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관상(觀想) 기도(Contemplative Prayer)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1. 관상기도의 이해

 

1) 관상기도의 어원적 이해
      관상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contemplation은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contemplatio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테오리아(θεωρία)로 데오레인(θεωρείν)에서 유래 되었다. 데오레인(θεωρείν)은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θεολοϒία)라고 했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어 성서는 히브리어의 da'ath를 번역하면서 gnosis(靈智)를 사용하였다.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전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하였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지식을 말할 때 gnosis의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요 14:7, 요일 4:8, 2:3~4, 요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밀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 (요 5:19, 30, 14:10, 눅 6:12, 9:28~29, 막 14:36, 마 4:1, 마 14:13, 눅 22:42,)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것의 원뜻은 지식의 지적 시각(視角)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이 기술적인 용어에다 교부들은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다. 이 theoria를 확대 이해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관상기도관상상태는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상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관상기도를 번역자에 따라 침묵기도, 마음의 기도, 묵상기도, 명상기도, 듣는 기도, 집중기도, 등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토마스 키딩은 향심기도를 발전시켰다. 근대의 토마스 머튼의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주로 명상, 묵상이라 번역하였으며, 리차드 포스트의 책을 번역한 사람들은 듣는 기도, 마음의 기도, 묵상기도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 외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말하여 아직 통일된 언어는 없으나 그것은 모두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상태를 표시하는 말로 근본적으로 관상에 이르는 기도들이다. 본 글에서는 관상에 이르는 모든 기도들은 관상기도라고 하기로 한다. 역자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역자의 글 그대로 두기로 한다.



2. 관상이 아닌 것
     
* 자세한 것은 관상기도 박노열 편저 pp, 30-36, 42-44. 참조

관상기도가 새로운 영역이면서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에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혼동이 오기 쉽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므로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고 경험으로만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신자들이 “기도 중에 겪는 경험과 기도의 내용”을 구별해 보지 않으면, 기도 중에 여러 가지 현상적 경험이 많은 사람이 관상기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또는 반대로 심리적 경험이 적은 사람은 기도의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도 중 겪은 경험이나 기도 내용은 구별해 보아야 한다.

1) 관상은 긴장해소 훈련이 아니다. (목표가 다르다)
    동양에서 행해지는 요가, 천천히 달리기, 초월적 명상(Transcendent Medita -tion)이 아니다. 이것들은 마음의 휴식이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목표로 한다.

“침묵기도”는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다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깊은 기도를 행하는 신자의 지향이 관상기도의 첫 사다리인 침묵기도를 포함하여 그 다음 단계까지를 지향하고 있다. 토마스 키딩은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 한다.

2) 관상은 은사가 아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 선물이다)
     관상기도의 선물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침묵기도는 믿음, 소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침묵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 까지 이르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순수한 믿음이란 내 자아가 관여하여 지적인 토론을 주로 하는 명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3) 관상은 초감각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疑似) 심리현상이 아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간다)
     관상은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는 것과 같은 소위 예시의 은사나, 육체이탈경험, 초감각 경험, 심리 현상들인 몸 밖의 경험(out of body experience), 또는 죽음에 임박한 경험(death experi -ence)이 아니다.

심령의 선물은 “케이크 위의 아이스크림”과 같다. 이러한 선물을 가지게 되면 당사자는 겸손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지도자들은 이러한 선물을 가능한 한 피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인격의 변형(transforming) 과정은 심리적 신비 경험이나 능력 그 자체 보다는 믿음, 소망, 신적인 사랑의 성장에 좌우된다. 관상기도는 믿음, 소망, 사랑이 3가지가 자란 열매이고 이것들을 더 나아가게 한다. 이에 비해 심리적 경험이나 능력은 하나님과의 거룩함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들을 영적 발달의 표징으로 보는 것은 오해(mistake)이다.

4) 관상은 신비 현상이 아니다.(주님의 일치를 이루는 것에 관심, 체험은 부산물)
     신체탈혼,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시는 음성, 사람의 영 안에 새겨주시는 말씀 등이 아니다. 순수한 믿음만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지름길인 것이다. 신자는 관상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이 있지, 심리적·신체적 느낌이나 경험에 쏠리게 되면, 목표를 잃어버리기 쉬움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관상기도를 하는 중에 경험하게 되는 관상 기도의 체험과 관상 기도 그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관상기도의 정수는 관상기도를 하면서 무슨 체험적 경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데 있다. 관상기도 중의 체험은 하나의 부산물과 같은 것이지 관상기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인간의 체험이나 인식능력으로 영혼에게 다가오는 ‘빛’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키딩은 인간은 “자신의 삶 안에 맺어진 열매를 보고 그 현존을 짐작할 뿐” 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나아가서 “관상기도의 기본은 순수한 믿음의 길이다. 그 외는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 짖는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