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유럽의, 유럽인에 의한 수도원

 

 

 

1. 새로운 수도원 운동

 

클루니 수도원에서 시토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교회개혁 운

동은 일반 평신도들의 신앙 각성 운동과 서로 맞물리게 된다. 10세기를 전후해서 나타난 유럽의 변화 중, 도시의 형성과 번성이 외부적 특징이라면, 그 내면적 특징은 십자군전쟁으로인한 기사계급의 출현과 지중해 교역이 새로 시작되면서 나타난 시민계급의 출현이다. 이렇게 형성된 시민계급은 유럽 역사에서 새로운 변혁계급으로 등장하고 마침내 근대 사회의 주역이 된다. 이런 발전은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와 관계가 깊다. 민중계급이 자신들의 시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내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클루니와 시토 수도자들의 신앙 운동이 민중계급까지 확산된 것을 의미하는데, 새롭게 부상한 이들 신앙적 민중계급은 새로운 수도원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도미니크 수도원과 프란시스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들은 유럽의 기독교가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고백 위에 만들어낸 유럽의 수도원들이다.

 

민중 경건 운동

십자군 운동은 하급 귀족들이 새로운 계층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영주와 귀족들의 부하들로서 만족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십자군전쟁을 통해서 그들은 기사계급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들은 십자군전쟁에 참여하면서 외국 문물을 경험하고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특별한 계층이었다.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아랍권과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등장한 시민계급의 출현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무역이나 상업을 통해서 얻은 부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 신흥 계층은 새로운 건축술을 받아들여 새로운 교회 건축이나 교회 미술에 주요한 후원자 계급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곧 신앙에서도 주체적 계급, 자신들의 것을 요구하는 계층으로 성장했다.

중세의 사회 구성은 이처럼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변혁의 핵심인 기사계급이나 시민계급은 중요한 가치 하나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새롭게 전파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가오는 신앙의 의미는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다. 클루니 수도윈의 '개혁 운동'과 시토 수도원의 '은둔과 고행의 경건한 삶'은 제도권 교회나 성직자 계급이 아니라 각 개인이 신앙에 눈을 뜨게 하는 중요한 동기를 제공했고, 마침내 이들 시민계급이 신앙의 열정을 분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것의 구체적 모습이 십자군 운동과 중세 민중 경건 운동이다. 이것은 보통 수도원 운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생산양식의 변화와 이에 따른 중세 사회구조의 변화라는 틀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 것이 수도원이고, 기존의 교회와 성직자 중심의 신앙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흐름을 통해서 시민계급의 자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에, 중세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동력을 얻게 한 것이 새롭게 신앙적 각성을 한 평신도 계급이라는 말은 타당하다.

이들 시민계층이 가진 신앙적 각성은 지금까지 교회와 교권이 중심일 때 만들어진 교리나 신학, 성사(聖事) 혹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라, 평신도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어떤 학자(딘첼바허)가 말하는 것처럼 신앙에 근거한 "사랑의 관계"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정치 권력자가 명령하던 중세의 전통적 틀이 깨졌으며, 이제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실제적 삶을 신앙에 근거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앙의 흐름이기에 12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영적 경건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평신도 운동은 곧이어 전통적 교회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나타났다. 중세 교회사에서는 이것을 중세 민중 경건 운동이라고 부르며, 또 이 운동이 교권에 도전했기 때문에 중세 이단 운동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신앙적 자각을 통해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에 이단 운동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민중 경건 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런 운동의 시작은 보통 북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아놀드 운동으로 보고 있다. 이 운동을 시작한 브레스키아의 아놀드(Arno1d von Brescia,c. 1100-1155)는 사람들에게 세속화된 성직자들과 그들의 옮지 못한 행위, 물질에 대한 탐욕과 지배욕에 대해 반대하는 저항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교하고 다녔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성직자들은 모든 세상 권력과 소유를 포기하고 사도들처럼 완전한 가난과 순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소위 사도적 청빈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결국 하나의 무리를 이루게 되어 교회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아놀드 운동은 단일화되고 경직된 중세사회의 한쪽이 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결정적 신호탄이었다. 전통적 교회 입장에서 말한다면 소위 진짜 이단이 출현한 것이다.

교회에 반대하고 순수한 신앙이나 사도적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 이것이 이 운동의 핵심인데 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뒤이어 카타리파(Cathah), 왈도파(Waldo) 등 수많은 이단 운동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교권제도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가난을 강조했으므로, 부와 사치 그리고 형식주의에 물든 교회에 식상해 있던 일반 민중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으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더구나 새로운 운동들에서는 성직자와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며,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친 것이고, 동시에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제도권 교회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 새로운 운동의 주장은 때때로 상당히 극단적이었으며, 전통적 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교회로서는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제도권 교회는 이 이단을 쓸어버리기 위해 십자군을 동원했다. 물론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이 아니라 이단을 박멸하고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한 소위 알비십자군(알비는 카타리파가 일어났던 지역 이름)이었다. 알비십자군은 카타리파의 본거지인 남부 프랑스를 공격해서 초토화시켰다. 이런 교회 정화 운동의 선봉에는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가 있었다.

 

도미니크 수도원

이노젠트 3세는 이단들과의 싸움을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카타리파나 왈도파가 가진 사상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고, 그들의 이상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제도권 교회가 이를 받아들여서 교회 안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문제들은 이단을 박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제도권 교회 안에서 금욕이나 개인 경건, 가난의 이상을 실현하는 단체를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런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 중에서 교회의 통제와 감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지원해서 새로운 수도원을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미니크 수도원은 소위 이단 운동에 빠진 사람들을 올바른 신앙, 즉 제도권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세워진 수도원이다. 도미니크 수도원을 세운 도미니쿠스 데 구즈만(Dominicus de Guzman)은 스페인의 카스티야 출신으로 1196년 마드리드 근방의 어거스틴 수도회 수도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지역 교구의 주교인 아케베도의 디에고(Diego von Acevedo)와 친밀하게 되었고, 둘이 함께 카스티야 국왕을 수행하면서 많은 여행을 했다. 1206년, 그들은 로마 여행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던 길에 카타리파와 왈도파가 세력의 절정을 누리던 랑그독 지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전통적 시토 수도자가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시토 수도자들에게 이단들의 선교 열정과 가난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만이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충고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고 열정적으로 방랑설교를 하면서, 이단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 때, 디에고는 주교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신의 교구로 돌아갔고, 도미니쿠스가 이 일을 넘겨받았다.

도미니쿠스의 일은 몇몇 동역자들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들은 동역자 중 한 명이 제공한 집 세 채를 근거로 조직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215년 도미니쿠스는 로마에서 열리고 있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운동을 수도회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이미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존 수도원의 하나로 편제되도록 권유받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거스틴 수도회 규칙을 채텍했으나 그들이 하는 일은 이단에 대한 선교와 설교였다.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점증하는 이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이러한 수도회를 활성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해인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1216-1227)는 이 도미니크 수도회를 공식 승인하였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공헌은 그들이 가진 목적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대는 여성들이 사회의 한 계층으로 새롭게 등장하던 시대였고, 특별히 이단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교회가 여성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단 운동에서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남성 중심 체제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고, 왈도파에서는 이미 여성 설교자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독자적 해결책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 부분을 중시해서 여성 수도회를 세우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런 해결책은 많은 호응을 받아서 독일 같은 경우는 여자 수도원이 남자 수도원의 숫자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또 다른 특정 중 하나는 그들이 신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이들이 신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게 카타리파나 왈도파가 신학적으로 이단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신학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후대에 도미니크 수도원이 신학 일반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들을 길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중기 스콜라 신학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은 거의 전적으로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업적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 스콜라 신학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이다.

도미니크 수도원은 또한 교황에 대한 충성이 워낙 각별했기에 이단을 설득해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뿐 아니라 종교재판소를 통해서 이단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원래 이단들을 데려다 신학적으로 설복해서 의견을 되돌리는 것이 그들의 전문 분야였으므로, 그렇게 시도하다가 따르지 않거나 자신들과 맞서는 이단들에 대해서는 응분의 처벌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일정 부분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초기의 목적과는 달리 후대로 가면서 오히려 종교 재판에서 심문을 담당하는 전문가들로 변모한다. 아직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어 개인의 신앙고백을 억누르는 중세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시스 수도원

프란시스 수도원은 도미니크 수도원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세워졌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처음부터 교황이나 중세 가톨릭교회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태어났지만, 프란시스 수도회는 말 그대로 일반 민중의 신앙이 수도회로 형성되어 나타난 유럽 민중 고유의 수도원이라 할 만하다.

이 수도회의 설립자 프란시스는 교회의 정치는 물론 수도회의 행정조직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만 자신의 경건한생활이 이단으로 오해받고 비난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회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는 카타리나 왈도처럼 개인적으로 복음적 삶, 경건한 가난의 삶을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그가 바란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의 제도권 교회와 이단 사이에 있었던 긴장관계를 본다면 홀로 금욕과 가난의 삶을 사는 것이 이단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설립자는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z vonAssisi, 1181-1226)이다. 직물 장사를 하던 아버지 덕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프란시스는 기사가 되어 십자군에 참여하여 군사적으로 명예를 얻고자 하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젊은 청년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 경험과 오랜 동안 투병생활을 한 경험 등은 그가 기사로서의 삶이 아닌 영적인 삶을 살도록 준비시켰다. 명상과 기도로 살던 어느 날, 그는 폐허가 다 된 성 다미안(St. Darnian)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시스, 주의 집을 수리하라. 주의 집이 무너지고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많은 돈을 가져다가 수리비로 주였다. 이것은 아버지를 화나게 했고, 아버지는 그를 도시의 행정관과 주교에게 고발해 가져간 돈을 변상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주교와 아버지 앞에다 놓은 후, 이제는 육적인 아버지와 결별하고 영적인 아버지를 위해서만 살 것을 선언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문둥병자를 간호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지내다가 1208년, 아시시에 있는 포르티웅클라 교회에서 낭독하는 성경 구절을 들었다. 그것은 마태복음 10장 9-10절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명령이라고 받아들인 그는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고 다닌다. 복음을 따라 사는 그의 생활을 보고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기 시작했고, 곧 작은 무리를 이루었다.

이렇게 무리를 이룬 후 프란시스는 가난을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 후에 자신이 직접 쓴 유언장에서 이런 삶을 살도록 알려준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언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우리 생활을 받아들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또한 안팎으로 기운 수도복 한 벌과 띠와 속옷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 더 가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들이 내세운 이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지 봉사하기 위한 존재들로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기 위한 존재, 무조건적으로 남을 사랑하기 위한 존재, 겸손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프란시스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방랑생활을 하면서 경건을 실천에 옮기고, 걸식해서 식사를 해결했다. 식사를 얻지 못하면 굶었고, 헛간이나 마구간에서 잠을 잤으며, 잠자리를 얻지 못하면 노천에서 잤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고자 이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났고, 비슷한 모임들이 많이 생겨났다. 결국 이 모임은 조직화된 수도원으로 성장해 갔고, 교황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공식 수도원이 되었다.

프란시스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프란시스 수도원은 이단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당시에 이단들이 주장하던 것들이, 이 수도원을 통해 제도권 교회 안에서도 가능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산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수도원은 당시에 교회와 사회가 분열되어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었던 위험을 잘 막아냈던 것이다.

프란시스 수도원은 당시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나타나던 초기 자본주의의 위협도 잘 막아냈다. 당시에는 지중해 교역이 활성화되고 식량보다는 원자재가 치부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토지 중심의 봉건주의가 몰락하고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이 나타났다. 그러자 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몰려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어 사회 문제로 떠올랐지만, 정부나 교회는 이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프란시스 수도원은 이런 사회 현상을 신앙의 이름으로 잘 추슬렀고, 신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향한 모델을 제시하여 이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이처럼 프란시스 수도원과 도미니크 수도원의 성공은 중세가 이미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고, 수도원은 그 변화의 중심이자 주역이었다.

 

중세 수도원의 질적 변화

전통적으로 14-15세기는 중세의 해체기로 설명된다. 중세의 해체는 곧 중세를 구성하던 기본 요소인 교황제와 교회의위기를 뜻한다. 이것은 카놋사의 굴욕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세속 권력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천명한 후, 십자군전쟁과 종교 재판 등을 통해 자신의 절대적 지배를 확인했던 교회가 세속 권력들에 의해 위축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났던 백년전쟁(1337-1453)은중세 해체의 서곡이었다. 두 나라가 전쟁 비용을 위해서 교회에 세금을 물리려 하자 당시 교황 보니페이스 8세(Bonifatius VIII, 1294-1303)가 반발했고, 왕들이 교황에게 저항하면서 세속 권력과 교황권이 충돌했다. 보니페이스는 우남 상탐(Unam Sanctam, 유일한 권위)이라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교황의 절대권을 지키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미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자리잡은 국가주의는 교황이나 신앙보다는 국가의 편에서 상황을 보도록 했던 것이다. 더구나 다음 교황인 프랑스인 클레멘트 5세(Clemens V)가 프랑스 국경 근처 아비뇽을 교황의 거처로 삼으면서 교회는 국가, 곧 프랑스에 예속되었다. 교황과 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곧 수도원의 침체나 몰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12세기 이후 교황과 교회는 서구의 절대적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고, 이때 새롭게 나타나서 시회 발전의 주도적 역할을 하던 수도원들 역시 교황과 교회가 몰락하자 영향력의 감소나 침체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세속 권력들은 교회에 세금을 물리고, 교회의 수입을 지불하는 장부인 성직록(Benificium, 聖職緣)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려서 교회 재산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는데, 수도원을 성직록에 올려놓고 수도원의 재산을 유용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어떤 경우는 권력가들이 수도원을 이단으로 고발하거나, 명분을 만들어내어 해체시키고 재산을 통체로 빼앗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 수도원에 닥친 커다란 위기였다. 물론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 것만큼, 전통적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수도원이 내놓은 해결 방식은 국가적 또는 국제적으로 연대해 묶여 있던 거대한 수도원 조직을 나눠서 지역의 수도원으로 묶거나 아니면 단독 수도원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 간의 다툼에서 수도원이 더 이상 교황의 전위대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단 재판에서 교황과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랐던 것을 생각하면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임에 분명하다. 수도원의 전통적 이상에서 본다면 다시금 세상을 뒤로 하고 묵상과 금욕 등 은둔자적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페스트와 왕위 계승전쟁 그리고 경제 · 사회적 불만 때문에 나타난 전쟁과 민란 등 혼란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시련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으며,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의 신앙이나 예배로는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고, 이것이 수도자들에게는 은둔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14세기의 수도원 운동은 전통적인 모습에서 변화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규범이나 공동생활보다는 내적인 경건을 추구하는 명상을 중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수도원이나 수도자들이 신비한 체험이나 환상을 많이 보고, 이웃을 위한 희생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은 것들로 확인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수도원 중 이 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는, 결혼해서 이미 자녀까지 두었던 비르지텐(Birgitten, 1301/03-1373)라는 스웨덴 귀족 출신 여성이 참회의 순례 여행을 한 후 시토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신비한 체험과 환상을 보고 세우게 된 비르지텐(Birgitten) 수도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수도원이나 수도자를 대표해 주는 경향은 네덜란드에서 생겨난 공동생활 형제단이다. 게하르트 그로우테(Gerhard Groote, 1340-1384)에 의해 세워진 이 공동체는 특정한 수도회 명칭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일정한 수도규칙을 따르지도 않았다. 함께 모여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이 수도회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손노동을 통해서 직접 생활비를 벌었는데, 그것은 주로 예배나 교훈적인 책들의 필사였다. 이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대중과 청소년 선교, 성직자 교육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학문 연구에 열심이었고, 학교를 세우고 자체 교육을 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인문주의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운영하던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비르지텐 수도원이나 공동생활 형제단의 공통적인 특징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신비한 내적 체험이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신성의 실제적 체험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이 시대에 특별히 많이 나타나서 중세 후기 신비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한데, 이런 신비적 체험의 산실이 수도원과 수도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체험은 중세 후기의 유명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cer Eckehart, 1260-1327/28)에 근거를 두고 있고, 그로우테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내적인 경건을 추구했다. 이것은 데보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새로운 경건) 운동이라고 불리며, 보통 종교개혁을 준비한 경건운동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들은 사변적인 스콜라 신학을 폐기하고,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며, 관상(觀想)적 성경 읽기, 그리스도의 고난에 신비적 동참, 그리스도의 세상 사역에 동참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던 어거스틴 수도회 수도자 토마스 켐펜(Thomas Kempen)이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Nachfolge Christis)라는 책은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비르지텐 수도원과 공동생활 형제단은, 비록 14-15세기에 수도원이 침체와 몰락의 길을 걷지만 여전히 시대 변화에 걸맞은 영적이고 경건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역할은 담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4세기의 수도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이제 규범과 공동생활이 수도원의 특징이 아니라 개인이 신성에 참여하고, 또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교회와 국가가 발전하고 분화되면서, 이들이 더 이상 신앙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익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도자든 일반인이든 신앙의 궁극적 지향점은 각 개인이 신을 체험하고, 그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이런 발전은 필연적이었다고할 수 있다. 이런 발전을 우리는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발전은 수도원과 교회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했다.

 

 

2. 종교개혁과 수도원

 

비르지텐 수도원이나 공동생활 형제단이 세웠던 개혁의 싹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와 교황제 자체를 부정하는 대폭풍이 몰아쳤던 것이다.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이 대사건은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이 된다. 이 대사건은 수도원에도 역시 폭풍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교황과 가톨릭의 교권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종교개혁 운동이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귄위를 상당 부분 뒷받침해 주던 수도원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던 루터(Martin Luthet, 1483-1546) 역시 성직자 수도회인 어거스틴 수도회 출신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이 개혁 운동은 수도원의 전통적 흐름을 전혀 새롭게 바꿔 놓을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도원이 해체되어야 했고, 수도자들이 추방당해야 했다. 하지만 수도원과 수도자의 본래 이상은 사라질 수도 없었고,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그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야 했다.

 

수도원의 위기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모범적인 수도자였다. 어거스틴 수도회는 성직자 수도회였기에, 신부 서품을 받은 루터는 학자이자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경 교수로 활동했던, 성공적인 수도자로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스콜라식 신학 교육과 성경 해석 방식은 그가 가진 내적인 고민에 답을 주지 못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웠고, 죽은 후에 천국에갈 수 있는 확신을 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원했다. 성경학자였던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며, 교회나 성례는 이것을 알려주고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에게 신앙의 절대적 원칙과 기준은 단지 성경일 뿐이며 다른 어느 것도, 특히 인간의 행위나 노력은 구원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던 교회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믿음과 성경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루터가 보기에 수도자의 삶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활동이었고, 수도자가 될 때 서약하는 수도원 규법 역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루터가 보기에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은 신앙인은 자유로운 인간 활동을 통해 신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지, 개인의 삶을 이런 저런 규범으로 묶어 놓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1522년 수도서원에 대해 조목조목 논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의 요지는 신 앞에 선 인간의 양심보다 수도회 규범을 더 높은데 두는 수도원 조직은 성경적, 신앙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이런 반대는 수도회나 수도자들을 향해있던 불만들을 조직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런 세력을 등에 업고, 종교개혁가들은 수도자라는 신분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어 했다. 수 많은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났고, 그 중에 많은 수가 루터를 따르는 충직한 추종자들이 되었다.

이런 흐름과 맞물려 수도원들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가 거의 분리되지 않았던 중세적 특질에서 교황이나 교회의 권위가 퇴락하자 개혁가들이 영주의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고, 영주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주도권을 갖는 지역교회 개념이 나타났던 것이다. 영주들은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수도원을 해체하는 정책을 행했다. 이런 움직임은 1526년 제1차 스파이어 제국회의를 통해서 영주들 스스로 교회 개혁권을 가진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법제화되었다. 가톨릭교회 쪽에서는 신앙에 관계된 부분에 제국 의회가 법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많은 영주들이 이 법을 근거로 수도원 간판을 내리게 했고, 수도자들을 추방시키기도 했다. 헤센의 백작 필립(Philipp von Hessen)이 1526년 자신의 영토에 있던 수도원을 폐쇄시키고 이를 세속기관으로 만들자,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많은 영주들이 이 조처를 뒤따랐다. 이것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체에서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살아남은 수도원과 수도자들은 이런 사회적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수도원과 수도자의 숫자가 거의 반으로 줄어든 사회적 상황에서, 또 절대 권위를 갖고 있던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수도원과 수도자의 이상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떤 노력이어야 하는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도, 수도회가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 원인도 중세 중기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인 내부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한 때문이었다. 결국 대답은 분명했다. 살아남은 수도원들은 개혁 프로그램에 동참해야 했다. 그렇다고 마냥 루터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그래서 많은 수도원들이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떠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구제나 봉사활동 등 일반 사람들을 위한 사회활동을 강화하고, 이것을 통해 일반인들의 일상적 삶과 접목된 수도원과 수도자 활동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성직자로서 수도회를 구성하되 사회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원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런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수도원으로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생겨난 테아티너(Theatiner) 수도원이 있는데, 이들은 일반 민중에 대한 설교를 주요 과제로 천명했다. 비슷한 유형의 수도원인 바르바니텐 수도원은 선교를 목적으로 했다. 또 북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40년 정식 수도회로 공인된 소마스커(Somasker) 수도회는 병자 간호와 교육을 주목적으로 했다.

이런 새로운 활동을 하는 수도원들이 대부분 새롭게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전통적 수도원들이 그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새로 시작할 힘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수도회를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요구는 마침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를 통해 종합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회와 새로운 수도회들

예수회의 설립과 활동은 전적으로 설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의 탁월한 활동에 힘입고 있다. 스페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군복무 중 중상을 입고 오랜 병상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경건 서적과 영성 서적을 탐독하면서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그는 1534년 8월 15일 여섯 명의 도료와 함께 가난, 순결, 순례와 영혼 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수도원을 설립했다. 1540년 교황을 방문한 그는 이 수도회를 공식 수도회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당시 교황 바울 3세는 "예수회"라는 이 수도회를 승인했다. 이 수도회의 목적은 "십자가의 군기 하에 하나님을 위해 싸우며, 주님 한 분에게만, 그리고 지상에서는 그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봉사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내세운 목적이 알려주는 것처럼 이 수도원은 전통적인 수도회가 내세우는 서원인 가난, 순결, 순종 외에 '영혼 구원과 믿음의 전파를 위해서 내려지는 교황의 명령을 지체없이 실행에 옮겨야한다'는 항목을 덧붙이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회의 특별한 특징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전통적인 수도회의 모습 중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도원의 건물보다 인적인 관계를 중시했으며, 수도자 복장을 갖추지도 않았다. 또, 공동 예배 시에 전통적으로 해오던 성무일도(聖務禱)의 기도 낭송 역시 빼버렸다. 아마도 전통적 수도원이 가진 영적 전통은 그대로 받되 활동이나 형식은 그 시대에 맞게 자유롭게 변형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회 활동은 종교개혁이라는 폭풍에 시달리고 있던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교황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여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고, 그들의 활동이 그리스도의 명령과 교회와 교황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보이려 했다. 그들은 여러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아주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되는데,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지역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임으로써 교회와 교황권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 내용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전통적 교리체계를 변호하고,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우는 개혁신학의 내용들을 반박하는 신학활동이었다. 그들은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을 통한 가톨릭 세력의 만회에 힘써, 개신교로 넘어갔던 폴란드와 벨기에를 다시 가톨릭으로 넘어오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이 전통적 중세의 신앙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교회에서의 신앙 활동을 새롭게 정리해내서 각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로욜라가 쓴 영신수련 이라는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책은 또한 후대에 가톨릭교회의 피정(避靜)을 포함한 많은 영적 수련 모임에서 영성수련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했다.

다른 하나는 선교인데, 선교는 넓은 의미로는 개신교에 넘어간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시 탈환하는 것을 포함해야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아시아, 구체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전교사를 보낸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 선교사였던 마레

오 리치(Matteo Ricd, 1552-1610)로 그는 1601년 중국 북경에 도착해서 서양 문물을 전함으로써 중국의 개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연암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북학파는 바로 이 리치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서양 문물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상과 세계관을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일본에 선교사로갔던 인물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msis Xavier)로 1549년 일본에 도착해서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서양 문물을 동양에 전해 주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유럽에서 반으로 줄어든 가톨릭교회를 양적으로 다시 채워 세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사실로 보여준다. 이런 노력이 동양 선교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고,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변화된 유럽 사회의 경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회가 나타났던 종교개혁기에는 수도회가 사회나 일반 민중의 삶에서 설제적 도움을 주는 신앙의 모습으로 변화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수도회이면서 수도원적 외형을 가지지 않은 단체들이 여럿 나타나는 계기도 된다. 이것은 현대 수도회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이런 경향의 수도회들이 예수회와 비슷한 시기에, 그러나 예수회와는 무관하게 여러 곳에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대표적 여자 수도회로는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474-1540)라는 여성이 1535년 자신의 고향 이탈리아에 세운 성 우슬라(Ursula) 수도원이 있는데, 이 모임은 타락한 여성을 선도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 영국에서는 마리아 와드(Maria Ward, 1585-1645)라는 젊은 여성이 공동체를 조직해 여성들을 교육하고 개혁 운동을 벌여, 침체에 빠진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자 했다. 이 노력은 영국 가톨릭과 교황권, 또 전통적 수도원들의 무관심과 비협조로 결실을 맺진 못했지만 그의 열정과 노력을 눈여겨 본 독일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가 이 여성을 초청해 뮌헨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하여, 사회적 교육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또, 어떤 수도원은 병자 치료와 간호를 목적으로 한 수도원으로 설립되기도 했고, 빈민 구제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역할 등을 목적으로 세워지기도 했다. 이런 수도회의 여러 모습들은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세워졌기에, 기존 교회 조직과의 관계 설정이 문제로 떠올랐다.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하더라도 각 지역의 주교나 교회와의 관계도 정리해야 할 부분이었다. 마침내 종교개혁에 대응하기 위해서 열렀던 트렌트 종교회의(Tridentinum, 1545-1563)에서는 수도회 문제를 중요 의제 중 하나로 다루고, 수도자 칙령을 발표 했다. 이 칙령은 수도회의 독자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는 각 수도회를 교회가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신교 이단을 막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민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물론 교회와 주교의 지도와 감독을 폐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도회와 수도자예게 많은 부분에서 면책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각 수도회의 독자적 다양성을 인정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도전 앞에서 교권의 일방적 지도보다는 개인과 개별수도원의 독자성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쩌면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개인의 신앙 위에 군림하던 중세의 모습이 개인의 신성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인정하고 일정 부분 후퇴하는 모습은 수도원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신성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인정하고 일정부분 후퇴하는 모습은 수도원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수도회는 종교개혁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냈고, 이 시련의 시기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3. 바로크와 계몽 시대의 수도원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는 이성주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리

고 있다. 이성이란 말이 나타내 주는 것처럼 이 시대는 인간과 인간의 권리를 가장 중시하는 특징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 시기의 수도원들은 또 다른 변화를 겪어야 했다. 우선 개신교가 수도원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수도원은 거의 가톨릭 교파만이 갖는 배타적 체제가 되었다. 또, 국가 절대주의 사상 아래 종교는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국제적 권위를 갖던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정치권력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수도원 역시 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가 권력의 희생물이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수도원들이 페쇄되었고, 반발할 경우 추방과 처형이 뒤따랐다. 하지만 시대 경향이 어떻게 변하든 수도사의 이상, 즉 신성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 어찌면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이것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근대의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모습은 교회와 단절된 채 독자적 조직으로 변해 가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속해 있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와 개인의 은둔적 명상이라는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이 특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로크 시대와 수도원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의 서구 사회를 보통 바로크시대라고 말한다. 바로크(barroco)라는 말은 못생긴 진주 또는 비뚤어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이다. 이 말은 원래 종교개혁의 마무리인 종교전쟁(30년 전쟁, 1618-1648)을 겪고 난 후 전통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절대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 서구 사회의 사상적 공황을 나타내 주는 말로 사용되었다. 처음에 이 단어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관과 사상적 가치, 새로운 문화를 지칭하게 되었고, (원래 발상지인 아탈리아를 넘어 프랑스를 중심으로) 급기야는 전통 가치를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된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크 문화는 그 어원이 '뒤틀림이나 못생겼다'는 뜻인 것처럼, 그 내부에 묘한 뒤틀림이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 대한 거부와 도전은 곧 절대 권력과 신성에 대한 부정과 도전이었다. 이것은 종교의 분열을 가져왔고, 새로운 교단인 개신교가 생기고, 종교가 국가에 예속되면서, 곁으로 보기엔 절대 권력과 신권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부에는 절대성이나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월성에 대한 희구, 또 그 속에서의 안정을 바라는 욕구는 넘어갈 수 없었으며, 이는 절대 권력을 태동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 묘한 뒤틀림을 잘 형상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 바로크 문화이다. 소위 절대주의 시대와 맞물려 나타난 바로크 문화는 웅장함, 화려함 등을 통해 인간이 가진 왕권이나 인간 문화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나타내며, 왕권신수설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거의 절대 권력인 종교를 부정하면서도 새로운 절대성에 대한 추종이나 욕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 자신을 절대화하고 싶은 욕구를 내보이면서도 그 속에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화려함으로 감춘 인간의 본능적 불안이라고나 할까?

사실 바로크 시대는 절대 권위의 상징인 절대주의와 비판적 지성을 도구로 한 이성주의 시대인 17-18세기인데, 바로크 문화의 본산지인 프랑스에서 수도원을 통해 중세 못지않은 신앙적 경건운동이 있었다는 점과 종교적인 마로크 음악과 종교 건축이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 종교개혁 이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교회나 교황의 권위를 넘어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신 앞에서 찾아보려 했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는 증거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의 수도원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크의 불안함과는 좀 다르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신성에 참여할 가능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종교개혁기에 나타난 예수회가 바로 이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신앙인의 신비적 체험에 대한 이해와 접근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중세의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완전한 신앙은 신앙적 신비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런 체험은 말 그대로 신비 체험이라서 신비적인 황홀경에서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지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일이라는 이해가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이런 체험은 수도자나 성직자같이 신이 선택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기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그나티우스가 쓴 영신수련 이라는 책이나 바로크 시대에 나타난 신비 체험의 경향을 보면, 일반인들도 특정한 훈련을 통해 이런 신비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종래에는 초자연적으로만 주어지던 경험이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가 "나는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신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을 요약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수도원과 가톨릭교회 내부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선교 현장이었다. 예수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선교했던 아시아권에서 소위 적응주의(Akkommodation) 논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논쟁의 요점은 피선교지의 토착문화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문제의 발단은 인도와 일본 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예수회 수도자 사비에르, 마테오 리치, 아담 등으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대개 피선교지의 전통문화를 수용하고 받아들여, 토착민들의 종교적 풍습을 많은 부분 인정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종교 풍습을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공자 숭배와 조상 제사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다른 수도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좀 늦게 중국 선교를 시작한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시스 수도회는 이 문제를 교황청에 고발하였고, 교황 이노센트 10세는 1645년 전통문화 수용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예수회의 요청으로 1656년 알렉산더 7세가 이를 다시 수용하는 허락을 내렸다. 그러다 1692년 또다시 금지되었고, 그동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중국에서, 가톨릭은 사실상 추방되었다. 개인의 신성 참여와 정통적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와 수도원

노력을 통해서 개인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17-18세기 기독교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가톨릭 영역에서는 개인의 은혜 체험을 강조하는 얀센주의(Jansenism), 행위 보다는 영적 체험을 중시하는 정적주의(靜讀主養)가 프랑스에서 일어났고, 개신교 영역에서는 독일의 야곱 뵈메(Jacob Boemer, 1575-1624)나 영국의 조지 폭스가 교리적 정통주의보다 개인의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주장들을 내놓고 있었다. 이들의 강조점은 약간씩 달랐지만, 개인의영적 체험이나 성령의 지도를 받는 신비한 경험, 또 엄격한 도덕과 윤리적 삶을 중시하는 공통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위협 앞에서 수도원과 수도자의 이상은 지켜지기 어려웠다. 이성을 앞세운 계몽적 합리주의는 수도자의 이상을 근본부터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수도자의 삶이나 그들의 생활방식은 이성에 반하는 것일 뿐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수도원 제도가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가 미신으로 치부했던 고대의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들어서 수도자의 삶을 광신자, 정신이상자, 얼빠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끔직한 것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합리성이나 유용성을 가지고 삶의 가치를 평가했던 계몽주의자들에게 수도자와 수도원은 넓은 토지 위에 그럴듯하게 세워진 큰 건물 안에서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들과 장소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국가가 수도회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수도회를 폐지하거나 수도자들을 추방할 명분을 주었다. 국가가 수도원을 해체하고 추방한 이유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가톨릭의 기관이어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와 이익을 대변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수적으로 꽤 많은 수도자들이 교황이나 교회의 권위보다는 합리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을 옹호하고 나섰던 것도 국가가 더 이상 교황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수도원을 통제할 수 있게 된 배경을 제공했는지 모른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제 국가가 수도원과 자기 나라의 교회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수상이었던 리슬리에 추기경(Armand de Richelieu, 1624-1642)이 주축이 되어 나타나게 된 소위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의 권리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으로, 1663년에는 파리 대학의 신학부에 이 사상에 동의하도록 요청했고, 마침내 1682년에 이 내용의 '갈리아 조항'이 프랑스 성직자의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여서 독일교회에서 역시 에피스코팔리즘(Episcopalismus)이라는 사상이 나타나 독일교회의 문제는 독일의 주교단 회의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1786년에 독일의 주교단이 교황청 대사의 말에 불복종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각 나라에서 수도원을 해체하고 폐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나라들, 특히 예수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 등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였던 나라들에서 예수회를 폐지하고 추방령을 내렸다. 더구나 프랑스 왕실은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예수회의 폐지를 요구했다. 예수회가 존속하면 프랑스의 교회들이 교황과 국가 사이에서 둘로 분열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만일 이 폐지 요구를 듣지 않는다면 교황령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교황 클레멘스 14세(1769-1774)는 1773년 7월 21일 예수회의 해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해산 명령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은 나타나지 않았다. 교황이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이 어떤 영향력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프로이센과 러시아에서는 교황의 예수회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된다. 프로이센과 러시아 정부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학교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예수회를 해산할 마음도, 해산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예외적인 경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오히려 예수회의 해산은 수도원 제도가 구심점을 잃고 해체되어 가는 시작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18세기 마지막 20년과 19세기 초반은 보통 수도원과 수도회 이상이 거의 사라질 뻔한 위기까지 갔던 시기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보통 환속화 또는 세속화(Säkularisiemng)라고 표현되는 이 시기의 수도원 역시 세속화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국가나 정치 권력자들은 국가가 처한 재정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 흔히 수도원이나 교회의 재산을 사용했다. 신앙 자체를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던 교회보다는 사회적 경향을 따라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수도원이 그들에게는 손쉬운 상대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인츠(Mainz)의 대주교이자 제후였던 칼 요셉이 부유한 수도원 세 개를 해체하여 현대적 대학을 세운 일일 것이다. 19세기 들어서면서 이런 흐름은 더욱 강력해져서 이탈리아에서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총본산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한 몇 개의 수도원을 국가가 압류해서 국가문서 보관소로 만들었고, 수도자들을 국가 공무원으로 편입해버렀다.

몇몇 수도원들은 서로 연합해서 목회 사역보다는 수공업을 한다거나 교구 주교의 휘하에 들어가 하나의 교회처럼 행정적으로 도움을 받으려는 시도를 했고, 사회나 지역적 필요성 때문에 남은 수도회들도 여렀 있었다. 또는 이런 해체의 시기에 프랑스 수도자 데 레스트랑처럼, 프랑스 혁명 때 자신이 있는 수도원이 해체되자 수도자들과 함께 이웃 나라인 스위스로 가서 새로운 수도회를 세웠던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수도회 역시 전쟁 중에 해체되었고, 다시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러시아 등을 방랑하다가 나폴레옹 퇴위 후에 프랑스로 돌아오는 고달픈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계몽주의 이후 유럽의 전체 분위기가 수도회에 대한 사회적 냉대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중세적이고 구질서적인 것들은 무엇이든 부정하고 싶었던 혁명의 시대는 구질서에 속하는 수도원 제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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