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탁발 수도회

 

 

 

 

만일 하벨베르크의 안셀름이 다음 세대에 새롭게 생겨난 수도회가 가진 삶의 방식을 보았다면 아마도 그는 더욱 더 놀랐을 것이다. 물론 전통적 수도회나 새롭게 생겨난 수도회나 둘 다 잘 유지해가고 있었다.

이들 수도회의 형제들은 12세기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을 해냈다. 베네딕트 수도회, 시토 수도회, 쁘레몽뜨레 수도회, 그리고 성직자 수도회의 필경실에서 수도원 신학이 태동했다. 이는 "수도원 인문주의"라고 표현되는데, 중세의 스콜라 신학 때문에 자주 간과되고 있긴 하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세기가 바뀔 즈음해서 종교적 삶이 새로운 방식의 삶의 형태와 또한 새로운 양식의 공동체 형태를 요구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전의 수도사적 삶이 추구했던 이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으므로 변화력과 적응능력이 새로운 방식에 의해 만들어져야 했다. 이전의 전통적 수도원 공동체는 시골 지역에 세워졌었고, 이런 바탕 위에서 수도원의 과제는 문화였으며 경우에 따라 선교의 과제를 수행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농업구조 및 봉건체제와 결합되어있었다. 도시 시민, 상인 등 당시 사회에 새롭게 부상하던 사람들에 관해서 수도원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적 요구를 이끌어갈 사람들이 이 계층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절한 생활 형태를 급속히 발전시켰다.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특히 중부 이탈리아와 남부프랑스에서-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가 종교적 삶의 양식을 추구했다. 이들이 가진 특징은 가난과 공동체로의 결집이었다. 어떤 가르침이나 강요와는 무관하게 성경과 예수의 삶을 향함(Hinkehr)이 그들의 기본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점은 이들이 수도원이나 교권 체계에 관해서 불신과 때로는 적대시하는 감정까지도 갖게 했다. 성경과의 직접적 만남은 자의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성경 해석을 낳았고, 또한 여기저기에서 광신적 설교를 낳았다. 이 때 함께 터져나온 가난 운동 또한 공동체를 만드는 역동적 힘으로 작용해서 공동체를 만들게 했는데, 이런 모임이 교회 내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는 쉽지가 않았다.

이노센트 3세(Innotzenz 111, 1198-1216)는 교회와 이들을 통합시키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이 노력의 결과 이탈리아의 휴밀리탄(Humiliaten)과 프랑스 지역에서 활동했던 왈도파(Waldensian)와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 교황에 의해 소집된 1215년의 라테란 회의는 종교 공동체는 어떤 것이든 베네딕트 규범이나 어거스틴 규칙 외의 다른 규칙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결정함으로써 새로 생겨나는 모든 공동체를 베네딕트와 어거스틴 수도회 양식을 따르도록 하고자 했다. 이 회의에서는 기존의 수도원들이 여론형성을 통해 주도권을 잡았다(새로운 시도를 막고자 했다: 역자 주).

그러나 교황은 이에 반대하고 기존 수도원의 이상인 공동의 삶(vita communis)과 이를 위해 요구되는 사도적 삶(vita apostolica)과 복음적 삶(vita avengelica)을 새로 나타난 생활양식에다 가능한 한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노센트 3세가 교황직에 있던 시기는 실제로 유럽의 수도원 역사상 새로운 시작이 새로운 해안을 만난 시기였다. 여기에 첨가해야 할 것이 이 새로운 해안으로 가는 길이 이전의 전통에서 시작되고 이 전통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새롭게 태동한 결과물이 중세의 탁발수도회로 태어났는데, 이는 결국 자발적 복음과 사도적 청빈 운동이 교회 체제 안에 생겨난 결과이다. 전통에서 받은 요소와 시대적 상황에 적응했던 두 요소가 가진 관계는 가장 먼저 생긴 탁발수도회가 특별히 잘 나타내 보여준다. 이것은 구츠만의 도미니크(Dominikus von euzman, 1170년경 Caleruega/스페인에서 출생, 1221년 볼로냐에서 사망)가 세운 설교 형제단이라는 수도회이다.

도미니크는 일찍이 오스마에 있는 개혁 성직자 수도회의회원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정신적 고향은 수도원식-성직자의 생활 방식으로, 중세적 수도원의 삶에서 최신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셈이었다.

도미니크는 그의 주교였던 디에고와 함께 고향 스페인을 떠나 왔다가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서 활동함으로써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이단의 무리들을 알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이 두 성직자에게 1206년 남 프랑스에 선교 임무를 맡겼다. 교황이 그들에게 위탁한 첫 선교지는 랑에독의 푸일(frouille/ languedoc)이었다. 여기에서 디에고는 카타리 파에게서 가톨릭교회로 다시 돌아온 여자들을 위하여 집 한채를 세웠다. 올바른 신앙을 가진 가정 공동체이자 삶의 공동체가 다시 개종한 여자들의 교회적 삶과 봉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야 했다.

도미니크는 이 기관을 계속 확장시켰다. 그는 확장하면서 이단적 요소가 분명한 것을 추가시켰는데, 이단들이 하는 목양의 실제를 요령 있게 자신의 선교 활동에 받아들인 것이다.

푸일에 있던 이 여성의 집은 도미니크의 주위에 몰려든 방랑 설교자들의 보호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하면서 카타리파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랑에독까지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 설교 공동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를 툴르즈로 옳기게 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주교였던 풀코(Fulko)가 그들에게 집 한 채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설교하는 성직 수도사"들 역시 교구 설교자들에게 속한 공동체가 되었다. 툴루즈의 집은 그 결과 공신력을 가진 성직 수도사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거처라는 특징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 거처 지역, 즉 이들이 살고, 기도하고 일했던 이 공간은 전체가 교구가 되었다.

1215년 도미니크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이 조직을 교황에게 승인을 받고자 했다. 라테란 종교회의의 법조문 제13조는 새로운 수도 공동체의 설립을 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종교회의가 대안으로 제시해 주었던 어거스틴 규정은 이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성직자 수도원 제도 출신인 도미니크는 그가 만든 공동체에 이 규칙을 채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규정은 새로운 해석을 위해서는 충분히 열려 있었다. 이 규칙이 100년 전에 여러 다른 종류의 성직자 수도원들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면, 지금은 이 규칙이 외부적인 형식상 칭호로서 새로 생겨난 설교자 공동체에 사용될 수 있었다. 삶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은 당연히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규범에서 다룰 문제였다. 어거스틴 규칙을 채택한다는 것은 이것을 채택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어거스틴 규칙의 기본 구성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교황의 승인은 1216년과 1217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 의해서 행해졌는데, 이 승인을 계기로 이들의 사역자가 남프랑스에서 설교를 통해서 교구 선교를 하던 것에서 전체교회로 바뀌었다. 이것으로 인해서 원래 이들이 했던 사역으로 이단들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했던 설교의 활동 공간이 교황의 위탁으로 의해서 전체 교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되었다.

도미니크와 함께 일했던 형제들의 모임은 1220년 볼로냐에서 모인 총회에서 처음으로 법규를 정했는데, 이는 총회들에서 계속해서 보충되었으며, 또 수도회가 발전함에 따라 계속 발전했다. 이 법규는 이 수도회가 인적 구성을 갖는다고 정해 놓고 있다. 이 설교 수도회가 인적 구성을 갖는 것은 아마도 서방 수도원의 역사에서 처음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수도원과 성직자 공동체가 가지는 수도회의 특징은 공동생활이었다. 그래서 수도회적 삶이란 특정한 장소에 묶여지는 것,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성직자들이 속해있는 교회에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에는 경제상의 권리와 법적인 권한도 포함되어 있다. 수도사는 입회 서원식을 함으로써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인적 구성에서는 이런 장소적 연결이 없다. 이런 구성체에 속한 사람은 수도회에 가입하는 것이지만, 어떤 특정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수도회가 수도사에게 수도원이라는 것으로 가르치는 개념은 자신들이 하나의 "단체"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모임에 속한 사람은 소박한 의미에서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전체 교회, 교구, 또는 도시에서 봉사하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친다. 이들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사는 수도회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통일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의무로 주어지는 규범이 바로 장소에 묶이지 않은 인적 연합체를 묶는 끈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수도회의 법규는 외부 세계를 향해서 이 설교 수도회가 일상적 시민들이 삶의 형태와는 물론이고, 다른 수도공동체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 모습을 갖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만의 배타성을 갖도록 했다. 내적으로도 역시 법규는 모임체 내에서 규정으로 정해진 생활 형태를 분명하게 전해놓는 역할을 하고, 또 계속해서 늘어나는 가족들을 재차 결집하는 내적 통일성을 갖게 해 주었다.

수도원적인 요소와 민주적인 요소를 교묘하게 섞어 놓은 조직 체계가 이 수도회의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다. 모임들은 각 지역별로 나뉘어지되, 이들 역시 전체가 연결되어 있었다. 모임의 장(prior)은 각각의 모임에서 독자적으로 선출했다. 지역 모임의 지도자는 지역 총회(각 지역 모임의 총대들에 의해서)에서 선출 되었으며, 또한 총 대표자(총무 교사)는 총회(지역 총회의 총대들에 의해서)에서 선출되었다.

이런 종류의 인적 구성은 수도원의 역사에서 보면 획기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이전에 있었던 형태인 장소에 묶여 있으면서 장소를 성소로 생각하고 봉사하던 수도원들이 함께 묶여서 연합을 만들었던 수도원 연합의 형태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모임들은 다른 수도원의 규칙을 받아 사용하되 장소에 묶이지 않은 인적 모임의 단체로 시작했다가 이것이 활성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무적 규정을 매개로 해서 결합한 것, 즉 이 수도회 모임에서 최고 기구가 법적 최고 기관으로 하는 것 같은 규정을 통해 결합은 그 전에 있던 많은 모임에게도 본보기로 작용했다.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정한 법규 12에는 총회는 모든 수도회들에서 반드시 설치되어야 하는 기관으로 명시되었다. 그래서 설교 수도회에서 만들어진 형태인 인적 구성을 기초로 한 모임 역시 기존 수도원들이 갖는 위치에 설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인바 자신들이 수도사 이상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새롭게 모습이 이전의 수도원 양식과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 새로운 요소는 이전 것을 새 시대에 맞게 완성시킨 것으로 여겼다.

 

"포미니크는 가입 선서를 통해서 성직 수도사였고, 규칙에 따르는 엄격한 삶을 통해서는 수도사였다. 그런데 은혜가 더욱 넘치므로 말미암아 그는 사도적 삶의 근본 원칙을 보여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새로운 설교 공동체는 또한 사도성이라는 전통적 상표를 아주 필요로 했음에 틀림없다. 이것을 얻음으로 이 공동체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수도사의 삶과의 계속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사도적 삶"을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 양 주장하는 이단 무리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사도성의 주장이 불가피했다.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은 이미 자신의 변화 적응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이런 삶은 수도사들에 요구되어 왔고, 또한 성직자 수도사들 역시 이런 삶을 요구받았으며, 이제는 이들과 나란히 가는 이단운동들 역시 이런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은 지금까지의 양식이 훌륭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들은 가난에다 가치를 부여하고, 가난했던 사도들과 가난했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방랑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이때 마태복음 10:9-20에서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따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의 설교 활동과 장소에 묶여 있지 않은 자유로움은 외부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가난에 대한 요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통적인 수도사들이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입장에서는) 수도사들 각각이 개인적으로 가졌던 가난은 수도원이 가진 공동의 재산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13세기에 나타난 자연경제에서 화폐경제로의 이행(移行)은 잠정적이긴 하지만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경제구조가 도시화 된 초기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어 옛날의 전통적 가난과는 다른 가난의 실제를 요구하도록 했다. 도시시민 계급은 설교 수도회 사람들이 소유나 수입이 없이도(sine redditibus, sine possessions) 살아 갈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이제는 설교 수도사 개인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가난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물론 설교 수도회가 가진 근본적 목적이 가난 자체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에게 가난이란 수단이었으며, 원래의 목적을 위해서 다른 방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가난을 추구하는 삶이 이단들의 무리에 대항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단 무리들의 가난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속한 설교자들도 진실한 사람들은 "무소유로 무소유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들만이 복음을 전하는 전권을 부여받고 있다고 하던 이단에 속한 설교자들에게 대응해서 이쪽 설교자들 역시 방랑을 했으며,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설교만은 교회로부터 위탁 받은 것이었다. 설교 활동은 교회에서 맡긴 사명이었으므로 수도회에서는 공부를 과제로 정했고, 그래서 공부가 그들의 규칙에 하나의 조항으로 명문화 되도록 했다. 모든 수도회에는 (가르치는) 선임자나 교사가 있어야 했다.

이제 도미니크 수도사들에게 있어서 공부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수도회의 총회는 모든 지역 수도회를 위해서 공부를 위한 중심 기관을 세우도록 했고, 재능을 갖춘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1216년에 도미니크는 형제들 중 일부를 파리로 보내서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수도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 수도회에서 만들어진 공부에 대한 체계는 대학에서의 교육 체계를 그대로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이 대학의 교수직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파리, 볼로냐, 괼른, 옥스포드 등). 공부의 필요성은 실제상은 언제나 완전한 모습으로는 나타날 수는 없었던 설교를 위해서 나온 것이었고 이런 공부에의 계속적 요구는 도미니크 수도원으로 하여금 공부하는 수도원의 특징을 갖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상겨난 새로운 특징은 수도회가 원래 가지고 있던 관심 분야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교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으므로(이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표식이 총무교사가 로마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사역은 전체 교회를 상대로 하게 되었다. 1121년에 괼른에 독일에서의 첫번째 도미니크 수도회가 세워졌다. 이 독일 지역 수도회는 처음 설립 때부터 독일적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설립자의 뒤를 이는 지도자가 독일인이었던 삭센의 조르단(Jordan von sachsen, 1222-l237)이었고, 1241-1252년까지 역시 독일인이었던 빌데스 하우젠의 요한네스(Johannes von Wildeshausen)가 수도회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세기말에 독일에서의 수도회 숫자만 90개를 넘어섰으며, 1303년에는 두 개의 지방 수도회(Teutonia와 Saxo-nia)로 분리되었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활동은 이제는 원래의 과제였던 이단을 향한 설교에서 다른 쪽으로 옳겨진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원래의 과제를 잘 회상시켜 주는 것이 나타났다. 128년 이들에게 북부와 동부 유럽에서의 선교 사역이 맡겨졌고, 이어 동양과 원동 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대학에서의 가르치는 활동(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도시에 있었던 수도회들, 특히 도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생활했던 설교 수도회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도시민들에 대한 목회(Seelsorge)였다.

중세의 교구, 특히 제도권 교회는 도미니크 수도사들에게(다른 탁발 수도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영혼 구원에 관한사역 즉, 목회에서는 관대한 자유 공간을 허락했다.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도시민들은 수도사들의 목회 사역을 수긍하고 받아들였고, 그들의 사역을 요구했으며, 그들을 도왔고, 탁발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것까지도 시민들이 스스로 계획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개는 새로 생긴 설교수도회들과 일반 목회를 하던 성직자들과 서로 경쟁 관계로 들어가게 했고 서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정식 수도회로 되어졌지만,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의 목회 사역은 대상이 개종한 여자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이 이 과제를 계속 수행함으로써 13세기 여성 운동이 교회적으로 화고한 지위를 얻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도미니크는 다음 시대의 여성 공동체에 관한 모범을 제시할 수 있었던 기관인 여성 수도원인 제2수도원을 세웠다.

여성 수도회들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돌보던 설교 단원들에게 새로운 활동 영역이 부가되었다. 이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두 가지의 수도회 외에 그들의 종교 이상을 가진 새로운 종교 이상을 나타냈다. 이것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성 도미니크의 참회 형제자매들"로서 이것이 제3의 도미니크 수도회가 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가 생긴 것과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두번째 탁발수도회가 생겨났다. 이것은 교회적, 종교적으로 같은 배경 하에서 생긴 것으로 이런 것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 뒤에는 동일한 당대의 특질이 놓여 있다. 하지만 새로 생긴 수도회는 도미니크 수도회에서와는 달리 설립자의 개인적 특징이 새로운 수도회가 생겨나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했다.

도미니크는 l221년에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수도회와 관련해서는 위기나 재난은 아니었다. 설림 동기는 제도로 전이(轉移)되어 있었으며, 이 제도는 원 과제의 사역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세운 "소형제단"은 좀 달랐다. 프란시스(지오반니 베르나르도-프란시스의 어렸을 때의 이름)는 1181년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신흥 부자였다는 것과 그의 개인적 성향이 그를 도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게 했다. 기사단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아씨시와 페루기아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혀 1년간 갇혀 있게 되는 것으로 끝났다. 어렸을 때의 꿈이 이것으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병에 걸렸던 그는 종교적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이는 그의 개종으로 이어진다.

중세의 복음주의와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가난 운동을 그는 자발적이고 개인적 가난으로 받아들였다. 프란시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추구하면서 문둥병자를 돌보고, 아씨시 근교에 있던 무너진 교회를 재건축했으며, 거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소문거리가 될 만한 희극적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와 결별하고 아씨시 주교의 보호 아래로 들어갔다(1206/07). 마태복음 10:9-16을 자기의 삶의 기본 줄기로 발견한 그는 그 당시의 흐름인 "사도적 삶"(vita apostolica)의 실천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프란시스에게 합류해서 동참하는 동료들이 생겼고, 이들은 프란시스의 지도에 자신들을 맡겼다.

 

"주께서 내게 형제들을 주신 다음에, 나에게 아무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만 가장 높이 계신 분께서 직접 계시를 통해서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라고 알려 주셨다".

 

이러한 자기 이해 하에 프란시스는 복음에서 가르치는 일반적 내용이 자기 자신 즉 개인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은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을 비롯하여 그의 동료들이 가진 목적은 단순히 복음대로 사는 것이었다. 말씀과 행위를 통한 가난의 실천, 형제들끼리의 공동생활, 참회의 설교는 소형제단의 삶의 특징을 나타내 주는 표식이었다.

1210년에 프란시스는 이러한 생활 방식을 교황 이노센트 3세에게 공인 받을 수 있었다. 공인 받았다는 것은 아씨시의 형제단이 이단의 무리에 속한다는 의심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이 작은 공동체가 대단위의 교회 공동체로 자라갈 길을 열은 것이었다.

"복음적 삶"(vita evangelica)에 대한 프란시스단의 해석은 빠르게 폭넓은 사회적 동의를 얻었다. 아씨시 근방에 있었던 작은 교회인 포르티웅클라(Portiuncula)가 이 은둔의 중심지이자 회집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그의 형제들이 그가 가르친 메시지를 가지고 시골 지역으로 가도록 했다.

1212년에 아씨시의 클라라가 그의 운동에 동참했고, 곧 이어 아씨시 근교 산 다미아노(San Damiano)에다 함께 했던 자매들과 주거를 마련했다. 이렇게 해서 프란시스 수도회의 제2회(클라라 수도회)가 만들어졌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교황 이노센트 3세가 1210년에 구두로 승낙한 규칙을 근거로 해서 더욱 확장되어 나갔으나, 분명한 개념이나 조직 체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한 설립자가 가졌던 자발성과 종교성이 모든 형제들에게 절대적 권위로 작용하기에도 불가능했다. 공동체에 입회하는 것, 훈련과 교육, 형제들의 활동 등은 어떤 식이든 명백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종교적 삶(religose vivere)을 원했다. 이러한 목적은 새로 생겨난 수도회 역시 이전의 수도원과 맥을 같이 하도록 했다. 즉 이 수도회 역시 세상과 관계를 단절(saeculum relingquere) 하기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의 어떤 다른 것, 새로운 것을 갖고 있기를 원했다. 이렇게 진행되어가는 동안, 비록 전혀 새롭게 만들어진 생활양식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이긴 하지만 이 수도회의 삶이 새로운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독특한 특징 몇 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공동체는 (당시의) 종교 운동의 배경하에 생겨난 것으로 종교적 삶은 사실 공동체였으며, 세속적 삶과 구별되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이 공동체가 살고 있는 거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규칙으로 정해진 삶의 규범에 묶여지는 것, 즉 의무화된 서원을 통해서 모두에게 알리는-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세상의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는 인간적 연합체로서 모습이었지만, 서원을 통한 생활 규범에 묶임이 이들을 수도회로 만들어 주었다.

1220년대에 프란시스단은 이러한 수도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시작했다. 프란시스는 이 시기에 이방 지역에 선교사로 가기를 노력했다. 1219년에 이집트에서 술탄 엘 카밀(ElKamil) 앞에서 설교했고, 수도회 형제단들이 이 술탄의 통치구역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형제단이 처한 혼미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에 돌아오도록 했다. 1221년 3,000명이 넘는 형제들이 소위총회를 하기 위해서 포르티웅클라에 모였다. 그리고 여기서 삶을 상세하게 규정한 규칙(regulanon bullata)을 통과시켰다. 형제들이 유럽의 모든 나라로 나가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세계 속에 확장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프란시스 자신은 수도회의 지도자의 위치에서 물러났다. 피터 카타니(Peter Catani)가 총무로 선출되었으나 곧 코토나의 엘리야스(Elias von cortona)가 이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설립자가 수도회에 대한 책임감을 계속 갖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교황이 파송한 감찰관의 도움, 특히 추기경 오스티아의 휴골리노(Hugolino von ostia; 후에 교황 그레고리 9세)의 도움을 받아 프란시스는 1223년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은 1223년 11월 29일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공인 받았다. 이 규칙은 형제단 전체가 복음적 삶을 살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소형제단의 삶은 이것이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삶을 통하여 순종과 무소유와 순결함으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규칙은 또한 교황과는 순종의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특별히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특히 규칙에다 수도회가 교황에게 추기경을 한 명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명문화 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우리들 모두가 거룩한 교회에 속해 있는 하부 조직으로서 가톨릭적 신앙에 확고히 머물기 위해서 한 명의 추기경이 이 형제단을 지도하되 보호와 양육으로 한다·.."

 

형제들에게는 노동의 의무가 있으며 노동을 통해서 살아야 한다. 신자를 대상으로 하든,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든 설교는 특별한 임무로 규정되었다(일상적 과제가 아니었다).

수도회의 입회 과정도 규정되었는데, 형제들의 공동기도가 설명되고 있다. 가난, 프란시스가 아주 혹독한 실제를 보여주고 거의 숭배하다시피 한 이 가난은 형제단을 나타내주는 가장 중요한 표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가난하게, 무소유로 살아야 하며, 돈은 한 푼이라도 받으면 안된다.

죽기 바로 전에 프란시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는 그의 형제들을 위한 영적인 유언장으로서, 이것을 통해서 그는 형제들이 규칙을 "가톨릭적으로 더 잘 따를 수 있도록 하고자"했다. 유언장에는 규칙을 절대로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말라(regula sine glossa)는 엄격한 조항이 들어 있다. 선서하듯이 하는 이 텍스트의 설명에서 우리는 그 뒤에 흐르고 있는 가난에 대한 논쟁을 느낄 수 있다.

1226년에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죽음을 맞았고, 뒤에 수많은 형제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예측할 수가다.

소형제 수도회는 이미 전 유럽과 근동에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총무였던 형제 코토나의 엘리야스(Elias von Cotona; 1232-1239) 아래서 수도회는 현저히 목회적 특징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프란시스 수도사들이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이 이미 그들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과 같은 활동영역을 갖도록 했다.

로마(교황청) 사람들과의 긴밀한 유대는 프란시스 수도사들이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을 가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도시에서의 목회 활동의 일환으로 프란시스 수도원 역시 도미니크 수도원처럼 도시에다 그들의 주거를 갖게 되었다. 이슬람 지역이었던 북 아프리카와 근동 지방에서 선교하거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2세기 중반에 프란시스단은 이미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파리, 옥스포드, 괼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 활동도 했다. 프란시스단 역시 공부하는 수도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수도원장이 한 명이 있는 수많은 지방 분회들이 지역마다 모여 있었다. 이들을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것이 지역 원장이었고, 이들 지역 원장 위에 이들에 의해 선출된 층무원장이 전체 수도회를 지도했다.

이러한 프란시스 형제단의 지도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프란시스가 직접 지은 것으로 이것은 직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형제들은 그들(직급자들)과 의논하고 순종하되(원장의 직에 있는 사람들은) 종이 주인에게 하듯 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장들은 모든 형제의 종이기 때문이다."

 

독일 지역에서는 1221년부터 급속히 확장되면서 세워진 것들(Augusburg, Wiirzburg, Worms, Speyer)이 1230년에 두개의 지방 구역(Rteni와 Saxonia)으로 나누어지는 성장을한다. 라인 지역 지방회는 1239년에 다시 둘로 나누어져서 남 독일(Koln)과 북 독일(StraBburg)의 지역회가 생겼다.

프란시스단 뿐 아니라 클라라 수도회도 확장을 거듭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여자 수도회들이 갖던 특징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좁은 독방의 밀실에서 기도와 관상을 하는 삶이 그것이다. 하지만 다른 여자 수도원이나 여자 성직자 수도단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가난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클라라는 가난과 관련해서는 철저히 프란시스와 일치하고 있었으며, 또한 자매들은 자신들의 특징 곧 가난의 특권(privilegium paupertatis)을 고수하고 이를 옹호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자매들처럼 이제 클라라회 자매들도 여성 종교운동이 교회권의 공인을 받으며, 또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수도원적 삶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들 또한 프란시스단이 했던 방법을 좇아서 급작스럽게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냈다.

수많은 속인들, 특히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종교적 삶을 추구하고 공동체에 속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기가 쉬웠고 이단의 비밀 집회로 오인 받곤 했다. 어떤 삶의 모습이 교회의 공인을 받으려면 명문화된 규범과 규칙 또 규약과 벌칙 규칙이 있어야 했다. 종교적 삶이란 수도회적 규범을 따르는 삶으로 나타나야만 했던 것이다.

13세기 평신도 종교운동이 교회와 접목되는 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힘이 폭을 더욱 넓혔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비록 이것이 딱딱한 규범으로 나타났고, 전체 세계 즉 기독교 세계에서 정당성을 가지는 수도회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러나 우선은 종교적 삶이 있었고, 그 다음에야 이것이 올바른 가치를 갖게 되었고 또 동시에 안전함과 지속성을 갖게 되었다"는 곧 신앙에의 중세적 확신을 나타내 준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제2 수도회(자매 수도원-역자 주)가 빠르게 확산되어 가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자매 공동체들의 적지 않은 숫자가 어떤 특별한 규범을 정하는 것이 없이 단순하게 클라라의 삶의 규범을 따랐고, 그래서 이들 또한 클라라 수도회가 되었다.

프란시스단의 활동과 그 활동의 뛰어남이 수도회라는 벽을 뛰어 넘어서 계속 확장되어 가면서 이 수도회의 활동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세력과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도 자꾸 많아졌다. 이것 역시 도미니크 수도회에서도 역시 그랬던 것과 같다. 제3프란시스 수도회 역시 형제단을 배경으로 생겨난 것으로, 이것 또한 공인받은 대단위 수도회 공동체로서 지도와 보호를 받고자 했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 평신도 종교 운동의 결과였다.

이 수도회가 3개의 가족 단위에서 확장되어가고, 또 종교적 삶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초신자들에게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했던 이전 수도회들과 성직자들로부터의 적대자들을 막아내면서(여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위대한 교사였던 보나벤츄라(Bonaventura, 그는 1274년 리용 종교회의 동안에 죽었다)와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Thomas von Aquin(이 사람 또한 같은 해인 1274년 이 리용 종교회의를 참석하러 가다가 죽었다), 이 수도회는 평화와 안정적 질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설립자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 이미 터져 나왔던 문제, 즉 특별한 능력을 가졌던 창시자 의도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데 대한 어려움에 관한 문제가 설립자가 죽은 후 심각한 논쟁으로 더욱 날카롭게 터져 나온 것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학자들에게만 한정된 학술적 논쟁이 아니었다. 이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수도사들의 매일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프란시스단의 본질적 품성에 대한 해석과 이 품성의 지속적 보유에 관한 문제였다. 이는 프란시스적인 것에 관한 문제(quaestio fransiscana), 곧 설립자가 원래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함으로써 그의 의도가 시대를 넘어서, 또한 여러 다양한 상황 아래에서도 존속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그의 아들들에게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을 의무조항으로 해 놓고 이 의무를 그가 세운 규칙을 어떤 해석이 없이 그냥 그대로 따르는 것과 동일시했다. 일찍부터 두 가지 다른 의견이 수도회 내에 있었다.

하나는 '해석 없이 규범대로'(regula sine glossa) 따르는 쪽이었는데, 이런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프란시스를 몸으로 체험하고 몇 년씩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로서 하나의 분파를 형성했다. 이들에게는 규칙이나 유언장 외에 프란시스 자신이 바로 그들의 삶의 규범, 즉 소형제단에게 의무적인 규범이었다. 그들의 확신은 공동체가 원래의 상태로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 무리에서 프란시스단의 스피리투알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프란시스 정신의 계승자라고 생각했으며, 후대의 역사 기록에서도 보통 이렇게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이 보여준 엄격함과 조금의 양보도 없는 배타성을 본다면 이들을 이렇게 인정해 주는 것은 좀 무리라 하겠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해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수도회 설립자의 생존시의 삶의 모습을 근거로 내세웠는데도 불구하고, 프란시스의 요구를 실제적 삶에서 "프란시스만큼"을 도저히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프란시스단이 나타날 수 있도록 했던 힘인 역사의 진행을 외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수도 공동체에 나타나는 문제일 수밖에 없는 본래의 의도를 지켜 나가는 것과 현재에 대한 불가피한 적응, 즉 처음 시작과 계속 만들어감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은 이런 것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스피리투알단은 곧바로 피오리의 요아킴(Joachim von Fiori, 1202년 사망)의 계시론에 빠져서 이 사상이 말하는 성령의 시대가 바로 프란시스를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들에게 프란시스는 "전대미문의 세계사적 신화"로 부각되었고 그가 만든 수도회-물론 스피리투알단의 시각과 실제에서-가 마지막 때의 유일한 수도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련의 생각들은 아씨시 출신의 설립자의 인격이나 인간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고, 더구나 규칙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삶(regula sine glossa)을 표방하는 자들로 자신을 지칭하는 것과는 더더욱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극단적 스피리투알 단원들은 요아킴 사상과 결합하면서 결국 이단이 되었고, 프란시스 수도회 내에서와 교회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다른 의견을 가졌던 무리들 또한 일찍 즉 수도회 설립자의 생존 때부터 있었던 것들로, 이들은 "공동체"를 지향하던 무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로부터 나중에 옵세르반츠(Observanz)회와 콘벤투알(Konventual)회가 나왔다. 이들에게서는 프란시스 운동이 전통적 수도회들이 가졌던 삶의 모습과 하나로 합쳐져서 다른 수도회의 모습과 동화되는 것이 나타났다.

이들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 특히 도미니크 수도회였는데, 이들의 확장과 성공적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는 시샘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열정적 경쟁심을 바탕에 둔 현실 적응의 노력은 조직이 크게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의 결과 수도회는 성직자화 되었고 대학화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프란시스단 역시 도미니크단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하는 사역에 동참하여 도움을 주는 공동체로 만들었다. 로마의 고위층들의 호의는 수도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정에 불타고 있던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프란시스가 형제들에게 명령한 엄격한 가난을 놓고 벌이는 불가피한 분쟁이 바로 로마의 원로들에 의해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그레고리 9세(1227-1241. 이전에 추기경 휴골리노(Hugolino)로서 몇 년간 수도회 설립자의 조언자요 조력자였다가 1230년에 칙령 "Cuorfongori"를 통해서 첫째는 유언장은 수도회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것-그러므로 교황청에서 규칙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고 또 동시에 앞으로도 규칙을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과 소유의 전적인 금지하는 것을 법적인 유권 해석을 통해서 "사용권은 보장되는" 생활양식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인정은 수도회가 큰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교황의 이름으로 되어진 규칙 해석은 수도회에게 설립자의 유산을 계속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스피리투알 사람들은 이런 전개에 함께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공동체에게도 현실에 적응하는 것과 또 다른 수도회와 차이를 없애 보려는 노력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어쨌든 수도회 내에서 온건파에 속했던 무리들(콘벤투알과 옵세르반츠를 구성하게 되는 무리들)은 교황의 규칙 해석을 중시하여 수도원의 설립자가 가졌던 꿈과 목적을 교황의 권위 있는 말씀과 서로 조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이 무리의 대표자가 보나벤츄라(Bonaventura)이다. 이 사람은 수도회 역사 초기에 중요한 대변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1257-l774년에 총무원장으로 프란시스 수도회를 이끌었다. 보나벤츄라는 이미 주어져 있었던 교황의 규칙 해석에다(수도사로서는) 처음으로 규칙에다 공식적 해석을 덧붙였다. 그는 이 일을 그가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 당시에 논쟁되고 있었던 설립자의 유산을 법적으로(durchdas Recht) 보장해놓고자 개최한 회의인 나르본(Narbonne) 총회(1260)에서 결행했다. 그는 규칙 해석에다 다음과 같은 설명 표제를 붙이고 있다.

 

"담이 있어 경계를 정해 놓지 않으면 소유물 자체를 잃게 된다."(시락서 36, 27)

 

이것으로 여러 개의 분파로 갈라져서 고통스럽고 짜증나는 싸움에 휘말려 있던 이 수도회가 내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었다. 규칙의 단어들을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설립자가 현재에 살아 있는 존재로 회상하는 것도 아니고, 아씨시의 설립자가 규칙에 정해져 있는 원래의 의도 자체에 대한 관심을 쉽게 포기하는 것도 아닌 방향에서 수도회의 앞길을 결정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프란시스가 했던 탁월한 시작점은 홀로서기로 살아갈 능력이 있는 제도화되어 있는 기관 속으로 확실하게 번안되어 들어오게 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시스 수도회라는 두 개의 커다란 수도회의 발전과 함께 서구의 수도원은 새로운 수도원의 모습을 선보였다.

수도사의 삶의 목적은 원래-베네딕트 규칙이 정해 놓고 있는 것처럼 "수도사란 진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이고, 이것은 모든 수도회들에 공통적인 내용이다. 두번째 목적인 설교와 목회는 수도사가 실제로 사는 삶의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고, 이것을 통해서 수도사적 삶의 양식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넓게 파급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특정한 장소에 묶여 있지 않고 사람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생활 방식은 그 자체로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활양식은 13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에 종교적 제도로 받아들여졌고,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런 동참세력들 역시 수도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수도회적 명망과 영향력을 갖고자 했다. 이전부터 있었던 종교 공동체들은 현실에 적응하고자 했으며, 또한 탁발 수도회의 모형을 따른 새로운 수도회의 건립이 수도원계를 지배했다. 1198년 이노센트 3세가 공인한 제3 수도회(평신도 수도회-역자 주)가 바로 이런 흐름의 결과물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처럼 요한네스 폰 마타(Johannes vonMatha; 1213년 사망)가 세운 공동체는 성직 수도회의 생활 형태를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수도회의 조직 체계는 탁발 수도회를 표준으로 삼았다. 이 수도회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그것은 모슬렘에게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이 수도회의 활동은 특별히 스페인 남부와 북 아프리카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포로들을 구할 때 빈번히 사용된 방법이 이 수도회 소속 수도사와 포로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수도사들이 이것을 고전적 수도사의 이상인 "그리스도로 인한 방랑"(Peregrinatio propter Christum)으로 이해했고, 그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이 이상을 행하는 선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수도사들의 고향인 수도원들은 구해 낸 포로들을 그들이 갖고 있던 "자비의 집"에서 돌보아 주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수도회는 그들에게 목회적 활동까지 해야 했다. 이것으로 수도원의 활동 영역이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특정한 목적을 가진 수도회였던 트리니타리를 이어 곧바로 생겨났던 메르세다리엔 수도회 역시 이런 종류의 수도회였다. 1223년 페트루스 놀라스쿠스(Petrus Nolascus; 1256년 사망)는 "자비로운 우리의 성모 수도회"라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 수도회의 과제 역시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을 구해 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기사 수도회(기사단)의 시작이다. 이 수도회는 나중에 탁발 수도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12세기 중반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생겨났던 칼멜산 은둔자들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베르트흘트 폰 칼라브리엔(1155년 사망)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은둔자들을 모아 무리지어 살도록 했고, 예루살렘의 대주교는 1207년/09년에 이들에게 규칙을 제정해 주었으며, 이 규칙은 122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공인되었다.

당시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평온치 못한 상황 때문에 은둔자들은 좀 더 안전한 지역인 유럽의 나라들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은둔적 삶이 수도원 안으로 접목되어 들어갔고, 또한 규칙이나 활동은 탁발 수도회의 것들과 동화되었다. 이 수도회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급속히 확장되었다. 독일에는 1249년 괼른에 수도회가 세워짐으로써 진출을 했다. 이 수도회가 미친 영향의 가장 큰 것은 마리아 숭배사상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중세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수도원들인 도미니크 수도원과 프란시스 수도원에다 깔멜 수도원 역시 중세의 흔한 수도원의 하나로 추가되었다.

1233년에는 플로렌스에는 종교적 열정을 가진 시민들에의해 세르비텐 수도최(Servi beatae Marine Virginis; 선하신 처녀 마리아의 종들)가 생겨났다. 이 수도회는 어거스틴 규칙을 따랐고 깔멜 수도회와 같은 입장이었으나 15세기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탁발 수도회로 인정받았다.

수도회의 역사에서 은둔자들의 무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무리들로부터 드디어 13세기 중반에 커다란 포괄적 대형 탁발 수도회가 등장했다. 이것이 어거스틴 은둔 수도회 (Augustinereremiten)이다.

이 수도회는 이탈리아 지역에 있던 여러 종류의 은둔자무리들이 함께 연합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전적으로 교황청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보면 이 수도회는 설립자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추기경이었던 리처드 아니발디(Richard Annibaldi)의 열정적 노력과 1253년에 교황 알렉산더가 내린 칙령 「보편 교회에 허락함」(licet ecclesiae catholicae)을 통해서 생겨났다. 이 수도회는 이미 있던 무리들이 강제적으로 묶여져서 하나의 새로운 수도회를 형성했기 때문에-일부는 자신들의 독자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4개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이 새로운 수도회는 수도사의 근본적 이상인 은둔에다 초점을 맞추어 그 이름에다 은둔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긴 했지만, 실제상의 규칙이나 활동은 탁발 수도회와 같았고, 특히 도미니크 수사들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이 수도회 역시 빠른 성장을 거듭해서 1298년에 이미 독일지역에 40개의 수도원이 세워져 두 개의 지역회로 나누어져있었다. 이렇게 해서 도미니크회, 프란시스회, 깔멜회와 함께 어거스틴 은둔 수도회가 세워졌고 이들이 중세 도시의 교회와 종교를 이끄는 주도적 세력이었다.

이 어거스틴 은둔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보여준 것은 수도원적 삶의 가변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보여준 예에 해당한다. 11세기에 개혁의 열정을 가진 성직자들이 어거스틴이 남긴 수도원 유산을 넘겨받아서 성직자 수도회를 만들어 내었고, 이것은 당시의 베네딕트 수도원의 틀 속에서 대형 수도원으로 동화해 갔었다. 그런데 이제 13세기에는 탁발 수도회라는 새로운 형태가 수도원의 전체적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 하에서 어거스틴 규칙이 새롭게 부각되었지만 역시 탁발 수도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제 규칙이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을 포함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쪽으로 이해되는 흐름이 잡히고 있었다.

탁발 수도회들은 기독교적 가난이 특별히 강조되던 13세기에 교회권을 지배했던 복음주의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도시의 시민계급과 도시 문화가 이 수도회들에게 생존 공간과 발전의 여지를 제공했다. 이들은 한 세기가 넘도록 여러 가지 다양한 모숨으로 유럽의 종교 문화를 담아내었는데 이는 정신문화를 주도하는 기반인 대학에까지 이어졌고, 또한 권력의 핵심부인 제후나 왕의 궁내관 같은 로마의 구신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탁발 수도회가 가진 독특한 종교적 삶은 종교 운동과 종교적 역동성을 하나로 모으는 그릇의 역할을 했다. 또한 그럼으로써 지금까지의 수도회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탁발 수도회에 의해 나타난 특별한 것 중 하나가 여성 종교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도미니크단이나 프란시스단에 의해 언급되기 시작한 이것은 다른 모든 수도 공동체에도 파급되었다. 자매 공동체들 모두 역시 형제 수도회와 같은 규칙을 따랐으나, 교회의 감독의 강도는 좀 느슨한 규칙이 (따로) 주어지기도 했다.

어떤 규칙에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자매 공동체들은 이단의 의심을 받았다. 공인받은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공인받은 수도회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곧 이단의 의심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중세의 수도회에 관한사람들의 생각이 낳은 결과였다. 이 때 규칙이 구체적으로 어떤 규칙인가 하는 것, 즉 도미니크의 규칙인가, 프란시스의 규칙인가, 아니면 어거스틴의 규칙이나 또는 옛날의 어떤 수도회의 규칙인가 하는 것은 별 문제시되지 않았다.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든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떤 규칙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주위에 어떤 형제 수도원이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 변수였다. 주변의 형제 수도원에서 이 경건한 자매들은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동의하면 이 형제 수도회가 가진 규칙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형제 수도회들이 자매 수도회를 자신들의 계보로 받아들이는 데 항상 흔쾌히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1228년 총회에서 자신들의 수도회에 새로운 자매 수도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고 결정했다. 시토 수도회 역시 같은 해에 같은 결정을 내렸고, 프란시스단 또한 자매 수도사들에 대한 특별 배려 의무(cura monalium)를 없애 버렸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자매 수도원 문제를 놓고 수도회와 로마 궁내관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결과였다. 이것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킨 것이 교황의 명령이었다. 1245년 이노센트 4세는 자매 수도회가 형제 수도회에 편입되는 것을 규칙화했고 동시에 형제 수도원들이 그들에게 부속된 자매 수도회들을 책임질 것을 명령했다.

수도회는 13세기에 또 다른 변화와 새로운 성공적 요소를 경험했다. 탁발 수도회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여러 수도회들이 수도회의 원래 목적보다는 부차적 목적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새로이 건립되는 몇몇 수도회는 오히려 이 부차적 목적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소위 "병원 수도회" (Hospitalorden)이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것은 수도원의 고유한 이상 중 하나였다. 또한 초기의 동방 은둔 수도원에서도 이런 것은 당연한 활동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수도원 역시 자신들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이 기본 이상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공간과 병자를 돌보는 것은 초창기부터 수도원의 당연한 기본시설이었다. 하지만 구제를 받는 사람들은 보통 수도회 회원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산발적으로 허용되었다.

수도원 역시 자신들을 대중 구제 기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세의 변화된 상황은 수도원의 구제 활동 역시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십자군 시대를 낳은 시대는 순례 중에 있는 순례자와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 수도회가 생겨나게 했다. 실제로 기사단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이것이었으며, 기사단 역시 원래의 병원 수도회가 다른 모습으로 변모된 것이었다.

하여튼 유럽에 나타난 순례 문화는 타지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기 위한 기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순례자가 지나는 길 근처에 있던 많은 수도회들이 이 과제를 떠 안았다.

또한 이런 기관들은 도시들이 성장함에 따라 생겨난 가난한 사람들과 일반 병자들에 대한 문제에도 점점 더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이런 활동은 지금까지도 교회의 당연한 활동으로 여겨져 왔으므로 이런 진행은 필연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사랑의 활동의 결과였던 구빈원은 정규적으로 제도화 된 기관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은 구빈(救貧) 활동이 시 전체의 문제로 되고, 그 결과 구빈원들이 공영화되면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제도화된다는 것은 군빈원이 수도원화 되는 것이기도 했다. 종교적 형제단들(수도원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빈원들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의무를 넘겨받거나 새로운 구빈원들을 세우기도 했다. 공동체와 구빈원들이 함께 묶여지면서 보통구빈원 역시 수도회 선서를 하고 수도원 공동체의 하나가되는 식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대부분 어거스틴 규칙을 따르는 많은 수도회들은 이렇게 구빈원에서 시작되어 수도회로 바뀐 것들이다. 다른 공동체들 역시 여러 지역에서 탁발 수도회의 생활양식을 따라 세워졌고, 이들 또한 구빈 수도회가 폭넓게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여기에 속한 수도회로 1198년 몽트펠리(Montpellier)에 세워진 성령 구빈수도회가 있다. 이 수도회의 수사들은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나 누구는 하나님과 선하신 마리아와, 성령과 무소유 하신 우리의 주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Ego N, offero et trado me ipsum Deo et beatae Mariae, et Sancto Spiritui et dominis nostris infirmis)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던 이 수도회는 프랑스, 이탈리아, 남 독일에서 널리 퍼졌다. 프랑스에서는 이전에 이미 성 안토니의 병원 수도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13세기에 어거스틴 규칙을 받아들였고 구빈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 문제를 과제로 한 수도회 공동체들은 다른 일에도 눈을 돌렸다. 이것의 하나가 12세기 아비뇽에 세워진 수도원으로 이들은 특별히 다리를 놓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또한 이 수도회 이전에 이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자유 시민 계급의 형제 모임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위해서 만들어지는 이런 모임의 근본적 배경은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은 정형화된 수도원으로 바뀌는 것이 계속되었다.

중세의 수도원 파급 지역은 13세기말에서는 극도로 확장된 모습을 보였다. 두번째 서열로 물러나 있던 이전의 수도원들 외에 새로운 수도회들이 많이 등장해 있었다. 이들은 수도원끼리의 지역의 한계를 넘은 인적 관계를 통한 결합, 엄격한 조직 체계와 중앙 관리 체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규칙과 이름, 복장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으나 수도원에서의 삶이나 활동에서는 별 차이 없이 서로 아주 비슷했다.

수도 공동체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것은 세기의 마지막 시기인 이 당시에 수도회 사상에 변화 적응 능력과 다양한 현실적 적응 가능성을 새로이 보여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수도회들이 구속력 있는 유일한 최종적 규범으로 복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 복음서가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바는 복음적 삶이란 여러 가지 다양한구체적 현실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테판 무렛(Stephan Muret, 1124년 사망)은 탁발 수도회가 생겨나기 이전에 벌써 그가 세운 수도원을 위해 썼던 규범에서 복음과 규칙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해 놓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과 형제들이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크고 넓으며 광대하다. 가장 높으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우리는 그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다‥‥이런 여러 가지의 길에 대해서는 여러 교부들이 추천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가 성 바질리우스 규칙, 성 어거스틴 규칙, 성 베네딕트규칙 둥이다. 하지만 이 규칙들이 수도원 삶의 원천은 아니다. 이들은 파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뿌리가 아니라 가지이다. 믿음과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규칙 중 하나의 규칙밖에 없으니 이는 첫째의 것이요 근원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원천으로부터 모든 다른 규칙들이 마치 샘에서 나오는 작은 개천처럼 흘러나온다. 이 근원이 되는 규칙은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규칙에 있는 개별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본적 규칙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이렇게 복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은 모든 수도회에 공통적인 것이었다. 하나의 복음은 여러 종류의 서로 다른 눈으로 읽혀지고 서로 다른 귀에 들리게 되고, 이와 함께 특정한 인간 공동체에 대한 적응에서는 복음을 따르는 삶(vita evanglica)의 독특한 외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설립자가 쓴 규칙에서 나타나고, 각각의 수도회들이 당면해서 규칙으로 되어가게 한 구속력 있는 확정적 법규에서 나타났다.

수도회 같은 이런 커다란 연합체가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에서 읽어 낸 삶의 양식을 법적, 예전적으로 객관화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즉 복음서에서 읽어 낸 삶의 양식을 객관화시킴으로써 모든 주어진 조건적 상황에서 복음적 삶의 양식이 무조건적으로 통용될 수 있게

했고, 그 위에 모든 인격적 권위를 제도로 만들어 냄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