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개략

 

 

 

 

수도원 제도는 원래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 부분에 위치한 기독교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원은 역시 이곳에서 첫번째의 풍성한 발전을 했고, 그 후에 서방의 로마제국에서 나타난 금욕적 삶의 방식에 지속적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제국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고 교회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양쪽의 교회는 둘 다 자신만의 고유한 요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교회는 자신만의 특징을 갖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인 언어상의 차이는, 후에 가서 결과적으로 그리스-슬라브 교회와 라틴-게르만 교회가 서로 분리되는 결과를 낳긴 하지만, 실상은 언어의 차이는 각 교회가 가지는 독자성의 외부적 표현일 뿐이었다.

서로 간에 분리가 시작된 것은 4세기부터이다. 그러나 양쪽의 교회 권에 속해 있던 수도원 제도는 이 분리 과정에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분리되자 수도원 역시 교회와 마찬가지로 각자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지만, 그후에도 서로간의 실제적 교류 관계는 계속되었다.

동방의 수도원 제도가 수도원적 삶의 모습을 조직적으로 갖추게 된 것은 파코미우스의 위대한 업적이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수도원적 삶의 방식은 수도원장 안트리페의 쉐누테(Schenute von Antripe, 451?년 사망)의 개혁 작업을 통해 이집트에서의 주도적 생활 방식이 되었는데, 이는 이슬람이 침입함으로써 많은 수도원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 중 단지 몇몇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집트를 벗어나서도 수도원의 초기 형태는 계속 유지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여러 개의 수도원이 주목을 받았으며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예루살렘 근방에 있던 수도원으로 대표적인 것이 라우렌 수도원들로 여기에 그 유명한 마르사바의 라우라 수도원이 속해 있으며, 남부에는 시나이 지역에 카타리나 수도원과 라이타우 수도원이 있다.

소아시아 지방은 가이사랴의 바질리우스(Basilius von Carsarea)라는 수도원의 위대한 조력자이자 조직가요 규칙제정가를 배출했다. 그가 쓴 "수도 규칙"은 서방의 수도원 발전과 비교해 볼 때 통일적 수도회나 조직화된 수도 연합체를 형성해 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작성해 낸 규칙이 수도적 삶의 지침이 되었다. 즉 바질리우스 이래로 동방정교회의 수도원과 수도사들은 수도사의 삶에 관한 문제에서는 바질리우스를 따르는 것이 의무처럼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질리우스 수도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적당치 않다.

동방 수도회와 서방 수도원을 비교해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고 강조할 만큼의 조직적 차이점을 갖고 있지는 않은데, 동방 수도회의 대부분이 중세의 탁발수도승단의 생활 방식과 유사한 삶을 사는 조직체였고, 또한 새 시대에 서방에 나타났던 수도연합체 형식을 취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방 수도원을 서방 수도원과 동일한 범주에 놓고 봐서는 안된다. 서로 다른 차이 또한 분명하다.

동방 수도회는 영적으로 바질리우스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수용하는 수도원 규범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다양한 형태가 서로 묶여 있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사상 면에서도 바질리우스만이 아니라 그 외의 많은 교사와 정신적 교부들의 사상이 혼재하고 있다.

동방 수도원에서는 수도원에서의 구체적 생활 형태의 규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금욕적, 수도원적이라는 기본 이념 외에도 교회와 황제가 제정하는 법률이 중요한 표준 권위로 작용했다. 그래서 수도원에 관한 문제는 종교회의의 의제로 다루어졌다. 수도원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칼케돈 회의에서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수도원을 주교의 감독하에 둔다는 것과 함께 몇 가지 생활과 관계된 것을 정했다: 수도원의 설립과 폐지, 재정과 경제, 노예의 수용, 수도원 탈퇴 금지 등등.

황제가 수도원에 관계된 법을 제정한 경우로 대표적인 것으로 누구보다도 유스티니안 1세(Justinianl, 527-565)를 들 수 있다. 그는 "칙령"을 통해서 수도원에 관한 내용을 법적으로 분명하게 법제화했다. 황제는 수도원의 삶을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도사의 삶과 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실제적 관상은 신성한 것이다. 이런 삶은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며, 또한 이러한 삶은 이 삶이 가진 순수함과 기도 때문에 이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용하다."

 

황제는 법을 통해서 수도원의 삶의 모습에 개입했는데, 그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사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은둔의 삶은 완전한 삶의 단계로 이해했으나, 은둔자의 거주지는 수도원의 담 안에 있어야 하며 또한 원장의 감독아래에 있어야 했다. 황제는 또한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장려했다. 결혼한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서로 헤어져야 했으며, 어린이는 자신이 원할 경우 부모가 원하지 않더라도 수도원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환속한 수도사는 사회에서는 수도사의 신분을 계속 갖고 있지 못하도록 했다. 남녀 혼성 수도회는 폐지되도록 했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수도원에 대한 황제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실상 이런 황제의 배려 덕분에 수도원의 아주 강력한 인적 단체가 되었는데, 이는 제국의 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유스티니안 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있을 당시에 제국의 수도에는 68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며, 인근의 도시인 칼케돈에는 40여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다. 황제는 또한 귀양이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지은 사람들을 형벌에 대신해서 수도원에 강제로 머물게 했는데, 이것을 보면 황제는 수도원이 사회와 정치적 면에서의 구체적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도사의 삶을 정하고 있는 규칙에서 또 다른 것으로 소위 튀피카(Typica-"유형들"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역자주)라고 부르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한참 후기에 가서야 지금처럼 수도원 규약으로 인정되었다. 이 문헌에 관해 알려져 있는 가장 최초의 증거에 의하면 이 문헌은 9세기에 쓰여졌다. 이 튀피콘(튀피카는 튀피콘의 복수형-역자 주)은 원래 (수도원) 설립 증서의 한 종류로, 내용에는 설립을 확인하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정해 놓고 있으며, 예배 의식에 관한 규칙, 또 수도원에서의 삶에 관해서 정형화된 틀을 정해 놓고자 하는 것들이 들어 있다. 이 증서들은 비잔틴 수도원들이 관상 공동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도이다. 금욕, 금식, 수공업은 수도사가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요소로 되어 있다.

수도사들은 여러 다른 수도원에서 살았지만 어쨌든 그들의 활동 범위는 수도원 내로 한정되었다. 이것이 또한 라틴권 수도원 제도와 서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채색하고 또 책을 필사하는 것들이 수도원에서의 가장 선호되는 일거리였고, 이런 이유로 수도원이 필사본의 전승과 비잔틴 예술 전승에서 중요하고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적극적 이웃사랑 활동도 물론 수도원 공동체의 중요한 활동 영역에 속했다. 수도원의 대부분이 숙박소와 극빈자를 위한 집, 또 구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수도원을 경제적인 면과 정신적 면이 함께 묶여진 통일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수도사나 수녀가 직접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수도회들은 이런 일을 위해서는 일반인들을 고용했다. 중세 시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판토크라토어 수도원(Pantokratorkloster-권능의 수도원이란 뜻)은 50개의 병상이 있는 병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의료 전문 인력이 60명 고용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감독자, 감독관, 행정 공무 담당자가 역시 일반인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병원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 분야마다 담당하는 병이 달랐다. 분야마다 두 명씩의 의사, 두 명의 보조의사, 해당 병동 소속의 조력자가 있었다. 간질병 환자를 위해서는 특별한 병동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약 26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든 노인을 위한 숙박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목회적 사목 활동 분야에서는 수도원의 역할이 계속 축소되었다. 하지만 목회 영역에서 수도원이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언제부터인가 제도권 교회의 주교들은 수도원 출신들이 차지했다. 그 이유는 동방교회에서는 주교에게만 독신이 의무 사항이고 일반 사제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원은 자연스럽게 주교 후보자들의 저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수도사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외부 활동이 제한하고 있었음에도 수도원들은 교회와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에서 일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종교 문제에서 상담을 요청 받거나 영적 지도자의 역할, 저술가로서의 활동을 통해서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수도사들은 공공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5세기부터의 종교회의와 초상 논쟁에 관한 기사들은 수도사들의 사회 참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노울스(D. Knowles)는 자주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했던 수도사들의 단체를 "압력 단체"라고 부르고 있다. 비잔틴 역사에서는 이런 수도사들을 "정치가" 또 "셀롯당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교회와 황제권이 수도사들에 관한법률을 제정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수도사 개인이 공공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이 비잔틴 제국에는 분명한 흔적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주상(柱上) 수도사들이다. 이것을 첫번째로 보여준 사람이 주상 성인 시므온이다. 그는 학교를 만들었는데, 이 학교는 수도사들이 제국의 여러 곳에다 자신들이 살 기둥을 세운 것이다.

제국 수도에 아주 가까운 곳인 보푸루스 지방의 아나플루스라는 곳에 다니엘(493년)이라는 사람이 기둥 위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다. 이 사람은 국가의 교회적 정치적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 그는 황제 바질리코스와 대주교 아카키오스를 상호 중재하기 위해서 그는 그의 기둥을 떠나 도시 안으로 들어왔었다. 사람들은 주상 성인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증거로 여겼으므로-여러 분파들이 주상 성인이 손을 들어주는 쪽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주상 성인은 비잔틴에는 중세까지, 러시아에는 19세기까지도 이어졌다.

비잔틴 수도원이 가진 독특한 형태로 "아키오메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잠을 자지 않는 수도사들을 말한다. 설립자는 알렉산더로, 그는 405년경 한 무리의 수도사와 함께 제국의 수도에 있는 메나스 교회에서 이 모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설립자 알렉산더는 전통적 수도사의 의무 사항인. "끊임없는 기도" 조항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이 수도원에서는 실제로 쉬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해야했다. 수도사 공동체의 실질적 과제인 "끊임없는 기도"(laus perennis)가 실제로 행해져야 했으므로, 알렉산더는 수도사들은 몇 조로 나누어 서로 교대로 기도함으로써 끊이지 않는 기도에의 헌신이 계속 되도록 했다. 수도원의 옛 이상인 천사의 삶, 즉 수도사들은 이런 삶을 삶으로써 천사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고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상과 그들만의 독자적인 성경 해석이 이런 종류의 수도원적 삶의 유형을 만들어 냈다.

비잔틴의 수도원에 지속적이고도 폭넓은 영향을 미쳐서 거의 비잔틴 수도원의 특징을 형성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스투더우(Studiu) 수도원 출신 테오도르(Theodor, 826년 사망) 원장이 끼친 영향이다. 이 스투디우 수도원은 463년 집정관 스투디우가 세웠다. 테오도르는 학식과 천부적 재능과 종교적 철저함을 겸비한 인물로798년 이 도시 수도원의 원장으로 취임했는데, 당시에 그가 지도해야 할 이 수도원의 수도사 숫자는 천여 명에 달했다.

테오도르의 지도는 개혁 성향이었다. 그는 전체적 질서를 면밀히 분석해서 만들어 낸 조직 체계를 가지고 수도원을 이끌므로써 이 거대한 수도사 단체를 전체적으로 무리 없이 인도해 나갔다. 그가 쓴 수도사의 삶에 관한 저술들은 영적 삶의 지침이 되었다. 정기적인 대화를 통한 교제는 수도사 삶의 프로그램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도록 했다. 독특한 벌칙 조항은 전체적으로 계율을 철저히 지켜서 통일체를 형성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 활동에 관해서 역시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으므로 수도사들은 열심을 다해 맡겨진 일을 해야 했는데, 이는 수도원이 부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수도사의 삶에 대한 테오도르의 이러한 가르침은 다른 수도원들에도 파급되었다. 그래서 다른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사는 삶도 스투디우 수도원의 그것에 동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쪽 수도원 전체를 스투디우 수도사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방 쪽에는 서방 수도원에서 나타났던 식, 즉 전체가 하나의 단일화된 조직을 가진 수도회나 수도회 연합은 없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테오도르의 개혁적 활동 외에도 10세기에 아토스 산에 만들어진 수도사 집단 거주지(Monchskolonie)가 비잔틴 지역 수도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수도원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에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이 산은 반도 지역에 있어서 외부와 단절하기에 쉬운 환경이었으므로 수도사들의 거주지로 적당했다. 아타나시오스(Athanasios)가 황제 니케포로스 포카스(Nikephoros Phokas, 963-969)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처음으로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스투디우 수도원의 규칙을 따랐기 때문에 수도사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의무로 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에 수도원들이 계속 세워졌고, 그래서 이 반도 지역은 "성산(聖山)"이 되었고 급기야는 이곳에 독자적 수도사 국가가 만들어졌다.

11세기에 이곳의 수도원들이 첫번째 번성기를 맞았다. 아토스 산은 전체 비잔틴 수도원의 중심지로 공인되었는데, 이는 전체 기독교 수도원 역사에서 한 번뿐인 사건일 것이다. 13세기부터는 이곳에 그리스뿐 아니라 외국인 수도사들까지 거주하기 시작하여 외국인 수도사들도 이곳에 독자적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은 수도사들이 전체 섬을 총괄하는 수도사 공화국으로 법 제정도 수도사들이 맡고 있는데, 가장 최근의 법 제정은 1924년에 이루어졌다. 수도사가 아닌 사람들은 방문만 가능하다. 여자들은 이 반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여성은 동물까지도 금지되는데, 성도덕적 입장에서라기보다는 경제적 입장에서 금지되는 것이다. 동물의 암컷이 없으므로 수도사들은 경제적 목적으로 동물을 키우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수도원의 가난 이상을 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경제적으로 보장된 수도원들이 항상 위험에 빠졌다는 것도 전제로 하고 있다.

아토스 산에 있는 수도사 공화국은 독자적 형태를 오늘날까지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잔틴 제국의 상승이나 하강에 따라 영향을 받았고, 현재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수도원 형태는 비잔틴 제국의 몇몇 곳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리스 북부 지방에 사람들이 쉽게 가기가 어려운 곳이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고대 스파르타 근방인 미스트라에 모여 있는 수도원 밀집 지역이 있다.

동방교회의 수도원 역시 자신의 역사에서 서방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위험에 직면했던 시기가 있었다. 박해를 동반한 성상(聖像) 논쟁 파동은 수도원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성상(聖像)에 대한 견해를 묻는 시대의 질문은 수도사들에게도 던져졌고 이들이 입장 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성상 숭배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던 수도사들은 처벌을 받았고 유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동방교회 수도원들에는 조심스럽긴 했지만 상당한양의 재산과 부(富)가 축적되었다. 황제가 수도원에 여러 가지 특권을 주었고 또한 증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많은 교묘한 행정가들이 이것을 의식적으로 조장해 냈다.

 

"수도사들은 가만히 숨어서 기다리면서 작은 포도원, 농경지, 집, 가난한 사람의 오두막집에 딸린 조그만 경작지를 빼앗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것은 이웃을 겁주는 행동이던가 혹은 이웃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술책일 수도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불처럼 그들은 자기 주변에 놓여져 있는 재산을 빼앗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이 이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과의 신뢰 관계를 가짐으로써 자신들이 행한 범죄적 사실에 대한 비난에 보호막을 치고자 하기 때문이며, 또한 많은 재산과 함께 자신이 재력가로서의 평판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자신에게 노예처럼 예속시켜 놓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12세기 말경 주교였던 데살로니카의 에우스타티오스(Eusthatios von Thessalonike)가 헬라 수도사들의 소유욕과 땅에 대한 탐욕을 비난한 글이다.

부유하게 된 수도원들이 처하게 된 위험은 재산 때문에 수도원 정신을 잃게 되는 대가를 치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공공 사회에서 수도원을 매력적인 경제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럽에서 행해졌던 것처럼 황제가 세속인들의 정치적 군사적 공헌에 대한 대가로 수도원의 성직록에 이름을 올려준 것이다. 수도원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수도원의 성직록을 받게 됨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 수도원들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도원 내부에서 일어났던 논쟁은 중세에 가서는 마침내 비잔틴 수도원들의 평화를 깨뜨려 버렸다. 이것이 헤지카즘으로(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평안, 관상'의 뜻) 이는 새롭게 부상했던 신학자이자 신비주의적 저술가인 시므온(Symeon, 1022년 사망)의 사상에 근거해서 괴상한 신비 이론과 관상의 실제를 발전시킨 운동이다. 이 경건 운동은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공동체들과 수도원들 사이에 불화와 알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토스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 Palamas vom Athos, 1359년 사망)가 이 운동을 이론적으로 옹호한 가장 중요한 옹호자인데, 이 사람은 황제의 도움을 입어 이 헤지카즘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중세 후기에 비잔틴 수도원에게 아주 어려운 시련이 닥쳤다. 이 시련은 수도원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러 면으로, 특히 아토스 수도원 지역에서는 공동생활 방식을 깨트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것의 원인은-이 당시의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꼭 마찬가지로-수도사가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요구 조건은 폐기되었고 수도사는 개인 소유와 자유로운 사용이 허락되었다. 이는 또한 수도사의 신분을 가지고도 개인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예배를 공동으로 드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생활을 허락하는 정교회의 수도원 형태가 생겨났다(Idiorhythmie).

수도사는 수도원의 틀 안에서 혼자 살기도 했고, 또는 몇몇이 함께 모여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아토스 지역에는 대형 수도원이 있는 외에 이런 가족 형태의 수도원적이며 금욕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모임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비잔틴 제국의 보호와 돌봄을 받으며 자란 동방 수도회는 제국의 권력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수도원 역시 확장되었다. 10세기에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진출했으며, 마침내는 러시아까지 도달했다. 1015년이 되면서 곧바로 영주 키에프의 야로슬라브가 러시아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수도원을 세울 때 그는 설립 과정이나 수도원 규칙을 정하는데 있어서 비잔틴을 본보기로 했다. 비잔틴 수도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러시아의 오래된 유명 수도원들에는 오늘까지도 잘 나타나 있다.

1050년 러시아 사람으로 아토스에 장기간 체류했던 안토니오스는 키에프에 동굴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 건립 때에 아토스는 정신적 고향의 역할을 했다. 수도원은 건립되자마자 수도원적 생활 방식은 대단히 엄격히 강조되었고, 스투디우 수도원과 같은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런 방식의 수도원들이 러시아에서 계속 확장되어 나갔다. 이들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들이 주교로 선출되었다. 수도원들은 문화의 보존소가 되었는데, 특히 민족 문학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13세기에 있었던 몽고 침입은 러시아 수도원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러시아 수도원의 새로운 복구 활동은 14세기에 시작되었다. 복구 활동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사람이 수도사 세르기우스(Sergius, 1314-138)이다. 이 사람은 1344년 모스크바 지방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을 계기로 모스크바 지역을 중심으로 근방에 큰 수도원들로 가득 채워졌다.

두번째로 생긴 수도원 공동체가 북 러시아의 지나기가 어려울 정도의 숲과 늪지대에 세워졌다. 생활 형태는 다양하긴 했지만 비잔틴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은둔자들, 소모임 수도사들, 또 대형 수도원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여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금욕을 따르는가, 수도원 규칙을 따르는가의 결과였다.

그런데 후에 이들이 서로 명확한 차이를 갖게 되고 서로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제는 가난, 홀로 있음, 외부적 활동에서의 차이였다.

요지프 볼로키(Josif wolochij, 1515년 사망)가 모스크바 근방에 볼로클람스크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도입했다. 이곳은 모스크바 교회와 러시아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이 수도원이 눈에 띄는 특징으로 가졌던 것이 호화의 극을 이루는 예배였다.

다른 방향에서 있는 수도원으로는 닐 소르스키(Nil Sorskij, 1508년 사망)가 세운 수도원으로 이곳은 슬모임 수도원을 특징으로 했다. 이 계통의 수도사들은 엄격한 가난과 은둔 참회의 삶을 요구받았다. 이 수도원 수도사들의 외부활동은 사랑의 본을 보이는 설교와 온유함이어야 했다. "요지프" 수도원 사람들은 짜르 정부의 호의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볼가 강 건너편에 거주지를 갖고 있었던 소모임 수도사들의 추격을 받았다.

러시아 전체를 덮을 정도로 번성했던 러시아 수도원 역시 18세기에 세속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세속화 운동은 1764년, 즉 서방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고, 이것의 여파로 거의 600여 개의 수도원이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 중 많은 수도원이 계속 존속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서구 국가들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수도원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요구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 나타난 러시아 수도원의 갱신 운동을 살펴보면 이 갱신 운동이 특출한 능력을 가진 수도사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은 플라톤이라고 불린 파이시 벨리치코프스키(Paisij Welitschkowskij, 1793년 사망)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벨리치코프스키는 닐 소르스키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었고, 또 솔로브에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암브로이시 그렌코프(Amwroisij Grenkow, 1892년 사망)와도 같은 맥에 서 있다.

이 시대는 러시아의 스타르첸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시대였다. 스타르첸의 활동에서 수도사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조언자로, 영적 지도자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스타레츠 페오판(Feofan, 1751-188)은 수도원 내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고, 옵티노 수도원 출신으로 칼루가 행정부에서-그렌코프도 여기서 소속되어 있었다-일했던 레오니드(Leonid)와 마카리(Makarij)는 수도원 외부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1917년에 발발한 혁명은 러시아 수도원이 가지고 있던 화려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대로 남은 수도원들은 몇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들 또한 국가의 엄격한 감시하에 놓여졌다. 이러한 러시아 수도원의 종말은 아토스의 수도사 공화국에게도 손실이었다. 왜냐하면 아토스 지역에서 가장 큰 수도원이 바로 러시아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후 이 지역 러시아 수도사들은 본국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아토스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는 1923년 이후에는 로잔느의 평화가 이루어지면서-이 수도사 공화국이 넓은 땅을 잃게 된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터키를 떠나서 고향으로 되돌아옴에 따라 인구의 20퍼센트 정도가 증가했는데, 이들이 거주할 적당한 땅이 없었다. 그래서 국가는 아토스 지역의 땅과 다른 수도원들이 가진 땅들 역시 압류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스의 옛 수도원들은 그들의 토지를 빼앗겼고, 그외 수많은 수도원 공동체들은 그들의 생활 기반을 통째로 빼앗겼다.

오늘날의 동방정교회 수도원의 실태는 정확한 파악이 안된다. 정확한 파악이 안되는 이유는 우선 눈에 띄는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수도원들이 활동하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정교회의 국가들 중 공산주의 정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수도원은 엄격한 국가의 통제와 강제적 조치를 따라야 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도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도원들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들면 불가리아의 릴라 수도원은 단순히 유명한 관광 명소일뿐 아니라 수도원의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오늘도 활동하는 수도원이다.

그리스에도 또한 20개의 대형 수도원과 12개의 분파 또 700여 개의 소규모의 수도사 거주지가 있는 아토스 지역 외에도 남녀 수도사들이 살고 있는 일련의 수도원들이 있다. 예를들면 아테네 지역에 렌텔리, 요한네스 테올로고스, 오시오스 멜 레티오스, 뵈오틴 지역에 수많은 방문객으로 유명한 오시오스 루카스, 미스트라 지방과 북부 그리스의 메테오라 수도원들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에 있는 수도원 모두를 망라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동방정교회 수도원에 관한 통계가 불충분한 것은 그리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집트의 와다 나트룬에 있는 마카리오스 수도원의 콥틱 수도사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몇 년 전부터 아주 적극적인 수도원 공동체가 세워져서 활동하고 있는데-이런 적극적인 활동은 수도원의 미래를 밝게 해주고 있으며, 또한 이들이 갖는 신학적 관심은 그들이 내적으로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방의 수도원과 비교해 본다면 세상적인 것에 별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동방정교회의 수도원들의 계속적 존속 문제는 그들이 속해 있는 교회적, 종교적 주변 세력에 달려 있다.

1963년에 아토스는 천년맞이 축제를 하면서 수도원 개혁에 관해서 언급하고 수도원 삶에 대한 찬양과 수도원에 대한 미래의 확신을 내놓았다. 이것의 내용은 주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 계속적 성장을 위한 국가적 지원, 수도사의 신학교육 등이다. 하지만 만일 동방정교의 교회가 살아 있는 종교적 정신과 진실된 선의를 가지고 수도원을 이끌어 주지못한다면, 또한 동방교회 안에 있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도움을 줌으로써 이들이 믿음을 근거로 하면서 수도원적 삶의 본질적 내용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인위적인 방책으로 끝날 것이다. 본질적 내용은 "진실되이 하나님을 추구함"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수도원의 역사는 수도원의 역사가 위대한 성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비참한 좌절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젊은 파코미우스가 늙은 스승 팔레몬의 엄격한 금욕 학교에 입문하고자 했을 때, 파코미우스는 다음과 같은 진솔한말을 들어야 했다.

 

"내 아들아, 수도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 온 사람들의 많은 수가 참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