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묵상에서 관상으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가는 단계의 특징

 

"가르멜의 산길", II,13-15장과 "어둔밤", I,9-10장에서 묵상(사색)에서 관상으로 옮아갈 때 나타나는 표징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여기에 옮겨 정리한다.

 

 

1. 가르멜의 산길에서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가는 단계의

징표 세 가지

 

열심한 사람이 자신 안에서 가져야만 하는 징표들을 적어놓고, 그 징표들을 통하여 그가 언제 묵상과 사색을 포기해야 할 때이며 관상의 상태로 나아갈 때인지 알게 되는 것을 적어놓는다.

 

1. 이 가르침이 모호하게 되지 않기 위하여 이 장에서는 열심한 사람이 이미 말했던 상상들과 형상들과 초상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색적인 묵상기도를 언제 그만두어야 좋을지를 알게 해줄 것이다. 열심한 사람의 정신이 그것을 요구하기 훨씬 전이나 한참 뒤에 묵상을 그만두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기 위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때에 묵상과 사색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뒤로 퇴보하지 않도록 하려면 적합한 시기가 오기도 전에 상상적인 묵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간 이들에게 적합한 일치의 방법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감각의 능력들에 의한 지각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을 통해서 초보자들의 정신을 준비시키고 영적인 것에 길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먼 방법이 초보자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또한 초보자들이 본성적이고 세속적이며 일시적인 모든 유치한 상상들과 형상들을 감각에서 비워버리는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하여 거리가 먼 방법이 초보자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 열심한 사람들이 자기 안에 가져야만 하는 몇 가지 징표들과 드러나는 현상들을 말할 것인데, 그런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무 때나 그럴 것이 아니라 제때에 묵상과 사색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2. 첫째로 자신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상상력과 함께 사색을 하거나 묵상을 할 수 없으며,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은 맛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전에는 감각에 매달렸고 달콤한 물을 자주 얻어냈었지만 이제는 메마름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도 묵상에서 사색을 할 수 있고 달콤한 물을 얻어낼 수 있다면 묵상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묵상에서 그런 현상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셋째 징표에서 말하게 될 평화와 고요함이 그 영혼에게 찾아들 것이다.

 

3. 둘째 징표는 영혼이 안팎을 가릴 것 없이 특별한 일들에 감각이나 상상력을 끌어들일 의욕이 전혀 없음을 보게 될 때이다. 잠심(정신 집중)이 깊이 되었을 때에도 상상력의 작용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상상력이 작용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다른 것들에 의도적으로 상상력을 적용하는 것이 싫어진다는 것이다.

 

4. 셋째 징표는 더욱 확실한 것인데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집중을 하게 되면서 아무런 특별한 생각이 없이 내적인 평화와 고요함과 쉼 속에 혼자 있는 것이 좋아진다. 더 나아가서 묵상에서 관상으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로서 기억, 지성, 의지라고 하는 감각의 능력들의 움직임이나 활동, 즉 적어도 사색적인 활동이 없으며, 무엇에 대한 이해인지도 모르고 특별한 지식도 없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만 사랑이 가득한 전체적인 깨달음과 집중만이 있을 따름이다.

 

5. 열심한 사람들이 감각과 묵상의 상태를 확실하게 포기해야 하고 정신과 관상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적어도 이 세 가지 징표들을 자신 안에서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6. 둘째 징표가 없이 첫째 징표를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처럼 하나님의 일들 안에서 더 이상 상상하거나 묵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방심이나 정성의 부족함에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다른 이상한 것들에 대한 욕구도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는 둘째 징표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감각이나 상상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 미온적인 태도나 방심에서 오는 것일 때에는 영혼이 상상력을 즉시 다른 이상한 것들에 두려는 욕구와 의욕이 생기고 그곳으로 끌리는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만일 셋째 징표를 함께 볼 수 없다면 첫째와 둘째징표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비록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더 이상 생각하거나 사색을 할 수 없다고 여겨질지라도,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의욕도 없다 할지라도 이런 것들이 우울증이나 심장. 혹은 뇌로부터 오는 기분의 언짢음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기분의 언잖음은 감각 안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무엇을 생각할 의욕도 없이 만들면서 분명한 침울함과 포기상태를 가져다주고 달콤한 황홀경에 있으려는 충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런 것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앞에서 말했듯이 평화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가득한 집중과 깨달음이라는 셋째 징표를 가져야 한다.

 

7. 이 상태가 시작될 때에 초보자들에게는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것인데, 하나는 이 사랑 가득한 깨달음이 초보자들에게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고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완전히 감각적이라고 하는 묵상의 수련방법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이미 순수한 정신에게 속하는 느껴지지 않는 새로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감각적인 것을 더 추구하면서 그 안에 고요하게 머물 줄을 모른다. 그래서 제아무리 내적이면서 사랑이 가득한 평화가 엄청나게 넘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느끼거나 즐길 여유가 없다. 영혼이 고요하게 있는 것에 습관이 많이 들어있었다면 그만큼 많이 평화 안에서 항상 성숙될 것이며, 영혼이 다른 것들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게 될 하나님의 전체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을 더욱 많이 느낄 것이다. 고요하게 있는 것에 습관이 많이 들어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수고도 없이 기쁨과 맛과 쉼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8. 이제껏 말한 것으로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그 원인들과 이유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 정신으로 가기 위해 이미 말했던 세 가지 징표들이 필요한 것들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2. 징표가 필요한 이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미 말한 징표들의 필요성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징표들의 유익함을 밝힌다.

 

1. 앞서 말한 첫째 징표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관상적인 삶이라는 정신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열심한 사람이 이미 묵상이 싫어지고 사색을 할 수 없을 때는 묵상과 상상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사색과 묵상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들 안에서 찾아내야만 했던 모든 영적인 선이 영혼에게 분명하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시작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사색하거나 묵상할 수 없다는 것이며, 묵상 안에서 달콤한 물이나 새로움에 대한 기쁨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영혼은 자기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정신(영성)에게 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매번 영혼은 적어도 정신(영성)에 따라서 기쁨을 느끼면서 영적인 선을 받아들이는데 자기에게 유익하고 받아들이던 방법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만일 영적인 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탁월하다 할지라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전에 영적인 선을 받아들일 때 그 원인들 안에서 찾아내던 달콤한 물이나 기댈 곳을 찾지도 못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에 따른다면 맛있는 것이 키워주고 살찌게 한다. 이에 대하여 거룩한 욥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지 않은 맛없는 것을 어찌 먹을 수 있느냐고 한다(6:6). 이것이 바로 전처럼 사색을 하거나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정신이 거기에서 찾아내는 것은 기쁨이 별로 없는 것이며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이다.

 

2. 둘째로 영혼이 이 기간 동안 이미 습관적이며 실제로 묵상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묵상이나 사색의 끝은 하나님으로부터 약간의 사랑과 깨달음을 얻어내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묵상을 통해서 그것을 얻어내는 매 순간마다 단지 하나의 행위일 뿐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 많은 행위들은 영혼에게 습관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매번 부분적으로 얻어낸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들의 많은 행위들이 여러 번 계속된다면 영혼 안에 습관을 만들어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들이 없이, 적어도 거듭 반복되는 행위가 없이도 많은 영혼들을 관상의 상태에 즉시 넣어주기도 하신다. 영혼이 전에 묵상의 수고를 통해서 매번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어냈던 것이 이제는, 이미 말했던 것처럼, 자주 반복되었기 때문에 영혼에게 습관이 되었으며 전체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의 실체가 되어버렸으며, 전처럼 하나씩 구별되고 차이가 났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하면서 마치 물에 다다른 사람이 수고할 것 없이 가볍게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형상과 초상과 생각들을 통해서 힘들게 얻어낼 필요가 없이 가볍게 사랑 가득한 깨달음을 얻어낼 수있다. 이런 방식으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있게 될 때 분명하지 않지만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스럽고, 고요한 깨달음의 행위 안으로 들어가면서 영혼은 거기에서 지혜와 사랑과 기쁨을 음미한다.

 

3. 영혼이 고요함 속에 있으면서 특별한 깨달음을 더 얻으려고 애를 쓰거나 묵상을 하려고 원하는 것이 바로, 영혼이 수고는 무척하지만,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젖을 먹고 있는 어린애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어린애가 이미 어머니의 가슴에 달라붙어서 젖을 빨고 있는데 그에게서 젖을 빼앗아버린 다음에 새삼스럽게 젖을 물려주면서 젖을 손으로 쥐어짜가지고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은 껍질을 벗긴 과일을 맛있게 먹는 사람에게 점질이 벗겨진 과일의 점질을 다시 벗기고 먹으라고 한다면 껍질을 찾을 수도 없을 뿐더러 만일 벗겼다면 손에 있는 과일에서는 제대로 맛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다른 것을 잡으려다가 잡은 것을 놓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관상기도의 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기들이 해야 하는 것이 사색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정신의 껍데기인 형상들과 상상들을 통해서 특별한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이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실체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고요함 속에서는 상상들과 형상들을 찾지 못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낭비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사용하던 사색과 상상의 껍질을 찾으러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벗겨졌기 때문에 점질을 찾지 못한다. 이렇게 알맹이를 맛보지도 못하고, 묵상을 하지도 못한다. 또한 그들은 당황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퇴보하는 것이며 무엇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게 된다. 비록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무엇인가 빼앗기는 것은 사실이다. 자기들의 고유한 감각에 의한 고유한 수련방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처음에 맛을 느끼던 방법까지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 가까워지는 정신으로 무엇인가 얻으면서 가는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정신의 밤으로 더욱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은 아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다.

 

5. 둘째 징표에 관해서 말해야 할 것이 조금 있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이라고 하는 다른 상상들을 즐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던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적합한 상상들도 그에게는 달갑지 않다. 단지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잠심의 상태에서는 영혼의 상상력이 오고가고 다양하게 움직이지만 영혼이 좋아하거나 의지적으로 찾기 때문에서가 아니며 오히려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평화와 그윽한 맛이 영혼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6. 이미 말한 묵상을 포기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하고 적합한 징표이며 하나님 안에서 사랑이 가득하고 전체적인 깨달음과 그에 대한 알아차림이 시작된다는 셋째 징표에 대해서라면 여기에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이미 첫째 징표를 설명했던 곳에서 알아듣도록 말했다. 다음에 이것에 대하며 말할 적합한 곳에 이르게 될 때에 분명하지 않지만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에 대하여 말하게 될 것인데, 그때라면 지성에게 포착되는 부분적인 지각들을 모두 다룬 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이 묵상과 사색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 때에 어떻게 그에게 하나님의 전체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과 그에 대한 알아차림이 필요한지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한 가지 이유를 말할 것이다. 만일 영혼이 그때에 이 깨달음이나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영혼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감각적 능력들을 따라다니면서 움직이는 묵상을 포기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말했던 전체적인 깨달음이라고 하는 관상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상 안에서 영혼은 기억과 지성과 의지라고 하는 영적인 능력들을 갖게 되는데, 이 능력들은 이미 활동적이었고 이 능력들로부터 만들어졌고 얻어진 깨달음과 일치되어 있는 것들이다. 결국 감각적이거나 영적인 능력들을 통하는 두 가지 방법을 따르지 않고서는 영혼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얻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묵상기도도 포기하고 관상기도까지 할 수 없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수련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말했듯이, 영혼은 감각적 능력들을 통하여 대상들을 추리하고, 찾아내고 깨달음들을 얻어낼 수 있다면 영적 능력들을 통해서 이미 이 능력들의 작업이 없이 이 능력들 안에서 받아들인 깨달음들을 즐길 수 있다.

 

7. 감각적 능력들과 영적 능력들을 통해 영혼이 이루는 작업에 애를 쓰면서 가는 것과 이미 이루어진 일을 즐기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 있는 차이는 목적으로 계속 걸어가는 수고와 목적에서 얻게 되는 쉼과 고요함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음식을 요리하는 것과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미 요리된 음식을 씹어서 맛을 즐기면서 음식을 먹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받아들이면서 가는 것과 이미 받은 것을 잘 이용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 능력들과 함께 수고를 하는 것은 묵상과 사색이며, 영적인 능력들 안에서 이미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받아들여진 것은 관상이며 이미 우리가 말했던 깨달음이다. 묵상에는 물론이요 관상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게으르게 있었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영혼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묵상과 사색을 포기할 수 있기 위하여 이 깨달음이 필요하다.

 

8.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전체적인 깨달음이란 가끔 매우 미묘하고 섬세한 것이라서 대부분 그 깨달음이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고 완전하고 매우 영적이며 내적일 때는 영혼이 제아무리 노력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볼 수가 없거나 느끼지 못한다. 말했듯이, 이 깨달음이 더욱 밝고 완전하고 순수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는 때는 이 깨달음이 영혼에게 더욱 깨끗하게 주어지고 지성이나 감각을 통해 포착될 수 있는 다른 지식들이나 부분적인 깨달음과 상관이 없이 영혼에게 주어질 때이다. 지성이나 감각이 부분적인 깨달음이나 지식들을 얻어낼 수 있는 재주와 습관을 지니고 있으며,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에 이미 익숙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이 깨달음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 깨달음이 더욱 순수하고 완전하고 단순할 때 지성은 조금밖에 느끼지 못하며 지성에게는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반대로, 이 깨달음 자체가 덜 순수하고 덜 단순하다면 이성에게는 더욱 밝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그 깨달음이 이성과 감각을 속여 넘어뜨릴 수 있는 약간의 지적인 형태들과 뒤섞이고 감싸졌고 입혀졌기 때문이다.

 

9. 이 비교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태양빛을 예로 들어보자. 태양빛이 입자와 먼지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감각적이고 만져질 수 있기 때문에 시각에는 더욱 밝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렇게 태양빛이 밝다면 입자와 먼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태양빛이 단순하고 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그 자체로는 덜 순수하고 덜 밝은 것이다. 또한 입자나 먼지들 없이 태양빛이 순수할 때에는 육안으로 보기에 덜 만져질 수 있고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더욱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더욱 어두워지고 덜 감지될 것이다. 만일 태양빛이 아주미세한 먼지까지 포함해서 모든 입자와 먼지로부터 깨끗하고 순수하다면 눈에는 태양빛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어둡기만 할 것이다. 시각의 대상인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이 어디 주의해서 볼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빛이 시각의 고유한 대상이 아니고 탄지 볼 수 있는 것을 보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볼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태양빛이나 혹은 전체적인 빛이 반사작용을 할텐데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유리창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고 육체같이 두꺼운 물체가 있어 그 빛을 막아서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통과한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다면 태양빛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깨끗할 것이지만 볼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있을 때에는 더욱 밝게 보이고 또 느껴질 것이다.

 

10. 지성이라고 하는 영혼의 눈(시력)에 대해서 영적인 빛을 같이 적용할 수 있다. 전체적인 깨달음과 우리가 말하고 있는 초자연적으로 매우 순수하고 단순하게 비춰지는 빛은 모든 것을 벗어버렸고 지성의 대상이라고 하는 모든 지적인 형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영혼이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빛이 더욱 순수할 때에는 영혼에게 습관이 되어 있는 빛들과 형상들과 환상들을 더욱 멀리 쫓아버리기 때문에 영혼을 더욱 어둡게 한다. 이때에는 어두움만 잘 느껴지고,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빛이 영혼에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비추지 않을 때에는 어두움도 느끼지 않으며, 빛도 보지 못하고, 영혼이 기대하던 하늘의 것이나 지상의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은 가끔 엄청난 망각에 빠진 듯이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며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도 모른다. 여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런 망각의 상태에서 많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며, 영혼이 다시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잠시 한 순간처럼 여겨지거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11. 이런 망각의 원인은 깨달음의 순수함과 단순함 때문이다. 이 깨달음이 영혼을 점령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영혼이 애써서 얻었던 기억과 감각들의 형상들과 모든 지각들로부터 깨끗하고 순수하고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혼을 망각 속에 놓아준 것이다. 이런 영혼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다 할지라도 몹시 짧게 여겨질 것이다. 시간 속에 있지 않는 순수한 지식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짧게 여겨지는 기도는 하늘을 꿰뚫는다고 말한다(집회 35,21). 짧지만 시간에 속하지 않는 기도였기 때문에, 그리고 영혼이 천상적 지식과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을 꿰뚫는 것이다. 이런 순간이 지나고 자기 정신으로 돌아올 때 이 깨달음이 영혼에게 어떤 효과를 남기는데 영혼이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이 일어났던 것들이다. 그것은 바로 천상적 지식으로 향하는 마음의 솟아오름과 모든 대상들에 대한 기억들, 형상들, 초상들,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초월과 멀어짐이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것, 즉 망각에서 다시 돌아왔던 것을 말하는데 기억하는 것은 단지 지붕 위의 외로운 새와도 같은 자신을 보았다고 한다(102:8). 외로웠다는 것은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졌고 초월했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지붕 위에 있었다는 것은 마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영혼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무지한 존재처럼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가(雅歌)의 신부가 신랑에게 내려갔다가 아무것도 몰랐다(아가 6,12)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효과들 가운데 이 꿈과 망각과 아무것도 모름에 대하여 설명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이 깨달음이 영혼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에 매어 있지도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은 감각들을 통하거나 감관의 능력들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은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믿지 말아야 하며, 비록 영혼의 감관의 능력들의 움직임을 잃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설명했듯이 지식은 깨달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매우 현명했던 아가(雅歌)의신부는 이런 의심에 대해 자신은 잠자리에 들었어도 정신은 말짱했었다고 자신에게 대답했던 것이다(5:2). 말하자면 본성적으로 자신은 일을 멈추고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초자연적으로 깨어있었고, 초자연적인 깨달음에 초자연적으로 이르렀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어나는 망각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힘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영혼에게서 본성적이며 영적인 모든 능력들의 움직임들이 없어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며, 깨달음이 항상 영혼을 완전히 차지하지 않으므로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경우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지성이 세속적이고 영적인 모든 부분적 깨달음으로부터 벗어났고, 이미 말했듯이 의지가 세속적이고 영적인 모든 지식들에 대하여 생각할 의욕조차 없을 때라야 가능하다. 이것은 바로 영혼이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징표이다.

가끔 영혼이 아무것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징표는 깨달음이 단지 지성에게만 와 닿을 때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거의 항상 함께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깨달음이 의지와 함께 지성에게 와 닿을 때, 영혼은 별로 느끼지를 못하지만, 만일 이 깨달음으로 채워진 영혼이 조금만 잘 분별을 한다면, 그 깨달음 안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특별히 잘 알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영혼이 사랑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알지도 못하면서 지성에 이렇게 어둡게 와 닿기 때문에, 그리고 의지에게도 역시 혼돈스럽게 사랑과 그 기쁨이 어둡게 와 닿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전체적이며 사랑이 가득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13. 만일 영혼이 앞에서 말했던 징표들을 보게 된다면 영적인 사색의 길을 포기해야만 하도록, 그리고 비록 영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는 않을지라도 깨달음에 의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해주기 위해 이 깨달음 속에 있는 영혼에게 이 징표들이 왜 필요한지 알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빛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이미 말했던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마치 태양빛이 많은 입자들로 가득 차있을 때 눈에 더욱 잘 보이는 것처럼 이 빛(깨달음)이 지성에게 더욱 잘 감지되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영혼이 더욱 순수하고 출중하고 밝은 깨달음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거룩한 빛이 더욱 높고 출중할수록 우리의 지성에게는 더욱 어둡다는 것은 분명하다.

 

14. 이 거룩한 깨달음에 대해서라면, 특히 깨달음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는 효과들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무척 많다. 그러나 제때가 오면 다루기 위해서 이제 모두 그만두자, 여기에서 우리가 길게 늘어놓았던 이유는 남겨놓은 것이 더욱 혼란스러운 가르침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뿐이었다. 분명히 말해서 모호한 주제이기 때문에 아직도 해야 할 말이 무척 많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용의 모호함 때문에 담화로나 책으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가 아니며, 그 자체로 예외적인 것이고 어두운 내용이기 때문이고, 내가 재주가 없고, 아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알고 있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하고, 지나치게 길게 설명했으며, 내가 다루는 주제의 한계를 넘기도 했고, 적당한 때에 설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잘 안다. 고백하지만 가끔은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했던 적이 있다. 몇 가지 이유를 통해서 이해를 시키지 못하면 다른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것이며, 또한 앞에서 말해야 되는 것을 위해 빛을 비추어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 부분을 매듭짓기 위해, 그리고 이 깨달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는 그에 대해 짧게 다를 것이다.

 

 

 

II , 15

 

관상의 전체적 깨달음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앞으로 나아간 이들에게 본성적 감관의 능력들의 작업과 본성적 사색을 이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끔 유익한가를 밝힌다.

 

 

1. 앞에서 말한 것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간 이들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미 말했던 관상의 초자연적인 깨달음 안에 넣어주시기 시작한다면 그 자체로 이들은 본성적인 형상이나 사색, 그리고 묵상의 방법을 다시는 이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답한다면, 전체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을 지니기 시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절대로 묵상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초보자들은 아직도 완전하게 관상기도의 습관이 들지 않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즉시 관상기도를 시작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이들은 이미 묵상에서는 멀어졌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가끔 전에 했던 것처럼 형상이나 지나가는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무엇을 찾던 묵상이나 사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초보자들이 이미 말했던 징표들을 통하여 아무런 고요함이나 깨달음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에는 사색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한 대로 영혼 안에서 완전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 습관이 생길 때까지 묵상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묵상을 원하면서도 할 수 없게 되거나 묵상을 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을 때, 즉 영혼이 깨달음과 평화 안에 머물게 될 때까지만 묵상을 이용해야 한다. 이미 앞으로 나아간 이들의 시기라고 하는 이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에 따라서 관상과 묵상을 넘나들게 된다.

 

2. 이때가 되면 영혼은 감관의 능력들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즉 특별한 행위를 통해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단지 받아들이는 가운데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스러운 깨달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그 깨달음 속에 머물기 위해 가끔 부드럽고 알맞은 사색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이미 이 상태에 있는 영혼은 말했듯이 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감관의 능력들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한 기쁨과 깨달음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무엇을 느끼거나 보려고 원하지 말고 단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신경을 쓰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수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은총을 건네주신다. 마치 눈을 뜨고 있는 사람, 즉 수동적으로 단지 눈을 뜨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초자연적으로 쏟아지는 이 빛을 받는 것을 수동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자기의 솜씨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비추심이나 밝혀주심, 혹은 영적인 충만함처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단지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3. 비록 의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호하고 전체적인 깨달음을 자유롭게 받아들이지만, 이 거룩한 빛을 더욱 순수하고 풍요롭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색의 형상과 개념(정보)과 초상과 빛들로부터 오는 확실한 다른 빛들을 끼워 넣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깨끗하고 고요한 저 빛과 아무런 유사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에 부분적인 것들을 생각하거나 알려고 원한다면 비록 그것들이 몹시 영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중간에 구름을 끼워 넣은 것처럼 정신의 단순하고 깨끗한 빛을 방해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눈앞에 무엇을 덮어씌웠기 때문에 시력을 약화시키면서 앞에 있는 것이나 빛을 못 보게 하는 것과 같다.

 

4.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설명한다면, 영혼의 지각적인 모든 형상들과 영상들이 비워졌고 정화되었다면 완덕의 상태로 변화되면서 순수하고 단순한 빛 가운데 머물게 될 것이다. 이 빛은 영혼에게 항상 와있는 것이지만 영혼을 덮고 있고 부담스럽게 하는 피조물의 너울과 형상들이 가로막고 있다면 비춰지지 않는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만일 이 모든 너울들과 결함들을 제거한다면 정신의 순수한 가난함과 벗어버림 가운데 머물면서 이미 순수해지고 단순해진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지혜 안에서 변화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빠진 영혼에게 본성적인 것이 없어진다면 영혼의 본성이 비워진 상태로 있을 수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거룩한 것이 주어진다.

 

5. 열심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듯이 묵상을 할 수 없을 때 지성의 고요함과 함께 하나님께 사랑이 가득한 집중을 하면서 머물게 되는 것을 터득한다. 점진적으로 그러나 매우 빨리 영혼 안에 거룩한 고요함과 평화가 하나님께 대한 놀랄만하고 탁월하며 거룩한 사랑으로 뒤덮인 깨달음과 함께 내려올 것이다. 이때에는 어떤 사색이나 영상들이나 묵상들, 그리고 형상들이 끼어

들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영혼을 불안하지 않게 하며, 영혼에게서 만족과 평화를 빼앗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영혼은 맛없음과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만일 영혼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근심이 일어난다면 영혼을 평화스럽게 하는 것과 아무런 움직임이나 욕구가 없이 고요함과 평화 속에 머물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내외적으로 모든 것들을 비우는 것을 터득하라. 그러면 내가 너의 하나님인 줄 보게 될 것이라고 우리의 주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46:11).

 

 

 

 

 

 

 

 

 

2. 어둔 밤에서

 

 

I , 9

 

수련자들이 걸어가는 감각의 정화와

밤의 여정을 알게 하는 징표들에 대하여.

 

 

1. 메마름이 흔히 감각적 욕구에 대한 정화와 앞에서 말한 밤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죄들과 결함들, 혹은 게으름과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기분의 어떤 언짢음이나 몸의 불편함에서 오는 경우도 있으며, 앞에서 말한 악습들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언급된 정화의 메마름을 분별하는 징표들을 몇 가지 열거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징표들을 말할 수 있다.

 

2. 첫째는 하나님의 일들에서 아무런 위로나 기쁨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들에게서도 역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감각적 욕구에서 정화시키고 닦아내기 위해 어두운 밤에 넣어주셨기 때문에 영혼이 무엇에 유혹을 느끼거나 기쁨을 찾지 못하게 하신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메마름과 기쁨이 없음은 새로 지은 죄들이나 결함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죄와 결함에서 온 것이었다면 자연스럽게 어떤 이끌림이나 하나님의 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맛을 들이려는 욕망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구가 어떤 결함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하게 될 때에는 영혼은 즉시, 적게 혹은 많게, 거기에서 느껴지는 애착과 기쁨의 정도에 따라 그 결함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기쁨을 찾으려는 대상이 이 세상 것들은 물론이요 하늘의 것에도 해당된다면 우울증이거나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흔히 아무것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없으므로 다음에 말하는 둘째 조건과 징표를 확인해야 한다.

 

3. 앞에서 말한 정화를 분별할 수 있는 둘째 징표는 다음과 같다.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살려내기 위하여 마음을 쓰게 되고 고통스러운 근심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결함들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생각되면서 하나님의 일들에서조차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게으름과 미온적인 태도에서 오는 맛없음과 메마름이 아니다. 미온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으며 내적인 마음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메마름과 미온적인 태도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미온적인 태도는 게으름이 많고 의지와 정신력에 있어서 우유부단하고,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정화를 시키는 메마름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까봐 무척 주의를 기울이고 고통스럽게 걱정하면서 마음을 쓴다.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메마름에 가끔 우울증과 언짢음이 함께한다 할지라도 욕구를 정화시키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 아니며, 이미 모든 기쁨이 없어졌고, 오직 영혼의 관심은 하나님께만 두게 된다. 순수하게 기분에 의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싫어지고 인간이 황폐해지므로 정화를 시키는 메마름이 함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욕구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적 정화에있어서 영혼이 느끼는 기쁨은 초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움직이기에는 영혼의 감각적 부분이 매우 쳐져있고, 게으르고, 연약하다할지라도 정신은 날렵하고 힘이 있다.

 

4. 이 메마름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감각이 지니고 있던 힘과 감각이 느끼던 행복을 정신의 몫으로 돌려주시기 때문이다. 이 때에 영혼의 감각적 부분은 정신이 느끼는 행복과 힘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메마르고, 텅 빈 것같이 느끼는 것이다. 영혼의 감각적 부분은 순수한 정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은 기쁨을 느끼지만 육체는 맛을 잃어버리고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약해진다. 그러나 정신은 푸짐한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힘이 세지고, 방심하지 않고,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한다. 이렇게 영혼은 어두운 밤의 초기에 즉시 영적인 맛이나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메마름과 맛이 없음을 느낀다. 그 이유는 변화에 의한 새로움 때문이며, 이미 감각적인 기쁨들에 충분히 길들여져 있었고, 아직도 거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미묘한 맛을 느끼기에는 아직 영적인 맛이 적용되지도 않았고, 정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메마름과 어두운 밤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준비될 때까지 영혼은 영적인 맛은 물론이요, 좋음도 느낄 수 없을 것이며, 전에 쉽게 맛볼 수 있었던 그 맛이 없어지고 오히려 메마름과 맛이 없음만 느낄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사막의 외로움으로 끌어가시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 다다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상음식을 주셨고, 그 때 그 음식은 여러가지 맛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성서는 말하기를(지혜 16,20-21), 음식을 먹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맛이 바뀌었으나 전에 애굽에서 먹던 양파나 고기에서 느꼈던 그런 맛이나 즐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미 그들의 입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의 미묘한 달콤함보다는 애굽에서 먹던 음식에 매력을 느끼고 그 맛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묘하고 달콤한 맛을 지닌 천상음식 앞에서 탄식하고 울었던 것이다(11:4-6). 우리 욕구의 초라함도 이렇게까지 내려갈 수 있으니 우리의 불쌍함이 우리를 울게 하고, 느껴지지 않는 천상적 보화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6. 이미 말했듯이, 이런 메마름이 감각적 욕구에 대한 정화에서 오는 경우 조금 전에 말했던 이유 때문에 정신이 처음에는 그 맛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신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서서히 내적인 음식에서 오는 실체의 힘을 느끼고 활기를 찾는다. 그 음식이란 감각에게 주어지는 어둡고 메마른 관상의 시초이다. 관상이란 기도를 하는 사람 자신에게 조차 은밀하고 감춰진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감각을 비우고 메마르게 하면서 영혼에게는 혼자 조용히 있으려 갈망과 이끌림을 남긴다. 결국 영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무엇을 생각하려는 욕심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영혼은 내적으로는 물론이요 외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포기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고요하게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쓰지 않고 한가하게 있는 가운데 영혼은 즉시 내면으로부터 어떤 힘이 솟아오름을 아주 미묘하게 느낄 것이다. 이 힘은 매우 미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것을 느끼기 위해 애를 쓰거나 욕심을 낸다면 오히려 느끼지 못한다. 이미 말했듯이, 관상이란 영혼이 애를 쓰지 않거나 한가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손으로 움켜쥐려한다면 어느덧 빠져나간다.

 

7. 이런 의미에서 아가서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나에게서 눈을 돌려주세요. 그 눈들이 나를 날려 보낼 것 같답니다' (6:5)라고 했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관상기도의 단계에 놓아주시고 아주 다른 길로 이끌고 가신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하시려는 일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초보자로서 영성생활을 시작할 때와는 아주 정반대의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색으로부터 벗어나서 나아간이들의 대열에 들어가는 관상의 단계에서는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내적 능력들을 묶어놓으시어 감성에 기대지 못하게 하시며, 의지의 놀음에 놀아나지 못하게 하시고, 기억에 있어서도 사색을 못하게 하신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때에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며 단지 내적인 평화를 깨뜨리고 감성의 메마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도 방해가 될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매우 영적이며 미묘한 것이라서 그 열매는 고요하고 미묘하고 고독하고 평화스럽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매우 감각적이고 단맛을 찾아 헤매던 초보자의 단계에서 느끼던 기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이 평화 안에서 다윗이 말한 것처럼(85:8)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영혼을 만드시기 위해 말씀하신다. 이제 셋째 징표를 알아보자.

 

8. 감각의 정화를 알아차리게 하는 셋째 징표는, 흔히 그런 것처럼, 영혼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서 무엇을 해보려고 한들 상상의 감각 안에서는 더 이상 사색을 할 수도 묵상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에는 개념들을 종합하거나 분석하는 사색을 통해서 하던 것처럼 감각을 통해서 영혼과 사귀셨으나 이제는 더 이상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정신을 통해서 사귀신다. 여기에서 영혼은 사색에 들어가지도 않고 점진적으로 단순한 관상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게 된다. 이제 영혼의 낮은 부분의 내적이고 외적인 감각들로는 관상에 이를 수가 됐다. 결과적으로 상상이나 환상은 어떤 생각을 하기 위해 더 이상 기댈 곳이라고는 없으며 더 이상 발걸음을 앞으로 내얻지 못할 것이다.

 

9. 셋째 징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감관의 능력들과 그 능력들의 기쁨이 없어지는 것이 언짢은 기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분이란 그렇게 고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만일 기분에서 오는 것이라면 언짢은 기분이 사라지게 될 때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즉시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감관의 능력들은 기댈 곳을 찾게 된다. 그러나 감각의 정화에서는 뒤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관상기도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영혼은 감관의 능력들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사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영혼에게 있어서는 가끔 정화의 초기에서 감각적 사색이나 자신의 기쁨을 버리면서 계속해서 관상기도에 머무를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젖을 떼면 나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더욱 더 열심히 관상기도에 머무르려고 애를 써야 하며 감각적인 일에서는 손을 떼야 한다. 그러나 관상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매우 다른 방법으로 치닫는다. 이 감각의 메마름의 밤이 그들에게 그렇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그 메마름이 느껴지고 또 다른 때에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떤 이들은 사색을 할 수 없고, 또 다른 이들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들을 수련시키기 위해, 낮춰주시기 위해, 욕구를 바로잡아주시기 위해 이 정화의 밤에 넣어주시는데 그들이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는 더 이상 더러운 달콤한 맛에 매달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관상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관상이라고 하는 정신의 삶에 그들을 넣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의 길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다 관상으로 이끌어주시지 않는다. 반 정도도 안 데려가신다. 왜냐고? 그분만이 잘 아신다. 5") 이들은 생각과 사색의 젖에서 나오는 감각에 기대는 일. 즉 묵상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떠난다면, 이미 우리가 말했듯이, 잠시 한순간일 뿐이다.

 

 

 

 

 

 

 

 

 

 

 

 

 

II , 10

 

어두운 밤에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하여.

 

 

1. 앞에서 말했듯이, 감각의 밤에 따르는 메마름의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감각의 길에서 빼내어 정신의 길로 넣어주시는데 이는 묵상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관상으로 데려가시려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했듯이, 이 때에는 영혼이 자신의 능력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더 이상 사색을 할 수도 없다. 이 때에 수련자들이 커다란 고통을 겪는데 견뎌내야 하는 메마름 때문이 아니라 영적으로 좋았던 것들이 자기들에게는 끝이 났으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는 생각과 더불어 자신들의 영적 여정을 놓친 것이라는 근심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기댈 곳도 찾지 못하고 좋은 것에서 기쁨을 찾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숨이 막히고, 그들의 옛날 습관처럼 약간의 기쁨을 가지고 감관의 능력들을 사색의 대상에 집중시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때에 영혼은 내적인 혐오감과 엄청난 권태를 느끼면서 무엇인가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감관의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보다는 그냥 고요하고 시간이나 까먹으면서 있기를 좋아한다. 결국 이런 수련자들은 하나님의 일에서 실패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작업에서도 아무런 유용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만 오히려 평화와 고요함 가운데 있던 정신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이들은 관상기도를 다시 시도하기보다는 이미 해오던 묵상기도에 머무르려는 이들과 같으며,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시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과 같고, 사냥을 하기 위해 사냥한 것을 버리는 사람들과 같다. 이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분명히 말해두었지만, 이렇게 영혼이 해오던 대로라면 관상의 길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2. 이 때에 이런 현상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없다면 이들 수련자들은 뒷걸음질치게 된다. 이들은 용기를 잃어버리면서 가던 길을 버리게 되고, 적어도 게을러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는데 이는 묵상과 사색의 길을 가면서 얻게 된 지나친 열성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의 태만과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서 자기에게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지쳐있기 때문이다. 이제 묵상이라는 것은 이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묵상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관상이라는 전혀 다른 길로 데려가신다. 한 가지가 묵상과 사색의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무런 상상이나 추리에 빠지지 않는 관상의 길이다.

 

3. 이런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인내를 가지고, 너무 고통스러워말고 스스로를 달랠 줄 알아야 한다.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께서 거두어주실 수 있을 만큼 준비되었다면 정신의 어두운 밤을 통하여 주시게 될 사랑의 순수하고 분명한 빛으로 데려가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 여정에서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

 

4. 감각의 밤에서 영혼이 갖춰야 할 태도는 사색과 묵상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묵상의 시간이 아니다. 비록 자기들이 느끼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그리고 자신들의 느슨해짐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의욕이 없는 것이라고 느껴질지라도 이제부터 영혼은 자신이 고요함과 평온함에 머무르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기도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묵상할 것인가 걱정하지 않으면서 기도 안에 머무를 때 영혼은 모든 깨달음들과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쉬게 되고, 기도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영혼은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런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무엇을 느끼려거나 기쁨을 맛보려는 욕심이 없이 이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쉬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놓치지 않는 가운데 만족해야 한다. 이런 많은 욕심들과 관심들은 이 단계에서 주어지는 관상의 달콤한 쉼과 부드러운 고요함을 오히려 흔들어놓고 영혼을 불안하게 만든다.

 

5.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걱정스러운 나머지 다른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영혼은 그저 평화롭게 머물고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머무는 것이 정신의 자유와 기쁨으로 가는 것이다. 만일 자기의 고유한 의지로 자신의 내적인 능력들을 가지고 무엇인가 하려고한다면 기도 안에서 영혼에게 이미 정착되고 굳혀진 쉼과 평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화를 잃어버리거나 그 보화를 간직하는데 방해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가의 행동과 같다. 화가가 얼굴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배경을 검게 칠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덧칠을 하기 원한다면 결코 그림을 끝내지 못할 것이며, 그리던 그림을 망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내적인 평화와 쉼 안에 머물기 원하면서 어떤 작업을 하거나 무엇에 매력을 느끼고, 혹은 다른 것에 집중한다면 즉시 자기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하게 될 것이며. 감각적 허전함과 메마름만 느끼게 될 것이다. 집착이나 새로움에 기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이런 기댈 것들은 이 관상의 길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게 때문이다.

 

6.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은 자기 감관의 능력들의 작업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오히려 이런 것이 빨리 없어지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영혼은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주부적(注浮的) 관상의 작업이 방해받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평화로운 풍요로움이 주어질 것이다. 또 그래야 은밀하고 어두운 관상이 영혼에게 가져다주고 증폭시켜주는 사랑이 머무를 곳을 불타오르고 뜨거워진 정신 안에 마련할 것이다. 관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고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영감이라서 일단 정착을 하기만한다면 사랑의 정신 안에서 영혼을 불살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구절을 이해한다. 말한다면:

초조함과 불타오르는 사랑에서

 

  9장 묵상에서 관상으로.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