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근세 및 현대의 수도원

 

 

 

 

수도원의 역사에서 근세 시대의 특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아주 분명한 특징은 강화와 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롭게 갱신된 배후에는 1900년경의 새로운 도약이 있다. 이때의 도약은 오래 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즉 이 시작의 주창자들과 주도 세력은 이 도약이 시작된 시대에는 이 세상에 없었다. 개개의 수도원 공동체들은 이 때 그들의 새로운 영웅적 시작을 유산으로 계승하려는 노력이 최우선의 과제로 등장해 있었다.

이런 생각은 다수가 모여 사는 모임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그들 공동체의 고유한 자의식과 존재 의미를 강화시켰다. 이는 자신들의 고유한 사역과 원래 목적에 대한 책임의식을 고취시켰고 이것을 보존하고 계속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도록 했다. 이는 후진 양성을 일으키게 했다.

보통 수도원은 일반 신앙인들에게 수도원을 향한 길을 개방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전통적인 수도사의 일을 그대로 해낼 수 있는 힘인 것이다. 이때도 이런 노력이 있어서 1900년 이후 수도회원의 숫자가 꾸준히 증가했고 1965년에는 최고 숫자가 336,000명에까지 이르렀으나 그 이후는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수도원들이 급작스럽게 몰락하는 경우는 몇 안되는 예외-즉 스페인 시민 전쟁시에 수도사에 대한 박해와 수도원 폐기나 독일에서 국가 사회주의 시대에 있었던 박해와 폐기운동 같은-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우리 시대의 중반 즉 1950년대를 넘어 오늘까지도 수도원과 수도회는 조용하게 특별한 문제없이 가톨릭교회의 한 기관으로서의 자기 이해를 갖고 지내고 있다. 이들 수도회공동체들이 했던 일 중 병자를 돌보는 사회-자선의 사역과 학교교육과 어린이 양육에서 보여준 위대한 활동들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봉사를 실증해 보여준 훌륭한 표시로 나타났다.

양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이들 수도회의 형제와 자매들이 보여준 헌신적 사역은 국가를 초월해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전세계를 향한 선교는 가끔씩은 국가를 등에 업고 하기도 했지만, 독일은 1918년까지, 다른 나라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그러나 현재는 선교를 목적으로 한 수도회들은-실제상으로는 가톨릭의 선교는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수도사들의 몫이다-제3세계 민중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그들의 발전을 돕는 역할을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19세기에 시작된 전통의 고수와 원래 목적에 대한 계속적 확장의 분위기는 제2차 바티칸 회의 시대까지 시대 흐름을 주도했다. 개개의 수도회들에게는 이 시대까지 특별한 변화나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양차 대전이라는 세상의 정치적 사건인 재난은 수도원과 수도회에도 불어 닥쳤고, 이는 소요와 불안정, 또 위험을 수반했으며 이것의 영향은 수도원의 쇠퇴로 나타났다.

정치나 국가의 목적에 따른 선교 상황은 여러 선교국들에서 (새로운) 선교의 과제를 갖도록 했다. 모스크바의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던 동유럽은 모스크바 지역에서 수도원과 수도회 연합을 만들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수도회 지부들이 지하로 숨어들거나 또는 서방 세계에서는 새로운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몇몇의 새로운 수도원 공동체-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에서-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그들의 고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현제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수도원들에게는 시험이었고, 큰 타격이었으며 이쪽저쪽을 막론하고 모든 수도원에게 커다란 재난이었다. 그러나 수도사의 삶과 수도회의 본질적 모습은 교회 내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도처에서 그렇게 평가 받았다.

이 시대의 수도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1917년에 새로운 교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이다(Codex juris Canonici). 이전에도 물론 수도회의 삶의 형태가 교회법에 포함되었고, 그래서 수도원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 들어 있어서 어떤 수도회가 공적으로, 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해당 주교와 교황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렇게 허락을 받아야만 공식적인 수도 공동체에 속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새로 생긴 수많은 수도회들은 이기존의 법규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회들은 로마가 그들의 수도회를 공인해 주기를 요청했고 이런 요청이 빈번해지자 교황청은 1825년 교황 레오 12세 때 소위 "데크레툼 라우디스"(decretum laudis; 특별법)을 제정하게 되었고, 이것이 근거가 되어 다음 시대에 교황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첫단계가 되었다.

새로 제정된 법전에는 설립 절차에 관해 명확하게 규정해 놓았다.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당 교구의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주교가 허락한 다음에 교황에게 보고하고 동의를 받는 것이 의무 사항으로 해서 수도회들이 주교의 관할하에 있음을 명시해 놓았다(법전 492조).

어떤 수도회가 교황의 승인을 받으려면 우선 예의 "데크레툼 라우디스"가 주어져서 가승인 상태에 있게 되고, 다음에 두 단계의 시험 기간을 거쳐 "협정 승인 칙령"이 주어짐으로써 마침내 법적으로 교황에게 속한 수도회가 되었다.

이 법전은 각 수도원의 일상적 요소인 새로운 수도사의입회, 시험, 교육에 관한 내용, 수도회로부터의 탈퇴나 제명에 관해서(법전 646-672) 자세하게 규정해 놓고 있다(법전539-591). 이 법전에는 또한 상급 지도자들에 관한 내용도 정해 놓아서 이들의 선출, 재임 기간, 지도를 규정하고 있다(499-517). 법전의 487-881까지에는 개개의 수도회들이 독자적 규칙을 제정할 수 있기 위한 모법(母法)을 규정해 놓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1917년 이후에는 개개의 수도회가 갖는 자신들만의 독자적 특별법도 일반 교회법에 맞추어야 했고, 이 결과 수많은 독자적 수도원 규칙이 생겨나게 된다.

수도원에 관한 모든 문제에서 최고의 상급 기관인 교황청은 수도회의 최고 기관의 역할을 했던 셈인데, 이는 1586년부터 그렇게 해 왔고 1908년에 교황 피우스 10세 때에 재차 새로이 개편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교회의 법전은 한편으로 수도회가 본질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도 분명하게 규정해 주었다. 수도회의 모습은 어떻든 계속적으로 공동의 삶을 살되 그 근거가 신앙이어야 하며, 기도는 일상적인 계명 외에도 청빈, 순결, 순종을 복음서의 요청으로 받아들여 이를 그들의 계명으로 서원(誓願)하고, 이 서원에 매이는 것을 말한다(487조)고 규정해 놓았던 것이다.

이런 정의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져 있던 것과 현재의 모습들을 그대로 옳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수도회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얼마 안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최근에 수도원의 역사에서 특별한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움직임이란 20세기에 나타난 세속 수도원을 말한다. 이 기관들은 원래의 수도회들이 하던 활동 영역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전혀 새로운 모습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기관에 속한 사람들은 전통적인 수도회의 남자 수도사나 여자 수도사들이 가졌던 자기 이해와는 달리 자신들을 "새로운 종류의 급진적 소명"을 받은 자들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기관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설립되면서도 그 속에서 요약되는 교회적 이해는 다음과 같다.

 

"세속 수도회들은 사제와 평신도의 동맹체로서 여기에 속한 회원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에 이르기 위해서, 또 이들이 가진 사도적 사역의 온전히 이루고자 이 세상 속에서 복음의 가르침을 고백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의는 새로 생긴 공동체들이 자신들 스스로를 "세상적 공동체" 모임으로 이해하면서 이 모습으로 수도원 역사에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기관들에 속해있는 회원들이 가진 목적은 (전통적 수도사들처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즉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옛 수도회나 새로운 수도회나 일치하는 목적이다. 수도회의 목적은 어쨌든 사도적 사역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도적 사역은 지금까지는 목회나 사회 활동 또는 교육 활동이었고, 또한 이런 활동이 행해질 때 수도회에서 독자적으로 하거나 아니면 교회적으로 행해졌었다. 그런데 새로 생겨난 사회 기관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 있다. 물론 이들이 독자적으로 한다 하더라도 이들의 활동 역시 이전 수도회들이 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선 독자적인 자신들의 기관을 아예 갖지 않고 있다. 즉 지금까지는 어떤 공동체에서 병원을 세우고 거기서 일하거나 또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학교를 세우고 활동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들은 그런 활동 기관을 전혀 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회원들을 다른 조직이 가진 사회 기관들로 일하러 보낸다.

이들은 또한 사도적 활동의 범위를 모든 직업까지로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속한 회원들은 세상의 직업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자신들이 배운 직업 활동을 하는데, 자신들의 조직이나 교회와 관계없는 장소와 환경도 가리지 않는다.

이런 다양한 일들에 뛰어들게 한 것은 이 세속 수도원 공동체의 회원들이 이 일을 복음에서 명령하고 있는 그들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한해서는 모든 수도회 소속 사람들이 동일하다. 즉 이들은 수도원적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다른 요소인 함께 공동생활을 계속하는 것, 즉 함께 하는 삶은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 수도회에 속한 수도사들은 혼자, 또 경제적으로도 자기 문제는 자기가 책임지며 어디서든 살아간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형태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어떤 모습은 혼자 살아서 어떤 연합체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도 하며, 혹시 외부적 모습은 전혀 수도원적 색채를 갖지 않고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가 있기도 하고, 또 더 큰 모임들이 모여서 함께 사는 대형화된 공동체도 있다.

복장에 관해서도 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많은 경우는 정해진 복장이 아예 없고, 복장을 가진 수도회들도 옷을 그냥 "평상복" 정도로 알고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생활모습이나 어떤 신분에 있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표시 등은 이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역사상의 수도회들과 같은 맥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이들 역시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과거 중세에 발전했던 형태인 중세적 탁발 수도회의 유형인 묶여 있지 않은 인적 연합의 형태로서의 탁발 수도회의 모습과 또 이를 근거로 해서 예수회에서 만들어진 모든 수도회적인 것을 철저히 포기하는 삶에서 경험되어진 것들,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진 수도회들에서 다양하게 모방되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것들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세속 수도회들은 물론 역사상 그들의 선구자를 갖고 있다. 선구적 역할을 한 공동체들은 예수회가 해체된 후 옛 예수회 소속 수도사들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이다. 예수회식의 삶, 즉 수도사로서의 삶은 계속되어야 했지만 외부적으로 수도회로 인식될 수 있다거나 공공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철저히 숨기고 폐쇄적인 공동체로 유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때 이미 나타났던 것처럼 회원들이 엄격한 자의식과 개인적 삶에서 엄격한 규범을 따르는데 대해 활발한 활동을 보임으로써 세상을 향해 열린 태도로 서로 제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세속 수도회에 그대로 재현된 경우인 것이다. 공동체 소속은 정신적으로 연결되고 철저한 시험, 후보자들의 선정, 독립적으로 사는 모든 회원들에 대한 꼼꼼한 감시, 상급자들에게 철저한 보고 등의 요소는 엄격히 규칙에 따르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바로 전통적인 수도사의 삶의 모습이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게 하고 있다.

"세속 수도원"이 옛 수도원들과 같아지게 된 것에 대해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세속 수도원이 생겨나는데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이 19세기에 생겨나서 기존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했던 수도원들이다. 그런 이유로 세속 수도원의 설립자 중 대다수가 이 새로운 수도원 출신들이다.

그런데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수도원들은 세상 속에서 사역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고립되어 있고, 옛 수도원 전통에만 단편적으로 고착되어 있었으므로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왜냐하면 현대 문명이란 삶을 더욱 편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 즉 위생 문제와 관련해서나 또는 정보매체 등을 만들어 냈고, 이런 문명의 요소들이 수도원 안에까지 파급되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이런 문명적 요소에 대해 억지로 멀리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또 양심에 부담을 느끼는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정도의 인정만 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사도적 활동을 세상 속에서, 즉 세상 내적 활동으로 하게 함으로써 더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길을 용감하게 개척해 낸 것이 바로 세속 수도원이다. 인들은 처음부터 아예 자신들의 삶이 세상 속에 주어진 것으로 이해했다. 즉 자신들의 삶이 세상에서 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철저하게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도의 사역이라는 것이 수도원이라는 "인공적 광야"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생활환경을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 영역에서 그들의 활동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단체에 속해서 특별한 사람들로 인정받고, 어떤 특별한 계층의 신분이 공공적으로 확인되는 곳에 속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냄이 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 속에서, 직업 활동을 잘 해냄으로써, 그리고 준비된 자세로 직업에 임함으로써 이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일상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이 이들에게도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똑같이 하라는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속 수도회의 회원들은 세상에 속한 막연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이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인 독신 생활은 그들이 이미 세상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재정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것은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수도사라는 신분에 있음을 분명히 해주며, 그러므로 그들은 상급자의 요구에 복종해야 하며, 수도회가 명한 일을 해야 하는 것 등은 그들이 속해 있는 세상의 사람들과 완전히 동일시된다거나 동화되어 세상의 일원으로 되는 것은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 수도원의 사람들 역시 수도사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또한 설립할 때 보여 주었던 열정 이후에 세속기관들이 "수도원화" 되어 갔다는 것은 이들이 수도원에 속해야 한다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교회의 판단 역시 이들을 수도원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이 세속 수도원들이 지원 세력을 얻지 못했으나 교황 피우스 12세(Pius 12, 1939-1958) 하에 특별법으로 이들 또한 기존의 수도원에 준하는 권리를 갖는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들 세속 수도회도 주교와 교황의 관할에 들어간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이들이 전통적인 수도원이나 수도회와 동일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규칙과 조직의 관점에서 세속 수도회를 보면, 이것은 장소를 근거로 하지 않은 인적 결합 단체가 더욱 발전한 형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장소와 관련 없이 만들어진 단체의 사람들이 사도적 소명을 수행하는 것을 살펴보면 최소한 17세기 때부터 나타났던 수도회들과 연관시켜 본다 하더라도 이 세속 수도회가 이들 선구자들에게서 배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수도회를 세울 때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특정한 분야에 사역을 고정시키는 것은 없어져버렸다. 목적의 방향을 "일상적 삶을 통한 증인의 역할",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시킴", "세상을 위한 봉사" 등 아예 폭넓게 잡았다. 세상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봉사를 통해서 이들은 이전의 전통적 수도원들, 즉 자신들의 과제 영역을 명확하게 해 놓지 않고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만 알고 있고, 그래서 모든 과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았던 수도회들과 같은 맥에 서 있다. 영적, 금욕적 기본 배경을 본다면 세속 수도원 모두를 하나의 틀 속에 있는 것으로 쉽게 분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제는 기독교적 경건의 어떤 특정한 입장을 선택해서 이것에 몰두하는 것은 더 이상나타나지 않는다. 일단의 공동체들에게는 목적이 소박함과 가난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가 살았던 스스로를 감추고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프랑스인으로 아프리카 선교사이자 참회자의 삶을 살았던 샤를르 드 푸꼬(Charles de Foucauld, 1856-1916)의 삶이 본보기가 되었다. 이 사람의 영향 하에 나타난 수도 공동체는 두 개인데, 하나는 "작은 형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자매단"이었다. 이들 둘은 다같이 이 프랑스인의 완고하고도 매력적인 인간적 면모가 남긴 유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영향은 이 두 수도회에만 한정되어 머무르지 알고 많은 세속 수도원들에게 역시 특별한 영적 고유 모델과 삶의 모습에 본보기 역할을 했다.

세속 수도회의 또 다른 큰 무리는 마리아를 숭모하는 영성을 그들의 삶의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들 중 많은 기관들이 여자 수도 공동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은 이들은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음에도 인류 구원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에 선례를 남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세속 수도회들은 이전의 수도원들이 가졌던 영성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데, 이들은 베네딕트적 기본 수도원생활 모습과 프란시스와 깔멜 수도회의 경건을 받고 있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자신들을 외부로드러내던가 밖으로 알리는 것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의 세속 수도회인 오푸스 데이(Opus Dei) 수도회의 설립자는 여기에 속한 수도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당신은 순교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내가 당신을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순교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자신을 사도로 드리되 자신을 사도라 하지 말아라. 선교사이되 자신을 선교사라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사람이되 세상 사람이어라: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라.

 

지난 10여 년 간 얼마나 많은 세속 수도회가 새로 생겨났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1974년에만 약 27개의 세속수도회가 교황이 주는 (수도회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10년전에는 주교가 (수도회적) 기관으로 인정했던 숫자가 60개를 넘었다.

이 시기에 공적으로 인정받지 않고 활동하던 숫자가 거의 200여 개였다.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다. 설립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데다 설립 후에도 이들이 알려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세워진다 하더라도 설립 초기의 단계를 넘어서 크게 발전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 이 세속 수도회는 회원들 또한 여러 수도회들, 사제 수도회, 남자 수도회, 여자 수도회들 안에 흩어져 있다.

사제 수도회에 속한 것으로 독일에서 특별히 알려져 있는 수도회는 "아름다운 곳의 수도사"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교구(라인 강 근교의 발렌더 지역이 중심지)의 사제들로 이루어진 마리아 숭모와 사도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독일 내에서 두번째에 속하는 수도회들이 "가톨릭 사도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곳인 마리아 형제단"과 벨기에 쁘레몽뜨레 수도사인 베렌프리드 반 스트라텐이 세운 "건축 수도회"이다.

세번째에 속하는 것은 독일 지역의 수도회들 중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들인데, 이것에 속한 수도원들로 이름이 "아름다운 곳의 마리아 자매들"(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회원 수는 약 2000명), "왕이신 그리스도의 자매들"(아우구스부르그의 마이팅겐 소재), 기독교적 교육 단체인 "헤게"(베스트팔렌의 바르부르그 소재), "거룩한 교회 안실레"(뮌헨 소재), 성 보니파티우스회(리페의 하이덴올덴도르프 소재), "베니로" 회 소속 자매들(베네딕트 수도원을 모체로 하고 있으며 뮌헨에 소재한다) 등 몇몇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외국에서 시작되어 독일로 유입되고, 독일에서 단체로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들도 있다.

최근의 가톨릭 수도회의 역사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면, 지금까지는 대표성 사상을 특징으로 하는, 즉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수도원의 특징이던 것이 새롭게 생겨났던 세속 수도회들에 의해 이 사상이 약화되어 갔는데 비해 복음교회 즉 개신교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갔다.

개신교에서 이때에 수많은 수도회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그들의 프로그램에 대표성 사상을 의도적으로 집어넣고 있다.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역시 많은 "세상적" 기관들을 설립되었으나 이들의 특징은 세상과의 단절을 철저히 포기하는 특징을 갖는 반면에, 복음교회들 중에는-물론 아주 미미한 숫자이긴 하지만-옛 수도원의 전통인 일상과 분리되고, 특징이 외부로 드러나는 형태를 따르기 원해서 복음교회들끼리 서로 연대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이런 모임들이 설립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베브라 근방 임하우젠 공동체는 제3제국 시대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여가 시간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독일 교회가 만든 기관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새로이 생긴 국가 경계가 이 기관의 근방에 만들어지는 바람에 이 기관은 난민들과 유랑민들을 받아들이고 구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이런 봉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남자들 몇몇이나 여자들 몇몇 이 조그만 소그룹으로 모여서 봉사 활동을 하다가 수도원과 비슷한 공동의 삶을 살면서 일하는 단체로 변모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공동의 삶을 살았다-하나님 찬양, 중보기도, 유치원과 농삿일을 통한 봉사가 이들의 삶이었다. 이곳은 교회적 삶의 영역을 더 확장하는 곳이었으며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을 필요한 장소에 배치하는 곳이었다."

 

"다름슈타트 에큐메니칼 마리아 자매회"의 시작은 제3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 처음에는 소녀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으로 시작된 모임이 함께 모여서 사는 공동생활 사상을 낳았다. 독일의 와해(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제3제국이 시작된 것을 의미: 역자 주)를 보고 나서 이 자매회의 초창기 멤버들이 이들의 "대모(代母)"였던 바실레아 슬링크와 마튀리아 마다우스에게로 모여들었다.

이 자매 공동체 회원들은 나치 정권이 행했던 공포 정치를 향해서 참회, 속죄, 중보 기도를 대답으로 내놓고자 노력했다. 이들에게는 사회 구제 활동이나 교리문답의 가르침은 2차적인 문제였다.

1951년 다름슈타트-에버슈타트의 자매 회원들은 독자적 수도원 건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이들은 건물로 보나 하루의 생활 일과를 보나 전통적 수도원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매 공동체는 외부 활동에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관상적 수도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자매회 소속 회원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에큐메니칼 자매 공동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도 장래를 향한 프로그램에 속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 활동의 과제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이 하나가 되는 데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에큐메니칼적 성향은 다른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회원들의 삶을 사는 정신이 에큐메니칼적이다. 그래서 이들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함께 모아진다-성경 말씀, 마리아를 숭모하는 경건, 프란시스적인 아무 염려도 하지 않는 생활 모습 등이 어떤 때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요소들과 함께 서로 합해져서 종합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수도원은 프랑스의 떼제에 원장 로제가 세운 떼제 수도원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립자는 1940년에 떼제에(이 장소는 수도원역사에서 빛나는 전통을 가진 클루니 수도원이 있는 곳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진 곳이다) 커다란 건물 하나를 구입했다. 그는 여기에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교회와 세상에서 함께 봉사" 하는 데에 몸바쳐 헌신하고자 하는 형제단을 건립하고자 했다.

이 계획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1945년 떼제에서 이것은 작은 모임으로 공동의 삶을 시작했다. 4년 후 최초로 모였던 형제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이를 위해 독신으로 살 것, 모든 소유는 공동으로 할 것, 공동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평생토록 지킬 것을 맹세했다. 원장 로제는 제네바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 이미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이 방면에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었던 사람으로 떼제에서 역시 공동의 삶을 주된 과제로 삼았다.

"꼼뮤노테"가 이 떼제 수도원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름을 이렇게 붙인 이후로 지금까지도 가톨릭 수도원들에서는 이 이름에 대해 기꺼워하고 동시에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떼제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립자는 이 공동체를 위해서 공동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1952/52년에 쓰여진 떼제 규칙이며, 그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복음적 기독교인들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이미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구속하는 규칙을 당연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형제들이여, 규칙에 눌려서 신음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뒤를 돌아보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두와 함께 다같이 주님의 말씀에 인도 받고 있으며 그래서 당신은 매일 매일 새로운 그리스도에게 영접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설립자 로제는 이 공동체의 기본 원칙과 규칙을 성경에서, 수도원 전통에서 취해 내고 있다. 베네딕트의 영향은 수도원을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칭하고 있는 데서 분명히 찾아 볼 수 있고,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이 떼제 수도원의 조상이라고 봐도 될 만큼이며, 샤를르 드 푸꼬 역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에큐메니칼적 사회 참여의 요소도 원칙과 규칙에 반영되어 있다.

이 떼제 공동체는 관상적 수도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수도원 하루 일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기도, 예배, 관상이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가톨릭 수도사들이 하는 공동 기도에서 본을 떠서 만든 이 수도원 고유의 기도 규칙서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데, 이 또한 가톨릭 수도원의 영향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수도사나, 온 세상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수도사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수도사들에게 보호를 받기 위한 첫번째 과제는 사적이든 공적이든 기도인 것은 분명하다. 설립자는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는 현실주의자이자 동시에 수도사들에게 기도조차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에게 어떤 날은 예배가 아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당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라.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에는 도달할 수 없는 요구에 대한 표현이며, 그러므로 출석 자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속에 어떤 확실한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도 당신 안에서 지금 현재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라."

 

그렇지만 기도와 관상이 수도회를 외부와 단절시킨다거나 스스로 폐쇄적으로 되어서도 안된다. 방문자로 와 있는 사람들 역시 예배를 위해 모여 있는 시간에는 지체없이 함께 모여 있는 형제들과 힘께 해야 한다. 수도원 바깥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열린 개방성이 이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 공동체의 특징이다.

 

"인간적인 것에 당신의 마음을 열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으로 도피하고 싶은 모든 헛된 욕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속한 시대를 향해 서라. 당신이 있는 이 순간의 조건에 순응하라."

 

로제는 또한 모든 인간적인 것에 마음을 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적 이웃 사랑의 필연적 완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특별히 두 가지 방향에서 보고 있다.

 

"재산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오 불의한 인간 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정의를 목말라 하는 사람 모두를 사랑하시오"

 

이 요구는 물론 형제들이 사회봉사를 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이 또한 특별히 제3세계 가톨릭 수도사들의 활동에서 영향받고 있는 면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의식과 동질 의식", 또한 이 요구는 이들 중 소 분회의 떼제의 형제단을 사회 재난의 발생한 곳으로 달려가도록 명령하고 있다.

 

"입으로는 이웃 사랑을 쉽게 외치면서 실제로는 관계없이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사이에서 쓸데없이 분쟁에 휩쓸리지 말라.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 되기 위해서 열정을 가져라."

 

이러한 호소는 떼제 회원들에게 설립자가 가진 에큐메니칼적 노력을 알게 하고, 그래서 떼제는 오늘날까지도 에큐메니칼적 노력의 진정한 본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수도회는 연결고리나 조직화가 약한 편이 아닌데도 규칙에 보면 제도적 장치나 조직의 면에는 별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현재는 이 수도회를 설립한 사람이 원장이기 때문에 원장이자 설립자인 그가 이 공동체의 정신적지주이고 그의 지도적 역할을 통해서 성장해 왔다. 후계 문제는 아무 것도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는 이 조직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봐야 할 것인가? 규칙은 단지 다음과 같이 정해놓고 있다:

 

"원장은 자신을 보좌하고 자신을 이어 계속성을 지켜 나갈 부원장을 두어야 한다."

 

이는 후계자를 잠정적으로 임명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이것은 이미 옛날 수도원 전통에 있었던 것이었으나 베네딕트 규칙이 워낙 큰 권위를 누리면서 이런 전통은 사라져 버리고 선거를 통해서 후계자를 결정하는 베네딕트식 방법이 주류가 되었다.

떼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수도원적 삶의 형태가 재발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떼제에서 만들어진 삶의 형태는 가톨릭의 수도회 공동체들에게도 새롭게 자각하도록 깨우쳐 주고 있는데, 하나는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목적을 다시 일깨워 주는 의미에서의 자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여 분격하는 입장도 있는데, 이들 입장 역시 도외시할 수 없는 하나의 자각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가톨릭 수도회 이념은, 수도원 역사에서 최소한 19세기의 수도원들이 가졌던 위치와 비교한다면, 지금 시대에, 즉 2차세계대전 후 수십년 동안에 성장과 확장의 마지막 국면을 맞고 있다.

19세기의 베네딕트 수도사들과 시토 수도사들은 피 선교국가들에서 토착적인 수도원을 활성화시키는 노력을 함으로써 조력자의 입장에서 하는 단순한 형태의 선교를 시도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엄격한 관상 수도원인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미국에서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확장을 경험했다.

켄터키 주의 겟세마네 수도회(Gethsemani)의 수도사이며 잘 알려진 문필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 수도회의 침묵 수도사들에 대해서 쓰고 이것이 많이 읽혀져서 이 수도회를 알리는 선포자가 되었다.

하지만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이 겟세마네 수도원에 관해서 "미국의 중심이며‥‥ 자신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미국을 움직이는 중심축"이라고 했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을 나와서 불교의 수도에 관한 학술회에 참가하려고 여행하던 중 1968년 방콕에서 죽었다. 이 수도사가 수도을 떠나서 수도원에 적을 두지 않은 상태로 죽었다는 것 또한 그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를 여러 해 동안 떠나 거리를 두고 있었고, 또 전통적 수도원 삶의 형태에 관해서 많은 비판을 남겨 놓았다는 것은 지난 수십여 년 간 가톨릭 수도회의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최근의 역사적 변환점은 제2차 바티칸 종교의회라할 수 있다. 이 회의는 교황 요한 23세가 1959년에 예고하고, 1962년에 개최했고, 1965년 교황 바올 6세 때에 끝났다. 이 종교회의는 아주 큰 기대를 모았다. 이 회의에서 내 건 주제가 전체 교회의 아기오르나멘토(Aggiornamento' 체제와 교리의 현대화)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커다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도사들 역시 이 아기오르나멘토에 공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특별한 기대를 갖고 지켜보았다.

1965년 10월 28일 이 회의는 수도사의 삶이 시대에 걸맞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칙령(perpetae caritatis)을 통과시켰다. 칙령은 수도사의 삶이 갖는 가치와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동시에 수도원 삶의 모습 역시 반드시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칙령이 전체적으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수도원적 삶이 변모된 현실세계에 적응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점이다(accommodata renovtio vitae religiosae; 시대에 적합한 종교적 삶의 갱신).

이 회의는 어떤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요소보다 오히려 시대에의 적응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수도사의 삶에 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언제나 원전을 근거로 해야 하며 각각의 제도와 조직 역시 끊임없이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변화된 시대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제2조).

이 두 가지는 두 개의 정형화된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이들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은 특별히 새롭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실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하자 현실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어려움이란 이 시대의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이고 동조했던 역사 비평학적 성서신학이었다. 왜냐하면 역사 비평학적 성서신학은 성경의 내용 중 지금까지 수도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해석되었던 전통적 해석을 근본부터 뒤흔들어서 의심나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는 수도사의 삶이 과연 성경적으로 권고하는 삶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에서도 동일하게 받아들여진 이 역사-비평적 방법은 수도회와 이에 준하는 모임들의 기원을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지평과 관련시키도록 했고, 그 결과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고 생각되어 시대를 넘어서 절대적 통용 가치를 갖고 있다고 믿어 오던 수도회의 시작과 설립자를 상대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런 어려움은 두번째 요구 조항인 시대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아주 심각하게 나타나게 된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성 있는 시대에 대한 이해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대를 묘사하는 구호들 역시 "서력 기원에 따른 세계", "도시화되고 기술화된 세계", "다면화된 세계", "성숙한 세계"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각각의 나라들이 가진 차이나 대륙간에 생기는 차이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시대 환경을 말할 때 저개발국가의 상황은 정말로 상황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남아메리카의 상황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요구 사항인 "상황에 맞는 개혁"(acommodatio renovatio)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어떤 공통의 계획으로 운용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어서 종교회의가 커다란 노력과 진지한 배려를 통해서 만들어 낸 칙령이 불안정하고 해체되어 가는 상황에 빠져 있던 수도원이나 수도 공동체들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사실 시대에 적응한다는 것은 수도회 회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세상에서 더욱 신앙적으로, 더욱 활동적이 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원칙"의 대부분이 개별적으로 결정될 사안이다. 도처에서 이런 시대 적응의 첫걸음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구조와 기존의 생활 형태에 대한 새판짜기로 나타났다. 이것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흔히 나타나는 경우로 수도회를 떠나서 수도사로 사는 경우와,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사가 되고자 하는 자도 수도원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 머무는 경우가 생겼다.

수도 공동체에 속한 사람 숫자의 변화도 중요한데,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스페인 사제 수도원에서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는 후보자의 숫자가 1962/63년에 6,114명이던 것이1966/67년에는 4,458명으로 줄었고, 새로 서품 된 사제의 숫자는 1962/63년에 669명에서 1966/67년에 296명으로 감소했다.

미국에서는 훈련받는 수도사들(세속 수도회와 수도원 소속 수도회를 합해서)의 숫자가 1962/63년의 48,046명에서1968년 33,990명으로 줄었다. 독일에서 역시 새로 서품 된 수도 사제의 숫자가 1964년의 156명에서 1968년 114명으로 줄었다. 네덜란드에서는 1935년까지만 해도 1,218명의 수녀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1966년에는 200명만이 보고되고 있다. 1961-1966년 사이에 325명의 수도사와 430명의 종신 헌신의 서원을 했던 수녀들이 수도회를 떠났다.

벨기에에서는 여자 수도원들의 수녀들이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들만이 남게 되어 소속 회원의 숫자가 매해 거의 850명씩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 명이 가입하는데 두 명이 나가는 것이다. 스페인의 관상 수도원에는 가입하는 숫자가 1963년에 1,150명이었던 것이 1958년에는 585명으로 줄어들었다.

관상 수도원들에 나타나는 이러한 감소 추세는 서구 세계전체에 동일하다. 캐나다 역시 1590년 이후 모든 형태의 수도사적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미국에는 수도회 소속 수녀들의 총수가 1966년에 181,421명인데 1968년에는 167,167명으로 줄고 있다."

미국 내의 수녀회(19f2년에 약 445개의 단체와 약 145,000명의 회원이 있음)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 통계가 보고되고 있다: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수도 공동체에서 빠져나간 회원의 연평균 숫자가 3,841명이다. 이 숫자 중 사망이 원인인 것은 1,346명이며, 종신 헌신의 서원을 파기하고 나간 것이1,551명, 일시적으로 헌신하겠다고 서원했던 사람이 944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1970년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숫자가 파기하고 나갔는데 그 숫자는 2,546명이다. 1965년에서 1971년 사이에 수도원에 입회한 젊은 여성의 수는 13,476명이었는데 이중 1973년까지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의 숫자는 5,907명이다."

 

이런 상황은 독일에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몇 년 사이에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신학대학들, 즉 미래의 수도사 사제들을 양성하는 수도원의 독자적 교육기관에서 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자 하는 회원들이 거의 없게 될는지도 모르는 우려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 구제 활동과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는 수녀 자매단의 숫자 역시 지난 몇 년간 거의 삼분의 일이 줄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실상 종교개혁 이래 수도원에 불어닥친 가장 큰 흐름인 수도원과 수도 단체들의 자체적 해체 과정에 다름 아니다.

수도회들은 자신을 구해 내고 보존시켜 가는 것이 부과된 과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종교회의에서 제정한 것에 연결해서 모든 수도회들은 떠들썩하고 거친 공식적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비상 총회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총회를 소집해서 다수의 위원회들이 만들어지고 여러 가지를 토의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시대 상황과 억지로 구겨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많은 숫자의 수도원에게는 이것이 곧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수도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운명은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급격히 줄고 있는 수도사 숫자에 달려 있다. 수도 공동체들 역시 전체적으로 없어져 가는 추세이다. 어떤 것들은 비슷한 계열의 공동체들과 연합해서 소박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현재의 수도원들 모두가 가망 없는 포기 상태이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혼란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이해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 수도원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또한 부인 못할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전통적 형태의 수도사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목회 사역적 활동과 사회 활동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교회가 세상에서 행하는 중요한 봉사의 구성 요소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 모임에 일련의 고무적인 자극이 외부로부터 와서 이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샤를르 드푸꼬가 세운 "작은 형제와 자매들"이 그들의 소박하지만 엄격한 삶의 모습, 그리고 이들이 행하는 가난과 사람들과의 진지한 결합에서 보여주는 본보기적 삶의 모습을 통해서, 또 떼제 수도회 역시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가진 공동체의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수도원들에게 여러 모로 고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 영향을 받은 전통적 수도원들은 수도원 자체를 "단순한 수도원"(monasterium simplex)으로 생각해서 임시적 기관으로 여기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되자 수도원은 단순한 거주 장소가 되어 오늘은 몸담고 있지만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것과 같은 맥에서 세상 한 가운데에 세워지는 소규모의 작은 공동체모임(Fraternitat)을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수도원을 개방해서 수도원적 삶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과 이 삶을 공유하는 방식이 생긴 것도 역시 같은 맥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수많은 여러 가지 모습들이 이러한 "시대를 향해 열려 있는 수도원"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이러한 것은 수도원 바깥 세상에도 영향을 미쳐서 옛날의 공동체의 모습을 본 딴 새로운 운동이 만들어지게 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남녀의 많은 숫자는 이전에 수도원과 수도회에 속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적 공동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여기에 속한 회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에 맞는 생활과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세상 한가운데서,. 가족 안에서, 직업 속에서 살고자 한다. 여기에는 결혼한 사람도 있고 독신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활동의 핵심적 인물들은 수도원식의 공동체 양식을 따라 사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이렇게 살도록 하는 동기는 자기들이고 유하게 가지고 있는 영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새로운 복음화에 열정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또는 사회 구제 활동의 영역에 관심을 쏟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몇 개의 예를 들어 본다면, 카리스마적 갱신, 새로운 교리 연구회, 기독교적 삶의 공동체, 프란시스 수도원식의 공동체, 도미니크 수도원식의 공동체, 노아의 방주, 노틀담 모임, 자원자(自願者) 예수회, 유대의 사자와 희생양, 예루살렘 공동체, 포콜라, 자유공동체 등등이다.

한편 이런 와중에서 다시금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 새로운 수도원들은 "제3세계"에 속한 나라들에서 구령 사업 분야와 사회 구제 활동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것들로 이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 수도원의 모범을 따라 세워졌지만, 철저히 각각의 지역 교회의 상황에 따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의 새롭게 생겨난 수도회는 역시 제3세계에 세워진 관상 수도회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수도원으로서는 수도원 전통상의 일원으로서의 위치를 가지지만 수도원적 전통과 자신들 고유의 문화적 유산을 과감하게 결합시켜서 토착적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는 수도회이다. 이런 수도회는 특히 베네딕트 수도회와 시토 개혁수도회에 속한 남녀 수도회들에서 많이 나타나며, 지역적으로는 아프리카에서 특히 자신들 고유의 소망을 담아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옛날 국가들, 즉 옛날에 수도원 활동이 활발했던 국가들에서 새롭게 설립되는 수도원의 숫자는 알기가 어렵다. 이들은 설립된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친 시험 운용 기간과 최소한 잠정적으로라도 교회의 공식인 인가가 있은 다음에야 공식적인 문서에 등록되기 때문이다. 또한 설립되는 많은 공동체가 세속 제도식의 수도회(CIC 710-730)의 형태로 만들어지거나, 또는 이미 있던 수도회가 새로 생긴 제도권교회의 수도회 법을 따라 "사도적 삶의 공동체"(CIC 731-746)에 새로이 등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중 많은 숫자가 단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작은 범위에서만 알려지고 그들 중 기껏 몇개만이 이런 교회적 경계를 넘어 성장해 갈 수 있는 것도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원인이 된다.

1975년에 설립된 성 요한 수도회(Communate Saint-Jean)는 1986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는데, 이 수도원은 성직자 수도원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수도회는 또한 2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지고 프랑스를 중심무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미국에까지 퍼져 있다. 두 개의 자매 수도원이 이 수도회와 연계되어 있는데, 하나는 목회 활동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관상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베들레헴과 마리아 승천 수도회 가족" 역시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방향 설정 때문에 이런 저런 노력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결정된 방향은 은둔 수도사로서의 삶이었다. 이 수도회 역시 이 노력의 과정 중에 교황의 승인을 받았고, 현재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수많은 여자 지(支)수도회(약 20여 개의 수도원)와 소수의 남자 지(支) 수도회(두 개)를 가지고 있다.

수도원으로 설립된 다른 또 하나는 1977년 아이 엔 프로방스(Aix-en Provence) 지방에 세워진 "작은 사도 수도회"(Fratemitat der apostolischen Monche)가 있다. 이 수도회의 회원들은 교구 사제들로서-그래서 주교는 그들의 상급자가 된다-공동생활을 하며, 그들은 사목 활동에서 예배 의전(儀典)적-수도원적인 생활 리듬을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런 방식을 본 따서 만든 수도회가 독일에도 있는데, 이는 이런 종류의 수도원이 현재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어거스틴 전통을 따르는 수도원들 중에서도 세속화 기간 동안 몰락했던 이 계통의 몇몇 수도회 연합체들이 다시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1961년에 빈데스하임 성 빅토르 수도연합회가 재정립되는데, 이 수도회는 지금 현재는 어거스틴 성직자 수도회 연합회에 속한 세 개의 독립적 수도회로 활동하고 있으며, 1979년에는 성 크로이츠의 수사 수도회가 건립되는데, 이는 독자적 수도 공동체로 재건립된 경우이다.

삐에르 테이야르 데 샤르뎅은 1921년 6월 21일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세상 속에서 세상일에는 더욱 참여적이되 동시에 세상과는 더욱 거리를 두는 새로운 기독교인의 삶을 보여주는 새로운 베네딕트와 새로운 이그나티우스를 소망한다."

 

이 위대한 사상가의 바램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란시스라는 사람도, 이그나티우스, 베네딕트, 도미니크 등은 모두 단지 한 곳, 신앙 세계에서 형성되어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세운 수도회들 역시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수도원도 수도회도 신앙 세계만이 키워 낼 수 있다. 수도원과 수도회는 또한 세상을 비롯함으로써만 생존해 나갈 수 있다. 1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