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기독교 금욕에서 기독교 수도원으로

 

 

 

 

기독교 수도원의 시작은 기독교 금욕에 숨겨져 있다. 기독교적 삶과 교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이 들어있는 신약성경은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금욕적 존재방식으로 살도록 강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불확실한 형태로 되어 있긴 하지만 금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러 주장과 설명이 들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내용에 속하는 것이 신약성경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서, 이 세상은 일시적인 것이요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부분이다.

고린도전서 7:31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되 세상 물건을 쓰지 않는 자처럼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복음서에서도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을 보면 역시 이런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막 6:7-9; 10:17-31; 마 19:10-12; 27-28; 눅12:22-31 등). 그런데 이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곧 고행자나 금욕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해 보기 전에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보자, 이 질문은 사람들이 따르고자 하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고행적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가 금욕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다.

예수님이 독신으로 산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독신적인 삶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또한 예수님은 직업을 통해서나 개인재산을 통해서나 먹고 사는 문제에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포기하고 자신의 생을 살았고, 또 특히 가난에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그는 부자 친구나 후원자들에게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거리낌 없이 받았으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극단적 가난을 요구한 적도 없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예수가 자신의 말과 가르침, 그리고 삶을 통해서 보여준 전체적인 것을 조망해 본다면, 그의 삶은 금욕적으로 해석해도 되고, 더구나 금욕적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기독교의 독자적인 금욕이 나타난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는, 복음은 처음부터 금욕적 삶을 보여주고 있으며 금욕적 삶에 익숙한 분위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원시 기독교의 복음에서 전해 주는 내용들이 금욕적 삶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낳았으며, 또한 이런 요소로 원시 기독교는 타 종교와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낳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후기 유대주의의 묵시사상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후기 유대주의는 강한 묵시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현재의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 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올 시기가 눈앞에 닥쳐왔다고 믿었고, 이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급박한 기대" 때문에 그들은 금욕적 경향을 강하게 가진 군사적인 생활형태를 가지고 살았다.

또한 이들이 가진 이원론적 사고, 즉 세계를 빛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인 사탄의 나라로 나누는 사고방식은 금욕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들 중 대표적 무리가 쿰란 에세네파인데, 이들은 자신들을 "거룩한 남은 자들"로 이해해서 마지막 시대에 속한 참된 이스라엘로서 구원을 위한 열정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목적에서 자기들끼리 아주 긴밀한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 공동체의 특징은 금욕적 삶이었다.

유대인 학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이런 공동체 무리에 속하는 "치료자들"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외부와 단절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며, 금욕적 고행이 의무였고, 삶의 근본적 지향점을 관상에다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식생활은 육식을 하지 않았고, 주식은 빵이었으며 그 외에는 소금과 나무에서 추출한 약간의 향료를 사용했다. 이들은 이성이야말로 절제하는 삶으로 인도하며, 이로 말미암은 자기 희생이야말로 올바른 삶이라고 가르쳤다. 포도주는 어리석은 행동을 낳게 하는 독(毒)이라 했고, 화려하고 값진 음식을 탐닉하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갖도록 한다고 가르쳤다.

이 내용은 기독교에 수도원 공동체가 처음 생겨날 때 어떠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하다. 실제로도 고대 기독교 역사를 설명하는 문헌 중에 필로가 언급하고 있는 "치료자들"을 기독교의 수도사로 묘사하고 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들은 유대 공동체의 계열에 속하며, 기독교적 금욕집단이나 수도원 역사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집단이 구약적 전통에 헬라 철학적 요소가 잘 혼합되어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는 이론과 실제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이 기독교 금욕 경향의 전 단계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독교적인 완전한 삶과 관련해서 이름을 남기고 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필로의 많은 저술을 기꺼이 인용하고, 이 사상을 독자적이긴 하지만 계승 발전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결국 기독교의 교회가 생겨나는 바로 그 시기에 유대주의는 금욕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현저히 발전시켜 놓고 있었으며, 이런 경향은 기독교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쳐서 이 금욕의 이론과 실제가 기독교 공동체에 그대로 반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헬라적인 문화와 헬라 정신세계와의 관계도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헬라 세계의 영향은 팔레스타인 밖에 세워진 기독교 교회들이 받은 것이다. 기독교가 헬라 세계와 만나면서 신관과 세계관, 또 역사관 등이 서로 논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런 논쟁의 예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후반부의 바울의 소아시아 전도이다. 바울이 선교 여행을 통해서 행한 모든 일들은 사실 기독교와 헬라 문화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결과 어떤 부분은 서로 조화적인 연합을 했고, 어떤 부분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쩠든 이 과정이 기독교 세계에 헬라적 요소가 개입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고, 이 요소 중에 헬라의 정신세계가 가지고 있던 금욕적 요소를 받아들였다.

헬라적 정신세계로부터 기독교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받았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기독교 나름의 문화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 이상 주변의 환경이나 다른 문화와의 만남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필연적 과정이며, 이런 영향 하에서 새로운 문화나 문명 안에서도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자랄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회에서도 일어나서 유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시작했던 기독교가 헬라 문화와 만나게 됨으로써 세계화의 기초를 놓게 되고, 이런 와중에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쓰여지는 계기도 마련된 것이다.

금욕과 관련 기독교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 철학 학파들이다. 이 철학 학파들이 가지고 있던 금욕의 개념은 원래 손으로 어떤 것을 만들어 완성시킨다거나 운동에서 훈련을 통한 단련을 의미하는 뜻이었으나, 나중에 완성된 또는 완전한 인간의 개념과 연결되어 쓰이게 되었다. 이 결과 금욕이란 말은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노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금욕이란 단어는 자기 포기, 특히 육체적 정신적 훈련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런 훈련에서의 일차적 목적은 “미덕 훈련”이었다. 어던 것을 미덕이라고 하느냐는 것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났다.

플라톤이 말하는 네 가지 덕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덕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들고 있으며, 지혜는 지배자에게, 용기는 군인에게, 절제는 생산자에게, 정의는 세가지 덕이 완전히 조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 금욕이라는 수단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음식의 제한, 물질 소유의 포기, 본능적 욕구의 억제-이는 대부분의 경우 독신주의로 나타났다-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은 피타고라서나 고대 그리스의 종교 중 하나인 올페우스교에서도 이미 보이고 있다. 이들은 "육신은 영혼의 무덤"이라는 철저히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영혼을 감옥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역시 이런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의 이론 역시 영혼이 가장 원하는 것은 가능한 한 빨리 이생의 갑옷을 벗고 원래의 고향 즉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자는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의롭고 경건하고 고고하게 살며" 세상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는 삶을 플라톤은 "내면적인 이민"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실현한 사람은 "국가라는 아주 작은 장소에 태어났으나 영혼은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은 현자에게 이 세상과 떨어져 있는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그 자신도 “내면적 이민”의 삶이 종류를 살면서-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위대한 영혼이 너무 협소한 국가라는 국가에 태어나게 되었음”을 어느 날인가 깨닫게 된다고 가르친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아니토스와 멜레토스가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나를 손상시키지는 못할 것이다”는 내용은 플라톤이 인간 속에 만져질 수 없는 불멸의 것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을 빠져 나가게 되는데, 이렇게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이생의 삶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로서 물질적이고 변하는 이 세상의 것들과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어던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그런데 플라톤 철학에 세상적이고 염세적인 성향을 갖게 했고, 이 철학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금욕적 실제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 결과 "철학적 삶"이란 바로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도록 했다. 기독교 금욕 운동에 영향을 준 또 다른 분파가 스토아학파이다. 이 스토아학파의 금욕은 철저히 세상적이고 현실적이며 개인적이다. 이들에게서 금욕은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자연과의 합일을 뜻한다. 그들은 선이나 악을 똑같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인간적 감정을 다스리거나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들로부터 자유하고자 한다. 이 자유만이 이들을 원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인간의 운명까지도 뛰어넘게 되며, 모든 욕심이 사라지고 자연과 일치되어 모든 애착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이런 경지에 이른 자를 현자라고 부른다. 이런 경향은 실제적 금욕을 요구하는 데로 이어지는데, 여기 또한 음식의 제한, 옷과 집도 소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 등의 형태가 있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神)조차도 헐벗고 가난하다"는 것이다. 춥고 더운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 거친 잠자리, 또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들의 자발적 포기, 고행, 결혼에 대한 엄격함과 결혼의 완전한 포기 등이 이들의 특징이었다. 세네카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훈련을 하는 사람 중에 어떤 이는 전혀 웃지 않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전혀 입에 대지 않음으로, 어떤 사람은 완전한 독신으로, 또 어떤 사람은 거의 잠을 자지 않는 고행 등을 한다고 한다.

이 스토아학파가 금욕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모든 사회적 제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적인 자유이다. 이들에게서 특징으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는 함께 공동으로 훈련한다는 생활형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표현한 말 중에 "제우스도 자기 혼자 밖에 없다"라는 구절도 있다. 이런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동으로 사는 사회에서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이들이 "현자들로 이루어진 도시"의 이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견유학파의 추종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무소용"의 철칙을 가지고 살았다. 이들에게 가장 좋은 훈련 수단은 수고와 재난이었다. 수고와 재난을 통해서 인간은 완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관습과 체제를 거부하고 살았으며, 이는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던 디오게네스의 삶의 형태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 견유학파의 경향은 2세기경에 하나의 학파를 형성했다. 이들이 가지는 삶의 형태로 정해진 것이 바로 디오게네스의 삶의 형태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 견유학파는 그 당시에 방랑 설교자로서 고대 세계를 돌며 그들의 "딴 세상적 삶"의 이상을 전파하고 다녔다.

이런 금욕적 삶의 형태들이 기독교가 헬라세계에 전파되었을 때까지 그대로 살아 있었는데, 이들 여러 경향들이 분명한 차이도 없이, 각 경향들의 특징을 조금씩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금욕이라는 큰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에 유입된 때와 시기적으로 유사한 시대에 번성했던 후기 스토아철학인 신플라톤학파와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이런 금욕적 경향들을 계속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롭게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정신사적 흐름이 기독교와 논쟁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영향은 기독교의 독자적 금욕 경향이 싹트게 되는 시작점을 주었다.

그렇다고 이 고대 세계의 금욕적 경향이 기독교에 금욕주의가 생기게 한 근본 배경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단지 분명한 것은 이런 경향이 기독교 안에도 금욕적 경향이 나타나고, 이런 경향이 주목을 받게 하는 데 중요한 요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삶이 금욕적 삶이라는 생각은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도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생각이었고, 이런 바탕에 전파된 기독교는 일반인들에게 철학적 경향으로 이해되었기에 철학적 삶을 요구받았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철학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이 증명의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금욕이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종교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물론 기독교에서 금욕이 강조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기독교 철학자이자 순교자인 저스틴(160년경 사망)은 스토아 철학자인 무소니우스(Musonius, 100년경 사망)가 윤리적으로 올바른 원칙을 따라 살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것을 놀랍다고 여기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런 금욕에 대한 경쟁 관계는 계속되어서 세속적 철학의 분파들도 이른바 금욕을 가지고 종교로 되어 갔다. 이 당시의 종교는 금욕이라는 잣대로 재었던 셈이다. 그런데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거짓 종교가 더 금욕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결과 기독교에는 2세기경에 윤리적으로 아주 높은 수준의 금욕적 경향들이 나타났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주의였는데, 이런 독신주의 경향은 원래 기독교의 초기부터 있었던 경향이긴 하지만, 이제 독신주의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을 변호하는 표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세속적인 금욕 경향과 타 종교들과의 논쟁을 통한 금욕의 영향 외에 영지주의도 기독교 금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지주의 운동은 일찍부터 기독교와 관계를 맺었다. 기독교가 영지주의에서 받은 가장 큰 영향은 영지주의가 가진 사고 체계이다. 영지주의적 사고 체계의 기본 요소들은 세상을 관조하고 독특한 종교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내용들은 구약과 신약의 계시 내용과 서로 잘 조화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영지주의적 교리 체계를 가진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영지주의적 공동체는 나름의 교회 공동체로 자리잡았으나, 후에 다른체계로 인정되어 2세기 동안 기독교 공동체와 분리된다. 기독교적인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의 경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물질적 세계와 인간의 육체는 악한 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러므로 물질세계와 인간의 육체는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Pneuma)을 가지고 있어서 신적인 생명 요소의 찌꺼기를 조금은 가지고 있다. 이렇게 조금 남아 있는 찌꺼기는 항상 신과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노시스(영지)란 뜻은 원래 해방시키는, 자유를 주는 지식이란 뜻으로, 사람들은 이런 지식을 가짐으로써 신과 합일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합일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금욕이 필수적 요소이다. 그노시스에서 요구하는 금욕의 실제적 모습은 다른 종교나 집단들과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사고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금욕을 육체와 정신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전투를 통해서 신에 거부하는 것, 물질적 영역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추구한 것이다.

영지주의와 기독교는 2세기에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 분리되고 영지주의는 결국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단이 되었으나 금욕의 특징을 가진 영지주의의 성향을 기독교 내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이는 영지주의를 따른다는 것보다는 경쟁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단들도 저런 금욕을 하는데 하물며 옳은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 철저한 금욕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이단이고 정통이고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가 금욕에 강조점을 두는 시대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들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단으로 판정되기는 하지만 기독교 계통의 것들로는 2세기 후반의 몬타누스파와 엔크라티아파가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금욕을 중시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교리적인 면보다는 실천적인 면을 중시해서 금욕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들이 이단으로 판정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저스틴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철학적 교리적으로 이론화하려는 경향이 교회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결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어쨌든 이 당시의 교회가 금욕적 성향이 아주 강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금욕적 경향이 강한 시대 배경은 예수를 해석함에 있어 금욕적인 전제를 가지고 이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님은 금욕을 가르쳤으며, 사도들 또한 금욕적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 경향이 되었다. 기독교의 위인들은 위대한 금욕가로 묘사되었고, 완전한 기독교, 영웅적인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은 금욕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때 쓰여진 기독교 문헌들을 보면 금욕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이 물론 그 당시의 기독교인의 삶이 금욕적인 것만이 특징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금욕적인 경향이 강했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 또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 금욕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금욕의 경향에서 기독교 안에서도 많이 나타난 생활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내용은 물론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우선 독신주의가 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되, 안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있고, 복음서에서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결혼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마 19:12). 독신주의와 함께 세상 재산의 포기(부자 청년 이야기), 사회적 안전장치의 포기 등이 묘사되어 있고, 또한 사도들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은 버린 사람들로 이해했다(마 19:27 이하). 당시의 사회적배경은 이런 텍스트들을 선호했고, 결국 예수를 진실 되게 따르는 자는 윤리적 행위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금욕을 정도에 따라 나누는 경향으로 발전되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금욕은 의무이고, 이것을 넘어서 행하면 하늘에서 큰 상급이 보장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2세기에 쓰여진 문헌에 보면 "당신이 주의 계명 이상의 것을 행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크게 높이실 것이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런 기록은 물론 기독교인의 삶을 "이 단계 윤리"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금욕적 삶은 이 세상에서의 기독교인의 삶에서 저 세상에서 더 큰 영광을 받게되는 더 높은 단계의 삶의 단계이며, 이생에서 이를 위한 것을 준비를 함으로써 이것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금욕을 특별히 선호하던 사람들은 2세기에서 3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자신들의 무리(群)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나중에 두 세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방랑 사도들의 무리"이고, 다른 하나는 "독신 이상으로 모인 무리들"이다.

방랑의 사도들은 원래 원시 기독교의 선교 과정에서 이미 나타났던 생활 형태인데, 이 형태가 금욕적 성향과 접목되면서 금욕적 방랑 사도들의 무리가 생겨났다. 이들은 초대 교회에서 상당히 넓게 퍼져 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특별히 초점을 두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대표로 자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독교의 교회 체계가 정형화되면서 교회의 교권체계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는데, 이들은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했기 때문에 교권체계에 부담을 주었던 까닭이다. 약간의 불화는 있었지만 베드로전서 2:11이나 히브리서 11:38 등의 성경적 근거 때문에 교권 체계도 이들에게 이단 판정을 내리지는 못했고, 그래서 교회의 대표적 지위에서는 밀려났으나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독신주의적 경향은 특히 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신약에서 결혼하지 않는 삶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긴 하나, 원시 공동체는 종말론적 경향과 금욕에 대한 관심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독신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관심을 돌렸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처하게 된 사회적 상황은 이러한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이 독신생활의 내용이 특별히 여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는 여자 수가 남자보다 월등히 많았고, 이는 어쩔 수 없이 결혼 기회가 적어짐을 의미했다. 더구나 믿지 않는 자들과의 결혼을 특별히 피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졌던 당시 교회로 보면 결혼의 가능성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과정으로 여기지 않더라도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의 다음 단계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에서 독신주의가 여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가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이것은 남성들이 교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당시의 교회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특정한 업무를 맡아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신앙적 열정을 가진 여자들이 자신의 온전한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결혼하지 않고 사는 생활을 하도록 한 면이 있다.

결혼한 여자에게 주는 교회의 가르침은 시민으로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여성으로서 역할을 잘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즉 교회의 직분에 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진지하게 강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교회는 그때까지 일반화되어 있던 생각인 여자는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가 실상 여러 면에서 당시의 일반 풍조와 다른 경향을 갖고 있었음에도 여성에 관해서만은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여자가 독립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교회 내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들이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순결한 처녀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독신의 삶이었다. 순결에 대한 칭송은 고대 교회에서 최고의 찬사를 가지고 나타난다. 즉 처녀들은 "교회라는 나무의 가지에 영적 은혜로 치장하고 핀 꽃으로, 기쁨의 터이며, 영광과 명예로 가득찬 순전한 사역이며, 주의 거룩함에 버금가서 하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일부"라는 것이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처녀의 순결에서 인간과 결합해서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키프리안이 쓴 문헌에 의하면 "너희 순결한 처녀들이여, 우리는 이 다음에야 될 수 있는 순결함을 너희는 이미 갖고 있구나! 너희는 부활의 영광이 이미 갖고 있으니, 순결함을 가진 너희는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존재들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잘 알려진 비유인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의 내용인 세 단계의 열매맺음에 대한 해석이 이 순결과 연결되어 해석되어서, 순교자는 100배의 상급을 받고, 순결한 처녀는 60배, 일반 신자들은 30배의 상급을 받는다고 해석했다.

금욕적이고, 처녀로 사는 삶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결과 3세기가 되면서 이러한 금욕과 독신의 삶은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3세기의 교회는 교인 수가 급증하면서 대중 교회의 모습을 갖기 시작했다. 교회란 위대하고 특정한 성인들이 모이는 특정한 집합체로 인식되어 왔었는데, 이 시기에 교회에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특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인식이 바뀌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결과 지금까지의 교회가 "성인들의 교회"라고 이해되어 왔다면, 이제 교회는 그 자체가 "거룩한 교회"로 이해되게 된 것이다.

교인 개개인에게 요구되던 순결이나 거룩함 둥은 계속 요구되었으나, 교회가 객관적인 거룩함의 틀로 이해되었다. 실제로 교회에는 거룩한 교인과 그렇지 못한 교인들이 섞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녀의 순결함과 금욕이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으로 인식되어 있었으므로, 교회의 특징이 순결함과 금욕을 상징하는 기관이 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이 결과 순결과 금욕은 교회 내에서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순결과 금욕은 교회의 필수적 요소가 된 것이다. 이제 교회 내에서 금욕적 요소는 교회를 규정해 주는 요소가 되었다.

금욕적이며 순결한 처녀로서의 삶이 각각의 교회들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이것이 분명하게 자리매김 되면서 북아프리카의 터툴리안(220년 사망), 키프리안(258년 사망),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258년경 사망)이 이러한 삶을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금욕적 삶을 살았던 오리겐은 신플라톤학파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영성신학의 대가로서 금욕과 신화를 함께 묶어서 이론적으로 통합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오리겐은 그의 서술을 통해서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 수도원적 삶에 대한 교사이자 수도원 제도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리겐 개인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가이사랴 교회의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완성된 그리스도인인 영성주의자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그를 모방하도록 했다. 오리겐은 영성주의자나 기독교적 완전함의 이삼을 가진 사람들이 사막에서 사는 광야 금욕의 형태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오리겐은 은둔자의 삶이라는 삶의 형태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리겐의 서술에서 세상과 교회의 시끄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 은둔하는 것이 완성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진지한 가능성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생활은 영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이런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소에 머무름"인데, 이런 삶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개인의 집에서, 광장이나 극장에서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가진 금욕과 세상에서 행하는 금욕이 실제로는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이런 삶의 형태는 기독교가 있기 오래 전부터 세속 세계에도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필로가 에파노르토제의 법을 설명할 때 썼던 "옛날에 사용되던 동전이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져 새롭게 사용된 것과 같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세속 세계의 금욕가들이 행했던 금식 역시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의 금식과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양적, 질적인 의미에서 음식물을 제한하는 데는 어쨌든 같은 것이다. 하지만 금식의 동기 면에서 살핀다면, 모든 금식의 실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실상 고대 교회의 금식은 처음부터 그들만의 금식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내부에서 생겨나는 금욕의 동기는 항상 제일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금욕에서는 예수의 행위와 말씀을 금욕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했다고 해야 한다.

금욕적 삶에 대한 또 다른 동기는 강력한 역동성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동기란 바로 세계의 급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으로 이 확신이 금욕의 삶을 살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세상의 급박한 종말을 확신하고 있었고(고전 7:28-29 참조), 금욕적 삶이란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실상 세상의 종말이 바로 앞에 닥친다는 급박한 종말 신앙은 초대 교회에서 사라지고 종말론적 이해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즉 세상의 종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세상이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고 해서 종말 사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종말이 영적으로 해석되었다. 종말론적 기대가 영적으로 개인적으로 해석되면서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마지막이 오는 것은 정해진 것이며, 이때 심판이 있는데 여기서 상을 받거나 저주를 받게 된다고 여겨졌다.

심판과 상급의 기대가 새로이 금욕의 동기를 유발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저 세상에서 받을 상급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금욕적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금욕에 관심을 갖게 한 다른 것은 금욕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삶을 미리 맛보고 산다는 사상이었다. 이와 관련한 표어들을 보면 "다시 얻은 낙원", "천사와 같은 생활" 등으로 이런 요소 또한 고대 교회에서 금욕으로 이끄는 특별한 동기로 작용했다.

고대 교회를 금욕으로 이끈 또 다른 요소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핵심 요소인 모방적 삶이다. 선지자들은 금욕적인 삶의 형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을 남겨서-히브리서 11:33-39는 이러한 금욕적 삶의 시작점으로 해석이 가능한 신약성경의 구절로-금욕적 삶이 모방하는 삶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또한 사도들의 삶에도 동일하게 연결되었다. 사도들의 삶에서 보여준 금욕적 삶의 형태가 새로운 자극점을 주었던 것이다. 순교자는 금욕을 통해서 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제 순교의 개념은 영적으로 해석되면서 금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평생을 통해 순교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금욕적 삶은 순교의 독특한 형태가 되었고, 동시에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증거가 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이러한 삶은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죽음과도 같은 형벌에 내어놓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이것보다 더 분명한 구원의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4세기부터 이러한 금욕의 삶은 평화기의 "영광의 순교"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동기 지워진 기독교 금욕의 형태들은 우선 교회와 일반 신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반 신자들에게 고행과 금욕 이상이 접목되면서 "가정에서의 고행과 금욕"의 형태가 나타났다. 이 가정에서의 금욕 형태는 수도원이 나타나기 전에 넓게 퍼졌던 고행의 생활 형태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수도원처럼 교회와 분리된 독립된 형태의 수도원은 3세기에 나타났다.

수도원의 본래적 특징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금욕가들이 일반 교회에서 분리해 나간 것, 즉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 결과로 이들은 하나의 독자적인 고유의 종교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을 통해서 금욕이 가장 근본적 생활 요소가 되는 특별한 특징을 갖는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된다.

수도원 이전의 금욕 단계에서 본래적 의미의 수도원으로 이행해간 과정은 단순히 위에서 설명한 기독교 금욕이라는 동기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동기, 즉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덧붙여 맞물려졌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고, 광야에서 수도원이 체계화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광야 금욕의 시작을 4세기로 잡고 있으며, 또 수도원이 생기게 한 교회의 세상적 모습이 로마 제국과 결탁한 기독교적 제국 교회라고 한다. 이 주장은 다음의 단순한 사실로 반박된다. 즉 금욕가들은 3세기에 이미 광야로 나가 있었다는 것으로, 즉 교회가 승리한 존재로서 제국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에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주장은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249-251)가 기독교를 혹독하게 박해함으로써 그 여파로 광야 금욕가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내용은 고대 교회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내용이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쓴 내용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 유세비우스가 기독교인을 국가가 박해했을 때 광야로 도망간 사람들을 수도사로 묘사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욕가들이 광야로 나간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요한네스 카시안(Johannes Cassian, 435년경 사망 추정)의 설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의 책 「수도원에 관해서」(de institutis coenobirum)에서 "수도사는 교회 감독과 여자를 피해서 광야로 갔다"고 쓰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수사학적 과장이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3세기에 나타난 광야 금욕가의 출현에 대해서, 즉 수도원의 시작에 관해서 중요한 역사적 단서를 전해 주고 있다. 카시안의 말 중에서 수도사가 교회의 감독으로부터 도망갔다고 표현하는 이상, 이는 금욕자와 교회 사이를 문제 삼아야 한다.

3세기의 기독교는 조직화된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의 최고위직은 감독이었고 모든 직위와 기능, 활동은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금욕자는 그런데 이런 조직에서 빠질 수 밖에없었다. 왜냐하면 이들 공동체의 직위와 활동은 공동체의 관심에 따른 사회적 접촉이나 인간적 문제들에 관한 참여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이들이 직위나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면 그들의 본래적 관심인 관상, 금욕과 고행은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욕자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의 일반적 질서와 규칙과는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것을 저항이나 반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신앙과 구원에의 관심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상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신비적 만남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이들에게는 세상과의 단절이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들이 보는 바 교회는 세상의 일부였다.

교회 역시 금욕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 이는 형식이나 실제적인 고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여기에 시민으로서 사회적 활동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또 한 가지는 교회가 정형화되고 조직화되면서 개인의 관심이나 중요도가 이제는 개인이 갖는 금욕이나 고행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자체, 공동체의 일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현실도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제 교회에서 개인의 역할을 감소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금욕이 수도원의 형태로 이어진 데에는 교회가 많아지고, 정형화 조직화되면서 대형화된 교회가 어떤 빌미를 재공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여자에게서 도망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수도원이 생겨나기 전에 금욕자들이 남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의 다수도 금욕가에 합류해 있었고 그래서 혼성으로 구성된 금욕자 무리가 당시에 일반화되어 있었고 수도 많았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혼성 금욕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소지가 많았다. 그 결과 이런 혼성 금욕가는 교회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호평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런 의심을 탈피하기 위해서 동성끼리의 금욕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필요성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특히 중요했다.

또 한 가지 여자와 문제가 되는 것이 가정 내에서의 금욕과 고행과 관련해서이다. 가정 내애서 금욕은 보통 스스로 선택해서 결혼을 안하고 독신으로 사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금욕의 중요한 요소인 순결을 유지하는 것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재산이나 가정과 관계된 세상사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은 금욕자들이 가지는 이상이 훼손된다는 느낌을 갖도록 했다.

많은 금욕자들이 가지는 이상을 여성들은 이미 가정에서하고 있다고 인식되는 데 대한 반감을 갖게 한 것이다. 금욕자들이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자신들의 이상을 갖기 위한 거의 유일한 대안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었다. 여자에게서 도망한다는 말은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고대의 교회는 구약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초기의 교회는 이 영향을 받아서 여성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3장을 비롯한 구약과 유대 문헌 전체에서 가진 여성에 대한 입장은 거의 일관되게 여성에 대한 평화의 입장이다. 여자란 사람을 유혹해서 죄악에 빠뜨리고,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시안이 말하는 여자로부터 도망한다는 뜻은 범죄의 가능성, 타락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함을 이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3세기 이후에 교회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든 군중밀집 교회가 됨에 따라 지금까지 교회가 견지해 왔던 윤리적으로 고급한 차원의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초신자와 고급 신자간의 2단계 윤리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교회를 "세상"으로 되도록 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초대 교회의 세속화 때문에 광야로 나갔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는 새로이 설명될 필요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교회를 떠난 금욕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저항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성 교회에 대항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단지 보통 교회에서와는 달리 복음서에서 요구하고 있는 금욕적 삶을 방해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살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의 교회 내에 금욕적 그리스도인과 비금욕적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대칭되는 쌍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세상과 수도원"이라는 반대 명제로 이해되며, 이들은 전체 교회사에서 계속적으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교회의 상황과 관련된 설명만으로는 3세기에 광야 금욕자들이 생긴 이유를 전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당시에 기독교 내로 침투해 들어온 염세주의적 세계관은 기독교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고, 세상을 떠나 그들만의 조직 질서를 원하도록 동기 부여를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견유학파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금욕의 욕구로 세상을 떠나도록 이끌었다. 경제적 이유(세금 부담), 사회 정치적 이유(군사 부역과 다른 국가적 부역 의무)들도 각각 사람들이 광야로 나가게 한 원인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 종류와 각기 다른 개별적 동기들에 의해서 금욕자들은 3세기 동안에 교회를 떠나 나왔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동쪽 지중해 지방을 벗어나서 광야에 산다는 것이었지만, 이들은 광야를 단순한 체류 장소, 즉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의 생애」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금욕자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뒤돌아보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교회에서의 삶의 모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확인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하나는 본성을 넘어서 사는 것으로 일상적이고 보통의 삶과는 관련을 맺지 않는 삶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의 삶의 습관을 근본으로부터 바꿔서 하늘로부터의 위로를 가지고 살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봉사한다‥‥ 이와는 달리 다른 하나는 보통의 인간이 가지는 국가와 사회적 삶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거스르지 않는다. 이들 역시 경건함과 주께 자신을 드림의 굳은 결심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일반 생활, 즉 결혼, 아기출산, 직업 생활, 국가의 법에 복종 등 일반 시민이 지켜야하는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로 이런 삶과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일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