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반추와 식별

 

 

반추는 기도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의 결과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관심을 둔다. 그 기도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작용하시고 개입하시고 있는지를 식별하기 위함이다.

식별은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선택하기 위함이다.

 

 

1. 반추의 필요성과 방법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그분의 동역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단순히 그분이 우리 삶 속에 베풀어 주시는 그 결과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결과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취되어 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의향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기에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부르신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움직여 이 땅에 무슨 일을 이루게 하는 도구 이상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한 초대의 장()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진행되어 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식별하기 위해 반드시 반추(反芻, reflection)가 필요하다. 기도 후에 기도를 다시 되씹어 보면서, 그 맛이 무엇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평가해 본다는 의미에서 반추(反芻)라는 말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도를 해 두면 자기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거니 하는 식으로 기도를 끝맺는 경향이 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문제를 하나님의 권한과 처분에 맡긴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기도할 수도 있다. 또 하나님께 맡겼으니 그 진행 상황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자신이 목적한 결과에만 집착할 뿐,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의향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반추가 없는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된 기도라 할 수 없다. 어떤 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일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성숙된 관계를 이루어 가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단일한 종류의 기도가 연속성 없이 반복되면서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기도를 주문(呪文)적인 역할에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각각의 기도는동일한 내용의 축적이 아니고, 하나님과 교제의 진전을 바라보는 연속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단막극이 아니고 연속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 기도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며, 어떻게 진행되는 것이 좋은지를 감지하기 위해서 반추가 필요하다.

기도 후 경험을 반추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관계의 성숙정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에 대해서 그분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무응답이었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침묵이었는가, 내 쪽에서 감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침묵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주님과 관계를 시도하면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견뎌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도자 자신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 문제를 찾아 내어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실 반추도 기도 후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반추를 하는 동안 기도 안에서 경험했던 느낌을 다시 경험하며, 그 경험 가운데서 간접적으로나마 주님과 교제가 지속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기도 가운데서 경험했던 것들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며, 마음 깊은 곳에 더 확실한 흔적으로 남는다. 이처럼 반추는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명료하지 않은 얽히고 설킨 실타래와 같은 기도의 경험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말씀과 더불어 하는 기도에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냉철하게"라는 격언이 이러한 과정에서 실천된다. 기도 안에서는 논리적인 이성보다 전인적인 감성을 추구하므로 그 경험이 매우 모호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구 읽혀 있는 경험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반추라는 논리적인 전개 과정을 밟으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풀리게 된다.

또한 반추를 통해서 기도의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기도는 나와 주님이 만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우리가 이상적으로 바라는 것은 나와 주님이 완전한 합의를 이루는 일치의 경험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도가 미완성으로 끝난다. 약속된 시간의 제약이나 교제의 미숙함 때문에 주님과 교제가 충분히 완료되지 않은 채 끝나기도 한다. 기도하는 사람 편에서는 기도가 끝났지만, 반추를 통해서 돌이켜볼 때 주님은 아직 나와 대화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주님과 교제가 일어나고는 있지만 주님의 의향이 분명히 드러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주님의 의향은 분명하게 전달되었지만, 그러한 주님의 의향에 대해서 내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기도가 불충분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그러한 상황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반추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해야 할 기도를 찾아낸다. 계속되어야 할 기도라면 주님과 보다 완전한 교류를 위해서 그 시점을 중심으로 기도를 반복할 수 있다. 그래서 반추와 반복기도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반복 기도는 단순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되풀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욱이 이전에 했던 기도에서 아무런 느낌이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기도 자료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어떤 경험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재 시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반복이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에 얻은 통찰력이나 영성적 위안 혹은 영성적 고독 등을 근거로 하여 미완성된 주님과의 교제를 더 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미완성된 그 경험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경험을 유발시켜 준 성경 본문의 어떤 특정한부분에 초점을 두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반복은 이전 기도 속에서 우리를 다루기 시작하신 성령님을 존중하는 태도이며, 그분과 더 깊이 사귀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과의 대화를 다시 회상하며 그분과의 사랑을 더 깊게 맛보면서 기도에서 경험했던 분노, 고독, 메마름 등을 치유 받으며,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고자 함이다.

반복 기도는 이전에 있었던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이미 시작한 주님과의 교제를 보다 깊게 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반복 기도를 하는 동안 기도자는 주님이 더욱 자유롭게 우리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내면의 공간을 활짝 열어 놓는 관상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반복이라 할지라도 이전에 있었던 특정한 경험이나 감정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전에 있었던 경험이 반복 기도의 출발점은 될 수 있을지라도 반드시 그 경험의 연속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시작이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성령님은 그 기도를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반복 기도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험이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보다 친밀감을 맛본다. 둘째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다 분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의향과 그 의향에 대한 나의 의향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알려진다. 세 번째는 지속적인 투쟁을 통하여 적절한 결단에 이르게 된다.

기도를 반추하는 과정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기도의 내용이 아니고 기도 후에 남겨진 느낌이나 여운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지성적 통찰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성을 움직임으로써 전인적으로 반응하도록 하신다. 주로 감성이나 남겨진 여운을 중심으로 반추해 가면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추적해 가며 해석해 나갈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항목을 기준으로 반추를 펼쳐 갈 수 있다. 첫번째는 주님과의 접촉점이 어느 부분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접촉점의 여부를 통해서 주님과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혹은 기도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주님과의 접촉점이 확인되었으면 그 친밀감의 정도는 어떠했는지를 추적해 본다. 친밀감의 정도가 기도 전반에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강하게 어느 부분에서는 미미하게 느껴진다. 또 어느 부분에서는 전혀 느껴져 오지 않는다. 이 친밀감의 정도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를 확인한다. 그것은 해석 이전에 직감적으로 느껴져 오는 경험의 산물이다. 그것을 기초로 기도자는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본다. 그 이유가 확인될 때 다음 기도에서 보다 발전적인 기도를 기약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매번의 기도에서 어떤 이미지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기도자는 각각 다른 성경 본문과 각각 다른 환경과 부딪치면서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과 이미지를 만난다. 그 다양한 이미지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기도자는 하나님을 보다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으며, 자신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네 번째는 그 기도 속에서 어떤 모습의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누구인가? 그것에 대해서 자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반추해 본다. 다섯 번째는 그러한 반응을 가늠하기 위해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인 경험을 반추해 본다. 다음과 같은 심리적인 용어로 표현해 볼 수 있다. 환희, 기쁨, 슬픔, 의혹, 확신, 혼돈, 투명해짐, 갈등, 사랑, 증오, 만족, 불만, 평안, 불안, 조급함, 초연함, 따스함, 외로움, 위로, 분노, 두려움, 열망, 좌절감, 용기, 담대함, 희망 등이다. 이러한 감정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인함으로 기도를 보다 활발하게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 여섯 번째로 남은 과제는 "이제 보다 영적 진보를 위해서 취해야 할 다음 조치는 무엇인가?" "기도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반복해야 할 기도가 무엇인지를 찾아낸다.

반추를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도록 한다. 기도 후에 보다 분명하게 남겨진 흔적을 중심으로 잠시 생각한 후에 느껴지는 대로 흘러가는 생각대로 기록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될 수 있는 한 기도 속에서 일어난 내면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반추에 쏟아 부으면 기도 안에서 일어날 일 외에 반추 자체를 위한 또 다른 글이 되기 쉬우며 기도의 내용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매번 해야 하는 반추가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반추를 지속적으로 해내기가 쉽지 않게 된다. 반추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할 수 있는대로 "라고 생각했다."라는 표현보다는 "주님께서 라고 말씀하셨다." 혹은 "주님께서 이렇게 떠오르게 하셨다."라는 표현이 좋다.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라는 표현보다는 "내가 이렇게 느꼈다."라는 표현이 더 좋다. 기도에서 얻은 경험은 수동적인 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추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 자료: 5:1-11

 

나는 기도를 반추하는 동안 그 기도 안에서 경험한 내용에서 빈 배와 같은 인생에게"라는 주제를 찾아냈다. 본문을 가지고 연속해서 두 번 기도를 시도했다. 처음 기도에서는 거의 성경 말씀을 꼼꼼히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정도로 끝을 맺은 듯하다. 특별히 주님과 부딪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잘 감지할 수 없었으며, 기도가 끝난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면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같은 본문으로 기도를 반복하다 보니 그 말씀이 서서히 살아나는듯했다.

외롭게 바닷가에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는 빈 배와 그 옆에 서성이는 베드로가 보였다. 그 배를 잠깐 사용하신 주님은 밤새토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배와 베드로를 보시고 매우 불쌍히 여기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빈 배와 같은 내 인생에 주님이 일찍이 찾아오셨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분이 세월이 흘러갈수록 나의 싫을 더욱 풍성케 하신다는 느낌이 있어서 마음 속 깊이 감사가 일어났다. 마치 베드로가 뜻하지 않게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된 것과 같은 경험이 내 삶 전반에 걸처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에 비해서 주님을 향한 나의 희생과 헌신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빈 배와 같은 나에게 찾아오신 그분을 더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빛진 자의 심정이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는 느낌이 있었다. 은혜에 합당한 어떤 삶으로의 방향 선회를 요구하시는 것 같았다.

베드로와 같이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 대신에 "주여, 주님을 더욱 깊이 맛보고 싶습니다. 빈 배를 계속 채우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 더 깊이 맛보기를 소원합니다."라는 열망이 일어났다. 내 영혼 깊은 곳에는 그분을 더 깊게 만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오래 충분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계속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과 쫓기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그분을 향해 초점을 맞추어 그분을 충분히 맛보고 경험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분과의 만남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주님과보다 친밀한 삶을 위해서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시는가라는 물음이 일어났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나 혼자 그렇게 주님을 충분히 맛보고 즐기는 것으로 주님이 내게 주신 인생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나는 주님이 거저 주신 은혜를 갚아야 하는 빛진 자가 아닌가라는 의식도 일어났다. 오늘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주님을 목말라하고, 그분을 더욱 깊이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난다.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는가?"의 사명도 내게 있지 않은가? 적당히 물러감과 나아감이라는 조화로운 삶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 모양으로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명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더 깊은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계속적으로 그 깊은 곳이 어디인지를 묻고 있다. 이전과 비슷한 주제로 기도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삶으로의 방향을 전환하라고 하시는지, 지금의 삶을 유지하되 태도를 바꾸라고 하시는지를 잘 모르겠다. 계속되어야할 기도이다.

 

2) 기도 자료: 16:1-11

 

텅 빈 무덤처럼 기도 중에 팅 빈 느낌을 받았다. 그저 그 장면 이상 아무것도 전개되는 것이 없었다. 답답한 상태로 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는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 예수님이 그 장면 속에 없었기 때문에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그랬는가? 충분히 역할이 정해지지 않아서 그랬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찾아가는 여인들의 마음을 자세히 읽은 후에 그 심정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뒷부분을(9-11) 주목하지 못했다. 그 곳까지 주목하였더라면 더 생각이 확장되어 주님과 교제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본문을 읽을 때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원인도 있다. 단순히 무덤 속에 나타난 천사 청년에만 주목하기를 힘썼는데, 거기서는 아무 감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는 말씀을 여러 번 되뇌이면서 감동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여전히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자주 졸음에 빠지곤 했다.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다음 반복 기도에서는 무덤으로 달려가는 여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한 여인의 심정으로 그 무덤에 들어가 보아야겠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천사의 부탁을 듣고 내 속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 여인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지, 아니면 희망이 솟아나는지를 살펴보아야겠다. 오늘 하루 동안 천사의 부탁에 대해 주목하면서 종종 묵상해야겠다. 그리고 오늘 놓친 부분을(9-11) 다시 살피면서 반복 기도로 들어가야겠다.

 

3) 기도 자료: 20:11-18

 

마리아가 슬피 우는 장면이 떠올랐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내 형제들에게 알려라"하는 말씀이 마음에 부딪쳐 왔다. 마리아의 슬픔은 팅 빈 무덤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소망할 것 없는 그 상태에서 죽은 시체라도 붙들고 싶은 마리아의 심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생은 그렇게 슬픈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그 때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처절한 심정을 일시에 유쾌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네 마음 속에만 담아 두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부탁하셨다. 동일하게 슬픔과 낙심 가운데 빠져있는 형제들의 아픔을 헤아리시고 전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내형제들에게"라고 하시는 소리가 마음 깊숙이 전해져 왔다. 나도 주님의 형제구나 하는 확신이 밀려왔다. 오늘 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소식을 듣고 있다. 제자들이 마리아로부터 들은 소리를 오늘 말씀으로 기록했으니 나도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듣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에게 보다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 예수님이 나에게 과연 내 형제라고 하는구나하는 자신감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나의 맏형이 되셨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 곧 너희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셨다. 주님은 나에게 형님으로 다가오셨다. 그 형님과 더욱 가까이 지내고 싶은 열망이 일어났다. 나는 기도 가운데 여러 번 주고받는 대화가 있었는데, 과연 형님이 하시는 소리인가라고 확인하곤 하였다. 내 안의 소리와 주님의 반응이 혼재되어 나타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능동적인 기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내 의지가 완전히 주님께 붙들릴 것이고, 그 때 기도는 온전히 수동적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이번 기도에서 경험되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 누구보다도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라는 느낌이다. 그 외에 어떤 특별한 다른 내용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주님이 나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고, 나는 주님을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감성적으로 느껴져 오기는 처음인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전한 그 메시지는 분명히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하며 현계에 머물고 계시기에 이 말씀은 2천년이라는 세월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전해져 오는 생생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일어났다.

이 말씀으로 반복 기도를 할 때는 '형님 예수님' 이라는 새로운 발견에 초점을 두고 주님께 더 친밀하게 다가가는 경험을 하고 싶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수동적으로 형님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그리고 최근에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열망에 대해 주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 오늘 기도에서도 어렴풋이나마 "내가 형으로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고, 원하는 대로 행해 보라."는 느낌이 왔다. 영광스럽게도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 사람으로 선택된 막달라 마리아가 내 안에 새겨지면서 주님과 친밀한 삶, 그 순수한 사랑 외에 나머지는 모두 군더더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 이름, 명예 등 모두 헌신짝과 같은 것이다. 사랑받고 사랑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하겠다는 느낌이 온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확인받고 싶다.

 

 

 

2. 식별의 일반적 원칙

 

 

여기서 다루고 있는 영성 식별은 기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경험의 기원과 출처를 밝혀내고 걸러 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기도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도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기도자로 하여금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기도의 경험이 반복되면 될수록 기도자는 그 경험이 이끄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초청을 받는다. 즉 기도안에서의 경험은 알게 모르게 어떤 행동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그 경험의 출처를 식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영성 식별은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구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나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를 가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충동하시는 그 기원이 성령님이라면 그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잘못 판단한 채 행동하면 실패를 하고 고생을 하게 된다는 식의 식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영성 식별은 가시적인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 즉 최선과 차선의 문제인 것이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를 영성 식별의 주제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사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원하시지 않는 일인지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자는 그 문제를 가지고 긴 시간 기도했지만 쉽게 분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삼자가 볼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명백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 판단되었다. 그런데 본인은 왜 그것에 대한 식별이 어려웠는가? 그에게 있어서 영성 식별이란 "하나님이 그 사업을 좋아하시는지, 그래서 그 사업을 도와 주실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실패할 사업인지"를 가늠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주님과 소통할 수 없었기에 식별이 어려웠다.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접근했더라면 식별은 매우 단순하게 된다. 즉 사업에 대한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떠나 하나님을 향한 최선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가의 문제가 식별의 주제가 된다. 그럴 때 하고자 하는 사업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즉시 판단이 서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도덕적 판단과 영성 식별과는 차이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 최선의 참을 추구하면서 기도를 하는 동안 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관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굳이 영성 식별의 주제로 다를 필요는 없다. 식별의 주제가 되는 것은 적어도 도덕적 판단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즉 어느 것을 선택할지라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최선의 삶인가에 대해서라면 선택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최선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아 내기 위한 작업이 영성 식별의 본래 목적이다. 예를 들면 가난과 부가 선택의 문제로 주어졌다면 그것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하며 무엇이 최선인가를 가늠하고자 할 때 영성 식별이 필요하다.

기도 속에서 일어난 경험도 영성 식별의 주제가 된다. 그 경험이 자주독백적인 깨달음이나 통찰력인지 혹은 성령님의 개입의 결과인지에 대한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 식별이 필요하다. 우리의 기도가 성령님의 개입과 상관없는 자기와의 독백적인 대화인가, 혹은 성령님의 개입을 전제하는 주님과의 대화인가에 대해 우리는 자주 혼란을 겪는다. 기도 중에 주님의 개입이 수동적으로 강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더욱 그러한 의혹이 강하다. 그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독백적 기도와 대화적 기도의 성격을 구분지어 식별할 수 있다.

첫째, 독백적인 깨달음은 밝고 선명한 느낌은 주지만, 여기에서는 역동성이나 내면의 갈등이나 투쟁을 잘 감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대화적 기도는 역동성이나 갈등 및 투쟁의 경향을 지닌다. 둘째, 독백적 결과는 지성적인 만족은 주지만,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충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화적 기도에서는 지성적 작용보다는 감성적 움직임이 더 강하다. 셋째, 독백적 깨달음은 일회적 사건처럼 느끼지만, 대화적 기도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느낀다. 전자의 기도에서는 어떤 깨달음을 전해 받으면서도 홀로라는 느낌이 강하다. 후자의 경우에서는 지성적 통찰력을 얻는 가운데서도 홀로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과의 만남의 흔적을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깨달음과 통찰력이 대화적 기도와 완전히 별개의 차원은 아니다. 많은 경우 기도 속에서 일어날 지성적 통찰력은 주님과 풍요로운 대화로 나아가는 창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성적 통찰을 기도로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단지 그것에 만족해 버린다면, 그 기도는 매우 메마르게 되고, 기도가 마치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독백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기도자가 침묵 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투쟁이나 갈등과 같은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가 무르익으면서 투쟁은 순종으로 바뀌어 가지만, 그 순종에 이르는 과정 가운데서 자주 주님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신의 의향과 주님의 의향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투쟁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기도는 자기 생각 속에 갇히지 않으며, 주님을 향해서 내면의 에너지가 활발하게 뻗어 가는 것을 경험한다. 전체적으로 뚜렷한 움직임은 없지만 그런대로 여러 종류의 흐름이 있는 듯한 기도에서 주님과 분명한 만남의 시점을 찾고자 한다면, 상대적으로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움직임을 찾아, 그 곳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 가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이 강하게 느껴져 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고 반복 기도에서 의도적으로 주님과 대화를 시도해 본다. 대부분의 결과는 성령님의 개입이 었었지만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불투명하게 느껴진다.

기독교 영성사에 의한 전통적인 이해로는, 기도 중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들리는 소리의 출처는 세 곳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첫째,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있다. 둘째, 선한 영(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있다. 셋째, 악한 영(악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분류해 내는가는 영성 식별에서 다루어 할 중요한 과제이다. 사실 위의 분류 중 순전히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별히 기도 중에서라면 어떠한 영적인 실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기도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실제로 기도의 실존(reality)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도 안으로 들어갔다면 이미 성령님이나 악령에 의해서 자신의 생각이 영향을 받거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도 후에 자기 생각에 불과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식별을 해낼 수 있다. 곧 기도 속에서 떠오른 생각이나 통찰력이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혹은 영의 실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보다는, 내가 과연 기도의 실존 가운데 있었는지 하는 물음이 더 우선되어야한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기도 가운데 들어가 있었는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 주님과 의도적인 만남을 시도했는가? 즉 대화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리고 내면에서 어떤 움직임을 감지하였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자신의 기도의 진면모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이 있다. 성령님의 감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자신의 습관적 태도나 성령님의 감동을 소멸하도록 책동하는 악한 영의 작용에 대해서 식별해 보아야 한다. 특별히 외부로부터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내면의 움직임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심리 환원주의적 성향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성향이 악한 영의 책동을 허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깊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이나 통찰력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내면의 생각이나 성향은 성령님에 의해서 개선되기도 하고, 악한 영에 의해서 악화되기도 한다. 때로는 마음의 기본적 태도가 성령님이나 악한 영을 불러들여 그 영의 실체에 봉사해 주기도 하지만, 성령님이나 악한 영의 실체가 주도해서 우리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악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생각을 악한 영이 작용하여 개악(改惡)시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혹 악한 영이 천사로 가장하여 우리 영혼을 속여서 우리 영혼을 자기 의도대로 끌어갈 수는 있다. 그런 경우 매우 복잡한 식별이 필요하다. 자기 생각의 흐름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서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처음과 중간과 끝이 일관성이 없이 움직인다면 천사로 가장된 악한 영의 작용인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 영혼을 매우 혼란케 하고 낙담케 한다면 바로 악한 영에게 속은 것이다. 천사로 가장한 악한 영은 매우 부드럽게 접근하지만 점점 우리 영혼을 혼란케 하면서, 정체가 발각될 때는 소리를 지르며 나간다. 그 결과로 우리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이것은 천사로 가장한 악한 영이 선하고 거룩한 우리 생각과 의도를 왜곡시키는 예이다. 그러나 악한 영이 우리의 왜곡된 의도와 생각을 바르게 바꾸어 주거나, 선한 의도와 생각을 더 좋은 것으로 발전시켜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악한 영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우리 마음을 거룩하고 선하게 감동시켜 간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다. 성령님은 악한 생각이나 의도를 보다 거룩하고 선한 생각과 의도로 바꾸기를 시도하신다. 그 과정 속에서 성령님의 의도와 상반되는 자신의 의도와 부딪치면, 고통스러운 갈등과 투쟁이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 속에서는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과 사랑이 끓어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감정은 내면에서 갈등을 빚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통 중에 환희를 맛보게 된다.

반면에 의도가 거룩하고 선한 영혼의 기도에 성령님이 개입하신다면, 그분은 그를 더욱 거룩하고 선하게 이끌어 가신다. 같은 의도끼리 만났기 때문에 두 실체가 부딪치는 소리는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 더욱 환희와 평화를 맛보는 경험을 한다. 좋은 것으로부터 더 좋은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감정의 경험에서도 주의할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기도 가운데서 평화와 기쁨을 맛보면 의심하지 않고 성령의 개입으로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반드시 성령님의 개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악한 영과 만나도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영을 만나서 악한 의도가 더욱 악하게 빠져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은 평안하고 심지어는 환희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의도끼리 만났기 때문에, 그런 경우의 경험 역시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어가듯이 조용하고 달콤하다.

그러므로 식별에서는 그것이 내 생각인가 아니면 영의 실체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물음보다는 내 생각이나 의도가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물음이 더 중요하다. 성령님이나 악한 영은 얼마든지 순간순간 자유롭게 우리 영혼을 이끌어 갈수 있지만, 자신의 기본적 태도나 의도는 쉽게 변화를 겪지 않기 때문에, 그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기도 후에 중요한 식별의 태도는 내면의 악한 의도가 개선되고 있는지, 개악되고 있는지, 또 내 선한 의지에 대한 열망이 더 향상되고 있는지, 그 열망이 시들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기도 후에 반추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여러 움직임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감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반추를 하는 동안 내 안에 갇혀 있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이 보다 객관화됨으로써 그 실체와 윤곽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때때로 자기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을 곧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 그래서 그 경험이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다면 그 경험을 입 밖으로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면의 일이 밖으로 드러나면 객관화되기 때문에 그 경험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을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식별 규범에 의하면 악한 영은 자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일단 자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면 매우 악한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실체가 만인에게 알려진다. 이것을 심리적으로 해석하면, 자기 밑바닥 근저에 숨겨져 있는 동기와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주 모호한 경험일수록 제삼자를 영적지도자로 받아들여 자신의 경험을 드러낼 때 매우 안전한 식별을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맛보고 난 후에,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통념적으로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은 후에는 반드시 악한 영의 시험이 따라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각 사람의 믿음을 든든하게 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시험을 허락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은혜 후에 반드시 시험이라는 공식은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믿음이 사람들 가운데 팽배해 있는 것은 그러한 경험을 실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맛본 사람은 영적 민감성이 살아난다. 영적 민감성이 살아나기 전에는 시험이와도 시험을 규정할 능력이 없었다. 시험 한가운데서 시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볼 때, 죄악된 삶을 살아가는 상태는 달리 악한영의 책동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영적 민감성이 살아났기에 시험을 시험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고, 그 시험에 대항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하기 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뿐이다.

 

 

 

 

 

 

 

 

 

 

 

 

 

 

 

 

 

 

3. 하나님의 음성에 관하여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무엇보다도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확신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에 나타날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혹은 바울처럼 어깨 너머로 들려오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 중에 누구도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물으면 확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흔치 않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공개석상에서 다루는 것조차 꺼려한다. 매일 기도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인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다. 그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고 기도를 발전시키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방법과 상황이 다를 뿐 오늘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 대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문제를 풀어 가야한다.

우선 기도를 하고 있지만 독백적 형태의 기도일 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첫째,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신다고 믿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경우는 하나님의 음성을 상식 밖의 일에서부터, 또는 초월적이고 비상한 현상 가운데서 찾고자 한다. 이는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비상한 하나님 체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상한 현상 자체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그 사건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잘 고려하면서 하나님의 간섭을 이해해야한다.

오늘도 하나님은 똑같은 사건이지만 그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신다. 동일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매우 신축자재하시고 유연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보여 주는 하나님의 개입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편적인 거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에 성서(the Scripture)가 성경(the Bible)이 된다. 오늘 우리는 매우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 처해 있다. 오늘 내가 처한 독특한 상황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 상황에 맞갖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즉 내가 처한 삶의 정황 속에서, 그리고 상식선에서 주님은 자주 말씀하신다.

둘째는 하나님을 나의 진정한 대화의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보좌에앉아 계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 거룩하신 분, 우리를 그저 멀리서 불쌍히 여기시면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분이라는,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결코 그분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할 수는 없다. 그저 높은 분에게 낮고 천한 자가 빌고 또 비는 일을 반복해서 할 수밖에 없는 종과 주인의 역할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주로 성부 하나님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미지를 계발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성자 예수님, 특히 공생애를 사셨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인간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이 필요하다. 오늘도 예수님은 영으로 우리 가운데에 임재하셔서 우리를 대화의 파트너로 받아들이시고 있다는 믿음을 발전시켜야 한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 하신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현재화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셋째는 듣고자 하는가, 혹은 듣고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 보아야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개방적이고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물음이다. 더욱이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혼은 더욱 활짝 개방되어 있기에 내면의 움직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된다. 영적 민감성이 예민해질 때 각 채널 즉 마음의 소리, 주변 환경을 통한 소리, 기억된 성경 말씀의 소리를 통하여 곳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 온다.

 

 

 

 

 

 

 

 

 

4. 식별과 영적 지도

 

 

영적 지도의 핵심적인 역할은 식별의 문제이다. 그 식별의 중심에는 기도자의 경험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영적 지도자는 기도자의 내면의 움직임에 초점을 두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읽도록 도와준다. 기도자는 자주 말씀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평소에 가지고 있는 자기 문제에 자주 몰두하곤 한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하며 주님과 관계 형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그 말씀으로부터 자기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보려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몰입형 기도에 빠지곤 한다. 그런 경우 영적 지도자는 기도자의 경험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 경험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식별하도록 도와주어야한다.

한 기도자가 선택해야 할 어떤 사역(청소년 사역자, 선교사 혹은 도시 목회 등)을 앞에 두고 주님과 사귐의 기도를 하였다. 기도가 매우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그는 기도 내내 주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그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확인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사건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는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깊이 접근하면 할수록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부담감과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상반된 결과를 자세히 반추해 본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당혹스러울 밖에 없다. 전자의 기도에서는 주님이 자기의 길을 인정하는 듯했지만, 후자의 기도에서는 십자가의 길에 직면하면서 그 길이 자기의 길이 아닌 것처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이 부분에서 식별이 필요하다. 자기가 품어 온 야망이나 꿈을 주님이 부여하신 사역이라고 믿고 있는 것인가? 전자의 기도에서 그 활기와 기쁨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이것을 식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혹은 후자의 기도에서 자신에게 부담감과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그 기원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도 가운데서 활기와 기쁨이 일어났다면 자기의 지향(志向)과 영의 실체(성령님 혹은 악한 영)의 지향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후자의 경우에서 부담감과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은 자기의 지향과 영의 실체의 지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내면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는 말이다. 만일 전자에서 영의 실체가 성령이라고 한다면 기도자 자신의 지향이 선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경험이다. 여기서 순간적으로 변할 수없는 요소는 마음의 지향이다. 그것은 그의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고 기도할 때도 그는 여전히 선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가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고 부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악한 영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식별이 있을 수 있다. 첫 기도에서 보여 주고 있는 그의 마음의 성향이 악한 지향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악한 지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악마적이거나 죄악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보다는 자기의 야망이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때때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향과 일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동기 자체가 거룩한 열망이라고 할 수 없기에 악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악한 지향을 지니고 있는 그 사람이 기도 중에 활기와 기쁨을 맛보고 있다면 악한 영의 개입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같은 지향끼리는 서로 일치하기에 기쁨과 활기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악한 지향을 지니고 있는 그 사람이 후자의 기도를 할 때 부담감과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면 외부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영의 실체는 성령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영적 지도자는 그의 사역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식별해 주기보다는 무엇보다 먼저 그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 지향이나 성향을 바꾸어 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한동안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면서 회개를 이끌어 갈 수도 있고, 주님이 걸어가신 삶의 성향에 자신의 삶을 조율할 수도 있다. 그리고 후에 변화된 성향을 가지고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다시 기도하면서 식별할 때 보다 온전한 주님의 부르심을 인식할 수 있다.

기도가 언제나 거룩한 열정이 동기가 되어 시작되지는 않는다. 아니 더 많은 경우 기도는 보다 나은 일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곤 한다. 즉 물질의 문제, 인간관계 문제, 가정의 문제, 질병의 문제, 성격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 사역의 문제, 학업의 문제 등이 기도의 중심 과제가 되곤 한다. 영적 지도의 일차적인 관심은 그러한 개개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주어야 하는지에 있지 않다. 영적 지도자는 "한 개인이 왜 그러한 문제에 얽혀서 고통을 겪고 있는가? 그러한 고통이 그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지금 그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에 얽매이게 하고,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도록 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를 식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 기도자의 내면의 성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혹은 세속적인 열망에로 기울어져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영의 실체를 식별하도록 도와준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기도자는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었든지, 그대로 있든지에 상관없이 영적인 성장에로 발돋움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기도 경험의 패턴은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주로 지성적인 통찰을 통하여 주님과의 접촉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성적인 통찰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영적 체험에 대한 확신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도에서 지성적 통찰을 주로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유형에서 벗어나는, 보다 감성적인 경험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성적 통찰을 통해서 얻은 경험에 대해서 스스로 충분한 신뢰를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성을 통한 주님과의 접촉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성을 사용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해서 더 신뢰를 보내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성이 자신의 지성을 통제하는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성은 감성을 통제하기보다는 감성의 경험을 소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는 지성적 통찰보다는 감성적 통찰을 계발할 때 보다 활발한 기도로 발전시켜 갈수 있다. 반면기도 중에 일어났던 감성적 경험을 반추할 때는 지성적 통찰을 사용해야한다. 기도 속에서 감성적 통찰이 결여될 때 식별의 자료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성적 통찰에만 의존하는 기도는 각 개인의 영적 성장을 돕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영적 지도를 할 때 그 내용이 무엇이었느냐라는 질문보다는 그 느낌이 무엇이었느냐라는 질문을 더 선호한다.

우리는 침묵 기도에 익숙한 사람들과 통성 기도에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종종 상반된 경험을 듣곤 한다. 침묵 기도는 기도가 성숙하면 할수록 모든 집착이나 애착으로부터 초연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역이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식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반면에 통성 기도에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듣는 반응은 기도가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사람이나 사역을 향하며 더욱 열정적이 되어 간다고 한다. 그러나 초연함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열정이 없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고 한다. 과연 기도의 유형이 사람들을 이렇게 다르게 만든다고 하면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라기보다는 심리적인 효과라고 말해야한다. 곧 그것은 성령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초연함이나 열정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생활습관 속에서 길들여진 심리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심리적인 효과를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갈라디아서 5장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는 말씀을 눈여겨보자. 오래 참음(혹은 초연함)이라는 성령의 열매는 맺었는데, 사랑의 열정은 시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경우 이 둘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라면 각 개인의 기질에 따라 어느 정도 성숙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연속적으로 다양한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절름발이식으로 어느 한쪽은 성숙해져 가는데 다른 한쪽은 정반대로 약화되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위의 기도자들의 경험은 그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기질이 개발된 것일 뿐, 성령의 열매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유형의 기도든지 그 기도가 성숙하게 무르익어 간다면 조화로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해야 한다.

 

 

 

 

 

 

 

 

 

 

 

 

 

 

 

 

 

 

 

 

 

 

 

 

5. 식별과 선택

 

 

기도의 경험을 식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귀고 있는 주님을 보다 더 잘 섬기고, 그 부름에 보다 충성스럽게 응답하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순간순간 주어진 환경이나 삶의 방식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방향은 악한 것을 피하고 선한 것을 선택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나은'(magis) 선택을 하기 위함이다. 즉 주님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기 위함이다. 어떤 선택을 앞두고 기도할 때 먼저 취해야 할 조치는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하는 일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라는 영성가는 "영성적 위안은 따르고, 영성적 고독에 대해서는 대항하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영성적 위안(consolation)과 영성적 고독(desolation)에 대해서는 앞장의 '식별과 영적 지도'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설명한 바가 있다. 다시 간단히 설명해 보면, 일차적으로 위안과 고독이라는 말 그대로 그것은 기도 가운데서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영성적 위안이란 기도의 경험이 평안하고 유쾌하고 감사와 사랑이 일어나며 그래서 심리적으로 위안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으로 영성적 위안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성적 고독도 표면적으로는 평안과 유쾌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적 위안의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서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안함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 보여 주고 있는 삶의 방식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고, 성령의 감동에 기꺼이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영성적 고독의 경우에는 그 정반대의 현상을 경험한다. 복음적 순종에 대해서는 부담스럽게 느낄 뿐만 아니라,심지어 그러한 가치관에 대해서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기에 심리적으로 매우 불편한 감정이 일어나며,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영성적 위안과 고독의 성질을 잘 이해하면 예수님의 방식에 맞는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 선택의 가능성에 직면할 때, 기도 중 선택하고자 하는 그 대상에 대해서 나의 내면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면의 상태를 거듭 점검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영성적 위안의 상태를 확인하였다면, 그 때가 선택을 위해서 가장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는 선택하고자 하는 대상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징조이다. 반면에 영성적 고독이든지, 혹은 내면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거나 움직임이 있더라도 식별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선택을 일단 보류하는 편이 좋다.

기도를 하는 중 도무지 내면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거나 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는 선택을 위하여 또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 이런 때는 선택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일에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만큼 정확한 자료를 수집한다. 수집된 자료를 나란히 나열하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가지고 그 자료를 분석하고 종합 평가하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판단 작업을 하는 증에도 기도는 계속적으로 요청된다. 또한 짧은 시간에 이 작업을 끝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얻기가 쉽지 않고, 그 자료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달라지는 자신의 기분이나 선호도가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업의 도구로 다음과 같은 도표를 사용할 수 있다. 이 작업을 하기 전 기도자는 이미 첫 단계에서 마음의 기울어짐과 영성적 위안을 구하면서 기도했지만 결론을 얻을 수 없었기에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조치는 선택을 위한 두 번째 단계이다. 이 선택의 예는 현재의 사역에서 또 다른 사역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과연 어느 것이 주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최선의 선택인지를 묻는 작업을 예로 보여 준 것이다.

 

식 별 작 업 2

또 다른 부름에로 응답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

아니다

강점(얻는 유익)

약점(잃는 것)

강점(얻는 유익)

약점(잃는 것)

1) 시간에서 자유롭다

 

2) 중심 사역에 집중할 수 있다.

3) 주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4) 주변의 견제와 경쟁이 없기에 내적 평화를 누릴 수 있다.

5) 가족과의 충분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

6) 자신의 사역이 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7)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다.

 

1)경제적인 측면에서 부자유스럽다.

2) 생활터전이다. 활동무대가 불투명하다.

3)일정한 사역의 대상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3) 사람과의 교제가 제한될 수 있다.

4) 견제세력이 없기에 게을러질 수 있다.

5) 가족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

6)지금까지 누려왔던 안정적 사역을 잃게 된다.

7)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 이끌어 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가족의 동의가 필요한데 그때마다 마찰을 빚을 수 있다.

8) 이제까지 누려왔던 지명도나 기득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1)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다.

2)이미 누려온 사역에 대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

3)사람과의 다양한 교제가 가능하다.

4)긴장감을 통하여 자기를 통제하는 기회를 얻는다.

5) 지금까지 해 왔던 사역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

6)개인적인 삶(가족 중심적인 삶)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7)지금까지 누려왔던 지명도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역을 넓혀갈 수 있다.

 

1) 중심사역에 집중할 수 없다.

2) 시간적 부담 때문에 심화적 지식을 발전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

3)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없다.

4)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누리는 데 제한을 받을 수 있다.

5) 끊임없는 견제와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내적 평화를 얻을 수 있다.

6) 타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일이 확대됨으로써 본질적인 일이 약화될 수 있다.

7)가족과 더불어 있는 시간이 제한될 수 있다.

8)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데에 한계가 있다.

9)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이상적인 삶을 자유롭게 실현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종합정리

종합정리

종합정리

종합정리

1. 자유로움.

2. 내적 평화.

3. 중심 사역

심화 가능성.

 

1. 불투명한

미래.

2. 경제적 불안.

3. 가족과의 마찰 부담.

4. 기득권 상실.

 

1. 경제적 안정.

2. 기득권 유지.

3. 다양한 인간

관계 기회.

4. 안정적 사역.

5. 가족 중심적

삶 유지.

 

1. 내적 평화와

확보를 위한

투쟁.

2. 가족과의 관계

투쟁.

3. 중심사역 심화 약화.

4.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

확보의 어려움

5.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실현

상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나열한 후에 그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핵심적인 요점이 무엇인지를 인지한다. 그 핵심적인 요점의 경중(輕重)을 따져 가면서 서로 우열을 비교한다. 우선 양쪽에서 얻게 되는 강점을 서로 비교하면서 분명한 현실과 분명한 현실은 아니지만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는 것을 다시 꼼꼼히 따져 본다. 그리고 그 중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가려낸다. 그 다음 단계로는 양쪽에서 잃게 되는 약점을 위와 같은 절차를 통해서 서로 비교 분석해 본다. 이러한 작업을 할 때는 이 선택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토론자로 참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삼자를 통해서 보다 객관적인 의견을 들을 수 있으며, 수정 보완할 기회를 얻는다. 이 때 제삼자의 목소리가 너무 강해서 자신의 본래의 생각이 압도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제삼자가 자신과 같이 똑같은 기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귀를 기울이면서 무엇을 수정 보완할 것인지는 자신이 평가하여 결정할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시키는 동안 기도자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때 기울어지는 쪽을 선택하면서 이미 제시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려해 본다. 우선 강점이 우세한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쉬운 쪽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더 편리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또 다른 선택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느끼지만, 현계의 삶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라는 주님의 또 다른 요청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법은 드러난 갖가지 강점과 약점 중에서 자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부분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가지고 주님과 교제하도록 한다. 위의 작업이 끝나고 어느 정도 결정된 문제를 가지고 다시 주님께 나아간다. 그리고 그때 그 기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영성적 위안을 맛보고 있는지 혹은 영성적 고독을 맛보고 있는지를 점검해 본다. 일관되게 영성적 위안을 맛보고 있다면 그렇게 선택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전히 혼돈되거나 영성적 고독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선택의 문제는 일단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내면 상태를 점검받기 위해서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도록 한다. 그래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영성적 고독으로 몰고 가는지를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거나 개선하여 영성적 위안의 상태를 기대한다. 그리고 난 후에 선택의 문제를 다시 다룬다.

 

     13장 반추와 식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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