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1. 우리의 안내자 예수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어느 날 마침내 영혼과 하나님의 일치가 완성되는 사랑의 산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녀는 영성적 향상에서 피할 수 없는 메마름과 시련과 어둠의 시기 중 하나를 겪으면서 자기 영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수님은 제 손을 잡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지하도, 해도 비치지 않고 바람도 비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로 데려가 주셨습니다. 이 지하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반쯤 가려진 희미한 빛, 즉 제 약혼자의 얼굴의 내리뜬 두 눈에서 비춰 오는 그 빛이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여행은 지하도를 따라가기 때문에 목적지인 산을 향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느낌 이었습니다."(예수의 아녜스 수녀에게 쓴 편지,'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편지1998, 분도)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도, 데레사는 목적지에 이르리라는 확신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것은 거의 보이지는 않았으나 거기에 자기 손을 잡고 인도해 주시는 안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내자는 바로 예수님 이었다.

이제 십자가의 요한이 '영의 수동적 밤' 이라고 부르는 그 시련을 지나 하나님과의 일치로 영혼을 인도하는 가장 괴롭고 어두운 부분을 연구하기 전에, 영혼이 그러한 괴로움을 혼자서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싶다. 그때 사랑스럽게 손을 잡고 안전하게 걸음을 내딛도록 해 주실 안내자, 동반자, 정배가 계심을 신비 박사인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에게 보여 준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며, 참인간이시며 참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길이자 목적, 우리의 전부이신 예수님이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제부터 하나님과의 일치를 바라는 관상적 영혼이 자신의 영성 생활을 통틀어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의 둘째 위격 이신 주님께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 측면에서 충분하고 완전하게 설명 해 주고자 한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들어야할 영혼의 스승이며 모범이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정배이시다. 예수님은 정배로서 영혼을 당신의 생명에 참여케 하시고,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은총을 통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신다. 예수님은 또한 영혼의 관상의 대상이며, 영혼은 우리를 구속(救贖)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그 신비에서 사랑을 다해 자양분을 받는다.

 

 

2. 스승이요 모범이신 예수님

 

사실, 십자가의 요한이 그리스도를 스승이요 모범으로 보여 준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스승이며 '사랑하는' 모범으로 보여 준다고 말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므로 그분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셨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실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먼저 십자가의 요한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우리가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사실 성인은 우리를 차츰 하나님과의 일치로 이끌어야 할 금욕과 포기의 길로 용감히 나아갈 원동력을 예수님의 사랑에서 찾도록 호소하고 있다.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온 우리는 이제,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모든 여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데까지 더욱 가까이 왔다. 우리가 배운 첫째 가르침은, 주로 우리를 현세적 만족으로 너무 쏠리게 만드는 그 감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었다. 영혼은 감각의 사용을 자제하고 열정을 억제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마음을 준비한다. 십자가의 요한이 제안하는 이 수련은 단호한 노력을 요구하는데, 영혼은 이 수련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참으로 주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된다. 또한 주님께서도 영혼을 '찾으러' 오시는데, 바로 메마름이라는 위기를 통해 찾아오신다. 그 위기를 통해, 영혼은 자신의 내적 생활을 감각적인 것에 덜 의존하게 함으로써 더욱 영성적으로 강해진다.

이제 그는 '영의 길'을 걷게 되어 향주덕을 열심히 닦음으로써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며, 이를 통해 영혼은 참으로 하나님과 끊임없는, 특히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을 더더욱 '적극적'으로 찾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다시 그 영혼을 찾아오신다.

이제 우리는, 영혼을 즉시 하나님과 일치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준비인 영의 정화를 마무리하는 그 위기를 검토하게 된다.

일치의 길에는 두 가지 준비 기간이 있다. 그것은 감각의 정화와 정신의 정화인데, 각각 능동적 시기와 수동적 시기가 있다. 영혼이 용기 있게 그 첫 번째 길에 투신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힘을 얻도록 호소한다. 다음으로 둘째 시기인 영의 정화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고통 앞에서 영혼이 두려워하며 주저앉지 않도록,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당신 자신을 완전히 없애셨는지를 상기시킨다.

일치의 길로 항하는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십자가의 요한이 영혼에게 제안하는 저 과감한 포기의 계획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래야만 쓸데없이 방황하며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우리의 자연적 경향에 대항하는 끓임 없는 싸움이어서, 우리는 처음부터 긴장되고 거의 고통스러운 느낌을 주는 십자가의 요한의 다음 말을 다시 떠 올러게 된다. "가장 쉬운 것보다 가장 어려운 것을, 가장 즐거운 것보다 가장 덜 즐거운 것을." 영혼이 이런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으러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오로지 영혼의 정배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만 그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십자가의 요한의 말을 들어 보자. "영혼은 '초조함과 불타오르는 사랑'에서 신랑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감각의 이 어두운 밤을 지나서 나왔다고 말한다. 기쁨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즐길 수 있도록 의지에 불을 붙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욕구를 이겨내고 모든 사물들에 대한 기쁨을 부정하기 위해서 더 큰 다른 사랑의 대단한 불타오름이 필요하다. 더 큰 사랑이란 바로 자기 신랑의 사랑이다. 영혼은 신랑에게서 힘과 기쁨을 얻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쉽게 부정할 수 있는 항구함과 용기를 얻게 된다. 자기 신랑의 사랑을 얻는 것이 단지 감각적인 욕구들의 힘을 이겨낼 수 있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초조함과 사랑으로 불타오르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욕구의 대단한 초조함으로 말미암아 감성은 감각적인 대상들로 쏠리고 끌려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만일 영적인 부분이 영적인 것보다 더 큰 초조함으로 타오르지 않는다면 본성적인 멍애를 극복할 수 없으며, 감각의 이 밤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감각적인 대상들에 대한 욕구를 끊어버리면서 모든 사물로부터 어두워진 곳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를 얻어내지도 못할 것이다."(가르멜의 산길1.14.2) 다른 번역에서 보면 "의지가 불타는 일이 없게 될 그런 사랑으로 ‥‥ 모든 욕망을 끊고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임의 사랑인 보다 큰 사랑의 뜨거운 불꽃이 있어야한다. 이 사랑에서 즐거움과 힘을 얻으면 영혼에게서 모든 다른 사랑을 거뜬히 부정할 만한 끈덕진 용기가 쏫아 나게 된다." "그리고 감각욕의 위세를 누르기 위해서는 임에 대한 사랑을 지니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강렬한 욕망과 사랑이 넘치는 마음의 충동이 있어야한다."(가르멜의 산길1.14.2) 비교해서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에게 가장 중요한 첫째 임무는 기도, 묵상, 경건한 독서, 희생으로 그 사랑을 얻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부족함 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영혼이 예수님을 사랑할 때, 그는 예수님을 기쁘게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어떻게 예수님께서 말씀과 모범을 통해 포기의 길에 들어서도록 가르치셨는지를 십자가의 요한은 설명해 준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은 복음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떤 정말로 신뢰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영성적 생활에서는 단 한 분의 스승, 곧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그 가르침을 다른 모든 영성가들은 시대와 사회적 신분과 소명 등의 특수한 조건에 적응했을 뿐이고, 그 본질은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므로 전부 말끔히 벗어 버림에 대한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도 복음서에 없는 것이라면 따를 가치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복음서에 더욱 정식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어디로 따라오라는 말씀인가? 완전히 없어지고 온전히 무로 돌아가게 되는 길을 따라오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비좁다."

정말 그렇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4)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모범을 보여 주셨으며, 훌륭한 스승들은 모두 예수님을 본받았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도 영과 감각의 정화, 즉 영성의 길에서 거치는 두 시기에서 영혼이 본받아야할 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았다.

감각의 억제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감성적인 삶에 대해 죽으신 것만은 확실하다. 살아 계시는 동안은 영적으로 죽으셨고, 돌아가실 때는 물질적으로 죽으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에 확실히 감각적인 것에서 영적으로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은 본성적으로 죽으셨음이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드시(8:20) 살아계실 때에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돌아가실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하셨다."(가르멜의 산길 2.7,10) "둘째, 돌아가시는 순간에 그분의 영혼 안에 아무런 위로나 편안함이 없이, 성부께 자신의 영혼의 아래 부분에 따르는 철저한 메마름을 남기는 가운데 완전하게 파멸을 맞으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라고 외치셔야 했다."(가르멜의 산길 2.7,11)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참혹한 고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도록 하자! 사랑하는 스승께서 우리를 위해 견디신 그 고통을 생각할 때,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이 솟는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십자가의 요한은 영적 여정의 첫째 부분인 감각의 밤보다 틀림없이 더욱 고통스러운 둘째 부분인 영의 밤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온전히 없애 버리신 저 가슴에 사무치는 모습을 그는 다음과 같이 보여 준다.

"당신이 돌아가시던 그 순간, 영혼엔 조금도 편한 구석이나 위로가 없이 오로지 당신 자신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상태에 계셨으니 ‥‥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하는 부르짖음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 사람들이 죽어가는 당신을 보고 조롱했으니 ‥‥ 자연성으로 볼 때 죽음으로 그 자연성은 없어진 것이요, 아버지의 도우심이나 영적 위로 역시 없어져 버렸으니, 그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이 빚을 다 갚고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키도록,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없애시고 무로 돌아가게 하셨다."(가르멜의 산길2.7,11)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우리 때문에 참아 견디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또한 이처럼 당신을 없애 버림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도 알아듣게 해 주셨다. "이 버려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을 때 이루셨던 기적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일, 지상에서는 물론이요 하늘에서도 볼 수 없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셨는데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일치시키고 화해시킨 것이다."(가르멜의 산길2.7,11)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을 완전히 없애 버리신 것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길과 문에 대한 신비는 하나님과 일치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 때문에 영혼의 감각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 파멸을 혹독하게 겪을수록 하나님과 더욱 일치하게 되고 더욱 커다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영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을 때, 이때가 바로 최고의 겸손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영적인 일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일치는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높은 상태이다. 이 영적인 일치는 휴식이나 기쁨, 그리고 영적인 감정으로가 아니라 내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이며 감각적인 십자가의 생생한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가르멜의 산길2.7.11)

영의 밤의 도가니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견디신 그 고통의 모범에서 위로를 받게 되며, 또한 그 고통이 가져오는 풍성한 결실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이 명확히 단언한 것처럼,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분명 그처럼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시하도록 이끌면서, 영성의 길에서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비하여 더욱 큰 용기로 맞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켜 왔다. 우리가 받게 될 예수님의 도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초자연적 생활을 하게 하시며, 또한 당신을 본받음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게 하는 은총도 주신다. 십자가의 요한은 예수님을 영혼의 정배로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이 진리를 되풀이해서 깨우쳐 주고 있다.

 

 

3. 영혼의 정배이신 예수님

 

십자가의 요한은 다른 여러 신비가들과 같이 영혼과 하나님의 합일을 혼인에 의한 결합이라는 상징으로 즐겨 표현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영적약혼과 혼인에 대해 말하고, 또한 영혼의 정배라는 단어까지 쓰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정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을 뜻하는 것임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영혼은 그리스도 전체와의 일치, 즉 그분의 신성은 물론 인성과도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거룩한 인성으로 살아가는 그 풍성한 은총을 통해, 영혼의 삶은 예수님의 삶의 연장처럼 된다. 또한 그분의 신성으로 살아가면서 그 거룩한 의지 안에서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려야 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과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십자가의 요한이 사람이 되신 말씀을 정배라고 표현한 것은 다만 시적인 상징의 개념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신학자이므로 신학적 전통,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개념의 가치와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합한다는 것을 정배라는 말로 표현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그 머리와 하나가 되는 가르침'에 내포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실재를 뜻한다. 후자는 성경에서 뽑아 낸 것으로, 현대 신학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영성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친숙한 상징이 되어 왔다. 다만 신비체라고 할 때 그리스도와 결합된 모든 영혼을 말하는데, 정배라고 할 때는 언제나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직 한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말한 두 경우 모두, 영혼에게 넘치도록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것을 언급한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논리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당신의 몸,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만드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펀 인류는 하나하나의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과 결합된 모든 영혼의 정배라고 당연히 말할 수 있다.

남편은 머리라는 이름으로 아내에게 힘을 갖고 있다고 성 토마스는 말했다. 참으로 내적 생활을 하는 영혼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영성적 가르침의 금자탑이라 할 만한 회칙이 1943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반포되었다. 이 훌륭한 회칙에서 우리는 신비체의 개념, 즉 그리스도와 영혼의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이 신비체의 가르침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 분명한 증거로 우리는 성인의 주요한 저서에서 신비체에 대한 뚜렷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표현을 몇 군데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톨레도의 쓰라린 옥중 생활에서 쓴 몇 가지 시구에서도 그런 표현을 엿볼 수 있다. 거기서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이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과 지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똑똑히 말하고 있다.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현대 신학자들이 정의한 온갖 교의적인 명확성을 신비 박사인 십자가의 요한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천재적 신학자인 십자가의 요한은 분명히 우리의 영성 생활이 가장 엄밀한 뜻에서 우리 영혼의 참된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종속되어 있음을 적어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 영혼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 즉 은총의 근원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것은 아담이 지은 죄와 그것에 이어서 범한 우리의 개인적인 모든 죄로 잃었딘 은총을 당신의 거룩한 수난으로 되찾아주셨을 뿐 아니라, 20세기 이전 십자가에서 그것을 되찾으신 이후 실제로 지금도 그 은총을 나누어 주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얻어 주신 속죄의 업적에는 사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체험하셨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희생되시며 끝났던 그 고통을 통해, 죄로 더럽혀진 인류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주신 사실이다. 하지만 이 첫째 사실에는 영원히 계속될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이 이어지고 있다. ,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끓임없는 전구로 얻으신 그 은총의 무한한 보화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필요로 하는 특별한 은총을 나누어 주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교황의 회칙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이러한 은총들을 선택하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이 은총들을 받아 우리 영혼에게 나누어주신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는 초자연적인 생활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와 동화되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의 물로 새로 태어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그 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얻어 주시고 당신 성사의 효력으로 친히 우리에게 전하시는 초자연적 생명의 근원인 그 거룩한 샘에서 펴 올린 것이다.

이 생명 이 참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녹아 버리게 한다. 이 사실을 초대 그리스도 신자들의 지하 묘지(카타콤바)에 나타난 감동적인 과거 기록이나 사도 시대의 교부들이 남긴 글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데도, 사랑하는 구세주를 나타내는 데도 동일한 상징을 즐겨 사용했다. 이 동일한 표시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인 물고기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그 영혼이 세례의 샘에서 생명의 물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처럼 그 물 안에서 생명의 원천을 발견함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머리글자를 이어 맞추면 물고기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물고기가 주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닮은 점은 어떤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 영혼 안에서 은총의 생명 이 자람에 따라 더더욱 뚜렷해지게 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향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을 박아준다. 하나님의 생각과 원의 안에서, 우리는 신적 전형(典型)을 닮아 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창조주의 눈길로 이 무한히 신비스런 신적 전형인 성자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성자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히 담아 가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그분을 닮음으로써 우리는 이 지상에서나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인생길을 걷도록 정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의 요한의 말대로 각자는 저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을 다른 길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영적 여정을 거니는 방식의 반만이라도 다른 이의 방식과 일치하는 영혼을 찾기란 거의 힘들 것이다.."(사랑의 산 불꽃3,59) 구원의 성년 축제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비오 11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장엄한 말을 남겼다. "물리적인 하늘의 별이 서로 다른 것처럼 영적 완성의 천상, 즉 성인들의 천국에서, 각 영혼은 혼자 따로 하나님께 알려지고, 혼자 따로 사랑받고, 은총을 받으며, 인도되고 있다." 자연 과학자들의 말처럼, 꽃을 보더라도 다른 꽃과 완전히 같은 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이 초자연적 차원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람은 제각기 그리스도의 특별한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 안에서, 그 모습이 이루어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 사람의 인격의 숭고함과 위대함이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각 영혼은 "주님을 위해 내가 있어야할 곳에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총은 영혼을 예수님과 동화시키려고 한다. 그 은총은 그리스도의 영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본성을 우리 안에 보존하게 해 준다. 하나님의 이러한 은총을 통해서 사람이시요 하나님이신, 즉 위격적 결합으로 하나님의 위격을 지닌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혼의 이 은총은 '머리로서의 은총'이라고 불린다. , 머리의 은총은 지체에 그 은총을 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체인 각 영혼이 지닌 은총은 많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머리가 지닌 은총과 다른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지닌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영혼 안의 것과 온전히 같은 본질과 성향이다. 그 은총은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살고 활동하게 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과 결합시켜 주고자 한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반영되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교황 비오 12세는 예부터 전해 오는 전통을 따라서, "교회는 거의 그리스도의 둘째 위격처럼 존재한다."고 되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는 또 다른 그리스도, 즉 완전히 닮은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그분의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처럼 교회는 가르치고 다스리며 여러 가지 성사를 베풀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온갖 덕, 그분의 거룩하고 영웅적인 온갖 행적으로 빛나고 있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려는 열의로 불붙고 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교회는 분리된 특정한 개인의 영혼의 총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덕과 초자연적 은총을 찾아볼 수 없다면, 교회는 그런 것을 반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은 모습으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연장시켜 간다는 것은 ,또한 많은 개개인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반영되고 연장되고 있음을 뜻한다. 선택받은 영혼인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이 지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문 안에는 많은 영혼이 열망하는 이러한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오늘날 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제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 인성의 연장(延長)이 되어, 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의 신비와 영혼의 구원의 신비를 새롭게 하실 수 있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정배로 삼은 영혼에게 과연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상이 있을까! 이처럼 사랑하는 정배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동화가 최고로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은총을 주시면서 그 영혼 안에서 일하신 결과이다.

영혼 안에서 이러한 생명의 광채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넘쳐 나오고,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는 십자가의 요한의 깊은 통찰은 영가로 알 수 있다. 거기서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이 깨닫게 되는 덕들과 그 덕들이 완전히 성장하여 튼튼히 자리 잡게 되는 최고의 생활,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또한 천국의 성인, 순교자, 동정녀, 박사들을 장식하는 후광은 모두 모여서 으뜸이신 그리스도의 머리 둘레를 감싸는 왕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성인들의 위대함이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그들의 위대함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임을 입증 하는 것 같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이 영혼의 정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정배인 영혼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서서히 그 신성과 결합하도록 이끄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 안에서 친히 사시던 생활로 점점 동화되게 하시어 마침내는 이 인성을 온전히 닮은 모습이 되게 하셔서, 영혼이 이 인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재현하고 연장하게 하신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혼이 사랑에 넘치는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본받을 모범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화의 힘이 자신 안에서 온전히 발휘되기를 청하며, 정배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모든 일에서 순종하며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유순히 자신을 맡기고 싶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생활이 모두 영혼 앞에 펼쳐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관상적 영혼이 된 사람에게는 과연 이처럼 그리스도와 친밀한 생활이 가능한 것인지를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4. 관상의 대상이신 예수님

 

영혼이 관상적이 되어 마음이 하나님과 일치될 때 더 이상 그리스도의 인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고 흔히 말하며, 더구나 이러한 생각이 신비 박사인 십자가의 요한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그러한 설을 적극 반대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데레사 영성의 신학자인 십자가의 요한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성녀 데레사와 의견을 달리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십자가의 요한 역시 개혁자인 성녀 데레사와 같이, 관상적 영혼은 모든 영성의 여정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신심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기를 원했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에게 남겨 준 자료에 따라 연구하면서, 그가 사실 그러한 방향으로 영혼을 지도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그다지 흥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관상적이 된 영혼이 특히 신성으로 끌리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신비적 인식의 첫 대상은 바로 신성,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관상이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정을 깨닫게 되는 방식이므로, 애덕의 사랑 안에서 영혼은 자기를 강하게 끌어당기시는 분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영혼을 끌어당기고 결합시키는 이 애덕의 사랑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상냥함, 즉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는 이 관상적 인식 안에서 당신을 어렴풋이나마 드러내 보여 주신다. 이러면서 관상적 인식은 이미 말했듯이 우리에게 소위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지니게 해 준다. 따라서 관상에 들어간 영혼은 자연히 사랑의 눈길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거기서 나와 다른 특별한 생각을 할 마음도 없을뿐더러, 지난날 자신의 내적 생활에서 크나큰 양식이었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서도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이것을 나무랄 수 있을까?

아니, 결코 비판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성녀 데레사는, 영혼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며 하나님께 끌리고 있음을 느끼는 가운데 오롯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 다시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성녀가 인정하지 않았던 점은, 영혼이 그러한 관상에 이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모든 구체적인 생각을 스스로 물리치고 싶어서, 이런 체험이 관상에 방해가 될까봐 두려워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녀가 배척하고 있는 것은 일부러 머리를 써서 그리스도를 마음에서 멀리하려는 의도이지,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여 영혼이 저절로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우를 두고 한말은 아니다.

이 둘째 태도가 좋지 많은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성 생활에서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반드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으로 되돌아가서, 우리의 영성 생활이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 성장한다는 것을 습관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 보게 되듯, 그는 우리가 영성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영혼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 십자가의 요한에게는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 결코 관상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관상 그자체가 예수님의 강생과 구원의 신비에 관해 더욱 깊이 깨닫도록 영혼을 비추어 주는 데 도움이 된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스승이요 모범이시며, 영혼이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여정 전반에 걸쳐서, 즉 서서히 관상에 들어가는 여러 단계에서 꾸준히 스승이요 모범이 되어 주신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은 분명 이 길의 어느 지점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멀리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스며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미로운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지행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요한이 그리스도께 기대한 것과 같은 빛과 위로를 결코 그리스도의 모범 중에서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이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을 고의로 멀리하는 것을 인정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거기에 관해서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 이제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기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 더욱 쉽게 온전히 잠기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생각을 멀리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충분하게 대답하기 위해, 먼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성 요한의 생애와 전형적인 그의 시구(誇句)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인간이신 그리스도께 향하는 것이 영혼 안에서 관상의 진보를 방해한다고는 그가 믿고 있지 않았음이 명백하다는 점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교회 안에서 기도하면서 차분히 마음을 모으는 것을 각별히 좋아했다. 개혁 가르멜회에서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 ) 인간이시며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주시는 예수님 앞에서 항상 묵상 기도를 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것은 성녀 데레사의 영향만이 아니고 십자가의 요한의 영향도 있다. 더구나 위에서 언급했던 십자가의 요한의 시, 즉 그가 '신앙으로 하나님을 앎을 하는 영가'라는 제목을 단 아름다운 시는, 바로 교회 안에서 그가 신성에 대한 모호하고 어두운 관상을 하면서 영혼의 양식을 얻었음을 보여 준다.

 

영원한 저 샘이 우리게 생명을 주고자

살으신 이 빵 안에 감추여 계시느니

그래도 밤이어라

 

여기 피조물을 부르고 있어

이 물에서 저들은 배부르노라 어두워도

밤이기에

 

내 목말라하는 저 산 샘을

생명의 이 빵 안에 나는 보노라

그래도 밤이어라 -최민순 옮김

 

십자가의 요한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도 신성 안에 깊이 잠겨 있었음을 이것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어두운 관상의 영역까지 어떻게 드높여지게 되는가를 잘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일러둘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너무나 흔히 예수님의 인성을 추상적으로, 그것이 마치 그분의 신성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혼은 인성을 그렇게까지 분리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말할 때는 '인간 그리스도'를 부각시키려다가 자연히 그렇게 되어 버린다. , 인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위격과 그 인간성이 결합되어 있음을 전제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실상 인간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다. 예수라고 불리는 이 구체적 실존 안에 온전한 인간성을 지니고 계시며, 또한 그 위격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성도 거기에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의 주된 아름다움은 그분의 신성에 있으며, 이것이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대하게 하고 또한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영혼은 될 수 있는 한 깊이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며, 자연히 그분의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을 보려고 그분 앞에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의 시선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온전히 현존하는 그분(성체)께 다가가면서 으레 그 신성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스도께 다가가면서 영혼은 또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분 안에서 관상의 주요 대상을 발견한다. 사랑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 그분의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이처럼 사랑에 머물게 한 것은 그분(감실)을 바라보는 눈, 거룩한 그분을(성체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리스도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관상을 방해하지 않으며, 영혼은 그 생각을 그리스도의 신성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관상으로 옮겨 가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얻어지는 관상적 인식은 강생의 신비를 깊이 알아듣게 하고 그 신비의 높이와 더 큰 가치를 깨닫게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더욱 깊은 '감각'을 지니게 해준다. 만일 신성에 관한 관상이 지성으로 얻어지는 그 어떤 개념적 인식보다도 훨씬 풍요로운 하나님께 대한 감각을 지니게 해 주는 것이라면, 우리의 시선이 신성에서 강생의 신비로 내려갈 때라도 하나님께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전에 맛보았던 하나님의 더없는 위대하심과 지극히 높으심을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겸손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감동케 하며, 우리에게 오시기까지 몸소 완전히 낮추신 하나님의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더할 나위 없이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영가에서,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일치의 관상을 즐길 때, 관상적 빛 안에서 신성과 강생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 서로를 깨우쳐 주며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실 십자가의 요한은 그때 영혼과 사랑으로 맺어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과 덕들에 대한 앎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비밀들을 깨달으면서 얻게 되는 기쁨과 맛을 즐길 것이다. 앞서 말한 비밀들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정의, 자비, 지혜, 권능, 애덕 등 많은 개념들도 깨달을 것이다."(영가37,2) 다른 번역자는 "다만 하나님이요 사람이시라는 신비뿐만 아니라, 그러한 신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볼 수 있는 정의, 자애, 예지, 능력, 사랑, 이 밖에 하나님의 여러 덕과 속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생기는 기쁨도 함께 맛볼 것이다."라고 썼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더욱 깊은 인식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심오하게 통찰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곧 이어 그 깨달음은 강생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아듣게 해 준다.

그다지 높지 못한 관상의 영역에서는 물론 앞서 말한 경우만큼은 현저하지 않지만 같은 사실을 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관상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생기고, 바로 그 감각에 의해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강생의 신비에서는, 하나님의 이 위대하심이 '말씀'이 신분의 위격 안에서 그분의 인성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깨달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스승을, 또한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정배가 되게 하시는 우리의 정배를 알아보게 해 주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정배가 되게 하시어 당신 생명에 참여케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을 기르시면서 당신께 동화되게 하셔서 마침내 하나님과 결합되기에 더욱 어울리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영혼은 신뢰와 사랑으로 거룩하신 정배를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자신의 갈망과 필요와 희망을 그분께 말씀드린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 전체와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영가의 모든 구절에서, 우리는 영혼과 정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넘치는 사귐과 대화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 그리스도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이 그분을 알게 되고 그 무엇보다도 최고의 아름다움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관상 중에 그 아름다움을 체험할 때, 영혼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인성이라는 베일 아래 숨기고 계신 사랑의 정배를 더더욱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은 언제나 찬미 받으시고 사랑받으실 영혼의 인도자이자 빛이며 힘이다. 비록 영혼은 매우 연약하지만, 예수님의 힘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이렇게 '사랑에 넘쳐 다 맡기고 임에게 의지하면서'(8:5 참조) 가다가, 도중에 적의(敵意)와 장해를 만나더라도 두려움 없이 맞서게 될 것이다. 영혼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처럼 어두운 지하도에 있을지라도 영혼은 차분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자기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지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시며 마침내 복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실 것을 믿으면서 안심하기 때문이다.

 

 

19장 예수님은.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