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기도(祈禱)의 형태와 단계

1. 기도(祈禱, Prayer)란 ?

1) 사전적 의미
   기도(祈禱)【명사】【~하다|타동사】종교적 대상과 교제와 화 구를 하는 것, 신명(神明)에게 빎. 금식 ∼ / ∼를 올리다.
    
기원(祈願)【명사】【~하다|타동사】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 를 빎. 수명장수를 신불께 ∼하다.

2) 기독교적 의미

"하나님과의 대화"
  이 말은 신자가 주님께 아뢰는 측면과 주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측면인 양자 간의 활동 영역이 잘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 인간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행위"
  이 말은 기도의 한 면만을 잘 드러내준다. 위로 향하는 기도로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응답하시는 것을 듣는 측면이 간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온전한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는데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

2. 기도의 형태

  "아뢰는 기도"와 "듣는 기도"이다.

1) "아뢰는 기도"
       아뢰는 기도 혹은 올리는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간구와 청원을 하는 행위이다. 통성기도, 상상적 기도(imaging prayer), 능동적 기도와 인간의 마음과 이성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명상(medita -tion) 기도가 있다.

2) "듣는 기도"
       듣는 기도는 경청기도, 가슴(heart)기도, 비우는 기도. 수동적 기도가 이에 속한다. 곧, 기도자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보다는 수동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기도이다.

3. 기도의 3 단계

전통적으로 기도의 심도를 나타내는 의로서 구송기도와 명상기도 그리고 관상기도로 구분해 왔다. 성숙한 기도에 이를수록 그 희구하는 의도성의 농도가 점점 희박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 이유는 주장하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상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 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1) 구송(口誦) 기도(vocal prayer).
     간청하는 기도. 우리의 의사를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주님께 아뢰든지 올려드리는 것이다.

2) 명상기도(meditation).
     이 기도는 인간의 마음(mind)과 이성을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추구하고 의지적으로 집중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기독교 신자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Quiet Time)와 유사하다. 기독교인이 많이 행하는 큐티는 신자의 영성에 매우 중요하다. 만약 큐티를 마친 후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된다면 큐티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이런 침묵의 시간을 갖이면 말씀의 놀라운 능력과 생명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식이 많다 해도 그 지식에 비례하여 영혼이 안정되고 활기찬 생명력 있는 삶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실제이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지식을 내것화(owning) 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물론 머리의 영역의 기도도 필요로 한다.

명상기도는 어떤 주체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강조한다. 반면에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말할 때 관상기도라 한다.

3) 관상(觀想) 기도(contemplative prayer).
     구송기도, 명상기도가 인간의 언어나 지식을 사용하여 기도한다면,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가슴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기도이다. 그래서 대 그레고리오는 이 기도를 ‘하나님 안에서 쉼’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했다.

이러한 관상기도는 주님과의 일치(communion, 친교, 합일)를 지향한다. 그래서 관상기도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관상기도와 관상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기도는 주님과의 친교를 지향한다고 할 때, 관상 상태는 관상기도나 기타 다른 헌신적인 행위들로 인해 주님과의 합일이나 친교에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4. 전통적 관상기도의 두 길

기독교 전통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이르는 두 종류의 관상의 길이 있다. 하나는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으로 습득적(acquired) 관상기도이다. 다른 하나는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인 주부적(infused) 관상기도이다. 이 두 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신학자는 오리겐과 니사의 그레고리이다. 더 자세한 것은 제4장 관상에 이르는 길에서 다루기로 한다.

(1) 습득적(acquired) 관상기도
      능동적(active) 활동을 하는 습득적 관상기도는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으로 개념이나 상징,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 모든 피조물이나 인간의 모든 선한 경험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엿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이 기도에서는 기도자의 능동적 활동을 인정할 뿐 아니라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 유념적인 방법(kataphatic, 긍정의 길)의 기도는 신자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신자들이 관상기도 한다고 할 때 대부분 이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된다.

(2) 주부적(infused) 관상기도
      무념적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 이미지, 상징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 주시고 알려주심을 직접 체험하여 그 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제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의 개념적인 장갑을 벗고 '빈손'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무념적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의 기도는 수동적 측면이 중심이 되는 기도이다. 곧, 기도를 하는 가운데, 기도자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은혜가 내려오는 소낙비처럼 퍼 부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는 기도자의 의지적 의도보다 수동적인 제세에 있는 것이다.

“예” 다음은 성 프랜시스의 기도이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혈색이 좋지 않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은총의 기도 가운데 있게 되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시중드는 수사가 바라보고 있었다. 프랜시스 성인은 ‘한 시간정도 기도했겠지’하고 기도를 끝내고 나오면서, 옆에서 기다리면 수사에게 “내가 얼마 동안 기도했나?”라고 물어보았다. 그의 답은 “4시간 기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 의지로 원하는 바를 간구하는 수준과, 이성을 통해 성찰하는 명기도의 차원을 넘어, 주 앞에 머물러있어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은총을 부어주시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 머물러 기도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위와 같은 것은 아니다. 자신은 관상기도를 한다고 침묵가운데 있으나, 어떤 경우는 말없이 간구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는 특정대상을 사고하거나 성찰하는 명상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관상기도 중에 흔히 나타나는 일이므로 관상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지도자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생활은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하는 일과 성령에게 우리 자신을 여는 일을 주도적으로 행하도록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할 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도를 인도해주시는 분은 성령님임을 깨닫고, 그분의 손길을 인정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5. 관상기도의 종류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인식 즉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이 상태는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이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분의 기다림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으로 먼저 나아가야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는 "자연"에서(중세, 성 프란시스), "성경"에서(종교 개혁자, 루터 칼빈), "영(영성가들)"에서이다. 특히 십자가의 요한은 그 장소를 "어둔 밤"이라 했다. 어둔 밤이란 감각이 닫혀진 영혼의 세계이다.

전통적 관상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식에 따라 기도의 유형이 다르다.

(1) 초대 교회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하나님의 실존인 성경과 평정한 마음이 직접 부딪힘으로 하나님의 실존과 만나고 응답하는 "거룩한 독서"가 있다.
(2) 동방교회에서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는 "예수기도"가 있다.
(3) 상상력이나 이미지 등을 매개체로 하여 관상체험에 이르는 유념적(有念的, kataphatic way) 방법을 '이냐시오식 관상기도'라 한다. 이 기도는 상상력이나 이미지라는 준비단계를 통해서 얻어진 관상을 "습득적 관상기도(accquired contemplation)"라 한다. 이 기도를 "불완전 관상" 혹은 "능동적 관상"라고 한다.
(4)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모든 지성이나 상상력이나 이미지 그리고 느낌이나 생각이 멈추고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관상체험에 이르는 무념적(無念的, apophatic way) 방법을 "주부적 관상기도(infused contemplation)" 혹은 "완전관상"이라 한다.
 
필자는 이 기도를 통상적으로 "관상기도" 혹은 "침묵기도"라 하며 이 기도를 지향한다.
(5) 위의 전통적인 관상기도 외에도 관상에 이르는 기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개신교에서는 독특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가 있다. 나는 이 기도를 "한의 기도" 혹은 "부르짖는 기도"라 한다.

우리들은 가톨릭에서는 관상기도가 있고 개신교 안에서는 관상기도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우리만의 독특한 관상기도가 있다. 그것은 한의 기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산에서 들에서 기도원에서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그 결과로 방언, 통역, 예언, 병 고치는 은사, 축사 등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 다만 우리들은 이러한 일을 은사에만 치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어 하나님과 하나 되는 또는 하나님 자신을 원함이 아니라 그 결과인 은사나 현상에 치중하고 있는 부분이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면 그 분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받아서 자기가 행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것은 절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분이 치료하시고, 그분이 축사하시고, 그분이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분께 쓰임을 받고 있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산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대부분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버릴 것인가? 아니다. 다만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부르짖는 기도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도이다.

우리는 관상기도와 관상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관상기도와 관상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되는 데는 한 두 가지의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방법은 다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그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 방법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나아가는 방법을 기도라 하고 관상상태에 이르기 위한 기도를 관상기도로 한다면 부르짖는 한의 기도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이다.

한의 기도로 관상에 이르는 데도 그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처음에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마음이 집중되며 정화된다. 그 정도가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음 마져 줄어지게 되고 마침내 침묵상태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관상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부르짖는 단계는 외적 정화의 단계이며 점점 침묵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내적정화의 단계이다. 이 과정을 그치며 침묵상태에 머무를 때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내게 다가오시어 하나 되어 주신다. 이 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놓아질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실제 산에서 나무뿌리를 뽑으려는 자세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관상에 이르기도 한다.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통성으로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이 관상의 신비에 들어가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신비하고 비밀스러워하는 것은 이해부족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도 관상기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할 뿐이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 잘못 활용하거나 신비주의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개신교 안에서도 잘 개발하여 관상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의 한계성이 있다 장소문제 환경문제 등이 곧 장애요인인데 꼭 큰소리로 부르짖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속으로 부르짖는 것이 더 크게 부르짖는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방법은 더 개선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침묵기도 수련이 되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쉬워지고 확실해진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