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기도의 시작

 

 

 

만일 관상기도를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라. 우선 항상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엄격한 순종을 실천하라. 순종이 없으면 양심이 깨끗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양심을 깨끗이 보존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하여, 둘째는 영적 아버지에 대하여, 셋째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대해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한다.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상충되는 일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영적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그분이 명하는 것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며, 그분의 목적과 뜻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사람들에 관해서는, 당신이 싫어하는 일 및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들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물건들과 관련해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의복을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여 양심이 당신을 책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 어디서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장소)

기도자가 완전히 혼자서 사사로이 있을 수 있는 장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장소,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 예수님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라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5:16).

 

그러나 예수께서도 언제나 뜻대로 외딴 곳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6: 30 이하).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장소에 있다거나 한 방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벌써 심리적으로 강한 분심이 되고, 완전한 긴장 이완에 방해가 된다.

만약에 가능하다면, 교회나 자기 방에서 기도할 것이다. 보통으로 교회는 이러저러한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기 방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옥외에서 좋은 장소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중단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어야만 한다.

 

2) 얼마 동안 기도할 것인가? (기도 시간의 길이)

매일 한 시간을 온전히. 매일 한 시간의 묵상기도가 대부분의 수도규칙들이 전통적으로 규정한 시간이다. “기도 시간이 너무 짧으면, 여러 가지 공상을 버리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시간이 다 지나간다. 막 준비가 되어서 정말로 기도를 시작해야 할 때에 벌써 그만두게 된다.” 하루의 한 시간은 우리 삶의 시간 전체의 약 4%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활동적이고 바쁠수록 그만큼 더 하나님 앞에서 긴장을 풀고 쉬기 위해서는온전한 한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의 이 기도가 우리의 신경과 정서에 꾸준히 영향을 미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약 바쁜 생활을 한다면, 고요와 침묵 속에서 매일 우리 영혼을 치유하고’, ‘성령께 우리를 열어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선행보다도, 이런 식의 매일의 침묵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히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더 높은 무지의 구름에 전력을 다해 열심히 파고들라. 휴식은 나중에 취하라.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는 한 시간은 어렵다. 그러므로 점심시간이나 오후 시간 등 가능한 시간(20~30)으로 2~3회 나누어 하는 것도 무방하다.

 

3) 언제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때)

실제로 언제 기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소임과 임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이들은 이른 아침을 좋아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1:35).

만약 이른 새벽에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새벽의 고요함은 정말로 큰 보상이 된다. 어떤 이들은 잠자기 전, 저녁의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간에는 긴장을 풀기가 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 지킬 수있어서 좋다. 가급적이면 잠자기 직전에는 숙면을 위해서 피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온전히 한 시간을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다.

장거리 버스 여행 중이나 기차 정거장에서도 한 시간의 기도를 할 수 있다.

 

각자가 언제가 기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인지 때때로 점검해야 할 것이다.

 

 

 

1. 관상기도의 방법

 

왜 기도를 실천합니까?”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질문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루 중 특별한 시간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하루의 일정표 안에 기도 시간을 배정하기를 거부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영성생활의 목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살전 5:17).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상황을 고려해볼 때, 만일 우리가 전혀 기도를 실천하지 않고서도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묘기는 전혀 연습이나 훈련을 하지 않고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습관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배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소원을 찾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갈망을 내려놓는 기술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의 분심들을 의식하고 나서 그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한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데 능숙해진다.

 

 

1). 하나님의 임재의식

 

하나님을 보는 것’,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우선 이것은 환영들을 보는 것이나 머릿속으로 실제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주 안에서 일하는 우리 자신이 아닌 타자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 방법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 타자에 대한 의식을 경험할 기회를 준다. 우리는 어떤 느낌생각그림행동사람완전한 침묵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음성들이 하나님의음성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기도를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고 서서히 우리를 휘어잡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나는 구름처럼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순간적인 빛의 깜박임처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우리의 생각들의 배경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나타날 수도 있다. 그때에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숙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러 시간, 여러 주, 여러 해가 지나면, 우리는 서서히 실제로 자신이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지 확실히 알기 시작한다(물론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느끼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현존 의식이 증가함에 따라, 기도의 실천은 우리의 직장, 우리의 여가, 우리의 가정, 우리의 여러 가지 관계들 안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께 주목하면서 성령과 함께 자유로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기도는 영성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기도의 역사적 인물들은 기도 방법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이 목표와 함께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 결합해 넣은 사람들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 방법들이 역사적으로 어느 한 시점에서 창안되었다고, 어느 거룩한 사람이 각각의 방법을 만들어내어 교회 안에서 사용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고자하는 각각의 방법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어떤 형태로 존속되어온 것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속한 것의 표식을 찾기 위해서 항상 성경침묵창조력상징침잠(沈潛) 등을 사용해왔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이미 이것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이러한 찾는 과정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나의 특별한 형태의 기도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인 탐색을 조직하고 표시하고 이룩하는 것인데, 그 일은 이미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기도는 파악하기 어려운 현존을 소유한 동반자와의 대화이다. 하나님은 유형적인 형태를 취하시지 않으므로, 이러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한다.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합일은 죄와 죄의 원인들을 뿌리부터 없애버린다. 어쩌면 이것이, 습관이 된 미움의 행위들을 피하려는 수천 번의 결심과 개인적 노력보다 한결 효과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원천, 유일무이한 사랑의 원천이시다. 우리가 사랑의 원천과 하나가 되고자 할 때 우리 자신이 그 사랑의 중재자가 되고, 그리하여 사랑이 그 거룩한 원천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거쳐 우리 개개인의 세계로 흘러들게 된다.

이제 관상기도에 필요하다고 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2). 관상(침묵)기도

관상기도, 혹은 관조기도라는 말은 포괄적이다. 관상기도란 용어에는 거룩한 독서, 예수기도를 포함하여 습득식 관상기도, 주부식 관상기도, 이 모두를 아울러 말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는 거룩한 독서, 예수기도를 따로 말하고, 습득식 관상기도와 주부식 관상기도를 관상기도라고 말한다.

저자는 습득식 관상기도를 권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관상기도란 주부식 관상기도를 말하며, 아직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서 번역하는 사람마다 차이를 보내고 있다. 이들을 보면 침묵기도마음의 기도듣는 기도집중기도향심기도구심기도관상기도등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관상기도라고 말하고 경우에 따라 침묵기도라고도 한다.

 

 

 

2. 어떻게 실천 할 수 있는가?

 

각 전통들을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관상적인 수단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의 일부분으로 경험될 수 있는지 물어야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1) 고독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정해 놓고

실험해보라.

새벽에 산책을 나가 당신의 세상(도시든지 교외든지)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어 보라. 하루 동안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 공항이나 버스터미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 알아보라. 혼자만의 하루-아니면 3, 또는 7- 침묵 수도회를 가지라. 도심으로 가서 사회 정의 수도회를 가져 보라. 다음 비행기나 버스 여행이 당신의 개인 수도회가 되도록 해보라. 한 달 동안 차의 라디오를 끄고 출퇴근하며 작은 수도회를 가지라. 새벽 2시에 일어나 그리스도의 임재를 상기시키는 촛불을 하나 켜고 한 시간 동안 밤의 소리를 들으라. 당신을 위한 광야의 시간을 가질 많은 방법들을 생각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 얼마 동안은 평상시의 성경 읽는 시간을 접어 두고,

그 시간에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시간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지성과 영혼을 신적인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돌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외적 내적 감각들이 나침반의 바늘처럼 성령님이라는 북극성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가며 성령님이 인도하신다고 느끼는 단어나 문장에 이르렀을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다.

성경을 읽던 중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8:10)라고 말한 느헤미야의 멋있는 말씀을 찾았다고 하자. 우리는 멈추고 기다리고, 포기하고 잠잠히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성령께서 우리의 약점을 속속들이 이해하시고, 힘이 부족한 이유들을 드러내시고,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주위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 힘을 갈망하게 하신다. 우리는 성경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주님, 당신의 기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들, 예컨대 음식과 피상적인 대화들과 쓸데없는 것들 속에서 기쁨을 얻을 것을 갈망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기쁨에 완전히 젖게해주소서." 성령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 아니면 찬양을 하고 춤을 출 수 있다. 아니면 의식적인 지성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언어로 기쁨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 외에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단지 힌트만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성경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3) "신성한 여가"를 즐기고 싶은(끊임없고 영속적인)

"인간적 갈망을 꺽으라"

낮잠을 자라.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이웃을 찾아가 한 시간이라도 같이 보내라. 해가 지는 광경을 보도록 서로 도우라. 산보를 하라.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물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산보를 즐기기 위해 산보해 보라, 기도를 하루쉬어 보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노래를 들어 보라. 샤워 대신에 목욕을 하라.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낭비해 보라. 아이디어들은 무한하다.

 

토마스 머튼은 나는 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꾸밈없음과 진지함과 겸손함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그것의 통합을 끈질기게 주장했다"고 기록했다. 사랑스럽게 하나님을 주목하고 점점 자라가는 하나님과의 연합(일치. 합일)을 통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탐구하는 모험에 당신을 초대한다.

 

 

 

 

 

3. 장애물 뛰어넘기(Overcoming Obstacles)

 

1). 침묵하는 법을 배우라.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 30~60)

 

우리 습관에서 다른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침묵에 들어가는 법을 배우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하는 편이 더 쉽다. 따라서 침묵의 공간과 시간을 구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처음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새로운 노력이든 첫걸음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일단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경험하게 되면, 기꺼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무한한 공간의 하나님은 무한한 침묵의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침묵은 그분의 임재를 잉태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침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 어떤 장애물을 예측한다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정신을 산만케 하는 물리적인 것에는 전화벨 소리,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 다른 사람의 말소리 등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 최선의 해결책은 그러한 환경을 피해 보다 덜 소란스런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정신 집중을 요하는 긴급한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조용한 침실로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활동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피하기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장애물, 곧 불신앙, 죄책감, 피로, 낙담, 정신을 산만케 하는 생각들 등이다.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도 가운데 이것들을 하나님께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이것들은 잠긴 문이 아니라 다리가 될 수 있다. 비록 이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말씀드려야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

낮이나 밤 시간에 침묵을 위한 스케줄을 짜는 일이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케줄 없는 활동들은 물거품이 되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는 습관이 되면, 낮 동안에 혼자만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장소에 대해 그렇게 엄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단과 훈련이 필수적인 열쇠이다.

 

앞서 살았던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독을 하나의 훈련으로 개발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경우,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지고 혼자 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 마음이 일상생활의 다급함을 잊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우리 마음에서 그분을 가로막는 것들을 정리할 때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사막이나 동굴로 은둔할 수 없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준비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 -30분에서 1시간-을 떼어 놓아라.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바쁜 일들이 엄습하기 전인 이른 아침에 이런 시간을 갖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잠들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갖길 좋아한다.

 

묵상

침묵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자연의 아이콘이다.

 

 

2).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

(천천히 묵상하는 독서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일정 시간 기도하지만 침묵이 그들의 기도 생활에 줄 수 있는 유익을 완전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침묵에 관한 매혹적인 구절을 볼 수 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8:1). 문맥에서, 침묵은 일련의 대재앙의 전주곡이다. 이 경우에서는 침묵이 폭풍전야를 상징한다.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침묵은 중요한 사건들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침묵은 말하자면 무대를 세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로 물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기도 시간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무대를 세우고 싶어 한다.

 

준비

앞에서 말한 천천히 묵상하는 독서를 해보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복음서 가운데 몇 구절을 선택해서 저어 보라.

 

묵상

"오 하나님, 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을 알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게 하소서. 그분은 주님과 성령과 함께 영원히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3). 침묵과 묵상에 대한 관심이 비기독교적인 행위로

이어지는가?

(외형은 비슷하나 목적이 다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려 섞인 말로 이 질문을 하곤 한다. 오늘날 묵상(명상)이라는 말은 기독교보다는 뉴에이지 운동이나 동양 종교들과 관련하여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묵상이 다른 유형들과 얼마나 다른지 살펴보고 나면, 비기독교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허 자체를 조장하는 명상 학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한쪽으로 제쳐두는 것은 하나님이 첫째가 되시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비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 세밀히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단계이다. 이 단계를 성취하고 나면,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데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능적으로 동양의 신비주의를 꺼리는 것은 동양 종교들은 기독교와 정반대되기 때문이다. 동양의 비기독교 종교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다르다.

선불교도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명상을 하고, 논리적인 생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자기의식을 버림으로써만 만물의 거룩을 알고 만물과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식을 낳는다. 명상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선불교도들은 자신이 죄와 고통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 이들의 구원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음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선불교도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왜 버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몰랐으나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한 선불교 대승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에 대해 배우고 싶어 스승을 찾아온 제자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 스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스승이 차를 따랐다. 그는 제자의 잔이 넘치는데도 계속해서 차를 따랐다. 제자가 잔이 넘친다고 불평하자, 스승은 제자도 그 잔처럼 이미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제자가 빈 잔을 내밀지 않으면, 채워지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는 똑같이 하나님()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비 체험은 혼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동양인들에게 있어, 신비 체험의 목적은 거룩, 정결, 지혜의 통일된 의식을 갖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힌두 신비주의는 존재의 부정과 무위(無爲) 자체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기독교 신비주의는 보다 활동적이며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목적이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포용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까지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침묵 속에서 묵상할 때 기적적인 체험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율을 구하는 것이 침묵의 목적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신비주의까지도 환상이나 무아지경(자신 밖에 있다는 느낌) 같은 체험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일치한다.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가장 큰 목적은 아무런 기대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불교는 묵상(명상)과 깨달음을 가장 크게 강조한다. 어떤 저자는 어느 한쪽도 묘사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면서 선불교도의 명상 체험을 수영에 비유했다. 그러나 묘사는 인간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실제적인 이해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는 또한 수련을 통해, 명상 중에 얻어진 고요는 일상생활로 옮겨진다고 했다. 조용한 영혼과 자신의 본성과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것도 명상의 목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목적 모두가 훌륭하다는 데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목적이 명상의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평안과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존경받는 수련회 강사인 앤드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우리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진짜 이유는 침묵하며, 피조물의 소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이다."

 

) 덧붙이는 말

: 선불교의 명상(묵상)은 깨달음(깨달음이 곧 구원이라 함)이 목적이고, 관상은 하나님과 하나 됨(일치, 연합)이 목적이다. 수도하는 외적 모습은 비슷하나 수도하는 그 목적이 다르다.

 

준비

그리스도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라. 당신이 노력해야할 일은 영혼이 영양분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평온히 침묵시키는 것뿐이다. 하나님께 평안과 지혜를 달라고 구하라.

 

묵상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동기를 아신다. 개인 기도에 묵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한다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4). 나의 발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래 점검표로 점검하고 평가하라)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주시는 것을 잴 수 없다. 자신이 통제권을 가지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기도 생활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보자. 웨인 오츠는 자신의 책에 "침묵 실천 테스트"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실었다.

 

다음 질문들에 답하면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라.

 

1). 당신이 매일 반복되는 일과들 가운데 침묵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장소나 시간은 어디며 언제인가?

2). 당신의 삶에서 누가 가장 큰 소란과 혼란과 스트레스를 야기하는가?

당신은 이것을 바꾸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당신은 소란과 침묵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3). 당신은 보다 조용히, 보다 느긋하게 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

당신의 일과 중에 신경을 거스르는 과도한 짐들을 내려 놓으려고 애쓰는가?

4). 당신의 일터 중에서 침묵의 장소들을 열거해 보라.

5). 최근에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 는가? 있다면 어떤 경우였는가?

6). 당신이 첫말과 끝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 결코 말싸움에 서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바뀌었는가?

7). 당신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어떤 잡담을 하는가? 또 당 신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소음을 줄이 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8). 청각뿐 아니라 다른 네 감각-시각, 촉각, 미각, 후각- 까지 동원해서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9). 텔레비전, 전화, 라디오, 오디오 등에 대한 중독에서 벗 어 나는데 있어 어느 정도 발전이 있었는가?

10). 친구, 가족 등에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가?

11). 단절된 자신의 과거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연결되었는 가?

12).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깔보거나 얕보는가?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은가?

13). 피로에 지치고, 객관적인 시각을 잃으며, 형편없는 판 단을 내리고, 혼란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 즉시 자신 을 위해 침묵의 시간을 가졌는가?

14). 고독감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침묵을 구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을 형성할 권리를 행사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는가?

15). 개인적이며 혼자만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와 의 식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자발적인 행동을 취했는가?

16). 시끄럽고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 침묵을 경험하기 위 해 하던 일을 제쳐두고 한적한 곳으로 피한 적이 있는 가?

17). 자신이 덜 보기 싫은가? 자신을 더 존경하는가?

왜 그런가?

18). 가족의 침묵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는가?

19). 일터에서, 예전에는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전혀 말이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왜 그 사람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20). 최근에 분명한 이유도 없이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 지 않은 적이 있는가?

21). 자신의 이상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비판하기에 바쁜가?

22). 개인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침묵의 임재를 알고 있는 가?

 

 

침묵

테스트를 해보라. 당신의 대답들을 살펴보고 어느 부분에서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보라. 당신을 제지하는 것이 관계인가 습관인가?

 

묵상

앤드류 신부는 초연함을 고무풍선에 비유한다. 그는 모든 실이 잘려지지 않은 채 한 가닥이라도 풍선에 매여 있으면, 바람이 불 때 풍선은 터지고 만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불만과 분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야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4. 관상기도에 접근하는 전통적 방법

 

기독교 전통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이르는 두 종류의 관상의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이며, 다른 하나의 방법은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이다. 이 두 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신학자는 오리겐과 니사의 그레고리이다.

오리겐(Origen, ca. 185-255)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의 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적은 타락 이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이란 인간이 본래의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요, 관상이라는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리겐은 인간이 세 단계를 거쳐 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 중 첫 단계는 도덕적인 조명인데 그것은 죄로부터 떨어져 나와 덕을 실천하는 삶(praxis)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둘째는, 자연관상(테오리아, theoria, natural contemplation)이며 마지막은, 하나님 관상(테오로기아, theologia)이라고 부른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여기에서 오리겐이 말하는 움직임은 빛에서 더 밝은 빛으로의 움직임이며, 오리겐은 어둔 밤이나 무지를 통한 앎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 )은 개념이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개념, 상징, 이미지를 포함하여-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모든 피조물이나 인간의 모든 선한 경험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엿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기도자의 능동적 활동을 인정할 뿐 아니라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갑바도기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중 하나인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ca. 335-395)는 관상 이해의 다른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특히 그의 대표작인 모세의 생애에 잘 나타난다. 모세의 생애에서 그레고리는 오리겐이 했던 것처럼 세 가지 단계를 말하고 있으나, 그 방향은 오리겐의 것과 정반대이다. , 빛에서 어두움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의 첫째 단계로, 모세의 빛의 경험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불타는 수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다음 두 단계는 깊은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중 첫 번째는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어두운 구름(nephele)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두 번째는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 짙은 어두움(gnophos)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성으로는 인지되지 못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주신다. 도리어 이 어두움 안에서 가장 분명한 하나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에서는 긍정의 길은 제한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말해줄 뿐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내면의 실재에 이르도록 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어떠한 생각이나 사유, 단어, 상징도 인간을 하나님 실재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 이미지, 상징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 주시고 알려주심을 직접 체험하여 그 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의 개념적인 장갑을 벗어던지고 빈 손어둠 속으로 가야한다.

기독교 영성전통에서 무념적인 접근의 성향을 가진 영적 작가로는 14세기 무지의 구름의 저자, 마이스터 에카르트, 16세기의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20세기의 토마스 머튼 등이 있다. 그리고 유념적인 접근의 성향을 가진 작가로는 아빌라의 테레사, 그리고 로욜라의 이냐시오 등을 말할 수 있겠다. 테레사의 주요 작품들인천주자비의 글, 영혼의 성, 완덕의 길(the way of Per -fection)은 유념적인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테레사는 말이나 개념을 넘어서는 무념적인 영적 체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반대로 무념적인 전통에 뿌리를 둔 머튼이나 십자가의 요한이 많은 이미지나 개념, 또는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디오니시오도 그의 저서 신의 이름들(the Divine Names)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긍정하는 유념적인 접근을 사용하지만, 이 긍정의 길을 통해 언제나 하나님을 완전하게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무념적인 접근과 유념적인 접근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과 접근에서 서로의 방향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찾아감이라는 목적에 있어서는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이 두 개의 길은 우월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서로 조화를 이룰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목표를 위해서 말이다.

 

긍정적인(kataphatic) 방법은 단어, 개념, 이미지, 상징, 결단 등으로 이루어지는 기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기도하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며, 자신의 양심을 성찰하며, 더 선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세상에 나가서 기도한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긍정적인(kataphaic)"이라는 단어는 "아래로"(down)라는 의미를 가진 Kata"연설(speech)"라는 의미를 지닌 phasis라는 두 개의 헬라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적인 전통에서는 우리의 지식과 단어와 이미지와 감각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상대방을 말로 꼼짝 못하게 함(talking down)"으로써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신성에 대해 말한다.

긍정적인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긍정하는 방법이다. 이 전통에서는 기도를 하나의 관계로 간주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속한 것을 연구하여, 그 원리들과 통찰들을 우리의 기도 관계에 적용한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에, 우리는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을 확인한다. 그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보고 아는 모든 것을 능가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개념과 이미지와 상징 등을 인정하는 이 전통의 대표적 인물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St. Ignatius of Loyola)이며, 이 시대의 주도적인 옹호자는 테이야르 드 샤르뎅(Thilhardde Chardin)이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며, 하나님은 피조 세계 안에 현존하신다.

 

부정적인(apophatic) 전통은 긍정적인 전통과 균형을 이루는 또 다른 방법이다. "부정적인(apophαni)"이라는 헬라어는 어떤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 전통은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을 지닌다. 이 전통에서는 우리가 육안으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말로는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고 의식한다. 이것은 무한한 것에게 굴복하는 방법, 자신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그것을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이것은 역설, 언어의 절제, 궁극적으로는 침묵의 방법이다. 이것은 복종,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수용의 방법이다.

부정의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하는 부정의 방법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상징이나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망각에 의해서, 무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이런 방법에 의한 하나님 이해에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내가 어떤 예를 사용해도, 나의 말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묘사할 수 없고, 나의 지성과 유한한 기능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쉬는 것,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뿐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지에 대해서 더 잘 안다. 우리의 정신은 개념이나 이미지나 상징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두워진다. 이 전통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의 저자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역시 이 전통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물론 긍정적 전통이나 부정적 전통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두 전통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하면서도 인간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긍정하기 위해서 성경에 계시된 단어나 성례전이나 상징을 의지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두 전통은 기도에 대해 총제적으로 묘사한다.

긍정의 방법은 우리가 기도 생활을 제한하는 이미지들을 방출할 수 있게 해준다. 부정의 전통은 우리가 이미지들을 포기해야한다는 것, 그것을 초월하는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준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방법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의지하며,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가 필요하며,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긍정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이다. 부정의 방법과 관련하여, 영적 고전인 무지의 구름"집중기도"에 초점을 두려 한다.

 

 

 

5. 관상의 두 길

 

영성사에서 말하는 관상의 길은 전통적으로 주부적 관상과 습득적 관상 두 종류로 크게 나누고 있다.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혹은 수동적 관상은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다. 특징은 일체의 영성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의 경험을 주장하는 전통이다. 관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 영성의 흐름은 안토니오,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요한, 토머스 머턴에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이미지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만큼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에게만 속한 무한한 속성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우리에게 있다. 이 비유사성을 제거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피조물이나 인간의 개념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나 속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것이다.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달려갈 때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깊은 심연은 결코 감각으로도 지적인 인식작용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전한 영의 세계요, 절대적인 세계이다. 이 순수한 속에서 개념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혹은 능동적 관상으로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이다. 특징은 모든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전통으로 이야시오식 관상이 여기에 해당된다.

유념의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 상상력을 사용하여 관상경험에 이르는 기도를 '이냐시오식 영신수련'을 들 수 있다. 로욜라 이냐시오는 회심과정이나 그 이후의 영성수련과정을 볼 때 그의 영성적 경험에 있어서 그의 풍부한 상상력이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냐시오식 관상기도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1)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공적사상에 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2) 상상력은 정화되지 못한 우리의 비이성적인 내면세계에 대한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상상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 반대하거나 경계만 할 일은 아니다. 상상력의 극치 그 자체가 관상체험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관상으로 들어가는 좋은 길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초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만남을 주도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우리의 모든 활동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부름을 받는다. ,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와 교제하시도록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주를 사랑하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만물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나님 임재의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만물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새로운 눈과 귀로 세상을 본다.

 

당신은 "기도가 당신으로 하여금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깊이 의식하게 만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실체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스며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잠재적인 기도의 수도장이다.

습득적 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쉽다. 그것을 행하여 이러한 효과를 거두었고, 앞으로 그것을 행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된다. 주부적 관상과 관련하여, 기도자가 실제로 아는 것은 그곳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어느 수준의 친밀함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알지 못한다. 시나 이미지나 알레고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느 수준의 의사소통이 발생한다. 우리는 편안하게 경험의 영 안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이 사랑의 연합에서부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의 지식이 흘러나온다. 이 사랑의 지식의 주부적 특성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임을 가리켜 준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자신이 이러한 하나 됨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선물이다.

 

 

 

6. 관상에 이르는 길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인간 조건의 두드러진 착각이다. 영적 여정은 이것을 치유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기도가 메마른 것을 하나님께서 부재하셨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침묵은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이다. 그 외의 것은 어설픈 번역인 것이다. 그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내적 고요에로 이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이 아니고 직관적 기능에 넣어 주시는 순수한 믿음의 결과에서 온다. 처음에 우리는 건조함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순수한 믿음의 훈련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겸손이라고 하는 두 가지 열매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자신의 글에서 기도의 단계를 7궁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영성신학자 조던 오먼은 데레사의 7궁방을 9단계로 세분화하여 기술하고 있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4단계를 말하나 마지막 단계는 천국에서 이루어질 일로 이 땅에서의 3단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기도의 3단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관상에 이르는 데는 세 단계의 삶(정화, 조명, 일치)이 있다.

아주 오래된 기독교 전승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을 탐구하며 성숙해 가는데 세 단계 또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정화의 길, 조명의 길, 합일의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 단계는 두 번째 단계에 포함되고 첫째, 둘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에 포함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실상 삶의 대부분을 이 세길 사이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위에 말한 길 중에 둘이나 심지어는 세 가지 길을 동시에 밟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에 있는 단계는 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1). 정화의 길이다. (능동적. 자신을 비우기)

우리는 하나님께 끌리면서도 세속의 유혹과 죄의 습성, 윤리적 약점 또는 단순한 무지로 말미암아 사랑을 찾는 길에서 어떤 때는 뜨거워지고 어떤 때는 차가워집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엇 무엇을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로 드러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작입니다. 걸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기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요. 이 길을 정화의 단계(사랑하기)라 합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고 했다. 우리가 자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존재의 정화를 의미한다. 회심 자체가 매우 급작스럽게 혹은 매우 감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화의 작업은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기를 힘써야 한다. 정화의 단계는 외적 감각의 정화, 내적 감각의 정화, 정욕의 정화, 지성의 정화, 의지의 정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유혹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영성생활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내면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알려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조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2). 조명의 길이다. (수동적, 사랑하도록 맡기기)

조명의 길에서 사실상 관상기도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열심히 찾게 됩니다. 종교는 문화 이상이며 진정한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도중에 잠시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정화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필요하면 언제라도 자진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달릴 수 있으려면 먼저 걷기부터 해야 합니다. 이 길이 조명의 단계 (사랑하도록 맡기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총의 능력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죄악의 길로 다시 빠질 수도 없고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맑고 밝은 내적인 평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정반대로 내적인 소동을 경험한다. 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범죄의 가능성과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적인 비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지하며, 여전히 그 길을 걷는데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기 포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정화단계에서의 정화가 능동적인 것이라면, 조명단계에서의 정화는 수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3). 일치(합일, 하나 되는)의 길이다. (사랑 나누기)

조명의 단계를 지나며 자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거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바로 완성의 단계인 일치의 단계(사랑 나누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마치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나는 구름처럼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상상과 기억이 점차로 사라지면서 깊은 평정의 감각을 갖게 된다. 모든 기능이 잠잠해지고 하나님 안으로 빠져들어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일치의 기도'이다. 이것은 성인들의 길이지만 우리 모두 부름 받은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길에 한 발을 (아니면 두 발을 모두) 들여놓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어쩌면 그대는 이처럼 높은 단계에 그대 자신을 올려놓기가 두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마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하거나 이 세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특별한 벗들만을 위한 자리라고 말하겠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세 번째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특별한 벗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대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벗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그저 솔직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거룩함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그대가 획득해야 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미 그대를 위해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 팔을 벌려 주님을 향해 달리십시오. 세 번째 길에 걸맞는 특별한 종류의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 이 작은 책은 그대를 이 같은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합일로 차분히 인도하여 그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6장 기도의 시작.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