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새로운 대륙에 전해지다

 

 

1. 서방교회에 전해진 수도원

 

동방교회에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은 수도원은 서방교회로 전해졌고, 역시 고유한 신앙 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서방교회사에 특별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특별히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프랑크 왕국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서의 역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수도원은 야만족인 게르만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가르치는 역할뿐 아니라, 로마제국의 기독교를 매개로 전해진 그리스-로마 문명과 문화를 유럽에 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서방에서 문화를 보존하는 자와 전승하는

자로서, 서방의 역사를 그리스-로마 사상과 연결된 기독교 문화로 만드는 창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로마, 이탈리아

동방교회에서 기독교의 제도적 기관으로 발전한 수도원과 금욕적 삶의 방식은 여러 경로를 거쳐 서방 기독교에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이자 삼위일체 논쟁으로 유명한 아타나시우스(Athana sius), 제롬(Hieronymus),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2/35)가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개인 금욕적 수도방식을, 제롬과 카시아누스는 공동생활과 규칙을 따르는 생활방식을 서방에 전달했다. 그 결과 4-7세기에 30여 종류의 수도원 규칙이 서방에 소개되었고, 이 규칙들을 바탕으로 6-7세기에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kt von Nursia)가 독자적 규칙을 만들어, 이것이 후대에 서방교회의 수도원을 대표하는 규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서방 라틴 지역에 은둔이나 금욕의 수도 형태가 알려진 것은 4세기경으로,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놓고 벌어진 삼위일체 논쟁 때문에 유배를 당해 서방에 가 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이다. 그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동·서방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렇게 영향을 받은 인물 중에는 서방교회 신학의 거성인 히포의 어거스틴(Aueustinus von Hippo, 354-430)과 성서 번역으로 유명한 장로 제롬(Hieronymus, 340/50-420)이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저서인 고백록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해 처음 들었던 장면을 묘사해 놓고 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의 친구 폰티아누스가 찾아와서, 그에게 자신이 만났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제의 특사였던 이 젊은이가 어느 기독교인이 건네준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읽고 감동을 받고, 또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신성을 사모한 나머지, 황제의 특사라는 자신의 일도 내버리고 약혼 계획도 취소한 채 수도생활로 전향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세례받기 전이었던 어거스틴도 이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수도자적인 금욕생활로 뛰어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서방에 알려진 금욕적 수도자의 삶은 주교나 영적 지도자, 또는 신학자들이나 남녀 평신도들이 함께 모여서 수도자의 이상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4-5세기에 서방에 나타났던 금욕적 수도자의 모습은 이탈리아의 로마, 베르첼리, 밀라노와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역, 또 조금 후대인 6세기에는 영국의 스코틀랜드까지 확대되었다. 초기에 수도자 이상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서방교회에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로는 주교 베르첼리의 유세비우스(Eusebius von Vercelli, ✝371), 마일란드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von Mand, 1397), 갈리아에 살았던 투르의 마틴(Martin von Tours, ✝431) 그리고 놀라의 파울리누스(Paulinus von Nola, ✝431) 등을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에 세워졌던 금욕적 수도 공동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제롬이다. 그는 382년에서 384년까지 삼 년 동안 로마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만난 아베틴의 부유한 과부인 마르셀라를 도와 이 집을 금욕적 공동체로 만들게 된다. 이들은 함께 살면서 금욕적이며 영적인 생활을 하는데, 제롬은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수도원 전통과 신학이 서로 연결되는 고리를 만든다. 제롬이 떠난 후 마르셀라는 공동체를 시골로 옮겨 여성들만의 금욕 공동체로 만들고, 로마 지역에 금욕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다.

한편 이탈리아의 베르첼리에서는 주교 유세비우스가 성직자들을 모아 공동생활을 하면서 금욕의 삶을 실천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처음 나타난 성직자수도원이다. 그 외 암브로시우스의 영향 하에 세워진 금욕 수도원들이 있고, 시칠리아섬에도 역시 수도원이 세워졌다.

 

갈리아, 스페인

로마와 이탈리아 지역에 수도원이 세워지자, 로마의 영향이 미치고 있던 갈리아와 스페인 지역 그리고 아일랜드(즉, 영국)까지 금욕적 수도방식이 전파되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오늘날의 유럽 지역에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가 수도원 이상을 동방교회에서 배워 온 이유와 동일하다. 당시의 로마 귀족들은 문화적으로 월등하게 앞선 동로마의 모든 것을 따라 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것이 로마와 이탈리아 지역에 금욕적 수도원 이상이 뿌리내리게 된 배경이 되었다. 특히 수도원 생활은 로마의 귀족계급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던 목가적 생활방식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에 로마 귀족계급이 수도원 생활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스페인이나 갈리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귀족들이 동방교회를 배우고 싶은 만큼이나 로마를 따라 하고 싶어 했다. (무조건 모방하고 따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로마가 당시 서방세계의 문화적 중심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따라 세워졌는지는 모르지만 스페인에도 4세기경에 이미 금욕적 형태가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사라고사(saragossa) 종교회의(380년) 등에 나타난 기록은 이를 뒷받침하는데 스페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주교였던 프리스킬리안의 예가 그러하다. 그는 완전한 금욕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다가 마니교로 고발되어 죽음을 당했다.

갈리아 지역의 수도원도 로마나 이탈리아처럼 은퇴한 귀족계급에 의해 주도되었다. 아를의 호노라투스(Honoratus von Arles, ?~429/30)는 405-410년경 지중해 근해에 있는 섬인 레린(Lerin)에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갈리아 동남부에 수도원 문화를 세우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곳은 귀족적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금욕 경향과 함께 학문적 경향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찾았고, 또 많은 새로운 수도원이 세워졌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많은 수의 주교들이 이곳에서 나오게 된다. 호노라투스는 428년에 남 갈리아 지역 아를의 수석 대주교가 되었다.

이 레린 수도원은 6세기 초반에 갈리아 지역의 수도원을 대표하는 인물인 아를의 케사리우스(Caesarius von Arles, 470-542)를 길러낸다. 케사리우스는 여자 수도원을 위한 포괄적인 규칙과 수도자들을 위한 간단한 규칙을 저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동방 수도원에서의 경험, 요한 카시아누스의 주장들, 또 그가 정리한 '어거스틴 규칙' 등을 참고해서 수도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 역시 공동생활을 강조하며, 그 근거로 어거스틴 규칙을 내세우고 있다. 그에게서는 특히 예배의 축제적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마르세유의 수도원은 좀 특별한 경로로 세워진다. 415년 요한네스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c. 360~430/35)가 마르세유로 왔다. 그는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수도자가 된 다음, 이집트수도원에서 10년 동안 수도자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 탁월한 설교 수도자는 로마를 거쳐서 마르세유에 와서 남자를 위한 수도원과 여자를 위한 수도원을 세우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가르쳤다. 특별히 그는 수도원 제도와 주된 죄의 극복을 위한 여덟 가지 그리고 24교부 금언집이라는 책을 통해서 수도원 이론을 정립했고, 그 결과 서방교회에서 최초의 탁월한 수도원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수도원은 영적으로 지도해야 한다는 수도원 영성을 제창해서 서방교회 수도원의 아버지인 베네딕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라틴 수도원의 특징이 된 수도사들의 '성무일과(聖務日課)',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동기도', 이때 시편을 12편씩 낭송하는 '낭송 기도' 등을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편 낭송 기도는 낭송자가 시편을 한 편 낭송하면 나머지 수도자들이 앉아서 듣고, 들은 후에 그 구절을 따라 침묵하며 명상 기도를 드리고, 마지막 시편은 각 절마다 수도자들이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방식이다. 아침과 저녁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이후 서방 수도원에서 아침 찬양 기도(라우데, Laude)와 저녁 찬양 기도(베스퍼, Vesper)로 정형화 되었다.

 

 

2. 아일랜드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원

 

서방교회 고유의 특징을 가진 수도원은 영국의 아일랜드에

서 나타난 독특한 수도원과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베네딕트 수도원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두 수도원 역시 완전한 서방교회의 자생적인 수도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방문화와 결합되어 서방교회 특유의 수도원을 만들어낸 모태가 된 것은 분명하다. 특별히 아일랜드의 수도원은 유럽문화 발전의 기반을 구축한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배경을 제공했기 때문에, 유럽역사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동방교회에서 전해진 기독교 수도원은 서방교회의 문화와 연합해서 독자적 모델을 만들어 가는데, 그것의 시작점은 아일랜드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다시 말해 서방 수도원은 아일랜드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원에 의해 토착화되었던 것이다.

 

아일랜드 수도원

아일랜드의 기독교는 성 패트럭(St. Patrick)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4세기 말 영국 서부에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그는 침입자들에게 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갔고, 수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후에 그는 갈리아 지방으로 도망쳤고, 갈리아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기도 중에 아일랜드에 선교하러 가라는 계시를 받고 주교가 된 후, 432년경 아일랜드로 갔다. 그의 전도는 성공적이어서 아일랜드 섬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 후 아일랜드의 기독교는 유럽 대륙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발전을 하게 된다. 우선 패트릭이 갈리아 지역에서 머물렀던 수도원이 이집트계의 금욕적 수도원이었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기독교가 가지는 일반적 특징은 수도원 적이고 금욕적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아일랜드에는 수도원과 교회의 차이가 없었고, 지역을 담당하는 종교 단위가 교구가 아니라 수도원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4-5세기는 지중해권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게르만족의 대 침입으로 인한 전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서유럽 전체가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이 게르만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유럽 특유의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반면에 섬나라 아일랜드는 이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아일랜드의 기독교는 유럽대륙과 전혀 다른 기독교, 즉 수도원 중심의 독특한 기독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아일랜드는 대부분 부족의 족장들이 수도원을 건립했고, 족장의 직계 가문이 관장하는 부족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주교도 임명 되었지만 주교의 역할은 성찬식을 주재하는 정도에 그쳤고, 아일랜드 기독교를 실제로 다스린 것은 수도원장이었다. 그래서 아일랜드인들은 로마 교황을 로마의 수도원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일랜드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극단적 금욕생활을 했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침묵으로 보냈고, 자주 금식을 했으며, 얼음물 속에 들어가서 몇 시간씩 기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완전한 삶을 사려고 했기 때문에 작은 잘못이 있더라도 이것을 회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상급자에게 고백하는 전통을 만들어내었다. 이 전통은 서방교회에 전해져 고해성사로 정착되었다.

아일랜드 수도자들이 했던 고행의 특별한 형태로 방랑생활이 있다. 563년 그리스도를 위해 방랑자가 되기를 원했던 성 콜룸바(St. Columba, 521-597)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이오나(Iona) 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스코틀랜드 전 지역을 유랑하며 선교활동을 해서, 스코틀랜드 기독교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 아일랜드의 또 다른 수도자인 콜룸바누스(St. Columbanus, 530?~6l5)는 590년 12명의 동료와 함께 유럽의 중심부인 부르군도 왕국을 방문하고, 보비오 수도원 등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 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수도원을 세우고 기독교를 전했는데, 이 수도원들은 유럽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고, 또 선교의 요람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자 중 대륙 선교에 탁월한 공을 세운 사람은 보니파티우스(Bonifatius)이다. 그는 8세기에, 이미 영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베네딕트 수도원의 삶의 방식과 그 규칙을 들고 독일에 선교사로 가서 수도원을 세우고, 독일에 조직 교회가 세워지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일랜드 수도원의 또 다른 특징은 배움의 열정이다. 이들은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공부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신약성경은 고대 헬라어로 적어졌고, 교부들의 저작들은 고대 그리스어와 고대 라틴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진 배움에의 열정은 고대의 순수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복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런 학문적 열정은 고전을 필사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서 고대 학문을 정립하는 결과도 남게 되었다. 이런 학문적 열정은 후에 영국 전체가 문화적으로 크게 번성하는 힘으로 작용했고, 후대에 게르만족의 역사를 기독교와 관련시켜 구원사 입장에서 서술한 게르만 최초의 교회사 책인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 674/74-375)의 앵글족 교회사( Historia ecctesiastica gentu Anvtwums,가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

서방교회 수도원의 역사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베네딕트 수도원은 서방 수도원 역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세를 지나면서 베네딕트 수도규칙이 서방의 모든 수도규칙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수도원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수도규칙이다. 법이나 규범을 중시하는 서구 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인지, 아니면 규칙을 준수하다 보니 이런 사고방식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구 수도원에서 수도규칙에 대한 존중은 특별하다. 이는 서방에서 발전한 기독교가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것, 동방에서 발전한 불교가 경전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비교된다. 법과 규범을 중시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수도원 역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서, 베네딕트 수도규칙이 서방 수도원의 대표 규칙으로 공포되었고,

베네딕트 수도원의 역사는 곧 서방 수도원의 역사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창시자이자 이 수도규칙의 저자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kt von Nur, 480?~ 547?)라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가톨릭교회의 교황제도를 확립한 최고의 교황으로 추앙받고 있는 교황 그레고리 1세(Gregor I,590-604)가 쓴 전기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로마로 공부하러 갔으나 곧 공부를 중단하고 로마 근처에 있는 험한 골짜기 속의 동굴에 살면서 은둔과 금욕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레고리 교황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공부를 중단하고 집과 재산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달성할 만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많은 고행을 했고, 마음의 탐심을 물리치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가시와 찔레밭에서 딩구는 고행으로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삼 년의 고행 후 그는 다른 금욕자들을 돕기 위해서 근교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그의 엄격함을 싫어한 수도자들 때문에 거기서 나와 독자적으로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이 529년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수도원장으로 수도 금욕자들을 돕던 베네딕트는 당시까지 전해 오던 규칙들을 참고하고, 특별히 당시에 알려져 있는 '스승의 규칙(Regula Magisteri)'을 토대로 하여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만들어냈다.

규칙은 7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론에서 그는 수도생활을"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생활"로 정의 내리고 있다. 또, 수도원의 조직은 원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규율 준수, 가난, 순결(독신), 순종을 서약해야 하며, 수도자가 된 사람들은 기도와 명상 외에도 육체노동과 공부를 할 것, 또 재산은 공유하고 공동생활을 해야 하며, 최소의 것으로 검소하게 살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베네딕트가 만든 규칙이 당시 수도원의 유일한 규범은 아니었다. 베네딕트 수도규칙이 주로 '스승의 규칙'이라고 알려진 규칙을 참고해서 만들어졌지만, 파코미우스나 어거스틴 수도규칙도 참고로 한 것이 분명하다. 또, 그의 규칙에서 바실리우스나 요한 카시아누스의 저서 또는 사막교부들의 저서까지 읽으라는 권고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에 다른 여러 규칙들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대, 즉 6세기에는 베네딕트 규칙 외에도 몇몇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서방의 수도원 발전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당시의 수도자들이 수도자 생활의 모범적 형태, 즉 수도자적 삶을 정형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수도원이나 수도자의 삶이 서방교회에 보편화되어 가면서 점차 수도자적 삶의 모범을 찾으려는 노력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도자의 모습과 질서들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이를 자신들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인 동시에, 수도자의모습을 정형화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것을 보면 3-4세기에 서방에 전해진 수도원과 수도자적 삶의 모습이 삼사백년이 지나면서는 점차 서방의 독자적 제도로 자리잡아 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7세기에 들어서면서 혼합 규칙 시대를 만들어냈다. 각 수도원에서 원장이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수도자들은 전해져 오는 규칙들을 대본으로 하고, 현실적 필요에 따라 적당한 수도규칙들을 직접 작성했는데, 서구 수도원 역사에서 이 시기를 특별히 '혼합 규칙 시대'라고 부른다. 새로운 규칙의 작성은 특별히 갈리아 지역에서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규칙은 약 30개 정도가 되는 것으로 말려져 있다. 규칙을 만들 때 대본으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된 규칙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보비오 수도원을 세운 콜룸바누스가 쓴 콜룸반 규칙과 베네딕트 규칙이었다. 이제 유럽 전역에 수도원이 많이 세워졌고, 이에 따라 수도규칙들이 전해지고, 새로운 규칙들도 씌어졌다. 베네딕트 수도규칙도 이렇게 전해진 규칙들 중 하나였다. 베네딕트 규칙은 원래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에서 만들어졌으나, 이곳이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어버리자 수도자들이 로마로 피신하면서 규칙도 가져갔고, 당시의 로마 교황이었던 필라기우스 2세(Pelagius II, 579-590)가 로마의 한 수도원에 이 피난수도자들을 위한 피신처를 제공해 주면서 로마에 알려졌다. 그 다음 교황인 그레고리 1세(Gregor I, 590-604)는 베네딕트의 전기를 쓸 만큼 베네딕트와 그의 수도규칙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규칙을 특별히 중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혼합 규칙 시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단지 많은 규칙 중 하나로 알려져 있던 것이다.

7세기 말경, 베네딕트 규칙은 프랑스(갈리아) 지역 수도원에서 수도자 생활을 했던 수도자들에 의해 영국에 전해졌다. 이 규칙은 영국에 전해지자마자 단시간에 영국 수도원 전체를 석권했다. 664년 휘트비(Whitby) 종교회의를 통해서 로마교회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한 이후, 영국에서는 이 나라에 선교사를 보냈던 교황 그레고리 1세가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로마식이라는 말은 곧 기독교의 정통 방식이라고 이해되었고, 영국의 모든 수도원들이 로마의 수도규칙, 즉 베네딕트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또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수도원들은 유럽 특히 독일에 선교사를 보내서 수도원을 건립했는데, 이때 적용한 수도규칙은 당연히 베네딕트 규칙이었고, 독일 지역에 베네딕트 규칙이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 지역에서도 영국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베네딕트 규칙이 대표성을 가진 규칙으로 자리 잡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트 규칙이 '로마의 수도규칙'으로 알려졌으며, 이러한 현상은 로마제국의 수도원들이 이를 따르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규칙은 7세기 후반 이후에 더욱 확산되어 대표성을 부여받아 영국과 프랑스(갈리아) 지역에서 로마 수도원을 대표하는 수도규칙이 되었고,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에서 '로마의 수도규칙'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 로마의 수도규칙으로 성장한 베네딕트 수도규칙은 마침내 프랑크 왕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공인된 수도규칙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이는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상황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프랑크 왕국은 정복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고, 정복된 야만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국가적인 과제였다.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소위 국가 통합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 일을 자연스럽게 수도원과 수도자들이 맡게 된다. 서방 수도자나 수도원의 특징 중 하나인 선교가 처음 시작된 배경이기도 한 이것은, 서방 수도원의 질적인 변화라고 불러도 좋을것이다. 동방 수도원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수도원들은 보통 세상으로부터의 도피(fuga mundi)를 특징으로 하는데,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수도원이 세상 속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정부의 지원 하에 새로 정복된 지역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도시를 건설했다. 이는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68-814) 때 특별히 활성화된다. 그는 영국 수도원에서 많은 학자들을 데려와서 프랑크 왕국의 학문을 크게 발달시키는 동시에, 수도원은 물론 교회들에도 학교를 설립하게 하여 대중 교육의 물꼬를 텄다. 또한 황제는 자신의 정복 전쟁을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정복 지역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했고, 이때 유력한 수단으로서 정복지에 수도윈을 세우고 수도사들을 통해 교화와 신앙 교육을 시켰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일종의 국가 공무원이 되었고, 이것은 국가 행정과 종교의 대표자는 황제라고 생각하는 샤를마뉴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수도원을 효율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서 수도규칙 역시 국가에서 관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국가의 법처럼) 모든 수도원을 단일한 규칙 하에서 관리하려는 의도로 수도원의 규칙을 통일하고자 했고, 787년 베네딕트 규칙의 표본을 자신에게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마침내 샤를마뉴의 아들로, 경건한 황제로 알려진 루이(Ludwig, 814-840) 때에 가서 결실을 맺게 된다. 이일의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은 아니안의 베네덕트(Benedikt von Aniane, ?~821)였다. 그에 의해 베네딕트 수도규칙이 유럽 수도원의 단일화된 공식 규칙(una consuetude monastica)으로 정리 되었고, 816년 8월 23일 루이 황제에 의해서 제국법으로 공식발표되었다. 마침내 베네딕트 수도규칙이 서방 수도원을 점령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구 수도원은 교회의 기관이자 국가의 한 기관으로서, 그 성격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중세 서방교회의 특정인 세상과 교회의 연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수도원이 세속 기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사회 기관으로, 신앙적인 동시에 정치수도원은 소위 종교적 그리고 이적 성격과 역할을 가진 기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곧 수도원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3. 수도원 개혁 운동

 

10세기를 전후해서 서방교회의 수도원 운동에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이 시기에 수도원 이상(理想)은 더 이상 수입해 온 이상이나 제도가 아니라 내면화된 서방 특유의 이상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서방교회의 수도원은 서방교회 역사에서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들만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회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것은 수도원의 타락을 남게 한 원인도 되지만, 서방 특유의 수도원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루니 수도원

10세기를 전후한 서방교회의 역사는 혼란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혼란의 내용은 교회권의 타락과 이종족들의 침입이다. 이것은 중세 사회를 질적으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남는다. 서방의 역사에서 중세는 대부분 전쟁이나 역병 또는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초기, 중기, 후기에 한 기간씩 전쟁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초기에 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전쟁과 혼란이 있었고, 7-8세기에는 샤를마뉴에 의해 왕국이 통일되고 안정을 찾았으나 그가 죽은 후 곧바로 바이킹, 마자르, 사라센인들이 유럽에 침입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들의 침입과 노략은 전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들은 교회나 수도원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상황은 교회나 수도원이 그들의 안전을 영주나 제후 등 정치 권력자들에게 의탁하도록 만들었다. 정치와 신앙이 하나였던 중세에 이런 모습은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 권력자들이 수도원에 실제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권력자들에게 수도원이 재산을 증식하는 수단이자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자들에게 종교권력(?)은 상당히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반대급부 없이 절대적인 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던 것이다. 전쟁과질병이 횡행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별로 없던 중세 시기에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하거나, 싸움에 이겨서, 또는 죽을 때 유산의 형테로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대형 수도원들은 막대한 영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약탈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귀족이나 권력자들에게 수도원을 노릴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편 수도자는 원래는 평신도였기 때문에 사제 서품을 받아야 할 의무가 없었고, 교황 등 교권 세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원장이 된다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도원 방어나 신앙을 핑계 삼아 가족이나 친지를 수도원장 자리에 앉히거나, 경우에 따라 직접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마침내 수도원장이나 성직자의 자리를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매매'가 일반화되는 결과를 날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소위 개혁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은 누구나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교회나 정치권은 자신들에 주어진 점은 특권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개혁을 시도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힘을 가진 집단이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비판 세력이나 저항 세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도 된다.) 교회나 수도원 역시 스스로 개혁 세력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908-910년 사이에 아퀴테인의 빌헬름(Wilhelm von Aqutanien) 공작이 부르군도의 클루니 지방에 있는 자신의 사냥터를 수도원 터로 제공하면서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도와 예배 외에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수도원장 선출 역시 수도자들에게 맡겼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과 함께, 또 최후의 심판이라는 위협 아래 간절히 탄원합니다. 그 어느 세속 군주, 영주 혹은 주교들이라 할지라도 강제로 수도원장을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수도원에 관한 일체를 부르노라는 이름의 수도원장에게 맡겼다. 이 수도원의 화두는 당연히 수도원 개혁이었다. 개혁을 위해서 클루니(Cluny) 수도원 수도자들은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글자 그대로 지키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그 구체적인 모습은 규칙에 정해진 대로 하루 일과를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이 남긴 글을 보면, 그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루를 지낸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그들이 하루 종일 예매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예배는 물론 베네딕트 규칙이 아침 찬양에서 저녁기도까지 정해 놓은 규칙을 따른 결과였다.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예배의 회복'으로 보였고, 신앙의 경건을 잃어버렸던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클루니의 '예배의 회복'은 단순히 베네딕트 규칙을 그대로 준수한다는 의미 이상을 내포했다. 이는 당시 귀족이나 권력자들, 또 고위 성직자들이 사유재산으로 여기던 수도원이 그 본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당연히 많은 수도원들이 권력자의 간섭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저항의 방식은 개개의 수도원이 클루니 수도원 같은 유력한 개혁 수도원의 지(支)수도원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일종의 연합체 형태를 구성했던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은 성공을 거두어 수도윈과 종교권에 대한 권력의 개입을 차단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개혁이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개혁 수도회 출신 수도자들이 고위 성직자나 교황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당시의 고질적 병폐였던 성직매매와 맞서 싸웠고, 마침내 교회개혁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수도자 출신 중에서 교회개혁 운동을 일으킨 가장 대표적 인물이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와 싸워서 승리를 이끌어낸 교황 그레고리 7세로, 그는 카놋사의 굴욕(1077년)이라는 대사건을 만들어내어 중세시대 교회의 우위를 확고하게 다진 장본인이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수도원 역사로 보면) 수도자들의 신앙 회복이 교회질서를 새롭게 만들어낸 흔치 않은 사건이며, 또한 수도자들이 세상일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 성공은 후유증을 만들어냈다. 수도원과 수도자들이 세상일에 너무 개입하면서 수도원 자체가 지나치게 세속화되었던 것이다. 클루니 수도원과 그 밖의 개혁 수도원들은 지나치게 부유하고 비대해졌다. 또한 이미 민중들 속에 깊이 뿌리박힌 기독교 신앙은 참된 경건의 모습을 찾았고, 그것을 수도자들에게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끝없이 높아졌다. 수도원에는 수도자들보다 수도원에서 고용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수도원의 마구간은 말들로 넘쳐났다. 당시에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말이 넘처나서 매 수도자에게 배당되고도 남았다는 사실은 당시 수도자들의 현실을 잘보여준다. 이것은 수도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의미하지만, 금욕과 은둔 속에서 신성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상은 약화되었다는 또 다른 이면도 내포한다.

 

시토 수도원

클루니를 통해 시작된 수도원 개혁 운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회개혁을 이룬 클루니 수도원이 그 맡은 사명을 다하자, 수도원 본래의 이상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맡을 수도원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 수도원이 역시 클루니와 마찬가지로부르군도 지방에 세워진, 역사적으로 시토 수도원(Zisterzienser) 이라고 알려진 것이다(1098년). 이들 역시 베네딕트 수도규칙의 준수를 앞세웠으나 그 구체적 내용은 좀 달랐다. 그들은 베네딕트 수도규칙 안에서 자신들을 위한 복음의 실질적 해석을 목적으로 했다. 클루니가 사회나 교회 등 외적인 부분들, 흔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면, 시토 수도원은 수도자들의 원래 이상인 수도자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길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시토회 총회 지침은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는 침묵과 세상에서 분리된 분위기 속에서 산다. 그리고 관상(觀想) 중에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살도록 조장해 주며 또한 그러한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새로운 수도원의 특징은 침묵과 은둔으로 요약된다. 침

묵과 은둔이라는 이상을 따랐기에 시토 수도원과, 또 이 수도원의 이상을 따르는 많은 수도원들은 대부분 황야나 척박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다시금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 힘을 쏟았다. 이들은 철저한 공동생활, 자가 경작을 통한 자급자족, 규칙을 따른 관상 기도,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聖讀, 성경을 하나님이 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묵상하면서 읽는 성경 읽기 방법) 등을 지켰다.

서구 역사에서 10-11세기는 여러모로 전환의 시기이다. 아랍권에 의해 막혀 있던 지중해 교역이 새로 시작되면서 초기 자본주의가 나타나 봉건주의가 쇠락하며, 새로운 시민계급이 태동하고 도시가 형성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시민계급이 나타나면서 교회나 교권에 의한 신앙의 독점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하다. 이렇게 개인 신앙고백을 중요시하는 모습은 바로 시토 수도원 이상을 따르는 수도원과 수도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것에서 확인된다. 새로운 수도원들은 클루니와 마찬가지로 모(母)수도원, 자(子)수도원의 관계를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수도원들은 11-12세기에 유럽 전역에 수백 개가 넘게 세워졌다.

이렇게 확장된 수도원 세력은 그들의 이상인 침묵과 은둔에 머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십자군 전쟁, 시민계급의 태동, 자본주의의 시작 등 여러 가지 시대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수도사들이 직접 십자군에 가담하든가, 가담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는 등 사회 문제에 직·간접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모-자 수도원 관계로 강력한 통일성과 연대체계를 갖고 있던 수도원들은 사회적으로 거대한 권력 기관이 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수도원과 유명한 수도자는 말 그대로 교회의 실세였다.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hard von Clairvaux, 1090-1153)가 그 중 한 사람으로, 그는 교황에 선출된 적은 없었지만 교황보다 높은 사람이었다. 그가 지명하는 사람이 곧 교황이 되었던 것이다. 수도원 생활에 신비주의적 경향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그는 십자군 문제, 신학 문제, 사회 문제, 교권 문제 등 모든 것에 참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서방교회 전체를 움직이는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12세기쯤 되면서 시토 수도원의 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클루니에서 시작된 세속 권력과의 단절, 시토를 통한 수도원 고유 이상의 회복은 성공했지만, 그들이 사회적 세력이 되자 수도자들은 다시 개인적 은둔과 침묵을 원했던 것이다. 마침 새롭게 부상한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신앙을 더 이상 교회나 수도원에 기대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 수도자의 이상을 따르고자 했다. 물론 이 이상은 시토 수도자들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은둔과 금욕이라는 수도자의 이상이 수도원 담을 넘어 일반인들에게까지 파급되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12세기에 새로운 수도원들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제3장 새로운 대륙으로.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