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관상의 전통

1.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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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의 탄생,

삶, 죽음과 부활

(약 BC4-약 AD29)

 

 

 

 

 

 

 

 

 

 

교회의 탄생(1세기)

 

 

 

 

 

 

 

 

 

 

바티칸 공의회

(325-787)

 

 

 

 

 

 

 

 

 

 

교황의 주도권(5세기)

 

 

 

 

 

 

 

 

 

 

 

1000

1054

 

 

 

 

 

 

 

 

 

 

 

 

 

 

 

동방정교회

 

천주교

 

 

 

 

 

 

십자군

(1096-1291)

 

 

 

 

 

 

 

동방정교회의 선교확장

(14-현제)

 

 

 

신교도

 

1517

 

 

 

 

 

 

 

 

 

 

 

 

 

 

천주교의 선교활동들(16세기-현제)

 

 

 

 

 

 

 

 

 

 

신교도의 선교 폭발

(17세기-현제)

 

 

 

 

 

 

 

 

 

 

 

 

 

 

표 :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들

2. 관상의 전통(觀想의 傳統)

관상의 전통

주목할 인물 0 중요한 운동

나사렛 예수

(BC4 - 약 AD.29)

사도 요한(1세기)

 

 

 

 

 

 

 

이집트의 안토니우스(약 251-356)

 

 

사막의 수사와 수녀들(4세기)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약 480-약 547)

 

 

베네딕토회 수도사(6세기-현제)

 

 

 

 

 

 

 

 

 

1000

동방교회 (예수기도의 발전)

 

 

 

 

아시시의 클레어(약 1193-1253)

 

 

가난한 클레어 수녀회(13세기-현제)

 

 

 

 

라도네주의 세르기우스(1314-1392)

 

 

공동 생활 형제 자매회(14-15세기)

노리지의 줄리안(약 1342-1413)

 

 

 

 

 

 

무지의 구름(14C후반-15C),부정의 기도

닐 소르스키(1433-1508)

 

 

모라비아 주의의 운동(16세기-현제)

* 마틴 루터(1483-1546)

1517

종교개혁(쯔빙글리: 1484-1531

존 칼빈 : 1509-1564)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예수회(제수잇) 가톨릭 최대교단. (역개혁=도덕주의, 절대론)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갈멜 수도회(개혁)

십자가의 요한(1542-1591)

 

 

갈멜 수도회(개혁)

 

 

 

 

로렌스 형제(1611-1691)

 

 

 

 

 

 

경건주의 운동(17세기-현제)

귀용부인(1648-1717)

 

 

 

 

 

 

 

토마스 머튼(1915-1968)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노리지의 줄리안

헨리 나우웬(1932-1996)

 

 

 

 

 

 

 

표 : 관상의 전통

◎ 종교개혁과의 관계

“마르틴루터가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한 것은 개신교와 개신교-가톨릭간의 관계에 있어서 불행한 일이었다. 실제로 신비주의 전통에서 많은 지혜를 얻은 루터에게는 신비적인 것이 있었다. 루터는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증거가 결여된 것처럼 보인 중세시대 말기의 경건을 거부했다. 그러나 루터가 신비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개신교는 신비주의 전통에 접근하지 못했고, 이 전통이 개신교 신비가들이 유입되지 못했다.”

※ 주) Lawrence S. Canningham & Keith J. Egam, 'Christian Spirituality" 엄성옥 역, 「주제별 기독교 영성」 (서울: 은성, 2004), pp210-211. *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우리 모두는 기도로 충만한 삶과 보다 풍성하고, 보다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대한 관상의 전통의 강물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준다. 이 현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1) 관상의 모범.
      관상의 모범을 먼저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도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 평생동안 관상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관상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계시록은 강력한 예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것은 관상의 전통이 가져다 부는 변치 않는 선물이다.

다음으로 역사에서 관상의 모범을 찾아본다면 “안토니우스”이다. 그의 필생의 소명은 오랜 세월을 거쳐 관상한 사도행전에서 근거하였다. 어는 주일 복음서를 공부하던 중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다. 안토니오는 그 말씀대로 상속받은 재산 중 어린 여동생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의 격려의 말씀이 있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 두 말씀에 힘입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의 유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적훈련(askesis)이 더욱 중요하다. 사막의 생활은 강력한 내면적인 집중을 얻기 위한 고독과 금식, 영적교제를 깊게 하기 위한 관상과 기도, 마음의 변화를 얻기 위한 성경공부와 관상, 아버지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육체노동과 귀신 좇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영적생활 훈련들의 목적은 육체와 영혼을 의로움 안에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험을 받을 때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이런 삶에서 이런 종류의 인격 형성이 풍부했다. 안토니오의 전기에는 “그의 육체적 측면들이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킨 것은 아니다. 인격의 확고함과 영혼의 청결함이 그를 구별시켜 주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혼란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외적 감각들도 평정을 유지했다. 혼의 기쁨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쾌활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관대한 성격과 겸손한 영혼”을 소유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변화는 너무나 놀랄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기를 열망했다” 이것이 사막에서 오랜 고독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맺으신 열매이다. 20년의 광야생활을 후에 하나님은 그 시대에 띄어난 사역을 하도록 그를 세상으로 내어 보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의 삶으로부터 우리는 관상하는 삶과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의 시선을 돌리는 것에 대해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사부 안토니우스와 사도요한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많은 영감을 준다해도 현제와는 거리가 먼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관상적 삶을 현대에도 경험할 수 있을까? 특히 일상의 요구들과 압박들을 끊임없이 받고 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절박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작품들을 읽고 관상할 필요가 있다.

2) 관상의 전통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자" 이것은 확실히 관상적 물줄기, 즉 기도로 충만한 생활에 관한 가장 깊이 있는 묘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가 이 묘사에 미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가슴 시리도록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을까? 경건한 믿음의 권위자들은 이 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관상의 이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불 ‥‥ 이 불타는 사랑 ‥‥ 이 강력한 사랑의 불과 상처 ‥‥ 바로 이 사랑의 불 ‥‥ 불타오르는 사랑 ‥‥ 성스러운 사랑의 불" 등 뿐만 아니라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은 불과 사랑이다. 제거하고 정화하는 불, 감싸고 위로하는 사랑, 이것이 관상적 생활의 요소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한결같은 응시이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친구들 간의 친밀한 나눔"인 것이다.

사랑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섬세하고도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은 업적이라기보다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사랑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기 때문에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평안하고 사랑스러운 유입"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왜냐하면 기도 생활의 초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며, 처음에 우리는 강도에 있어서 큰 변동을 경험한다. 높아졌다 낮아지고, 뜨겁다가도 차가와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사랑은 좀 더 깊고, 좀 더 강하고, 좀 더 안정되게 자란다.

공허(어두움)
     관상적 생활과는 반대되며, 거의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공허가 있다. 사랑스러운 기쁨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에, 우리는 강렬한 갈망과 동경과 추구-추구하지만 발견 못함-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완전한 발견은 아니어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다. 아마도 불만스러운 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것을 "생생한 갈증 ‥‥ 사랑을 향한 긴급한 갈망"이라고 부른다.

많은 경우, 공허는 어두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경험한다. 건조함, 곧 마음의 사하라 사막 또한 경험한다. 이 모든 경험을 하는 동안 고독은 고마운 동행자가 된다. 우리는 홀로 계신 분과 함께하면서 혼자 있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 공허, 이 어두움 이 건조함이 곧 기도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것은 고행적인 부류의 천국의 교제이다. 기쁨이 잔치라면 공허는 금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

변형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점차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내면의 기능들을 '사로잡으신다.' 처음에는 마음과 의지를, 그 다음에는 생각을, 그리고 상상력을, 그리고 정열들을 사로잡으신다. 그 결과는 인격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되는 변형이다. 우리는 점점 예수님의 습관들과 감정들과 소망들과 믿음과 사랑을 갖게 된다.


3. 관상의 중요한 장점.

      관상의 전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강점들을 가져온다. 그 중에서 네 가지를 살펴본다.

1) "처음 사랑"(계 2:4)의 불길에 계속해서 부채질을 한다.
     이것은 관상의 가장 기본적인 공헌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마음-사랑밖에 가진 것이 없다."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항상 우리의 처음으로 부르고, 항상 뿌리를 찾도록 하고, 항상 우리의 기초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거듭 거듭 거듭해서 사랑에 빠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메시지가 단순하다고 쉽게 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처음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빨을 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2) 우리를 단지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한다.
     지성적 공식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끈질기게 강조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적인 사람은 ‥‥ 위험을 각오하고서 자신의 마음을 언어와 관념 너머의 사막에 내어 놓은 사람이다. 그 사막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순수한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듯이,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옥죄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미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개 믿음을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하려는 영속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하면 우리의 객관성과 시각을 잃을 수 있다.

3) 기도의 중심을 강조한다.
     관상적인 사람들은 기도가 선한 것이거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필수적인 것, 곧 제1순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방교회의 은자(隱者) 테오판은 이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일 기도가 올바르면 모든 것이 올바르다."

하지만 관상의 전통은 기도의 중추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 이상을 제안한다. 기도를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을 제안한다. 침묵을 강조하고 쉬지 않는 기도를 말한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지속적으로 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저는 중보기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으로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삽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끊임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제 영혼의 은밀한 체험입니다.

4)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삶의 고독을 강조한다.
     옛적의 영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외로운 골짜기'를 홀로 지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그 곳을 지날 수는 없다. 내가 가야만 한다." 고독은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역사를 써 가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또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또한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의 고독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험하고 사막 같은 영성이다. 우리는 영혼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탐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땅은 악몽 속에서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애쓰는 곳이다. 그 곳은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소망은 절망과 소망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안 후에만 찾을 수 있다. 그 곳은 십자가가 잔혹이 아니라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곳이다. 이것들은 관상의 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