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서방수도원의 시작

 

 

 

 

서방 수도원과 관련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서방 수도원이 독자적으로 발전된 체제인가, 아니면 동방수도원에서 단순 이식된 제도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로 시도되었지만 아마도 "그럴 뿐 아니라 또한"이라는 대답이 적절할 것이다.

각기 독자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 왜냐하면 서구의 수도원은 교회 내의 금욕적 성향에서, 특히 가족 금욕의 형태를 모체로 해서 발전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발전에 동방 수도원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서구의 금욕주의는 동방교회의 금욕사상을 따라서, 이 사상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생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 이식이라는 주장은 동방교회의 모범이 서방교회 수도원이 짧은 시간 안에 제 모습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데서 분명히 맞다.

동방 수도원이 문헌을 통해서 수도원에 관해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함으로써 서방의 금욕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물론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곧 서구 수도원은 동방 수도원의 단순한 모방이라는 생각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중요한 실체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동방 수도원이 통일적 수도원의 형태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즉 동방 쪽에는 동방교회 내에만 하더라도 아주 다양한 종류의 금욕적, 수도원적 이상이 있다), 서방 수도원 역시 통일된 수도원의 형태를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바로 그래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수도원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방 교회에서 가정 금욕이나 경건 활동이 수도원적 체제로 형성되어 정형화된 것은 4세기 후반이다. 이런 수도원 체제는 빠른 속도로 서방 라틴 교회에 퍼져 갔다. 빠른 확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당시의 방랑 금욕가들이다.

방랑 금욕가들은 동방의 금욕가들의 생활 형태를 그대로 배워 온 것으로 세상을 방랑하면서 소위 Imitatio Christi의 이상을 좇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꾀나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반문명적으로 살아서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멸시를 받기도 했다.

히에로니무스는 로마를 위해서 이러한 비문명적인 수도사들에 관해서 비난하면서 이들의 금욕은 금욕 자체를 욕먹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 때문에 이들의 금욕은 사회적 흐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금욕적 삶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금욕적 생활이 필요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길들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는 방랑이 아니라 "정주", 즉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금욕적 생활을 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한다.

이런 삶의 형태의 구체적 모습은 가정에서의 금욕이나 교회 내적 금욕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삶의 모습은 로마의 귀족 계급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많은 귀족계급의 부유한 부인들이 이런 삶의 모습을 따르게 되는데, 이들은 보통 신학자나 수도사들을 도와 수도원을 세우는 데 중요한 조력자가 됨으로써 라틴 수도원이 생겨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히에로니무스(Hieronimus)이다. 그는 382년부터 384년까지 3년간 로마에 머무르는데, 이때 아베틴(Aventin)에 살던 부유한 과부 마르셀라(Marcella)를 도와 이 여자의 집에서 금욕적 삶의 공동체 모임을 만든다. 이 모임은 금욕적이고 영적인 생활뿐 아니라 히에로니무스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함으로써 후에 서방 수도원의 당연한 특징이자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은 금욕과 공부가 결합되는 선례를 만든다.

히에로니무스가 로마를 떠난 후 마르셀라는 거주지를 시골로 옮기고 금욕적이고 영적인 삶의 이상을 함께 하는 여성들을 모아 여성들의 금욕 공동체를 만든다. 히애로니무스는 이에 관한 설명을 남겨 놓고 있다.

 

"직접 구운 빵, 직접 재배한 채소, 신선한 우유 등 훌륭한 땅의 소산물들이 필요한 만큼, 살기에는 충분할 만큼 제공된다. 이렇게 살면 잠 때문에 기도할 시간을 뻬앗기는 일이 없으며, 배가 너무 불러서 말씀을 읽기 어렵게 되는 일도 없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쉼터를 제공하고 가을에는 부드러운 공기와 바닥을 덮고 있는 낙엽이 고요함을 준다. 봄에는 꽃이 가득한 초원에 씨를 뿌린다. 새의 지저귀는 노래 소리는 시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한번 알려주며, 겨울이 되어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장작이 필요 없다. 온 몸이 따뜻해질 때까지 깨어 있거나 그냥 잠들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것은 나는 결코 추위에 얼어 떨지는 않는다.

 

이 내용은 사실 고대 로마의 목가적 전원생활에다 수도원적 분위기를 가미해서 만들은 시가(詩歌)이다. 고대 로마의 목가적 삶의 형태가 기독교화 되었으며, 시골 별장의 생활이 수도원 생활이 되어 있는 것이다. 히에로니무스는 다음의 시편 구절로 설명을 끝맺고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28)

 

히에로니무스가 보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은 도시에서의 소란스러움 즉, 투기장이나 서커스, 극장 또는 사람들과의 번잡스러운 교제 속에서는 불가능하고 고독과 홀로 있음 속에서만 가능하다. 만일 도시에서 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도시를 벗어나 교외에라도 나가야 한다. 라틴 교회의 '전원'은 동방교회의 '광야'와 같은 것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마르셀라(Marcella)는 도시를 떠나 전원으로 가면서 혼자 간 것이 아니었다. 로마시의 다른 금욕가들도 많이 따라서 그 여자가 살고 있는 곳으로 왔다. 금욕가 이상은 가졌으나 따라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 가능한 은둔과 고독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시 안에 있는 대 저택이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서방에는 도시 안에 "인공 광야"가 생긴 셈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도시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히에로니무스는 4세기말에 이미 수도사들의 무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게 되었다"고 쓰고 있는데, 약간의 과장이 섞인 것으로 보이지만 어거스틴이 387년 로마에서 아프리카로 돌아가면서 남긴 기록에서 로마에서 도시 수도원을 보았다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이런 수도원이 잘 알려져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도시 수도원 형태는 얼마 안가서 로마 주교, 즉 제도권 교회에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며, 교회의 인정을 계기로 조직과 삶의 양식에서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된다. 발전의 외부적 형태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도시 안에 큰 교회를 본딴 수도원 건물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에서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지명도를 가지던 바로 그시기에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수도원은 계속 확장되고 있었다. 베르첼리(Vercelli)에 주교 유세비우스(370년경 사망)가 성직자, 즉 신부들과 함께 모여 사는 성직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수도사처럼 살면서 성직을 수행했다. 이것이 교회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성직자 수도원이다.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97년 사망)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밀라노와 그 주변 지역이 주요한 수도원 중심지가 되었다. 금욕적인 생활로 아주 이름이 높았던 암브로시우스는 그를 찾아오는 수많은 금욕 지원자들, 특별히 금욕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바다를 건너서 자신을 찾아온 처녀들의 얼굴 가리개를 걷어 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뿐 아니라 수많은 영적 저작들을 통해 금욕적 삶의 방향과 필요한 내용들에 판한 조언을 남기고 있어서 수도사가 아니면서 서방 수도원의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저작들에서 이탈리아 해변을 따라있는 수많은 섬들에 만들어진 금욕자들의 은둔지역에 관해 서술해 놓고 있는데, 이 또한 광야지대가 없는 서방에 만들어진 인공광야였다. 수도사의 이상을 가지고 은둔의 세계에서 관상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외딴 섬은 훌륭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이것을 마 치 소설처럼 서술해 놓고 있다.

 

"바다는 바로 금욕의 고요한 고향이고, 포기를 가르치는 학교이며, 진지한 삶의 피난처이며 항구이며 쉼터이다. 또한 신앙 있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포기는 물론 경건함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 생긴 수도원 지역은 4세기 후반에 시작된다. 이탈리아 테라키나(Terracina)에 있는 피네툼(Pinetum) 수도원을 위해서 아킬라의 루피누스(Rufinus von Aquila)가 5세기초에 바질리우스의 수도원 규칙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을 보면,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수도원의 영향이 이탈리아, 즉 라틴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시실리 지역에도 갑바도기아의 영향하에 생긴 수도원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수도원은 동방 수도원들과 비교해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이때 형성된 이탈리아 수도원의 특징은 계속해서 서방 수도원의 특징이 되고 있다. 제일 먼저 언급되어야하는 것이 수도원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거나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로마의 귀족 계급, 특히 부유한 귀족계급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경향은 수도사들의 생활 자체에 귀족적 경향을 갖게 했다. 그러나 수도사가 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아주 빈민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빈민층의 사람들이 수도사가 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요소는 물론 사람들에게 수도사가 매력 있는 것으로 보이게 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수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부정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요인으로 작용해서 수도사들의 교만과 독선의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노예였던 사람이 수도사가 되면 수도사는 평등하므로 서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평민이었던 사람들은 인사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당시에 쓰여진 문헌들에서 수도사의 덕목 중에 겸손과 공손함, 가난함 순종 등을 강조했고, 이것이 현재까지 서방 수도원의 중요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다음 특징은 서방 수도원에서는 주교들의 역할이 항상 중요했다. 이 말은 수도원과 교회가 항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서방 수도원의 계속되는 특징 중 하나이다.

또 하나는 서방 수도원이 가졌던 유연성이다. 서방 수도원은 금욕의 이상을 가지고 수도사가 되는 데는 일치했으나 교회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자신의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환경이 바뀜에 따라 조금씩 변해야 했다. 결국은 서방 수도원은 거의 교회 조직의 일부가 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그 외에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서방 수도원에는 단절되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은둔사상이 동방 수도원에 비해서 현저히 약하다는 사실이다. 서방 수도원에는 수도사가 되어서 수도원에 들어감으로 은둔의 이상은 이미 실현한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의 생활이 세상에서와 크게 다를 바 없더라도 수도사로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북 아프리카 지역을 라틴권 즉 서방 수도원과 함께 다루는 것은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us von Hippo, 420년 사망)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특징적 수도사 거주 지역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서방 수도원에 미친 영향에서도 또한 독보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프리카의 수도원 전체를 어거스틴의 영향하에, 또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분파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북 아프리카 지역에는 일찍부터 동방 수도원의 영향으로 방랑 수도사 무리와 소단위 수도사 공동체가 있었다는-것이증명되고 있다. 사실 어거스틴의 수도원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도 다른 수도원들과의 비교, 경쟁 관계에서 설명하는 것이 정확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다른 수도사나 수도원들의 잘못이나 수정해야 할 점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수도원 형태를 만들었다고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특징은 수도원 이상과 생활 양식들이 대부분 그의 신학적 성찰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고, 또 교부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개종하는 데에는 안토니의 저작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저작의 영향으로 어거스틴은 386/7년 겨울에 카시아꿈(Cassiacum)에서 거의 수도사처럼 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인 북 아프리카로 돌아온 후 그의 타가스테(Thagaste)의 옛 집은 "철학적 삶"의 장소에서 "수도사적 삶"의 장소로 바뀌었다. 이렇게 되어 그는 결국 390년 성직자가 되고 396년에 히포(Hippo)의 주교가 된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성직자 공동체에 함께 하게 된다. 여기서 또한 (서방 공동체의 특징이기도 한) 성직자의 삶의 양태와 수도사적 삶의 양태가 결합되는 첫 걸음을 볼 수 있다. 어거스틴 같은 신학자에게는 수도사의 삶에다 신학적, 교회론적 자극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은 수도원의 기원에 대한 고전적 근거인 사도행전 4:8-35을 해석하면서 '한 마음과 한 정신'(cor unum et anima uma)의 이상은 수도원의 삶에서만 가능하고 교회의 삶에서는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수도원을 세운 목적이 바로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가 쓴 수도원 규칙도 전적으로 이 목적과 부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거스틴 수도원 규칙과 관련해서 두 개의 텍스트가 전해 오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짧은 텍스트는 첫째규칙 또는 수도원 규칙이라 불리고, 내용이 긴 것은 둘째 규칙 또는 Paeceptum(규범)이라고 불린다. 짧은 텍스트에는 긴 텍스트 내용 중에서 어거스틴의 편지로 되어 있는 부분을 여자 수도사 공동체를 위해 변형시킨 내용이 들어 있으며, 여기에 수도사의 삶에 관한 어거스틴의 교훈들이 들어있다.

둘째 규칙은 어거스틴 저작이라 하더라도(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첫째 것은 어거스틴의 교훈을 요약 축소 편집한 것이므로 최소한 어거스틴 자신이 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내용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둘째 규칙에 없고 첫째 규칙에는 있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해 오던 수도원 이상과 교훈들을 모아서 어거스틴의 이름은 빌려 하나의 규칙으로 만든 것일 수 있다는 가설이다.

이런 문제 제기와 가설을 낳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서이다. 이 당시의 라틴 수도원들은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