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중세 후기의 수도원

 

 

 

 

네덜란드의 문화 역사학자인 호이징거(J. Huizinga)는 14, 15세기를 "중세의 가을"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 시대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명칭인 "후기 중세"라는 이름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후대라는 것은 몰락과 퇴락이 진행되었다는 관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상에 나타난 어떤 시대에다 특징을 나타내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항상 나중 시대에 일어나는 일이고, 이때에는 이름 붙일 당시의 시각과 판단 능력을 갖고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14, 15세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이 세기들이 중기 중세의 사회 형태가 해체되는 것이 특징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해체의 경향 속에서 중세 중기에 생겨났던 생활의 형태들은 이런 생활 형태를 생겨나게 했던 근거를 상실해갔고, 이전에 이런 생활 모습을 낳았던 틀은 붕괴되었다. 이런 진행은 수도원 공동체들에게 불안정과 무기력에 빠지게 했는데, 이런 것은 현실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옛 수도원들에게 특히 심했다.

해체적 경향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인 단체로 만들어 가던 중기 중세적인 수도회 사고에도 영향을 발휘했다. 개개의 수도회들이 독자적인 교회의 한 지체나 단체가 되었다. 수도사, 성직자 수도사, 탁발 수도회들, 그리고 그들 외에 지금까지 옛날의 수도원에서 관장하던 교육 기관과는 관계없이 성장한 대학들과 학교들이 이제 경쟁 관계에 들어가게 되 었다.

14세기말 서방이 두세 명의 교황하에 있는 분열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이 분열은 각각의 수도 공동체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강하게 불어닥친 당시의 국가주의도 대형수도원들이 가진 국제성을 공격해서 수도 공동체들이 국가의 경계 안에 머물도록 강요했다.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 역시 수도원과 공동체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소위 백년 전쟁이 수도원을 황폐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요인들은 서로 얽혀 있었기는 해도 수도원 내부에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수도회들의 전통적 삶의 상태를 그 근본에서 위협해 왔다. 여러 가지 다른 다양한 양태를 가지긴 했으나 수도사들이 용감하게 세상을 등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의 실제적 삶은 다시 세상과 연관을 맺어야 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 시대의 행과 불행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옛 수도회에 속한 대형 수도원들에게는 봉록과 관련해서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대수도원이 성직록으로 간주되어 수도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평신도나 교직자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이 성직록을 가진 자는 봉록원장으로서 수도원의 재산을 관리하고 보호할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성직록 소유자는 수도원 공동체의 정신적 관심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도원 재산을 개인적 관심에 따라 사용했는데, 이는 수도원을 빈한하게 했고 쇠락하게 했다. 그러자 수도원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해졌고, 이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수도원들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외부로부터 밀려온 쇠락과 해체의 기운에 대해서 수도원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여러 가지였다. 압력에 굴복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수도원적 엄격함의 틀과 훈련을 포기하고, 계약을 통해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사유재산제를 도입하는 것으로-물론 아주 조금씩 진행되긴 했지만-어쨌든 원장과 행정 담당자들을 시작점으로 해서 공동체적 삶을 서서히 와해시켰다. 이러한 과정이 만들어 내는 최종적 결과는 수도원 거주 지역이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재산이 거의 없는 작은 소규모의 수도원들에게 특히 많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결과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수도원이 변모해서 새로운 기관이 되어 수도원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 이런 기관의 재산이 된 수도원 재산은 개인적인 성직록 관리자의 손에 넘어가거나 또는 새로운 상황을 통해 자유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기관의 주인이 된 수도사들에게 분배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은 몰락과 쇠퇴가 보여주는 일반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고 후대에 봤을 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씨를 뿌리는 것들도 있었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한다. 옳았던 옳지 않았던 많은 수도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켜 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해서 생겨난 수도회들의 관심사와 또 시대가 요구하는 영성을 자신들의 공동체에다 받아들였다.

탁발 수도회들에서는 중앙집권적 지도 체제와 엄격한 조직 체계가 공동체가 계속해서 확장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었었다. 시토 수도회와 쁘레몽뜨레 수도회 같은 새로운 수도회의 시작점을 열었던 수도회들까지도 비슷한 조직 체계를 시도했다.

교황 베네딕트 12세(Benedikt XII 1334-1342)는 그 자신이 시토회 수도사였음에도 1356년에 「베네딕티나」라는 개혁 칙령을 내려 이전의 수도회들을 지역 체계로 바꾸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예를 들어 베네딕트 수도회의 경우 30개의 지역화로 나누어졌다. 3년마다 지역 총회가 개최되어야 했고, 여기서 정해진 시찰단이 개별 수도원들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수도사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탁발 수도회 활동이 큰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결정들이 전체적으로 훌륭한 결과를 맺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몇몇의 수도원들에서 지역에서나 수도회들에서 서로 함께 연합체를 구성하는 것이 수도원 갱신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는 개혁적 요구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1419년 파두아에 있던 성 기우스티나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루드비히 바르보(Ludwig Barbo)가 이러한 개혁적 입장에 있는 수도회들을 소집했다. 이 모임이 의도한 것은 강력한중앙 집권제로서, 그들이 결정한 것은 매년 총회로 모이되 이 총회가 최고의 권력 기구가 되는 것이었다. 각 수도원의 원장들은 이제 더 이상 독립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종속되어있으며, 더구나 매년 새롭게 선출되는 상위자가 되었다. 이것은 실상 베네딕트의 규칙과는 일치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체제야말로 공직봉록이라는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실질적 무기였고 수도회의 고위 지도자들을 공동체로 굳게 재결합시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도원 연합체의 삶에다 바르보와 그를 뒤이은 후계자 원장은 밖으로부터 온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자극점을 주었다. 이들은 당시에 네델란드의 평신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Devotio moderna(새로운 경건)라는 경건의 실제와 독일 신비주의를 수도원에 도입했다. 거기에 더해서 이 수도원들은 학문적 연구에서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선을 대었다.

이러한 진행 과정은 이 시대의 대부분의 수도원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고, 15세기말에는 스페인까지 하나로 묶게 만들었고, 이 스페인에서는 이런 경향에 대한 유력한 옹호자인 가르시아 데 시스네로스 폰 몽테라트(Garciadecisneros von Montserrat, 약1510년) 원장을 낳기도 한다. 그는 이 새로운 경건의 모습을 잘 이해했고, 그 결과물이 그가 출판한 책인 Exercitadorio de la vida spiritual이다.

이 개혁을 프랑스까지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특별한 결과를 맺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독일어권에서는 개혁의 노력이 일깨워졌다.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던 1417년에 수명의 원장이 모여서 교황의 개혁 칙령이었던 Benedictia를 근거로 한 베네딕트 수도원을 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협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 집권적 개혁은 하나의 흐름으로 형성되지는 못했다. 개혁이 성공적인가의 문제는 여러 개별 수도회들이 직접 시도하는 개혁 노력에 달려 있었고, 그래서 개개의 수도원들이 폭넓은 갱신의 근원적 보루가 되었다.

이런 보루에 속하는 수도원이 카슬(Kastl) 수도원이다(오버팔츠 지역). 이 수도회에서 개혁의 노력이 시작된 것은 14세기에 원장으로 있던 헤르만(Hermann, 1322-1356)이 수도원의 경제 문제를 개선하면서부터였다. 세기말쯤 원장 오토(Otto)는 카슬 수도원의 (개혁적) 고유 생활양식을 확립했다. 이런 분위기를 더욱 활성화 시키는 것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수비아코(수도회), 보헤미아의 브레브노프(수도회)로부터, 그리고 다른 곳-이탈리아의 개혁 같은-으로부터 왔는데, 이는 이전의 수도원들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속적 경건으로부터 온 것이다.

카슬 수도원의 원장 요한네스는 많은 저술을 통해서 수도원의 개혁을 위한 풍성한 영적인 토양을 제공했는데, 그의 개혁 프로그램은 옛 것과 새 것을 묶어 경건한 인문주의라는 틀로서 수도원적 경건을 현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카슬 수도원은 수도원들의 연합체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낸 생활양식은 점차 바이에른의 여러 수도원들에게 확산되었다. 바이에른의 구도원들 가운데 카슬수도원 외에도 오스트리아의 멜크 수도원에서 시작된 개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멜크 수도원 역시 수비아코의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들에 의해 개혁되었다. 원장 니콜라우스 소이링거(Nikolaus Seyringer, 1425년 사망)는 멜크 수도원식의 생활양식을 다른 수도원들이 따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및 폴란드의 수도원들 다수가 멜크 수도원의 규범을 따랐다.

바이에른에서는 테게른제 지방이 멜크 수도원식의 개혁이 전파되는 중심지 역할을 했고, 슈바벤에서는 울름 지방의 비블링겐 수도원이 중심 역할을 했다. 이런 활동들은 전체적으로는 멜크 수도원의 생활양식을 따르는 것이긴 해도, 전적으로 개별 수도원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체적 결합은 15세기 동안에 독일 남부 지방과 오스트리아 지방의 수많은 수도원들을 한 정신으로 묶어 주었으며, 이는 "중세의 가을" 중기에 나타난 옛 전통에 머물던 수도원들을 새롭게 개혁하고자 했던 의지들이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마침내 베저의 부르스펠트 지방에서 독일 베네딕트 수도원의 세번째 개혁수도회가 나타난다. 요한네스 데데롯(Johannes Dederoth)이 1433년 이곳의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곳에 원장으로 오기 전에 이탈리아 개혁을 배웠고, 원래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분원장이었다가 베네딕트 수도회원장으로 취임한 트리어의 성 마티아스 수도회 원장 요한네스 로데 밑에서 개혁의 주도 세력을 모았었다.

이 부루스펠트를 근거지로 해서 독일 북부 지역과 남서지역의 수도원들에게도 개혁 사역이 널리 퍼져 나갔다. 위에서 언급했던 베네딕트 수도회의 두 개혁 그룹에서 해 내지 못했던 것을 부르스펠트는 해 냈다. 즉 엄격하게 조직화된 연합회를 형성해서 각 수도원의 원장들이 매년 총회로 모이도록 했던 것이다(1530년에 94명의 원장들이 모였다).

이런 중요한 개혁 시도에도 역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개혁의 계기는 실제상 대부분 밖에서 왔다. 교회를 통해서 영향받는 삶이 일반적으로 쇠퇴되어 있는 것을 체험하는 상황은 바로 곳곳에서 "머리와 지체 모두에 개혁"이라는 개혁 구호가 터져 나오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15세기의 종교회의들은 개혁 종교회의였고, 모든 사람들 또한 수도원들의 개혁이 급박하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로마의 궁내관들이 이 주장을 수용했다. 추기경 니콜라우스폰 쿠에스(1464년 사망)가 수도원의 개혁에 특별히 열정적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로마의 궁내관들이 단독으로 수도원이나 수도회를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지방 영주들이 이 개혁 운동을 방해할 수도 있고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위에서 언급된 베네딕트 수도원의 개혁 운동에는 지방 영주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개인적 경건에서 비롯된 교회 개혁을 위한 계발적 요소들이 수도원 개혁에 좋은 영향을 미친것이다.

세번째 요소는 새로이 더 깊은 종교적 삶의 경지를 요구하던 평신도 경건이다. 이는 영적인 삶이 개별적이고 개인화됨에 따라 나타난 당연한 현상이었고, 또 이 시기는 Deviotio moderna(새로운 경건) 운동이 폭넓게 영향을 미치면서 종교적 삶으로 이끌던 시기였다. 개혁 의지를 갖고 있던 수도원들은 새로운 종교적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런 종류의 경건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새로운 경건이 시작된 곳은 네덜란드였다. 게하르트 그로우테(1384년 사망)가 이 운동의 창시자이다. 그는 회심 이후 열정적인 종교적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은 그를 참회를 가르치는 설교자로 나서게 했고, 그의 설교는 폭 넓은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서 우리는 성경의 (의미를) 발견해 내고, 13, 14세기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쓴 작품 내용들, 특히 독일 신비주의의 대가와 또 종교적 삶을 제대로 내면화시킨 분명한 통찰력 등이 종합해서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중화 되어간 이 경건 운동이 의도하는 것은 특별한 힘을 부여받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 내용은 분명한 자기 억제와 실제적 이웃사랑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von Kemten, 1380-1471)는 경건 운동을 대표하는 저작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에서 여기서 말하는 경건이란 "회개의 개념을 알므로써 사랑의 회개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겸손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쁘게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운동 역시 12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작점이 평신도 운동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처음 단계는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다음 단계에서는 여기에 관계된 사람들이 종교 공동체로 모여들게되었다. 이런 모임에서 "함께 생활하는 형제와 자매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나타난 공동체가 형태상 새로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종교적 삶이란 고정된 양식으로 조직화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 신념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었다.

새롭게 생겨난 공동체인 형제의 집, 자매의 집에서는 가르치는 활동(출판 포함), 목회, 구제 활동을 통해서 필요한 생계비를 벌었는데, 이들은 전적으로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전통적 수도원의 모든 요소를 그대로 갖고 있었음에도 신조는 갖고 있지 않았다. 적대적 대우도 받았고 이단의 의심도 받았음에도 이 공동체 모임들은 특히 시작되었던 지역과 그 주변 지역인 북 독일 지역과 라인 지방에 확산될 수 있었다. 이 공동체들은 종교 개혁기까지 이 지방에서 계속 지탱할 수 있었다.

루터도 마그데부르그(Magdeburg)에 있었던 이 공동체 계통의 학교에서 잠시 공부했는데, 그는 이 공동체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모든 정황이 이 형제들의 집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면, 모든 교회는 이런 삶을 통해서 이때 이미 축복 받은 상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동체가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이다. 이는 이 운동이 유럽의 수도회 역사에서 전통적 수도회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특히 베네딕트 수도회가 해당된다. 또한 시토 수도회에서 역시 비슷한 영향을 미쳐서 "네덜란드에서의 시토수도원의 성직자 형제단"의 설립을 낳게 했다. 여기서 또한이 새로운 경건 운동이 개혁의 토대와 통일체적 연합의 토대를 만들어 준다.

새로운 경건은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와 카르투지오의 상황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먼저의 것은 1387년에 설립된 "빈데스하이머 회의"이다. 이 이름은 성직자 수도회입장을 따라 어거스틴 규칙을 규범으로 한 수도회가 있던 쯔볼게 지역의 빈데스하임(Windesheim)을 좇아 명명된 것으로, 수도회적이었지만 실생활에서는 G. 그로우테와 그의 제자들이 가졌던 경건으로 특징지어지는 영성을 따랐다. 이런 새로운 설립은 그들의 개혁 성향을 옛날 수도회들에게(독일에서도 역시) 넣어 줄 수 있었고, 이들은 전체로 합쳐져서 하나의 확고한 연합체로 결성되게 된다.

11세기 이래 자신들이 살아 있던 카르타우센(Kartausen)지방에 조용히 머물고 있던 카르투지오(Kartliuser) 수도회는 중세 후기에 가서는 아주 널리 확장되어서 높은 명망을 얻게 되었다. 14, 15세기는 이 수도회가 가장 널리 확장된 시기인 동시에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시기였다.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과 독일 신비주의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에서 관심을 끌 만한 거점 지역을 발견했고, 이 요소는 이 수도회를 급작스럽게 특별한 매력을 가진 현대적 종교 공동체로 만들었다. 처음 설립될 때와는 반대로, 이 시기의 카르투지오회는 도시 근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형 카르투지오회는 특별히 독일에 널리 퍼졌다(괼른, 마인츠, 트리어, 프라이부르크, 바젤, 스트라스부르크 등). 그 외에 파리, 런던, 로마에도 이런 도시형 카르투지오회가 있었다.

인문주의에 의해 고양되어진 시민 계급은 도시 지역을 근거로 나타난 학식을 갖춘 수도사들을 도왔고, 영주들은 설립자로 나섰으며, 또한 자신들이 묻힐 곳으로 카르투지오회를 지정했다. 예를 들면, 디욘 지방의 카르타우세 캠프몰의 부르군도 공작들은 이곳을 유명한 예술가인 클라우스 슬루터의 작품으로 장식하도록 했다.

탁발수도회들과, 이러한 탁발수도회를 모방해서 세워진 다른 수도 공동체들이 역시 13세기의 수도원 세계를 지배했다. 옵세르반츠 남자 수도회(observanz)와 옵세르 여자 수도회(obser)를 위한 이 탁발수도회들의 연합체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중세 도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들은 도미니크 수도사들과 프란시스 수도사들이었다. 안토니우스 폰 파두아(Antonius von Padua, 1231년 사망), 다비드 폰 아우구스부르그(Dauid von Augusburg, 1272년 사망), 베르트흘트 폰 레겐 스부르그(Berthold von Regensburg, 1272년 사망), 휴고 폰 디그네(Hugo von Digne, 약 1250년 사망), 윈스터 사람인 디트리히 코엘데(Dietrich Coelde, 1515년 사망), 또한 15세기에 옵세르반츠 운동의 강력한 옹호자들로서는 일단의 프란시스 수도사들이 언급되어야 한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옹호자들로서는 스테판 폰 버본(Stefan von Bourbon, 1261년 사망), 디트리히 폰 프라이베르그(1310년 이후 사망), 히아친트 폰 크라카우(Hyazinth von krakau, 1257년 사망), 빈첸츠 페러(Vinzenz Ferrer, 1419년 사망), 그리고 플로렌스의 웅변가 사보나롤라(Savonarola in Florenz, 1498년 사망) 등을 들 수 있다. 이 사람들 및 수많은 탁발수도회 출신의 설교가들은 스콜라적인 설교 방식을 벗어나 생활에서 겪는 체험과 관련시켜서, 구속사와 날카로운 시대 비판의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깊은 영향을 주고자 하여 지방 방언을 사용한 대중 설교의 방식을 취했다.

건축학적인 개념상 이미 교회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진 탁발수도회의 수도원 교회들에서 설교가들은 설교 예배를 위해서 도시 민중들을 모았다. 탁발수도회의 여자수도회는 독일 신비주의가 길러지고 자라나는 토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여자 수도사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남자 수도사들이었는데, 이들의 신비주의적 가르침은 종종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이런 예는 스위스의 도미니크 자매 수도원이었던 퇴스(Toss)에서 특히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당시의 독일 여성 수도원들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던 요소들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대학의 신학대학에서는 탁발수도사들이 아주 짧은 시간에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일반 목회자들의 저항이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거세기도 했지만 13세기의 위대한 학자들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츄라는 다음 시대에도 계속 그들의 수도회에서 계승자를 길러 내어 신학적 전승을 이루어 독자적 학파를 형성했는데(토미즘, 프란시스 학파), 14세기에는 어거스틴 학파가 독자적 학파를 형성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츄라의 신학이 이들 어거스틴파 은둔수도사들에 의해 보존되고 계승되었다.

대학에서 이들 수도회의 대표자들은 학파 신학을 형성해냈고 이들은 유명론이라는 이름하에 연구를 하면서 고전적 스콜라 신학을 옛 방법(via antiqua)이라고 분리하고 새로운 방법(via moderna)이라는 길을 열었다.

중세 후기에서의 탁발수도회들의 다양한 활동은 커다란 영역에 미치고 있다. 그들의 활동 중에서 오늘날의 은행 대출 제도와 차용 제도의 선구자들인 프란시스단의 몬테기에타티스(Montesgietatis)가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수도회의 회원들은 비 기독교 국가들에게도 가도록 하여 선교사의 새장을 열기 위한 초석을 놓은 선교 사역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수도회들의 활동이 이령게 다양한 국면에 미쳤다는 것은 수도사 이상이 갖는 풍성함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수도원과 수도회는 이들이 가진 속박되지 않음, 가변성(Beweglichkeit), 또 적응 능력(Anpassungsffihigkeit)의 특성으로 인해서 무리 없이 교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무리가 되었다. 존재로서의 우위권을 가진 것(교회)이 행동으로서 우위를 가지는 것(수도회)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체의 새로운 설립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로마의 교황청이 호의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금지한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설립되는 수많은 단체들은 (당시에) 공인되어 있던 규칙 하나를 채택함으로써 생존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교회 내에서 수도회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1274년의 제2차 리용 종교회의는 새로 생긴 수도회들에 관한 전체적 상황을 의제로 다뤘다. 교황의 칙서 「서로 다른 수a많은 수도회」(Heligionum diversitaten nimiam 23차 칙령)는 수도회 세계를 새로이 구획정리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종교 회의에서는 그동안 새로 생긴 몇 개의 수도회를 해체하라는 요구까지 결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대한 수용, 해석, 신행은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어떤 수도회가 실제로 해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몇몇 작은 수도회들과 비교적 큰 수도회였던 "데푀니텐티에 예수 크리스티"(De poenitentiae jesu christi, '예수 그리스도의 참회로부터'라는 뜻으로 보통 "자루 형제들"이라고 불렸다)라는 수도회는 이 결정에 의해 희생된 분명한 경우이다.

이런 종류의 교회가 내린 결정이나 처방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것이 해결되지는 못했다. 어쨌든 기존의 수도회들을 몰락으로 끌고 가는 불편한 상황이 탁발 수도회를 심하게 괴롭혔음이 분명했다.

또한 14세기의 중반에 창귈한 페스트는 각 수도회의 수도사들의 숫자를 현격히 감소시켰다. 어거스틴 은둔 수도회를 보더라도 거의 5천 명이 넘게 줄었다. 이 병이 가져다 준 것은 인력의 손상만이 아니었다. 이 병은 수도회들을 구심점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자포자기 상태로 만들어 놓아서 가뜩이나 침체되어 있던 수도원의 훈련 과정을 침체 상태로 빠트려 버렸다.

더구나 이때 나타난 유럽 교회의 대분열(교황의 바벨론포로기-역자 주)은 탁발 수도회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수도회들이 지역이나 수도회에 따라 여럿으로 분할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1314-1347)와 교황 요한 22세(1316-1334) 사이에 일어난 분쟁은 탁발수도회들에게 서로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이 결과 역시 수도회 가족들이 다시 쪼개지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몇몇 수도원들 간에 계속 되어온 해묵은 논쟁들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 또한 탁발수도회와 도시의 사제들 간에도 심각한 갈등이 항존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도덕체계와 이를 바탕으로 한 기관으로 자리를 갖추고 있었던 수도회들이 이렇게 갈갈이 찢어지게 되자 수도회의 물락과 자기 손상의 흐름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갱신을 위한 흐름들 또한 수도회에 밀려들어와서 개혁을 향한 힘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에서 가장 큰 움직임을 보인 것이 모든 대형 수도원에서 일어난 계율 준수 운동(observanzbewegung)이다. 이것의 시작은 설교 수도단의 총무원장이었던 카푸아의 라이문트(Raimund von capua, 1380-1399)의 주도하에 일어난 것인데, 라이문트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였던 시에나의 캐더린(Katharia von siena, 1380년 사망)에게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개개인의 수도사와 수녀의 독신 격리생활과 무소유에 특별한 강조점을 둔 것으로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콘스탄츠 종교회의 이후에 강조되어 나타났다. 개혁입장에 선 수도원들은 전체 수도회 내에서도 자기들끼리만 독자적 모임을 결성했는데, 이는 수도회 내의 수도원이 생겨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어거스틴파의 은둔 수도사들에게 있었던 개혁 역시 같은 과정을 겪었다. 여기서도 역시 공동 삶의 형태의 해체와 개인 소유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개혁은 개인자산을 배제하고 수도회의 공동 삶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완전한 공동체의 삶(vita communis perfecta)에서의 수도사의 삶(vita regularis)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거스틴 은둔 수도회의 개혁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유는 1431년 설립된 롬바르디아 수도원 연합회가 개혁 의지가 있는 수도회들의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몇몇 수도사들이 독자적 개혁 총회(소위 작센총회와 같은)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런 독일 개혁 운동의 대표자는 오스나브뤽 사람인 하인리히 졸터(Heinrich Zolter, 1460년 사망)이다. 이러한 개혁 단체에 속하는 것으로 에르푸르트에 있는 수도원에 1505년 마틴 루터가 들어가게 된다.

깔멜 수도회 역시 이렇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의 기운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여러 공동체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노력들은 콘벤투알회와 옵세르반츠회로 수도회가 분리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수도회 총수였던 요한네스 소렛(Johannes Soreth, 1471년 사망)은 전체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깔멜 수도회 내부에서 있었던 개혁 활동은 16세기에 가서야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는 수도회가 나누어져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는 대가를 치른 결과였다. 이 수도회가 개혁 깔멜 수도회이다.

프란시스 수도회에서는 설립자의 이상을 놓고 초기 때부터 있었던 논쟁이 이 시대에 가장 격렬한 논쟁으로 비화했다. 프란시스가 형제들에게 의무로 부여했던 조항인 완전한 무소유의 이상을 지고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규칙에 관해 교황이 해석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노센트 4세가 1245년 「오르디넴 베스트룸」(ordinem vestrum)이라는 칙령을 통해서 마침내 프란시스단의 동산과 부동산 모두를 교황의 소유로 넘겨받았을 때, 이렇게 사는 가난이란 단지 명문화 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니콜라우스 3세가 1279년 규칙에 관한 설명으로 칙령을 내어 규칙에 관한 진지한 연구를 통해 재산과 사용을 향유하는 권리와 단순한 사용을 교묘하게 구별해 내었지만, 이것이 형제단 내부의 싸움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스피리투알단은 순수 가난의 이상을 옹호했는데, 13세기말경의 이 무리의 지도자는 페트루스 요한네스 올리비(1298년 사망)였다.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은 규칙을 문자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했으며 형제단에게 전적으로 가난할 것, 소위 사용에서까지 가난해야 한다는 "우수스 파우퍼(Usus Pauper)"를 고집했다. 이 수도회 내부에서 일어난 "가난에 관한문제" (puaestio de paupertate)는 공동체와 스피리투알단을 나누어 버리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가난에 관한 문제는 이 수도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교황 요한 22세(1316-1334)에서 가시화 되었다. 이 교황은 처음부터 기존 공동체의 편에 서서 스피리투알단을 막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스피리투알단을 비난하면서 순종이 가난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하고, 그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을 강요했다. 이 가난 논쟁은 수도회의 담을 넘어 밖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 논쟁은 곧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개인적으로든 함께든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겠느냐는 일반화된 형태의 질문으로 요약되어 나타났다. 프란시스단에서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총무였던 케제나의 미카엘(Michael von Cesena, 1316-1328)은 1322년에 전체 기독교에게 보낸 회람문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재산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가톨릭적으로나 올바른 신앙의 가르침으로 맞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가 단순히 학자들 간의 갈등이나 수도회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대단히 위험한 폭파력을 가지고 위협할 수 있는 현실과 직접적 연관을 가진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어떤 권력에도 연연하지 않았다면,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대리자라는 교황에게 역시 이것이 요구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요구해야만 했다. 요한 22세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가난을 요구하는 주장을 이단이라고 선언하면서 프란시스단 소유의 모든 재산에 대한 권리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런 조치로 인해서 프란시스 수도회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재산이 사도직을 갖고 있는 교황의 소유로 되어 있지 않다면 규칙에서의 요청 사항은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되면) 이단이라는 의심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되면 존재 자체가 곤경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회 총무원장이었던 케제나의 미카엘(Michael von Cesena)과 또 다른 수도회 수도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에게 등을 돌리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에게 의탁해서 그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달갑지 않은 분쟁은 결국 뮌헨에 있었던 루트비히의 왕궁에서 프란시스단을 파문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해서 프란시스 수도회가 이러한 외부적 결정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피리투알 쪽에 속했던 사람들은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이단으로 사라져 갔고, 종교 재판소는 이들을 재판했으며, 그들은 소멸되어 갔다. 프란시스단의 다수를 차지했던 무리들은 이전에 교황이 발했던 규칙에 관한 설명을 근거로 한 수도회 개혁에 착수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의 와중에 개별 수도회나 전체 수도회가 원칙적으로 무소유의 삶을 천명하고 정기적 수입이나 사유 재산을 포기하는 것을 주장하고 규칙 엄수 운동이 수도회 내에서 중지되어 버렸다.

한편 다른 무리에 속하던, 콘벤투알회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의 주장은 공동 소유, 수입과 토지 소유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개혁은 결국 여러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따로 진행되었다. 시에나의 베른하르딘(Bernhardin von Siena, 1444년 사망), 카페스트라노의 요한네스(Johannes von capestrano, 1456년 사망), 사르테아노의 알베르트(Albert von Sarteano, 1450년 사망), 마르크의 야곱(Jakob von Mark, 1476년 사망) 등이 여러 가지의 개혁들을 함께 요약해 내었고 양측 입장의 독자성을 놓고 미래의 진로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초창기에는 엄수파인 옵세르반츠가 전체 수도회 연합에 잔류했다.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독자적 총무부 원장을 세움으로써 이들이 수도회 내에서 갖는 의미를 알려주곤 했다. 하지만 괜찮아 보이는 이 연합은 단지 외부적으로만 봉합되어진 연합체에 불과했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마침내 최종 결정을 내려서 이 표면상의 연합을 깨뜨렸다. 1517년 5월 29일 칙령 Ite vos in vineam meam(너희는 나의 포도원으로 가라)에 의해서 옵세르반츠(엄수파)는 콘벤투알회와 분리 되었다. 이들은 각각 독자적인 총무원장을 선출했고, 이 결과 프란시스가 남긴 수도회는 두 개의 독립적인 수도회로 나눠지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모든 수도회에서 한결같이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시대는 갱신을 향한 노력들이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며,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계율을 따르는 많은 수도원에서 살고 있으면서 이런 갱신의 요소들을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요소들은 자신들이 가진 전통적 입장들과 성공적으로 접목시켜서 자신들의 수도회 이상이 공공적인 삶에서도 책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그들의 삶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머리와 지체들"에게서 계속해서 부각되고 요청되었던 교회의 개혁은 수도원 공동체들에서 가장 먼저 목표로 떠올랐다. 물론 기독교의 본질을 잘못 다루고, 왜곡시키고, 잘못 해석하는 것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서 어떤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개혁을 위한 노력들이 특별한 기여를 할 수는 없었다.

전체로 보더라도 15세기의 수도원과 수도회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를 못했다. 특히 "피곤하게 만드는 생활 모습"(D. Knowles)을 가진 탁발 수도회 수도사들은 비판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탁발 수도사는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 후기에 유행했던 패러디(parodie: 형식은 진지한 작품이나 연설 등을 따르면서 내용은 익살스럽게 만든 문학 형식의 하나-역자 주)에서는 탁발 수도사가 단골 대상이 되어 작품들에서 신랄하게 비판 받았다.

그러나 14, 15세기에 수도원에는 개혁과 몰락만이 전체 분위기였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부패해 가는 수도원들과 타락해 가는 수도회 회원들에 대한 교회 내부에서 나오는 정당한 비판도 한몫 하고 있었다. 이 당시까지 계속해서 있어왔던 수도원적 삶에 대한 비난이 이 시기에는 특별히 크게 부각되어 나타났다.

수도원적 삶의 정당성 자체가 이제 질문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국사람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84년 사망)는 결정적인 명제를 몇 개 작성했다. 내용의 첫 출발점은 타락한 수도원들에게서 경험한 것들인 지나치게 부유한 대형 수도원, 또 정규의 사제가 하는 목회 활동을 방해할 정도인 도시에서의 탁발 수도사들의 지나치게 바쁜 모습들이었다.

이러한 잘못들에 대해 위클리프가 반기를 들자 동조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판단의 척도는 단지 이 잘못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기독교적인 것, 또 모든 교회적인 것의 최종적 판단 근거는 성경의 권위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도록 요구받고 있는 "비천한 그리스도"의 권위였다. 그런데 성경은 수도원 제도에 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첫번째 규칙"(regula prima)으로 모든 다른 규칙에 우선한다는 것만이 확실한 것이다.

수도원 제도는 순수한 인간적 발견품으로서 그리스도와 성경의 권위에 의해 보호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이것은 "주께서 멸망시켜 버린 바리새파"이다. 수도원이 말하는 바는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이 훌륭한 존재로 있고자 하므로 수도원은 자신의 실체가 그리스도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는 적그리스도인들의 실체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수도원 제도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중세 전체에서 본 수도원의 역사에서 이때 처음으로 수도원에 대해서 성경의 권위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첫번째 사례이다. 이때의 권위는 수도원적 삶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바로 그 권위였다. 이것은 서로 성경 이해의 기본 원칙이 달라서 하나는 수도원의 입장으로, 다른 하나는 수도원에 적대적 입장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준다.

콘스탄츠 종교회의는 위클리프의 수도원에 대한 공격을 거부하고 가톨릭의 전통적 입장을 확인한다. 위클리프 자신은 자신이 한 수도원에 대한 비판으로 영국의 수도원이 몰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쪽에서 영향을 발휘한다. 개별 수도사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도원들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수도원의 소멸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제도화된 수도원 제도는 단순히 구호만으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실제상 강한 강제 수단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