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기도의 진행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충분히 준비 되었다고 자만하지 마시고, 또 지루하다고 포기하지도 마시고 천천히 수도(수련)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래를 잘 읽고 숙지한 다음 묵상으로 갈 것인지 관상으로 갈 것인지 수도자가 겸손하게 판단하여 진도를 택하기 바랍니다.

1. 기도의 시작

1). 간단한 기도로 시작하라.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껴안은 채 이 짤막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간단한 기도를 드리라. 이런 기도면 된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더욱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이 한 시간의 기도시간을 은총으로 내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빠, 아버지를, 주님, 주여, 여호와여, 또는 그대가 선택한 어떤 낱말을)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였습니다(경험상 일정한 단어를 사용하면 좋으며, 이 부분은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한다). 분심이 생길 때 이 거룩한 단어(주여…)로 이 시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제 성령님께 힘을 얻고, 예수님과 하나 되는(일치 혹은 연합하는) 가운데, 이 기도로 아버지께 저의 사랑을 드리려 합니다.”


 예 1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더욱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이 한 시간의 기도시간을 은총으로 내려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분심이 생길 때 주여 함으로 이 시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제 성령님께 힘을 얻고, 예수님과 하나 되는 가운데, 이 기도로 아버지께 저의 사랑을 드리겠습니다.”


 예 2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더욱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이 한 시간의 기도시간을 은총으로 내려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분심이 생길 때 주여! 함으로 이 시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제 성령님의 도와주심과, 예수님의 하나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사랑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2). 다음에는 차분히 평화롭게 애정을 가지고 마음의 귀를 기울이라.
   소리를 내어 기도하거나 혀나 입술을 움직이지 말고 다만 이 기도로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으라. 이렇게 한 시간을 계속하되, 그리하도록 부르심 받는다고 느낄 경우에는 더 오래 해도 된다.

3). 분심이 생기고, 분심에 빠졌음을 깨닫거든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가라.
   분심이(상상이나 기억이나 사고) 생기고 거기에 말려들었음을 깨닫거든 간단히 ‘거룩한 단어(아빠, 아버지, 주님, 주여, 아멘, 또는 그대가 선택한 어떤 낱말)’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가라. (이 경우 필자는 거룩한 단어와 함께 고개를 살짝 움직여 처음상태로 돌아간다. 단 짧고 신속하게 작은 동작으로 행한다). 한 시간 동안 묵상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해도 좋다. 그러나 한 번에 너무 많이 반복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해도 해도 안 되면 기도를 중단하지 말고 자세를 처음상태로 바로 잡아라. 그리고 기도를 계속하라.
   이 경우 사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꼭 한가지 방법만 주장할 이유는 없다. 본인이 편하고 좋은 방법이 있으면 사용해도 좋다.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분심을 떼어 버리고 처음상태와 같이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다.

   만일 기도하는 동안 졸음이 오면 졸음도 축복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다음,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돌아간다. 졸았다 해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하나님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신다.

(4) 가끔 거룩한 단어를 ‘초월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지금까지 드리든 거룩한 단어가 중단되고, 그대의 의지가 어둔 방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고요한 쉼 속에서 말씀이나 상징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더 없이 멋진 일이다. 혹시 그대가 이런 상태를 맛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거든 간단히 ‘나는 내 기도로 돌아가리라.’고 말하고 그렇게 하라.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시간은 아주 화살같이 지나간다.


2. 극기(포기, 금욕) 밀양가르멜 여자수도원, 하느님과의 일치 (성바오로, 2014) pp.85-114.


"내 사랑을 찾으러,
산과 강가로 가리라;
꽃을 꺽지 않고,
‥‥"           (「영가」 3)

   이 「영가」에서, 영혼이 모든 힘과 정력을 기울여 곧장 앞으로 달려가 다다르기로 굳게 결심하는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그 결단이 너무도 확고해서 '꽃들도 꺽지 않겠다.'고 외친다. 그렇다. 나는 피조물에서 만족을 찾는 데 사로잡히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목소리에서 무언가 절대적이고 영웅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혼은 사랑 때문에 이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사랑이란 '죽음처럼 강한 것'이다. 이 길이 온갖 장애와 고뇌로 가득한, 위로라고는 없는 길임을 알고 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열정이 재촉하고 희망이 격려해 주고 있어, 그는 맨 끝까지,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저 정상까지 가기를 원한다.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가기 위해, 돌아서 가는 길로 가지 않고 곧장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올라가는 길로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꽃들도 겪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완전한 포기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1). 전부 말끔히 벗어 버려라

   이제부터는 가르멜의 산길을 인용하면서, 영혼을 놀라게 할까 봐 겁내지 않고 그대로 옮기겠다. 이 책에서 십자가의 요한은 전부 말끔히 벗어 버려야 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논제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말끔히 벗어 버림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다만 일치의 관점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의 본성에서부터 말끔히 벗어 버림의 필요성을 밝혀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필요성을 증명하면서 우선 처음에, 그가 영혼을 인도하고자 하는 이 일치의 경지에 대한 정확한 관념부터 알려 주고 있다. 영혼이 열망하는 영적 완벽함이나 성화(聖化)에 대해 성인이 품고 있던 높은 관념이, 즉 완덕이나 성화란 영혼이 이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일치에 이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그 관념이 성인의 모든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치의 상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일치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모습을 바라보며 묵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경지에서 영혼이 누리게 될 모든 풍요로움을, 이에 따라오는 감미로운 체험을, 하나님의 빛과 사랑에 잠기는 가장 지고한 은총을 생각해 보며 묵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야, 즉 관상 생활의 여러 단계를 감행한 후에야 이 경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인이 실천한 방법에 따라서 그 일치 상태의 중추를 이루는 여러 가지 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일치 상태의 근본적인 요소와 거기서 솟아나는 모든 복합적인 영성적 풍요로움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의 말을 빌려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가장적절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거룩한 일치의 단계)란 영혼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영혼 안에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 아무것도(하나도) 없어야 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하여 영혼의 움직임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가르멜의 산길」 1.11,2)
   일치 상태, 다시 말해서 거룩함의 본질적인 요소를 두루 다 포함하고 있는 십자가의 요한의 이 훌륭한 정의는 주의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상, 이 정의 안에서, 십자가의 요한의 모든 가르침의 골자를 파악하게 된다.
   우선 먼저 유의해야할 것은, 신비 박사인 십자가의 요한에 의하면 일치 상태의 본질은 의지 안에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일치를 즐겨 '변모의 일치'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곧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이 변모가 '의지로써' 이루어지게 됨을 명백히 단언하고 있다. 이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 허사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에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혼의 변화를 의지의 선에서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선에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성인의 생각과 한참 동떨어진 철학적 관념론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십자가의 요한에 대해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변화는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변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사실에서 , 즉 첫째는 부정적인 사실, 둘째는 긍정적인사실에서 이루어진다.
   부정적인 사실이란 그 영혼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온갖 경향, 즉 그 경향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모든 경향의 부재(不在)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없어지게 될 때 이에 대응하는 다른 경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곧 부정적인 요소가 긍정적인 요소로 대치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경향이 전혀 없으며, 그 대신 영혼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치의 단계를 영혼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었다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맞춰진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곧 영혼의 뜻이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영혼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어떤 결함 습관적인 결함들을 열거하면, 보편적인 습관처럼 말을 많이 하는 버릇,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집착으로서 사람이나 옷, 책과 방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쓸데없는 잡담, 무엇을 맛보거나 듣거나 이와 유사한 것들로부터 만족감을 조금이나마 느끼려는 것에 대한 집착을 꼽을 수 있다.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나쁜 습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영혼이 무엇에 집착하는 것이 그리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습관에서 오는 것이라면 결함이 ㅈ「아무리 작은 것이라할지라도 영혼이 완덕에 나아갈 수 없다. 이는 마치 한 마리의 새가 가는 줄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 아무리 가는 줄이라도 묶여 있다면 날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무리 가는 줄이라도 끊지 않으면 날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영혼이 제아무리 덕을 쌓았다할지라도 어떤 것에 집ㅊ착하고 있다면 거룩한 일치에 이르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라도 원했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1.11,3)
   달리 정리하면; "이 상태에서 두 의지가 하나의 의지가 된다. 그 의지는 곧 하나님의 의지이고, 이 하나님의 의지는 곧 영혼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결정적 요인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가 영혼의 의지로 되는 것, 말하자면 영혼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안으로 사라져 마침내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로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는가? 인간적인 것이 참으로 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라면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점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이 감화를 받았던 사랑의 심리학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잠간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천사 같은 박사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서들에서 사랑의 심리적 과정에 대해 자주 말하면서 강조하기를,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애정 안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지 안에서 그 사랑의 대상에게 기울어지는 경향이 생긴다고 했다. 이런 경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만큼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아 그 사랑의 대상에게 우리를 끌고 가게 된다. 이런 경향이 온 마음에 밀어닥칠 때, 마음은 더 이상 어떤 다른 것에게도 애정을 느낄 수 없게 되며, 그 유일한 사랑의 대상에 의해 온전히 이끌려 가도록 자신을 맡겨버린다.
   이 경향으로, 그 사랑의 대상이 마음 안에 어떤 형태로 늘 현존하면서 마음을 지배하고 행동하도록 충동하기 때문에, 마음은 사랑하는 대상의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말할 때, '그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물론 그 사람이 육신으로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는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할 수 없겠는가? 우리가 극진히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자녀가 '마음 안에 있는' 어머니는 자기를 온전히 잊고 그 얼마나 너그럽고 헌신적으로 되는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쉬지 않고 돌보며 그 아이가 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 기쁘고 만족스럽게 해 주기 위해 온갖 희생을 견디어 낸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다. 사랑할 때는, 그 사랑의 대상이 정신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어 그 사람에게 마음을 쓰게 하며 우리를 움직이고, 그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를 위해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대상이 하나님의 뜻인 경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작은 피조물인 우리가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그분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며 따를 것을 전적으로 요구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이해하고, 온 마음을 바쳐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뜻 또한 이 피조물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며, 그 마음 안에서, 언제나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경향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 안에는 이러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 영혼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이 경향 하나뿐이 아니다. 종종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사랑하면서도, 영혼은 다른 것들을 무척 사랑하며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너무 자주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몹시 거역하는 것이어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죄를 범하게 된다.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즉,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태만하게 지내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마음을 다해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불완전이라는 과오를 범하고 만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 사랑의 유일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그분의 뜻인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자애심으로, 즉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으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사랑한 모든 것 역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해 버린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경향을 생기게 하여, 우리를 행동하게 충동하고 그 사랑의 대상에게로 끌고 간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이처럼 여러 다른 경향과 충동이 여전히 존재하는 의지는 분명 하나님의 의지에 온전히 '점령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피조물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둘로 나뉘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피조물을 사랑 할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 안에서 자기만족을 찾으며 피조물 자체에 빠져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자애심이 자리 잡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충동과 함께 자애심에서, 자기 의지에서 나오는 충동이 있게 된다. 영혼은 이번에는 이 충동에 의해서, 다음에는 저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며, 마침내 마음속에 두 개의 의지가 자리 잡게 된다.
   만일 영혼이 피조물인 그들 자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없게 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피조물을 사랑하고 싶어 하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통제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야말로 그 영혼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피조물을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 뜻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그때 영혼은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그 영혼의 유일한 동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혼 안에서 그 자신의 의지는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지배하게 된다. 자기만족에 이끌리는 충동은 영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양보하기 위해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런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아버지의 뜻에 관해 하신 말씀을 되풀이할 수 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즉, "나는 어떤 다른 것도 참지 않으며, 다른 데로 마음이 기우는 일도 없다. 내 안에는 다른 충동이란 없고 하나님의 뜻만이 지배하고 있으며,  나의 의지는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의지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변화된 영혼이란 이런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생기게 된다. 이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밖에서'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영혼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경향을 찾아볼 수 없게된다. 그때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을 위해서, 그 영혼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두 조건을 충족시킨 영혼을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 안에서 모습이 변한 영혼, 즉 변모의 일치에 이른 영혼이라 부른다. 아주적절하게, 성인은 이것이 사랑의 일치라고 특징지었는데, 그것은 성인이 말하는 변모란,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 사랑의 지시에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 의지가 변화된 영혼이란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영혼을 말한다. 당연히 그런 영혼 안에는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없게 된다. 바로 이련 이유에서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의 기본적 명제가, 즉 영혼은 전부 말끔히 벗어 버림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 가르침이 정당화된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는 데 절대적 장애가 되는 것은 온갖 '애착, 또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듯 충분히 통제되지 못한 '욕구'이다.
   되풀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적극적으로 명하신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라고, 즉 그분께서 규정하신 한도 안에서 그분의 지고한 뜻에 따라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피조물이란 늘 정도에 맞게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피조물이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에게 '무한히', 한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선 우리의 사랑이란 창조된 사랑이니만큼 필연적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게다가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의 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우리의 사랑이 그분의 배려 안에서 합당한 사랑이 되게 하려면 바로 이 의존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한도보다 더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보다 피조물에게 더 마음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받는 분이어야 하며, 우리의 다른 모든 사랑은 그분에 의해서 조절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애정을 조절해야 하는 이 의무를 완전히 무시하고, 매력을 느끼는 순간 즉시 피조물에게 애정을 쏟아 버린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만족을 찾고 있다. 우리의 본성에 만족을 찾으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도적으로까지 우리에게 그런 만족을 줄 피조물을 찾게 된다. 이렇듯 '애착'이, 즉 무질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억제되지 못한 '욕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모든 집착이 똑같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런 무질서가 늘 같은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우정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에 애정을 쏟게 되면, 그 사람은 대죄를 범하게 된다. 그런 애정이 금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다지 중대한 것이 아닌 경우라면 소죄가 될 것이다. 또 그 영혼이 완전히 자기 자신의 편의대로만 처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힘껏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불완전이라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런 경우를 보면 번번이, 언제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고 피조물에 '애착하면서', 오직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것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 안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다른 움직임이 존재하며,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 안에서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단 하나의 의지가 영혼을 지시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옆에 나란히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변화를 방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십자가의 요한은 말한다. "한 마리 새가 가늘거나 굵은 줄에 묶여 있다고 하자. 아무리 가는 줄이라 할지라도 단단히 묶여있다면 마치 굵은 줄에 묶여 있는 것처럼 날아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가는 줄을 끊기가 더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고 할지라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날아갈 수 없을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1.11,4 )
   영혼도 이와 같다. 마지막 애착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조금만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어도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로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충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곁에 나란히 남아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의지가함께 있는 한, 분명 하나의 의지만 남아 있게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변모의 일치에 도달하려면, 그 영혼은 반드시 전부 말끔히 벗어 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영혼이 변화되고 싶은 열망에서 바라게 되는 그러한 말끔히 벗어버림이 얼마나 탁월하고도 근본적으로 사랑의 과업인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려고,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을 정의하면서 '전부 말끔히 벗어 던져버리는 일'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벗어 버리고 던져 버리는 일"(「가르멜의 산길」 2.5,7)이라고 성인은 말하고 있다.
   완전한 이탈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왕국을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참된 실제적 수단이다. 성인이 내린 정의는 이 사랑의 왕국의 기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이제 누구나 쉽게 추측하는 이 완전한 이탈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2). 이탈의 규칙

   십자가의 요한이 쓴 책의 일부는 그의 저서들이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다행히도 그의 많은 제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읽히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요한의 영성 지도 방법을 다룬 가장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내용이었다. 거기서 성인이 그 가치와 풍요로움을 높이 찬미한 하나님과의 일치 상태에 영혼이 도달하고자 원할 때, 반드시 실천해야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러한 황금률을 가르멜의 산길에 삽입하기 전에, 강론할 기회에 이미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다녔다. 성인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영적 딸인 베아스 가르멜 수도원의 성령의 막달레나 수녀가 받아 적은 수첩에서도 가르멜의 산길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책이 출판되기 이전부터 널리 읽히고 있었고, 책에서 일부를 때내어 복사도 한 것 같다.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가 스페인어로 처음 출판되던 바로 그해에, 프랑스의 퐁투아즈에서 세상을 떠난 강생의 복녀 마리아가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것을 가지고 있었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프랑스어판은 그로부터 두 해를 더 지나서야 출판되었다. 확실히 이 원고들은 원본 그대로였던 만큼, 크게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마 거기서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읽었을 것이다.

항상 마음을 담아 실천해야 한다.

더 쉬운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을;
더 맛있는 것보다 더 맛이 없는 것을;
더 즐거운 것보다 오히려 덜 즐거운 것을;
쉬는 것이 아니라 고된 것을;
위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가 없는 것을;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크고 값진 것이 아니라 작고 값이 없는 것을;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을;
세속적인 것들 가운데 더 좋은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떠 나쁜 것을 찾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버림과 비움, 그리고 가난함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야 한다.
                           (「가르멜의 산길」 1.13,6)

   이것을 듣고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려는 그 파괴적민 작업 타령이군요. 그런 것은 사람이 싫어서 도피하는 이들이나 영웅적 은수자들이라면 몰라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렇 다고 생각하는가?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다시 본문의 제자리에 넣어 앞뒤 관계를 이어 본다면, 아마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우리를 매우 높이 이끌어 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화의 은총을 다시 입게 된 영혼의 열망을 가장 완전하게 채워 주는 경지까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일치 상태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고자 한다. 이어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십자가의 요한은 이 일이 매우 힘든 작업 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혼이 영성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자신이 그런 일치 상태와 아주 멀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흔히 그 시기에는 자기 안에 무질서하고 잡다한 집착이나 욕망이 가득하다. 감각적으로는 오관의 욕구를 채우는 데 너무도 익숙해 있어서 물질적 쾌락을 누리는 데로 기울어진다. 정신 속에는 종종 자애심과 자신의 우수성에 대한 만족감이 팽배해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온 세상의 중심으로 삼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자기 지시를 받아야하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런 요구들 때문에, 그는 성급하고 불만스러워하며 근본적으로 겸손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그러므로 악하고 불안전한 마음의 움직임과 경향에서 감각과 정신을 정화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때로는 영혼 안에 아주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므로, 그 뿌리를 뽑아내려면 크나큰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정신적 결함 속에서 헤매며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여러 해 동안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호한 노력 없이는, 바라는 목표까지 도달할 수 없음을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 해서 낙담해서는 안 된다. 우리 혼자의 힘만으로 이런 일을 시작하고 그것을 훌륭히 완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 드높은 목표를 고려하면서, 그것은 인간의 창의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일이며, 반드시 하나님 친히 손을 써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단언한다. 성인은 이 일이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며, 물론 인간이 스스로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역사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영혼은 용감히 이 일을 시작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시어 자기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그를 친히 이끌어 주실 것이다. 자기 혼자서 이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도와주러 오실 것이므로, 그 목적을 꼭 이룰 수 있다는 큰 희망이 있음을 아는 것은 틀림없이 위로가 된다.
   영혼은 하나님의 호의와 은총을 통한 극진한 도움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일을 시작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임을 이내 깨닫는다. 영혼은 이제 자기가 담당해야 할 일을 열정적으로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주는 완전한 정화의 밤으로 능동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쁘게 노력할 것이다. 특히 피조물에게 빠지게 하는 오관에서부터 정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성 요한은 이 밤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특징적인 수련을 설명하는데, 이것을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맞추면서 매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일상적인 욕구를 지녀야 한다. 그분을 본받을 수 있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분이 하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삶을 깊이 연구해야한다." 십자가의 요한이 관상기도에 나아가기 위해서 우선 성경 읽기나 묵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제하고 다음 단계를 다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가르멜의 산길」 1.13,3)
   영혼이 모든 인간적인 장애를 포기하는 작업을 힘차게 시작하게 해주기 위해서 , 십자가의 요한은 먼저 영혼이 사랑하고 사랑받는구세주인 예수그리스도와 다정한 벗으로 지내며 사귀도록 이끌어 준다. 우리의 본성 이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을 꾸준히 물리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불건전하고 어쩌면 어리석기까지 한 욕망의 충동을 매우 강렬하게 느끼게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자애심을, 즉 십자가의 요한이 자애심의 충동이라고 하는 그 '욕구'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영혼은 다른 사랑에 대한 '초조함'을 지녀야 한다. 즉,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님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어져야 한다. 따라서 영혼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또한 그분께서 살아가시면서 어떤 식으로 처신하셨는지 알기 위해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할 것이다. 그분의 행동 양식이 우리 삶의 규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성부의 뜻 안에서 펀 생애를 사셨으며, 모든 것을 그분 마음에 들게 행하시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요약할 수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혼은 이와 같이 하려고 결심한다. 분명 이러한 수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영혼이 그분의 뒤를 따르려고 일단 결심하고 나면,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의 요한은 그들에게 포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둘째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들어 보기로하자.
   "둘째, 감각들이 가져다주는 어떤 기쁨일지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비운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가르델의 산길」 1.13,4) 이런 생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내양식(요 4:34)이라는 말씀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기쁨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세속적 활동들은 이를 통해 쾌락과 만족감을 맘껏 누려 보라고 제안하면서 우러를 유혹하고 매력을 느끼게 만든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행위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하건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위를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만 행하고 있는 것인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사도 바울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쳤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먹고 마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으며, 너무도 많은 경우에 오로지 먹는 즐거움에만 빠져 있지 않은가. 이런 행동은 영원히 의미가 없으며, 노예근성과 애착이 생기게 할뿐이다.
   이 모두를 좀 더 잘 이해시키려고, 십자가의 요한은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것을 들음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지도 말아야 하고 들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하고 처다보지도 말아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13,4)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을 때, 언제나 그것을 삼가라는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많은 즐거움을 삼가라니, 실제로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면 첫째로 괴상한 사랑 취급을 받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만일 어느 가정의 한 어머니가 가정생활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죄가 되지 않는 당연한 작은 즐거움까지도 그런 것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에서 모조리 단념해야 한다면, 남편과 자녀들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하는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들을 잃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요한은 그런 반박을 미리 짐작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감각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도 더도 덜도 말고 거절할 수 있다면 기꺼이 거절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만족감을 피할 수 없다면 단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가르멜의 산길」 1.13,4)
   바꾸어 말하면, 그런 것을 즐기기를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고 지향을 바로잡으면서 지나쳐 버리기를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것에서 자애심을 끊고 모든 것에 매이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행동의 지향을 놓치지 않고 늘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할 때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누가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둘째 규칙도 첫째 규칙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힘(에너지)이 필요하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셋째 규칙으로 힘을 발휘해서 실천해야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주님을 섬기고, 오로지 그분의 마음에 들고자 애쓰며, 그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바치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낙을 만끽하려는 우리의 무절제한 경향이다. 이러한 쾌락에 대한 갈망은 그것을 즉시 채워 주는 피조물에게 달려가도록 우리를 떠다밀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래의 경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도록 우리의 영혼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결코 그러한 경향을 이겨 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의 다음금언의 뜻을 더 잘 알아듣게 된다.

더 쉬운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을;
더 맛있는 것보다 더 맛이 없는 것을;
더 즐거운 것보다 오히려 덜 즐거운 것을;
쉬는 것이 아니라 고된 것을;
위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가 없는 것을;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크고 값진 것이 아니라 작고 값이 없는 것을;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항상 마음을 써야 한다.
                        (「가르델의 산길」 1.13,6)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어려운 것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원의를 기르고, 그런 경향을 우리 안에 생기게 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렇다. 말끔히 벗어 버림에 대한 사랑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인 것들 가운데 더 좋은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떠 나쁜 것을 찾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버림과 비움, 그리고 가난함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13,6)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한 애착에서 초연해져야 한다. 이 지상의 것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한다. 그것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수도 있는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것들을 빼앗길 때 그런 것들 없이 살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생기도록 허락하시든가 원하셔도 결코 낙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충격은 전쟁 중에는 거의 날마다 겪었던 일이다! 그러나 고결한 영혼에게는 그것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해 주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열정을 갖고 시작하도록 권유한다. "실천하려면 우선 마음을 담아야 하고, 의지 안에서 일어나는 반발심을 잘 극복해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13,7)
   옳은 말이다. 이런 집착에 대해 강경한 조처를 취하지 많으면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이 비인간적이지는 않다. 그는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이며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서에 따라 신중히' 나아가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런 신중함 때문에 힘이 빠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셋째 규칙은 힘을 지니도록 도와준다. 그 힘은 안일한 생활과 여러 가지 즐거움에 사로잡힌 노예적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필요한 작업을 하도록 격려해 줄 것이다.
   아직도 십자가의 요한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가?
   십자가의 요한은 천재이다. 그는 예술가 기질이 있으며,  예술가는 자신의 직관을 감각적 형식으로 표현한다.
   베아스 수도원의 수녀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이 어느 날 그림 한 장을 가지고 갔는데, 그것은 가르멜 영성의 역사에서 유명해진 '완덕의 산', 즉 영성 생활을 풀이한 그림이었다.
   그것은 상징적인 산으로, 영혼의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절정 부분은 도표에 둥근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예로부터 원형은 언제나 완전성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 산에 오르는 길은 원을 중심으로 세 갈림길로 표시되어 있다. 바깥쪽의 넓은 두 길은 도중에 막혀 버렸고, 가장 좁은 한 가닥 길은 원의 중심을 향해 곧장 뚫려 있다. 그 길 위에는 '무(無), 무, 무'라고 여러 번 쓰여 있는데, 이 길이 바로 완전한 극기의 길이다. 이 길은 우리를 원형의 중심으로 곧장 인도한다. 그 종착점에는 '이 산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만이 머무른다.'는 뜻깊은 문장이 적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만을 위해서 사는 영혼은 변모된 영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영혼이며, 따라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자하는 영혼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무(無)'의 길을 걷기를 열망해야한다.
   '무(無)'의 길에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사실, 한복판에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른 영혼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영적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쓰여 있고, 그 주변에는, 변모된 영혼에게 따라오는 여러 덕행과 성령의 은사와 그 결실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머리에 쓰는 관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표시는 변화된 영혼이 관상을 깊이 즐기고 있으며, 이미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면서 이 세상에서도 그분과 즐겁게 지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일치에 도달한 영혼에게는 천국 보상의 전조로 지상에서 갚음을 받게 되어 있다. 변모의 일치는 영혼 안에 관상의 은사가 자연스럽게 자라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십자가의 요한이 그린 그림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암시되어 있다. 성 요한은 베아스 수도원의 수녀들에게 손수그림을 그려 주었고, 수녀들은 각자 그 그림을 성무일도서 안에 소중히 간직했다. 그 방법은 이상을 늘 목전에 두고 성무일도를 바치며 거룩한 시편의 날개를 타고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드높이 오를 때에도, 그 이상을 실현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상적 영혼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큰 공헌을 한 셈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베아스 가르멜 수녀원 수녀들처럼 이 그림을 기도서 갈피에 끼워 두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바라는 우리의 이상을 키워 갈수 있겠다.
   그 그림은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십자가의 요한의 교훈을 거듭 일깨워 줄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완전한 포기의 길을 가야 한다." 피조물에 대해 "무"가 되어야 하나님의 "온전함(穩全)"에 다다를 수 있다. "Nada,無-Todo,全; 무(無)는 전(全), 곧 온전함이다." 자세한 것은 머리말의 "일치의 길"로 돌아가 보라.


                 십자가의 요한의 「완덕의 산」


3. 관상 생활


   '관상 생활'을 '관상'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관상'이란 참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만이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시고 거기에 알맞게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즐겨 거듭 말했듯이, 그분께서는 그 선물을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주신다. 그러나 관상 생활의 경우는 그와 같지 않다.
   '관상 생활'이란 직접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활동과 관상으로 구분하는 옛 방식은 두 가지 층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두 대상을 통해 우리 자신 안에서 애덕을 닦아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란 근본적으로 애덕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두 대상을 가진 이 애덕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이웃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사랑을 직접 탐구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꾸준히 닦아갈 수 있다.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활동생활을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탐구하는 것은 관상생활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듯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탐구하는 이러한 삶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관상 생활에 자신을 바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탐구가 결실을 맺게 하려면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야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가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주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주로 두 가지다. 모든 전통은 그 두 가지를 '기도'와 '금욕'이라고 알려 준다.
   금욕은 극기, 포기, 희생이라고도 하는데, 영혼이 피조물에게서 초연해지도록 도와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충동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장애로부터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켜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에 넘치는 대화로 이루어지며, 극기로 준비된 그 마음속에 하나님 사랑의 불을 지펴 준다. 우리가 피조물에서 마음을 떼는 것은 다만 마음을 공허하게 비워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관상 생활이란 '기도와 금욕의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도록 이끌어 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라고 더욱 명확하게 묘사할 수 있겠다.
   관상적 생활이 이것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나서, 여러분은 놀라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관상적'이란 낱말 자체가 이 삶이 관상과 연관이 있음을 뚜렷이 시사하고 있는데, 만일 그것이 전부라면 그런 삶이 관상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관상이란 관상적인 삶과는 도대체 아무 연관이 없다는 말인가?"
   거듭 말하지만 '관상'과 '관상 생활'을 혼동하지 않아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적인 삶은 관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관상적인 삶은 영혼이 관상을 동경하게 서서히 준비시키고, 관상에 들어가고 싶게 하고, 관상을 향해 나아가게 해 준다. 그뿐 아니라 관상 생활을 열심히 꾸준하게 계속하다보면, 보통 관상에 이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관상 생활은 관상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며, 관상은 관상생활의 목표이자 목적이다.
   그렇다면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은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방법으로, 관상 생활이 열망하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게 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어떤 '특별한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여러 다른 방법으로도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매우 다른 두 가지 방법 이 있다. 첫째 방법은 '지적'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을 사용함으로써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은 '경험적' 방법으로, 근본적으로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보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지적 또는 개념적 인식으로 아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만들어 낼 관념을 사용해 깨닫는 것이다. 이 방법 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원칙적인 방법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는 관상적 인식을 검토하기 위해서도 언제나 다시 이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런 깨달음은 개념적인 것도 아니며 관념을 사용해서 생기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운 교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주님이시며 무(無)에서 우리를 지어 내셨고 우리는 그분께 온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시며 곧 하나의 신성 안에 세 위격이 계시다는 것, 그중 한 위격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는 언젠가는 영원한 지복 안에서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모든 진리를 지적으로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실재에 관해 우리에게 주어진 관념과 우리 자신이 형성한 관념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개념을 다듬어 가고, 이 개념들이 더욱 분명하고 명확해질수록 그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이처럼 더욱 깊이 깨닫게 된 진리들은 하나님을 더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반려로 맞기를 원하시며, 당신과의 일치를 가로막는 죄에서 우리를 구해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즉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당신의 거룩하신 아드님의 더없이 비통한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더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지적 묵상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지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묵상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종교의 신비들을 더욱 깊이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며, 이처럼 더 깊이 알아듣게 된 신비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더더욱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 기도는 영성 생활에서 매우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해 주는 기도이다.
   그러나 지적 인식이 매우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한 체험의 성격을 띈 깨달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경우에, 관념들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러한 인식은 우리에게 늘 분명치 않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심오하고도 강렬한 사랑은 직접적으로 그분에 관해 새로운 관념을 갖게 해 주지는 않지만,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게 해 준다. 영혼은 이런 감각을 추리나 논증으로써가 아니라 말하자면 체험적 방법으로 깨닫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온갖 피조물과 전혀 다르시며, 참으로 유일하시고, 매우 위대하시며, 마땅히 우리 마음의 모든 사랑을 다 바쳐 드려야할 분임을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감각은 십자가의 요한이 '수동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을, 즉 영혼이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로 끌어당겨짐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사랑을 즐기고 있을 때 특별히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관상의 첫 단계의 하나인 '고요의 기도'를 묘사하면서 말한 것처럼, 영혼은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 어떤 다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된다.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에 더없이 만족하며 커다란 평화가 밀려드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영혼은 당신 자신을 위해 자기를 창조하신 그분과 어떤 사랑의 접촉(맞댐)을 하고 있다고,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영혼은 성 어거스틴과 함께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는 쉴 수 없습니다"(「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1,1)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영혼은 하나님 안에 쉬면서 자기는 완전히 만족할 수 있다고 느낀다. 이와 같이 사랑의 방법을 통해서, 영혼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체험은 지성에도 반영된다. 그러나 이때 개념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은 사실, 그 체험 이 관념이나 지적 개념의 방법으로 얻어진 인식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얻어진 인식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이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심오하기는 하나 명확하지 않은 어떤 감각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말은 우리의 개념에 의해서만 형성되고 적용된다. 그러므로 개념과 관계가 없는 것은 대체로 표현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로 설명하고자할 때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며, 마치 이런 체험이란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듯 형상이나 비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인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사랑을 통해 얻게 된 인식이 다른 것에 비해 열등한 인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종류의 인식 또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인식, 언젠가는 우리 자신도 거기에 이르리라고 희망하는 지고의 인식, 즉 천국에서 누리는 지복직관에 속하는 인식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지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즉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뚜렷이 뵙게 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그때 우리는 그분을 뵙게 되는 것이지, 그분을 개념 안에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개념으로도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보며 깨닫는 하나님의 저 무한한 완전성을 표현할 길은 없다. 따라서 영원한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며 천국에 있는 이들의 가장 내밀한 기쁨의 근원이 되는, 곧 거룩한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진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전할 수 있을 뿐이며, 이 거룩한 대상에 관해서는 그 어떤 개념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축복을 받은 영혼 중 그 누구도 자신의 가장 내밀한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가 누리게 될 천상 행복 가운데 가장 깊은 행복을 하나님과 우리 각자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과 거룩한 세 위격 사이에서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인간의 지고의 위대함이 있으니, 인간은 자신의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며 영원히 살도록, 홀로이신 하나님과 홀로 표현할 길 없는 만남을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복된 영혼들이 거기서 서로 교류하는 기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게 될 그 행복에 비하면, 그 기쁨이란 부수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렇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며 살고자 힘쓰는 영혼은 얼마나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관상가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참으로 관상 안에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저 친국 행복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미리 발견하는 셈이다. 비록 천국에서의 지복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가운데 누리게 되는 행복이고, 관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체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표현할 길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깊은 체험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이끌어 주는 관상의 위대함과, 관상을 하도록 영혼을 준비시키고 거기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관상 생활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가 언젠가는 관상에 이를 수 있도록 관상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잘 준비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관상에 도달할 가능성이 정말 조금이라도 있단 말인가? 성녀 데레사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관상을 "원하시는 이에게,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주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은 관상이란 거저 받는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의 승낙에 달려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성녀 데레사가 관상은 거저 받는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녀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성녀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관상의 은혜를 요구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혹시라도 그 어떤 요구를 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착각과 망상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 선물의 주인이시며, 우리 영혼들에게 어떻게 그 선물을 나누어 줄지를 판단하신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견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교만한 죄가 될 것이다. 동시에 성녀 데레사는 똑같이 강조하기를, 많은 영혼들이 관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관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며, 그 준비란 소위 관상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이루고 있는 '기도'와 '금욕'을 스스로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관상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은 관상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을 준비해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녀 데레사가 가르치는 것처럼, 한 영혼만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관상에 이르도록 초대하신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모든 영혼을 초대하는 생명의 물의 비유를 통해 바로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세상 것에 대한 갈증을 모두 없애 주는 생명의 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도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상의 선물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선물들과 비교할 때 이 초라한 세상이 얼마나 가치 없는가를 우리 스스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제대로 준비하는 모든 영혼은 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확실성과 함께 하나님의 그 선물은 거저 받는 것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켜 생각할 수 있을까? 데레사 성녀가 직접 그 해답을 준다. 즉, 관상이란 풍요로운 샘이며 거기서 흐르는 물이 여러 물줄기를 이루는데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고, 또 다른 어떤 것은 웅덩이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을 부르시고 모두에게 마실 물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어떤 종류의 물줄기에서 마시도록 부르심을 받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으시며, 우리 생애 중 어느 때 그물을 마실 수 있는지도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관상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니, 어떤 것은 감미롭고 어떤 것은 무미건조하다. 어떤 것은 대단히 빛나고 말할 수 없는 감미로움을 주는 반면, 어떤 것은 어둡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두운 관상이 앞의 것보다 영혼에게 덜 유익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형태의 관상을 마련하시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이에게 주시므로, 누구도 자기가 마시게 될 물이 큰 줄기의 물일지 작은 물줄기일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해 그 선택을 하신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에게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련데도 언제나 꾸준히 준비할 수 있는 너그러운 영혼에게는 어떠한 형태의 관상이든 결코 부족함 없이 베풀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그분의 몫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다. 우리를 위해 어떤 관상을 마련하시는지는 주님께서 결정하신다. 그 결정이 바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의견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선물들을 내리실 때 주님께서 장애물에 부딪치시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물들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주님의 선물들을 받도록 길을 트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우리는 관상 생활을 함으로써 확실하게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상적 일치를 바라는 영혼에게 필요한 준비에 대해서다. 그는 그 준비에 대해 열성을 다해 가르치고 있다. 그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은총이 우리 탓으로 지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 목표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관상 생활의 스승이 지닌 이 거룩한 조바심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스승의 안내에 따라 여행하기 위해, 우선 눈을 들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즉 하나님과의 일치의 절정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응시하기 시작해야겠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러한 목표를 우리에게 제안하면서, 그리로 가는 길, 즉 포기와 기도에 관해서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한 각오로 이 포기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자. 성인은 이러한 포기의 절대적 필요성과 함께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포기와 더불어, 우리는 그 포기를 통해 깊어지게 마련인 기도를 합쳐야한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의 관심이 기도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묵상의 실천을 통해 기도의 귀중한 안뜰로 들어서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런 다음, 영혼이 무미건조함의 위기를 겪음으로써 어떻게 묵상에서부터 첫 번째 겸손한 관상의 형태가 태어나기 시작하는가를 보여 줄 것이다.
   우리는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신덕 · 망덕 · 애덕인 향주덕(向主德)을 실천하면서, 즉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순수한 사랑 안에서 우리나오는 신앙의 기도를 꾸준하게 열심히 바치면서, 하나님과의 일치의 길로 용감하게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또 다른 위기에 부딪치게 하시면서, 가장 고통스럽지만 더없이 귀중한 영혼의 어둔 밤을 겪게 하신다. 그 어둔 밤은 영혼 혼자서는 결코 얻게 될 수 없는 어떤 순수함을 지니게 해 줄 것이다. 마침내 영혼은 자신을 사로잡으며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그 일치에 이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상을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즉, 우리가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 편에서 노력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아름답고 고결한 영혼은 그처럼 드높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노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도 그런 영혼들 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될까?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를 위해 그 힘 있는 전구로써 하나님께 이 은총을 얻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제 유순한 마음으로 그의 학교에 들어가도록 하자. 우선 성인의 가르침을 귀담아들은 다음,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도록 하자! 그것은 정말 노력해 볼만한 일이다.


4. 기도의 진행

   수도원에서 지도한 기도는 수도원까지 찾아오시는 분들은 적어도 기도에 열심인분들이며, 성경 읽기와 묵상 및 기도에 큰 힘을 쏟고 있는 분들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갈망으로 찾아오신 것으로 알고 또 당연히 그럴 것으로 간주하고 관상기도를 지도해 왔습니다만 오랜 시간 살펴본 결과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그 안내를 하고자 합니다.

1). 충분히 이해하고 기도하라
   단숨에 달리려 하지 말고 먼저 책을 천천히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읽어 내가 설명이 가능할 때 다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요령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숙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몇 번이고 기도요령을 습득하도록 수도(수련)해야 합니다. 그 후 조용히 절차에 따라 기도하다보면 성령님의 인도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을 신뢰하고 성령의 기도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한 사람이 대표기도하면 다른 분은 그에 기도에 동의하여 아멘으로 화답하며 대표기도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의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조용히 침묵가운데 그분께 집중하길 바랍니다. 집중하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집중마저도 성령님이 주장하게 됩니다. 즉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분과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가 잘 안되면 묵상으로 돌아가라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 해 오신 분들은 묵상기도를 건너 관상기도로 바로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마음  먹은 대로 잘 안되거든 다시 겸손하게 묵상으로 돌아오십시오. 위 1)번의 내용을 실행하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의 ‘마리아’처럼(눅 10:38~42)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후에 그분 앞에 겸손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기 바랍니다. ‘마르다’처럼 봉사는 많이 해도 마음이 분주할 땐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겸손하게 묵상기도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3). 처음부터 묵상에서 시작하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나 초보자들은 먼저 성경 읽기와 묵상기도를 위 1)번과 같이 시작하십시오. 성경을 읽을 때 평소와는 달리 천천히 단어나 구, 절을 음미하며 읽으시길 바랍니다. 읽다가 관심이나 무슨 느낌이 있으면 그곳에서 멈추어 추리하며 묵상기도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읽는 분량에 관심 가지지 말고 그냥 천천히 읽으며 음미하길 바랍니다.

4). 관상의 시기가 오면 묵상을 버려라
   묵상기도를 수개월 혹은 수년 또는 그 이상 하다가 관상에서 묵상으로 넘어가야할 시기가 올 때까지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묵상에서 관상으로 넘어가야 할 시기와 증표에 대하여는 묵상에서 관상으로 장을 읽고 기억하기 바랍니다. 충분히 숙지되었으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5).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라
   이 기도는 주님의 나라로 갈 때까지 해야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팔복이 다 천국 가는 복이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하게 정화된 사람뿐이랍니다. 욕심을 버리도록 노력하십시오. 필요하다면 앞장으로 돌아가 극기(포기)의 장을 다시 읽으라.

   아래에 나의 갈 길을 기록하고 겸손히 실천하라.

1. 계속 나아감
   이유 :



2. 되돌아 감
   이유 :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를 거쳐서 가라.
알지 못하는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네 자신이 아닌 것에 다다르려면 네 자신이 아닌 거기를 거쳐서 가라.

어떤 것에 네 마음을 머물러 두면
   온전하심에 너 자신을 맡기지 못한다.
온전하심에 온전히 다다르기 위해
   모든 것에 대해 너 자신을 온전히 끊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을 때는
   아무것도 원함 없이 이를 지녀야 한다.

이 헐벗음 안에서 영혼은 쉼을 발견하나니
이는 아무것도 원치 않기에
   위로 그 무엇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고
   아래로 그 무엇도 그를 누를 수 없으니
이는 그가 겸손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6). 주님의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빈다.
   하나님과 하나 됨(부어 넣어 주심)에도 깊이가 있으니 일치의 시작, 영적약혼, 영적결혼, 영화의 단계가 있으니 모든 이들이 열심히 수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부어넣어 주심으로 관상을 체험 하시기를 (영화의 단계는 나중에 가기로 하고, 우선 영적 약혼, 영적결혼으로 변형하는 일치에 이르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7장 기도의 진행.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