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주의사항

 

 

 

관상기도가 기도 중에 제일 좋다는 말은 귀로 들어 알고 있어 관상기도를 해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 위험하니 주의하란 말도 들었을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관상기도란 말이 이제는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고 있다. 최근에 각 교단에서 관상기도를 주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자동차 운전이 위험하다고 좋은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서 다니겠는가? 운전을 잘 배워 유용하게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 관상기도도 분명히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마치 교회 잘 다니다가 이단에 휩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상기도도 잘 못하면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것이 관상기도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관상기도를 배우는 이들에게 관상기도의 장점보다 주의하여야 할 점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의하고 있다. 관상기도에 주의하여야할 점이 있지만 조금만 주의하고 바로 알면 어려움이 없이 참되고 온전한 영적인 신앙생활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이제 장점과 주의할 점과 유의할 점들을 알아보자.

 

 

1. 관상의 중요한 장점.

 

관상의 전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강점들을 가져온다. 그 중에서 네 가지를 살펴본다.

 

1) "처음 사랑"(2:4)의 불길에 계속해서 부채질을 한다.

이것은 관상의 가장 기본적인 공헌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마음-사랑밖에 가진 것이 없다."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항상 우리의 처음으로 부르고, 항상 뿌리를 찾도록 하고, 항상 우리의 기초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거듭 거듭 거듭해서 사랑에 빠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메시지가 단순하다고 쉽게 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처음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빨을 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2) 우리를 단지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한다.

지성적 공식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끈질기게 강조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관상적인 사람은 ‥‥ 위험을 각오하고서 자신의 마음을 언어와 관념 너머의 사막에 내어 놓은 사람이다. 그 사막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순수한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듯이,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옥죄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미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개 믿음을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하려는 영속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하면 우리의 객관성과 시각을 잃을 수 있다.

 

3) 기도의 중심을 강조한다.

관상적인 사람들은 기도가 선한 것이거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필수적인 것, 곧 제1순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방교회의 은자(隱者) 테오판은 이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일 기도가 올바르면 모든 것이 올바르다."

하지만 관상의 전통은 기도의 중추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 이상을 제안한다. 기도를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을 제안한다. 관상의 전통은 침묵을 강조하고 쉬지 않는 기도를 말한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토마스 머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지속적으로 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저는 중보기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으로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삽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끊임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제 영혼의 은밀한 체험입니다."

 

4)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삶의 고독을 강조한다.

옛적의 영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외로운 골짜기'를 홀로 지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그 곳을 지날 수는 없다. 내가 가야만 한다." 고독은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역사를 써 가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또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또한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의 고독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험하고 사막 같은 영성이다. 우리는 영혼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탐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땅은 악몽 속에서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애쓰는 곳이다. 그 곳은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소망은 절망과 소망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안 후에만 찾을 수 있다. 그 곳은 십자가가 잔혹이 아니라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곳이다. 이것들은 관상의 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2. 잠재하는 위험에 대한 이해

 

관상의 전통의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운동들에는 고난과 위험들이 있고, 관상의 물줄기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사전 경고를 받게 되면 우리는 미리 무장을 하고, 위험한 여울과 강한 역류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위험들은 전통이 왜곡 된데서 나오는 것이지 전통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이기 원한다. )

 

1)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다.

이 분야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을 수도사들이 저술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기저귀 가는 일이나 애 봐 주는 사람 구하는 일이나 사친회 모임에 참석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물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며 관상적인 삶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들과 가정과 직장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지내는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를 쌓아 간다. 우리에게는 모든 일상의 삶이 기도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개발해야 하는 장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하는 '신성한 장소들'에 포함된다.

교회 출석과 성경 읽기와 또 다른 '종교적' 활동들이 우리의 전체 경험 중 일부를 차지하겠지만 진정한 성스러운 장소는 우리의 사무실이나 작업대, 우리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놀이터, 배우자나 아니면(미혼이라면) 깊은 고독 가운데서 지내는 우리 집이나 아파트의 조용한 지성소이다.

 

형태는 미묘하지만 동일한 위험은 관상적인 생활에 열정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 문제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와 경건이 우리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질 때,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영성이 사기꾼임을 폭로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은 깨어지고 피 흘리는 인류에 대한 관심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를 타락한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부정과 연결시켜 준다.

 

2) "지나친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asceticism)는 단순히 말하면 '훈련'이라는 뜻을 가졌다. '선수'(athlete)라는 영어단어가 이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삶 가운데서 훈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운동에 지나치게 빠지듯 '영적 포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도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유혹의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우리는 이와는 반대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위험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았다. 예를 들자면, 유명한 이집트인 '기둥 성자' 시므온 스틸리테스는 30년 동안 18미터 높이의 기둥에서 살았다. 그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둥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밧줄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그 주위가 썩어 악취가 나고 구더기들이 우글거렸다. 시므온은 상처 부위에서 떨어진 구더기들을 주워 상처 위에 다시 놓으며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을 먹으라'고 벌레들에게 말했다.

유럽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지나친 금욕주의의 예들을 볼 수 있다. 모든 행태들이 이전 것에 비해 훨씬 더했다. 시아란 성자는 빵을 모래와 섞어 먹었다. 케빈 성자는 7년 동안을 서 있었다. 핀추아 성자는 7년 동안 철 족쇄로 겨드랑이를 채우고 공중에 매달려 지냈다. 이테 성자는 딱정벌레들이 그의 몸을 뜯어먹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나친 모습에 질겁을 한다. 물론 질겁할 일들이었다. 하지만 현대 시대의 지나친 행태들과 그 모습이 많이 다를까?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들의 일생이 '철로 만든 방들'을 획득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나친 금욕주의와 과도한 운동은 같은 집착에서 비롯된 극과 극이다.

금욕적인 실행의 진정한 목적과 올바른 위치를 이해함으로써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다. 영적인 삶에서의 훈련을 통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지 금식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는 잔치를 배우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훈련들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목적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 :17). 목적은 자유롭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의 즐겁고 유쾌한 사랑 관계이다.

 

3) "반지성주의 경향"이다.

믿음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지적인 노력의 가치를 감소시키려는 경향이다. 이것은 때로 반 지성주의에 가까워지게(혹은 적대심으로 빠져 들게) 된다. 이런 경향을 확고한 신학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신비주의 종파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전통에 충실한 정통 작가들도 마음-믿음을 강조하려다가 고의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한 몫을 더하게 된다.

 

왜 이런 위험이 나타났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들은 모두 의지를 끌어들이지 못하거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차갑고 둔감한 신학을 보아 왔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지성주의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올바른 합리와 명확한 생각의 결여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성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 둘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이 위험은 많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4)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체스판 위험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관상적인 이들은 사랑이 가득하고 양육하는 책임을 지는 모범을 보일 의도를 가진 공동체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 번에 걸쳐 보게 되겠지만 전통의 가장 큰 강점은 심각한 약점이 될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상적인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귀 기울여야 할 그 메시지가 특히 서구 문화에서는 '하나님과 나' 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로 인도될 수 있다. 특정 신비주의적 표현들, 특히 반()제도적 정신에 물든 것들은 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 때로는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반 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과거에 활발했던 신학 저술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빈번하게 무지한 이단을 낳는 교리적 순진함이다.

 

우리에게 관계가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 엘리야나 세례 요한을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는 규칙을 증명해 줄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믿음을 고립되어 행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자신의 통찰을 전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천국의 공동체- '성도들의 친교' -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용기에서 힘을 얻고, 그들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도받음으로써 우리는 능력을 받는다.

 

 

3. 반드시 알아야 할 교훈

 

1). 영성생활의 본말을 전도해서 은사 자체에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영성생활의 주된 목적은?

(1)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함이 가 장 큰 목적이고,

(2)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존재를 하나님 안에서 사 랑하는 것이다.

 

2). 영적으로 체험된 것 중에서 순수 관상으로서의 하나 님에 대한 직관적 지식(환상, 계시, 영적 언어, 영적 느낌)은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므로 수동적으로 받아 야 한다.

즉 외적 감각이나 내적 감각의 개입 없이 오직 초자연적 방법으로 주어진 영적 지식으로 받으라. 다른 은사들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거두어 가시기도 한다(고전 13:8).

*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지막 우상은 신령한 은사들에 대한 집착이다.

 

3).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지고의 영광된 목표 앞에서 아직 도상적 존재이다.

자기가 현재 도달한 어떤 고상한 영적 상태에서 자만하거나 자족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한다.

* ‘오직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4. 가슴을 열어라(머리에서 가슴으로)

 

 

머리를 없애라. 머리 없는 자신을 상상하라. 이것이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묵상법 중의 하나이다. 이 묵상을 행해 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걸을 때에는 마치 머리가 없이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라. 처음에는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머리가 없다고 상상하면 아주 이상하고 묘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당신은 가슴으로 내려가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눈먼 사람은 더 예민한 귀를 갖는다. 그의 귀는 음악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법칙과 같다. 눈먼 사람은 더 음악적이다. 음악적 감수성이 더 뛰어나다. 왜 그런가? 일반적으로 눈을 통해 흐르는 에너지가 막혀 버렸다. 그래서 에너지는 다른 통로를 찾는다. 귀를 통해 에너지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맹인은 촉감이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을 통해 서로를 감지한다. 그러나 맹인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에너지가 손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맹인은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감각이 예민하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다. 하나의 센터(, 중심)가 막혀 버리면 에너지는 다른 축(중심)을 통해 흐르기 시작한다.

이런 묵상법을 시도해 보라. 머리 없이 존재하라. 그러면 돌연 당신은 이상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당신 자신이 가슴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머리 없이 걸어라. 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고 머리가 없다고 상상하라. '내 머리가 사라졌다'고 느껴라. 처음에는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그대는 진짜로 머리가 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즉시 그대는 가슴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서양인들이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인들은 생각이 배에서 나오는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식 교육을 받지 않은 일본의 아이에게 "생각이 어디에서 나오니?" 하고 물어보라. 그는 자신의 배를 가리킬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났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머리 없이 살고 있다. 만일 내가 당신의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고 물으면 당신은 머리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머리가 아니라 배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의 마음이 더 고요하고 차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서양식 사고방식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동양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동양은 외딴 섬처럼 여기저기 존재하는 몇몇 사람들의 영혼 속에나 존재한다. 지리적으로 볼 때 동양은 사라졌다. 온 세계가 서양화되었다.

욕실의 거울 앞에 서서 묵상하면서 머리를 없애보라. 자신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가슴을 통해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라. 그러면 서서히 가슴의 센터(, 중심)가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의 인격(personality) 행동 패턴 등 전반에 걸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가슴은 가슴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머리를 없애보라. 그리고 두 번째로는 사랑으로 더 충만해져라. 사랑은 머리를 통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랑으로 충만해져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머리를 잃어버린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평상시처럼 작용하고 있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머리가 사라져야 한다. 사랑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필요하다. 사랑은 가슴의 기능이다.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어리석어진다. 그는 "내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 내가 제 정신인가?" 하고 반문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둘로 나눈다. 분열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의 가슴은 고요하고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를 위해 집 밖으로 나오면서 가슴에서 벗어난다. 그는 머리를 갖고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충만한 사랑을 느낄 때에만 가슴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이렇게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일상 생활 속에서는 결코 가슴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어떤 친구의 이야기이다. 그 친구는 큰 교회 목사였는데, 그의 부인이 친구를 보고 말했다.

"제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어요?''

"무슨 문제입니까?"

"제 남편은 당신의 친구잖아요.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해요. 그러니 당신이 그에게 조언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할 것 아닙니까?"

"그이는 침대에 누워서도 교회 목사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해요. 그이는 내게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에요. 그저 하루 24시간 내내 교회 목사라고요."

자신의 신분에서 내려오기란 매우 어렵다. 그것은 고정된 태도를 형성한다. 만일 그대가 사업가라면 그대는 침실에서도 사업가의 면모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에 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원할 때마다 자신의 행동 패턴을 즉시 바꾸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사람은 머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묵상법을 위해서는 더욱더 사랑으로 충만해지라. 사랑으로 충만해지라는 말은 그대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질적 변화를 일으키라는 뜻이다. 모든 관계의 밑바닥에 사랑이라는 토대를 세워라. 모든 관계를 사랑에 기초한 것으로 만들어라. 그대의 부인이나 아이들, 친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의 관계를 더 많은 사랑으로 채워라. 그것은 다만 생명체를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를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어떤 관상가는 움직이거나 걸을 때에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개미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를 사랑으로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대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더 많은 사랑에 기초할수록 가슴의 중심이 더 활발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가슴에는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고유한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결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그것은 마음에게 있어서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은 오직 분석할 뿐이다. 마음은 나누고 구분한다. 마음은 분열을 능사로 여긴다. 그러나 가슴은 통합한다. 오직 가슴만이 통일성을 줄 수 있다.

가슴을 통해 세상을 보면 우주 전체가 하나의 단일체로 보인다. 반면에 마음을 통해서 보면 세상 전체가 원자로 쪼개어진다. 통일성은 사라지고 오직 수많은 원자가 있을 뿐이다. 가슴은 통합의 경험을 선사한다.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연결시킨다.

과학이 결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에 의해 채택된 방법 자체가 궁극적인 단일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의 방법론은 추론과 분석, 구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과학은 분자, 원자, 전자를 발견해 냈으며, 이것들 또한 더 작은 단위로 계속 나누어 나갈 것이다. 과학은 결코 전체라는 유기적 단일체에 이르지 못한다. 머리를 통해서는 전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가슴으로 해야 한다. 머리로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관상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다. 그 열망으로 하는 것이다. 말로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도 머리로만 하기 때문이다. 모두 가슴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관상에 이르고 관상적인 삶을 누리자.

 

 

 

 

 

 

 

5. 마음으로 기도한다

 

기도는 마음의 근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기도의 장소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 하고 싶으면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은총을 간구해야 하지만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기도는 은총인 동시에 우리 노력의 결실이다. 우리의 노력이라는 면에서 볼 때 기도가 잘 되느냐 안되느냐는 근본적으로 마음속 깊이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은 마음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만나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하게 된다.

이제 미음의 개념과 '마음속 깊이 들어가' '마음으로 기도 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마음의 개념

 

1) 구약 성경

구약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 전체를 가리키고 인격의 진수를 뜻한다. 마음은 사람의 가장 심오한 내면성을 의미한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24:7)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3~34)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32:39-40)

 

예레미아에 의하면, 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알고 공경하는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공경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지성으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공경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공경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변화는 인격 전체의 변화를 뜻하며,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변화, 가장 근본적인 생활태도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게약을 '새로운 마음의 삽입'으로써 설명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1:19-20)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6-27)

 

하나님은 사람의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도려 내시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신다. 이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규정을 철저히 따르게 된다.

 

2)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적극적 활동으로 인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16:14-15)

 

본문에서 '마음을 열어' 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부에서 활동하심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을 개방시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면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회개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활동과 은총이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시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힘으로 인하여 사람은 낡은 인간을 그 행위와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게 된다(l4:22-24; 3:9-10). 의화는 마음의 새 창조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재생이다.

의화의 원천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깊은 데서 활동하시고 마음을 그리스도화 시켜 그 사람을 전적으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아버지의 자녀로 변하게 하신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아빠' 라고 부르게 된다(8:15; 4:6). 이것이 새 마음으로, 새 인간이 되어 기도한다는 뜻이다.

마음은 결코 감정, 기분, 감수성이 아니고 애정이나 미움을 느끼는 어떤 기관도 아니다. 그것은 지성과 의지의 능력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마음은 모든 기관이나 능력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을 움직이고 조절하는 원천으로서 모든 신체적, 정신적 행동의 궁극적인 기반이자 생활의 근원이다. 신비가들이 말하듯이 마음은 '영혼의 선단(先端)'이며 '정신의 절정'으로서 인격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 존재하는 내면성이다.

 

 

2. '껍질'로 덮여 있는 마음

 

마음은 사람의 정신과 심리와 신체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이를 의식하고 실감하기가 어렵다. 보통 마음은 정신적, 심리적, 신체적 행위 밑에 잠자고 있거나 마비되어 있다. 이런 마음을 잠에서 깨우고 자유로이 활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신수련과 영적 수련 그리고 기도 수련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지니는 원래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하여 자기 의식의 깊은 수준에 내려가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의식이 깊이 내려갈수록 마음속 깊이 들어가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하나님과의 친교로서의 기도를 잘 할 수 있게 된다. 그 반대로 자기 의식이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심리적 흥분 상태가 될수록 자신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어 기도를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잠들고 마비된 상태이다. 이 사실을 마음의 '껍질'이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볼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껍질로 덮여 있다. 껍질은 사람의 자기 의식을 외면화하고 산만케 하고 흥분케 하는 모든 것이다. 이 껍질로 인하여 마음이 잠들거나 마비되어서, 사람은 지성과 의지, 감정, 감각, 감수성 등의 능력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껍질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근심 걱정, 산만성, 무질서 등은 얇은 껍질이며 미움, 분노, 교만, 질투, 복수심 등의 악의는 보다 두꺼운 껍질이요 큰 죄악 등은 아주 두꺼운 껍질이다. 마음이 여러 능력을 활동하게 하는 데 있어 얇은 껍질은 작은 피해를 끼치지만 두꺼운 껍질은 큰 피해를 끼친다.

지성과 의지를 비롯하여 감정, 감각, 감수성 등의 모든 능력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아 외부 조건에 반응하기는 하나, 이 능력을 근본적으로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이 죄악과 악의와 무질서 등의 껍질로 덮여 있다면 여러 능력을 통제하지도 다스리지도 못하게 된다. 그 결과 능력은 외부 세계와 외부 조건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잠들고 마비된 상태이다. 그 마음은 참으로 둔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6:9-10; 13:14-15; 4:12; 8:17-18; 8:10).

 

 

 

3. 마음의 '껍질'을 벗긴다

 

사람의 자기 의식이 마음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사회생활, 정신생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인 행위가 된다. 자기 의식이 마음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덮고 있는 껍질을 벗겨야 한다. 먼저 죄의 두꺼운 껍질을 벗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의식과 자기 마음 사이의 관계를 차단시키므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기도를 할 수 없게 하고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죄는 기도의 가장 큰 적이다. 그 다음에 모든 악의 껍질을 벗긴다. 미움, 분노, 교만, 질투, 복수심 등의 껍질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모습을 흐리게 하여 기도를 어렵게 한다. 마지막으로 근심 걱정, 산만성, 무질서 등의 껍질을 벗긴다. 이 껍질들은 사람의 심리를 불안하고 변덕스럽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얕은 수준에 머물게 하여 참다운 기도를 바치지 못하게 한다.

마음의 둘레에 무수하게 붙어 있는 껍질을 하나씩 벗겨 가면서 마음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바로 정신 수련이요 영적 수련이며 기도의 수련이다. 벗기면 벗길수록 자기 의식은 마음의 핵심에 도달하여 사람은 내면화되고 집중되고 단일화 되며 순수하게 된다. 반대로 많은 껍질들이 붙어 두꺼워지면 두꺼워질수록 자기 의식은 마음에서 멀어지며 사람은 외면화되고 산만해지고 복잡하게 되고 불순하게 된다. 전자의 길은 영을 따라 사는 삶의 길이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며, 후자의 길은 육을 따라 사는 삶의 길이요, 육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다(참조: 8:1-17; 5:16-25).

마음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껍질을 몇 개 정도만 벗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벗겨가야 한다. 간단없는 마음의 탐색, 끊임없이 반복되는 마음속으로의 침입, 이것이 정신 생활과 영성 생활의 내용이요 목적이다.

우리 자신의 가장 심오한 현실, 우리 자신의 가장 참다운 모습,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은 아무 가림도 속임도 없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에서 사람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 곧 마음에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므로(1:26) 사람의 진실한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마음에서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본다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시어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 이렇듯 마음의 심오한 곳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날 때 비로소 인격적 만남과 내밀한 친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4. 기도의 상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심오하고 본질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인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참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을 아빠로 모시는 데에 있다. 그는 자기의 삶과 행동의 근본에서 하나님을 아빠로 모신다. 곧 마음 한가운데에 아빠를 모신다. 입으로 소리내어 아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 자체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빠라고 부를 때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의 근본인 그 마음은 바로 일종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기도의 삶과 행위를 시작하고 기도의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기도의 마음은 어떤 기도를 의식적으로 외우는 행위라기보다 삶과 행동의 근본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 기도의 상태이다. 본인이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살고 행동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행동이며 하나님을 아빠로 모시는 살과 행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기도의 상태에 있으며 그의 삶과 행동은 기도의 상태 안에서 친행된다.

마음은 사람의 능력과 기관과 행동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도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마음은 아빠의 사랑을 받고 아빠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맛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죄와 악의와 무질서의 껍질로 덮여 있을 경우에는 마음이 기도의 상태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진다. 마음에 자리 잡은 기도의 상태는 무의식 수준에 있으며 잠들어 있거나 마비되어 있으므로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5. 기도의 행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적인 기도의 상태를 의식하게 되었을 때 보통 우리가 말하는 기도의 행위가 된다. 즉 잠재의식 속에 묻혀 있는 기도의 상태가 의식 수준에 올라왔을 때 사람은 소위 기도라고 불리는 행위를 하게 된다. 무의식적인 기도의 상태가 의식적인 기도의 행위로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식이 마음속 깊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 의식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하려면 마음의 둘레에 붙어 있는 껍질을 제거한 후 자기 의식을 마음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럴 때 자기 의식은 기도의 상태를 의식하게 된다. 곧 마음의 무의식적 기도의 상태가 의식의 수준으로 올라온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의식과 마음이 만날 때 이미 마음에서 잠재적으로 바쳐지고 있던 기도가 의식 세계로 뛰쳐나와 의식적 기도의 행위가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바쳐지고 있었던 기도가 마음의 껍질을 꿰뚫고 뚜렷한 행위로서 표면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죄와 악의와 무질서의 껍질에서 마음을 해방시켜 자유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야 마음은 원래 지니고 있던 기도의 능력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이 자기의 모든 능력을 마음에 집중시킨다면 마음은 그 능력들까지도 기도에 전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기도는 마음의 껍질을 제거하기만 하면 저절로 나오기 마련이며 마음 안에 들어가 집중하기만 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발굴된 유전에 송유관(送油管)을 넣기만 하면 원유가 솟아나오는 것과 같고, 큰 댐의 수문을 열기만 하면 막대한 양의 물이 넘쳐 나오는 것과도 같다.

어느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재로 덮여 있는 숯불과 같다고 한다. 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재 밑에는 시뻘건 숯불이 타고 있다. 여기에 마른 나무 가지 하나를 던지면 갑자기 불길이 솟아올라 나무 가지를 태우는 것과 같다. 재 밑에 숨어 있던 불이 나무 가지에 타오르면서 다른 가지를 불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재로 덮여 있던 숯불은 껍질로 둘러 쌓여있는 마음이고, 나무 가지를 던지는 일은 마음의 껍질을 벗겨 자기 의식을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나무 가지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은 마음속에 이미 있었던 기도의 상태가 의식적인 기도의 행위로 되는 것을 뜻한다. 재 밑에 숯불이 이미 있었듯이 마음속에는 기도의 상태가 잠재해 있다.

 

 

6. 기도의 상태에 공명한다

 

기도는 우리가 생각해 내는 것도 아니고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책이나 분위기에서 얻는 것도 아니다. 기도할 때는 외적인 일이나 피상적인 감정, 감각 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의지해야 한다.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원래부터 주어진 은총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이 본래적인 기도의 모습을 찾아내고 식별하고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즉 이미 주어진 기도의 상태를 발견하고 그 리듬에 공명(共鳴)하는 일이다. 이는 곧 자기 지성과 의지, 몸과 정신, 감정과 감각 그리고 동작, 자세, 목소리 등 모든 능력과 기관을 기도의 리듬에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로 자신의 본래 기도의 리듬에 공명할 때 비로소 전 인격적이고 의식적이고 정성어린 기도의 행위를 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도의 리듬에 생활과 활동까지 공명하게 된다면 생활과 활동도 일종의 기도가 된다. 자기의 생활과 활동을 기도의 장소인 마음속으로 가져가 마음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에서 바쳐지고 있던 기도는 점차생활과 활동에 스며들어 영향과 힘을 주게 되고 마침내 생활과 활동 전체를 기도로 변화시킨다. 기도의 상태는 원래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 마음에 생활과 활동을 의식적으로 합치시키고 공명하게 함으로써 생활과 활동이 일종의 의식적인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생활과 활동이 하나님을 아빠로 모시고 아빠라고 부르는 상태를 의식적 표현하고 있다면, 그 생활과 활동은 틀림없이 기도이다.

 

 

7. 마음으로 돌아간다

 

마음 밖에서 헤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마음은 인격의 핵심이며 자기 의식의 고향이다. 사람은 평소에 쉽게 이 고향을 떠남으로써 자신을 잃어버리곤 하는데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야한다.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아빠로 모시는 모습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모습은 바로 마음 안에 농축되어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모습인 마음 안에서 사람은 자신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마음에서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친밀한 친교를 나눌 수 있다.

기도는 사람의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사람이나 책을 통하여 외부에서 받아들이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지도와 책의 설명은 자신의 기도의 상태를 발견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기도의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외부의 지도와 설명을 받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고향, 기도의 장소는 마음이므로 자기 마음속에서 기도를 찾아야 한다. 기도의 장소는 지성도 의지도 아니고 그밖의 다른 어떤 능력이나 기관도 아니다. 이 능력들은 그것들이 마음에 집중될 때에야 비로소 기도에 도움이 된다.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성만으로 기도하려고 할 때 그 기도는 차갑고 형식적인 기도가 될 것이다. 겉으로는 정확하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루지 못한다. 의지만으로 기도하려고 할 때 그 기도는 일종의 정신 수련이나 윤리 도덕적인 노력에서 그치게 된다. 아무리 꾸준하게 기도하더라도 인내와 희생 정신만으로는 기도의 즐거움과 은혜로움을 맛보지 못한다.

감정이나 감각을 중심으로 기도할 때에도 감정적 기도, 감각적 기도가 되고 만다.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열성은 피상적이고 뿌리가 없어서 일시적이고 실생활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열성은 해로우며 아무 이익이 없다. 신앙과 기도의 열성은 더욱더 내면화되어 실생활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상도 기도에 도움이 되지만 상상만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결국, 마음이 지성과 의지와 감정, 상상력 등을 적절히 조절하여 이용할 때 전 인격적 행위로서의 기도가 이루어진다. 전 인격적 행위로서의 기도는 항상 마음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하며 마음으로 바쳐져야 한다.



4장 주의사항.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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