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종교개혁과 역종교개혁에서의 수도원

 

 

 

 

"중세의 가을"은 수도원들에서 보면 단순히 몰락으로 특징 지워지지는 않는다. 모든 쇠퇴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역동적 삶이 있었으며, 수도원 제도의 갱신을 위한 생동력 있는 새로운 집중과 희망적인 요소들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수도원도 수도원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 수도회는 그들의 외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어떤 차원이든 그들과 연결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수도원은 자신들에게 친근한 환경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16세기초에 유럽 넓은 지역에서 이런 분위기가 사라져 버렸다. 종교개혁이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들이 가진 교리 체계, 그리고 그들의 삶의 양식까지를 뒤흔들어 버린 사건은 수도원 제도를 없애 버리는 것도 목표의 하나였다. 이것을 있게 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종교개혁의 시작점을 제공해서 직접적 연관을 갖는 마틴 루터(1483-1546) -그는 종교개혁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는 그 자신이 중세 후기의 은둔 수도사 출신이었다.

진지하고 열정적인 총무원장 요한네스 스타우피츠(Johannes Staupitz)의 지도하에 있었던 작센 주(州)의 지역수도회의 회원으로서 루터는 일찍이 수도회 개혁에 관한 논쟁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했었다. 그런데 루터는 옵세르반츠 즉 "계율 엄수파"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비판의 빌미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었던 이 수도회와는 어떤 (불만 섞인)긴장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수도회의 삶의 형태와 수도회 선서에 대한 거부가 종교개혁가로 가는 루터의 신학적 전개에 전제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루터가 약 1519년까지 따르고 있던 신학적 입장은, 그가 그후 몇 년 뒤에야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는 하지만, 수도사의 삶에다 어떤 영적인 근거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수도사의 삶이란 단지 성경만이 유일한 규범이라는 루터의 기본 원칙에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평생을 묶는 서약은 "복음을 통한 자유"라는 이상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도사의 규범과 실제는 루터가 보기에는 개인의 공적을 통한 구원이라는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루터가 말하는 최고 계명인 구원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과 다른 것이었다.

그는 수도 서원에 관한 논박을 성경의 로마서 14:23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1522년에 그는 수도 서원에 대해 조직적으로 논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의 내용은 "복음을 통한 자유"가 수도회나 인간의 양심을 수도회의 규약보다 높은데 두는 곳인 수도원에 매어 있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이미 있었고 또 다른 개혁가들에 의해 강력하게 제기되었던 수도원 공동체의 해체를 위한 문제 제기가 루터의 이 글을 통해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혁가는 이렇게 분명한 내용이 수도원의 벽을 넘어 들어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친하게 지냈던 동료 수도사 형제에게 1522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수도사들이 많이 탈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수도원에 가입할 때와 같은 이유라네. 그 이유란 배(腹)와 육신적 자유를 위해서이지. 이들을 통해서 사탄은 우리의 향기나는 말들을 뒤집어서 아주 추한 말로 바꾸어 놓고자 한다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게으른 배들은 배를 위한 것만을 찾지. 그런데 그들이 (어차피 범죄하는 이상) 수도사의 옷은 벗고 범죄하고 멸망해가는 것이 수도사의 신분으로 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고 이들이 수도사의 신분을 억지로 뺏긴다면 이들은 두 번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종교개혁가들이 했던 수도원에 반대는 수도원 제도의 개혁을 목적했던 것이 아니라 수도사라는 신분 자체를 없애버리고자 했다.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들이 속해 있던 수도원을 떠났다.

루터에게 특별히 충성스럽고 열심이었던 추종자들은 수도사 출신이었다. 그들 중 몇 명만 본다 하더라도, 베네딕트 수도원인 알피르스바하의 원장이었던 암브로시우스 블라르(Arnhrosius Blarer, 1492-1564), 베네딕트 수도원 릭스하임/엘사스의 수도사였던 볼프강 무스풀린(Wolfgang Musculin, 1497-1563), 로쿰에서 시토 수도회 수도사였던 안토니우스 코르비누스(Antonius Corvinus), 프란시스 수도사인 요한네스 크닙스트로(Johannes Knipstro, 1497-1556),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1490-1546), 요한네스 브리스만(Johannes Briesmann, 1488-1549), 요한네스 에버린(Johannes Eberlin, 1465-1533) 등을 들 수 있다.

수많은 수도회들이 반 수도원적인 설구가 계속됨에 따라 소리없이 사라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도원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에 관한 설교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교황권에) 저항적 입장이 되었던 지방 영주들에 의한 정책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을 실제로 해 나가는 데서 영주들의 역할이 자꾸커져서 1525년부터는 종교개혁이 영주의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주들의 종교개혁이란 말은 맞는 말이다. 중세 후기에 특징적으로 발전된 형태인 지방 기독교 개념은 개혁되었던 지방들에서 개혁이 전적인 흐름이 되었다.

루터 역시 정치적 소용돌이와 또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소요에 직면했을 때 수도회의 보호자였던 지방 영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루터는 이 영주들을 단지 "비상시의 임시사제"로 인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오히려 계속 발전해서 영주 총주교라는 직위를 만들어 영주들에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지를 감시하는 "감시국"의 일을 맡기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멜랑히톤에 따르면, 영주란 교회의 "최고 신분의 회원"이었다. 이들과 도시의 "경건한 교사직 책임자"는 "그들의 권위로 진실된 교회를 받쳐 주며, 하나님의 뜻을 잘못 가르치는 교사들을 골라내고, 경건한 설교자를 세울"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1526년에 있었던 제1차 스파이어 제국 회의는 영주들이 자신들의 영토에서 종교개혁을 실행할 수 있음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에 관한 권한"을 제국 회의의 결정을 통해서 영주들에게 준다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었다. 그럼에도 정치적 상황은 이런 진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했고, 더구나 개혁가들의 신학은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방 영주들은 수도원의 간판을 내리게 할 수 있었고, 폭력과 억압적 수단을 사용해서 수도사들을 개혁쪽으로 돌이키거나 추방시킬 수 있었다. 백작이었던 헤센의 필립(Philipp von Hessen)은 1526년 가을에 자신의 영토에 있던 수도원들을 해체시키고 세속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의 편에서 있던 다른 독일 지역들과 제국 도시들 역시 곧바로 이 조치를 뒤따랐다. 그후에 내려진 제국의회 결정 사항들(1548년의 아욱스부르그 임시 조치, 1552년의 파사우어 조약, 마지막으로 나온 1555년의 아욱스부르그 종교 화약)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이런 조치들을 철회시키거나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결정들은 이미 되어져 있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독일에서의 종교적-교회적 분열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또한 독일 많은 지역에서 수도원과 수도회를 사라지도록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 선 많은 지역에서 수도원의 삶과 유사한 삶을 계속하도록 했다. 이는 북 독일의 여자 수도원에서 특별히 두드러졌는데, 이 조직은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교에서 역시 "자매기관"으로 계속 존속했다.

더구나 영주들은 옛날의 수도원의 틀을 계속 갖고 있었던 건물들에서 사는 삶을 꼼꼼히 규칙한 독자적인 수도원 규칙을 만들어 반포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수도원이나 이런 조직들이 가진 삶이 개신교 쪽에서 역시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 개신교 신학이 수도사라는 신분을 옹호하고 인정하는 기꺼운 입장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회적 이유 때문에 사회적 제도로서 수도원과 유사한 조직이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 것이다.

중세 후기에 이미 도시에 있었던 여자 수도회들은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을 위한 구호 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이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았다는 것과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런 "조직" 안에서 사회는-계속해서 교회나 종교라는 특색을 가진 채로-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선 여러 지방에 관해서 말했는데, 이런 상황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유럽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비슷했다. 지방에 따라 종교개혁에 관한신앙 고백은 여러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 차이는 (수도원과 관련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수도사 신분 자체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는 모두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Heinrich VIII, 1509-1547) 치하에서 수도원들이 완전히 해체되는 데까지 갔다. 1535년경 영국과 웨일즈에는 약 80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이러한 해체 운동은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 의해서 1536-1540년까지 이루어졌는데, 실상의 목적은 영국의 왕에게 새로운 재정 보급 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수도원 쪽에서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수도사들 중에 순교까지 간 사람들 몇 명은 1535년과 1536년에 있었던 왕이 교회보다 더 높다는 선서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북부 영국에서 역시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수도원 제도를 완벽하게 몰락시켰다. 하지만 몰락은 아주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이 별로 크게 위력을 떨치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수도원이 자신들이 처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빠져 나오기는 불가능했다. 1516년에 교황 레오 10세와 프랑스 왕 프랑소아 1세 사이에 맺어진 종교 협약은 수도원장의 임명을 거의 전적으로 왕에게 일임했다. 그래서 직책은 있되 임무는 하지 않아도 되는 용직록의 대상이 크게 늘어났다.

수도원에 대한 정부의 가혹할 정도의 엄격한 규제에 대한 많은 수도원들의 대답은 스스로 해체하는 것이었다. 1562-1593년까지의 종교 전쟁 또한 결과적으로 수많은 수도원들을 폐허화시켰다.

종교개혁기는 유럽의 전통적 수도원들에게 황폐화시키는 기간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간을 경지 정리를 위한 유익한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수도사의 숫자상 현저한 감소-숫자가 거의 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는 반드시 손실이고 손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유럽의 북부 지방에서 있었던 로마 교회로부터의 단호하고도 폭넓은 이탈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것은 교회의 내부 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임을 나타내 주었고, 또한 수도회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서 중세 후기의 개혁의 동인(動因)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 생겨나는 수도회 공동체들은 거의 모두가 목회나 사회봉사 활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목적이 뚜렷한 설립은 수사 신부회(Regularkleriker)라는 새로운 수도회 유형을 만들어 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새로운 수도회는 중세적인 모습으로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이들과 비슷하게 되어 가면서 성직자처럼 되었던 다른 탁발 수도회들이 그들의 예비적 전형이었다.

성직 수사회란 성직자 공동체로서 전통적인 수도회적 삶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나 그들의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아예 성직자의 활동이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이탈리아에서 처음 생겨났다. 그것은 테아티너(Theatiner) 수도회로서 티네의 카제탄(Cajetan von Thiene, 약 1480-1547)과 후에 교황 바울 2세(1559년 사망)가 된 요한 피터 카라파(Johann Peter Carafa)가 세운 수도회이다. 카라파는 키에티의 주교였고, 그래서 이 새로운 공동체는 이런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들의 규칙은 어거스틴 규칙을 따랐는데, 이 규칙은 자신들의 공동체의 기본 목적에 맞춘 독자적인 규칙도 덧붙여진 것이었다. 덧붙인 내용은 모범적인 수도사의 삶과 목회에 관한 것으로 설교에다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이탈리아를 거의 넘어서지 못했지만(1622년에 뮌헨에 설립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수도회가 교회 개혁의 중요한수행자가 되는데, 특히 1555년 카라파가 교황이 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비슷한 공동체 하나가 1533년에 바르바니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등장했다. 그들은 사도적 활동을 한다고 하면서 민중에 대한 선교를 표방했다. 이는 조직적인 설교 활동을 통해서 교구 안에서의 종교적 삶을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소마스카라는 지방 이름을 따라 명명된 소마스크 수도회는 1540년 사제 공동체로 공인되었다. 이 수도회는 병자 간호와 교육 사업을 그들의 사회 구제 활동의 특징으로 했다.

이때 나타난 새로운 수도회 공동체들은 적정한 인원수와 함께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은 특히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von Loyola)가 예수 공동체-보통 일반적으로 예수회 수도회라고 부르는-를 설립함으로써 특히 두드러진다.

1491년 바스크 족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그나티우스는 1521년에 있었던 궁정에서의 군복무 후에 중상을 입었다. 오랜 병상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그는 영성에 관한 책, 즉 카르투지오 수도사인 작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삶」이란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은 그에게 중세 후기의 독일의 경건에 숙달하게 했고, 또한 중세 후기의 전형적인 성담(聖譚)인 포라긴의 야곱이 쓴 작품도 읽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인 몬트세랏(Montserat) 수도원 근방의 만레사(Manresa)에서 거의 1년간 요양을 하면서 그는 원장수도사 키스네로스(Cisneros)의 저술들을 탐독함으로써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 사상에 익숙해졌다. 열심히 탐구하고 또 종교적 경험을 하던 이 시기에 이그나티우스는 『영신 수련서」의 골격을 완성시키고 그 안에서 그는 순례자와 참회자에서 "교회의 사람"으로 변신했다.

팔레스타인의 거룩한 도시로 가는 순례와 예루살렘에서 살려는 시도가 무위로 그치게 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목회 활동을 하다가 종교 재판소에 끌려갔다. 이렇게 방해받게 되자, 그는 파리로 옮겨갔고 거기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처음에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와 계속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534년 8월 15일 그는 여섯 명의 동료(Laynez, Salmeron, Bobadilla, Franz Xavier, Rodrigues, Faber)와 함께 가난, 순결, 예루살렘 순례 및 구령 사업에 헌신할 것을 서로 맹세했다. 이것으로 수도원의 전통에 입각하되 그 당시의 해석에 바탕을 둔 삶을 사는, 그리고 분명한 목적으로 목회를 내세운 수도사 공동체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 수도회는 계획자체로 이미 이탈리아에서 새롭게 생겨났던 수도회인 수사수도회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537년, 팔레스타인을 향해 가려던 계획의 수행 중에 베네치아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신부 서품을 받았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방문은 실현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는 자신과 그의 공동체가 교황에게 봉사하게 해 달라고 간청할 목적으로 로마로 향했다. 1540년 교황 바울 3세(1534-1549)는 "예수회"라는 이 공동체를 승인했다. 이 단체가 내세운 목적은 "십자가의 군기 하에 하나님을 위해 싸우며, 주님 한 분에게만, 그리고 지상에서 그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봉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봉사는 그들의 설교와 강의와 봉사 활동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세 가지 수도서원인 청빈, 순결, 순종 외에 이들은 네번째 것을 덧붙였다. 즉, 예수회의 회원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또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내려지는 교황의 명령을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임종을 맞이하는 1556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그는 이 수도회를 계속 확장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며, 1542년부터 이 수도회의 원장이었다. 소위 "조직 규범"(Formula Institui)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삶을 규칙한 규범의 초안이 만들어진 것이 1531년인데, 이것은 많은 것들이 추가되어 수도회 규칙이 되었고, 몇 번의 개정 작업 끝에 1558년 이 수도회의 구속력 있는 규범이 되었다.

그런데 이 규범은 민주적인 요소들을 빼 버린 것을 제외하고는 중세의 탁발 수도회의 것에서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예수회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연대로 해서 만들어진 단체이다. 하지만 중앙집권 체제에 의해서 움직인다. 최고 집행권은 선거에 의하되 종신직인 수도회 총무원장에게 있으며, 그의 명령은 회원 하나 하나에게 직접-즉 중간 심급(지역이나 단위수도회 원장)을 배제하고-주어질 수 있다. 수도원의 관습에서도 역시 이그나티우스는 탁발수도회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고유의 수도사 복장을 갖지 않았고, 또 공동 예배시 공동으로 낭송해야 했던 성무일과 기도 역시 하지 않았다. 수도원이 지니고 있었던 영적인 전통은 그대로 받되 외적인 삶의 모습과 활동 범위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수도회들과는 달리 "더 이상은 필요 없는 것"(non plus ultra)으로 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수도회가 갖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은 회원 들을 철저하게 몇 무리로 나누어 계급 체계화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수도원에는 보통 사제와 평신도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들은 또한 동일한 서원에 묶여 있는 하나의 단일체-물론 외관상으로만 그랬던 것 역시 분명하지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나누어 놓았다. 첫째가 공동체에 속해 있되 아직 서원은 하지 않은 견습생들, 둘째가 서원만 함으로써 단지 이 서원에만 묶여 있고 가벼운 과실에라도 언제든지 내보낼 수 있는 사람들인 학습자(scolatiker)들, 세번째는 신부든 평신도 형제든 형제단 앞에서 공개적으로 일차 서원을 한 보좌 신부들로서 이들은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만 수도회를 떠나게 할 수 있으며, 네번째는 모든 격식을 갖춘 서원식을 한 교수 계급이 있다. 그리고 이 교수 계급에만 수도회의 상위급 직위들이 개방된다.

이러한 계급 체제는 수도회의 가동 능력, 무조건적인 명령복종을 가져왔으며, 또한 수도회에 대한 강력한 엘리트 의식을 심어 주었다. 예수회의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모여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특별히 선별된 사람들만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사도들도 역시 특별히 선택된 무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정되는 것이 자랑이나 교만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름을 받은 이 수도회가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선정되었다는 것은 '가장 작은자들의 모임' (minima societas)에 들어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수도회의 기본 과제와 맞물려 있다. 수도회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계속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석으로 이그나티우스는 전적으로 복음을 따르고 있고, 또한 예수에게 순종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서 예수의 보내심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필요하다. 이러한 순종은 개별적인 예수회 수도사들이 자신의 상관에게 묶이도록 했으며, 전체 수도회는 교황에게 묶이도록 했다. 순종이란 여기서 단순히 기능상의 수단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을 제물로 바치고 죽은 예수의 순종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회 수도사와 전체 수도회는 이런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큰 헌신을 하는 각각의 순수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예수회가 가진 기본 개념은 설립자의 개인적인 종교적, 교회적 경험에 의한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했던 경험이란 중세를 벗어나고 있었던 가톨릭의 개혁과 직접적 상관관계를 갖는다. 이그나티우스와 그의 수도회를 가톨릭의 역종교개혁의 전형적 산물로 보는 것은 사실을 제대로못 보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또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도 없었다. 마틴 루터가 쓴 글을 읽은 적도 없었고, 종교개혁을 놓고 어떤 식의 논쟁 신학에 빠져든 적도 없었다. 물론 리바데나이라가 쓴 『자서전』에서는 루터와의 유사점 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동시대적인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반대 명제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수도회의 구조상의 특성 때문에 이 수도회는 가톨릭의 반동종교개혁의 결정적 수행자이자 실체적 요인이 되었다.

초창기의 어려운 시기가 지나간 후, 예수회는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첫번째의 활동 지역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이곳에서는 예수회 수도사들의 활동이 워낙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이 지역은 수도회가 뿌리 내린 지역으로 거론된다. 프랑스 지역이 곧 뒤따랐고, 독일 또한 이어서 그들의 활동 지역에 포함되었다. 페트루스 카니지우스(Petrus Canisius)가 독일 최초의 예수회 수도사이다(1521-1596).

1556년에 독일의 예수회는 이미 두 개의 지역 수도회를 세웠다. 이 수도회는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와, 발트부르그의 추기경, 또 아우구스부르그의 주교에게 특별히 도움을 입었다. 독일 땅에서의 예수회 회원들은 이미 가톨릭지역이었던 이곳에서 고답적 신앙을 새로이 갱신해야 했다. 카니지우스가 쓰고, 짧은 기간에 널리 퍼졌던 책인 『요리문답서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