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혁명과 왕정복고 시대의 수도원

 

 

 

 

200여 년 동안 수도원들은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규칙으로 정한 내용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했고, 또 터져 나오는 개혁의 싹들을 계속 키워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 프로그램이 활성화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각 나라의 정치적 상황과 전체 교회의 종교 상황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특별히 종교적으로 활발한 활동과 활동의 결실이 있던 시기였다. 이 "경건한 사회적 분위기"(상류층에 속하는 귀족 평신도들과 개혁 의지를 가진 주교들에 의해 주도되었음)는 교회적 삶을 주관했다.

이 분위기가 기존의 수도원들과 수도회적 공동체들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개혁의 의지를 가진 수도원들 중 몇몇은 이 새로운 경건을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이 개혁 세력들은 새로 생겨나는 수도회 공동체를 위해서 프랑스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공동체들의 주목할 만한 성장에 특별히 적당한 나라임을 나타내 주었다.

트리엔트 개혁법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전통적 수도원들을 지역적으로 묶도록 했다. 중세 때부터 이것은 효과적인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계속해서 요구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베네딕트 수도회에 두 개의 수도회가 생겨났는데, 이들이 프랑스에서의 기존 수도원들을 새롭게 꽃피게 할 수 있었다. 멀리보면 이것은 사실 이탈리아의 개혁 수도원인 파우다 지방의 귀스티나(S. Giustina) 수도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이제 이것이 프랑스 수도원들에게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우선 베르덩에 있는 성 반네 수도원 출신의 돔 디디어 드 라 쿠어(Dom Didier de la cour, 1550-1623)에 의해서 이 성 반네 수도원이 개혁되었다. 여기서 시작된 이 개혁이 약 50여 개의 프랑스 수도원들을 개혁되게 했고, 이들이 함께 모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 수도원들의 영성은 "경건한 사회 분위기"에 의해 자극받은 것으로 새로운 영적인 삶을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의 신부들은 공부를 가르치는 일과 목회 활동을 넘겨받았으며, 이것으로 프랑스의 종교적 갱신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 수도원들 내부적으로는 경건, 금욕, 학문이 조화 있게 결합되어 있었다. 성 반네 수도원의 설립자는 수도사들이 순수한 학문적 훈련과 활동을 하도록 촉구했다. "무식한 베네딕트 수도사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라는 말은 돔 디디어가 개혁할 때 구호로 내건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새 시대적인 발전은 학식 있는 수도사를 만들어 내었다.

이런 개혁 수도원들의 입장이 두번째 프랑스 베네딕트 수도원 연합체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프랑스 중부 지역의 반네 소속 수도원들은 1618년 성 마우루스에 의해 독자적인 수도회 연합체로 연합되었다. 파리의 성 게르마인 데스 프레스 수도원이 곧 이 마우루스 연합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앙기본법으로는 성 반네 수도원의 것을 몇 가지 수정해서 채택했다.

돔 그레고레 타리쎄(Dom Gregore Tarisse, 1575-1648)가 초대 총무원장이 되어 개척자로서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성 반네 수도원에서처럼 여기서도 역시 수도원 밖에서 하는 일로서는 수업과 목회가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수도원적 "본래 과업"으로는 연구와 학문이 주어졌다. 역사에 관한 특별 학습이 모든 수도사들에게 의무 과목으로 지정되었다.

이 수도원이 이렇게 자리를 잡음으로써 마우루스 연합체는 이 시대의 학자들의 연합체에서 가장 우수한 모임이 되었다. 다케리, 루이나르트, 몽트후콘, 특히 마빌롱은 역사에 관한 연구와 출판으로 이 연합체의 학문적인 명성을 견고하게 해주었다. 이들은 중세에 있었던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문 활동을 통해서 "베네딕트 수도사의 전형적" 모습을 나타냈다.

성인전, 덱스트 편집(최초의 어거스틴 출판물), 외교학, 고지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이들의 업적은 오늘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 마우루스 수도회가 원래의 수도원 규칙을 자기들의 시대에 맞추어 수행하면서 매일의 "강독"을 한 학문 활동의 결과가 이것이다. 규칙 준수와 학문의 결합에 관해서 마빌롱은 그의 「수도원 학습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학습에서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학습은 우리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 구주가 우리에게 그의 인격 안에서 모범을 보이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이 수도회와 이것의 프로그램은 곧 급속히 확장되었다. 물론 이것이 마우루스 수도회 수도사들 모두가 제대로 된 학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우루스 수도회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디서나 기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이주는 온건한 압박은 오히려 활동을 촉진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추기경 라 로케프롤드(La Rochefoucauld, 1645년 사망), 프랑스 교회 개혁의 주도적 인물이었는데, 이 사람은 마우루스 수도사들 배후에서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이 마우루스 수도회는 개혁의 의지가 아예 없거나 반쯤있는 분파들을 받아들이는 데서도 실제적인 제도를 발전시켰다. 개혁의 입장에 서지 않은 수도사들도 이 수도원에서 계속해서 식사와 숙소를 제공받았다. 이 수도사들은 숫자가 많던 적든 독자적인 지도자 밑에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의 모든 책임 있는 직위는 개혁 입장의 수도사들이 차지했다. 이것은 한 수도원 안에 두 개의 공동체가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특별한 어려움은 생겨나지 않았다. 비 개혁적 입장에 선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래서 이들은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슈미츠(Ph. Schmitz)에 따르면 "이들은 수도원에서 보면 퇴직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수도원은 이들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했지만, 이들은 수도원과는 완전히 별개인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시토 수도회 역시 개혁을 필요로 했으나 이쪽은 좀 더 어렵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수도회에서 역시 그 시대의 특징적 흐름이었던 개혁이 내부에서 전적으로 독자적이고, 또 가장 관심 있는 것으로 떠올랐다. 아만드 쟝 부티어데 랑스(Armand jean Bouthillierde Rance, 1625-1700)는 추기경 리슬리외(Richelieu)의 조카로 시토 수도회 개혁에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대공 시대(Grande siecle)의 대표적 전형인-귀족적이며, 높은 학식과 최고의 교양이 갖추어진, 그리고 여러 개의 수도원을 관장하는 성직록 여컨에 이름이 올라 있는-이 사람은 30세가 넘으면서 급격한 참회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으로 봐서는 아주 볼품없는 작은 수도원인, 그리고 자신의 성직록에 포함되어 있던, 라 트라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사의 삶을 시작했다. 1664년 그는 원장이 되어 개혁적 입장에 선 무리의 지도자가 되었다. 자신의 수도원에서 그는 시토 수도회의 근본적 이상을 재활성화 하고자 했다.

시토 수도원의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개혁 노력과는 무관하게, 그는 이 이상을 자신의 독자적 입장에서 추진했다. 염세주의와 엄격함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신앙적 성향에 따라 그가 보는 수도사의 삶은 무엇보다도 참회와 속죄를 특징으로 했다. 이것은 물론 베네딕트 규칙과 원래의 시토 수도회 프로그램을 아주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요구 즉, 육식, 물고기, 계란, 버터 등의 금지, 계속적인 침묵, 학문의 배척, 수공업 노동 등을 요청하였다.

모든 반박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원자들이 이 라트라페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이 수도원은 시토수도원 개혁의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는 다른 수도회에서 있었던 개혁의 빛을 바랠 정도가 되어 시토 수도회 내의 새롭고도 독자적인 분파의 기원이 되었다.

17세기의 종교적 삶에서 프랑스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프랑스에 여러 종류의 종교 단체가 새로이 설립되었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것들의 배경이 되는 종교적 분위기에서 전통적인 수도원적 삶의 모습에다 사도 활동을 가미한 일단의 새로운 성직자 공동체가 생겨났던 것이다.

빈첸츠 폰 바울(Vinzenz von Pau교은 "자비의 자매들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정규의 조직화된 박애회를 만든 사람이다. 이 사람 또한 성직자 공동체를 세우고, 이를 통해 프랑스의 시골 사람들을 다시금 교회와 종교적 삶으로 이끌었다. 빈첸츠 자신이 원래 오랫동안 지방 교구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노력은 그런데 지속적으로 계속할 수 있는 제도화된 기관을 통해서만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생긴 프랑스에 선교를 위한 성직자로 모임은 1633년 교황 우르반 8세에게서 공인 받았다. 이 모임은 프랑스의 성 라자레에서 결성되었으므로, 이들은 보통 라자레단이라고 했다. 빈첸츠는 이 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직접 작성했다. 조직 체계상으로는 종신직으로 선출된 총무원장이 중심적 지도자가 되는 기존의 수도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수도회가 가지는 엄격한 특징을 포기했다는 것과 또 선교사를 공동체에서 사는 세속 성직자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대화된 수도원식 삶의 같은 형태가 요한 야곱 올리어(Johann jakob Olier, 1657년 사망)가 세운 성 술피스 성직자 공동체이다(술피스단이라 한다). 이것을 세운 설립자에 대해 같은 시대 사람이었던 위의 빈첸츠 폰 바울은 "영적계급에 속한 자들이 황폐화는 교회 파멸의 직접적 원인이된다"고 했다. 이 말은 이들이 성직자 교육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을 하는데 있어 개인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것은 충분치 않았다.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반포된 개혁 칙령의 해당 규칙들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빈첸츠가 스스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직접 나서서 프랑스의 여러 교구에서 이 일에 매달렸다. 그의 영향을 받아 올리어 역시 1641년에 학습소를 세웠다. 그는 파리의 성 술피스의 목회자로서 목회일을 하면서 동시에 성직자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그를 돕는 사람들을 원래의 사역 분야가 목회자 교육인 세속 성직자 공동체와 연합시켜 놓았다. 1700년이 되었을 때 이 술피스단은 이미 열 개의 학습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설립자가 아직 생존해 있을 때 캐나다 성직자교육을 위해 몬트리얼에도 역시 학습소가 세워졌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의 세번째 것으로 요한네스 에우데스(Johannes Eudes, 1680년 사망)가 만든 것이 있다. 그는 프랑스 오라토리움단 회원으로 민중 선교에 헌신하다가 성직자 학습소로 온 사람이었다. 1643년 그는 민중 선교와 학습 교육의 목적으로 "예수와 마리아 선교 성직자들"(에우데스낭이라 이름한다)이라는 단체를 세웠다.

이 남자 수도 공동체 외에 또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소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새로운 여자 수도회가 생겨났다. 그 결과 1626년 낭트에 프랑스 민중들을 위한 다양한 구제 활동을 목적으로 "성 카알 보로메우스의 사랑 자매들"(보로메단)이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로트링 지방의 신부였던 페트루스 푸리어(Petrus Pourier)가 1597년 크리스마스에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것을 모체로 하여 "우리의 성모 사랑 수도회로부터의 성 어거스틴 여자 수도회"라는 수도회가 생겨났다. 이것은 이전의 성직자 수도회의 이상이 새로운 활력과 과제를 가지고 새로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여성 수도회에서 시험과 기도영창은 교육활동의 한 수단이었다. 이 시대에 프랑스로 와서 프랑스를 본거지로 해서 퍼져 나간 우슬라 수도회와 영국 여성은(232-234쪽 참조) 그러므로 이런 배경에서 나타난 학교 수도회의 한 형태였으며, 또한 이것이 프랑스를 넘어 다른 곳에서도 활성화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 교회는 천천히 민중 학교가 특별한 과제임을 깨달았다. 여자 수도회에서 하던 학교 교육 활동은 일반 여자 아이들의 교육과 더 상위의 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 기존의 수도회들 역시 상급 학교에서의 교육을 이어서 발전시켰다.

18세기에 이 민중학교(초등학교?)가 시야(視野)에 들어왔다. 여기에도 역시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던 수도 공동체의 형태에서 주어진 교회에서의 시작이 성공적으로 열매 맺은것이다. 이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기독교 학교 형제단"으로, 이것은 1681년 라임 지역 성당 책임자였던 요한네스 밥티스타 데 라 살레(Johannes Baptista de la Salle)가 뢰엔에 세운것이다. 이 수도회는 평신도 공동체였다. 삶의 유형과 규칙은 다른 수도회와 같았다. 이들이 내건 목적은 민중학교 교육을 하면서 동시에 민중학교 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첫번째 교사 양성소(1699년 라임에 설치됨) 역시 이 데 라살레스의 창작품이다. 그후 1923년의 총회에서 이 연합 수도회가 활동 영역을 확대하도록 하고 더 상위의 상급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프랑스에서의 수도원과 수도원의 삶의 모습이 시작된 것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의 모습들과 유사하다. 물론 북쪽의 국가들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예외적인 곳도 있긴하다. 그러나 어쨌든 유럽 대륙에 있었던 네 개의 수도원(그중 하나가 비스툼 힐데스하임의 람스프링에 있다)에 있었던 영국 출신의 수도사들이 고향에서 전수 받은 베네딕트식 전통을 계속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이는 또한 19세기에 새로운 영국 베네딕트 수도원 연합체가 결성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 시대에 이탈리아에 새로이 생겨났던 수도원들 중에 살펴봐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몇 개 있다. 1597년에 칼라산차의 요셉(Joseph von Calasanza)이 성직자 단체를 결성했다. 이 모임은 이미 있던 형태인 정규 성직자 단체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면서 동시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는 이 단체에다 "경건한 학교인 성모의 가난한 정규 성직자들"(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이라 불림)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모임은 1621년 교황 그레고리 15세에 의해 공인되었다. 이탈리아의 초등학교 교육에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냈던 이 성직자 수도회는 빠른 시간 안에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등교육뿐 아니라 상급학교와 대학 교육까지를 담당했다. 예수회가 1773년 해산되었을 때, 예수회 수도사들이 담당했던 교육 활동을 이 경건한 사람들 모임이 계속 이어받은 경우가 많았다.

십자가의 바울(Paul von kreuz, 1694-1775)은 1725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에 관한 모임"(수난자들)이라는 연합체를 설립했다. 은둔자적 체험, 그리스도의 고난을 높임, 열정적 참회가 특징이었으므로 이 모임의 설립자가 이 모임의 사역을 중세의 탁발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했던 것처럼 목회 활동과 엄격한 수도사의 생활 모습을 결합한 설교자 공동체로 끌고 간 것은 당연했다. 이 수난자들은 다른 새로운 공동체들을 위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설립목적은 어떻게 표현하든 분명히 목회였다. 또한 이 공동체의 특별한 영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높이는 것 같은 특별한 예배를 특징으로 가졌다. 이들이 받아들인 규칙과 생활 모습은 많든 적든 이미 연합적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이런 종류의 기존 수도회 공동체들에서 배운 것이었다.

"거룩한 속죄자" 모임(구속주 단)도 이러한 새로운 수도회의 범주에 속한다. 이 중요한 성직자 연합체가 생겨나게 된 근본 배경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의 처음 출발점은 1730년부터 카스텔마레의 주교였던 토마스 팔코야(Thomas Falcoja)에게서 비롯되었다. 직접적 설립자는 리구리의 알퐁스(Alphons von Ligouri, 1696-1787)로서, 그가 1732년 성직자와 형제들을 모아 공동체를 시작했다.

이들이 가졌던 사역의 과제는 민중 선교였으며, 특별히 이탈리아의 버려진 산골 마을에서 설교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엄격한 공동체 생활은 설립자의 경건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 경건성의 특징은 속죄자를 높이는 것과 성찬을 특별히 중요시하는 것이었다.

리구리의 알퐁스는 그 외에 성례전 신학에 해당하는 방대한 신학 문헌을 특별히 강조해서 공부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서 이 이탈리아 구속주단은 얀센주의와 가장 날카롭게 대적했고, 가톨릭 참회의 실제에 관해서는 표준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정치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 모임이 빠르게 전파되지 못했다. 두 명의 독일인-타데우스 후블(Thaddaus Hubl)과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Klemens MariaHo「bauer)-이 이 모임에 들어감으로써, 이 새로운 수도원양식과 이들이 하는 목회적 실제가 이탈리아 밖으로 전파되었고, 이 결과 특별히 오스트리아와 독일 또 동부의 주변 국가들에게 새로운 사역 영역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독일, 곧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발생지인 이 나라에서는 수도원 삶의 갱신은 머뭇머뭇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종교개혁 세력이 들어선 지역에서는 수도원들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1629년에 내려진 회복 칙령(독일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내린 로마 교회 재산 회복령으로 종교개혁 이전에 로마교회 소유 재산으로 되어있던 것은 다시 돌려주라고 정함: 역자 주)이 황제의 직속 소유나 간접 소유로 되어 있는 수많은 종교 재단과 수도원들을 돌려주도록 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30년 전쟁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전쟁 통의 사건들은 이 칙령이 수행되는 데에 꼭 필요한 정치 권력적 전제를 빼앗아 가 버렸다. 1635년 황제는 이 칙령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장기간에 걸친 이 전쟁의 결과로 나온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다시 한번 이전에 교회와 수도회가 가졌던 재산 상의 지위를 회복해 주고자 시도했다. 교회의 재산을 소유하거나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1624년 1월 1일에 결정된 신분이 근거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의 실행은 이미 변해 버린 상황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수도원들은 가톨릭 국가들에만 남아 있었다. 수도원이 새로운 위치 설정을 할 수 있었던 곳은 단지 지배 권력이 종교를 바꾸어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함으로써 위로부터의 도움이 주어졌던 곳에서만 가능했다.

적어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수도원 연합체로 묶여서 (개혁적 입장의) 단체를 구성하고 있던 부르스펠더 수도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종교개혁을 잘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졌던 근본 이상인 수도원의 자율성, 원장 선출에서의 독립성, 또 선출된 원장의 종신 지위, 그리고 어떤 수도사든 입회 서원을 한 수도원에만 평생 소속되어야 하는 것 등의 이상은 독일 전역의 수도원 단체들에서 수행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 연합체의 대표자나 전체 총회, 또 시찰단에게 주어진 권력이 너무 미미했던 것이다. 부르스펠더 외에 여러 종류의 베네딕트 수도원단체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 생겨났는데, 이들은 트리엔트 회의에서 결정된 개혁에 관한 사항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던 것들이 나름대로 형태를 갖추고 나타난 단체들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시도되던 바 모든 독일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독일 베네딕트 수도회 연합"(Congregatio monasteriorum O. S. B. in Germania)으로 묶고자 하는 노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모임이 이루어지지 못한 중요한 요인은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주교들이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비교적 작은 수도원들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교회의 개혁 작업은 재정적 기반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베네딕트 수도원을 몰수해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생계 수단을 마련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워졌다. 급진적 요구를 담은 이 계획은 결국 탁상공론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개개의 경우들에 있어서는 교회 당국이이 계획을 실행에 옳김으로써 여기 저기서 수도회 재산을 "재 분배"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확실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개혁을 실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목회 활동과 교육 활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개혁활동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짤츠부르그 대학에다 공동으로 학문 활동을 하기 위한 중심기관을 만들었다. 이 건물 건축에 개개의 수도원들이 활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30년 전쟁 후에 다시 얻어진 그들의 생존력과 개혁된 자의식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특별히 훌륭한 수도원들 다수가 황제 직속의 소유로 되어 있던 독일의 남부지방에서 수도원의 원장들과 수도회 단체들의 건축 의지가 바로크 양식의 예술품으로 나타나서 탁월한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수도원 이름을 포도원, 또는 츠비발텐, 오토보이렌, 비블링겐 같은 토속적 이름을 택함으로써 다른 수도원들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원들 역시 이전 세대처럼 수도원식의 생활 형태를 가졌다. 하지만 영적인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 가는 근본인 경건은 바로크 시대의 그것이었다. 이 당시의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다른 수도회의 수도사들과 틀린 것이 없었다. 독일 바로크식 수도원에서의 학문 활동은 프랑스의 마우린 수토원의 명성과 위상에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수도회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려 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마틴 게베르트(Martin Gerbert, 1764-1793)는 그의 교회사 연구에서 독일 수도회를 이 유명한 마우린 수도회와(대등하게) 비교해 놓고 있다.

수도원들이 가졌던 커다란 도서관 방들은, 이것이 물론 대표적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학문 보호의 의미에 대한 수도원의 생각을 증명해 주고 있다. 18세기의 수도원학교에서는 자연과학이 주 교과목으로 다루어졌다. 이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골방"은 각 수도원장이 거의 독자적으로 개설한 것이며, 이 교육의 장에는 철저히 현대적 성향을 따라가게 했다.

그 밖의 다른 옛날 수도원들도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진행을 했다. 시토 수도사들은 독일에서는 프랑스 수도사들이 했던 것과 같은 급격한 개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연합체 결성은 있었는데,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곳이 남 독일의 살렘 수도원이다.

참사회 수도사들은 그들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 수도사들이나 쁘레몽뜨레 수도사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바로크 수도원과 종교 재단은 모든 기존의 수도원들에게 동일한 삶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 수도원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동일한 생활을 하는 것은 이들이 이름과 복장과 수도회는 다르더라도 서로가 동화되도록 했다. 그래서 쁘레몽뜨레 수도사들에 대해 예를 든다면 "쁘레몽뜨레수도회는 아무런 독자적 특징이 없다"는 말이 있게 되었다. 설립자의 유고집으로 출간된 변증론에서 수도회는 수도회 설립자를 가톨릭 성례론-역종교개혁과 바로크 시대의 가톨릭 교리의 중심점인-의 옹호자로 묘사하고 있고, 또 수도회자신 스스로도 성례를 아주 높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수도회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특별한 형태의 경건회를 가지게됨으로써 서로 차이가 날 수 있게 되었다. 두번째의 독자적 요소로 전통적 특징을 내세웠는데, 이는 각각의 수도원 공동체가 가진 "재산"이나 "특질"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지대한 손상을 입으면서 종교개혁을 견뎌낸 탁발 수도회들 역시 17세기에 새롭게 조직화함으로써 한 세기가 넘는 동안 계속 확장하고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학교사업과 목회 활동에서 지금까지는 도처에서 예수회가 개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왔었다.

이제 이 예수회가 했던 활동을 도시와 지방을 막론하고 탁발 수도사들이 넘겨받고 있었다. 탁발 수도사들은 이것을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잘 해냄으로써 그들이 가진 현실 적응 능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였다. 도시에서나 또는 시골 지방에서 탁발 수도회의 수도원들은 건축 양식에서 대수도원들의 복합 건축 형태를 자신들의 분수에 맞게 모방했다. 건축에서 역시 예수회가 교회와 연합 모임 공간(총회실)을 짓는 데서도 앞서 있었다.

예수회가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또 이를 통해 성공을 거둔 실제가 17, 18세기에 다른 수도회 공동체들에게 지표가 되었고 모방하고자 하는 매력적인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이 했던 경건, 즉 묵상으로 꽉 짜여진 것이 특징인 예수회의 경건 팔동이 또한 다른 수도회들에게도 널리 유행되었는데, 이는 수도원 밖의 세상에서도 똑같은 경건 활동이 유포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 18세기에 예수회가 다른 수도회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활동을 보인 것이 다른 전체 수도회의 생활 모습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18세기 후반에 이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 수도회가 여러 나라에서 집중 공격을 받은 데서도 잘 나타난다. 프랑스에서는 얀센주의 논쟁이 일어나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이 새롭게 돌출했음을 보여주었다. 또 예수회와 탁발수도회 회원들이 1622년 로마교회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 유럽 국가들의 선교 활동도 겸해서 하기 위해 활동하던 해외 선교에서도 예수회 수도사들은 제의 논쟁에 휘말렸고(특히 중국에서), 다른 선교 담당자들의 새로운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과 국가 교회가 교황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깨달은 것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교황제를 방어하는데 가장 열심이라는 것이었다.

1759년에 이미 예수회는 포르투갈과 그의 식민지들에서 추방당했다. 프랑스, 나폴리, 스페인, 파르마는 1760년대에 자국 내에서 예수회를 금지함으로써 포르투갈을 뒤따랐다. 정치적, 교회 내적 압력 때문에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1773년 결국 예수회를 해산했다

 

"학교에서의 교육이 정치적, 교회 적대적 또 신학적인 것에 관심을 가짐에 따라 아주 복합적인 역학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 결과로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되면서 이것이 결국 예수회의 해체로 나타나게 되었다."(B. Schneider)

 

해산 교서로 내린 「주는 우리의 구원자」(Dominus ac Redemtor)에서 교황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인 수도회의 승인과 해체에 관한 권한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결정에 대한 반대는 아무데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의 상황, 즉 교황이 예수회를 해체하는 권한을 행사하도록 한 상황은 교황이 이것과 관련해서 실제상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이 교서가 수행되는 것을 통해서도 잘 나타났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카타리나 2세이 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나라에서는 예수회 수도사들이 학교 교육을 계속했다.

유럽 수도원의 역사를 보면 예수회의 해체는 수도원의 해체가 일반화되는 과정의 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8세기의 마지막 20년간과 19세기 초반은 수도원과 수도회들이 지금까지의 교회사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보편적 환속화를 경험하는 기간이었다.

예수회의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계몽주의의 열정에 경도되어 교회에 적대적인 시대 상황이 환속화를 주도했다. 수도원 재산을 국가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는 또한 예수회 해체 시에 실제로 행해졌던 처방이기도하다) 타진은 수도원의 해체를 국가의 이익으로 연결하려는 광범위한 동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회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영적침체를 맞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수도원의 위기로 이어졌다. 수도원의 영적 삶을 규정해 주었던 바로크 시대의 경건은 18세기 말경에 힘을 잃고 말았다. 이 경건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고 (생활을 통해) 끌고 나갈 능력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수도원들의 해체와 전체 수도 공동체들의 몰락은 세기가 바뀌는 시기에 나타났던 옛날의 전통적 유럽이 붕괴되어 갔던 커다란 정치적 사건들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시대사조인 계몽적 합리주의가 수도사 이상을 근본부터 공격해 들어왔다. 수도사의 삶에 주어졌던 종교적이며 인간학적인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이런 삶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며, 인간의 권리와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수도원을 적대시하는 문학이 반수도회적 분위기를 홍보하는데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에 따른 역사 연구는 수도원 제도가 기독교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고,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에도 있음을 찾아냈고 또 수도사의 삶을 광신자, 정신 이상자, 얼빠진 자들이나 할 수 있는 "끔찍한 훈련"이라고 주장했다(L. Mosheim). 이 당시는 유용성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해체 여부를 결정했는데, 이들이 보기에 수도원이 사회를 위해 유용한 면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수도원에서의 삶은 부동산을 기초로 한 값비싼 건물에서 높은 사람에게 고용되어 빈둥거리는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 내적으로 취해진 수도원 정책은 이런 점에서 이해해야 제대로이해가 된다.

1786년의 피스토야 종교회의는 모든 수도회들을 통합할 것을 요구했고, 수도사들이 목회 사역하는 것을 금지하고 수공업에 종사하도록 했으며, 또한 단지 일 년에 한 번씩 수도서원을 하는 의무만 가지고 있었던 수도사들 모두가 교구 주교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프랑스에서는 "수도원 위원회"가 이와 비슷한 결정적 개혁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1780년 이후 425개의 수도원의 해체와 그 밖에 다수의 소규모 수도원 공동체들을 완전히 해체하는 일을 했다.

또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보다 먼저 이미 수도원들의 해체를 시작하고 있었고 토스카나, 팔마, 롬바르디아가 뒤따랐다. 스페인에서 역시 교회와 세속이 서로 동일한 정책을 연합으로 실행했다.

요셉 2세(Josef, 1780-1790)는 오스트리아에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도입했던 세속화 정책을 계속 이어갔다. 수많은 대형 수도원들, 수도회 단체들, 소규모의 수도원들 등 바로크 양식으로 훌륭하게 지어진 수도원들이 폐쇄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인간사회를 위해서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해체를 모면한 수도원들 역시 그들이 가진 삶 자체에서 큰 제한을 받게 되었다-새로 신입 수도사를 받아들이는 것과 수도회 회원 총 인원수에서 엄격한 인원 제한이 있었고(유명한 수도원이었던 흑삼림에 있었던 성 블라신 수도원에는 백 명이 넘는 수도사가 있었는데 20명으로 줄여야 했다), 수도원에서의 하루 일과를 국가가 규칙으로 정해 주었고, 젊은 수도사들은 국가 교육 기관에서 공부해야 했으며, 또 수도사들이 새로 정해진 교구에서 목회 활동의 책임을 맡는것 등등이 의무로 정해졌다.

다른 영주들 역시 이런 예를 좇아서 수도원과 수도원 재산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마인츠 대주교이자 제후였던 에르탈의 칼 요셉이 1784년 대학을 새롭게 현대적으로 세우기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을 때, 그는 이 새로운 대학을 위한 물질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마인츠 지역의 부유한 수도원 세 개를 해체했다.

이런 식의 환속화 과정이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행해졌다. 수도원이나 수도회는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졌고, 이 수도회에 속한 사람들이 의미 있는 일에 눈을 돌리고 이들의 재산을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당대의 계명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어서 나타난 혁명의 수년간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환속화를 전 유럽에서 일반적 현상이 되도록 했는데, 이는 1803-1806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둥, 평화"의 구호 아래 아주 강도 높게, 또 야만적으로 수도원들을 타파해서 수도원 지도(地圖)에서 많은 숫자를 아예 없애버렸다. 이후에 남는 것은 폐허뿐일 경우가 많았다. 클루니수도원이 1790년 이후에 파괴되었고, 과거 수도원 역사에서 위용을 자랑했던 다른 수도원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 환속화의 물결은 정치적 압박을 통해서도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큰 수도원들은 1811년까지 모두 해체되었다. 유명한 대 수도원인 몬테 카시노, 몬테 베르긴과 카바 등이"국가 문서보관소"가 되었고, 이렇게 환속된 수도원 공동체의 사람들은 국가 공무원의 신분으로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스페인은 1809년에 수도원들을 폐쇄했다. 독일에서는 1803년에 제국 대표단 회의 결정으로 (수도원들을) 환속시킬 것을 법으로 정했다. 교회와 수도원에 속했던 재산은 라인 강 왼편 기슭의 피해에 대한 복구비용으로 사용했다. 나머지 다른 수도원들 역시 영주들의 "완전히 자유로운 처분"에 맡겨져서 독일에서의 거의 모든 수도원 지역이 없어지게 된다.

이전에 대형 수도원에 속했던 것들은 하나도 이 소용돌이를 견뎌 내지 못했다. 중세적이든 새 시대적이든 수도원 연합체들이 받는 압박은 모든 지방 수도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별 (소규모) 수도회들은 그나마 현저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도원이 당연히 교회적 삶에 속했던 관계성이 이제 사라져 버렸다. 대중 사회는 이렇게(바뀐) 진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순교자(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들은 유혈 혁명 기간의 몇 년 동안에 프랑스 수도원에서만 나왔다. 다른 수도사나 회원들은 수도원 해체를 환영했고 폭력적인 억압에 대해 감사와 겸손으로 이를 받아들이거나, 또는 아예 미리 스스로 해체하기도 했다.

한편 많은 수도원에서는 공동 연합회가 반대하고 저항함으로써 이 국가 주도의 해체 작업을 해체를 지연시키기도 했다. 극히 작은 숫자지만 일부는 다른 장소로 옮겨서 수도원적 삶을 계속했던 경우가 있기도 했다. 이런 경우가 슈바빙 비블링겐이 크라카우 옆 튀닉(11807년까지 종속)으로 간 것과 성공적인 경우로 성 블라신 수도원이 라반탈에서 성 바울 수도원으로 된 것이었다.

수도사의 삶에 대한 소명을 진실되게 유치한 특별한 예를 프랑스의 라 트라페 수도회가 보여 주었다. 17세기에 데 랑스에 의해 개혁되었던 시토 수도원은 프랑스 혁명 와중에 해체되었다. 이 당시에 신입 수도사 교육을 담당했던 어거스틴 데 레스트랑(Augustin de Lestrange, 1827년 사망)이 수도사의 일부를 이끌고 스위스로 가서, 이전에 카르투지오 수도원 발 세인트가 있었던 곳에서 살았다. 1794년에 이들이 살던 이곳이 수도원이 되었고 데 레스트랑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데 랑스가 세운 업격한 규칙을 더욱 강화시키고, 당시의 다른 곳에서 수도원 해체의 흐름이 일반화 되어 있던 이 와중에 벨기에의 베스트말과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역인 다펠트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1798년 프랑스 혁명군이 스위스에 진주했을 때 발 세인트의 수도원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자 설립자였던 원장은 트라페식 수도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수도사들과 함께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폴란드, 러시아를 방랑했다. 수도원 망명자 교회는 떠돌아다니면서도 엄격한 수도 규칙을 지켰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새로이 거주할 곳을 짓는 것을 추진했다. 그러나 1800년에 짜르는 그들을 추방했다. 이 망명자들의 일부가 다펠트를 거쳐서 다시 발 세인트로 귀환했는데, 이 역시 1811년 다시 해체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 당하자 데 레스트랑은 다시 라 트라페로 돌아와서 이곳을 거점으로 프랑스에 새로이 수도원을 건립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 수도회는 모험적이라고 해야 할 방황을 하면서 환속화를 이겨냈다. 이는 이 당시에 가장 엄격했던 수도원 삶이 교회와 수도원에 적대적이었던 정책보다도 더 강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까지는 구 체제를 뒤엎는 것이 일반적 흐름이었고, 이 흐름은 수도원 제도를 그것이 중세적이든 새로이 생겨난 것이든 뿌리째 부정하고 있었다. 수도원과 수도회들은 마지막까지 싸워서 타파해야 할 구 질서에 속하는 것이었다. 계몽주의적 자유주의가 이런 흐름을 계속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이제 지방 영주 지배가 아니라 국가가 직접 통치하는 체제가 구축됨으로써 교회 역시 단면화 되어 교회의 새로운 질서를 수중에 넣고 있는 국가 교회 제도가 만들어졌다-예나 지금이나 종교 세력이야말로 권력 유지를 위해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다.

이전의 수도원들을 다시 복구한다거나, 수도사 거주 지역을 새로 만든다거나 또는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것들은 모두 이제 국가 고위층의 생각에 달려 있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교회의 자각은 복고의 표현 속에 계속 잠복해 있었다. 수도사의 삶이 교회를 도운 것도 복고 프로그램에 해당된다. 바로 이 수도사적 삶의 영역에서 수십년이 지나지 않아 지금까지의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주목받을 만한 열매를 맺은 복고가 나타났다. 교회의 관심은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므로 가톨릭 체제와 교리를 조심스럽게 현재의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정책과 낭만주의가 가진 열광적 열정을 한데 묶어서 새로운 종교적 감정을 만들어 내고 이런 분위기에서 수도회가 다시 소생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1801년의 협약에서 수도회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나(1789년 국가평의회 결정은 프랑스의 모든 수도회는 해체되었다고 공포했었다), 1807년 빈센트 폰 바울 소속 박애 자매단에게 활동 재개를 허락했다. 이 자매단의 사회 활동을 황제가 도왔고, 그래서 이 자매 공동체는 프랑스를 근거지로 해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모든 나라들이 그들이 오는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수도회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삶의 전통적 형태와 공공적인 사회 구제활동이 결합된 형태였고 또한 이들이 가진 형태는 곧 생겨난 수많은 여자 공동체들의 표본이 되었다.

교회의 복고 운동을 무엇보다도 잘 나타내 주는 표시가 1814년 교황 피우스 7세에 의해 이루어진 예수회의 공식적 부활이었다. 1773년 교황이 이를 해체했지만, 그럼에도 예수회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았었다. 러시아 지방회는 계속 존속했었고, 예수회 소속이었던 수도사들이 그 동안 사적 사제 모임으로 함께 연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원래 예수회가 가졌던 목적과 이상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예수회가 다시 부활하자 이 사람들이 다시 모여 왔고, 예수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1820년경에 이미 2천 명의 회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수회 조직에 관한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1773년 이전에 있었던 수도회의 모습을 복구하는 것과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두 성향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20년 로마에서 주선해서 개최된 총회에서 예수회는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결정하고, 새로운 상황에 관해서는 교황의 신학과 교회 정책을 위한 역동적 도구가 될 것을 결정했다. 활동에 관해서는 이 수도회 수도사들은 전통적 활동 분야인 학교, 민중 선교, 해외 선교, 피정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예수회를 다시 부활시킨 바로 그 해에 교황 피우스 7세는 수도회의 부활을 위한 개혁 총회를 개최했다. 총회는 정신개혁에 관심을 가져야 했으며, 동시에 이전 수도원들의 부활과 옛 연합회들의 복구를 감독하는 것에도 눈을 돌려야 했다. 교황은 옛날부터 있었던 수도원 규칙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이전 수도원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바티칸 영내에서는 흑의(黑衣) 베네딕트 수도회와 백의(白衣) 베네딕트 수도회가 각각 하나씩의 총회를 부활시키려고 했다. 인위적으로 생각해 낸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 대수도원들의 몇몇이 다시 재건될 수 있었고 이들은 또한 몬테 카시노에 연합 총회가 생기므로 함께 연대하게 되었다.

시토 수도회 수도사들 역시 교황이 나서서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고자 했다. 이들은 겨우 몇 명이 다시 모였고 대수도원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교황은 대표자가 된 산타 크로체 수도원을 로마에 세움으로써 단일 수도원 연합을 형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노력은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단일 연합체가 만들어지면 자신들의 계속적인 존립이 위협받으리라고 생각한 이탈리아 밖의 지역 수도원들이 반대했다. 외국인이 총무 대표가 될 경우 각 지방 영주들에게 걸림돌이 되기가 쉬웠고 수도원 해체의 원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시토 수도회는 어거스틴 데 레스트랑의 활동에 힘입어 짧은 시간에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들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역사적, 영적, 국가적 배경 때문에 독자성을 계속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엄격한 규칙이 전체 분위기를 주도했다.

탁발 수도회의 복구 운동 역시 같은 어려움을 껶었다. 이 수도회를 복구하고자 하는 시도도 교황 피우스 7세의 직접적 관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수도회가 국경을 초월하여 사람끼리의 연대로 묶여서 대형 수도원을 형성했던 옛날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리였고, 각 나라별로 소규모의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데에 그쳤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탈리아 수도원에만 제한되었으나 연합체를 형성했다. 스페인 지역의 (도미니크) 수도원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 연합체를 만들었고 그외 나라들에서 설교 수도사로 활동하던 수도사들의 모임들 역시 독자적 단체가 되어 수도회 지휘 체계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조직이 되었다.

이 세기의 중반쯤에 수도회의 복구 갱신 운동은 안정권에 접어들 수 있었다. 프란시스단 수도회들 역시 어렵게 진행되긴 했지만 복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가장 빠른 진행을 보인 곳이 카푸친 수도사들로서 이들은 새로운 시대 흐름과 잘 연결해 갔다. 이와 반대로 콘벤투알 회는 환속화로 인해 받았던 손실을 도저히 회복할 수가 없었다.

프란시스단(團)의 옵세르반츠회(會)는 이중의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 하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이에 서로 관계가 엄격히 단절되는 상황에 처하므로 생겨 난 어려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옵세르반츠회 자신과 3개의 개혁 단체들, 즉 옛 카타리파에 속하는 디스칼체아트(Discalzeaten)단과 개혁자 모임이라는 단체, 또 레콜렉텐이라고 불리는 새 모임 단체들과의 사이에 나타난 긴장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원래는 사소한 문제인 수도원의 관습과 생활양식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다른 관습과 양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그들이 서로 다른 독자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연합 운동을 와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중세에 있었던 나머지 수도회들도 모두 이와 비슷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세기가 한참 지났을 때 이들 수도회들은 각 지역회들 나름으로 안정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수도원이 이전에 가졌던 위상에 이르기에는 불가능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7세기에 생겨난 수도회들이 실질적으로 도약하고 발전을 한 때는 복구의 시대이다. 옛 수도회들이 차츰 기운을 회복해 갔을 뿐 아니라, 새로 결성된 수도회들도 교회적 활동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일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교회가 앞장섰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혁명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신부 페터 쿠드린(Peter coudrin, 1827년 사망)이 "예수와 마리아의 거룩한 마음을 위한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이 남자들의 모임 외에 백작 부인이었던 헨리트 아이머 데 라 슈발레(Henriette Aymer do la Chevalerie)와 함께 여성들의 모임도 만들었다. 이들 두 명의 설립자는 각기 사형 선고를 받고 프와티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서로 알게 된 사이였다. 혁명에서의 경험은 수도회들을 위해서 특별한 것이었다. 사제 활동, 선교에 관한 일, 교육 활동 등을 통해서 혁명을 통해 나타난 정신적 피폐를 다시 돌려놓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도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이념의 핵심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랑을 통해서 혁명가들이 가진 증오를 극복해 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외부적 활동도 내적이고 참회적이며 기도하는 삶과 같이 함께 묶어서 했다.

남성 모임-이들은 본부가 파리의 데 픽푸스 거리에 있어서 픽푸스 선교단이라고 불렀다-은 나중에 오세아니아 지역 선교 업무를 담당했고, 그래서 프랑스의 국경을 너머까지 활동을 확장했다.

1816년에는 후에 마르세이유의 주교가 된 칼 요셉 오이겐폰 마체놋(Karl Joseph Eugen von Mazenod, 1861년 사망)이 프로방스의 아익스에다 "프로방스 선교사들"이라는 단체를 설립하는데, 이 단체는 1826년 공식적으로 교회의 승인을 받았고 "순결한 처녀 마리아회"라고 이름 붙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제 공동체들이 다시금 소생하게 되어 목회 활동-즉 대중 선교, 영적 훈련, 교육, 청소년과 재소자 전도 또 이방선교(1841년부터 캐나다에 선교)-과 전통적 의미에서 수도원적인 공동의 삶이 다시 결합 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리용에는 "마리아회"가 생겼는데, 이는 쟝 클라우데 마리 콜진(Jean Claude Mariecolin, 1875년 사망)이 모으고 조직한 것이었다.

성직자 수도회단이 1836년 교황의 재가를 얻어서 공식 승인을 받았는데, 이들은 자기 구원과 특히 마리아 숭모 이상을 교육, 선교 활동과 결합시키고자 했다. 또 다른 "마리아회"도 있었는데, 이것은 1817년 빌헬름 요셉 하미나데(Wilhelm joseph chaminade)가 보르도에 세웠다. 초기에 세워진 수도회들은 폐쇄적인 수도 공동체는 거의 없고 오히려 함께 모여서 선교 활동을 하고자 했던 영적인 뜨거움을 가진 (일반) 사람들의 모임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마리아회 사제회 공동체, 즉 마리아 형제단과 마리아 자매단이 생겨나 (종교적 신분을 가지고) 학교 교육과 영적 사역을 담당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여러 종류의 영적 활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단체들 외에도 프랑스에는 몇몇의 평신도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의 주 업무는 가톨릭 학교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가장대표적인 것이 요한네스 밥티스타 데 라 살레가 세운 학교형제단이다. 이 모임은 이런 활동을 하거나 만들 때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이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특성이자 새로운 것으로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진 독특한 영성에 대한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경건회뿐이었다. 한편 1817년에 세워진 마리아 학교 형제단들의 특징은 마리아 숭모이고, "레 푸이의 예수의 거룩한 마음의 학교 형제단"(1831)의 특징은 예수의 마음을 숭모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수도 연합체를 낳게 한 다른 요인들도 있다. 요한네스 밥티스타 데 라 살레는 그에게 속한 모든 학교 형제단원들에게 공동생활을 할 것을 권했기 때문에 쟝 마리 로버트 데 라메나이스(Jean Marie Robert de la mmenais)가 1824년 학교 형제단이라는 모임을 설립해서 소속 회원들이 단독으로도 작은 마을 학교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소위 프로에르멜 학교 형제단이라 불린다).

이런 모임들의 몇몇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다른 나라로 활동 지역을 넓혀 갈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만들어진 단체들이 너무 다양하고 또 공동체들의 이름들 또한 너무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서 19세기초에 활동하던 여자 수도회들을 살펴보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과 사회 구제 활동을 펴던 수많은 여자 수도회들은 다음 세대에 이어서 온 산업 시대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이 여자 수도원들은 여러 나라에 빠른 시간에 퍼져 나가고 결실을 거두어 대단히 많은 숫자가 생겨났다.

"이들의 설립에 관한 이야기는 개괄적으로 단순화시켜서 말할 수 있는데, 거의 모두가 같은 사건으로 설명해도 된다. 그들의 활동 사역이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이라는) 같은 것인데도 아주 복잡한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에 떨어져 살았던 수도원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건한 처녀가 자발적으로, 또는 어떤 사제의 권고를 따라 어린이 교육이나 가난한 자, 병자를 돌보는 사역에 헌신하는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여자가 하는 일에 감명을 받은 처녀들이 그 여자에게 몰려와서 일단의 모임이 이루어진다. 그 지역의 영주 부인이나 여성주(女城主)가 이들에게 도덕과 재정에 관한 지원을 하고, 사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또 그들이 활동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되는 것을 막아 준다. 예수회나 또는 다른 수도회 출신의 목회 지도자가 나서서 전체를 관장해서 정식 수도회를 설립하도록 한다. 집을 사고, 주교가 개입하고, 정식으로 승인 받기 위해서 규칙과 복장과 책임자 여성, 수도원 이름, 도와줄 후견인, 또 신입회원 수련원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차츰 갖춰져서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되면 이들은 드디어 교황과 정부의 승인을 요청할 준비가 갖춰지는 것이고 날을 잡아 신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모임체가 태어난다."

설립 동기는 각 국가가 나름대로 가진 사회적 문제였다. 이 사회적 문제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마을과 도시의 청소년들, 돌보지 못하고 내버려두어야 했던 교회의 병자들과 노인들이었다.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종교 공동체의 설립이었는데, 이들은 과거에 이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범을 보였던 선례를 남겨 놓고 있었다.

중세의 대형 수도원들(어거스틴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시스 수도회, 칼멜 수도회 등)과 그들이 가졌던 규칙들이 새로이 다시 살아나되 원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다양성으로 등장했다. 그 이유는 물론 이들이 새롭게 세워진 종교 공동체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지리적 경계지역이 설립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늘어났다. 어떤 수도원이 세워지면 그 이웃 지역이 비슷한 종교 공동체를 설립하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은 수도원의 이름, 복장, 영적 가르침의 방향 등을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

교구 경계 지역이 그대로 종교 공동체의 경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 낯선 교구에 맨 처음에 세워진 공동체는 독자적 뿌리를 내려야 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여러 가지 특징이 요약된 독자적 수도원이 되었다.

또한 국가적 경계도 분리와 독자적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국가 정부는 수도회가 설립되는 것을 승인하던가 거절하는 주체였기 때문에 타 지역의원장 수녀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persona non grata)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사회 활동을 목적으로 한 여자 수도회 모임이 많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이렇게 설립된 여자 수도 공동체 모임이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을 사회적 배경에서 본다면 이 시대가 여자 수도회가 많이 나타났던 중세나 후기 중세 때의 사회상황과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각기 종교적 특징을 가진 사회 기관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자 수도회들은 종교적 욕구가 있었던 여성들의 세계에 안전하고도 보장받는 삶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이 새로운 공동체들은 여자들에게 보살핌과 교육 활동을 통해서 중요하고도 공공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공동체들은 그 외에도 다양한 환경에 속해 있던 여러 젊은 여성들에게 교회와 사회에서 활동할 가능성을 찾아 주기도 했다.

실상 개신교의 복음교회도 이러한 면에서는 이들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복음교회의 사회봉사 연합 단체들도 변화된 양태이긴 하지만 수도원의 기본 이상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성장해 가면서 역시 동일한 사회관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복음교회가 했던 조직적 구제 활동은 동일한 사회적 환경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한다. 카리스마적이며 조직화의 능력이 뛰어났던 사람들, 즉 요한 다니엘 팔크(Johann Daniel Falk, 1768-1826), 요한 힌리히 비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1864),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빙(Friedrich von Bodelschwingh, 1831-1910) 등등의 사람들이 고대 교회의 구제 활동을 교회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켰으며, 이 맥락에서 19세기의 정신에 바탕을 둔, 동시에 산업시대의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사역 활동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들은 복음적 입장에서의 수도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든 구제 공동체들-이 중에 가장 잘 알려지고 모범적 특질로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이 플리드너(Th. Fliedner)가 1836년에 카이저베르트에 세운 구제 기관이다-은 수도회와 비숫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매공동체는 신앙, 봉사, 생활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수도회적 삶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들은 공동 소유, 공동체에 속해 있는 기간 동안의 독신주의, 통일된 복장, 집합과 교육의 장소로서 본부가 사용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이 이것 자체로 종교적 가치로 당연시되지 않았다. 이 요소들은 기능을 위한 근거로 이해되어 주어진 과제를 위한 도움으로 생각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자 됨과 그를 위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매이며 또 자매들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봉사자들."

하지만 어떤 일에든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는 종교적 자세를 기초로 한다는 것은 아주 강조되었다. 이는 매일의 성경읽기, 침묵기도, 영적 성찰 등이었고, 강조 이유는 이 구제 활동을 하는 자매들이 "주의계집 종"(눅 1: 9)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톨릭적인 수도회의 이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강조했다. 하지만 그들은 맡은 과제들이나 봉사와 공동생활 형태의 동기가 종교적이라는데서 동일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같아지게 되었다.

프랑스 목사였던 베르메일(Vermeil, 1799-1864)은 파리 될리 구제단의 공동 설립자로서 개신교에다 여자들을 위한 "수도회"를 설립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가 세운 공동체를 개신교 교회 안에 수도회 사상이 새로이 소생한 것으로 자리매김 하도록 했다.

사회 활동 업무를 가진 이 공동체가 물론 기독교 수도원의 처음 시작점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도원이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소홀히 했던 적은 없었다.

계몽주의가 수도원에게 강력하게 요구했던 항목인 인간을 위해서 유용성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라는 요구가 19세기에 공동체가 새롭게 설립되는 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런 면에서 이해 가능하다. 물론 새롭게 세워진 수도회들 모두가 첫번째 목적으로 내세운 것이 전통적인 목적인 "자기 구원"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목적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봉사였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금욕, 공동 기도, 또 개인 경건의 자리를 영혼을 돌보는 일과 사회적 영역의 일이 대신하게 되었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수도회는 교회와 사회에서 유용한 존재였고, 더욱이 존경받는 활동 단체 였다.

19세기 전반에 새로운 수도회와 수도 단체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존경을 받으며 사회 활동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동안에, 옛날의 고전적 수도원들 역시 천천히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가 있었다. 새롭게 설립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인 젊은 신부였던 프로스퍼 루이스 파스칼 구에랑(Proster Louis Pascal Gueranger, 1805-1875)이 1832년에 옛날 마우린 수도회인 솔레스메 수도회를 소유하게 되었다. 일 년후에 그는 새로운 수도원 공동체를 설립하고자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여기서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도원적 삶에 대해서 경험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설립자 구에랑은 단지 공부하는 것과 옛날 베네딕트 수도원이 가졌던 과거의 영광에 심취해서 이것을 근거로 수도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로마(교황)의 축복(승인)을 얻어냈다. 이 단체 솔레스메는 수도원이 되었고, 동시에 프랑스 베네딕트 수도회의 모 수도원이 되었다. 구에랑이 원장이 되었다.

새 원장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마우린 수도회의 전통을 따를 것을 분명히 했지만, 규칙에다 원래의 수도원이 가진 이상적 제도를 본받아 모든 수도회가 자율적으로 원장을 선출하고 선출된 원장은 종신토록 원장의 직을 수행한다고 바꿔놓았다. 그는 프랑스에 빠른 속도로 수도원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연합체로 구성되기를 원했지만 이전에 연합체들이 가졌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거부했다. 또 그가 있는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어떤 외부 활동도 포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관상을 중시하는 수도 단체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원장 구에랑은 예배를 중시해서 수도사들에게 예배를 첫번째 과제로 제시했다. 그것은 베네딕트 규칙에 있는 요구로" 어떤 것도 예배보다 더 중요시 되어서는 안된다"(43, 3)는 내용인데, 이것이 새롭게 발견되고 재해석 된 것이다. 그래서 수도원의 일과 시간 중 일과예배(日課禮拜)가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곳에서 드려지는 축제적 분위기의 예배는 그 화려함에서 중세의 클루니 수도원의 장려한 예배를 회상시켜 주었다. 또한 수도사의 학문적 연구도 역시 일정 부분 예배라고 이해되었다. 이렇게 해서 솔레스메에서 갱신해서 시작한 성가합창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가합창에 다시 주목하고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널리 퍼져 나갔다.

이 수도회의 설립자였던 원장 자신도 예배의 역사나 예배해석에 대한 사역을 함으로써 예배에 관한 것을 사회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고, 또한 자신이 속한 수도원에서는 세상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가 예배학적 갱신이 필요하다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 결과 구에랑은 그의 수도원과 수도회에서 새로운 베네딕트 예배 모범을 만들어 냈다. 이는 삶의 모습에서 예배를 최고 가치로 놓고 사는 모습이 바로 수도원에서의 삶의 형태라고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수도원 삶과 예배를 서로 연결시킨 것인데, 이는 또한 예배에다 어떤 귀족적 성향을 심어 줌으로써 예배를 엄격하게 정형화된 생활 모습으로 이해하게 했다.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나중에는 특별하다고 할 만큼 훌륭히 발전한 이러한 수도회 외에도 1850년에 두번째의 베네딕트 계통의 수도회가 프랑스에 세워졌다. 이 경우 역시 일반성직자가 스스로 전승되어 오던 수도원식 삶의 형태를 찾아낸 경우이다. 쟝 밥티스트 무어드(Jean Baptist Muard, 1809-1854)가 그 사람으로,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엄격함과 사도를 따르는 활동을 서로 접목시킨 형태의 성직자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었다. 이 "설교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사"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노력의 결과로 이탈리아의 수비아코 수도회에 소속한 베네딕트 수도원 삐에르 크비 비레(Pierre-qui-vire)가 세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수도원은 프랑스에 독자적인 지역 수도회를 세움으로써 프랑스 안에 독자적 지역 수도회를 형성했다.

속세화의 흐름 속에서 대형 수도원은 하나도 살아 남지못했던 독일에서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재기가 바이에른에서 시작되었다.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1824-1848)는 1830년에 바이에른 하부 지역에 있던 옛 수도원인 메텐 수도원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차츰 이 지역의 베네딕트 수도회들이 재기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 수도회 소속 수도원들은 수도원식의 삶에 활동적인 학교 사역과 목회 사역을 결합시켰다. 1847에는 메텐 수도원 출신의 보니파츠 빔머(P. Bonifaz wimmer)가 이러한 수도원 활동을 미국으로 가져감으로써 이 바이에른 베네딕트 수도원 활동이 미국에 이식되어 특별히 활발하게 활동했던 미국 베네딕트 수도회의 활동 계기를 마련했다.

솔레스메를 모범으로 하는 베네딕트 식의 관상 수도원이 1863년 호헨촐러른 지방 보이론에 설립됨으로써 시작점을 마련했다. 설립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기독교-게르만적인 중세에 대해 낭만적 예찬을 특징으로 하던 본 지방의 신학자들이었다.

처음 설립시에 분명하지 않던 이념 즉 독일 피난처의 제왕이나 "성령 수도원" 식의 신학적으로 동일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라는 정도의 설립 이념이던 것이, 볼터형제(파터 마우루스와 파터 플라치두스)가 로마식의 베네딕트 수도원인 성 바오로 수도원에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이념이 정형화 되었다.

수도회가 호헨촐러른의 여자 영주인 카테린과 만나면서 결과적으로 보이론에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수도원식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는 데에는 구에랑의 규칙 해석을 모범으로 삼았다. 옛 독일 수도원인 부르스펠트 수도회와 슈바빙의 수도원이 서로 정신적으로 연결되어서 동일한 성향을 가졌다. 이런 연결은 보이렌 지방에 보이렌 특유의 독자적 베네딕트 수도원 형태를 만들어 냈다. 특징은 장려한 예배와 문화 활동, 세부적인 것까지 상세히 규칙된 삶의 모습인 중세의 봉건주의적 전통을 계속 이어 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수도원은 스스로 미래에 대한 희망찬 기대를 열어 주는 새로운 수도회의 시작점이라고 인식했다. 이것이 자라서 제대로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이를 통해서 곧 이어 베네딕트 수도회의 국제적 공동체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아주 성공적으로 활동을 함으로써 수십 년 만에 영향력 있는 수도원으로 자라서 베네딕트 수도원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수도원들을 폐쇄해 버리고 수도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계속되었던 유럽 국가들의 지속적인 수도원에 적대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또 수도원을 새로 건립하는데 특별히 어려움을 안건 주었던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세기는 가톨릭의 수도회들이 성장했던 시기로 보는 것이 옳다. 독일 수도원들을 본다면 문화 투쟁이 수도원에 대한 법을 제정함으로써 수도원들이 희망찬 새로운 시작을 한다거나 폭넓은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 당시에 수도원에서 쫓겨난 수도사들이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활동 가능성을 찾고자 시도하는 노력들이 자주 있었는데, 이 노력의 결과로 북아메리카 교회 안에도 수도원과 수도회 모임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문화 투쟁에서 제정된 법률이 별로 영향을 못 미치게 되자 독일 지역에서 수도회적 삶이 파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해물이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독일 제국의 정부가 식민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19세기 마지막 십 년 동안에 있었던 수도회의 왕성한 선교 활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식민지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이는 외국의 선교 공동체들에게 독일의 경계도 허물 수 있도록 했고, 여러 종류의 수도회들이 독일 지역에 지역 수도회를 세우고, 목회 활동과 구제 사업 및 교육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당시 열정적 선교의 바람을 타고 독일에서 선교 수도회인 성 오틸리엔 베네딕트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보이렌 수도원 출신인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1844-1927)으로, 이 당시의 시대 흐름인 선교 열정에 영향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중세초 선교활동에서 선교의 모범을 발견했고, 이 베네딕트 식의 삶과 선교 사역을 서로 결합시켜 베네딕트식의 선교를 다시 살려보고자 했다.

이 계획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빗 독일 땅이었던 독일-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실현되었다. 그 결과 또한 아주 성공적이어서 다른 선교 지역에까지 이 방법이 전파되 었다.

19세기에 수도원과 수도회 모임들이 새롭게 강화되어 나타난 것은 전체 교회사에서 유일한 과정이라고 해야 한다. 옛 수도원들이 이 시대에 다시 존경받는 기관으로 주목 받을 만한 생활 능력과 활동을 재발견해 냈다. 이 새로운 공동체들에서는 수도사들이 결속을 강화했는데, 각 공동체가 가진 생활양식은 서로 꽤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어쨌든 새로이 시작해서 모습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생겨남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러한 칭송을 반감시킨다. 이들이 새롭게 세워질 때의 실제에서는 도처에서 쓸데없는 싸움들이 있었고, 또 사람과 물질이 부족한 현실은 설립자들에게 거의 절망적인 어려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수도원이든 종단 수도회든 다시 세워지는 모든 모임들이 상식의 정도를 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교활하게 위장된 영업 활동, 가지고 있는 힘들을 무조건적으로 쏟아 붓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옛것의 복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방 분위기는 옛 수도원의 생활 방식이 분명해 보이는 생활 방식에는 무조건 고착하는 것으로 옛날의 수도원 제도의 기본 흐름을-이는 수도원적이요 절대적인 지도 원칙이 된다-굳게 붙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과거와 같아지는 노력은 수도 공동체들이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가는 데서는 오히려 선택의 폭을 좁게 해서원칙으로는 과거보다도 더 엄격한 금욕이 요구되고 실제상으로는 약화된 금욕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수도원 안에서 사는 삶에서의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한 사랑, 즉 가난, 공동생활, 세상과의 관계, 경건을 중시하라는 가르침은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이는 수도원 밖에서 사역하는 대부분의 수도사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일정 부분 서로 조화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미 사회 구제 활동을 했다거나 또는 목회 사역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에서 이전의 수도원 전통의 맥과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에 주어진 것 이상을 했던 것이다.

이 사소한 것은 그런데 또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수도회는 다른 수도원들과 달리 고유의 특징, 자신들만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공표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수도원 밖에서의 사역은 많은 수도원들이 다 동일했다. 하지만 이 사역에서 역시 다른 수도사들의 활동과 다른 특징을 나타내 주는 몇몇 수도회가 있었다. 예를 든다면 프랑스 추기경이었던 라비게리(Lavigerie)가 1876년 세운 성직자 공동체인 횐옷의 성직자들은 아프리카 선교를 유일한 사역 목적으로 세워진 수도회였으며, 자신 외에도 동일한 목적을 가진 자매 수도원과 서로 연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들의 활동 범위를 엄격하게 정해 놓는 것을 수도회를 구별 짓는 특징적 요소로 설명하는 것은 전반적인 차이를 설명하는데 적절치 못하다. 차이를 설명할 때 흔히 거론된 것이 금욕에 대한 요구로서 기본적으로 요청되던 것들이 원래의 모습과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이는 특별히 옷차림에 관한 규칙(특히 많은 여성 수도회들에서 자주 나타났다)과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틀인 경건에 관한 내용에서 그랬다.

원래 베네딕트 규칙은 단순히 "하나님을 추구함"이 공동체의 기본 요소이자 수도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내용이어서 이것이 요구되었으며, 아씨치의 프란시스는 그의 형제들에게 소박하고 단순하게 "복음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무 사항으로 가르쳤는데, 새로이 만들어진 공동체들은 이것을 협소하게 고정시켜 버린 것이었다. 19세기의 경건은 이러한 시대상 안에 투영되어 있다.

19세기의 경건은 그리스도의 비밀과 성자숭배 또는 기독교적인 실제의 삶 등의 부차적 요소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었다. 새로운 수도원 공동체들은 이러한 기독교 경건의 부분적 시각을 받아들여 자신들 고유의 것으로 하고, 이것으로 자신들의 독자성을 나타내는 특징으로 합법화했던 것이다.

하나의 예만 들어 본다 하더라도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있던 "예수의 마음 숭모회"를 들 수 있는데, 이 이상(理想)은 몇몇 수도원들에서 동일하게 몰두했던 이상들이다: "지고의 성스러운 예수의 마음으로 하는 선교회"(이는 1854년 슈발리에의 아수둔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지고의 성스러운 예수의 마음을 가진 아들들"(1866년 이탈리아 사람 콤보니가 세웠고 여기서 20세기초에 "지고의 성스러운 예수의 마음을 가진 아들들의 선교회"가 분리되어 나왔다), "지고의 예수의 마음을 가진 신부회"(1888년 레온 데혼이 사랑과 속죄의 정신으로 예수의 마음을 기리는 경건예배로 시작해서 널리 퍼지게 됨),

여기는 동일선상에 있는 자매 수도원들이 덧붙여 열거될 수 있다. 이들 역시 동일한 경건의 배경을 가지고 그들의 사역을 해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들로 구성된 예수의 마음 수도회들이 있었고 여기에 속한다. 이들에게서도 이전 수도원에서의 삶의 형태와 새로운 경건의 모습을 결합시킨 새로운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 성심의 어거스틴 자매 수도회", "예수 성심의 칼멜 자매 수도회" 둥. 마리아 숭배가 부상하면서(1854년 동정녀 잉태의 교리가 나옴) 많은 남성, 여성 수도회들이 마리아 영성을 그들의 근거로 삼았다.

이 시대를 나타내주는 특징인 "특별한 경건"이라고 이름 붙여진 경건의 흐름은 수도회들의 실체적 모습에 많은 흔적을 남겨 주었다. 이것은 단지 숭모한다거나 경건 예배의 형태로 특징 지워지는 협소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새로운 공동체 개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건의 흐름이 어디서 모습을 나타내면 곧 이런 흐름의 분위기를 형성해주고 추종자들이 모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곧이어 하나의 독자적 수도회가 만들어지고 이 수도회는 어떤 특정한 경건의 모습에 대한 대변자이자 선포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수도회 연합체들과 모임 단체들은 그들이 "교회적이되 무정부 상태"인 모습을 가지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독자성을 보여줄 수 있고 합법화할 수 있는 어떤 "독자적인 것"을 찾아냈다. 그 외에도 이 공동체들의 활동과 조직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 많았고, 또 여러 종류의 목회 사역이나 사회 활동에서 수도사들이 일하는 방식은 같은 경우가 많았다.

옛날 수도원 몇몇은 세기말에 교황청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단일 수도원이 되기도 했다. 이는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이제 다시 재건되어 힘을 되찾고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란시스 수도회들을 단일화된 통일체로 다시 묶었다. 프란시스 수도회에는 이 당시에 세 종류의 개혁 모임들이 생겨나 따로따로 활동함으로써 거의 독자적인 수도회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독자적 수도회를 결성하게 할 만큼 강했던 이전의 열정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국가적 배경, 자신들만의 과거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 또한 수도 규약에 나타난 사소한 것들을 다르게 정해 놓음으로써 나타나는 외부적인 차이점은 이들의 분리를 더욱 첨예하게 했지만, 실상 이런 분리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 프란시스 수도원의 감찰관 출신이기도 한 레오 교황은 네 가지나 되는 수도원 갈래들을 연합하도록 일을 추진했다. 이런 교황의 의도는 여러 갈래의 수도원들에 속한 수도사들 다수의 의견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895년의 총회는 교황의 압력하에 만들어진 단일화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마침내 1897년에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작은 형제단"(ordo fratrum minorum)은 이렇게 해서 총무원장을 정점으로 한 완전한 단일 조직을 재구축할 수 있었다.

이 통합의 결과 교황의 임명이긴 하지만 독일인으로 풀다 프란시스 지방회 출신인 알로이시우스 라우어가 수도원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장 자리에 올랐다. 이제 중세에 인적 단일연합으로 만들어졌던 프란시스단이 원래의 조직과 규약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 교황에 의해 주도되었던 통합 노력은 독자적인 생활공간을 갖고 독립적 대수도원이나 수도회 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전통적 수도원들에게는 더 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중앙집권적으로 로마가 행정을 총괄하는 데에 전혀 익숙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1857년 로마의 상 안젤모에다 학습소를 다시 개교함으로써 연합을 위한 첫걸음을 만들었다. 이 학습소에는 어떤 수도원이든 수도연합체든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이기만 하면 모든 수도사를 받게 되어 있었다. 여러 다른 수도회에 속한 원장들이 이 연합 계획을 찬동했고 발전시켰다. 이들은 이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더구나 그들 수도원이 처음 모이고 시작된 그 땅에서 계승 발전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써 수도회가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연합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음 해에 학습소를 확장하는 것과 맞물려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교황 레오 13세는 국제적인 베네딕트 수도원 하나에서 이 베네딕트 수도원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다시 결합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알게 되었다.

교황이 보기에 동방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는 베네딕트 수도사들(베네딕트 수도사들은 파에 따라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다. 검은 옷은 가장 전통적인 베네딕트 수도사의 복장이다-역자 주)을 통해서만 다시 합쳐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교황의 이 계획은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두를 연합해서 로마가 관장하는 학습소를 세우고, 모든 베네딕트 수도사들을 법적으로 통합 관리하는 교황청의 관심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1897년 마침내 아벤틴에 새로운 학습소가 문을 열었고, 5년 후에 "베네딕트 수도사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전체 수도회를 통합한 통일체가 만들어졌다. 한 명의 수석 원장이 수도회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수도회와 수도원들이 갖고 있던 독립성을 계속 보장되었다.

시토 수도회에는 이 중앙 집권적 단일화가 절반만 이루어졌다. 이 수도회 역시 여러 분파로 나눠져 있었는데, 각 분파마다 옛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모든 분파는 제각기의 생활 모습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연합에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두 개의 수도회로 나눠져서 서로 얽혀 있던 프랑스의 수도원들이 하나의 수도회로 연합하는 것이었다.

로마 교황청에서 나타났던 시도뿐 아니라 수도회 내부적으로도 나타났던 시도인 연합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1891년에 드디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연합은 개혁 분위기의 시토 수도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과가 레오 13세의 주도하에 한쪽 분파에 속한 수도원들을 하나로 묶어 독자적인 수도회 가족으로 연합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 시토 수도회의 대 전통은 각각의 총무원장을 가진 두 개의 독자적인 수도회에서 관리했고, 이들을 통하여 계승되었다. 이들이 "현실 적응파" 시토회(sacer ordo cisterciensium)와 "엄수파" 시토회(ordo cisterciensium strictioris observantae ; 트랄파)이다.

세속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함으로써 다시금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보이면서 생존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성직자 수도회 역시 이러한 연합 노력에 관심을 보였다. 프레몽뜨레 소속 수도사들이 1883년에 다시 총무원장 제도를 도입해서 다시 하나로 연합된 이 수도회를 대표하도록 했다.

어거스틴파 성직자 수도회는 연합 운동에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초기에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각 분파들은 존재 자체가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고 고립되었었다. 1959년에 가서야 4개의 어거스틴파 성직자 수도회가 하나의 연합체로 묶여질 수 있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교서 「카리타스 유니타스」(Caritas Unitas 자비의 연합)는 이 "사랑의 연합" 원칙을 천명해 주고 있는데, 이 연합체는 우두머리를 6년 임기로 선출된 원장이 맡지만, 이 또한 개개의 수도회들이 갖는 독자적 특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특징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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