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1, 12세기의 새로운 수도원 단체들

 

 

 

 

수도원 제도는 10세기말에서 11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에 서방 교회에서 단일화된 하나의 통일체로 형성되어 나타났다. 몇몇 수도원이나 수도원 연합체에서 약간 다른 형태의 생활 모습이 나타나긴 했지만, 베네딕트 규칙은 서구 수도원전체의 구속력 있는 규범이었다. 각각의 개별 수도원들이 고유의 특질을 따라 자신들만의 수도생활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이 목적하고 있는 바는 베네딕트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내용을 올바로 구현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시대 즉, 중세에 있어 베네딕트 규칙은 수도사에게 있어 하나님과 연결하는 끈이요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베네딕트 규칙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는 계시를 마침내 완성하셨다고 믿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을 통한 계시, 모세 율법을 통한 계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이어서 마지막 네번째 계시를 주심으로써 이미 완성된 율법을 더욱 강력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곧 베네딕트 계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베네딕트 규칙이 실제에 있어서 수도원 전체를 포괄하는 모든 규범의 기본적 틀로서 가변성과 적응성이 뛰어남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규칙에 쓰여진 내용은 수도원 공동체의 구체적 삶을 통해서 실제화 되었고, 교회적 상황을 위한 적절한 해석을 통해서 실제적 현실에 적용되었다. 이 말은 곧 베네딕트 수도원 제도가 어떤 정형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네딕트 수도원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들은 (같은 규칙을 따르더라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삶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서방 수도원 제도를 말하면서 정형화된 모습이라고 표현할 때에, 이 말이 상대적 의미라는 것을 또한 염두에 두어야한다. 왜냐하면 서방 수도원들 중에는 방대한 조직을 가진 커다란 몸체를 자랑하는 것들도 있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수도원의 시작점은 은둔사상이었고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이 사상을 수도원들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은둔의 삶은 항상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삶을 규정해 주는 기본 토대였다. 물론 서방 수도원은 처음부터 조직화된 수도원 체계로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속에 은둔적 삶의 양식이 살아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은둔적 삶은-특히 요한네스 카시안(Johannes cassian)의 이론적 해명 덕택으로-수도사의 삶의 최고 형태로 인정되었다. 또한 이런 삶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기도와 금욕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중세 초기의 유럽 수도원이 가진 은둔 이상은 실제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당시에 수도사나 수도원장, 또 성직자들 중에서 자신이 가진 현재의 직책을 떠나 홀로 사는 은둔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끊임없이 생겨나서 독자적 은둔의 모습이 많이 나타났다.

이렇게 홀로 사는 은둔자의 삶으로 끌어당긴 강력한 요인은 당시에 영국-스코틀랜드 수도사들이 보여주었던 고향을 떠나 방랑 생활을 하는 금욕적 생활 모습이었다. 이 방랑 수도사들(monarchi peregrini)은 유럽 대륙에서 모방자들을 얻게 되었다. 은둔적 방랑 수도사는 어디에 특정한 목적지를 정해 놓고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고, 말 그대로 유랑의 길을 걸었다.

옛날에 황폐하고 물이 없는 이집트의 광야 지역을 의미했던 "은둔"의 개념이 서방에서는 깊어서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운 불모지의 숲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은둔지라는 말은 여기서는 정리되고 문명화된 땅에 대한 반대 개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은둔"이란 말은 은둔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있는 장소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가진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삶"(memoria Dei)인에, 이것에 관해서는 아이길(Eigil)이라는 사람이 후대의 수도원 원장이었던 풀다의 스투름(Sturm von Fulda)의 생애에 관해 쓴 책에서 전통적인 은둔자의 삶에 대해 설명하면서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황무지의 땅이 은둔자에게는 고귀한 광야(dilecta eremus)가 된다는 것이 은둔자들의 삶에서는 당연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 초기의 은둔주의가 서로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1세기 동안에 서방의 수도사 밀집 지역에서 진지한 은둔 운동이 생겨나 널리 퍼지고, 이런 운동을 통해서 수도원 이상을 은둔 공동체라는 새로운 삶의 양식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 당시의 서방 사람들을 멀리 떨어진 황량한 숲으로 가는 동기를 만들어 주었을까? 또한 어째서 적지 않은 숫자의 수도사들이 그들이 속했던 커다란 도시 수도원들을 버리고 거칠고 황량한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클루니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다른 베네딕트 수도사들 중 많은 숫자가 은둔자가 된 것은 그 당시에 베네딕트 수도원체제가 처해 있었던 상황과 관련해서 나타난 반응이었다. 이 시대 즉 11세기에 "수도원의 위기"가 왔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서 "광야로의 도피"는 대형화된 수도원들이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요소들을 다시금 제공했다. 세상과 단절하고

세상의 묘구와 전혀 다른 삶을 산다는 외형적인 모습인 수도원으로 나타났으나, 내적으로는 부족했던 것이 이제 많은 수도사들에게 새롭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나타난 프로그램이 "광야로 돌아감"이었으며, 이런 표어 아래서 수도사들은 원래 자신들에게 요청되었던 부름에 다시 응하게 되었다. 고독과 청빈은 거대한 수도원에서보다는 작은 은둔 지역에서 더 잘할 수 있었으며, 고독과 청빈이 수도사의 삶의 갱신을 나타내 주는 표징이 되었다. 이러한 은둔운동은 그 당시의 수도원들이 가졌던 생각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도원적 생활 형태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이해해서도 안될 것이다.

은둔과 수도라는 두 종류의 수도사적 삶의 양태에는 서로를 다시 묶어줄 수 있는 공동의 뿌리가 있다. 그것은 자유의 이념이다. 이 자유의 이념은 클루니와 그 외 다른 개혁 수도원 무리들이 올바로 이해해서, 그 결과로 수도원 연합이라는 공간 안에서 실현되었던 것으로서, 이 이념은 은둔 운동에서 또한 요청되었던 것이다. 은둔자들은 자신들이 자유의 최고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단순히 세상의 통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세상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가진 자들로서 세상을 등진 실질적 자유를 의미하고 있었다.

수도원제(修道院制)가 생긴 초기부터 계속되어 온 역사적인 전형인 이 자유의 개념을 개별적으로 은둔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계속 살아남아 있었고 특히 남 이탈리아에서 계속 명맥을 이어오던 동방 수도원적 삶의 형태였는데-하지만 아마도 게으른 전승 수호자들로 외형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이 삶의 형태가 중세적 은둔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그리스 전통을 따르는 수도원에 관한 설명에서 중요한 사람이 닐루스 로사노(Nilus Rossano, 910-1004)이다. 그는 몇 개의 수도원을 건립했는데, 마지막으로 건립한 것이 로마 근교의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수도원이다. 이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은둔 운동의 지도자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개혁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은둔적 삶의 유산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수도원 갱신 과정이 시작되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일반인들이 은둔 운동에 열성적 관심을 보이게 됨에 따라, 그 시대에 라벤나의 로무알트(Romuald von Ravenna, 950-1027)는 이 은둔 운동을 수도원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라벤나 공작의 아들이었던 그는 라벤나 근교의 클라세 지역에 있던 클루니 계통의 수도원 성 아폴리나레(Sant' Apollinare)에서 20년이 넘게 수도사 생활을 했다. 그는 이 수도원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은둔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처음에는 베네치아 늪 근방에서 살다가 그후 몇몇 동료와 함께 피레네 산까지 갔고, 988년에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이 여정의 특징은 은둔과 순례였다. 이탈리아의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방랑 은둔자로 살면서 수도원들에게 개혁의 동기를 제공하고 은둔자 거주 지역을 만들었다. 그 중에 아레체(Arezze) 근방 카밀디(Camalddi)의 깊은 산속에 만들었던 거주 지역이 가장 유명하며, 여기에 만들어진 수도원은 산 이름을 따라 카말드리 수도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로무알트(Romuald)는 함께 있던 은둔 수도사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공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수도원처럼 베네딕트 규칙을 따르게 했다. 이렇게 되자 베네딕트 규칙은 은둔자의 삶을 위한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은둔 지역은 옛날 라우렌 지역의 전통을 따라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은둔자를 위한 오두막과 전체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큰 방들, 그리고 교회로 구성되었다. 이 은둔 지역의 구성요소로 수도원도 포함된다. 여기서 수도원의 역할은 세상으로부터 은둔 지역을 보호하는 일, 그리고 꼭 필요한 경우 세상과 은둔 지역을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두 가지의 조직이 한 거주지 안에 통합된 형태였다.

은둔자였던 사람이 이 수도원 식으로 조직된 은둔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원장직을 은둔자가 맡았다는 것은 당시에 은둔주의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공동체의 삶이란 은둔자가 방해받지 않고 금욕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려고 자유 공간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로무알트(Romuald)의 활동은 같은 라벤나 출신이며 수도원 이상은 곧 은둔자의 삶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페트루스 다미안니(Petrus Damiani, 1007-1072)를 통해서 계속 맥을 이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의 사상을 신학적이고 조직적인 틀로 정리해서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개혁 수도사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사람은 1057년 추기경이 되었고, 그는 추기경으로서도 이 활동을 계속해서 개혁 운동이 단순한 수도원의 벽을 넘어서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쳐 교회 내에 자기 갱신적 은둔 이상이 시작되는 전형적 예를 제공한 사람이 된다. 이런 개혁 분위기 하에서 엄격한 은둔적 삶을 기독교적 삶의 이상으로 설명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이에 상응해서 수도원과 교회를 향해 이런 삶의 양식을 진지하게 요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수도원 삶의 형태에 은둔의 이상으로 접목시키는 데 직접적 영향을 미친 은둔 개혁가로 대표되는 사람은 요한네스 구알베르투스(Johannes Gualbertus; 990-1073)이다. 이 사람은 카말돌리(Camaldoli)의 은둔지를 떠나 플로렌스 근방 발룸브로사(Vallumbrosa) 지역에 엄격한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 수도원의 목적은 공동체를 통해서 고독과 청빈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공동체적이지만 은둔자적 고행의 엄격함이 특징으로 나타나는 삶의 양태였다. 청빈에 대한 요구와 세상과의 엄격한 단절 요구는 개혁적 입장에 서 있던 수도원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수도원에서 봉사의 일을 담당하고 있던 평신도들은 "평신도 형제"로서 수도원 공동체에 편입되었다. 이런 과정이 단순히 경제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즉 이렇게 평신도들이 수도원에서 형제로 편입된 것은 단순히 수도원의 경제적 소유물을 안전하게 지키고 잘 관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 역시 이 개혁 운동에 뜻을 같이 해서 그들 역시 그 당시에 확산되어가고 있던 이 생활 형태에 동참하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은둔자로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복음적 삶을 실현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복음적 삶의 요구는 또한 (교회와 수도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결합되어서) 사람들이 은둔 운동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동성을 부여했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으며, 도처에서 추종자가 생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은둔주의 운동은 프랑스에서 특히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여러 종류의 새로운 은둔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 하나가 괼른의 브루노(Bruno von koln)의 활동이다. 이 사람은 1030/35년 괼른에서 태어나 목회자가 되었고, 1056년 라임 성당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고, 1975년에는 교구의 궁내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의 대주교와 심각한 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81년 자신이 대주교로 선출되는 데 방해를 받아 좌절되게 되자 그는 교회 조직에서 자신의 인생을 추구하던 것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상응해서 고독의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여러 과정을 거쳐 그는 주교인 그레노블의 휴고(Hugo von Grenoble)로부터 광야인 카르투시아(Cartusia) 산지(山地)를 얻어서 거기서 1084년부터 6명의 동료들과 함께 거주를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여러 거주지 중 하나였다. 한곳에 고정적으로 거주하며 활동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거주 지역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온 것은 브루노(Bruno)가 1090년에 교황 우르반 2세(그는 브루노가 라임성당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였다)로부터 로마로 부름을 받았을 때였다. 그러나 교황은 1년 후에 브루노를 다시 은둔생활로 돌아가도록 허락했고, 그는 칼라브리엔(Kalabrien)에 있는 라 토레(La Torre)에 새로운 은둔 지역을 세우고 살다가 거기서 1101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나서 샤르트로(Chartreuse)의 원장이었던 샤스텔의 귀도(Guido de chastel, 1137년 사망)가 은둔 수도자들에게 정형화된 삶의 규칙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브루노가 시작했던 활동이 미래를 얻게 되었다.

카말드리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카르투지오(Kartauser) 수도사들도 수도원과 은둔 운동을 결합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는 각 수도사들이 자신들 개인의 집에 살았는데, 이 집들은 십자형의 길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교회와 공동의 큰방은 거주지 근방에 세워져 있었다.

귀도(Guide)의 규약들은 광야적 이상을 (공동체적 수도원내에서도) 지탱할 만한 삶의 양식으로 변형시켜 냈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에서는 사색을 통한 수도원 활동을 확장시키는 요소들을 배제하고(그 자신이 이런 수도원을 6개를 건립했다), 평신도 식의 조직을 받아들여서 엄격한 조직 체계를 갖추어 전형화된 틀을 만들어서 이 카르투지오회가 오늘날까지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같은 시대에 광야 금욕에 대한 열정은 전통적인 베네딕트수도원에 속한 수도원들에게도 불어닥쳤는데, 이는 위대한 수도원장들이 줄줄이 배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또한 시토 수도원의 건립으로 시작된 것이다.

은둔 운동은 이 시토 수도원 운동의 근본적 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뿌리는 그 당시에 시대적 성향이었고, 특히 베네딕트 수도원적 삶인 클루니 수도원 소속 수도사들의 실제적 삶에 있다. 그러나 이 뿌리는 클루니 수도사들의 삶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베네딕트 규칙의 기본 전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했다. 홀로 사는 은둔과 공동체적 삶의 형태는 여기서 새롭게 나타난 수도원적 삶의 두 가지 요소가 되었다.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강조, 이는 베네딕트 규범을 엄격하게 따르는 단순한 형태로 나타났다. 은둔의 이상이 높게 평가되던 이 시대에 나타난 시토 수도원 수도사들을 수도원 운동의 구원자로 만들어 주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는 데 시작점을 제공한 사람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몰레슴의 로버트(Robert von Molesme)이긴 한데, 그는 아마도 이 수도회의 "반쪽 설립자"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1028년경 샴페인(Champagne)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나이에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을 몇 번쯤 바꾸다가 1076년에 마지막으로 랑게레(Langeres) 교구에 있는 몰레슴(Molesme)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가 수도원을 세운 기본 생각은 베네딕트 규범의 기본원칙에 따라 세상을 등지고 사는 수도사의 삶을 살도록 하고자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이는 클루니 수도원이 행하던 생활 모습에서 강한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을 넘어 베네딕트 규범을 '문자 그대로'(ad apicem litterae) 따르고자하는 것이었다.

이 수도원은 파리의 주 도로와 붙어 있고 리용과 이탈리아와도 연결되는 지리 상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혁 운동의 산실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작은 방 하나에 불과했던 이곳은 급속하게 커져서 분원을 가진, 또 목회 사역의 의무를 가진 커다란 수도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본래의 의도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는 소란과 불만에 휩쓸렸고, 설립자 로버트조차도 자기를 따르는 몇몇 동료와 함께 자기가 세운 수도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 새로 시작했다.

개혁 운동에 의지를 가졌던 다른 수도사들은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는 방법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또한 로버트는 몰레슴(Molesme)으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그는 그 수도원 내에서의 다양한 규칙 해석을 놓고 논쟁이 심해서 자기가 세운 이 수도원에서 주인이 될 수가 없었다. 1098년에 그는 이곳의 원장직을 떠나 디용(Dijon)의 남쪽 지방인 사람이 살기에는 황량한 시토에다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 수도원의 원장(Robert)과 함께 21명의 수도사들이 이주해 갔다. 그들은 함께 의논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딤후 3:12) 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노력과 극도의 어려움이 지나간 후에 그들은 그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 당시에는 아주 열악한 황량한 곳이었던 시토로 왔다. 그리스도의 군사인 그들은 이 황량한 곳이야말로 아주 적절한 곳이라고 단번에 결정해 버렸던 것이다"

 

은둔의 이상에 관해서, 가기에 쉽지 않은 이 황량한 장소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는 문헌은 이 새로운 수도원이 있게 한 또 다른 하나의 원인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성 베네딕트 원장의 모범을 본받아 그가 제정한 규범을 따른다."

 

로버트는 그가 전에 머물렀던 몰레슴(Molesme)의 수도원을 떠난 지 1년만에 이 수도원으로 다시 부름을 받았고 몇몇 수도사들과 함께 다시 돌아갔다. 시토 광야에 계속해서 남아있던 사람들은 이미 시작해 놓은 일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의 공동체에 조직과 체계를 갖춘 명료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자 했다. 로버트가 수행했던 원장 자리에는 알베리히(Alberich)가 새로이 선출되었다. 그는 새로이 시작된 수도원이 가졌던 초창기의 어려움을 다행히도 잘 견뎌 냈고, 10년 동안 조직을 잘 이끌었다.

영국인인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이 그의 뒤를 이었다(1109-1133) 스테판은 영국의 베네딕트 수도원 출신으로서 이탈리아에서 은둔 운동에 관해서 배웠고, 로버트가 몰레슴에 있을 때 몰레슴 수도원에 들어갔었다. 그러므로 스테판은 이 새로운 수도원(시토 수도원)의 개척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는 시토를 서방 수도원 지역의 확고한 중심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스테판의 전임 원장이었던 알베리히도 수도원에다 자신이 만든 규칙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테판은 새로 시작된 시토의 모범을 몸으로 체험한 건립자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축복하기를 계속하셔서 그의 기쁨을 높이시기를 멈추지 않으셨으니(사 9:3), 곧 행복한 어머니(즉 시토 수도원)가 자녀와 자녀의 자녀들에 의해, 20년 동안에 12명의 원장들에 의해 둘러 쌓였으니 이는 마치 올리브 나무의 어린 싹들이 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시 127:3)."

 

이러한 예기치 않은 확장은 시토에서의 삶의 방식을 다른 수도원들이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것은 시토에서의 형식이 그대로 정형화된 형식으로 파급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스테판은 여러 다른 수도원들에서도 시토의 수도사들의 통일된 방식을 유지하려고 "박애헌장"(carta caritatis)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새로이 생겨나는 수도원 단체는 이 헌장에 따라서 자체적인 수도원 체제하에 있긴 했으나, 철저히 베네딕트 규범에 따라 행해졌다. 하지만 개개의 수도원들이 수도회가 실질적인 통일체로 있기 위해서 (시토 수도원과) 모(母) 수도원과 자(子) 수도원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를 원했다.

이러한 모자 관계의 수도원 체제는 시토 수도원들이 갖는조직화된 체계적 통일성의 기초가 되었다. 자(子) 수도원의 첫번째 건립은 시토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첫번째에 속하는 네 개의 수도원이 라 페르테(La Forte), 폰티그니(Pon-tigny), 클레르보(Clairvaux), 그리고 보통 프리마(Primar)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는 모리몬드(Morimond)인데, 이들은 (시토 수도원처럼) 중요한 새 수도원 설립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런 수도원들과 연결된 수도원들은 모자 관계의 체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본거지를 원 수도원에다 두었다. 모 수도원의 원장에게는 자 수도원에 대한 시찰권이 주어지도록 약정했다. 시토에서는 프리마 수도원의 원장에게 이 시찰권이 주어졌다.

통일체 체제를 가진 수도회의 또 다른 요소는 박애헌장(carta caritas)이 규정해 놓고 있었던 총회 제도였는데, 이는 1년에 한 번씩 모든 수도원장들이 시토 수도원, 즉 모든 수도원들의 어머니 격인 이곳에 모이는 것이었다.

각각의 수도원들에서의 생활형태 또한 총회 제도를 통해서 스테판이 시작했던 원칙을 근거로 하되 더욱 발전된 형태로 확정되었다. 소박하고 단순하고 값싼 옷(검은 색이었던 베네딕트 수사의 옷은 아마 이미 흰색으로 바뀌었던 듯하다), 소박한 식사, 손으로 하는 작업을 통한 생필품의 조달, 특히 수도원에 속해 있던 평신도 가족들이 도와서 함께 일했던 농업, 꾸밈없는 수도원과 교회의 건축, 단순한 형태로 행해진 예배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의 목적은 물론 모든 사람이 베네딕트규칙을 올바로 이해하고 쓰여진 그대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 시토 수도원 수사들이 살았던 삶은 (이들이 역시베네딕트 수도사였긴 하지만-역자 주) 그 당시의 다른 베네딕트 수도원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새로운 생활형태였다.

스테판 하딩이 시토 수도회의 건립자라고 불릴 만한 타당한 근거를 몇 개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수도회가 세계로 뻗어 나가 확장된 것은 부르군디의 귀족 출신인 1090년 생의 끌레르보의 버나드(Bemard von Clairvaux)의 덕택이다. 그는 1112년에 30여 명의 친척과 함께 시토 수도회에 입문했다. 1115년에 스테판은 그를 한 무리의 수도사들과 함께 클레르보로 보내서 수도회를 건립하게 하고 원장으로 세웠다. 버나드는 1153년 죽을 때까지 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의 영향은 수도원이나 수도회 안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때를 "버나드 수도회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같은 의미로 "시토 수도회의 세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버나드의 영향하에 이 수도회는 전 유럽으로 급속도로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의 임종시에 시토 수도회의 숫자는 300개를 넘고 있었는데, 그 중 5분의 1이 넘는 숫자가 클레르보의 수도회가 직접 세운 것이었다. 클레르보 지역만 하더라도 1153년에 수도사의 숫자가 7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외적인 발전은 버나드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수도회 자체를 변화시킨 데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시토 수도원이 건립 초기에 가졌던 이상이었던, 거의 청교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토 수도회의 혹독한 엄격함을 회칙에다 집어넣었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런 생찰 방식을 그의 신비적 경건을 통해 균형을 잡도록 했는데, 이 신비적 경건은 예수와 마리아를 뜨겁게 경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도회의 수도원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으나 수도원을 넘어 널리 확장되어갔다.

버나드가 교회와 정치적 활동에 폭넓은 영향을 미침에 따라 그와 같은 소속이던 수도사들도 이런 영역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버나드가 제2차 십자군 운동의 준비에 관계하게 되자 소속 수도사들은 곧 그의 편에서 서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설교의 내용은 십자군들이 프랑스의 알비파 이단을 막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나드가 귀족들 편에 서서 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토수도회 수도사들도 버나드를 따랐다. 이로써 이 수도회는 전체 교회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시토 수도회의 초기 원장들은 침묵과 독거를 추구했고, 버나드의 때에는 또한 그의 예를 따라 수도사들이 설교와 저술과 문화 활동을 통해 세상을 위한 봉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버나드의 특별한 영향력을 통해서 강력하게 확장되어 가던 수도회는 버나드가 속해 있었던 옛 베네딕트 수도원과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로 자리매김 되었다. 하지만 시토 수도사들, 즉 횐옷의 수도사들도 베네딕트회 수도사였던 것은 물론이다.

이런 현상은 베네딕트의 유산을 놓고 논쟁을 일으키게 했다. 이 논쟁은 검은 옷의 수도사와 횐 옷의 수도사들 사이로 확대되었고, 수많은 논쟁의 문헌이 만들어지는 동기가 되었다.

버나드 자신도 이 논쟁에서는 맨 앞에서 싸웠다. 그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대표자가 클루니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Petrus Venerabilis, 1094-1156)였다. 버나드는 편협하고 도전적인 시각에서 클루니 수도사들을 보고 그들에게서 쇠퇴와 배반, 또한 명백한 퇴락을 찾아냈다. 페트루스는 자신의 입장에서 클루니의 생활 방식이 장기간의 전통을 가진 생활양식이며, 인간의 나약함을 고려한 생활방식 이라고 변호했다.

이 논쟁은 근본적으로 베네딕트 수도사의 두 종류의 생활방식에 관한 것으로서, 원래의 베네딕트 이상에 관한 게으름과 몰두, 불성실과 성실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있었다. 물론 어떤 쪽이 옳은 것인지 간단하게 구별하기는 불가능했다.

버나드가 자신의 시토 수도사들에게 요구했던 베네딕트의 이상이었던 이 배타성은 적대적인 상대편이 보기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버나드가 보기에는 시토 수도원들이 올바른 수도사의 삶을 위한 유일한 장소였으며(전적으로 폭넓게 파급된 수도원의 자기 이해의 결과로), 또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일한 장소였다.

버나드에 따르면 마태복음 19장 27절은 바로 사도들이 수도사로 선서하는 선언이었으며 사도적 삶으로 불리는 그들의 생활 형태로서, 이는 시토 수도사들에게 바르게 살아 계속되고 있으며 이상적인 교회의 시작점이었다(행 4:32 이하)-"수도회는 첫 시작이 교회에서였고, 또한 수도회의 바탕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ordo qui primus fuit in Ecclesisia, imo a quo coepit Ecclesia). 동시에 그것은 그의 수도회에서 제대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이상과 실제가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설명될 수는 없다. 이(시토) 수도회의 급속한 확장은 또한 쇠퇴의 씨앗을 잉태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도 없이 자주 개최되었던 강력한 회의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형제들이 함께 해야 했는데, 회의에서 인간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이 항상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가 경작의 원칙은 (시토) 수도원들에게 부(富)를 가져다주었으며, 이로 말미암아는 이 수도원들이 토지 소유에서는 다른 수도원들과 더 이상 전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많은 수도원들이 넘겨받고 있었던 토지 개간 작업은 결과적으로 수도원들이 다시 대지주 즉 거대한 농업 기업이 되게 헤했다.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그것으로 식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 딸린 사람들의 경작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으로 쾌적하고 편안하게 먹고 살았다.

이 수도회의 확장과 관련해서 독일의 경우를 본다면 동쪽방향으로 진행되어서 독일의 동부 지역에 그들의 목적지였다. 12세기말, 13세기초에 이들 정주 공간은 상당 부분 고갈되었고, 그 결과 수도원이 해 오던 개간과 식민 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상당히 활동의 제한이 전제될 수밖에 없긴 했으나 독일의 동부 지역에서의 식민 활동은 선교 활동과 맞물려 있었다. 이 두 활동을 동시에 지원해 주기 위해서 1202년 뒤나뮌데(Dunamunde) 출신의 수도사가 칼을 가진 형제단인 기사 수도회를 세웠다.

다른 나라에서도 시토 수도사들은 교회와 관련되고 정치적인 것들과 관련하면서 자신들의 수도원에서 빠져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알비파에 반대하는 십자군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군사로서가 아니라) 설교자로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수도회에다 명예와 존경을 안겨 주는 활동은 아니었다.

스페인에서는 수도회가 아랍인들에게 대항해 싸웠다. 여기에는 시토 수도회 출신 원장이 칼라트라바 기사 수도회를 세웠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버나드의 예를 따른 셈이 된다. 버나드는 다른 기사 수도회 공동체들을 세우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수도회가 영향과 활동의 범위를 수도원 밖에까지 미치게 한 것이 여기서도 나타나는 셈이다. 버나드의 세기에 살았던 프라이징의 오토(Otto von Freising; 이 또한 시토 수도사이다)가 "세계가 시토 수도회적으로" 되었다고 했는데, 시토 수도사들은 실제로 유럽의 수도회 전체를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그들이 세운 수도원과 교회들은 서방의 문화계를 풍요롭게 했다. 그러나 12세기 말경에 이 수도회의 생동력은 고갈되었다. 수도사의 역사를 위해 가졌던 시대적 의미가 종말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수도회가 가지고 있던 폭발적 확장의 자리에는 침체가 들어와서 완만한 해체와 점차적인 붕괴로 대체되고 있었다. 원래는 세상에서 탈피해서 나가고자 했던 은둔 운동이 세상에서 특별한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새로운 경향을 따라 설립된 수도원들과 공동체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결과는 수도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장은 이 시대를 종교적 열정기로 표현하게 하는 표식이 되었고, 이는 "그레고리 개혁"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교회 개혁까지 연결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수도회들은 한편은 물론 이런 은둔 운동의 결과였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이 운동을 지탱시켜 주고 이끌어 간 가장 중요한 세력이기도 했다.

또한 지리적이고 경제적 요인들도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유럽 인구는 1050-1200년 사이에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이는 교회와 종교적 특징이 특별히 뚜렷했던 중세의 사회 분위기에서 수도사의 숫자도 배로 증가하도록 했고, 더구나 참된 기독교 정신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요구는 개인들이 수도사로 결단하도록 촉구했다.

이 금욕적-수도사적 사회 분위기는 다른 종류의 수도회공동체도 결성하게 했는데, 그 중에는 특히 "홀로 하는 은둔"이라는 구호 아래 만들어진 모임이 있었고, 또 설교자나 방랑 사제의 삶을 취하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은둔주의와 방랑 설교가 결합해서 프랑스에서 몇몇의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결성되었다. 그중 가장 독자적인 것이 아비셀의 로버트(Robert von Abrissel, 1114년경 사망)가 설립한 것이었다. 이 사람 또한 처음에는 은둔자로서 "복음적이며 사도적 삶" 즉, 전통적 방식에서의 삶의 형태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방랑단이 되었고, 이 방랑단은 1096년 교황 우르반(Urban) ll세에게 공인 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사도적 삶"은 새로운 강조점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사도적 삶에다 사도들의 사역이기도 했던 설교가 추가된 삶의 형태가 재둥장한 것이었다.

사도적 삶을 모방해서 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은 특별히 이단 세력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져서 (제도권) 교회에서 하는 방랑 설교는 단지 교회에 대한 저항과 반대를 설교를 통해서 하던 이단들에 대한 반응 정도로 생각되었다.

로버트의 설교는 특별히 여자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이단 운동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성향이기도 하다. 로버트는 여자들에게 (그의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한 시험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그가 (제도권) 교회와 같은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폰테브롤트/ 디외체제 프와티에(Fontevrault/ Diezese Poitiers)라는 곳에 혼성 수도원이 세워졌다(약 1100년경), 요한복음 19장 27절을 기념해서 남녀 혼성으로 구성된 이 수도원의 지도자는 여자 원장으로 했다. 그들이 취한 규범은 베네딕트 규범으로 하되, 이 규범에다 몇 가지의 특별 규칙을 추가해서 만들었다. 이 수도회는 프랑스에서 널리 퍼졌고, 후에 스페인과 영국에도 전래되었다.

은둔 운동과 방랑 설교와 전통적인 수도원의 결합은 크산텐의 노베르트(Nobert von Xanten; 약 1082-1132)의 삶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남부 라인 지역 귀족 출신인 그는 크산텐에서 성직자 수도회 회원이 되었고, 후에 하인리히 5세의 궁정 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는 회심을 하게 된 그는 복음과 사도를 따르는 삶(viata evangelica, vita aposolica)을 따르고자 했고, 방랑 설교자로 자신의 이상을 채우고자 했다.

1120년 그는 라온(Laon)에서 은둔 생활로 돌아갔고 여기에다 쁘레몽트레(Premontre) 공동체를 세웠다. 여기서의 은둔적 삶은 성직자 수도원 방식의 생활양식과 결합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거스틴이 전해 준 생활 방식이 새롭게 옹호자를 만나게 된 것이었고, 이 생활 방식이 전파되는 계기를 준 셈 이 되었다.

다른 방랑 설교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노베르트가 세운 공동체 역시 여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쁘레몽트레 지역과 노베르트가 시작한 쁘레몽뜨레 수도원 역시 혼성 수도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1140년 총회에서 금지 되었다.

노베르트의 방랑 설교자로서의 활동, 성직자 수도원 출신이란 점, 또 은둔 운동과의 결합 등은 그가 세운 새로운 수도회 공동체가 유명세를 타게 했고, 그 결과로 공동체 안에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관상적 금욕의 입장이었고, 다른 방향은 금욕적 목회의 입장이었다. 관상적 금욕 경향은 프랑스에서 널리 퍼졌는데, 대표자는 쁘레몽뜨레의 지도자로 노베르트의 후계자였던 포세의 휴고(Hugo de Fosses, 1129-1161)로서 수도회의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금욕적 목회 경향은 독일의 수도원들에서 특징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노베르트가 1126년 막데부르그(Magdeburg)의 대주교가 되어 쁘레몽뜨레 수도사들에게 독일 동부 지역의 선교와 식민의 과제가 부여된 다음부터 증가했다. 이 지역의 브란덴브르그, 할벤베르그, 랏체부르그 등의 주교직이 수도회가 관장하던 곳이었다.

쁘레몽뜨레 수도회의 확장은 시토 수도회의 확장과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100년도 채 안되어 이 쁘레몽뜨레 수도회는 전체 유럽에 퍼져 나갔다(1230년에 약 1000여 개의 수도원). 이전에 시토 수도원이 했던 방식인 총무원장과 총회가 중심적 지도권을 행사하는 관리 방식은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전체를 안정적인 통일체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분원제도 대신에, 쁘레몽뜨레 수도사들은 소위 치르카리(Zirkarie)라고 불리는 방식, 즉 지역별로 수도원들을 묶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방식을 택했다. 1300년경에는 이런 단위체가 30개 가량 있었다.

그런데 이 수도원 역시 시작된지 100년이 넘게 되자 자신들과 비슷했던 수도원인 시토 수도원의 운명과 같아졌다. 즉 시토와 마찬가지로 쁘레몽뜨레에도 자신의 생활을 지탱하는 고유의 능력이 고갈되었다. 종교적 삶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표현방식을 만들어 내고, 이는 또한 새로운 수도회 공동체를 낳도록 하며, 지금까지의 수도회들은 쇠퇴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되었다.

11세기에 새로 생긴 수도원 공동체들은 전체 교회적 사건전개와 따로 떼어서 관찰하거나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전체(제도권) 교회는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포괄적 개혁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레고리 개혁"은 교회권 전체를 압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수도회들이 이 개혁운동을 야기시킨 장본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이 개혁 운동으로 인한 최초의 수익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개혁에 대한 요구의 결과였고, 개혁 운동에서 가장 앞장섰으며, 그로 인해 이들이 교회가 개혁 운동 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회와 교회 개혁 사이의 관계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바깥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으며, 또한 수도사적 삶이 일반 민중 계층에도 폭넓게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수도원에서의 삶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여긴 것이나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수도사 공동체를 통해서 복음적 삶(vita evangelica)과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이 요구하는 배타적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수도사적 삶의 형태를 따르도록 했다.

삶의 실제와 교회의 실제는 이런 이상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며, 또한 이런 식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일반인들에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런 요구하에서 가장 곤란에 빠진 것이 다수의 성직자들이었다. 교회에 적대적이고 이단인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삶에 대해서 격렬하고도 신랄한 비난을 퍼붓고 폐단을 들추어냈으며, 성직자의 모든 권리와 직위를 부정했다. 해결책 중 하나가 성직자가 수도원의 모범을 따라 개혁을 해서 자신들을 역시 복음적 삶(vita evangelica)과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개혁의 방법은 카롤링거 시대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성직자는 카노니커(성직자 수도사)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극소수의 카노니크만이 존속했다. 여기에 개혁 바람이 불었고, 1059년 라테란 종교회의는 성직자를 불러 모으게 했다. 공동생활과 사유재산의 포기가 바로 성직 수도사들의 삶이고, 이는 곧 이들이 여전히 금욕적으로 이해되던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을 지탱해 온 것으로 인정받도록 했다.

개혁의 의지가 있는 성직자는 개혁에 반대하는 동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 모임에 들어갔다. 이런 새 모임 성직자는 제도적으로 조직화 되어 있던 성직자 수도원으로 가지 않고 세속적 즉 독자적 성직자 수도원에 들어갔다.

옛날의 수도원 단체가 개혁되어서 생겨난 단체들 외에도 당대의 이상이었던 수도사적 삶의 형태에서 비롯된 새로운 단체와 성직자 수도회들이 생겨났다. 다른 종류의 성직자 수도회들은 아주 구체적 동기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서 순례자들이 가는 대로 중 아주 위험한 곳에 세우는 것 같은 것이다. 이런데에서 생겨난 일단의 성직자 수도단이 산티아고 디 콤포스텔라(Santiago di compostella)로 가는 순례길에 생긴 수도회이다. 대 버나드의 이름으로 세워진 이 성직자 수도 공동체도 이같은 동기에서 세워졌다.

정규 조직화 되어 있던 단체로, 보통의 수도사 공동체와는 달리 공인된 수도사 규범(이 규범은 물론 베네딕트 규칙이었다)을 따르지 않고 교회적 규범을 따라서 살던 공동체인 성직자 수도회가 이 시대에는 다시 수도원의 모습을 좇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금욕적이고 수도원적 모습을 따라서 사는 외형적 삶의 양식을 닮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규범에 묶여지는 것까지도 좇아갔다. 여기에서는 어거스틴이 남긴 정신적 유산 즉 어거스틴 규범이 역할을 했다. 당시에 설립된 이런 수도회의 설립 문서를 보면 설립된 단체들의 성직 수도사들이 『어거스틴 제2 규범」(Regula secundum Augustinum)을 따라야 한다고 규정해 놓은 것이 여럿 있음을 보게 된다.

"어거스틴 규칙"은 이 당시에 한 가지 종류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금욕이나 수도사의 삶에 관해서 설명해 놓은 여러 종류의 문건들이 이 위대한 교부의 이름하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어거스틴과 연결되었으므로 당시의 성직자 수도회는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성직 수도사들에게서는 수도원 공동체의 삶의 형식에서 특히 어거스틴의 규칙을 규범으로 정했고, 이를 "공인 규범"(regula recepta)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 어거스틴 규범을 따르는 수도원들은 새로운 수도원(ordo novus)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이 규범 때문에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는 최소한 외부적으로는 통일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어거스틴 규칙"이 가지는 운명은, 마치 베네딕트 규칙이 이전에, 그리고 당시까지 가져야 했던 운명과 같은 길을 걸었다. 어거스틴 규칙은 물론 공식적 규칙이었지만, 구체적 적용 부분에 가서는 이 역시 유추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이 규칙은 개개의 수도회 단체나 수도원 연합체에서 삶을 규정해 주는 원칙으로, 외부적으로는 이들 모두가 같은 수도회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기능 정도밖에 가지지못했다.

그래서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를 본질적으로 대표할 만한 대형 수도회가 생겨났다: 아비뇽의 성 루푸스(St. Rufus), 보베의 성 켄틴(St. Quentin), 라벤나의 성 마리아 포투넨시스(St. Maria portuensis), 엘사스의 말바흐(Marbach), 바이에른의 로텐부흐(Rottenbuch) 등등.

이 새로운 성직자 수도회는 다양하고도 수많은 계율들을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발췌해서 자신들의 규범으로 갖고 있었던 전통적 수도회와는 달리 새로운 가족 형태를 가지고 시작했다. 물론 성직자 수도회를 새로 세운다거나, 매일의 생활과 수도사로서의 활동 등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해 오던 것과 전혀 달랐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히 강조해서 그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문헌 상의 문제였다. 규범의 해석 문제가 있었다. 이 부분에서 골치 아픈 싸움들이 일어났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이 부분을 밀집 방어하기 위해서 재 결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륜과 원조를 내걸고 나왔다. 또한 성직 수도사들이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만큼 완전한 형태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여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유대인의 회당과 기독교의 교회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만큼 일반 성직자의 삶과 정규 수도사와의 삶은 서로 차이가 있다."

 

이런 간단한 문장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수도원과 세상 사이를 분리하는 벽이 다시 세워졌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제 수도원 세계에도 새로운 벽이 생겨났다. 그러나 완전함을 추구하는 계층의 사람들(즉 수도사) 안에서 공적을 더 크고, 더 작게 나누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대표자였던 루페르트 폰 도이츠(Rupert von Deutz)는 고린도전서 1:12을 가지고 단체와 수도원들이 서로 경쟁 관계에서 논쟁하고 있는 데 대해 경고했다.

 

"나는 어거스틴파이다. 나는 베네딕트파이다, 나는 이 규범을 따른다. 나는 저 규범을 따른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 어거스틴은 주교였다. 베네딕트는 그냥 수도사였다. 주교가 수도사보다는 더 앞서 있는 것이 분명하니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가 역시 베네딕트 수도회보다는 더 위에 있다."

 

논쟁은 다방면에서 불거졌다. 양쪽은 "장자권"을 주장했고 수도원이 처음 생겨날 때 있었던 옛날의 변증 의견과 이론까지 끄집어내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드디어 교황 우르반 2세(1088-1099)가 1092년 바이에른에 있는 로텐부흐 수도원에게 우선권을 인정하는 다음의 글을 써 주었다.

 

"성직자 수도회가 가진 삶의 양식은 교황 우르반 1세(222-230)가 도입한 것인데, 이런 양식은 어거스틴이 그가 쓴 규칙을 통해 정해 놓았고, 히에로니무스가 편지로 재구성했고, 그레고리 대제는 어거스틴 주교(그레고리 1세가 영국선교사로 보냈던 주교, 교부 어거스틴과는 다른 사람임-역자 주)에게 이 규칙을 전파하라고 명했다."

 

교황은 여기서 옛날의 자신의 선임 교황 중 하나를 성직자 수도원의 설립자로 만들고 있으며, 은연중에 수도원의 전통이 성직자 수도회를 옹호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주장이 역사를 그대로 보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주장인 것은 물론이다.

독일 쁘레몽뜨레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하벨베르그의 안셀름(Anselm von Havelberg, 1158년 사망)은 성직자 수도회의 대표자로서 이런 교황의 방식으로 수도원보다 자신들의 생활형태가 더 우위라고 주장했고, 특별히 성직 수도사들은 목회자이기 때문에 더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직자 수도원 모두가 목회자인 것은 아니었고, 또한 당시의 대부분 수도사들이 목회자이기도 했다.

후일 그는 서로 무리 없이 통합하기를 바라는 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때 그가 제시한 내용에서는 옛 것과 새 것에 관해 말하면서도 기독교적 완전함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옛 것에 장점이 있고, 또한 새 것에도 장점이 있다. 하지만 옛 것에도 단점은 있고 새 것에도 역시 단점은 있다. 새로운 것이라거나 옛날 것이라고 해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또한 명예와 관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11세기말에 성직자 수도회가 수도원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이 시대가 성직자 수도회의 생활양식을 인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이 시대의 가장 큰 권력자는 바로 교황들이었다. 이 교황들은 알렉산더 2세(106l-1073), 그레고리 7세(1073-1085), 우르반 2세(1088-1099), 파스칼리스 2세(1099-1118)로서, 이들은 이 수도회를 교회와 제국의 정치틀 안에 묶어 놓기도 했지만, 수도회 확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도왔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 있는 대로, 이 시대가 "클레르보의 버나드의 세기"라고 불려졌다면, 이 시기는 또한 시토 수도사 외에도 수도사와 교회라는 무대에 성직자 수도회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11세기의 새로운 공동체 모임들과 종교 단체들은 수도회에 관한 사상이 변할 수 있고 현실 문제에 적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열정적인 종교적 삶, 예외를 두지 않는 기독교 정신이 팽배했던 중세는 수도원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들은 규칙에 순종했고, 일생 동안 수도사로서의 서원에 묶여 있기를 맹세했고, 상급자에게 하급자로서 묶여 있게 하는 엄격하게 조직화된 공동체에서 살므로써 이런 영향을 나타내 보였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시대적 상황과 관계되어 나타난 것이다. 특히 대표적인 것으로는 위에서 말한 바 성직자 수도회가 했던 순례자 보호 사역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또한 12세기에 십자군 운동이 구체적 계기가 되긴 하지만 기사 수도회가 설립되도록 한다. 또 1119년 파엔스의 휴고(Hugo von payens)가 8명의 동료와 함께 팔레스타인 순례자들을 보호하려고 세운 템플 기사단, 1070년에 병든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생겨난 요한 수도단 등은 이 시대에 가장 먼저 세워지고, 또 많이 알려진 수도단들이다. 템플 수도단을 위해서는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친필로 다음의 축하 문헌을 써 주기도 했다.

 

우리 군사들의 영광이 템플 수도단 군사들에게 있기를! (De laude novae militae ad milites Tempti)

 

여기에도 또한 전통적 수도원 사상이 당시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함께 결합되었고, 수도사적 삶의 형태가 계속해서 분화되어 나갔다. 수도원 역사에서 이 시대가 갖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수도적 삶의 모습이 교회에도 폭넓게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수도사의 삶의 형태가 아주 다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하벨베르크의 안셀름(Anselm von Havelberg)은 수도원 내에서의 이러한 새로운 여러 가지와 다양한 방향에 대해 그저 놀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교회 안에도 새로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quot novitates in ecclesia!)

 

비록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것은 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이것을 긍정적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