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묵상기도

 

 

 

1. 기도와 상상력

 

상상력은 객관적 실체를 주관적 실체로 바꾸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기도할 때, 기도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그 말씀의 한 부분이 되는 참여자가 된다. 즉 그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기도 자에게 더 이상 제삼자가 아니라 보다 친밀한 대화의 상대자가 된다.

 

 

이미 제 1장에서 성경 말씀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인 신앙 고백을 전제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는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신앙인들은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기도 하고 연구도 한다. 상상력도 바로 성경을 보다 깊이 가까이에서 경험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한 방법이다. 성경을 묵상할 때 일반적인 태도는 지성을 사용한다. 성경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거나 그 결과를 전하려고 할 때 훈련된 지성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성경 본문에 다가가서 그 말씀을 맛보고 참여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고도로 훈련된 지성을 사용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훈련된 지성보다는 오히려 건강하게 개발된 상상력이 성경을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데 훨씬 유익 할 수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적 장르가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체적인 말씀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분석해서 이해하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때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대부분의 복음서는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사건을 통해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보여 주고자 하는 말씀이다. 즉 오고 오는 세대에 주님의 사건을 전하기 위해서 문자라는 매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문자를 뛰어넘어 보다 친밀하게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사건을 전달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곧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기록된 말씀을 사건으로 재현해서 그 사건을 현재화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으며, 그 사건 한가운데 계시는 주님과 만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가 된다. 그래서 특별히 복음서 말씀을 자료로 하여 기도를 하고자 할 때 상상력을 사용하도록 권한다.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장애물이 있다. 지성적인 활동에 익숙한 현대인은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다. 우선 그들은 상상은 비이성적인 활동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상상이 지성적인 활동을 어리석게 만들거나 왜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선입관이다. 먼저 상상(imagination)과 환상(illusion) 혹은 공상(fantasy)과의 혼돈을 정리해야한다. 환상이나 공상은 현실(reality)에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세계에 대해서 도피적이며,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유리되고자 하는 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환상을 통해서는 결코 보편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유익한 자료를 얻어 낼 수 없다. 반면에 상상이란 실제로 있었거나 있을 법한 사건의 실체나 진실을 맛보고 경험하기 위해서 사건을 새롭게 구축하는 행위이다. 상상은 객관적 실체를 주관적 실체로 바꾸어 경험하도록 해 준다. 사람들은 상상이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상상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이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상상은 창조적인 논리를 세워 갈 수 있는 탁월한 통찰력과 의미를 전해 준다. 그래서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지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만족스러운 목적을 세우도록 도와 준다.

상상력에 대한 일반적인 또 다른 염려는 정화되지 않은 우리의 감정이 여과장치 없이 반영될 때 상상이 아니라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상상의 대상이 된다고 할 때 자기 몰두에 깊이 빠지지 않는 한 그것은 거룩한 상상으로 발전될 것이며, 더욱이 기도가 한 개인의 독백이 아니고 성령님의 간섭이라고 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또 한 번의 여과 장치 역할을 하게 된다. 상상을 통한 기도에서 흔히 경험되는 일이지만, 기도 속의 상상은 자기 의도대로 진행되어 가지만은 않는다. 기도 속에서 상상이 일어나고 있다면 자신 안에 있는 상상력이라는 기능 외에 다른 영의 실체가 그 상상에 작용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통교(通交)를 위한 수신 안테나에 비유한다면, 이성적인 안데나뿐만 아니라 상상과 감성의 안테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 통찰에만 의존하는 기도는 라디오 수신기에 비유할 수 있다. 라디오 수신기는 청각적 소리만 전해 주듯이, 이성적 안테나만 사용하는 기도는 이성적 통찰만 전해줄 뿐이다. 반면 상상력과 감정을 동원하는 기도는 TV수상기에 비유될 수 있다. TV수상기가 소리와 상()을 동시에 전달해 주는 통합적인 역할을 하듯이, 상상력과 감정의 안테나를 세워 둔 기도라면 그 기도는 오감(五感)이 모두 참여하는 생동력이 넘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에서 상상력을 사용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적 상상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사건을 담고 있는 문학적 형태의 구성을 가지고 있는 성경 이야기를 다시 사건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자들이 오로지 시각적인 상상력에만 매달리다가 한 발짝도 진전하지 못하고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래서 기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결국 기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생긴다. 예를 들면 어떤 기도자가 한 장면을 그림처럼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 장면이 떠올라 재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구상해 낸 그 장면은 그 이상 다음 장면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벽에 걸린 액자처럼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박혀 버린다. 그럴 경우 기도자는 연속된 장면을 살려 내려고 몸부림친다. 왜냐하면 그 상상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장면만으로도 기도가 충분하게 진행될 수 있다. 그 한 장면으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살아나거나 또 어떤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으로부터 기도는 시작될 수 있다.

상상력에 대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생생한 상상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상상이라는 개념을 보다 유연성 있게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상상은 반드시 시각적 상상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 상상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그 다음 단계는 청각적 상상력이다. 청각적 상상력은 소리를 통해서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그 장면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나 명백하지 않으나 그 장면 가운데서 흐르고 있는 청각적인 분위기를 맛보는 것이다. 시각적 상상에서 반드시 움직이는 활동사진과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청각적 상상에서도 뚜렷한 어떤 말소리를 듣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그저 청각적인 어떤 느낌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어서 지각적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다. 지각적 상상력이란 감각적 느낌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미 앞에서 다룬 시각적 상상력과 청각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지각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 보통의 순서이다. 이 세 차원의 상상력이 활동하게 되면 주어진 본문 말씀이 사건으로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그리하여 기도자가 그 사건 안으로 초청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기도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예수님과 직면하는 자기의 역할이 분명하게 세워지면 기도자는 더 이상 그 장면을 만들어 가는 구경꾼이 아니고, 그 사건의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에 상상에 더 이상 매일 필요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상상력 그 자체는 기도로 들어가기 위한 매개체이지 그 자체가 기도는 아니다.

그러면 왜 굳이 그 힘든 상상력의 과정을 밟으면서 참여자가 되라고 하는가? 처음부터 말씀을 읽는 동안 특별한 과정 없이 자기의 모습이 드러나고, 곧바로 적합한 역할로 들어가면 주님과 바로 대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도 사실은 순간적이지만 기도자의 내면 안에서 상상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 역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사건의 분위기와 거기에서 오늘 자신을 향한 메시지가 어느 정도 살아나고 있는가이다. 또 주님을 향하여 내 영혼이 얼마나 활짝 게방되어 있는지는 기도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이렇게 볼 때 상상력을 강조하는 첫째 이유는 보다 생생하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음미하고 맛보고자 함이다. 둘째 이유는 그 주님을 향하여 관대하게 자기의 영혼을 개방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상상력의 풍요로움의 정도에 따라 기도의 진행 여부를 가늠하고자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상상력이 풍요롭지 못하면 기도가 잘 안되었다고 판단하고, 상상력이 매우 다양하고 풍요롭다고 느껴지면 그 자체로서 기도가 잘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옳지 않다. 상상력을 사용할 때 기억해야 할 분별의 기준은 상상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그 상상력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친밀감이다. 펼처지는 상상이 빈약했다할지라도, 그 장면에서 전해지는 친밀감이 두드러진다면 그것이 훨씬 더 기도를 힘 있게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

상상럭을 전개시켜 가는 과정에서 기도자가 그 사건 안에서 역할을 설정해 갈 때 적합성과 제한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종종 복음서의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만일 말씀 자체를 연구하면서 보다 깊은 뜻을 헤아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말씀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이 제일 목적이라고 한다면, 기도자가 예수님의 입장에 서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도자가 생각하는 대화의 파트너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설정은 상상이라기보다는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수태고지 사건을 기도하면서 자신이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 역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을 초월적 존재로 가정한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환상일 뿐이다. 여기에서 상상이 환상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볼수 있다. 환상은 현실을 보다 깊이 조명하지도 못하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그 현실을 왜곡하고 도피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 속에서 상상을 통해 역할을 정할 때 몇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첫째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 둘째는 전지전능자의 입장이거나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고, 보다 적극적인 참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 셋째는 현실적으로 있음직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려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자가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동물로 자신의 역할을 정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예를 들어 예수님이 수난 받으시기 직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기도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타시던 나귀의 역할이 되어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을 보곤 한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한 사람들이 매우 강력하게 주님과의 인격적 일치를 맛보는 경험을 한다. 그런 경우 그 역할의 대상이 인격은 아니지만, 의인화된 인격으로서 그 역할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물른 의인화된 인격을 통하여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상상력을 사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거듭 강조한 바와 같이 그 장면에 등장하는 주님과 활발한 교제를 하기 위함이다. 그 장면에 나타난 어떤 인물의 역할을 했다고 해서, 꼭 그 인물인 것처럼 가정하며(assuming) 주님과 대화를 흉내낼 필요는 없다.

설정한 역할의 입장에서 일단 주님과의 접촉점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역할은 충분하다. 그 후로는 기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님과 자유롭게 대화를 이끌어 가면 된다.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자는 성경의 배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먼저 만나게 된다. 그 배경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맛보고 경험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도자는 보다 생생하게 예수님을 관상하게 되고, 친근하게 그분에게 접근해 갈 수 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기도자는 반드시 그 장면을 전제하는 예수님을 의식할 필요는 없게 된다. 기도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기도자는 성령님의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 때부터 영으로 자유롭게 임하시는 주님과 대화를 이끌어 가면 된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자료로 하여 기도할 때 특별히 예수님 탄생 사건이나 유아기 때의 예수님과 교제를 시도하고자 할 때는 설정한 역할이 어색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도자는 들에서 양 떼를 지키는 목자였다. 그는 천사들로부터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목자들과 더불어 바삐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싫다. 목자들은 한 동굴에 설치된 마구간에 도달했고, 구유에 누인 한 아기를 목격했다. 그러나 기도자 자신은 그 아기를 바라보면서 들에서 목격했던 그 찬란한 광휘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기를 바라보는 동안 그 아기가 매우 슬프고 가냘프게 느껴졌다. 슬프리만치 누추하고 연약한 이 아기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말인가? 왜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시는가 의문이 들었다. 잠시 떠오르는 생각은, 주님을 따르는 자신의 모습도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신의 모습은 천사들의 나팔 소리나 그 찬란한 광휘와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무능해 보이고, 초라하게 느껴진 자신의 모습이 마구간에 누인 그 아기와 그대로 연결되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상태를 진행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목자였고, 그 목자 중 누구도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감탄과 놀라움이 있는 그 분위기를 따라갔다.

다른 한편으로 그 기도자가 지속적으로 기도를 발전시키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대화의 파트너가 구유에 누인 아기라는 사실 때문이다. 즉 아기와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기도를 끝낸다면 그것은 상상력을 통한 하나의 연극일 뿐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그 자신이 목자의 역할이 되었다 할지라도 끝까지 목자의 입장에서 주님과 대화를 이끌어 갈 필요는 없다. 그 마구간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목자의 역할은 충분하다. 그 다음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면 된다. 의도적으로 역할을 또 바꾸라는 말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되는 대로 그렇게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기 예수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가냘프고 구차하고 불방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그 기도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은 충분하다. 그 이후에는 영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일상적으로 우리가 간구하고 대화했던 그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서 상상 가운데 전해 받은 느낌을 출발점으로 주님과 자연스럽게 교제를 나누면 된다.

성경의 어떤 특정한 장면에 나타난 예수님을 상상할 때는 그 장면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성격을 전해 받는다면 주님과의 교제를 생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만일 내가 상상한 그분의 심정에 대해서 그것이 사실(reality)인지, 아니면 하나의 가정인지(assuming)에 대해서 의혹이 들면 주님과의 교제가 매우 어렵게 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런 의혹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이해가 각각 다르고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매우 적극적이고 명랑하신 분으로 이해한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은 매우 우울하고 고독하신 분으로 이해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매우 활동적인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관상적(觀想的)인 분으로 이해한다. 어떠한 이미지를 선택했을지라도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이 완전하고 바른 이미지를 선택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족하게 느껴진 그 이미지 때문에 기도를 방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기 자신에게 전해져 온 예수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기도에 임하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경험한 예수님의 이미지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하시어 허락하신 통찰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 속에서 그런 예수님의 이미지가 필요하기에, 예수님께서 그런 이미지로 각 개인에게 성육신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이미지에 고착되어 버린다면 자신의 영적 성장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자가 경험한 상상이 환상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적 현실성과는 너무 거리가 먼 듯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기도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가장된 연극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예를 들어 어떤 기도자가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자신의 역할을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생이나 그의 빈한(貧寒)한 가정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겼다고 한다. 만일 기도를 그렇게 끝냈다면 그것은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의 가상적인 연극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구상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상상력을 사용하여 기도할 때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날다. 그러면서도 기도를 하고 나면 무엇인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기도 후의 이 느낌을 중심으로 반추를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러한 구상이 떠올랐을까? 그럴 때 이러한 구상이 어떤 다른 구상보다는 수동적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곧 예상치 않은 상상력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성령님이 하시고자 하는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은가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도자는 반추를 하는 동안 현실성이 없는 이런 유감스러운 감정이 주님과 교제를 위한 매개체적인 심상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면 반복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를 이어 갈수 있다. 곧 유감스러운 감정을 유지하면서 "주님 내가 어떻게 주님을 도울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예상컨대 주님은 이렇게 반응하실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여전히 헐벗고 배가 고프다." 그러면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는 복음서의 말씀이 교차될 수 있다. 이 때 기도자가 적합하게 대응을 하면 여기서부터 기도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간다. 그러므로 기도 가운데에서 일어날 상상미 의혹을 줄 때 꼼꼼한 반추를 통해서 기도를 완성시켜 가면 된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음성(통성)기도를 주로 가르쳐 왔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침묵 기도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할 수 있으나, 심리적인 요인을 생각해 보면, 현대인들은 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월씬 더 내면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내면의 소리를 말로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점점 더 내향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침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침묵의 세계는 언어의 세계에 비해 월씬 더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자마자, 그 맛을 보기도 전에 잡념과 혼란으로 시달리곤 한다. 음성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두고 논리를 펴 가기 때문에 기도에 쉽게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침묵은 시간과 공간을 망각하거나 뛰어넘으려는 시도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논리의 세계로는 침묵의 세계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소리가 없는 침묵의 상태는 언어가 마음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이 제멋대로 흘러간다. 이렇게 볼 때, 거룩한 상상은 침묵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상상은 마음을 묶어 둘 뿐만 아니라 마음을 순차적으로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더욱이 상상은 고삐 풀린 마음과 성경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기도자는 점점 깊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지게 된다.

 

 

2. 묵상의 시간

 

1) 묵상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믿음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음속 깊은 곳에 머물러야 한다.

 

관상 기도 형태로 들어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묵상이고 다른 하나는 묵상이 동반된 독서, 즉 묵상적 독서라고도 하는 독서이다.

독서란 성경말씀 중에서 간단하면서도 할 수 있는 진리를 선택해서 읽는 것이다. 독서를 할 때는 먼저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한두 구절 읽는다. 이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 말씀에서 영혼의 충족을 얻지 못했다면 다음 구절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말씀 안의 진리를 온전히 소화했을 때에만 다음 구절로 넘어가라. 그리고 다음 구절을 선택해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한다. 이때 주의해야할 것은 무조건 다독하려하지 말아야 한다. 다독이 자랑이 아니다. 독서는 읽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에 반 페이지 이상은 읽지 않는 게 좋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독서의 분량이 아니라 태도이기 때문이다. 많은 구절을 읽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큰 유익이 없다. 마치 벌이 주위를 날아다니기만 해서는 꿀을 얻을 수 없고, 꽃에 앉아 벌침을 꽂고 빨아 먹어야 꿀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한 구절이라도 깊이 묵상해야한다.

한꺼번에 많이 읽는 방법은 영적인 일보다는 학문 연구에 더 적합하다. 그러나 신앙 서적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이와 다른 독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독서 방법을 추구하면 독서를 통해 기도하는 습관을 훈련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묵상적 독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질 것이다.

 

다른 방법인 묵상, 독서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간 뒤, 논리적 추론을 하기 위한 실제적인 묵상을 말한다. 이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고, 이성적 토론이 아니라 마음을 집중하는 것에 관심과 노력을 쏟아야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믿음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음속 깊은 곳에 머물러야한다. 이것이 산만한 생각을 없애고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오직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분은 오직 우리 마음속 은밀한 곳, 우리 마음의 지성소(sancta-sanctorum)에서만 만날 수 있다. 주님이 거룩한 영으로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람에게 가서 거처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14:23).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세월만 허비한 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자신 안에 완전히 깊이 빠진 후에는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깊이 잠기게 된다. 모든 의식이 주변에서 주님이 계신 영의 중심으로 완전히 모아지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훈련을 반복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된다. 이렇게 영혼을 내면으로 온전히 집중하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그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달콤한 진리에 온전히 젖어들게 된다. 그리고 생각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의지를 다해 그 안에 머무르고자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뒤에는 그 사랑의 감정으로 조용하고 평온한 쉼 가운데 머무르면서 지금까지 맛본 것을 삼켜야한다.

아무리 좋은 고기라도 삼키지 않고 씹기만 하면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감정이 솟을 때 그 감정이 계속 타오르게만 한다면 그 불꽃은 결국 꺼지고 말 것이고, 영혼은 영의 자양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느끼고 맛본 은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쉼을 누림으로 삼켜야 한다. 이 방법은 영적 교제에 절실하게 필요하며, 몇 년 동안 애써도 이루지 못한 영혼의 성장을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하게 해 준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면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산만하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영혼을 집중하려는 노력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산만해지려는 자신과 싸워 이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산만함과 싸우고자 하면 오히려 더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에게 온전히 내 생각을 집중하고 그분에게 마음을 내드리면서 산만함과 간접적인 방법으로 싸우라. 그러면 산만함 자체와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이길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초보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한 진리에서 다른 진리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성급하게 관심을 옮기지 말고 충분한 맛을 느낄 때까지 한 진리에 오래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깊이 깨닫고 맛보며 각인시키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습관 때문에 그렇게 깊이 침잠하는 게 쉽지 않다. 외부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습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면 이것은 매우 쉬워진다. 스스로 습관이 될 정도로 훈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를 베푸셔서 그분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주기도문'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실제로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으로 말한 후 잠시 침묵 가운데 하늘의 아버지가 그 뜻을 알려 주시기를 기다리라. 그리고 나서 영광의 왕이 우리 영 안에서 통치해 주시기를 구하며, 그분께 자신을 내드려고 우리를 통치하실 권리를 그분에게 양도하라.

이때 고요한 평화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않고 그 상태가 충분히 지속될 수 있도록 그대로 있어야 한다. 이 상태가 충분히 지속되었다는 판단이 들면 두 번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으로 넘어간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모든 뜻을 이뤄 주시도록 열망한다. 우리 마음과 우리 자유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쁘신 뜻대로 처리해 주시도록 내드린다. 그리고 그분 뜻에 온전히 붙잡히면, 당연히 주님을 사랑하게 됨을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님의 사랑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한다. 이 모든 과정은 고요한 평강 가운데서 이뤄지며 나머지 기도도 마찬가지다.

때로 우리는 목자가 필요한 양처럼 주님에게 참된 양식을 달라고 구한다.

 

거룩한 목자시여! 당신은 친히 당신의 양 떼를 먹이시는 분이며, 매일 그들의 양식이 되어 주시나이다.

 

또 우리는 가족에 대한 소망을 그분 앞에 가져가 아뢴다. 그러나 이 모든 기도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어야한다.

 

우리 마음과 우리 자유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쁘신 뜻대로 처리해주시도록 내드린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 머리로는 알 수 없다. 오직그분이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는 온전한 믿음으로 충분하다. 우리 내면에 계신 예수님을 항상 구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나 어린 시절의 모습이나 다른 어떤 모습들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 어떤 형상도 상상할 수 없다.

때로 병이 들 때 우리는 의사 되신 분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나아가 병을 고쳐 주시기를 구한다. 이때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고, 단순하고 잠잠한 침묵 가운데로 나아가라. 그러면 침묵과 기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공존하다가 점점 침묵 상태가 늘어나고 입으로 드리는 기도는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게 되고, 그분의 온전한 다스리심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혼이 침묵과 쉼을 맛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임재라는 이 생생한 의식이 우리를 기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2) 기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기를 바라면서 기도로 나아가라.

 

앞에서 말했듯이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게 쉬운 일임을 깨닫는다. 더 쉽게 영을 주님에게 집중하게 되고, 기도는 자연스럽고 즐거운 경험이 된다. 기도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기쁨을 알게 되고, 그 감미롭고 향기로운 냄새를 지각하게 된다. 이런 단계가 되면 이제 방법을 바꿔야 한다.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소개하는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를 바란다.

먼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때 잠시 겸허한 마음으로 침묵하며 가만히 있으라. 이런 믿음의 행동으로 시작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조금이라도 맛보면, 다른 생각으로 산만하게 하지 말고 그대로 머물러서 그 상태가 지속될 때까지 잠잠히 있으라.

그러다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면 주님께 감미로운 사랑의 고백을 드림으로써 마음의 불꽃을 다시 불러일으키라. 평화로운 마음상태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면 그 안에 머무르라.

이때 부드럽게 그 불길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불길이 다시 타오르면 불길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세게 타 올라 그 불길을 꺼뜨리고 말 것이다.

또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여호와여 말씀 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는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오직 자신이 받는 보상 때문에 주인을 섬기는 종은 보상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기를 바라면서 기도로 나아가라. 이렇게 하면 영적으로 메마를 때나 풍부할 때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시거나 무관심하고 냉담하게 대하시는 것 같을 때도 혼란스러워하거나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자녀들이여, 아버지에게로 나아오라.
그러면 사랑의 팔을 활짝 벌리고 받아 주실 것이다.

목자 되신 분에게로 오라.

죄인들이여, 구세주에게로 오라.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여,

스스로 힘으로는 기도할 수 없다고 믿는 자들이여,

바로 그런 당신이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나오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손짓해 부르고 계신다.

 

 

 

3. 묵상기도

 

관상적 생활의 본질을 말하는 저술가들은 한결같이 관상적 생활이 실제로 관상을 준비하는 생활이 되려면 정화와 기도, 특히 묵상기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감각의 정화만으로는 영혼이 예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을 닮기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상태에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화에는 묵상기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묵상기도란?

'묵상(默想)'이라고 불리우는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예를 들면,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의로우심, 그분의 편재(偏在)하심 등-이나, 혹은 예수님의 생애의 신비 -예를 들면, 그분의 매 맞으심-이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 -예를 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지킨다'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을 불태우기 위해서 상상력(想像力)까지 이용해서 그 주제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의 생각을 더욱 명확히 알아듣기 위해서는 아빌라의 테레사(예수의 테레사)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테레사에 의하면,

묵상이란 자기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나님과 단 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다. 결국 이는 사랑의 친교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심을 느끼고, 한편 자기편에서도 주님께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다. 즉 사랑의 부름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거듭 묵상기도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생각하는 일을 사랑 아래 두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묵상기도 중에도 생각은 하게 되지만, 그것은 슬기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욱 깊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빌라의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묵상 기도 중 줄곧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잠시 생각한 다음에는 주님이 그대들을 사랑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니, 그 생각을 멈추고 주님 앞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러 가지로 사랑에 넘친 대화를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대화 중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영광과 또한 그대 자신을 위해 요긴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리십시오.” 여기에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하는 묵상기도의 본질이 모두 요약되어 있으며, 따라서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 가득한 대화라 함은 핵심을 찌른 말이다.

감각의 정화는,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영혼이 예수께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을 본받기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상태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정화는 묵상을 동반해야 한다. 묵상의 목적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대로, 바로 '그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식을 조금이나마 얻어내기 위한 것'이고, 감각의 정화를 위한 끈질긴 싸움 안에서 그것을 지탱해주는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묵상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실천된다.

우선, 교회나 자신의 방 같은, 외부의 번잡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조심스레 머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정다운 이야기는 멀리 떨어져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아주 큰 소리를 내야 한다면 정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사랑에 겨운 대화를 하려는 이도 역시 하나님을 자기 곁에 모셔야 한다. 따라서 묵상기도의 준비는 하나님과 접촉하고 그분 앞에 자기를 두어야 하며, 교회나 자신의 방 또는 우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이야기하고자 부르시는 삼위일체께서 거쳐하시는 영혼의 지성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주님이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드러내신 거룩한 수난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를 더욱 더 사랑하려는 것이다.

거기서 맨 먼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現存), 혹은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면, 교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現存)에 대한 신덕(信德)의 행위들을 실천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그분께서 우리를 지배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분과 친밀하게 사귄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영혼은, 어떤 신비(神秘), 즉 하나님의 어떤 특성이나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다 주의를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이 묵상하고자 하는 어떤 신비-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등-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어떤 책을 읽음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십자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영혼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혼은 그 사랑에 사랑을 통해서 응답하고, 예수님과의 대화 안으로 몰입하게 된다. 결국, 영혼은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그분께 말씀드리게 된다: "예수님, 왜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제 일생을 망치게 되었습니까? 왜 저는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도대체 왜 저는 제 죄들로써 당신께 상처를 드리고 있습니까?" 영혼은 이어서, 전에는 한 번도 청해 본 적이 없는 것을 청하게 된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과 함께 고통 받게 해 주십시요!"

부언하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빌라의 테레사처럼 구세주께서 매 맞으시던 참혹한 장면을 자주 묵상한 듯하다. 두 분 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 그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되는 묵상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작은 질문표를 사람들에게 권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고통 받으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어떻게 고통 받으시는가?” 왜 고통 받으시는가? 와 같은 질문에 자연스레 나오는 대답은 확실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는데 적합할 것이다.

그 후에는, 대화는 중단되고, 그리스도를 향한 어떤 사랑의 눈길 안에서 영혼은 변모된다. 이 사랑의 눈길에는 종종 사랑의 감명과 눈물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 태도는 여전히 더 영적(靈的)인 것이 되어야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위해서 고통 받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단호하면서도 평온한 의지(意志) 안에서 스스로 더 변모되어야 한다.

부언하면, 영성생활이 진보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의지가 감수성을 강하게 지배하게 되면, 사랑의 감수성이 강한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사랑의 표현방법은 그다지 세차지도 요란스럽지도 않게되며 밖으로는 그다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안으로 깊숙이 간직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랑은 매우 고요히 표현되지만 주님께로 행하는 의지의 움직임은 훨씬 강하고 절실해진다. 그 때 영혼은 더욱 깊이 사랑을 깨닫게 되는 만큼 하나님과 사람이 되신 말씀을 주시하게 된다. 이 때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거듭 탐구하지도 않고 그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이미 깨달았으므로이제는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셨으며 또한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직관적인 눈길 안에서 그 탐구의 열매를 맛볼 것이다.

묵상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다만 영혼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영혼과 더불어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게 빛을 주시어 그로써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며 만물을 초월하여 사랑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심을 똑똑히 깨닫게 해 주신다. 또한 영혼에게는 도움이 되는 사랑의 힘이 주어진다. 이 의지가 하나님께로 깊숙이 향하는 고요하고 차분한 대화, 즉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쏠리는 눈길로써 지탱된 대화야말로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는 묵상기도의 참된 종국 목적이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묵상이나 사색의 끝은 하나님으로부터 약간의 사랑과 깨달음을 얻어내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 영혼 안에 주입시키기를 원하는 '인식과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다.

 

 

 

 

 

 

 

 

 

 

 

3. 주님이 받으신 채찍에 대한 현의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22:63~65)

 

잠깐 동안 추리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좋습니다.

주님께서 견디신 고통, 그 고통을 참으신 이유, 고통 받는 분이 어떤 분이며, 어떠한 사랑으로써 괴로워하시는가를 살펴봅시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한없이 계속하여 지치게는 맙시다.

 

추리의 작용을 접어두고 구세주 곁에 머뭅시다.

 

만일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의 벗이 되어 있음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임께 아룁시다.

우리의 애절한 소망을 여쭈고 스스로 낮추며 임과 함께 즐깁시다. 또한 우리는 임 앞에 머물기에 천만부당한 자신을 잊지 맙시다.

영혼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될 때 비록 그것이 묵상의 시초일지라도 거기서 퍽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이런 유의 묵상은 참으로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적어도 내 영혼을 위해선 그러했습니다.(천주자비의 글13.22)

 

 

 

 

 

십자가의 고통에 대하여

각자가 기록해 보자!

 

 

 

 

 

 

5. 관상적 묵상 사랑의 눈길

 

이제, 마음을 다해 금욕을 실천함으로써 생기는 열정적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상적 일치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영혼은 묵상, 즉 묵상 기도의 수련을 쌓아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묵상은 영혼 안에 극기(克己)하려는 결심을 더욱 단호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과의 일치로 이끌어 주는 길, 즉 전부 말끔히 벗어버림의 길에 들어서도록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우리는 우리 안에 완전한 포기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리스도께 배우기 위해 그분의 생애를 묵상하고자 하는 큰 소망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넘치는 묵상을 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힘과 용기를 얻게 되어, 영혼은 자진해서 그리스도처럼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묵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숨은' (최종) 목표라 하겠는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할 중간 목표에 먼저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다. 숨은 (최종) 목표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묵상에 특수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묵상은 관상에 이르게 하는 입문이 되어 준다. 이 목표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생활의 본질을 설명하는 저술가들은 한결같이 관상적 생활이 실제로 관상을 준비하는 삶이 되게 하려면 두 가지 일, 극기기도, 특히 묵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묵상이 어떠한 방법으로 영혼을 관상에 다가가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역시 그는 스승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데레사 영성의 신학자다. 그는 개혁 가르멜의 영적 어머니로부터 그 본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학문적 체계를 끌어들인 사람이다. 묵상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십자가의 요한은 전적으로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의 생각을 더욱 명확히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가르멜의 위대한 성녀의 가르침에 의존하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1). 아빌라의 데레사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요한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묵상한다, 추리한다 하는 그 목적이 당신께 대한 어떤 깨침과 사랑을 얻어 내자는 데 있다. "(가르멜의 산길2.14,2)

이 문구야말로 십자가의 요한 식의 묵상의 특별한 역양을 전해 주는 금언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십자가의 요한이 살았던 환경을, 특히 그가 각별히 영감을 받았던 아빌라의 데레사의 생각을 알 필요가 있다.

가르멜의 거룩한 개혁자인 아빌라의 데레사가 마음에 품고 또한 수녀들에게도 해설한 묵상 기도의 개념에서, 성녀는 자신이 기도에 부여한 애정적 성격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성녀에게 기도란 "영혼이 하나님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나님과 단 둘이서 자주 이야기 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데레사 자서전8.5)였다. 결국 기도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한편 자기도 주님께 사랑을 표시한다. 영혼은 하나님과 이야기하면서, 분명하게 사랑의 초대를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에 대해 말씀드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데레사는 거듭 "기도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다."(영혼의 성4.1,7; 창립사5,2)라고 하면서, 생각하는 일을 사랑보다 못하게 여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묵상 기도 중에도 생각은 하게 되지만, 이는 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묵상 기도 중 줄곧 생각만 하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잠시 머리로 생각한 다음에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으니만큼, 추론하기를 멈추고 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면서 주님과 함께 사랑에 넘치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대화중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과 자기 자신, 곧 주님의 영광과 자신을 위해 품고 있는 모든 소망을 말씀드리라고 권한다.

아빌라의 데레사에게는, 바로 이것이 묵상 기도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위대한 성녀에게 묵상 기도란 '주님과 나누는 사랑에 넘치는 대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개혁 가르멜의 신학자들이나 영성 지도자들은 아빌라의 데레사의 가르침을 체계를 세워서 영혼들에게 더 쉽게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묵상기도가 구체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화되는 여러 부분이나 다른 순간들을 구별하여 설명하면서, 하나의 작은 묵상 기도 방법을 제시했다. 이 방법이 가르멜의 여러 남녀 수도원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개혁가르멜 시초에 수련자의 교육이란 책에 모두 수록되었다. 초기 가르멜 저술가들은 이 책에 여러 차례 주석을 달았다.

그 기도 방법을 체계화한 사람이 십자가의 요한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십자가의 요한이 그것을 승인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개혁사가 말해 주듯, 수련자의 교육의 인쇄를 허가하는 공문서에서 '검토하고 교정함'에 십자가의 요한이 서명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직접 설명한 그의 저서는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십자가의 요한은 다만 자신의 저서에서, 묵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어떻게 점차 관상으로 옮겨 가는지를 설명했을 뿐이다. 십자가의 요한의 전기를 맨 처음 쓴 작가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명백히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 마리아의 요셉 키로가 신부는 이 특별한 작은 책에서, 십자가의 요한이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묵상을 가르쳤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십자가의 요한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전기를 남겼으며, 또한 성인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반대자가 있었던 시대에 그의 옹호자였다. 키로가 신부의 설명에서, 우리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가족에게는 전통이 된 작은 묵상 기도 방법의 본질을 모두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의 실천에 관한 신비 박사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다시 체계화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사실 십자가의 요한에게, 모든 묵상은 영혼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관상에 이르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에, 그리고 그분과 나누는 사랑에 찬 대화에 마음을 모으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2). 정적(情的)인 묵상-마음에서 마음으로

 

순서에 따라 잘 설명하기 위해, 가르멜의 전통적 방법에서 보여 주는 묵상적 기도의 개요를 따르기로 하겠다. 거기서 묵상은 일곱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준비, 독서, 묵상, 대화, 감사, 봉헌, 청원이다. 마지막 세 가지는 자유이며, 처음 두 가지는 준비 단계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묵상과 내적 대화, 또는 대화라는 두 부분만 남게 되므로 복잡하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처음 두 가지 부분, 즉 준비와 독서는 묵상과 내적 대화를 잘할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준비시킨다. 마지막 세 가지 부분, 즉 감사, 봉헌, 청원은 하나님과 더 길게 대화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묵상 기도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독서와 준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묵상 기도가 결국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서 비롯되고 깊어지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과의 대화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런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한다. 독서는 합당한 제목을 선택해야 하는데, 묵상 책이나 좋아하는 영적 서적이나 전례서, 또는 섭리로 눈에 띄게 되는 구절이나 다른 모든 것이 묵상재료가 될 수 있다.

묵상 기도의 본질과 그것을 받쳐 주는 것이 곧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임을 알 때, 우리는 준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또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누구하고 친밀히 이야기하려면, 그가 내 앞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다운 대화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아주 큰소러로 말해야 한다면 정다움이 가셔 버릴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하기 원하는 영혼 역시 하나님을 자기 곁에 모셔야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랑이 넘치는 내적 대화로 끝나는 묵상 기도를위한 준비는, 하나님과 만나면서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다. 성삼위께서 우리의 동반자로 우리 안에 머무시며 당신들과 함께 지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서 그분을 찾든, 바로 그곳에 있어야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드러내신 가장 거룩한 수난을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기를 다짐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훌륭한 주해에서 주님께서 견디셨던 가혹한 채찍질 묘사를 읽었다면, 이제 묵상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며 자기 영혼 안에서 그분을 흠숭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참으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삼위 일체 중 둘째 위격이시고, 거룩한 세 위격 모두가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묵상기도를 잘 시작한 것이다. 키로가 신부는 십자가의 요한이 이것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가르쳤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 아빌라의 데레사의 경우와 같이, 추리야말로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과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시작하게 해 준다.

수난의 신비에 대한 추리나 성찰은 상상력으로 쉽게 재현해 볼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떻든 복음의 주해를 읽은 사람이라면 채찍질의 장면을 누구나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상을 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예수님의 그림을 손에 들고 보면서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그 신비를 '내적으로' 재현해 볼 수 있는 영혼이라면, 그렇게 재현해 보면 좋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말라는 것과 또한 정확하고 세부적인 상상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 무엇을 재현해 보든 간에, 그 상상을 고정시켜 추리를 쉽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곰곰이 생각(추리)해 보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시간을 더 쓸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육화되신 말씀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깊이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충분히 써야한다.

십자가의 요한도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구세주께서 매 맞으시던 참혹한 장면을 자주 상상해 본 것 같다. 두 사람이 다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묵상할 때 추리를 좀 더 쉽게 하도록 작은 질문지를 만들어서 권했던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그 질문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통 받으시는 분은 누구인가? 무엇으로 고통 받으시는가? 고통 받으시는가? 어떻게 고통 받으시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답들은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갖도록 이끄는 데 적합한 것이 다.

'고통 받으시는 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워 갚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삼위일체 중 둘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거룩한 말씀이시다.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시고‥‥ 저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딘"(신경)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나의 하나님이다.

'무엇으로 고통 받으시는가?' 로마인의 잔인한 매질, 납과 가죽으로 얽은 보기에도 소름 끼치는 채찍은 보드라운 살을 찢어 갈기갈기 상처 내고, 맞으실 때마다 늘어나는 수많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고 만다.

' 고통 받으시는가?' ' 성부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으며, 성자는 그것을 승낙하셨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 잔혹한 고통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어 구원과 성화의 길을 다시 찾아 주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다. 또한 우리도 주님을 위해 무언가 고통을 겪을수 있도록 하시려고 우리의 모범이 되어 주시고 인내의 본보기가 되신 것이다.

'어떻게 고통 받으시는가?' 죽기까지 고통 받으시면서도 끝내 침묵하셨으며, 매도 피하려고 하지 않으신 이 '가장 인내로운 어린양'을 보아라. 이런 고통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또한 아낌없는 헌신의 모범을 보여 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처럼 깊이 자각한 영혼은 자연히 사랑을 고백하게 되지 않겠는가? 자기도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고, 사랑에 사랑으로, 아낌없는 헌신에 아낌없는 헌신으로 보답하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맹세)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고뇌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주님께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 영혼은 주님께 말씀드려야만 한다! 이제 영혼은 주님과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이토록 저를 사랑하셨기에 저도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너무도 조금 밖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는 당신을 더욱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사랑에 저 자신을 바치고 싶습니다. 당신을 끊임없이 더욱 깊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 성심께 가는 길, 사랑에서 진보하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저는 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끓임 없이 진보하기를 바라며, 저의 사랑이 말로만 그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면서 저를 온전히 바쳐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영혼은 이런 사람의 표현을 아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영성 생활에서 아직도 감수성 이 큰 역할을 하면서 영혼에게 그런 특별한 색조를 띠게 하는 한, 그러한 표현을 자주 말로 표현하며, 또한 소리를 내어 말하게 된다.

그러나 영성 생활이 진보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제는 의지가 감수성을 더욱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비록 사랑이 민감한 마음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사랑의 표현 방법이 덜 충동적이고 덜 요란스럽게 되며, 자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대신 더욱 깊이를 지니게 된다. 그때 영혼은 사랑을 더욱 평온하게 표현하나 주님께 향하는 의지의 움직임은 훨씬 확고하고 진지해진다. 이제 영혼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그분을, 사람이 되신 말씀을 늘 주시하게 된다. 이때 영혼은 더 이상 깊이 지적 추리를 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면서 찾지도 않고, 그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미 '깨달았으므로', 이제는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시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직관적 눈길로 찾아낸 그 열매를 맛보며 음미하게 친다. 키로가 신부가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해설하듯, '영혼은 하나의 사랑의 행위 안에서 충실하게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짧은 순간이지만, 영혼은 일종의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하나님을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복잡함도 소란스련 행위도 없이, 매우 단순하게, 하지만 또한 진정한 깊이를 지니면서, 영혼은 고요한 그러나 강렬한 사랑의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열중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특히, 키로가 신부의 말처럼,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며, 영혼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영혼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게 빛을 주시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만물 위에 사랑받으셔야 마땅한 분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신다. 또한 영혼에게 사랑의 힘을 주시어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이처럼 의지가 충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대화, 즉 하나님의 온화하심에 눈길을 모음으로써 계속되는 내적 대화야말로,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묵상기도의 참된 목적이며 결과이다. 다음과 같은 십자가의 요한의 말로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갈멜의 산길2.14,2)

 

 

3). 실생활과의 결부

 

묵상 기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또 적어도 여기서 끝내서도 안된다. 기도가 영성 생활에서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려면, 일상생활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주어야한다. , 실생활에서 덕행과 극기를 꾸준하게 철저히 실천하는 좋은 습관을 기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이 우리를 재촉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게 되어 그분의 모범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도 철저한 포기를 통해 우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갈 것을 권한다.

그처럼 무섭게 매 맞으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해 더욱 큰 사랑을 느끼게 된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어 내신 그 인내, 그 철저한 헌신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동되어 '주님처럼 살려고 원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실제적으로 극기를 결심하도록 자극을 받는 순간이다. 묵상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실제적 결의를 다지고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묵상 기도의 둘째 부분은 반드시 이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 부분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언제나 똑같은 식으로 묵상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지금까지의 묵상 기도 중 여러 번 마음으로 다짐한 실제적 결의를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는 것으로 묵상을 마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묵상 중 거의 모든 시간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소망에서 주님과 사랑을 다하여 이야기하며 보낸 후, 기도 끝부분에는, 실제적인 결론을 내릴 생각으로 그 결심을 새롭게 하게 된다. 그런 다음 이 결심을 실현할 기회를 많이 만나게 될 일상의 일과로 돌아간다. 영혼이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말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알고, 주님과 사랑에 넘치는 대화를 쉽게 할 수 있게 되면,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순서로 묵상해도 아무 상관없다.

그렇지만 모든 영혼이 똑같은 자질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특히 초기에는 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과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기위해 멈추고 싶어 해야 한다면, 이내 게을러지거나 싫증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라고 거듭 되풀이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싫증내시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같은 말을 거듭하는 것에 싫증을 낸다. 여기에 영혼 측의 어려움이 있다. 계속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끔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몇 가지 있게 되면, 주님과 정답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더욱 쉽게 된다. 바로 이 점을 돕기 위해, 십자가의 요한이 인정한 데레사적 묵상 방법에서는 감사와 봉헌과 청원이라는 마지막 세 가지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계속 이야기하는 동안, 영혼은 또한 가장 아름다운 자극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극기를 더욱 열성껏 실천하고 싶어지고,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수난을 묵상하면서 얻게된 더욱 강렬한 사랑을 힘껏 실천하고 싶어진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사랑에서 우리나오는 말을 거듭 말씀드리고 나면, 영혼은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러한 사랑의 고백에 이어 저절로 감사의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예수님께 우리를 위해 그처럼 많은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신 것을 감사드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수단을 통해 얻어 주신 은총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게 된다. ,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영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살 수 있게 된 그 엄청난 행운을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이 은총에 관해서는,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감사드릴 수 있다. 여기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동된 고결한 영혼은 오랫동안기쁨에 잠길 수 있게 된다.

고결한 마음은 자신이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연히 무언가 바쳐야할 의무와 그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이때야말로 좋은 결심을 한다든가, 아니면 결심한 것들을 돌이켜 보며 잘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때이다. 막연히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는 흡족해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현재 생활에서 어떤 결심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영혼이 해야 할 실천은 참으로 엄청나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택하기 위해, 즉 온갖 집착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엄격한 힘든 고행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에서 떠나야 하며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야 하겠는가! 영혼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셨으며, 자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의 행복과 건강과 생명까지도 내 영혼을 위해 다 버리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포기하겠다는 용기가 솟구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 영혼은 자신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모든 일을 예수님과 성부님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장애물들을 모두 없애 버리기로 결심한다. , 하나님의 틀에 맞지 않는 즐거움, 지나치게 감각적인 만족에 대한 집착, 안락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데서 생기는 물건에 대한 애착, 다른 사람의 결점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이웃과 충돌하고 무례하게 굴고 불평하면서 종종 애덕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자애심을 없애기로 결심한다.

그는 말할 것이다. '이토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린 것들을 다 싫어하신다! 예수님 친히 완전한 포기의 표양을 보여 주셨는데, 내 영혼을 위해서 당하신 그 고통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예수님께 많은 사랑으로 보답하고 싶고, 나 자신의 성화를 위해 나를 버리고 예수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이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으며,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좋은 결심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결심들을 꾸준히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초자연적인 일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총 생활에 관한 문제이다. 영혼은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라고 가르쳐 주신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거룩한 삶에서 진보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 청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영혼은 주님의 문을 두드리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간청한다. 지난날의 나약함을, 유혹에 빠졌던 경우를 돌이켜보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6:13)라고 간청한다.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 청하지만, 애덕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청하도록 촉구한다. , 그가 돌봐야 할 영혼들을 위해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 죄인들, 임종 자들, 죽은 이들, 사제들, 조국, 교회를 위해서도 청한다. 하나님께 청할 것이 너무도 많다. 영혼은 자신이 주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에, 이제 사랑이 충만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께 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힘 있는 도우심을 확신하면서 깊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말씀드리게 된다.

 

 

4). 영혼의 관상적 시선-하나님을 바라보다

 

감사, 봉헌, 청원으로 이루어진 이 모든 사랑의 대화는 결국 실제적으로 사랑의 생활을 하도록 준비시켜, 영혼은 실생활에서 관대한 행위를 통해 사랑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대화는 묵상의 결과로 지니게 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눈길을 더욱 정겨워지게 한다. 또한 지금까지 묵상한 개념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진 지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나누는 육화하신 말씀과의 친밀한 대화를 한층 깊어지게 해 준다. 영혼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로 다짐하면서 그의 의지를 온 힘을 다해 그분께 향하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통해서, 영혼은 그에게 필요한 몇 가지 실제적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서 솟구치는 사랑에 힘입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결심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다. 한편, 더욱 너그러워지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해 준다. 이러한 노력은 마음속에 더더욱 사랑의 불을 당겨 주며, 계속 하나님의 벗으로 지내고 싶은 내밀한 소망을 마음 깊이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묵상 기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에 깊이 잠긴 영혼이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바라보며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묵상 기도에 이중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영혼은 마음속에서 주님께 말씀드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영혼에게 말씀하신다. 둘째는 철저한 포기를 통해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둘째 목적은 첫째 목적을 통해 도달하게 된다. 포기를 실천하기 위해 너그럽게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것 또한 더욱 굳세고 진지한 의지로 주님께 그의 사랑을 증명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묵상 기도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갈멜의 산길2.14,2)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를 마음모아 깊이 헤아려 봄으로써,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욱 사랑하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묵상 끝에 오게 되는,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영성적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자세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추리를 멈추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님께 향하는 단순한 사랑의 눈길에 그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의 묵상을 통해 그분의 선하심을 더욱더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묵상하는 것이 이미 익숙해진 영혼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하겠는데, 그때는 주님과 나누기 시작하는 내적 대화 역시 매우 고요하며, 많은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마음이나 의지의 단순한 움직임으로 점차 '주님의 사랑의 반려자'가 되는 것이다. 영혼은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비추어 주시며 당신께 가까이 끌어당기심으로써 이 소리 없는 사랑의 언어에 응답해 주신다.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이러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의 행위가 영혼을 관상에 이르도록 준비시켜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매번 조금씩 사랑의 눈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게 해 주기 때문이다. 좋은 묵상은 종종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하는 행복한 순간을 갖게 해 준다고 성인은 설명한다. 이러한 순간은 지나가 버리지만 반복되면서, 서서히 영혼 안에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습성이 생기게 한다. 따라서 영혼은 적어도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수준의 관상적 기다림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된다. 심리적으로 관상적 시선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앞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또한 주님의 중재가 필요하다. 사실주님께서 그 영혼을 만나러 오셔서 그의 갈망을 채워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전혀 예기치 않은 식으로, 즉 영혼 안에 위기를, 무미건조함이라는 괴로운 위기를 겪게 하시면서 그를 만나러 오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것을 살펴보겠다. 이제까지 영혼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몫을 하는지를 보았다. , '관상적' 묵상이라고 하는 사랑에 넘치는 묵상을 통해 영혼은 스스로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6. 묵상기도의 단계

 

 

묵상기도의 단계는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하는 관상기도의 네 단계 중 첫 단계이다. 여기서는 그 첫 단계를 옮긴다. 묵상기도에 대해서는 앞에서 본바와 같다. 앞에서 충분히 이해한 경우는 그냥 지나가도 좋다. 그러나 겸손한 이는 한 번 읽고 도움을 받기를 바랍니다. 글의 구조는 변경하여 제목을 붙이고, 이하 번호는 원문을 찾을 때 용이하도록 그대로 사용한다.

 

 

1) 단시간에 배우지 못 한다

 

왜 우리가 짧은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배우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 비유로써, 기도의 네 단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그 첫째 단계를 설명한다. 이 가르침은 초보자들과 기도에서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1. 그럼 이제 사랑의 종이 되기 시작하는 영혼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를 그처럼 극진히 사랑해 주시는 분을 이 기도의 길로 따르려고 결심할 때, 우리는 바로 사랑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높은 명예이므로, 나는 그 생각만 해도 특별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첫째 단계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한다면, 노예근성의 두려움은 즉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 내 영혼의 주님, 나의 보화이시여! 주님은 어째서, 한 영혼이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심하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더욱 헌신하고자 모든 것을 떠나 힘껏 노력할 때, 그가 즉시 이 완전한 사랑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왜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느냐고 불평해야 옳았습니다. 우리가 즉시 그처럼 드높은 품위를 누리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완전히 차지하게되면, 이 사랑과 더불어 온갖 축복을 다 받게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데 몹시 인색하고 더딥니다. 그래서 그처럼 귀중한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존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그런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 귀중한 은총을 주려 하지 않으십니다.

 

2. 나는 그처럼 귀한 축복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살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고, 모든 관심과 대화를 천상적인 것에 두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면, 우리도 곧 이런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몇몇 성인들이 그랬듯, 우리 자신을 짧은 기간에 완전히 준비시킨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것은 땅에서 얻은 소득이나 수확물이고, 땅의 전자산과 소유권은 여전히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되기로 결심했고, 이런 결심은 큰 공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잘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것까지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려고, 다시 신경 쓰며 계획하고 그런 것을 대 줄만한 친구들을 사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많은 고심을 하며, 이전에 우리의 재산을 소유했을 때보다 더 큰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아마 우리는 수녀가 되었을 때나 이미 영성적 생활을 하며 완덕의 길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온갖 생각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존감이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그것을 이미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것을 되찾으려고 애쓰는데, 말하자면 하나님 손에서 그것을 억지로 빼앗으려 드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분을 우리 의지의 주님으로 모셔 놓고서 말입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일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3. 이처럼 그럴듯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하다니요! 우리는 흔히 말하듯, 두 손 가득 받기를 기대하면서도 우리 자신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실현해 보려고 애쓰지도 않고, 지상의 모든 것에서 초연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많은 영적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모순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이 보화를 한꺼번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 방울씩이라도 좋으니,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보화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받기 위해저 이 세상의 온갖 시련을 대가로 치러야 해도 좋습니다.

 

4. 그 같은 보화를 얻기 위해 힘껏 노력하기로 결심할 수 있도록 어떤 영혼에게 은총과 용기를 주실 때, 주님께서 그에게 참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께서는 참고 견디는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혼에게는 승리를 거둘 때까지 서서히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내가 '용기'라고 말하는 것은, 악마는 처음부터 영혼이 이 길로 떠나는 것을 막으려고 그 길에 수많은 장애물을 쌓아 놓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것을 통해 자기가 어떤 피해를 입게 될지, 한 영혼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영혼들을 잃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보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완덕의 정상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면, 그들은 결코 혼자서 천국에 가지 않고 늘 많은 사람을 함께 데려간다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훌륭한 지휘관처럼 대우하셔서 함께 동행할 많은 군사를 주실 것입니다. 악마는 영혼 앞에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쌓아 놓을 테니까, 돌아서지 않으려면 작은 용기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며 하나님께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5. 나는 이제 그 보화를 추구하고 이 계획을 이루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초기에 겪는 경험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신비 신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영혼은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주님께서 더 많은 도움을 주시기는 하지만 노력해야 하는 것은 초보자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다른 단계에 이르면 기쁨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초기 단계에 있든 중간 단계에 있든 마지막 단계에 있든, 각기 십자가는 다르다하더라도 모두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영혼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그분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는 이승에서부터 그처럼 넘치도록 보상을 받으니 참으로 복됩니다!

 

6. 나는 몇 가지 비유를 사용해야겠습니다. 나는 여자인 데다 그분들이 나에게 쓰라고 명하신 것만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피하고 싶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성적인 문제들을 표현하는 것은 나처럼 학식이 없는 사람한테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찾아보아야겠습니다. 내가 비유를 합당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을 테니, 신부님은 어리석은 내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 하시겠지요. 지금 생각하니, 나는 이 비교를 어디서 읽었거나 들은 것 같습니다. 기억력이 나빠서 어디에 있는 무엇에 관한 비유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내 생각을 설명하는 데는 꼭 맞는 것 같습니다.

초보자는 자신을 잡초 투성이 불모지에 주님께서 즐기실 수 있도록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존하신 주님께서 잡초를 뽑으시고 대신 좋은 화초들을 심어 주실 것입니다. 영혼이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런 일이 다 이루어졌다고 믿읍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정원사들처럼 이 화초들이 잘 자라도록 정성스럽게 물을 주어서 시들지 많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향기를 뿜는 꽃을 피워서 주님을 상쾌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종종 이 정원에 즐기러 오셔서 이런 덕행들 속에서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7. 이제, 이 정원에 어떻게 물을 주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수고를 해야 할지, 노고에 비해 결실이 더 많을지, 얼마나 오랫동안 수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정원은 네 가지 다른 방법으로 물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게 되면, 이때 우리는 수고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르래와 두레박으로 물을 긷게 되면, 이때는 윈치(winch, 밧줄이나 쇠사슬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기계-옮긴이 주)를 사용하게 됩니다. 나는 가끔 이 방식으로 물을 길었는데, 다른 방법보다 힘이 덜 들고 물을 더 많이 길을 수 있었습니다. 또는 강이나 개울에서 물을 끌어 델 수도 있는데, 이 방법으로 하면 땅에 물을 훨씬 더 잘 줄 수 있습니다. 땅이 흡뻑 젖기 때문에 물을 자주 줄 절요가 없으니 정원사의 수고가 훨씬 덜어집니다. 한편, 비가 많이 와서 물을 주게 되면, 그때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정원에 물을 주신 것이 됩니다. 이는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다른 방법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8. 이제, 이 정원이 살아 있도록 물을 주는 이런 네 가지 방법을 적용해보겠습니다. 물을 안 주면 죽을 테니까요. 이 비유는 주님께서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이따금 내 영혼을 드높여 주신 기도의 네 단계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줄 것 같습니다. 또한 이것을 쓰라고 명한 분들 중 한 분에게 조금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내가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단 4개월 만에, 내가 17년이 걸려서 다다른 곳보다 훨씬 드높은 곳에 올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보다 자신을 더 잘 준비했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이 모든 네 가지 방법으로 자기 정원에 물을 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방식으로는 아직 한 방울씩만 받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나 빨리 진보하고 있으니,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정원은 곧 물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보기에 내가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터무니없게 여겨지면 웃어도 좋습니다.

 

9. 기도의 초보자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방법은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각을 거두어들이다 지쳐 버릴 것입니다. 이제껏 산만한 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이렇게 잠심을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니까요. 초보자는 보거나 듣는 것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데 익숙해져야 하며, 기도 중에 이렇게 되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지난날의 자기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정념, 초보자든 진보한 사람이든 자주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처음에 초보자들은 괴로워하게 되는데, 자신의 죄를 제대로 참회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기로 그렇듯 진정으로 결심했으니, 참회한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 일은 지성을 지치게 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진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지요. 누구나 다 알듯이, 그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한 가지의 좋은 생각도 할 수 없으니까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물을 찾게 해 주시길 바람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물을 긷는 것이며, 이 꽃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인자하셔서, 엄위하신 주님만이 아시는 이유로-어쩌면 우리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우물을 마르게 하십니다. 우리는 좋은 정원사들처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물이 없어도 꽃들이 살아 있게 하시고, 우리의 덕이 자라나게 해 주십니다. 여기서 ''이란 곧 "눈물"을 뜻합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경우에는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 내적인 경건한 열정을 가리킵니다.

 

10. 하지만 여러 날 동안 계속 메마름, 반감, 싫증만 경험하고 물을 길러가고픈 마음이 조금밖에 생기지 않을 때 그 영혼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자기가 그 정원의 주님을 섬기고 있으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의 모든 봉사가 헛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즉 두레박을 그처럼 자주 우물 속으로 내려 보내도 빈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엄청나게 힘든 일에서 뭔가 얻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때때로 이 일을 하려는데 팔도 움직일 수 없는 경우가, 즉 좋은 생각을 단 하나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린다는 것은 물론 지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말하니까요.

그럼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제 그 정원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그처럼 위대하신 임금님의 정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낙으로 삼으면서, 이것을 가장 큰 은총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는 이 일로 임금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임금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처럼 믿어 주셨으니, 그분을 높이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금님은 그가 아무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맡은 일을 그처럼 정성껏 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도와드리고, 그분께서 일생 동안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사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가 지상에서 자신의 왕국을 갖기를 바라지 않도록 하고, 결코 기도를 멈추지 않게 하십시오. 비록 이런 메마름이 일생 동안 지속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밑에 넘어지시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주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단번에 갚아 주실 때가 올 것입니다. 모든 노고가 헛일이 될까 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자기에게 눈길을 두고 계시는 착한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생각에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도록 하십시오. 악마가 사막에서 예로니모 성인에게도 그런 나쁜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11. 그런 수고는 보답을 받기 마련입니다. 나도 이런 고통을 여러 해 동안 견뎠습니다. 이 축복받은 우물에서 물을 한 방울이라도 길어 올릴 수 있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호의를 베풀고 계시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 시련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고생은 세상의 다른 많은 고생보다 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그 노고를 높이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확실히 그런 시간들 가운데 주님께서 당신을 맛보게 해 주신 단 한 시간만으로도, 내가 오랫동안 계속 기도하면서 견딘 그 모든 고생을 나중에 다 보상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초기에 그리고 다시 나중에도, 우리가 이런 고뇌와 많은 다른 유혹을 겪게 하십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훌륭한 보물들을 맡기기 전에 그들을 시험하셔서, 과연 그들이 그 잔을 마실 수 있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엄위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이 길로 이끄셔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중에 주시는 은총은 지극히 고귀한 것인 만큼, 주님께서는 그 은총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달아, 적어도 루시퍼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12. 나의 주님, 주님께서는 그 영혼이 이미 당신의 것임을 아십니다. 또한 그가 주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따르고자 자선을 당신 손에 맡기고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도와드리며 홀로 십자가 지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 그 영혼에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이런 결심을 한 것을 발견한 영혼은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성적인 영혼들이여, 당신들은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원하며, 세상의 기분 풀이를 단념하고자 하는 이처럼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렀으니 가장 힘든 일은 다 한셈입니다. 이 은총에 대해 엄위하신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그분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십니다. '왜 그 사람에게는 불과 며칠 만에 경건한 신심을 주시고, 나는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주시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거든 무시하십시오. 모두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믿읍시다. 엄위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이끄시게 합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정원을 갈아 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셔서 그 정원의 주인이신 주님 결에 머물게 하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크나큰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 우리 곁에 계시니까요. 어떤 영혼들에게는 이런 식물과 꽃들을 이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을 주어 자라게 하시고, 다른 영혼들에게는 그 물 없이 자라도록 바라신다고 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주님! 당신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내가 주님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오로지 주님의 자비로 내가 덕을 좀 지니게 되었다면, 그 덕들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고통을 당하셨으니 나도 고통당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이 모든 면에서 내 안에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엄위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처럼 너무도 귀중한 은총을, 오직 위안만 받으려고 당신을 섬기는 영혼들에게는 결코 주지 마십시오.

 

13. 이것은 특별히 주시해야 하는데,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굳게 결심하고 이 묵상 기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이런 기쁨이나 감미로운 열정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께서 그런 것을 주셨다고 기뻐하거나 주시지 않았다고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그 영혼은 이 여정의 상당한 부분을 이미 걸어온 것입니다. 아무리 자주 넘어지더라도, 되돌아가게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쌓아 올린 건물은 애초부터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란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위안을 얻는 기쁨이나 감미로운 열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이 의롭고 굳건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내 생각에 그렇지 않은 경우는, 우리 쪽에서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드린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14. 나처럼 나약하고 용기라곤 없는 가엾은 여인을 위해서는,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어 주셔야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를 이 방식으로 이끌어 주시면서, 당신이 나에게 보내 준 시련들을 참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종들로서 학식과 높은 지성을 갖춘 영향력 있는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경건한 신심을 주시지 않는다고 그렇게 안달복달하는 것을 들으면 불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은총을 주실 때,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엄위하신 주님께서는 그때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받지 못했을 때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엄위하신 주님께서 그것을 주시지 않으니,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임을 믿게 하십시오. 나는 이것을 경험했고 깨달았습니다. 정신의 자유를 누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용기가 없어 주춤거리는 것은, 자신들이 불완전하다는 표시임을 깨닫게 하십시오.

 

15. 나는 이 말을 초보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보자들이 이런 자유와 결단을 지니고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작한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

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로 처음부터 십자가를 끌어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며 진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성이 일하기를 멈추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도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해도, 의지가 더 튼튼해지고 새 힘을 얻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잘못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엄위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비참함과 본성의 나약함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이 영혼들이 언제나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결단입니다. 우리가 자초하는 다른 괴로움은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전에는 1시간동안 기도하면서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면, 이제는 4시간 동안 기도해도 그럴 것입니다. 나는 이에 관한 경험이 상당히 많습니다. 나는 이 일을 신중하게 관찰한 다음 영성적인 분들과 의논했기 때문에,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자주 신체적 불편함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비참한 존재라서 육신에 갇혀 있는 이 가여운 영혼은 육신의 비참함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와 기분의 변화 때문에, 영혼은 자기 탓이 아닌데도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갖은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때 자신을 억지로 강요하면 할수록 상태가 더 나빠지고 문제가 더 오래 지속됩니다. 만일 이런 신체적인 불편함이 원인일 때는 신중하게 분별해서 가여운 영혼이 숨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 시간을 좀 바뀌야 합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귀양살이를 되도록 잘 견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이런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보며, 육체라는 한심한 손님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너무도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자주, 이런 무능함은 몸의 무질서에서 오는 것입니다.

 

16. 내가 신중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때로는 악마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몹시 산만해지고 불안할 때 기도를 언제나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앓기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들며 괴롭히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애덕 활동이나 영적 독서 같은 다른 외적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이런 일조차 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몸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경우에, 몸이 영혼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대화를 하며 영성적인 기분 풀이를 좀 하십시오. 정말로 영성적인 대화라야 합니다. 또는 시골길을 산책하십시오. 이런 모든 일에 있어서 경험이 중요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적합한지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분의 멍에는 감미롭습니다.(11:30)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영혼을 억지로 끌고 가지 말고 부드럽게 인도해서 영혼이 더 크게 진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17. 그래서 내 충고를 되풀이하겠습니다. 이 충고는 아무리 자주 되풀이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니까요. 그 누구도 마음의 메마름이나 불안함이나 산만함 때문에 결코 슬퍼하거나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영성적 자유를 얻고 늘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도록 도와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기쁘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것에서 얻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만일 그 우물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거기다 물을 부어 넣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도 태만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물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는 언제나 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통해, 우리의 덕이 더욱 많아지게 해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

 

 

계속 설명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외적이며 초자연적인 경험의 은혜를 주시기 전에, 영혼이 그런 경험을 하고자 할 때 생기는 피해에 대해 설명한다.

 

 

1. 앞 장에서는 옆길로 벗나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 또한 신심 생활의 초보적 단계에서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신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는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성찰에서 비롯되는 슬픔과 눈물은 감미롭습니다. 그때 우리가 소망하는 그 영광,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기쁨을 느끼게 되는데, 그 기쁨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도 아니고 감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고결한 기쁨이며 그 슬픔 또한 큰 공덕이 됩니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지성을 통해 얻게 되는, 경건한 열정이 생기게 하는 그 모든 것은 다 공덕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받을 자격도 없고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태보다 더 높이 올려 주시지 않는 영혼은 자신의 노력으로 더 높이 오르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잘 새겨 두십시오. 그런 노력을 하게 되면 그 영혼은 진보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될 뿐이니까요.

 

2. 이러한 상태에서 영혼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기로 결심하며, 자신의 사랑을 일우기 위해 많은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술이라는 책에서 설명한 대로, 그러한 덕을 닦아 나가는 데 도움이 될 다른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런 단계에 있는 영혼들에게 매우 좋고 적합한 책인데, 이때는 지성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그리스도 앞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그려 볼 수도 있고, 그분의 거룩한 인성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자신이 타오르게 되는 것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은 늘 그분 결에 머물고, 그분과 이야기하며, 그분께 필요한 것을 청하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즐거울 때는 그분과 함께 기뻐하면서도, 결코 그런 기쁨 때문에 그분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합니다. 일정한 기도문을 생각해 낼 필요 없이, 그냥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것을 청하는 데 합당한 말을 사용하면 됩니다.

이는 탁월한 방법으로, 매우 짧은 기간에 진보할 수 있게 합니다. 이 고귀한 동반자를 늘 자기 마음에 모시려고 노력하며 거기서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그처럼 많은 은혜를 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정말 배우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진보한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경건한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노력이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신 것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속에 모셔 오는 방법은 모든 단계에서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 진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빨리 둘째 단계에 이르게 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악마가 우리를 빠지게 할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4. 그런데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 단계를 넘어가고 싶어서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영성적 위로를 경험하고자 그의 정신을 들어 올리려고 애쓴다면, 그는 이것도 저것도 다 잃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성이 작용하지 않으면 영혼은 황폐해져서 대단히 무미건조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건물은 전부 겸손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 덕도 점점 자라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잃고 말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더 높이 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가까이 이끌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과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니까요.

내가 여기서 천국이나 하나님에 관한 숭고한 것, 하늘에 있는 놀라운 일들이나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를 생각해 보는 데까지 우리의 생각을 높이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나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요. 내가 너무도 못난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상의 일들을 생각해야 할 때조차 그렇게 할 용기가 조금도 없다는 이 진리를 깨닫도록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의 일들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용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분들은, 특히 학식 있는 분들은 이런 방법으로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학문은, 거기에 겸손이 따를 경우에는, 이 수업을 위해 더없이 귀중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나는 학식 있는 몇 분들의 경우에서 이 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분들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많은 진보를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학식 있는 분들이 더 많이 영성적인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5.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높여 주시지 않는 한,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영성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만일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설명하기 시작한 신비 신학에서는, 지성은 작용을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지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나를 도와주신다면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 작용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지성을 사용해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도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우리가 어리석고 냉담한 상태로 머물게 되어,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지성의 작용을 멈추게 하실 때는, 그분 친히 지성이 감탄하며 사로잡혀 있게 될 어떤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지성은 추론하지도 않으면서 사도신경 한 번 외울 사이에, 우리가 몇 년 동안 온갖 인간적인 노력을 다해서 이해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영혼의 능력들이 부지런히 작용하게 만들려 하고, 그 능력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는데, 이 사실을 잘 깨닫고 있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노력은 그렇게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허사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영혼은 뛰어 오르려고 하는데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는 사람처럼 어느 정도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힘껏 노력한 것 같은데 기대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영혼이 얻은 바가 적은 것을 보면서, 내가 말한 대로 겸손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겸손은 탁월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할 때 겸손이 따르면 영혼이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내가 이 점을 명확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나 자신에게만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것을 경험하게 해 주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즉시 이해할 것입니다.

 

6. 나는 여러 해 동안 많은 것을 읽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쳐 주셨지만, 나는 그분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엄위하신 주님께서는 원하시면, 내가 경탄할 만한 방법으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으십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많은 영성적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들은 주님께서 나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을 설명해 주면서 내가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어리석어서, 그분들의 설명에서 조금도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엄위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나의 스승이셨기에-주님은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이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정말 부끄럽습니다-내가 그분 외에는 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나는 바라거나 청하지도 않았는데-그런 것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했더라면 덕이 되었을 텐데 헛된 것에만 호기심이 있었습니다-하나님께서 한순간에 그 모든 것에 대해 완전하게 알아듣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고해 사제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분들보다 내가 더 놀랐습니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그분들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일이 바로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양심에 걸리는 일이 아년 이상, 주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은 것을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7. 다시 한 번 충고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영을 들어 올려 주시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 들어 올리려고 애써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경우에는 우리가 즉시 알게 됩니다. 그런 시도는 여성들에게 특히 해롭습니다. 악마가 어떤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겸손하게 당신께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영혼에게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게 하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영혼은 악마가 그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경험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이득을 보고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길게 다루었습니다. 이 길은 초보자들이 가장 많이 걷는 길이며, 내가 말한 그 충고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다른 분들이 다른 데서 훨씬 잘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또한 이것을 쓰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더더욱 그렇게 느꼈어야 옳았지만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나 같은 존재가 주님에 대해서, 그처럼 위대하고 숭고한 일에 관해서 말하기를 바라고 동의하셨으니 찬미받으소서

 

 

 

 

 

 

3) 악마의 유혹에 관한 충고

 

 

계속 설명하면서, 악마가 때때로 일으키는 몇 가지 유혹에 관해 충고한다. 이 장은 매우 도움이 된다.

 

 

1. 여기서 나는 초보자들이 당하는 어떤 유혹들에 관해 이야기하고-나도 그런 유혹들을 더러 당했습니다-그 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에 대해 몇 가지 충고를 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기 단계에는 긴장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시만 마음을 놓아도 열심한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많든 적든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죄짓는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덕을 지녀 완전해질 때까지 이런 두려움은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만의 성향을 유혹하는 상황에 놓일 때 조심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살아 있는 동안 겸손을 지니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비천한 천성을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많은 경우에 레크리에이션을 허락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욱 힘차게 다시 기도하러 갈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매사에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2. 우리는 확고한 신뢰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좋은 소망들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노력한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많은 성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도달한 높은 곳에 이르게 될 테니까요. 만일 그분들이 이런 소암을 이루기로 결심한 적이 없었다면, 이 결심을 서서히 실천에 옮기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처럼 높은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엄위하신 주님께서는 용감한 영혼들을 찾으시고 사람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은 겸손하게 자기 길을 걸으며, 자기 자신을 조금도 믿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이런 영혼들 충 어느 누구도 이 길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겸손이라는 구실 아래 소심한 영혼이 여러 해에 걸쳐서, 용감한 영혼이 단시일에 많이 진보한 것만큼 진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위대한 일을 해 보려는 용기를 가진 영혼이 얼마나 큰일들을 이를 수 있는지를 보먼서, 나는 감탄합니다. 비록 그 영혼이 즉시 그런 일들을 성취할 힘은 없겠지만, 한번 하늘로 날아오르면 상당히 높이 오를 수 있습니다. 아직 날개가 약한 새끼 새처럼 금방 지쳐서 멈추지만 말입니다.

 

3. 한때 나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종종 생각하곤 했습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 나에게 명하시는 바를 주시옵소서. 원하시는 바를 명하소서."라는 성 어거스틴의 말씀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도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겁이 나긴 했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가끔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런 첫 결심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초기 단계에서는 주저하면서 나아가야 하고 지도자의 분별력과 충고에 의존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지도자가 우리를 두꺼비처럼 되도록 가르치거나, 영혼이 작은 도마뱀이나 잡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스승은 아닌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겸손을 앞장세워서, 이런 힘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가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4.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어떤 종류의 겸손이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악마가 기도를 실천하는 영혼들에게 겸손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며 많은 해를 끼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위대한 소망을 갖고 성인들을 닮고 싶어 하며 순교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 악마는, 죄인들은 성인들의 행동에 감탄해도 되지만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거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나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들의 행동에서 어떤 것에 감탄해야 하며,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허약하고 병든 사람이 단식을 많이 하고 심한 보속을 하거나, 잠도 잘 수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가거나, 그런 종류의 다른 일들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일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매우 경별하고, 명예를 가볍게 여기며, 재산에 집착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매우 인색해서, 우리가 육신을 한순간이라도 돌보지 않고 영혼에 마음을 쓰면 땅이 꺼져 버릴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근심이나 걱정은 기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히 갖고 있으면 마음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그런 일들에 방해받을 정도로 하나님을 조금밖에 신뢰하지 못하고 자애심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슬퍼집니다. 사실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밖에 진보하지 못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크고 중대한 일들로 힘들어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하찮은 일들로 힘들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우리 자신이 영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5.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안식을 잃지 않고 저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육신과 영혼을 화해시키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의롭게 살아가고 덕에 굳게 의존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암닭의 걸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방식은 결코 정신의 자유를 누리게 해 주지 못합니다. 이런 길은 결혼이라는 소명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생활양식에서 나는 결코 그런 방식의 진보를 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아무도 나를 설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도 그 방식으로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다른 지름길을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 방식으로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6. 이런 소망에 관해서 나는 늘 포부가 켰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나도 기도하려고 노력했지만 하고 싶은 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만일 더 높이 날도록 나를 격려해 주는 분이 있었더라면, 그분은 내가 그런 소망들을 실현할 수 있는 단계로 이끌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문제를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게 다루지 않는 영적 지도자가 너무 적고, 너무나 귀합니다. 바로 그것이 초보자들이 더 빨리 높은 완덕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므로, 그것은 주님의 탓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잘못이고, 우리가 비참한 존재인 것입니다.

 

7. 또한 우리는 성인들을 본받아 고독과 침묵을 찾으려 애쓰고, 이 불쌍한 육신을 죽이지 않을 다른 많은 덕들을 닦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늘 모든 것을 편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영혼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맙니다. 악마도 우리의 육신이 아무 노력도 못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며 협조합니다. 악마는 영혼에게서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는 기미를 엿보는 즉시, 이런 모든 노력은 우리를 죽게 만들거나 건강을 해칠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 이러다 장님이 되고 말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잘 알고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이유로 시력과 건강을 잃는 것보다 더 좋은 시력과 건강을 갖게 되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매우 병약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나 건강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늘 거기에 얽매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악마의 이런 농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건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악마가 말할 때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대합하곤 했습니다. 또한 악마가 "좀 쉬어야지!"라고 하면 "나는 휴식은 필요 없다. 내가 필요한 것은 십자가다."라고 답했습니다. 또 다른 생각들이 들어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사실 건강이 매우 나쁘긴 했지만, 대부분 그런 걱정들은 악마의 유혹이거나 나 자신의 나약함에서 생긴 유혹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편안함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부터 건강이 훨씬 좋아졌으니까요.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 자신의 생각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를 믿어도 좋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잘못에 대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경고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8. 또 다른 유혹은 매우 흔한 것으로 영혼이 고요와 기도의 열매를 즐기기 시작할 때,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매우 영성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바라는 것이 질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소망을 이루고자 노력할 때,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인상을 조금도 갖지 않게 하면서 매우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점에서 뭔가 도움이 되려는 사람은 굳건한 덕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혹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도록 도와주려고 애썼을 때, 그들이 한편으로는 내가 기도함으로써 얻게 되는 많은 놀라운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기도하면서도 그처럼 덕이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유혹에 빠트렸고 어리석은 행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결국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정말로 나쁜 일을 나쁘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좋게 생각하던 시기에, 내가 가끔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9. 이것은 악마가 한 짓입니다. 악마는 그가 계획하고 있는 악을 시인하게 만들 목적으로, 우리가 지닌 좋은 덕들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악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도 공동체 안에서 행해질 때. 악마에게는 분명 대단한 이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처럼 큰 잘못을 범했을 때 그가 얼마나 큰 이득을 보았겠습니까! 따라서 여러 해 동안, 단 세 사람만이 내가 그들에게 해 준 말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께서 내가 덕을 실천하며 더 강해지도록 해 주셨을 때는 2-3년 사이에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또한 그런 잘못은 영혼이 또 다른 큰 손해를 보게 만듭니다. 즉 자기영혼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음에 가장 힘껏 노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영혼을 돌보는 것이며, 온 세상에 하나님과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됩니다.

 

10. 우리가 알아차려야 하고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덕에 대한 열의를 지니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을 볼 때 괴로워하게 됩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이런 고통은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분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걱정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즉시 그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그 일은 너무도 걱정이 되어 기도를 방해합니다. 가장 해로운 것은 우리가 이것을 덕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완덕에 이른 표시요 하나님에 대한 큰 열의를 지닌 표시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수도회에서 습관이 되어 버린 공공연한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나 이단들이 수많은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처럼, 성교회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로 슬퍼하는 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영혼을 위해 가장 안전한 길은 아무것에도, 누구에 대해서도 걱정하기를 그만두고 자기 자신을 돌보며 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좋은 지향을 믿기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들을 보았는데,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덕과 좋은 자질을 발견하도록 노력하고, 우리 자신의 큰 죄들이 늘 눈앞을 가려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하나도 볼 수 없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을 담장 완벽하게 실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런 노력은 우리가 한 가지 큰 덕을 지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낫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총으로-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언제나 펼요합니다. 그 은총이 없으면 우리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진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덕을 지니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히나님께서는 힘껏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의 청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11. 이 충고는 또한 지성을 사용해서 많은 추리를 하며, 하나의 주제에서 많은 생각과 개념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나도 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다른 충고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해야 할 일과 빛을 주실 때까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지성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추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로 다시 돌아갑시다. 나는 그들에게 기도 시간 내내 이런 방식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 방법은 매우 공로가 되기는 하지만, 그들은 기도가 감미롭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하는 주일 같은 시간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낭비는 큰 이익인 것 같습니다.

내가 제안했듯이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있다고 상상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지성을 지치게 만들지 않으면서 주님과 이야기하고 함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 드릴 말씀을 길게 준비하느라 지쳐 버리지 말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앞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셔도 되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떤 때는 이런 것을, 다른 때는 저런 것을 택해서 영혼이 늘 같은 양식을 먹기 때문에 싫증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런 양식은 매우 맛있고 자양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일단 맛을 들이게 되면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풍부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다른 많은 도움을 받게 해 줍니다.

 

12. 좀 더 잘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도에 관한 이런 문제들은 모두 어렵고, 지도자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라고 명하신 분은 머리가 좋으니까 암시만 해도 충분하겠지만 나는 너무도 어리석어서, 이처럼 제대로 잘 설명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을 몇 마디로 이해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해서 책만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없습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어떤 일을 이해하는 것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이야기하던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수난에 관한 장면 하나를 묵상하기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기둥에 매여 계셨을 때를 묵상한다고 합시다. 지성은 엄위하신 주님께서 홀로 당하셨을 기막힌 고통과 번민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 원인들을 찾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성이 활동적인 경우에는, 여기에서 다른 많은 것들을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만일 학식 있는 분이라면 참으로 더 많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시작해서, 계속하고, 끝마쳐야 할 기도방법입니다. 주님께서 영혼을 다른 초자연적인 길로 이끌어 주시기 전까지는, 이 방법이 가장 뛰어나고 안전한 길입니다.

 

13. 내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많은 영혼들은 거룩한 수난에 관한 묵상보다는 다른 묵상을 통해 더 큰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많은 거처가 있듯 거기에 이르는 길도 많을 데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하면 슬퍼지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묵상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수난에 관해 늘 생각하면 지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피조물 안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생각하고, 모든 것 안에서 볼 수 있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리스도의 수난과 생애에 대해서도 자주 묵상해야합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에게 모든 선이 왔으며, 또 오게 될 것이니까요.

 

14. 초보자는 무엇이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지도자가 꼭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지도자는 경험이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실수를 하게 되며, 그 영혼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인도하거나 영혼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큰 공덕임을 알기 때문에, 영혼은 그가 명하는 것 이외에는 감히 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경험이 없는 지도자들 때문에 답답해하고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정말 가여웠습니다. 한 영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랐습니다. 영성적인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괴롭히며 진보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영혼은 자신의 지도자 때문에 8년 동안이나 속박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지도자는 영혼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더 나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이미 고요의 기도에 이르도록 드높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여인은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15. 그러나 이런 자각의 길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여정에서 아무리 거인이라 해도 가끔 다시 젖먹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영혼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가끔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드높은 기도의 단계란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의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기도의 길을 걸으면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나오더라도 다른 모든 음식과 함께 반드시 먹어야 하는 빵이기 때문입니다. 이 빵 없이는 자양분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알맞게 먹어야 합니다. 일단, 어떤 영혼이 자기는 이제 기운이 다 빠져 버렸음을 발견하고 자신 안에 좋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데, 또한 그처럼 위대하신 임금님 앞에서 부끄럽게 느끼면서 그분께 받은 모든 은혜를 참으로 조금밖에 갚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아는 법을 배우기 위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앞에 놓아 주신 다른 음식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옆으로 밀어 놓아야 할 이유가 없숨니다. 엄위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양식이 적합한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6. 그러므로 지도자가 신중하고, 즉 건전한 분별력을 지니고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기다가 학식이 많은 분이라면 더욱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 자질을 모두 갖춘 분을 찾을 수 없다면, 먼저 말씀드린 두 가지 자질이 더욱 중요합니다. 학식이 많은 분들은 우리가 조언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언제든지 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학식있는 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런 분들의 학식은 초보자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초보자들이 학식 있는 분들에게 조언을 구해선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진리 안에서 걷기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식은 위대한 것입니다. 학식 있는 분들은 조금밖에 모르는 우리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깨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신심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옵소서!

 

17.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너무 여러 가지 일에 참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나는 말을 많이 늘어놓지 않고서는 내 생각을 설명할 수 없는 단점을 늘 지녀 왔습니다. 어떤 수녀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만일 지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망상을 갖고, 그 수녀에게 장상보다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편이 더 낫다고 설명한다고 합시다. 그는 이런 말을 아무 악의도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서 할 것입니다. 사실 그가 수도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그런 충고가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결혼한 부인을 지도한다면, 그 부인이 집에서 일해야 할 시간에 남편이 못마땅해 하더라도 기도하는 편이 더 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그 부인에게 시간과 일을 잘 조정해서, 모든 일을 순리에 맞게할 수 있도록 충고할 수 없습니다. 그는 빛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싶어 하더라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에는 학식이 필요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의견은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모든 그리스도인은 할 수만 있다면 학식 있는 분에게 지도를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더 많이 배운 분일수록 좋습니다. 기도의 길을 걷는 영혼들에게는 이런 학식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성적인 영혼일수록 그것이 더더욱 필요하게 됩니다.

 

18. 기도를 하지 않는 학자는 기도하는 영혼들을 지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잘못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나는 많은 학자들에게 조언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그런 분들의 도움이 더욱 필요했기 때문에 자주 그분들을 찾았습니다. 나는 늘 그런 분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어떤분들은 기도에 대한 경험은 없었지만 그 영성을 싫어하거나 거기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거기서 언제나 좋은 영성에 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만일 기도를 하는 영혼이 학식 있는 분의 조언을 청한다면, 그는 결코 악마의 환상에 속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스스로 속기를 원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악마들은 겸손과 덕을 갖춘 학식 있는 분들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그분들이 자기들을 찾아내서 쳐부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9.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어떤 사람들은 학식 있는 분들이 영성적이지 않은 경우에는 기도하는 영혼들을 지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성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학식 있는 분이 아닌 경우에는, 그것이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만일 학자로서 덕을 갖춘 분이라면, 그런 분의 의견을 듣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영성적인 일들에 대해 아무 경험이 없더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야할 것을 알려 주시고, 우리를 계속 도와줄 수 있도록 영성적 체험까지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경험하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두 사람의 경우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말한 분들 같은 지도자를 찾지 못하는 경우, 어떤 사람이 오직 한 지도자에게만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것은 큰 잘못이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수도자라면 그의 장상에게도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지도자에게 이런 세 가지 자질(건전한 분별력, 경험, 학식) 모두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식별력이 부족한 지도자에게 순종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영혼의 경우, 그 영혼에게 그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결코 이런 식으로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은 옮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세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순종하게 될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으니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처럼 정당한 자유를 포기하지 않게 하십시오. 합당한 지도자를 찾을 때까지, 차라리 지도자 없이 지내게 하십시오. 그가 참으로 겸손한 영혼이고 가장 올바른 지도자를 만나기를 열망한다면, 주님께서 그런 지도자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미합니다. 우리 여성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끝없이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그처럼 많은 노력을 해서 우리 같은 무식한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진리를 터득한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0. 나는 학식 있는분들에게, 특히 수도자들에게 때때로 감탄합니다. 그분들은 그처럼 많은 수고를 해서 얻은 지식으로 나를 도와주구 나는 그저 질문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혜택을 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기를 빕니다. 나는 이처럼 학식 있는 분들이 수도 생활의 매우 힘든 시련을, 즉 보속과 보잘것없는 음식과 순명의 의무를 견디며 사는 것을 압니다. 사실, 나는 때때로 그것을 생각하면 무척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그분들은 잠도 부족합니다. 모두 시련과 십자가뿐입니다. 나는 그와 같은 보화를 자기 탓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시련들을 겪지 않아도 되면서, 말하자면 입에 넣어 주는 음식을 먹으며 편한대로 살면서, 우리가 그들보다 기도를 조금 더 한다는 것 때문에 그런 시련을 견디는 이들보다 자신들이 더 낫다고 종종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1. 나를 이렇듯 무능하고 쓸모없게 만드신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깨워 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더욱더 찬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들을 위해 매우 정기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겪어야 하는 이렇듯 큰 폭풍우 속에서, 만일 그분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학자들 중 어떤 이들이 불충실하기는 했지만, 좋은 학자들은 한층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을 당신의 손안에서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도록 그분들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아멘.

 

22. 내가 말하기 시작한 주제에서 많이 벗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초보자들을 위해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숭고한 여행을 떠날 때 참다운 길을 걸어 나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묵상의 결론

 

기둥에 매여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돌아갑시다. 거기서 주님이 견디신 고통에 대해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왜 그런 고통을 당하셨으며 그런 고통을 당하신 분이 누구인지, 어떤 사랑으로 그 고통을 견디셨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생각들을 찾아내느라고 자신을 지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끔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분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우리를 보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그분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 그분 안에서 기뻐하면서, 우리는 결코 거기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영혼은, 비록 그가 기도의 초보자에 지나지 않더라도 많은 진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 방법은 매우 유익합니다. 적어도 내 영혼을 위해서는 그랬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아시겠지요. 주님께서는 내가 언제나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8장 묵상기도.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