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관상과 활동

     

 

1. 수덕과 신비의 통합

      

1. 영과 육 사이의 내적 분열

 

이제 우리는 관상과 활동 사이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인 우리 삶에서 활동과 기도를 어떻게 통합시킬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먼저 통합 개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통합이란 융합하는 것, 하나로 만드는 것, 완성하는 것, 불충분한 것 · 불완전한 것 · 부분적인 것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죄를 짓게 되면 통합되지 못한다. 마음이 갈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로 향하기가 어렵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활동을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내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데레사 성녀는 활동과 관상을 통합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수덕과 신비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수덕은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신비는 관상적 삶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분열은 우리의 영과 몸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분열된 것을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해 수덕실천의 노력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 안에 내적 분열이 일어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형제와 멀어지며 나아가 모든 창조물과의 조화로움도 깨어진다.

죄의 놀랄 만한 결과는 인간의 모습을 변형시켜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죽음으로 치닫게 하는 내면적이고 극적인 투쟁과 깊은 고뇌 속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의식을 분열시킨다. 바울 사도는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깊이 탄식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23).

비록 인간이 세례를 통해 구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영혼은 몸과 결합해 있기 때문에 내적으로 온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본능의 무질서함 때문에 자신 안에서 대립과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무질서한 자신의 이러한 정신 상태는 통합을 향하여 끊임없이 질서 지워지고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의 자유와 일치는 외부에서 오는 유혹과 내부에서 오는 탐욕 때문에 계속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우리 안에는 육의 원리와 영의 원리라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둘은 서로를 반대한다.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은 노예의 표시라기보다 창조된 새로운 생명을 간직한 거룩한 성전이다. 그러나 아직도 죄악의 빗 찌꺼기가 남아있어 항구하게 투쟁을 해야 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감으로써 "육의 욕망"에 저항하도록 권고한다.

다시 말해 육이 그리스도인의 원수라면 자신의 원수는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감으로써 '육의 욕망'에 저항하도록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에 누룩처럼 침투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악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를 충동하는 것이 더는 본성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도록 함으로써 나의 영이 하나님께 온전한 찬미와 경외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는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 인격적이며 숙고와 노력이 뒤따르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는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이해할 때 고행과 수덕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행은 원죄로 말미암아 깨진 균형과 조화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우리 존재의 수정 · 교육 · 정화의 차원을 표시한다. 고행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은총의 활동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죄는 영적인 생활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모든 이가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거부할 수 없는 실재이다. 데레사는 죄에 대항하는 모습을 기술할 때 정화의 측면보다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측면을 더 강조한다. 정화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투쟁을 통한 정화를 말하고자 함이다. 죄는 영속적이며 역동적 실재다.

죄는 우리 삶의 부정적 요소로 삶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절대적 회개와 적극적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영적 전통에서 말하는 두 가지 전형적인 밤, 곧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을 지나야 한다. 이 두 밤을 지나기 위해서는 계속되는 위험과 투쟁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영적 성장과 통합은 개성을 무질서하게 발전시켜 나가거나 자신을 아무렇게나 되어 가도록 내맡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통합을 향한 적극적인 움직임이며 선택을 통해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포기가 뒤따라야 할 뿐 아니라 통합을 방해하는 것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2. 고행을 전제한 기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을 때 마음이 갈라지게 된다. 따라서 갈라진 마음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바로 고행이며 수덕적 행위다. 통합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육의 욕심에 맞서 싸워야 한다. 성녀 데레사 역시 한때 자신의 마음이 갈라짐을 발견하였고 그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모은 통합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를 동반한 고행적(수덕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합일은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하고 덕을 닦으며 자기 본연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수덕적 노력과 합일을 향해 적극적으로 추구한 데서 오는 결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레사의 생각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만) 관상의 생수에 도달하게 도와주는 신비적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덕생활의 실천이 요구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수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행 또한 적절하고도 질서 있게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고행이 없는 신비는 없다. 덕이 없는 기도도 없다. 그러므로 고행()은 기도의 서막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을 '흠 없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인간의 조건을 하나님의 은총에 부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서 고행은 인간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는 덕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령 향상이 없다 하더라도 주님이 당신의 참 친구에게 내리고자 하시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충분히 얻어 입을 만큼 완전한 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아무튼 조금씩 천국의 길을 알게 됩니다. 굳건히 참아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틀림없다고 나는 믿습니다."(자서전8.5)라고 데레사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와 사랑과 영의 자유를 가져오는 덕을 고행의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하고, 이와 별도의 수덕적 체제 안에서 영적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고행을 위해 기교적 방법을 주장하거나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열광주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토마스 알바레즈 신부가 지적한 대로 데레사는 고행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고 분별심을 갖도록 요구한다. "또 어떤 수녀들은 제 몸을 제가 괴롭히고 있는데 이것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흔히 하는 말투로 단 하루도 가지 못할 고행을 무턱대고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는 악마가 넌지시 그런 것은 몸에 해롭다느니 하고 씌우는 바람에 그만 무서워 달아나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회칙이 명하는 보속마저 할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완덕의 길10,6).

고행은 자기 학대나 어떤 목적도 없이 의지를 굳게 만드는 엄격주의자들의 수련 도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고행은 영혼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도와주는 인격적 협조다. 이런 고행은 영혼의 시선을 자기에게보다 하나님께 향하게 하므로 고행 자체에 신비적 씨앗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영혼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넘어서기 전에 먼저 집착하는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야 한다.

주님은 영혼들이 갈라지지 않고 유보하지 않는 온전한 마음을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주님께 드리는 온전한 선물이다. 주님을 위해 절대적 사랑을 감소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들은 이미 자신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끊어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고백한다. "나 자신을 떠나야 한다는 것, 나를 끊어버린다는 것, 이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신한테 집착하고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완덕의 길10,2).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이며 전투다. 고행은 그리스도인 삶 자체와 하나가 될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표현이고 형상이다. 이런 사실에서 덕에 미치는 고행의 적극적 영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덕은 고행과 연결되어 있으며 거기에 의존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덕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총을 통해 신비적으로 주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잠재적이고 가능한 상태에만 머무르고 말 것이기 때문에 늘 역동적으로 발전되고 현실화되어야 한다.

기도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고행의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성녀 데레사는 일정한 시간표라든가 실천 방법으로 이루어진 정형화된 계획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성녀의 독특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세 가지 덕을 닦을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형제적 사랑과 이탈과 겸손이다.

하나님과 합일하기 위해 고행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하더라도 고행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훈련을 강화시키는 은수 교부들의 삶을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데레사는 그러한 움직임, 곧 교부들의 삶을 새롭게 고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운동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힘을 강제로 끌어들여 육신을 제어하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조절하며 그 힘을 좋은 일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활동할 때 자기 힘만을 절대적으로 믿게 되면 인간의 개성은 타락하고 은총 역시 적절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얻지 못하게 되어 내적 성장이 불가능하게 된다. 고행의 고유한 임무는 의지와 협력하여 은총이 머물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데레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고행은 소극적인 동시에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있다. 소극적 측면의 고행은 은총이 진행되는 과정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며 적극적 측면의 고행은 은총의 길을 손쉽게 만드는 방법을 증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행은 모든 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열정까지 내맡기는 것이며 교회 안에서 더욱 참되고 풍성한 봉사를 위해 성령의 손길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들은 개인적 포기와 정화를 거쳐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들의 자연적 특성을 극복함으로써 순수한 활동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이처럼 고행은 내적 · 외적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교회 안에서 새롭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영적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고행을 통해 자신의 내적 태도를 올바르게 수정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 이것이 고행의 시작이며 기본 의무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목표인 하나님과 우리의 인격적 만남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고행을 통해 그것을 올바르게 준비해야 한다.

이제 최초의 고행과 기도 사이의 상호관계를 요약한다. 곧 영적 생활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는 다소 봉인되었지만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균형잡힌 고행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도생활은 기도를 위하여 질서 있게 방향 잡은 고행적 삶 위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3. 주님의 파스카 신비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고행

 

가끔 우리는 고행적 삶과 신비적 삶을 지나치게 구분하거나 분리한다. 신앙인들의 삶은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실현방법은 각각 다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고행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신비적 삶만이 하나님과의 합일에 유일한 길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삶이 모두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공통된 목적 달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서 어떤 삶이 한동안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 고행적 삶과 신비적 삶을 지나치게 분리하거나 한쪽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두 가지 삶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같은 샘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합일을 향하는 길에서 서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행과 신비의 공통된 뿌리는 세례이다. 말하자면 세례가 고행과 신비, 수덕과 신비생활의 공통된 원천인 것이다. 그러기에 고행은 신비적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고행은 수덕으로 방향 지어진 것이기에 덕을 향상시키고, 덕이 향상되면 신비생활을 잘 준비할 수 있으므로 참된 고행은 신비적인 합일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때문에 영성생활을 연구한 박사들은 초심자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는 모든 고행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탱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포기와 이탈, 정화를 용이하게 하는 감각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고행은 파스카 사건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의 표지 아래 놓여 있으며 그분의 풍요로운 은총과 선물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신비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행은 세례의 실존을 살아가는 은총의 활동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세례를 통해 시작된 일련의 과정을 우리 안 깊은 곳에 이르도록 완성하는 성령의 움직임에 응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고행을 첫 번째 은총의 완성과 역동성을 가진 세례와 연결하여 바라보았다.

고행의 뿌리는 지극히 성사적이다. 수행자는 자신 안에서 새로운 생활력이 옛 인간을 압도할 때마다 파스카사건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자신 안에 거처하시는 역동적인 성령께 적극적이고 유순하게 협조하여 자신들의 실재를 변화시키고 변모시키는 일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가능해진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세례로써 그의 실존을 뒤집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파스카인 복음적 케리그마(kerygma),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파스카는 새로운 인간의 원리로서 죽음에서 삶으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것이며, 낡은 인간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인간이 수행하는 고행의 토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행은 그 원천과 목표인 주님의 파스카를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께 동화하는 궁극적 결과에 이르게 하는 신비를 나타내는데 고행은 이 세례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시말하면 고행한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안에, 또 우리 곁에 있는 악과 죄를 이겨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데레사의 고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을 향한 것이다. 완덕의 여정에 있는 데레사의 고행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특성을 담고 있는 초기 규칙을 새롭게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향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며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는 것이다. 단순히 삶의 중요한 순간뿐 아니라 일상적인 일들에서도 고행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수단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행은 그분을 따라 살고 그분을 닮아가는 끊임없는 여정이다. 하나님의 선물과 인간의 노력이 완전하게 협력함으로써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분과 닮아가는 여정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은 고통에서 사랑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일상적인 삶의 결실도 인간의 업적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신적인 지혜라는 자비로운 중재가 필요하다.

이 진리를 강조할 만한 근거는 의지의 합일이 영혼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통상적인 삶도 절대적으로 자신의 힘에만 기초를 둔 고행적인 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레사의 생각을 살펴보면 영혼이 하는 일은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합치시키는 데 필요한 경향'을 준비하는 정도다. 고행적 삶이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덕도 순수하게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산물이 아니다.

모든 덕의 활동은 기도의 한 형태처럼 하나님께 들어 높여져야 한다. 그 까닭은 단순히 덕스러운 노력을 수행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효과를 우리가 얻기 위함이다. 앞서 살펴본 고행에 대한 이런 신비적 시각은 데레사가 선택하고 수행한 덕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은총의 일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아무것도 아닌 이 하찮은 노력에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하신 힘을 합쳐주시고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 주시면, 당신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의 갚음이 됩니다."(영혼의 성5,2.5)

이 모든 고행은 우리가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것이다. 가끔 주님은 우리 내면을 특별한 빛으로 비추시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며 우리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서 철저하게 떼어놓으신다. 그 때문에 어떤 순간에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에 수동적으로 오로지 협조할 뿐인 것이다. 이것이 관상생활의 시작인데 이로써 주님은 당신의 중재적인 은혜로써 우리의 신앙과 애덕을 살아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요약하면, 성녀 데레사에게 고행은 신비, 곧 하나님과의 합일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고행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하여 성화의 신비적 행위라는 큰일을 준비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인 의미가 있으며, 실질적인 일이 된다. 고행적 삶과 신비적 삶은 영적인 단계와 영적 관계에 따라서 그 비중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늘 함께 나아가야한다는 것도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4. 신비에서 고행으로

 

데레사 성녀의 영적 여정에서는 먼저 고행적 삶 (또는 수덕적 삶)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신비적 삶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데레사는 신비적 삶에서 멈추지 않는다. 신비의 정상에 도달한 후에도 고행적 삶을 계속해 나간다. 그때 영혼은 다른 영혼들을 구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또 다른 차원의 고행적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행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적 고행의 최정상을 나타내는 제7궁방에서는 도중에 경험하게 되는 희열 앞에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구원 활동에 협조할 필요성이 새롭게 요청되는 것이다. "정말로 영적 인간이 되는 길을 알고 싶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 십자가의 낙인이 찍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자유를 고스란히 바쳐서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전 인류의 노예로 자기를 파소서.'하는 것입니다."(영혼의 성7,4.8)

수도생활의 일차적 목표인 하나님을 추구함은 자신을 개인 영역 안으로만 가두어 버리는 이기적인 삶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신비적 여행을 한 데레사는 영적 정상에서 결코 이기적인 만족에 안주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곧 사랑으로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신적 교통으로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멸망해 가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수천 번 생명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의 보편적 계획과 굳게 결속되고자한다.

우리의 시선을 소극적 차원의 고행(기도와 금욕 또는 보속의 삶의 관계)에 집중하면, 고행과 신비 그리고 기도의 관계에 대해 명백하고도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단 한 권의 성인전에서도 위대하고 거룩한 관상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듯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기도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격렬한 보속으로 이끌렸는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결연히 주장한다. "기도와 안락한 삶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완덕의 길, 바야도리드 파, 4,2) 이어서 회칙을 예로 들면서 말한다. "우리의 초대 회칙에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본분을 있는 정성을 다하여 지킨다면 수도회가 명하는 단식재와 금육재, 고행과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데레사의 고행적 신비체험은 교회에 대한 봉사로서 기도의 삶과 동일시된다. 이는 가르멜의 이상적 삶으로서 수도원 개혁의 초기부터 그녀가 확고하게 주장한 것이다. "나는 (성요셉 수도원에서) 나의 보잘것없는 기도로써 주님께 봉사합니다. 그리고 자매들에게도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 성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기도드리는 데 치중하도록 이끌었습니다."(창립사, 1,6)

고행과 신비생활의 관계에 관하여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오히려 은총이라는 같은 원천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별개로 독자적인 의지만으로 고행을 하거나 수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뿐만 아니라 고행과 신비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는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고행과 신비의 길은 모두에게 적용되며 그 길에서 서로를 돕고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영적 여정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고행의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주님을 잘 섬기게 하고 영혼 구원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 이 때문에 고행과 신비의 길은 주님을 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하나가 된다.

 

 

2.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통합

 

 

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

 

20년 동안 데레사가 겪은 위기는 그녀가 발한 동정 서원에 관한 것이었다. "데레사의 삶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투쟁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했다. 데레사는 그녀의 삶의 초기부터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사람들과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실존적 응답을 얻는 데 전념했다."

실제로 데레사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사랑 사이의 조화를 찾기 위해 여러 해 동안 투쟁한 후 해결점을 찾게 된다. '주님과 수년간 관계를 맺은 후'가 아니고는 활동에 열중할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 해 동안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주님의 선물과 기쁨을 받은 후에, 어려운 일을 하면서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이런 위로와 기쁨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영혼은 이웃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생각, 7,7)

수도서원에서 결정적인 회개에 이르기까지 데레사의 생애 전 기간이 두 가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어느 사랑도 나쁜 것이 아니지만 어느 한 쪽만의 사랑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므로 한쪽의 사랑에 머물다가 또 다른 쪽의 사랑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적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반복되었고, 데레사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갈등이었으며 투쟁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느 때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또 어느 때는 사람들과 관계되는 수천 개의 작은 이야기들이 데레사의 삶을 수놓았고 이들은 그녀의 삶에서 서로 경쟁하는 듯 했다. 그녀는 '그 두 적에서 화해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데레사 성녀는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데 본인이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동료 수녀들에게 활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권고했다. 기도로 하나님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아주 견고한 덕'을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도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애덕이 식게 되고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며 미지근한 사랑을 목격할 위험이 따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나무에 달린 열매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데레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의 원천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언제나 우선권을 갖는다. "만일 하나님 사랑의 뿌리에서 탄생하지 않으면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영혼의 성, 5,3.9)

하나님의 사랑이 그토록 중요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이웃사랑을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이웃 사랑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질적인 지표이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데레사의 신념이지만 그렇다고 이웃 사랑을 단순히 하나님 사랑의 부산물쯤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형제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게 측정할 수 있다.' 종종 형제애와 이웃 사랑의 증대는 여러 단계의 기도와 관상이 참되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또한 틀별히 사도적 열정의 표명으로써, 교회를 위한 임무로써 사랑의 진위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이웃 사랑은 자신의 선물을 통해 이웃에 봉사함으로써 하나님 사랑이 꽃을 피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사랑이 넘쳐나게 된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에게서 영혼들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이러한 영적 궤도는 관상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성소이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이웃 사랑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데레사는 단순히 상상 속에 머무는 갈망을 신뢰하지 않으며, 행동과 들어맞지 않는 덕도 믿지 않는다. 애덕은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살아 있고 성장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것을 깊이 반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만 완전히 하고 있다면, 이것으로써 할 일은 다 했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 본성이란 좋지 못한 것이어서 사랑도 하나님 사랑에 뿌리를 박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이웃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5,3.8)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단순하게 두 가지 계명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둘은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참된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를 성장하게 한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이웃을 돕는 데 게으른 마음은 하나님과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없다. 이 상태에 있는 영혼은 위험한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누군가 깊은 관상적 생활을 한다면 이웃이 도움을 요청할 때 쉽게 관상에서 활동으로 옮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관상생활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기 힘들다 하더라도 그를 안식으로 붙들어둔,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을 향한 바로 그 사랑이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형제를 돕도록 그를 밖으로 떠밀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진실하다면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 우리의 노동을 통해, 우리의 우정을 통해 당신 친히 이웃을 우리 안에서 사랑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웃 사랑이 방해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불충분함을 나타내는 표시일 수 있다. 이처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의 온갖 불꽃은 하나님 현현으로서 하나의 계시이다.

데레사의 영적 여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마침내 성녀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진실하고 고유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님을 환대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만 한다. 마르다는 이웃 사랑을, 마리아는 하나님 사랑을 나타낸다. 실제로 기도생활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횃불이 된다. 이 불길에서 영혼은 자기 형제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선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모든 선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이제 영적으로 자유로워진다. 더는 활동이 영혼의 관상적 합일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분열로 인해 고민한 데레사는 오랜 영적 여정 끝에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불꽃이 하나의 촛불이 됨을 보면서 그 해답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사랑이 진정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2.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통합 원리이신 그리스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며, 두 가지는 동시에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두 가지 사랑의 계명이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큰 휫불 안에서 하나가 되지만 데레사 성녀가 이 두 계명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는지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데레사는 사실 신학적인 중대한 문제에 직면한다. 이 문제를 풀기위해 다음 질문에 실존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두 가지 큰 계명을 진실로 "유사한 것들"이 되게 종합하는 공간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 가지 큰 계명을 조화시킬 수 있는 어떤 구심점이나 원리가 있는가?'하고 질문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랑을 통합할 수 있는 큰 사랑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 한 가지가 제시될 때 그 일을 위해 노동하고 수고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 일을 하는 동기가 의무에 의한 것이든, 이웃의 유익을 위한 것이든, 또 다른 이유에서든 그 일을 하는 여러 가지 목적을 하나의 목적으로 모을 구심점이 필요해진다. 갈라진 여러 목표나 사랑을 하나로 묶어주는 통합 원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통합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분 안에서 통합의 끈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타의 다른 이유에 머물기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고 그분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자비로운 활동 규범이 최후의 심판에서 선포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심판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25:31-46).

데레사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열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지상 과제는 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분열 상태를 다시 통합해야 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 때문에 데레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필요했다.

성 어거스틴이 잘 이해했듯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므로 인간은 혼자서 그 간격을 메울 수 없다. 인간은 혼자서 하나님과 합일에 이를 수 없어 중재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 중재자가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도달하는 유일한 ''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방황하며 보냈던 성 어거스틴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내면에서 분열된 인간이 통합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충만한 힘을 얻는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세세대대에 걸쳐 모든 것 위에 찬미를 받으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기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고백록, 7,18,24)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사이의 갈등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점을 찾았다. 데레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으로써 하나의 사랑이지만 두 개의 사랑으로 갈라지는 내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생애에 걸쳐 그리스도께 크나큰 신심을 간직했습니다. 이 사정은(그리스도의 인성을 버려둠을 뜻함) 마지막 일, 곧 주님에게서 나에게 황홀이나 현시의 은총을 아직 받잡기 이전 시기의 끝 무렵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처럼 심한 착각은 아주 짧은 동안이었고, 그 뒤에 나는 여느 때처럼 주님과 함께 있는 가운데서 나의 기쁨을 찾고자 하는 방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특별히 영성체할 때 그러했습니다. ‥‥ , 임이시여, 좀 더 큰 선을 위해 당신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어떻게 단 한 시간인들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온갖 선이 당신에게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내게로 왔단 말입니까!"(자서전, 22,4)

그리스도교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말하는데, 이 사랑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 사랑은 무의미하다.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에게도 이웃에게도 도달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육화의 첫 순간에 이미 자신 안에 모든 이를 취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사랑이 가능해진다.

합일시키는 사랑이 어떻게 갈라질 수 있는가? 사랑은 하나로 모으는 힘을 지니고 있어 서로를 갈라지지 않게 만든다.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분열시키지 않는다. 만일 사랑이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면 그 사랑은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사랑의 근원을 토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우리의 일치를 완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므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사랑받으실 분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랑이 가능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가지 사랑이 하나의 사랑이 된다.

이제 더욱 분명하게 창조주를 사랑하는 것과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주를 사랑하는 것과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의 갈등과 분열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랑 안에서 극복된다. 문제는 피조물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아니라 피조물에 도달하기 위한 적합한 방법을 찾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전해 주신 사랑에 더욱 닮아가는 사랑이며(완덕의 길, 11,1참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과 닮은 사심 없는 사랑이다.(완덕의 길, 11,4참조) 그러기 위해서는 신약의 점진적이고 정화하는 광휘가 우리의 땅을 온전히 덮어야 할 것이다. 그 광휘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다.

그분은 진리이시며 영광이시고 매력적이시며 매혹적이시고 전능한 능력자이시며 살아 있는 책이시다. 데레사에게 육화와 종말은 부활하신 분의 현존에 힘입어 긴장하는 두 개의 극이 아니라 서로 만나는 극이 된다. 둘째 계명은 진정 첫째 계명과 비슷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정 하나와 다른 하나가 분리되지 않으시는, 진실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혼자만의 기도 시간을 갖더라도 두 극은 함께 자라야 한다. 데레사의 결론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중재성에서 도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데레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고 흐뭇해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영혼이 겸손 되이 성자를 중재자로 받들고, 그분에 대해 크나큰 사랑을 품으며, 또한 높은 관상으로 이끄시려 해도 앞에서 말한 대로 스스로 자기를 합당치 못한 자로 인정하며, 베드로 성인과 함께 '저는 죄인이오니 주님, 저를 떠나주소서.' 하고 말씀드리는 것을 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십니다."(자서전, 22,11)

 

 

 

3. 관상과 활동의 목표인 성화

 

 

1. 기도의 열매인 성화

 

우리는 고행과 신비의 관계를 살펴본 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관상과 성화관계를 규명할 것이다. 관상은 궁극적으로 성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관상가는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관상과 성화라는 말을 서로 대체하여 사용할 수 있다. 관상과 성화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공동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관상기도는 성화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도 하다.

데레사는 관상의 이러한 가치를 잊어버리지 않았지만, 동료 수녀들 모두에게 공공연히 관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화는 활동과 관상을 중재하고 설명하는 개념이다.

하나님과의 우정인 그리스도인의 길에 대한 데레사 성녀의 교의는 성화를 향한 보편적 부르심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이가 보편적으로 성화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대중들에게 기도의 중요성과 그 여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일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가르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데레사는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초대할 때 보편성을 많이 강조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초대를 받았으며, 하나님에게서 거룩함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또한 모든 이가 거룩함에 이르는 관상의 생수로 향하는 길을 가도록 촉구받는다.

그런데 세례는 성화에 이르는 데 필요한 가장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서원이므로, 완덕으로 부르심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리고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각자는 애덕의 완성으로 매진할 의무를 지닌다.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자들의 복음적 권고도 세례를 완성하기 위함이며, 복음적 권고에 대한 서원의 목표도 성화의 완성을 위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세례 은총의 더욱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복음적 권고를 서원하여 사랑의 열정과 완전한 하나님 예배를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에서 해방되고자 하며, 하나님 섬김에 더욱 깊이 봉헌되는 것이다."(인류의 빛44) 곧 수도자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화라는 같은 소명을 자신 안에 충만히 실현해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강조하는 것이다.

세례로 시작해 성장하는 신비생활은 성화를 향해 가며, 그 안에서 활동하는 신적 은총과 역동성, 성령의 활동과 삼위의 신비에 대한 광대함 안에서 발전하고 통찰하는 능력을 만들어 내는 선물을 의식하는 것이다.

영혼의 성에서 제시한 합일과 융합이라는 기초 개념은 데레사에게 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내리게 한다. 거룩함과 완덕은 하나님과 영혼의 합일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레사는 성화가 하나님께서 영혼을 온전히 소유하실 때 이룰 수 있는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때라야 영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 사도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진정 합일을 구하는 모든 고행은 낡은 인간이 죽고 새로운 인간이 되어가는 일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성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함에 대하여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은 만일 사람이 그분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드리지 않는다면 당신도 전적으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전적인 선물은 데레사가 그토록 차근차근 가르친 덕의 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형제적 사랑, 이탈, 무엇보다도 이러한 두 덕과 긴밀히 연결된 겸손함이다.

우리는 데레사의 펜 끝을 통하여 먼저 고행의 길을 살펴보고, 신비적인 길로 들어서는 성화 여정의 자취를 살펴보고 있다. 영혼은 그의 모든 경험을 거쳐 삼위의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그의 여정을 끝맺게 된다.

고행은 가르멜에서 사는 사람처럼 축성된 사람이든,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 안에서 선을 베풀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데, 특히 영성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성화로 나아가기 위한 고행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오로지 고행만 한다거나 오로지 신비주의로만 빠지는 양극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사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곧 순수한 고행과 순수한 신비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성화에 이르는 보편적 소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화로 나아가는 여정에는 반드시 사랑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단 두 가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만 철저하게 지키면 우리는 당신 뜻을 이루는 것이 되고, 따라서 당신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영혼의 성, 5,3.7)

곧 성화란 그분의 사랑 안에 잠기기 위해 그분께 도달하는 것이며,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적인 경험 안에서 조금씩 하나님의 절대성에 사로잡히게 되며 합일 안에서 삼위의 신비를 관통하게 된다. 성부께서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지음을 받으시며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합일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만남에서 발하시는 사랑의 영이다.

교통하시는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봉헌한 봉쇄 수도자가 참여하는 것이다. 성화는 영혼의 충만한 완전함이며 그 완전함은 측량할 길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완성에 이르도록 촉구한다. 하나님은 모든 이가 성화되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관상의 궁극 목적은 성화이다. 가장 훌륭한 관상가의 일차적인 특징도 거룩함이고, 헌신적이고 봉사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성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활동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나 관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에게 공동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제 타락으로 말미암아 갈라진 인간의 영혼은 성화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로 통합된다. 성화는 활동과 관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끈이다.

 

 

2. 교회 안에서 활동의 원천이 되는 성화

 

모든 사람은 성화로 불림 받았다. 이러한 성화는 자기 만족이라는 틀 속에 폐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웃을 향하여 열려 있다. 그러므로 참된 성화는 활동의 원천이다. 성화를 위한 노력 없이는 활동주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활동은 성화에서 나와야하며 거룩함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성녀는 성화란 하나님과의 합일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수라는 상징(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참조)을 염두에 두고 완덕의 길 19장을 살펴보면 관상과 성화의 관계를 알게 될 것이다. 관상은 영혼을 성화시키고 그 효과로써 덕을 향상시킨다. 그러므로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주저 없이 그것을 관상가들의 덕이라고 부르겠습니다."(완덕의 길, 16,4)

데레사는 동료 수녀들이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목됨으로써 성화되기를 바랐는데, 이러한 성화는 하나님 왕국을 위한 신적 선물인 성령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관상, 곧 하나님과의 합일에서 나오는 성화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원천이 된다.

완덕(성화)과 사도직은 사랑의 충만이라는 같은 실재를 드러내 주는 한 긴밀히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사실 데레사는 완덕과 사도직을 동등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완덕이 사도직을 수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완덕을 사도직에 종속시킨 듯하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주님께 비는 것을 잘 알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성 안에는 이미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원수에게 넘어가지 않기를, 이 도성의 장상과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시기를 빌어야합니다. 그분들 대부분이 수도회에 딸려 있는 만큼, 성소와 완덕에 있어 남달리 뛰어나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3,2)

성화의 정점은 형제들에 대한 봉사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이나 특별히 수도자들의 첫 번째 사도직 사명이나 봉사는 개인적인 성화의 직접적인 열매가 되어야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수도생활 쇄신에 관한 교령에서도 관상 수도회의 역할을 중요시하며 그 생활양식이 거룩하게 보존되어야함을 천명하고 있다. "모든 삶을 포용하고 자기 자신을 증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더욱 긴밀히 합일할수록 그만큼 교회의 활력은 증대되며 사도직도 활력을 얻고 풍성해진다." "그들은 성덕의 풍부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 백성에게 모범과 자랑이 되며, 하나님께는 풍요로운 사도직을 돌려드린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교회의 영광이 되고 천상 은총이 솟아나는 샘이 된다."

교회적인 이러한 봉사는 보편적이며 구체적이고 효과적이며 특별히 그리스도적이다. 데레사는 사도직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원했다. 예컨대 많은 신자의 지지를 얻고 그들을 매료시킨 프란치스코나 도미니코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인격과 말과 모범이 특별한 봉사의 원천이 된다.

"보십시오. 단 하나의 영혼을 쓰심으로써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영혼을 당신께 이끌어들이시는지를. 여기에 생각이 미칠 때, 우리는 저 순교자들과 성녀 우르술라 같은 처녀 하나로 해서 몇 천 명이 회심했다는 사실을 두고 얼마나 주님을 찬미해야 하겠습니까? 악마는 도미니코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 그리고 다른 대수도회의 창립자 때문에 무수한 영혼을 잃었을 테고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 신부님으로 인해서 아직도 잃고 있는 중입니다."(영혼의 성, 5,4.6)

데레사 성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고 열정적인 단 한 사람이 미지근한 많은 사람보다 더욱 유익하다.'는 것을 이렇게 확신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상태에까지 도달해 까마득히 솟아올랐다가 악마의 빈틈없는 꾐에 말려들어 그만 악마의 손으로 넘어간 것을 나는 압니다. 여러 번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마는 그런 영혼 하나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혼을 망치는 셈이니 저 지옥이 온통 힘을 합칠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단하나의 영혼을 쓰심으로써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영혼을 당신께 이끄시는지를."(영혼의 성, 5,4,6)

완덕의 길 첫 장에서 데레사는 자신의 딸 같은 열두 명의 수녀들을 두고 직접 언급한다. 그들이 비록 관상적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귀중한 사도직을 수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데레사의 생각은 선발된 군인들이 일반적인 군인들보다 더욱 용기 있게 싸우고 더욱 많은 결실을 보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터에서도 관상으로 영웅적인 덕을 실천한 영혼들이 단순한 신자들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교황 바울 6세는 "현대인들이 영적 대가들의 증언을 기꺼이 듣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증거자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가르친다. 베드로 사도는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라고 설교함으로써 증거의 중요성을 전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도 행동과 생활로 세상을 복음화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교회는 이 세상 권력자들 앞에서 가난하고 초연하고 자유로우신 주님께 충실한 삶의 증언을 수단으로 세상을 말씀과 거룩함으로 복음화하는 것이다.

또한 증거자는 사랑의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 데레사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한다. 사실 교회의 선익과 영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한 영혼이 더욱 거룩할수록 교회는 비옥해지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잘 도울 수 있다. 또한 누군가 사랑을 많이 실천하면 더욱 훌륭히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진정 순수한 관상 중에 있는 영혼이 사랑의 가장 완전한 행동을 수행한다는 신비가들의 가르침이 진실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데레사 성녀의 경험에서 관상이라는 단어를 성화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관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만큼 성화는 더욱 증진된다. 그리고 관상을 통해 도달한 성화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 그렇게되면 거룩함(성화) 안에서 관상과 활동 사이의 갈등은 사라진다. 관상생활과 활동의 궁극적인 공동 목표는 인간 구원으로서 이 둘은 거룩함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성인들은 이웃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서 이웃을 바라본다. 그들은 사랑의 이 두 가지 형태 안에서 관상과 활동을 하나로 모은다. 그러기에 성화는 관상과 활동을 하나로 묶어주는 통합 윈리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성화는 모든 관상과와 활동가들이 나아가야 할 공동목표이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적인 개념이며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성화되어야 한다. 모두가 성화의 길로 걸어가야한다. 따라서 성화를 지향하는 사람은 관상과 활동의 선택이라는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4. 관상과 활동의 통합

 

 

1. 통합적 인간 활동과 관상의 조화

 

관상과 활동 간의 통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통합이라는 말 안에 개인 차원의 통합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그리스도인들의 신비체 안에서 종말론적 의미의 통합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데레사도 통합이란 말 안에 두 가지 의미를 포함시켜 생각했다. 첫째는 개인 완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통합이며 둘째는 그리스도 신비체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통합이다.

성녀는 단순히 개인 완성만을 지향한 통합이 아니라 몸과 머리 사이의 통합,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모든 그리스도인의 통합을 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개별적 차원의 통합 의미를 살펴보고 이어서 몸과 머리의 전체적 통합을 살펴볼 것이다. 사실 데레사는 두번째의 통합, 곧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통합됨을 목표로 삼았기에 이것이 달성되기 전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데레사가 기도생활의 가장 높은 단계인 관상과 사도직 삶의 통합에 도달했다고는 하지만, 이 통합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궁방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데레사는 관상과 활동, 그리고 이웃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이의 간격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성녀는 초심자들에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염려하라고 권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약간의 영적인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자만과 허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관상과 활동, 이웃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이의 간격은 마음의 분열에서 나온다. 분열된 영혼은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죄 탓에 흐트러진 기능들을 조금씩 모아들여야 한다.

이제 관상의 단계에 따라서 영혼의 모든 기능이 어떻게 통합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통상적으로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가 시작되는 기도의 첫 번째 순간에 개입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러한 기도를 관상기도로 바꾸어 놓으신다. 이 관상기도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관상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영적 여정을 시작한 영혼들이 이루는 하나님과의 합일 단계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관상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하나님과 이루는 합일도 깊어진다. 데레사는 한 인간의 통합과정에서 의지의 합일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완덕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순수한 관상이 시작되는 고요의 기도를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부른다. "그것은 기도의 시작입니다."(완덕의 길, 31,7) 고요의 기도에서 의지는 하나님과 합일하더라도 영혼의 다른 두 가지 기능은 일한다. "내 짐작에는 그것이 바로 의지로서, 의지만이 하나님과 결합되고 나머지 다른 기관은 자유로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기관들은 하나님 섬기는 일에는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지만, 세속 일에는 무디어지고 때로는 아주 바보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31,4)

영혼이 하나님과 더욱 깊이 합일될 때 단순한 합일의 기도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영혼의 모든 기능을 당신께로 합일시키신다. 데레사는 제5궁방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합일에 대해 말할 때 두 가지 특징을 꼽는다. 곧 고요의 기도에서는 신적 교통이 단지 의지에만 주어지는데 비해 여기서는 영혼의 전 능력에 걸쳐 주어지는 것이다.

관상의 이러한 형태는 온전히 수동적인데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그러한 크나큰 선을 방해할 어떤 상념이나 기억, 지성도 활동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진정한 합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악마도 해를 끼칠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이 영혼의 본질과 하나가 되셨고 그 영혼과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악마는 이곳에 접근할 수 없고 이런 신비적인 비밀을 알 수도 없다.

이러한 기도에서 영혼은 성장하지만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은데 이는 하나님과의 합일에 아직도 온전히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덕에 나아갔다고는 할지언정 (다음에 또 말하겠지만) 아직은 하나님 뜻에 온전히 바쳐지지 못한 까닭입니다. 비록 하나님 뜻을 맞추려고 힘은 쓸지라도 그 이상의 은혜를 받지 못한 탓으로, 그 이상 힘이 모자라는 것이 너무 슬퍼서 그저 눈물만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5,2.10)

하나님과의 합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와 완전한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 의지의 합일로 시작한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정말 합일되었으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 승리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평생을 두고 바라는 합일이요, 이것이 바로 내가 항상 우리 주님께 비는 합일입니다. 가장 분명하고 안전한 길입니다."(영혼의 성, 5.3.35)

하나님의 의지와 합일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영혼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에 대해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지는 두 가지 안에 계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어야 합니다."(영혼의 성, 5,3.7)

그리고 계속해서 사랑하도록 권고한다. "이웃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님께 빌면서 일체를 그분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이 힘닿는 데까지 힘을 쓰고 또 쓰면, 바라는 그 이상으로 주님께서 힘을 주실 것입니다."(영혼의 성, 5,3,12)

그리하여 신비적 약혼 단계인 제6궁방에 들어서면 영혼의 의지는 대부분 하나님과 합일한다. "이렇게 깨끗하게 된 영혼을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주십니다. 이것은 그 둘밖에 아무도 모르게 진행됩니다만 그 사람 자신조차 그 경위를 모릅니다. 그렇기에 비록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그 뒤에 어떻다는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누가 기절한다든지 심한 발작을 일으켜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와 다르기 때문입니다."(영혼의 성, 6,4.3)

비록 영적 약혼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이 친밀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안정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아직도 분리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영적 약혼은 이와 달리 흔히 서로 갈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합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둘이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합일이지만, 대부분 우리가 보듯이 둘이 떨어져서 따로따로 저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2,4)

마침내 영혼은 완전한 합일, 곧 영적 생활의 정상에 도달한다. 여기서는 주님과 비슷하게 되는 변모를 통하여 하나님과 영혼의 완전한 합일이 본질적으로 견고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변모된 합일' 또는 '사랑의 유사함을 통한 합일'이라고 일컬어진다.

"합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두 자루의 촛불을 한끝에다 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순간 불빛은 온통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해 심지와 불빛, 초가 온통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그러나 다음에 따로 떼어 놓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다시 두 자루로 남는 것뿐 아니라 심지와 초를 갈라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영적 혼인) 하늘에서 강이나 우물로 떨어지는 물과 같이 똑같은 물이 되어버려 강물과 그 안에 떨어진 물을 나눌 수도, 따로 갈라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2.4)

영적 보고서에서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물을 머금은 스펀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나의 영혼은 신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변모이며 신비체험의 열매다. 이제 인격은 그리스도로 변화되고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상이 명백히 각인된다.

영혼이 합일의 그러한 높이에 도달할 때 그 조건과 상태는 앞 단계의 조건과 상태와는 매우 다르다. 합일의 강도와 친밀성 때문에 덕은 안정되고 자신의 본질에 깊이 뿌리박히게 된다. 그 덕이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의 부유함과 무상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어 그러한 부유를 자신에게만 남겨두지 않고 교회의 형제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애덕과 겸손함으로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기 시작하는 것이다.

데레사는 단순한 합일의 은총과 영적 결혼의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합일에 따르는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합일의 해소성과 불가해소성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므로 합일의 은혜가 쉽사리 지나간 다음에는 영혼이 의식하는 그 임과 사귐이 없이 저 혼자 남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혼인의 은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항상 그 핵심에 하나님과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영혼의 성, 7,2.4)

데레사가 출판한 마지막 책들에서 기도와 관상생활의 높은 단계에서는 실질적으로 활동과 관상이 조화롭게, 그리고 내적으로 상호 침투하듯이 서로 융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도생활의 정점에서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 효과적으로 하나의 불꽃을 형성한다. 이 불꽃 안에서 영혼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한다. 이때 영혼은 관상적 합일에서 가장 자유로워진다.

최고의 관상가들 안에서는 활동과 관상 사이의 갈등이 완전히 극복된다. 그들에게 활동과 관상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서로를 양육한다. 사실 영적 생활의 정상에서 관상과 활동은 가장 완전한 조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조화는 영혼의 심부에서 실현된 하나님과의 상존 합일의 결실로 외적 활동 가운데에서도 내면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신적 사랑의 샘이 외적 활동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솟아나고 양육하는 것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합일은 커다란 활동의 꽃들을 피워내는 토양(humus)이다. 사도들은 이런 활동들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영을 부어주시는 분께 늘 되돌아가야 한다. 이런 고양된 단계에서 시작한 활동은 언제나 하나님 능력의 인장이 새겨지게 된다. 그때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향기를 발산하게 된다.

내향성과 외향성의 이러한 통합은, 영적 수련에 매진하는 한 영혼이 영적 약혼에 이르고, 그 후 영적 혼인에 도달할 때 특별히 잘 드러난다. 고양된 단계에서는 위대한 일을 하시며 숨어 계신 분의 현존이 신비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실재적이다. 여기서부터 사도직의 풍요로운 결실은 영혼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서 영혼을 통하여 주님께서 이끌어내시는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말한다.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란히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잘 모시고 항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께 푸대접을 하지 않고 잡수실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언니의 도움이 없었던들 마리아가 어떻게 주님 곁에 줄곧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잡수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모든 방법을 다 써서 사람들을 당신께 이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토록 주님을 찬미하게 말입니다."(영혼의 성, 7,4,12)

영적 혼인은 수난을 겪고 안식을 취하는 것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을 해결하는 것이다. 영혼은 평화와 조화와 하나님의 의지와 완전한 일치를 성취한다. "이런 영혼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만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나 다 좋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아 받으라는 것이 당신 뜻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좋은 일, 그러지 말라 하셔도 그전처럼 슬퍼할 것도 없는것입니다."(영혼의 성, 7,3.4)

데레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P 2)라는 시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의 손 안에 온전히 맡기는 것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다. 데레사의 시를 통해 활동과 관상의 통합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 완전히 순명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께서 저의 안식을 원하신다면

저는 사랑으로 안식을 취하겠어요.

당신께서 저에게 일하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죽기로

온 힘을 써서 그렇게 하겠어요.

저에게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할지를 말해 주세요

다정한 사랑이시여,

말씀해 주세요, 말씀 좀 해주세요.

저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혼의 합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와 결합되어 있다. 분열된 영혼은 회개와 정화를 거쳐 하나님과의 합일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통합의 증대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으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과의 합일 없이 통합될 수 없다. 만일 영혼이 하나님과 완전히 합일한다면 분열된 자신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 된 영혼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이로써 활동과 관상은 통합된 인간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영적 정상에 도달한 이들에게는 사도직과 관상의 두 가지 목적 사이에 반목이 있을 수 없다. 데레사는 일, 곧 활동을 하되 이일은 드높은 생각(하나님과의 합일)을 통해 잘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기 위해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회칙을 잘 준수하자고 말한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뻔합니다. 곧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큰 도움은 드높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써, 이는 그에 상응한 행동을 하도록 힘을 줍니다. 우리의 회칙과 회헌을 조심성 있게 완전히 지키기로 노력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완덕의 길, 4,1)

 

 

 

2. 관상과 활동의 통합을 이루는 기본 관점

 

1). 관상과 활동의 통합 원리인 사랑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데레사 성녀는 영적 정상에 도달했을 때 활동과 관상의 조화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합일의 열매이다. 영혼의 의지가 하나님 의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활동과 관상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영적 정상에서 관상과 활동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 정상에 이르기 전에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곧 영적 정상에 이르기 전에도 기도와 활동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규칙에 따라 기도와 활동의 시간을 분배한다. 그러나 관상과 활동의 진정한 조화를 원한다면 단순히 자신의 시간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조화롭게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데레사가 가르멜을 개혁하고자 했을 때, 수녀들에게 기도와 활동을 동시에 하도록 요청했다. 아직도 영적 정상에 도달하지 않은 수녀들에게 관상과 활동을 끊임없이 함께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데레사는 영적 정상에 도달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어떤 이유로 아직도 미성숙한 수녀들에게 두 가지 일을 함께하도록 했을까? 그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동기와 힘은 교회를 향한 사랑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동일한 실재이므로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데레사 성녀는 수녀들에게 적어도 약간의 분별심만 있다면 그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있다고 권고했다.

이를 위해서는 관상과 활동을 통합하는 참된 요소를 알아야 한다. 관상의 절정에서 얻어지는 통합의 결실이 있기 전에도 관상과 활동이라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삶을 하나로 모아주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 원리에 대한 인식 없이 활동과 관상을 함께한다면 부작용이 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둘을 통합시키는가? 무엇이 활동과 관상 사이의 통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가? 어느 영적 단계에서든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데레사에게 기도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활동이다. 이것은 기도가 주님과 정답게 이야기 나누며 우정을 맺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성녀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던 확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데레사의 기도에서 지성도 필요불가결한 역할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다. 데레사의 기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성임에도 그것마저도 사랑과 비교할 때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지성은 주인공인 의지와 사랑에 종속되는 것이다. 기도하기 위해 지성을 많이 써야 하거나 말을 잘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논리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건강을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이 사랑할 필요가 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일에 열정적이게 하고 더 많이 기도하게 한다.

애덕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 애덕 안에 기도의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하나님과의 합일을 원하고 그 합일을 통하여 더욱 효과적인 기도를 하고자하는 이들은 기도의 밑바탕에 애덕을 제외해서는 안된다.

애덕은 하나님과 영혼을 묶어주는 통합 원리로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애덕은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다른 덕을 자라게 하는 생명이기도 하다. 곧 신학적 애덕의 열정과 실행은 다른 주부덕을 증대시키는 열쇠다. 성인이 되기를 원하고 자기 안에 모든 초자연적 덕의 능력을 간직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러한 덕을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애덕이다. 애덕은 모든 덕의 영혼이며 생명이다.

관상의 가장 높은 단계는 초자연적 주입적 관상이다.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신비가들은 관상이라는 이름을 이 같은 최고 단계의 관상에 특별히 유보해 불렀다. 데레사는 살라망카 신학자들이 내린 '사랑의 영향 아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응시'라는 정의를 훌륭하게 실현한 것이다.

17세기 영성생활의 대가 랄만트(Lallemant)신부가 관상에 대해 내린 정의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관상이란 하나님이나 신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곧 사랑에서 발하고 사랑으로 향하는 단순하고 자유롭고 통찰하는 응시다. 여기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애덕이 활동한다. 사랑은 애덕의 원리이고 과업이며 목적이다."

랄만트 신부가 말한 대로 관상은 사랑에서 발하는 것이며 사랑으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관상가는 활동할 때 반드시 애덕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애덕은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나는데, 형제적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두 가지 옷을 입은 이 사랑이 형제를 위하여 헌신 · 봉사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장애나 산만을 제거한다. 성령의 충동 아래 있는 이는 관상에 전념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데 활동이 더는 장애가 되지 못한다.

데레사는 수녀들에게 활동을 요청하면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그녀의 이러한 사도적 태도는 자기만족만 추구하는 이들이 행동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개인주의적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거짓 인격주의자들의 삶과도 거리가 멀다.

데레사의 마음을 빼앗는 그녀의 유일한 근심거리가 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데레사는 자신의 모든 기도와 활동이 이웃과 교회로 방향 지워지기를 바랐다.

참된 신비가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비가는 누구이며 어떤 사명으로 살아가는가? 신비가는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성령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최고로 인식(eplgnosis)하는 이들이다.(참조: 1:9)

그들은 전체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증언한다. 그들은 사랑의 체험을 통해 신앙과 애덕 안에서 교통하고, 초자연적 인식으로 하나님을 느끼며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덕은 활동에 속한다. 덕은 애덕으로 습득되고, 애덕 안에서 꽃 피우고 향유하며, 애덕에 기초를 두고 또한 그 안에서 보존된다. 애덕은 여러 가지 덕을 서로 연결해 주는 중심이다. 애덕은 다른 덕을 자라게 하고 분발시켜주는 영양분이다. 사랑은 영혼 안에 덕을 결합하고 유지시킨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4) 그것은 모든 능력을 합일시키고 자신을 내어 주게 하고 하나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게 하며 그분께 속한 것을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덕이다. '보다 더 큰 일들'을 준비하도록 초대하는, 오해 받으시는 '사랑'께서 한탄하시며 데레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내 딸아!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는 어찌 그렇게도 드문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 비밀을 감추지 않으리라. 너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그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네가 곧바로 깨칠 수 없는 이 진리는 네 영혼이 거기서 이끌어 내는 이익으로써 뚜렷이 알게되리라."(자서전, 40.1)

이처럼 사랑만이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까지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고통과 사랑 사이의 내적 관계를 확인해 준다. "그런데 나는 긴 금화살을 손에 든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화살 끝에는 불이 조금 붙어 있었던 것같이 생각됩니다. 그는 때때로 그것을 내 심장을 통해 오장육부까지 꿰뚫었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뺄 때는 내 내장마저 다 빼 간 것 같았으며, 나를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으로 온통 타오르게 했습니다."

데레사는 관상이나 활동 중 그 어느 하나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특징지을 수 없을 정도의 경지까지 도달한다. 이제 사도직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그만큼 하나님을 환영하고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르다도 함께 활동하는, 사랑이라는 유일한 법의 힘을 얻어 관상과 활동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진정 사랑은 모든 활동과 관상의 합일 원리가 된다.

 

2). 하나님과 의지()의 합일

내적 일과 외적 일은 물론이고 어떠한 영적 상태에서도 사랑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의지다. 의지는 영적 성장으로 나아가는 데 활동과 관상에 균형을 잡아 주는 중요한 요소다. 데레사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며 그분만으로 충분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허무의 깊이를 알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엄위를 인식하고 깨달아야한다. 영혼이 자기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면 서로가 명령을 내릴 만큼 놀라운 일이 생긴다.

"여기서부터 주님은 영혼과 지극한 사이가 되시어 당신께 바쳤던 의지를 돌려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의지를 주시며 바꿈질을 하십니다. 서로 번갈아서 명령을 내릴 만큼 지극한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영혼이 청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영혼도 그분이 명하시는 것을 채워드립니다. 주님이 영혼을 좀 더 완벽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전능하시어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하시고 그 원하심은 끝이 없으십니다."(완덕의 길, 32,12)

비록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비접근성에도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으며, 거룩하신 그분의 의지와 만날 수 있고, 그분 안에 인간의 안식이 있다. 데레사는 의지의 합일에 대한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진정 합일했으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 승리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평생을 두고 바라는 합일이요, 이것이 바로 내가 항상 우리 주님께 비는 합일입니다. 가장 분명하고 안전한 길입니다."(영혼의 성, 5,3.5)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아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가 올바른 길을 가지 않으므로 데레사는 그들의 구원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자기 수녀들에게 길 잃어 위험에 빠진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여러분의 성소이며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완덕위 길, 1,5)

우리는 성화 안에서 관상과 활동이 통합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성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곧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가장 높은 완덕이란 내적 기쁨 또는 신기한 탈혼이나 현시, 예언 같은 데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차리는 것, 곧 전력을 다하여 그것을 원하고 우리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합치시키는 것입니다."(창립사, 5,10)

하나님께 의지를 봉헌하면 그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큰 주인이 된다. 우리가 의지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 편에서도 얼마나 너그럽게 알뜰히 돌보아 주시는지‥‥ 자기 의지와 이성을 주님께 복종시켰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 능력의 주인이 되게 마련하십니다. 이리하여 일단 자신의 주인이 되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는 완전해집니다."(창립사, 5,12)

데레사는 수녀들에게 순명하도록 권고한다. 그 까닭은 순명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와 부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웃어른의 뜻 외에 다른 것은 갖지 않고 사람에게 복종할수록 우리는 자기 주인이 되어 하나님 뜻에 우리 뜻을 맞추게 됩니다."(창립사, 5,13)

하나님의 일에 대한 사도들의 협력은 무엇보다 신적 의지에 내적으로 얼마나 순응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께 자기 의지를 드렸다고 해서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영적인 정상에 가까이 가면 오히려 하나님과 의지의 교환이 시작된다. "당신의 의지를 주시며 바꿈질을 하십니다."(완덕의 길, 32,12)

무슨 일을 하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한다면 어떤 순간에도 기도와 외적 활동 사이에 갈등이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가 기도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활동에 그 가치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영혼들은 행동으로 남을 도울 수 없을 때엔 기도로 일합니다. 그리고 숱한 영혼이 멸망하는 것을 괴로워하며 그저 지나칠 수가 없어 주님께 간곡히 기도드리고, 자신의 즐거움 같은 것은 아예 문제 삼지도 않습니다. 기쁨을 버린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개인의 만족 따위는 잊어버린 채 오로지 주님 뜻만을 채우려는 생각뿐이지요."(창립사, 5,5)

데레사는 생애 마지막 무렵에 종말론적 움직임과 육화의 움직임 사이에 충만함과 균형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지와 충만한 합치를 이루는 이냐시오 성인의 '무관심'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의지는 그분의 의지 외에 다른 것은 원하지 않으며 그분을 거슬러서 어떤 작은 행위도 하지 않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는 이제 죽든지 살든지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복종하게 됩니다."(영적 보고서, 6,7)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합일하려는 노력은 모든 상태의 영혼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활동과 관상 사이의 갈등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

영적 여정에서 요구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반드시 실천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종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 영혼은 순종에 민첩할 것이다.

데레사는 창립사에서 순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사랑하려고 결심하고 당신께 온전히 내맡긴 영혼에게 당신은 꼭 한 가지 밖에 다른 것은 더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것과 무엇이 당신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 영혼이 순명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외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영적 진보를 염려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창립사, 5,6)

이처럼 순종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맡기기 쉬울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드높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순명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은 기도와 활동 사이의 갈등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 이들은 온갖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며 나아가 분열된 내적 인간을 하나로 모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분열된 인간성을 하나로 모으는 또 하나의 통합 요소이다.

 

맺음말

 

데레사 성녀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삶이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여정이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기도생활은 필수적이다. 성녀의 견해에 따르면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 관계이며 본질적으로 신적인 의지 안에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기도생활은 완덕을 향하여 나아가는 생활로서 그것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에서는 인간적인 노력이 요구되고, 그다음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힘이 조금씩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하나님의 힘이 강해질수록 인간의 노력은 감소되어 마침내 관상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순수한 활동은 관상생활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신비적인 경험을 한 후에 영혼이 더욱 활동적이 되고 사심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신적 의지로 영혼의 마음을 변모시키는 하나님과 그 영혼의 우정은 영혼에게 애덕을 완성하게 하고, 사랑이며 존재 자체이신분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하나가 된 상대를 위하여 진심으로 봉사하고자 한다.

참된 우정은 둘만의 이기주의가 아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는 서로의 선을 바란다. 하나님과 영혼의 우정 관계인 참된 기도는 이기적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 정신의 원천이 된다.

기도생활은 영적인 혼인에서 얻게 되는 완덕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신비적인 경험이 기도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덕의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를 위한 활동을 할 때까지 기도생활은 계속 성장해 가야한다.

데레사는 활동과 관상의 통합에 도달하기 위해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결국 그 통합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안에서 통합되는데 그리스도는 진실로 하나님이시며 진실로 인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육화되셨으므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실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불꽃을 형성한다. 바로 이 불꽃에서 영혼은 하나님의 모든 선()이 자신의 선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완전히 하나가 된다. 이것이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다. 영혼은 이 최고의 영적 단계에 도달해 온전히 자유로워지며 이곳에서는 사도직활동과 관상적 합일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으며 동시에 훈련되어야한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주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것이 데레사의 생각이며 영적 통합을 이룬 이들의 삶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을 환대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에서 데레사는 육화와 종말이 서로 긴장상태에 있는 두 축이 아니라 수렴되는 하나의 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데레사에 의하면 참되고 완전한 합일은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과 그리스도 사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레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통합)가 될 때까지 결코 편히 쉬지 못할 것이다. 데레사의 긴 여정은 통합의 과정이며, 완전한 통합의 영성은 그의 삶의 정점에서 발견될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20장 관상과 활동.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