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관상기도

 

 

 

관상기도의 진행 중에 보이는 어떤 것이나 들리는 어떤 것이라도 다 버려라. 잡념과 같이 생각하라. 그 중 하나님의 것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악령의 것으로 보면 틀림없고 또 실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것을 마귀의 것으로 보느냐는 것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도 이해하시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 위함인 줄 그분이 먼저 아시고 더 기뻐하실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게든 그분의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그러나 악령은 그로서 끝이다. 평소에는 악령은 우리에게 관심을 멀리하고 있다가도 기도하기 시작하면 긴장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워오면, 즉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당황하게 되고, 당황하여 즉시 나타나 자기가 하나님인양 혹은 천사로 가장하여 "사랑하는 내 딸아"하고 나타난다. 속지 말아라. 다시 말하지만 관상기도를 수도하는 모든 이들은 기도의 진행 중에 나타나는 모든 환상이나 환청은 버려라. 다시 말하지만 버려라 그리하면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이런 환상이나 환청 혹은 분심(잡념)에 거기에 동일시하거나 시달리지 말라. 그럴 위험성이 크다. 주의 깊게 깨어 있어서 의식을 놓치지 말고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가 집중하여 응시(주시)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거든 남의 집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보듯이 하는 것도 한 방편일 것이다.

나는 자주 낚시꾼의 예를 든다. 강물에 낚싯대를 걸쳐 놓고 찌를 바라보아야 한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찌가 움직이는 것을 응시(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놓치는 순간 미끼만 달아난다. 강에 배가 오르내리는 것이나, 무슨 일이 생기든 그기에 동일시되지 말고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고 찌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인내하며 찌를 바라보아야 고기를 잡는다. 관상기도 하는 자도 낚시꾼처럼 정신집중 하여 응시(주시)하는 일은 전 기도를 통하여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떤 현상이 나타나든 그기에 동일시되지 말라. 그럴 위험이 크다. 그렇게 되면 주시를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핵심을 놓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라. 남의 집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보듯 하라. 그래도 사라지지 않으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분의 손길로 인도되는 그 순간부터 그분께 맡기면 된다. 아니 그 자체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분의 임재가 끝나는 순간 이 체험을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관상의 상태는 하나님의 일이다. 관상의 상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관상기도 중에 의식하지 못하고 기도를 마치면 인식하게 된다. 이는 마치 잠을 자다가 꿈을 꿀 때 꿈을 꾸는 줄 모르지만 꿈을 깨고 나면 꿈인 줄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일이 초보자에게 위로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놀라지 말고 감사하며 최대한 유지하도록 애쓰길 바란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 것은 어린아이에게 젖을 때고 밥을 먹이드시 수도자가 영적 성장 혹은 위로를 받았으면 그분께서 적절할 때 바꾸신다는 점을 이해 바란다. 그리고 계속 수련하면 영적 메마름이 있을 수 있다. 그 기간은 길수도 짧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당하고 합당하다 생각하실 때 관상으로 이끄신다.

관상의 상태는 기도 중에 아주 짧은 시간일 수도 있도 긴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항상 함께하는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다음의 주의사항을 읽고 수도에 전진하여 바른 수도에 이르자.

 

 

관상기도 수도자가 기억할 일.

1. 수련 중에 무엇이 보이거나 들리는 것이 있으면 아직 관 상의 상태가 아니다.

수도 중에 환상이나 환청 또는 귀신이 보일 때도 있으나, 이것은 자신의 내면의 무의식으로 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럴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냥 바라보면 사라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으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가라.

2. 수련 중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으면 안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 현상 자체는 뿌리가 없는 무지게 같아서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무엇인가 하려는 마음은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적 작용임을 깨달아라.

3. 수련 중에 ""라는 생각이 있으면 안된다.

양파 껍질을 계속 벗기면 그 안엔 아무것도 없다. 이같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주객이 어우러진 찰나의 현상일뿐이다. 변하는 현상을 ""로 보지 말라. 그 집착 때문에 분심이 생긴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으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욕을 버려야 한다. 특히 잠심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이나 고정관념이 잠심 속에 나타난다.

때로는 하나님으로, 때로는 귀신으로 나타난다.

수련이 진행되어 잠심상태가 지속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는 본인은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이 된다면 아직은 관상상태가 아니다.

설명하면 마치 꿈과 같이 그 상태에서는 의식이 없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아하 꿈이었구나 하고 깨달아지듯 의식의 상태로 돌아올 때 비로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환상이나 환청 혹은 무엇이든 인식되면 아직 관상상태가 아니므로 다 버리고 더 깊이 들어가라.

 

그리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주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하나 되시기를 바라고 계신다(17:11,21).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 나아가라.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9,10)하고 조용히 나아가서 하나님을 응시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조용히 그분의 은혜를 기다리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관상기도 전 알아야 할 중요한 일

 

관상기도를 말할 때 보편적으로 이해 할 것은 대부분의 관상기도는 주부적(注賦的) 관상기도(觀想祈禱)(수동적 관상)이다. 이 주부적 관상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관상을 허락하시기도 하신다.

어떤 경우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짧은 순간 관상의 상태를 허락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운 여행자에게 희망을 주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이다."

 

관상기도의 실제에 앞서 알아야 할 중요한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읽고 기억하여 유익을 얻기를 바랍니다.

 

1. 관상기도를 하기 위해 매일 정규적으로 참되고, 개인적이 고, 관상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선수가 경기를 위해 규칙적인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듯이 영적생활의 진보를 위해 기도의 장소와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2. 관상기도 중에는 단순하게 하나님만 집중하여 바라보라.

관상기도를 하는 동안 일상적인 일들이나, 어떤 환상, 해야 할일, 등 관상기도와 다른 것들이 떠오를 때에는 그것들을 없애려고 애를 쓰거나, 누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관상기도에 집중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3. 관상기도의 실천으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 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관상은 긴장해소 훈련, 은사, 초감각적인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심리현상, 신비체험이 아니다. 관상은 어떤 것을 의식하는 것이나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순수한 믿음으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4.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적이다.

신비주의의 특징은,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의 하나 됨은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계시, 진리의 심오성을 갖는다.

신비체험은 영속적이지 않고 순간적이다. 일반적으로 오래가는 경우가 30분이다. 시간관념이 없으므로 특별하게 오래 가는 경우도 있다.

수동성을 가진다. 초자연적이다.

 

5. 이 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그것은 기독교 관상기 도의 원천은 예수의 신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의 사항과 알아야 할 일을 읽고 숙지했으면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 좋다.

 

 

 

 

 

 

 

 

 

 

 

 

 

 

 

 

 

 

 

 

 

 

 

 

 

 

 

 

 

 

 

 

1. 관상기도

 

 

관상 기도는 개방과 참여로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

관상 기도는 관상적 태도로부터 비롯되며, 관상적 태도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언제나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열어 놓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는 능동적으로 준비할 수 있으나 온전한 관상 상태는 전적으로 은혜일뿐이다.

 

요즈음 곳곳에서 관상 기도라는 말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세간에는 그것이 마치 무슨 특별한 방법의 기도인양 호도(糊塗)하는 경향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기도는 관상적이다. 관상적(觀想的)이라는 말은 반드시 기도의 경험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먼저 관상적 태도를 통해서 관상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말을 생각해 보자. 관상적 태도란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투사하지 않고, 그 사람자체, 그 사물 자체로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대상을 관찰할 때 '같다'라는 표현은 그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또 다른 선이해가 깔려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것이 ‥‥와 같다'라고 보는 대신에 그것은 바로 그것이다'라고 볼 수 있는 태도를 관상적 태도라고 한다. 내가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상대방과 사물을 대하기 때문이다. 대항적 의식으로 상대를 대할 때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내가 없어지면 상처도 없다. 그리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온전한 삶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상대방 안에서 나를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 새는 새로서 노래하고 지저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새의 지저귐을 통해서 방해를 받는다. 새가 자신을 시끄럽게 한다고 느낀다. 자기 몰두로부터 새를 대하기 때문이다. 새는 누구도 대항하지 않고 새로서 지저귈 뿐이다. 관상적 태도를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 초월을 통하여 대상 앞으로 나를 넣는 훈련이 필요하다. 엘리엇(T. S. Eliot)'사중주'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음악이 들리네 / 음악이 없네 / 음악이 곧 나인걸" 이것은 하나의 관상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처음에는 대상의 소리로서 들리다가 그 대상이 없어지고, 마침내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기도를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도를 드리는 주체가 있고, 기도를 받으시는 객체가 있다. 여기서 기도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적 친밀함의 정도를 설명할 때 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점점 극복된다. 이것은 마치 너와 나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사귀면서 너와 나라는 간격이 좁혀지는 경험과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랜 사귐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어 서로 어우러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관상적 체험이라고 한다. 사실 어떤 기도든지 관상적 체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도는 없다. 어떻게 기도를 하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도자와 하나님과 관계적 일치가 없을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서 그러한 체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도라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도는 관상적이며, 관상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상 기도가 마치 별개의 방법이나 특수한 현상처럼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주로 하고 있는 기도가 관상적 체험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적 기도로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관상 기도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도를 단순히 한계적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내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도에서는 분명히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을 좀처럼 좁히기가 어렵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간구 기도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이유이다. 더욱이 소위 관상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적 일치는 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기도를 함에도 영적인 목마름이 여전하며, 무엇인가 또 다른 신비적인 것을 갈구한다. 이러한 열망 가운데서 오늘날관상 기도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관상적 체험이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체험이며, 그 체험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을 관상 기도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기도가 하나님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회복된다면 특별하게 들리는 그 말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관상적 기도는 개방과 참여라는 말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기도를 기도자의 심리 상태에 따라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폐쇄적 자세이다. 이는 기도자로부터 나가는 통로는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오는 통로는 막혀 있거나 대단히 제한적인 상태를 말한다. 듣고 싶은 소리가 한정되어 있기에 그 외의 것은 차단된다. 그러한 기도를 폐회로식(閉回路式) 기도라고 한다.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주님의 의사 전달은 결코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마음의 상태가 일방 통행적이다. 둘째는 개방적 자세이다. 이는 양 방향이 모두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주님을 향한 기도자의 마음도 열려 있고, 주님이 어떠한 의사를 전달할지라도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를 소위 개회로식(關團證式) 기도라고 한다. 이 기도에서는 언제든지 자기주장이나 욕구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에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의사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주님과 원찰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관상적 태도란 바로 후자와 같이 하나님이 언제나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를 의미한다.

관상적 기도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도자가 관찰자가 아니고 참여자가 된다. 관상적 상태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수동적인 상태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관상적 경험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기도자는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관상적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를 능동적 관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능동적 관상은 그 체험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가지고 주님과 만남을 시도하는 기도를 한다(2:8-20). 천사들로부터 베들레헴에 한 아이가 탄생했으며, 그가 곧 그리스도라는 전갈을 받은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달려간다. 기도자는 그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만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떠한 감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림을 보듯이 아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씀에서 전개되고 있는 놀라움과 그 환한 영광의 빛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구주 예수의 탄생이 전혀 기쁘지도 새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에 익숙한 사람은 이 순간이 바로 예수님과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능동적으로 기도를 이끌어 갈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순간 자기가 느낀 그대로 주님께 자기마음을 쏟아 놓는다. "주님, 주님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렇게 무감동한 상태에 있습니까?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열망이 없는 것입니까? 내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이미지의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까?” 이런 물음을 통해서 주님과 접촉을 시도해 본다. 그러는 동안 아기 예수님이 매우 슬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기도자는 그렇게 무능하고 연약한 모습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신의 왜곡된 그리스도 상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기대하면서 보다 가까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만일 기도자가 능동적으로 주님과 만남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 기도는 매우 무미건조하게 끝났을 것이다.

기도가 잘 전개되어 가지 않을 때 마음 밑바닥에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 같은 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원인을 자세히 성찰해 보면 주님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다. “왜 나는 주님을 이토록 사모하고 열망하고 있는데, 주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러면 그 문제를 지적해주시든지, 왜 묵묵부답(黙黙不答)이신가?” 이런 답답함과 원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분노를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편협되고 고정된 이미지가 기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분, 감정이 없으시고 마음대로 하시는 분, 그분은 거룩 거룩하신 분, 무감각하시면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큰 바위 위에 달걀을 던지는 듯한 막막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분과의 관계 사이에 흐르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살피기 전에 위와 같은 하나님의 이미지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자기 마음을 살피기도 전에 좌절감에 빠지곤 한다.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듯한 무기력함에 빠져서 항의할 마음도 감정을 표현할 용기도 잃어버린다. 영적 지도자는 그로 하여금 그러한 감정을 헤아리도록 격려함으로써 주님과 접촉점을 이루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곧 그 굳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 너에게 냉혹하게 대했느냐? 그래서 네가 나로부터 그렇게 많은 상처를 받았구나. 네 안에 있는 아픔을 쏟아놓아라. 그토록 사람들이 너를 아프게 하였구나. 네 부모 형제가 혹은 친구가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였구나. 그러나 그 때도 나는 너와 함께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이러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보호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사실 혼자 이러한 미묘한 내면의 흐름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라는 도우미가 필요하다. 도우미를 통해서 기도자가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됨으로써 능동적 관상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자가 말씀 안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력을 통하여 사건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기도자는 기도가 마치 가상적인 사건을 연출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위에서 보여 준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오늘 다시 재현하면서 기도자가 그 아기 예수 앞에 선다는 것이 마치 가상적인 연출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만일 상상을 통한 그러한 연출이 주님과 부딫침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분과 대화로 이어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상상 속에서 시연(試演)해 본 연극에 불과하다. 그래서 말씀과 한동안 씨름을 했을지라도 기도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 능동적인 대처가 대단히 중요하다. 말씀의 장면을 따라가는 동안 일어나는 내면의 감정이나 흐름을 재빨리 알아차려 능동적으로 대응하도록 도와주어야한다.

사실 상상을 통한 주님과 접촉점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능동적인 관상을 추구하는 하나의 조치이다. 말씀과 더불어 기도를 따라가는 동안 무슨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받아서 그 생각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혹은 또 다른 대응적 생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처음 떠오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어떤 생각이나 느낌도 자주 불완전하기에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적당한 능동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즉 그것에 대한 의문이 있으면 의문을 다시 주님께 넘겨 드림으로써 주님과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기도 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순종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고 하자. 그것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의문이 들 때, 취해야 할 다음 단계가 있다. 실천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즉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어 주님과 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 출처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다.

능동적인 관상의 상태를 눈여겨보면 하나님 체험을 감지하는 데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훈련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이다. 즉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필요한 동시에 주어진 대로 감사함으로 받는 태도도 필요하다. 우리는 자주 주님은 늘 거기에 계시는데 왜 전심으로 찾아야 하는가 물음을 갖는다. 주님이 늘 거기에 계신다는 사실은 경험 이전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칼뱅이 기도는 믿음의 연습’ (exercises of faith)이라고 했듯이, 기도는 이미 보편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믿음을, 각 개인이 구체적인 상황 아래에서 사유화하는(approphative) 작업이다. 그분이 거기에 계시지만 자의식적으로 내 영혼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거기에 계시지 않는 것과 같다. 아무런 교제와 소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찾는다는 것은 숨어 계시는 그분을 찾는 것이거나 하늘 저 높은 보좌위에서 끌어내리려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내 자신을 찾는 작업이다. 나의 현재적 갈등과 번민과 고통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이라는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바로 거기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그분과 통교(通交)를 경험하는 것이다.

관상의 또 다른 참여적 특징은 수동적 상태이다. 주님께서 임의적으로 우리를 그분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전적인 은총으로 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상태는 마치 주님을 향한 영적 여정의 종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사에서 관상가(혹은 신비가)들이 보여 주는 바는 아무리 수동적인 관상적 일치라 할지라도 항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수동적인 일치일수록 매우 강책하지만 순간적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무리 짧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연인과 같은 주님의 강렬한 사랑의 불꽃이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혹은 연인의 가습 한가운데를 강타하기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상흔(傷痕) 혹은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한 경험을 인위적으로 더 연장시킬 수도 더 강렬하게 할 수도 없다. 그저 수동적으로 그것을 맛보고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태가 영적 여정의 완성점이 아니기 때문에 평생 여러 번 반복해서 경험될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이 일상적인 기도 가운데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필자(: 유해룡 교수)가 만난 한 백인 여자 노인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미국 서부의 어떤 기도원을 책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언덕 위에 지어진 매우 아름다운 집이었고, 언덕 아래는 야구장만큼이나 넓은 잔디가 깔린 뜰이 펼쳐져있었다. 본래 기도원 용도로 지어진 집 같지는 않았다. 그 곳에서 머무는 동안 어느 날 아침 그 노인은 그 기도원의 유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그 기도원은 본래 자기의 사저(私邸)였다고 한다. 사저치고는 대단히 크고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그분의 가정은 미국 내의 큰 체인 슈퍼마켓을 거느린 백만장자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인가 자기가 누리고 있는 부에 대해서 점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주님의 음성이 내적 음성으로 들려 왔다. “딸아 네가 영생을 얻고자 하느냐. 그러면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음성이었다.

이전의 양심의 움직임과는 달리 너무나 탁월하고 강력한 음성이었다. 지금 듣고 있는 그 말씀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고, 때때로 그 말씀으로부터 자극을 받곤 하였지만, 이 순간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고 분명하게 느껴져 왔다.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고,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 순간적인 마음의 소리였지만 의심할 수 없는 주님의 소리로 여겨졌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자기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남편 자신도 그 날 동일한 경험을 하였노라고 고백했다. 그들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 즉시로 그들은 계산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남은 그 저택도 교회에 바쳤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그분들이 생존하는 동안 관리하면서 기도원으로 운영하도록 결정하였고, 그래서 이 기도원을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두 노인의 경험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고, 경험된 것을 없었던 것으로 취소할 수도 없는 탁월한 하나님 체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인 기도 생활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기도 자체가 성령님의 일이기에 얼마든지 탁월한 경험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매우 절박할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지고, 또 어떤 때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일치가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일관된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일치의 경험을 보장하는 그 어떤 전제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심지어는 회개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주님과 탁월한 경험을 보장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회개라는 통로가 주님과 깊은 경험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늘 다가오시지만, 그분을 충분히 받아들일 만큼 마음의 공간을 넓혀 놓지 않았거나 혹은 주님과 기도자 사이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 경우 우리는 주님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한 장애적 요소를 충분히 제거함으로써 다가오시는 주님을 보다 분명히 맛볼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전제 조건 없이도 무조건적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침투를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한 영혼을 당신께로 이끌고자 하는 원의(願意)가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한 인간을 회개의 참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 길에 지나시다가 세관에 앞아 있는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시니 마태가 주저함이 없이 즉시 따랐다는 사건이 있다(9:9). 성경 본문대로라면 마태가 주님의 소리를 듣기 위한 어떤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그저 갑작스럽게 부름을 받았고, 마태는 그 부름을 저항할 수 없는 주님의 탁월한 은총의 순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마태는 주저함 없이 즉시 응답했다. 본문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마태는 주님의 은총을 덧입을 어떠한 전제 조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죄인인 마태를 있는 그대로(9:13)주님의 원의대로 부르셨을뿐이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수동적 관상 체험은 계속 일어난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 기도에서 연약하고 무기력한 듯이 보이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연약한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을 깊이 맛보게 되곤 한다. 또 예수님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생애를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경험하게 된다. 특히 예수님의 고달픈 생애와 부딪치면서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각성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 어떤 행동의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기대를 건다. 그 열매로 그 경험의 뿌리의 진위를 식별해야 한다는 일종의 중압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기도 가운데 맛본 하나님의 은총을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한 경험이 즉시 어떤 외적인 열매를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세월을 두면서 서서히 우리를 변화시킬 흔적으로 남는다. 이것이 수동적 관상 경험의 탁월성이다.

2. 관상기도의 진행

1. 능동적 관상기도

2. 수동적 관상기도

3. 일치의 시작

 

 

1. 능동적 관상기도

 

관상이라는 영적 쉼에 다다르기 위해서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 즉 추리나 묵상을 포기한다. 그러나 초기 관상이라는 미묘함 때문에 이 시기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며 모르고 지나칠 위험이 다분히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 사랑 가득한 깨달음이 초보자들에게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고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완전히 감각적이라고 하는 묵상의 수련 방법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이미 순수한 정신에게 속하는 느껴지지 않는 새로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묵상을 마쳐야 할 시기에 대해 알아보자.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 가기 위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때에 묵상과 사색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이 포기 시기에 대하여 징표 셋을 제시한다.

첫째로 자신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상상력과 함께 사색을 하거나 묵상을 할 수 없으며,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은 맛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둘째로 영혼이 안과 밖을 가릴 것 없이 특별한 일들에 감각이나 상상력을 끌어들일 의욕이 전혀 없음을 보게 될 때이다. 영혼이 다른 것들에 의도적으로 상상력을 적용하는 것이 싫어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집중을 하게 되면서 아무런 특별한 생각이 없이 내적인 평화와 고요함과 쉼 속에 혼자 있는 것이 좋아진다. 여기에서는 다만 사랑이 가득한 전체적인 깨달음과 집중만이 있을 따름이다.

기억해야 할 일은 첫째 징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드시 둘째 징표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셋째 징표를 함께 볼 수 없다면 첫째와 둘째 징표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우울증이나 심장, 혹은 뇌로부터 오는 기분이 언짢음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기분이 언짢음은 감각 안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무엇을 생각할 의욕도 없이 만들면서 분명한 침울함과 포기상태를 가져다주고 달콤한 황홀경에 있으려는 충동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반드시 확인하여 평화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가득한 집중과 깨달음이라는 셋째 징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묵상과 사색을 포기하기 위하여 깨달을 것은 감각적 능력들과 함께 수고를 하는 것은 묵상과 사색이며, 영적인 능력들 안에서 이미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받아들여진 것은 관상이다. 묵상에는 물론이요 관상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게으르게 있었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영혼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다.

묵상의 방법을 고집하면 할수록 비참해질 것이다. 영혼은 영적인 평화로부터 자꾸 밖으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즉 이미 이룬 것을 다시 하기 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상상이나 상상이 이루는 것에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가운데 고요함 안에서 사랑스러운 집중과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감각을 통해서 양식을 얻고 사랑에 빠지기 위해 이런 생각들이나 형상들, 묵상들의 방법이 초보자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영혼들이 자신의 목적과 영적인 휴식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통상적으로 거쳐야 하지만 항상 묵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때가 되기도 전에 묵상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영혼이 고요하게 있는 것에 습관이 많이 들어 있었다면 그만큼 많이 평화 안에서 항상 성숙될 것이며, 영혼이 다른 것들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게 될 하나님의 전체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요하게 있는 것에 습관이 많이 들어 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수고도 없이 기쁨과 맛과 쉼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묵상을 실천하고 묵상을 통한 모든 노력의 결과인 이 예수께로 향하는 사랑의 눈길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묵상에 있어서, 즉 책을 읽고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뜻밖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총괄적이고 사랑에 가득 찬 이 눈길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영적인 맛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눈길때문이다. “처음에 영혼은 특별한 인식에 대한 묵상에서 피곤을 느끼면서 이 사랑의 눈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사랑의 눈길은 그 영혼 안에서 습관이 된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있게 되자마자, 그 영혼은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스럽고, 고요한 깨달음(인식, 認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지혜와 사랑과 기쁨을 음미하게 된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마치 물에 다다른 사람이 수고할 것 없이 가볍게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묵상을 통해서 힘들게 얻어낼 필요 없이 가볍게 사랑 가득한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다.

그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내적인 체험에 다다른 영혼은 특별한 주제들에 대해 읽거나 깊이 생각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되고, 실행 -즉 그 물과 열매의 알맹이를 얻기 위해서 그때까지는 그렇게 필요했던 행동방식-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곧장 사랑으로 가득 찬 침묵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이 침묵은 온갖 추리나 부질없는 이야기들보다 더 그를 예수님께로 일치시키게 된다.

이 기도는 추리적 묵상과 수동적 관상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에, ‘능동적 관상이라고 불린다.

모든 영혼들은 진정으로 성실하게 항구히 묵상을 한다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만 한다.

 

 

2. 수동적 관상기도

 

위험한 오해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무미건조함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시는 그 수동적 관상’ -혹은 감각의 수동적 밤’- 은 우리가 이미 말한 그 능동적 관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능동적 관상은 묵상의 완성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 각자의 합당한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무미건조함이 앞서거나 동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수동적 관상은 묵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부터 일어난다. 이는 영혼이 이런 상태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수동적 관상은 특히 가장 심각한 무미건조함 안에서 일어나고 발전되는데, 말하자면 모든 감각적 위로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경험에 있어서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동시에 확인되어야만 하는 세 가지 징표들을 열거한다.

영혼은 자신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상상력과 함께 사색을 하거나 묵상을 할 수 없으며,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은 맛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이제 더 이상 상상이나 추리를 통해서 어떤 것에서 다른 어떤 것에로 분주하게 돌아다닐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영혼이 상상이나 추리의 과정으로부터 열매를 얻어낼 수 있는 동안에는, 묵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영혼이 안과 밖을 가릴 것 없이 특별한 일들에 감각이나 상상력을 끌어들일 의욕이 전혀 없음을 보게 될 때이다. 영혼이 다른 것들에 의도적으로 상상력을 적용하는 것이 싫어진다는 것이다.”

묵상을 할 수 없게 된 영혼들은, 다른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그런 것들로부터 어떤 맛을 느끼려는 욕구마저도 갖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따금 자기 탓 없이 고통스럽게 상상력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님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의 맛을 즐기던 상태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얻던 온갖 재미들을 느끼지 않게 된다.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집중을 하게 되면서 아무런 특별한 생각이 없이 내적인 평화와 고요함과 쉼 속에 혼자 있는 것이 좋아진다. 여기에서는 다만 사랑이 가득한 전체적인 깨달음과 집중만이 있을 따름이다.”

가장 확실한 징표로서는, 영혼이 특별히 어떤 것을 심사숙고함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돌아다님도 없이, 사랑스럽고 보편적인 조심성과 내적(內的)인 평화, 그리고 고요함과 안식 안에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는 맛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즐거움은 감각적인 것(실제로 감각은 하나님에 의해 가장 극심한 무미건조함 안에 놓이게 된다.)이 아니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바와 같이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하도록 하자.

이런 상태가 시작되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인식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 이런 안식의 상태(, 온갖 추리의 정지 상태)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럽고 보편적인 이 인식이 영혼 자신 안에서 더욱 성장되고, 이 안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사물들 안에서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아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이 그에게 평화와 안식과 위로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 관상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감관의 능력들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즉 특별한 행위를 통해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단지 받아들이는 가운데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스러운 깨달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는 감관의 능력들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한 기쁨과 깨달음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무엇을 느끼거나 보려고 원하지 말고 단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신경을 쓰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수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은총을 건네주신다. 더 분명히 말하면 영혼의 지각적인 모든 형상들과 영상들이 비워졌고 정화되었다면 완덕의 상태로 변화되면서 순수하고 단순한 빛 가운데 머물게 된다. 이미 순수해지고 단순해진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지혜 안에서 변화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빠진 영혼에게 본성적인 것이 없어진다면 영혼의 본성이 비워진 상태로 있을 수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거룩한 것이 주어진다.” 영혼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때에는, 다른 것을 느끼려고 하거나 보려고 함이 없이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畵家)의 행동과 같다. 화가가 얼굴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배경을 검게 칠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덧칠을 하기 원한다면 결코 그림을 끝내지 못할 것이며, 그리던 그림을 망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내적인 평화와 쉼 안에 머물기 원하면서 어떤 작업을 하거나 무엇에 매력을 느끼고, 혹은 다른 것에 집중한다면 즉시 자기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하게 될 것이며, 감각의 허전함과 메마름만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기댈 것들은 이 관상의 길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은 자기 감관의 능력들의 작업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오히려 이런 것이 빨리 없어지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영혼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주부적 관상(注賦的 觀想)의 작업이 방해받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평화로운 풍요로움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의 열린 눈에 빛이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 들어가신다. 영혼은 오로지 다른 인식과 추리작용을 개입시키지 않는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온전한 헐벗음과 영의 가난 안에 머무르면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단순하고 순수한 지혜 안에 스스로 변모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지성을 잠잠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눈길 안에 머무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휩싸인 거룩한 안식과 평화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숭고한 인식과 함께 조금씩, 그러나 신속하게 주입될 것이다.

 

 

 

 

 

 

 

 

 

 

 

 

3. 일치의 시작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영적 약혼에 대해서 제시한 개요를 통해서,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결혼의 비유로써 설명하니 새롭고 한층 더 친밀한 일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는 영혼은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해왔고(능동적 밤), 하나님은 그런 영혼을 힘차게 도와주셨다(수동적 밤).

영혼에게 있어서 이 정화는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유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정화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설교에 대해서 영혼이 주의를 기울이게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10:21).

 

바로 이 순간에 영혼은 하나님께로 빠져든다. 이렇게 해서 모든 연인들의 걱정스럽고도 즐거운 이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혼은 밤낮으로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뵙고 그분을 행복하게 해드리려는 욕구에 불탄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에서처럼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혼은 그분과 결합될 수 있도록 죽기를 바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룰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최초의 일치가 맨 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전에, 이 합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하나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에 그토록 빠져 있는 영혼을 보시고 더더욱 당신 자신의 사랑에 못 이기시어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을 발견하게 하시고, 영혼과 당신과의 사랑의 약속을 승인하신다. “그래, 너는 나의 신부가 될 것이다!”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한 충실성을 약속하는 영적 약혼의 날이 바로 이때이다.

두 약혼자가 서로 친절함과 선물들을 주고받음을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하나님은 가장 귀중한 선물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가장 귀중한 선물들을 교환함으로써 대단한 기쁨을 얻게 된다.

 

그날이 멋지게 올 때까지 자신을 위해 천상 정배께서 배려하신 친절함으로써 자신이 온전히 깨끗하게 되는 그날을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영혼은, 창조주와의 영적 결혼이라는 거룩한 일치에로 인도된다. 거기서 -각각 고유한 존재를 보존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두 본성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두 본성이 합쳐지고 거룩한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드러내심(교통)이 이루어진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할지라도 이 두 본성의 존재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각자가 하나님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하나님은 영혼에게 더 이상 선물들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당신 안에 영혼을 빨아들이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영혼에게 내어주신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하나님께 대한 오롯한 사랑은,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께서 성부를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이고, 바로 성령이신 사랑이다.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실제로 변형되는 것이다.

 

사랑의 산 불꽃에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역사상 신비가(神秘家)들 중에서 그분이야말로 이런 내용을 언급하시는 유일한 분이시지만- 영혼이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영적 결혼의 다음 단계를 묘사한다. 이는 변형의 일치에 대한 문제인데, 그 자신 안에서 이미 신화(神化)된 영혼은 훨씬 더 하나님을 닮아가게 됨으로써, 자기 주위에 신적 사랑의 불꽃을 퍼뜨린다. 이 세상에서도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변화라는 완덕의 더욱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그 영혼은 단지 불(하나님)과 일치되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서 이미 생생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 일치 이후에는 그 어떤 가리움도 없는 일치, 천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일치 이외에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

이제는, 이 최초의 일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영혼의 노래의 첫 열두 노래들 안에서 서술하는 내용에 따라서 알아보기로 하자.

영의 수동적 밤의 끝 부분에서, 영혼은 아가(Cantique des Canti­ ques)의 신부와 함께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된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1:2).

 

그리고 하나님은 영혼의 이 소원을 글자 그대로 들어주시고, 영혼에게 입맞춤을 해주신다. 요한 성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강조하고자 한다. “이 실체적 어루만지심은 의로운 사람에게만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몸소 영혼에게 접촉하시는 이 입맞춤 안에 내포된 사랑의 체험 은 대단히 깊고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혼은 다시 자신이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영혼은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자신이 홀로 있음을 보게 될 때, 슬퍼하면서 다음과 같이 애원하게 된다.

당신은 어디에 숨어셨나요?

신랑이여, 내게 탄식을 남기시고

하나님께로 향한 일치에 가장 확실한 안내자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항상 남아있을 믿음에 의해서, 대답은 곧 들려온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23).

 

그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다. “!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여, 너는 신랑을 찾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 신랑이 있는 곳을 알아내기를 그렇게 원하는구나! 이미 네게 말하듯이, 네 자신이 바로 그분께서 머무르시는 방이다. 네가 바로 그분이 숨어 계신 은밀한 곳이다. 너의 모든 선과 희망이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 아니 네 자신 안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너는 그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며 만족스러움이다.”

말씀이신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본질적이고 실제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계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만나기 원하는 영혼은 애정과 의지에 따라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으며, 최고의 깨달음으로 자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잠심: 潛心, 마음의 평정). 이때에 세상 것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영혼이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있고 그분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 영혼은 진실로 그분께 신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에 영혼의 생각은 변함없이 그분에 대한 것뿐이다. 정신을 항상 하나님께 쏟으면서 사랑의 애착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분과 함께하면서 기도를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랑을 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에 빠져든 영혼이 오로지 사랑하는 님만 찾기를 충실하게 또 열심히 계속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랑에 감동하시어 당신의 현존(임재)을 잠시 동안이나마 영혼에게 드러내신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어루만지심”(‘신적 인식의 접촉’) 이라 부르는 이 선물은, “어루만지심은 지속적이지 않고 많은 것도 아니면서 잠깐씩 스쳐 지나간다. 만일 지속적으로 집중되고 길게 머무른다면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고, 사랑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 완결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영혼은 또 죽는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라 부른다.” 하나님께로 향한 이런 사랑으로 영혼에게 불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영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스로 반문하게 된다.

 

당신은 어찌 견디시며

어쩌면! 계실 곳에 계시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가며

당신이 맞을 화살로

 

그리고는 실제로, 영혼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느껴지는 최고의 선에 집중하려는 열망으로 죽어간다. 비록 그것이 감춰져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있는 것이 선하고 즐거운 것으로 힘차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그 안에 자연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선에 엄청난 힘으로 매혹되었고 넋을 빼앗겼다.

예기치 못했던 이 신적 발현(發現), 그렇게도 순간적인 이 신적 발현은,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욕망과 하나님을 완전히 찾아 얻지 못한 고통의 불을 영혼 안에 다시 일으키고 점점 번져가게 한다.

하나님은 사슴처럼 모습을 드러내시고, 영혼을 사랑으로 상처 입히시고, 달아나 숨으신다.

도망친 수사슴처럼,

내게 상처를 남기시고

그 다음에 영혼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랑으로 그 님을 질책한다.

왜 종기를 나게 하셨나요?

제 마음 낫게 해 주지 않으셨고

님께서 내신 상처, 님만이 치유해 주실 수 있음을 알고, 영혼은 이렇게 애원하게 된다.

! 누가 나를 치료해 줄 것인가!

이제 막 진실로 넘겨드렸건만

따라서 이 시기는 영혼에게 있어서 큰 고통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오로지 짤막한 사랑의 접촉으로만 중단되는데, 이 사랑의 접촉으로 하나님은 영혼에게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이 짧은 위로의 순간이 끝나면 영혼은 전에 체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고통 속으로 즉시 떨어지게 된다.

 

 

  10장 관상기도.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