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성(awareness)과 주시는 그대로 유지되어야한다. 절대로 흐려지거나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잠결처럼 흐리멍덩한 의식으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응시(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응시하고 또 응시하라. 그 응시가 더 안정되고 평안하여 흔들림이 없을 때, 순간 (마치 흡입되듯이) 관상상태로 변형된다. 모든 것이 보이고, 관찰된다. 응시자 자신이 보이고 관찰된다. 이 상태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비유컨대 꿈과 같다할 것이다. 꿈은 꿈을 꾸기 시작할 때 알지 못하지만 끝나면 꿈이었음을 의식한다. 이와 같이 이 상태로 변형되는 것은 본인도 느끼지 못한다. 이 상태는 의식으로 돌아오면 깨닫게 된다. 관상상태에서 자신을 이탈하여 공중 높은 곳에서 자신을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뻐하라. 그대는 관상상태가 된 것이다.

 

 

 

7. 쉼과 집중하기 수련

 

이 수련은 쉼의 수련부터 먼저하고 다음 집중 수련을 수행한다. 반드시 순서를 지킴이 좋다.

 

1) 쉼 수련

어떤 의미에서 쉼 수련은 우주를 지나다니는 은하수, , 행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광활하게 탁 트인 우주자체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은하수, , 행성이 우주를 지나다니듯 생각과 감정과 기분이 순수한 자각 속에서 오고간다. 우주를 지나다니는 물체들로 우주를 정의하지 않듯이 생각과 감정과 지각 등 자각이 파악하는 것들로 순수자각을 정의하거나 한정하지 않는다. 순수 자각은 단순히 '있음'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라.

 

쉼 수련법은 고정적 접근법분석적 접근법이 있습니다.

고정적 접근법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단을 제시하기 때문에 고정적 접근법을 먼저 수련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갖가지 생각과 느낌과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그것들을 단순히 자각하기가 한결 쉬워집니다.

고정적 접근법은 마음을 다만 있는 그대로 고요하게 휴식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마음의 본성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편안한 자각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휴식합니다.

 

분석적 접근법은 경험 도중에 마음을 직접 바라보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마음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쉬게 하는 수행을 조금 한 뒤에 배우게 됩니다.

또한 마음을 직접 바라보는 경험은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분석적 수련은 지도자의 문하에서 지도받을 때 가장 잘 수련할 수 있습니다. 이 수련은 마음을 휴식하고 고요하게 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수련

 

마음의 뿌리를 잘라 내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각 상태에서 휴식하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각 상태에서' 마음을 자연스럽게 쉬(휴식)는 법입니다.

 

마음을 쉬는 방법은 마치 기나긴 하루 일과를 힘들고 어렵게 방금 끝내고 쉬는 것처럼, 혹은 마라톤 선수가 막 골인하고 나서 쉬는 것과 같이 아무런 부담 없이 편안하게 쉬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긴장을 푸십시오. 어떤 생각이나 감정, 기분이 일어나든 그것들을 막을 필요도 뒤쫓을 필요도 없습니다. 열려 있는 현재 순간 속에서 다만 쉬며,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면 그저 그것을 자각하십시오.

쉼 수련법은 환상이나 기억이나 망상들 사이로 마음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각의 중심으로 대략 묘사할 수 있는 마음의 어떠한 현존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당신은 어떤 특정한 것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들에 깨어 있습니다.

이렇게 쉼 상태에서 수련할 때 우리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과는 완전히 무관한, 자연스러운 투명함 속에서 실제로 마음을 쉬게 하고 있습니다.

매우 일상적인 듯 보일지라도 투명함, , 자비의 모든 성질이 그 상태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수련법은 마음을 쉬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접근법입니다. 당신은 어린아이와 같은 일종의 순수함으로, ',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 기분, 감정이 내 자각을 통과해 가고 있는지 봐 봐.'라는 느낌을 가지고,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마음을 자각하며 쉬기만 하면 됩니다.

순수 자각은 단순히 '있음' 입니다. 그리고 이 수련은 순수 자각의 '있음'을 의식하며 다만 쉬(휴식)는 것을 포함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수행이 상당히 쉽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어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능력이나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마다의 성향 문제입니다.

 

쉼 수련의 실천

최선을 다해 일곱 가지 중심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정식 자세를 취할 수 없는 환경, 예를 들어 당신이 운전 중이거나 거리를 걷는 중이라면, 단지 척추를 똑바로 세우면서 몸의 나머지 부분의 긴장을 풀고 균형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현재 상태를 순수하게 자각하며 마음을 편안히 쉽니다.

어쩔 수 없이 온갖 종류의 생각, 기분, 느낌이 마음속을 통과하여 지나갈 것입니다. 마음을 쉬게 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수련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생각, 감정, 기분이 표면으로 솟아오르기 전까지 한 번에 몇 초 동안만 고요하게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인 지침은 단순히 이런 생각과 감정을 뒤쫓아 가지 말고 자각을 통과해 지나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만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을 무엇이 통과해 가든 그것에 초점을 맞추려고도 그것을 억누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하기만 하십시오.

일단 생각을 뒤쫓기 시작하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의 연결 고리를 잃게 됩니다. 또한 현재 순간의 실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온갖 종류의 환상, 판단, 기억, 그 밖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정신적 방황에 더 많이 사로잡히게 될수록 현재 순간의 열린 마음으로부터 쉽게 멀어질 것입니다.

이 수련의 목적은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이 습관을 고치고 현재의 자각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현재 순간의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생각을 뒤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마십시오. 과거 사건을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현재 순간으로 되돌려 놓고 수련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강화하기에 충분합니다.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수련하려는 의도'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천천히 진행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은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하루에 여러 차례 마음을 휴식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지루해하거나 자신의 진전에 실망하게 될 위험이 있고, 결국은 모든 시도를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잔은 채워진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할 때는 20분 동안 앉아 있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마십시오. 대신 1분이나 단 30초를 목표로 삼으십시오. 망상 속으로 빠져들기보다는,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관찰하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려고 하거나 그것을 열망하기까지 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 몇 초간을 이용하십시오. '한 번에 한 방울씩' 이렇게 실천하면 피로, 실망, 분노, 절망의 근원인 정신적 감정적 한계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밝음, 지혜, 성실, 평화, 자비의 무한한 원천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집중하기 수련

 

소리 수련의 장점은 온갖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을 서서히 배우게 된다는 점이다. 소리의 '내용'에 굳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듣는 법을 배우게 된다. 소리를 단순히 소리로 순수하게 집중해서 듣는 일에 익숙해지면 화를 내거나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 비난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고,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면서 칭찬에 귀 기울일 수도 있다. 훨씬 편안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가지고 감정적인 반응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단지 듣기만할 수 있다.

 

 

특정한 대상에 한 방향으로만 집중하여

마음을 쉬게 하라.

 

처음 시작했을 때 쉼 수련에서. 단순한 자각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본질이며,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너무 가까이에 존재합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마음을 고요하게 쉬는 수단으로 감각을 직접 이용하는 것입니다.

 

 

감각의 문

 

온 세상은 마음이 만든 세상이며, 마음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감각의 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에 뚫린 구멍들을 기초로 한 이미지입니다. 대부분의 감정과 지각은 이 다섯 가지 문 중 하나 이상을 통해 경험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감각 기능은 감각기관을 통한 지각만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 외 정신의식이 있다. 이 정신의식은 신비스럽거나 불가사의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초감각적 지각이나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구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일 뿐입니다.

이 의식에 대한 비유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집입니다. 구멍은 네 방향으로 하나씩 나 있고 지붕에도 한 개가 뚫려 있습니다. 이 다섯 개 구멍은 다섯 가지 감각을 나타냅니다. 이제 누군가 이 건물 안에 원숭이 한 마리를 풀어 놓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원숭이는 정신 의식을 나타냅니다. 큰 집 안에서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원숭이는 자연스레 구멍에서 구멍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확인하고, 뭔가 새로운 것, 다른 것, 흥미로운 것이 없나 찾아다닙니다.

자신이 찾아낸 게 무엇이냐에 따라 이 정신 나간 원숭이는 자신이 지각하는 대상이 즐겁거나 고통스럽다고, 좋거나 나쁘다고,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지루하다고 판단합니다. 그 집을 지나쳐가며 구멍마다에서 원숭이를 보게 되는 사람은 집 안에 풀어 놓은 원숭이가 다섯 마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단 한 마리만 존재합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훈련받지 않은 정신 의식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자각 능력을 가진 다른 모든 존재처럼 정신 나간 원숭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행복해지고 고통을 피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원숭이의 주의를 한 두 가지 다른 감각으로 일부러 돌려서 마음속 정신 나간 원숭이에게 스스로 진정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집중 수련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 하기에 이에 대응하는 방편에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방편에 익숙해짐으로써 우리의 주의는 안정된다.

 

일상 경험에서 우리가 감각으로부터 받는 정보는 대부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산만하게 만드는 근원이 됩니다. 마음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는 정보에 고정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므로, 감각을 통해 받는 정보를 막으려 하거나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려고 한다면 분명 부질없는 일일 것입니다. 더 실질적인 접근법은 감각과 친구가 되고, 감각기관을 통해 받는 정보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산만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단으로 산만함의 근원 자체를 이용하는 겁니다. 이 비유는 고대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에서 유래했는데, 그것은 작업해야할 특정한 물질과 동일한 재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리를 자르고 싶다면 유리를 이용해야 합니다. 철을 잘라 내고 싶다면 철로 만든 도구를 이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각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잘라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수련에서 우리는 마음을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우리의 감각을 이용합니다. 감각을 통해 우리가 받는 정보는 산만함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수행을 위한 훌륭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고요하게 수련하며 나의 지각을 관찰하는 법을 일단 배우고 나면, 수련이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지각하고 있는 것에 감정적으로 개입하는 정도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1) 신체 감각 수련

 

대상을 기초로 한 수련을 시작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 한 가지는 간단한 신체 감각에 부드럽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마 같은 특정 부위에 다만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몸을 이완시킴으로써 시작하십시오.

정식수련 중이라면 앞에서 설명한 일곱 가지 중심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 자세를 취하기가 불편한 곳에 있다면 그냥 척추를 곧게 세우고 몸의 나머지 부분을 편안하게 이완하십시오.

수행하면서 눈을 뜨느냐 감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감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운전 중이거나 거리를 걷고 있다면 눈을 뜨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잠시 있는 그대로 마음을 다만 휴식하십시오.

이제 천천히 이마 부위를 자각하십시오.

그곳에서 얼얼한 느낌이나 온기를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가려움이나 압박감까지 느낄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느끼든 1, 2분 동안 단지 그것을 자각하십시오.

다만 주시하십시오.

그 감각에 부드럽게 주의를 두고 다만 휴식하십시오.

이어서 주의를 거두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쉬게 하십시오. 눈을 감고 있었다면 이제 떠도 됩니다.

어땠습니까?

몸의 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잠시 주의를 집중한 뒤에는 몸 전체로 부드럽게 주의를 돌려 이 기법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약식 수련 중이라면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몸의 나머지 부분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완하십시오. 둘 중 어느 경우든 눈은 떠도 되고 감아도 됩니다.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것을 선택하십시오.

 

잠시 동안 대상 없는 수련을 하며 마음을 휴식함으로써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이마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부드럽게 자각하십시오. 마음이 이런 감각을 그냥 관찰하도록, 단순히 자각하도록 하십시오.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얼굴, , 어깨, 팔 등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각이든 관찰하면서 점차 초점을 내리십시오. 다만 관찰하십시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막을 필요도 없고 관찰하고 있는 것을 바꾸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고요하게 유지하면서 감각이 일어날 때 단순히 그것을 자각하십시오. 몇 분 뒤에는 마음을 그냥 휴식합니다. 그러고 나서 감각 관찰하기로 돌아오십시오. 수행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관찰과 마음 휴식을 번갈아 하십시오.

대부분의 감각에는 어떤 종류의 신체적 근거가 포함됩니다. 앉아있는 의자, 바닥, , , 동물, 사람 등과 우리 몸은 접촉하게 됩니다. 이런 접촉은 뚜렷한 신체 감각을 만듭니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으로부터 오는 이런 종류의 감각을 '전체적 신체 감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느낌에 좀 더 깊이 주의를 기울이게 됨에 따라, 반드시 직접적인 접촉과 관련되지는 않은 느낌, '미묘한 신체감각'이라고 부르는 느낌을 우리는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종류의 수련을 처음 수행하기 시작했을 때 특정한 감각을 피하려 할수록 그것이 커진다. 그러나 그것을 다만 바라보는 법을 배웠을 때는 내가 느낀 어떤 불편함도 좀 더 참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감각을 다만 관찰하면, 바로 그때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내 마음의 일부는 고통스러운 감각에 저항하고 있고, 내 마음의 또 다른 일부는 그것을 다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권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대립하는 충동을 동시에 바라보았을 때, 도피와 받아들임을 다루는 과정에 마음 전체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는 과정이 도피나 받아들임보다 더 흥미로워졌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다만 관찰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습니다.

 

 

(2) 고통스러운 감각 수련

 

차가움, 뜨거움, 배고픔, 배부름, 멍함, 어지러움, 두통, 치통, 코 막힘, 따끔거리는 목, 무릎이나 허리 통증 같은 것은 언제나 유쾌하게 자각되지는 않을지라도 상당히 곧바로 자각됩니다. 고통과 불편함은 이토록 직접적으로 자각되는 감각이기 때문에 사실 수련할 때 집중의 대상으로 삼기에 매우 효과적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고통을 신체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로 여깁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걱정하거나 이런 위협에 마음을 빼앗기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고통 자체가 커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이나 불편함을 수련의 대상으로 삼으면 그런 감각을 이용할 수 있고 이로써 밝음을 인식하는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다양한 해결책을 다루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합니다.

 

 

(3) 응시 수련

 

마음을 쉬게 하는 수단으로 시각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기술적인명칭은 '응시 수련' 이다. 이름만 듣고 겁부터 먹지는 마십시오. 응시 수련은 실제로 매우 간단합니다. 사실 우리는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거나 신호등을 바라볼 때마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이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대상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집중하면서 이 무의식적인 과정을 활동적인 자각 차원으로 끌어올릴 때, 마음은 매우 평화로워지고 열리며 긴장을 풀게 됩니다.

무리하지 않고도 볼 수 있도록 충분히 가까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대상을 가지고 시작하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닥 무늬 색깔이나 촛불, 사진일 수도 있고, 교실에서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뒤통수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순수한 형태' 라고 일컫는 좀 더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십자가나 성인의 사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종교전통에 속한다면 당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대상을 선택하십시오. 이 수련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정신적인 형태, 즉 당신의 상상 속에서 단순하게 생각난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어떤 대상을 선택하든 그것이 형태와 색깔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둘 중 당신이 더 좋아하는 쪽에 집중하십시오. 흰색, 검정색, 분홍색이든 원형, 사각형, 다각형이든 모두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겨우 인식할 정도로만 정신적인 기능을 사용하면서 색깔이나 형태를 주시하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 대상으로 주의를 가져오는 순간 당신은 자각하고 있습니다.

세부 사항을 전부 인식하기 위해 너무 분명하게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수련의 전체 핵심이 휴식하는 것임에도 긴장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집중하면서 초점을 느슨하게 유지하십시오. 어떤 것을 일어나게 '하려고' 애쓰거나 마음을 이완시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좋았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라지. 이것이 수련이야. 이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이야.

그 이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대상을 진정으로 보지 않고 눈만 뜬 채 응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당신은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 그 대상을 전혀 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그렇게 표류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초점의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표류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면 다만 그 대상으로 주의를 다시 가져오십시오.

이제 한 번 수련을 실천 해 보십시오.

 

가장 편안한 몸자세를 취하고 편안하고 느슨한 상태에서 잠시 마음을 다만 쉬게 하십시오. 그리고 바라볼 대상을 고른 뒤 형태나 색깔을 주시하며 그곳에 편안하게 시선을 둡니다. 의도적으로 응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을 깜빡여야 한다면 그냥 깜빡이십시오. 사실 깜빡이지 않으면 눈이 무척 건조해지고 따가울 것입니다.

대상을 잠시 응시한 뒤에는 단순히 마음의 긴장을 다시 푸십시오. 몇 분 동안 그 대상으로 초점을 다시 돌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의 긴장을 푸십시오.

시각적 대상을 방편으로 삼아 수행할 때마다 대상을 기반으로 한 수련과 앞에서 설명한 일종의 대상 없는 수련을 번갈아 할 때 큰 장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대상에 마음을 두고 휴식할 때 당신은 그것을 자신과 분리되어 있거나 별개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려놓고 순수한 자각 상태에서 다만 휴식할 때는 그 구분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대상에 집중하기와 순수한 자각 상태에서 마음 휴식하기를 번갈아 하다 보면 신경 과학이 우리에게 보여 준 기본적인 진실을 실제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재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바꿔 말하면, 보이는 것과 그것을 보는 마음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인식이 하룻밤 새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지각하는 것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은 감각 정보를 변환시켜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기초적인 방법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3장 잠심과 분심.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