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관상(觀想) 기도(Contemplative Prayer)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1. 관상기도의 이해

1) 관상기도의 어원적 이해
   관상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contemplation은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reality)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5) contemplatio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테오리아(θεωρ?α)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테오리아(θεωρ?α)를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이  테오리아(θεωρ?α)6)는 원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시각”을 뜻하는 것으로 데오레인(θεωρε?ν)에서 유래 되었다. 데오레인(θεωρε?ν)은 "어떤 대상을 목적을 가지고 집중해서 보다"로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θεολο??α)7)라고 했다. 그리스 교부들은 관상의 가장 높은 형태인 -직접적이고 총체적인-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직접적인 경험으로서의 하나님 인식을 표현하는데 ‘신학’(θεολο??α, theologi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8)
   "관상"이란 용어는 성경 안에 없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 안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관상의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 표현 혹은 이미지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관상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는 da'ath(다아트)이다.9)
   구약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어 성서는 히브리어의 da'ath를10) 번역하면서 gnosis(靈智)를 사용하였다.11)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전 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하였다.12) 사도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지식을 말할 때 gnosis의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요 14:7, 요일 4:8, 2:3~4, 요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하고 있다.13)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밀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14) (요 5:19, 30, 14:10, 눅 6:12, 9:28~29, 막 14:36, 마 4:1, 마 14:13, 눅 22:42,)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
   우리는 관상기도와 관상상태는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상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관상기도를 번역자에 따라 침묵기도, 마음의 기도, 묵상기도, 명상기도, 듣는 기도, 집중기도, 등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토마스 키딩은 향심기도를 발전시켰다. 근대의 토마스 머튼의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주로 명상, 묵상이라 번역하였으며, 리차드 포스트의 책을 번역한 사람들은 듣는 기도, 마음의 기도, 묵상기도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 외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말하여 아직 통일된 언어는 없으나 그것은 모두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상태를 표시하는 말로 근본적으로 관상에 이르는 기도들이다. 본 글에서는 관상에 이르는 모든 기도들은 관상기도라고 하기로 한다. 역자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역자의 글 그대로 두기로 한다.
(1) 히브리어 da'ath에서 유래된 용어사용 ( gnosis(靈智), Ginosken )
   바울 ; 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
   요한 ; 요 14:7, 요일 4:8, 2:3~4, 요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

(2) 성경에 직접 사용된 용어
   리차드 포스트는 그의 저서 Celebration of Discipline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성경은 묵상이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의 히브리어를 쓰고 있는데 그 두 단어는 성경에서 약 58회 사용되었다고 한다."고 한다.
   창 24:63, 시 1:2, 63:6, 119:97, 101, 102,

(3) 하나님의 임재 체험 인물
   창 24:63, 삼상 3:1~18,
   시 1:2, 63:6, 119:97, 101, 102, 148,
   왕상 19:12~13, 9~18,
   사 6:1~8, 9~10,
   렘 1:4~19, 20:9,
   요 15:16,

(4)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건의 형식
   요 17:26, 요일 4:2~3,
   바울 : 행 9:1~19, 갈 1:17, 고전 12:8, 고후 12:2,
   요한 : 요 4:7, 14:7, 요일 4:8, 23,

(5) 내용상 침묵하여 묵상함
   사 30:15, 시 34:8, 46:10, 62:1, 잠 4:23, 마 5:3, 8,

(6) 성령의 역사
   요 16:7, 13~14,  롬 8:26, 고전 2:7, 14, 10~12, 3:16, 요일 2:20, 27,

(7) 듣기와 순종하기
   출 33:11, 20:19, 신 18:15-18, 마 17:5, 눅 10:41~42,
   요 1:21, 4:19~25, 5:19, 30, 6:14, 7:37~40, 10:4, 14:10, 16:13,
   행 1:1, 3:22, 7:37, 살전 5:17, 히 1:1~13, 3:7~8, 12:25,

(8) 예수님
   마 4:1, 14:13, 23, 17:5(1-9), 26:36(36-46), 막 1:35, 6:31, 눅 5:16, 6:12,
   요 5:19, 30, 10:4, 14:6~10, 20, 27, 16:13, 8장, 9장, 10장, 15장, 계 3:20,

(9) 자주 인용하는 성구들
   계 3:20, 살전 5:17, 마 5:8, 막 1:35, 눅 10:41~42, 요 14:20, 23,
   시 116:9, 46:10, 27:14, 33:20, 37:7, 62:1, 5, 131:2,

계 3:20,     : 마음문을 열면
살전 5:17,   : 쉬지말고 기도하라
마 5:8,      :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을 볼 것
마 11:29,    : 주께서 원하시는 멍애 - 마음의 쉼
막 1:35,     :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더니
눅 10:41~42 :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택함
요 14:20,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요 14:23,    :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시 116:9,    : 여호와 앞에서 행하리로다
시 46:10, 27:14, 33:20, 37:7, 62:1, 5, 62:1, 131:2, : 주님 안에서 기다림

※ 관상적 목회자 유진 피터슨은
    : 사 30:15-, 시 46:10, 왕상 19:1~18, 마 5:3, 요 14:10,20, 17:21,
      롬 8:26~28, 계 3:20.을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다.

참고 구절
마 28:20    :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하리라
요 14:16    :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
요 14:17    :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거하시겠음이라.
롬 8:26~27 : 성령이 한없이 탄식하며 간구하심
갈 5:17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린다.

예수님 기도  (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
요 17:11  :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20  : 그들도 다 하나되어 우리 안에 있게하사~
요일 2:27 :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마 26:39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온전한 겸손)
2) 관상기도의 성서적 이해.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   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위의 계 3:20은 관상기도를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성경 본문은 인간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주님을 우리 영혼 안으로 모시어 들여야 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침묵 가운데 행하는 관상 기도는 주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임재15)하시길 기다리며 인간의 의식을 집중하고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성서 구절은 다른 어느 기도보다도 관상기도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는 현실적으로 실제기도의 행위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말씀에 충족되는 상태는 평소 신자의 삶에 주님과의 교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는 은총의 선물을 받은 것과 같다.  이런 은총의 선물 가운데 생활하는 신자는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시 116:9)의 삶을 사는 성화된 인생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토마스 키딩이 말하는 대로 하루에 2번씩 실천할 수 없다면,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마음의 고요 속에 주님의 임재를 초청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믿음 속에서 의식하고 느끼는 시간이야말로 주께서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멍애’(마 11:29)이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주님과의 관계 유지가 우선하여야 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이상의 성경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기도를 많이 하시고,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한 경험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있다는 확신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확신은 지속적인 관상기도의 실천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결과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의 시편에서도 관상기도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칼 야리코에 의하면, 관상기도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안식하고 기다릴 것을 요구’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별히 야리코는 시편에서 그 전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예를 들면, 시편 46:10; 37:7; 62:1; 131:2; 27:14; 33:20; 62:1, 5 등을 제시하고 있다.16)
   이상에서 보는 외에도 무수히 많이 있다.


3) 관상기도의 신학적 이해.
   관상기도는 바로 앞의 성경적 근거에서 살펴보았듯이, 초월적 신 이해보다는 “내재적 하나님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 일치를 말하는 내재적 신관이 필요하다.

   토마스 키딩은 그의 책『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에서 관상기도의 신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서술한다:

   오순절의 은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각성을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그분은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사시도록 성령을 보내주시며, 기도와 활동 중에 성령의 열매와 팔복(Beatitude, 마5장) 을 경험하고 또 나타내도록 힘을 주심으로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셨다.17)

   키딩은 우리의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후 영광 받으시고 승천하셔서 신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며 주님의 임재와 은총을 경험하도록 해주셨다는 교리적 진술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행하는 신학적 기초는 인간이 우월하거나 뛰어나서 주님과의 일치와 임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분께 사랑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이전에 이미 내재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앞에 머물러 그분의 마음(뜻)을 헤아려 보려고 하는 신앙 행위이다. 


2. 관상과 관상기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관상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관상이나 관상기도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묵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수동적 차원에 이르게 되는 주부적인 관상까지 마음기도(Mental Prayer)18) 의 전 범위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관상이나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상이나 관상기도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별을 두지 않고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는데 병행하여 사용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작가, 번역가들이 이 두 용어를 서로 바꾸어가며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관상과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다.
  관상과 관상기도의 두 용어에는 차이가 있다. 관상기도는 “관상에 이르는 길”이며 관상은 “최종목표”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영적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너무나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와 연결된다. 관상기도는 “관상에 이르는 길”이지만 관상기도는 곧 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관상기도가 언제나 관상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관상의 상태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비된 영혼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보면 토마스 키팅이 고안한 센터링 기도는 관상은 아니다. 이 센터링 기도는 관상의 첫 단계의 문턱에 있는 기도이다. 키딩 자신도 관상기도에 이르는 사다리의 첫 계단이라고 말한다. 또한 관상을 준비하지만 수동적 차원의 상태가 시작됨으로 관상이 이르는 기도라 말할 수도 있다.

  관상기도가 관상을 지향하는 기도라고 한다면, 사실상 우리의 모든 기도가 관상을 지향하므로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모든 기도가 관상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상기도라는 용어는 아주 적극적으로 사색을 하거나 상상을 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화되고 능동적인 기도로 관상을 지향하는 기도를 말한다.
  처음에는 말씀에 대한 사색이나 추리, 또는 상상력을 사용하여 묵상하며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묵상의 수준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우리의 기도행위는 일반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비추리적인 활동이 된다. 관상기도를 드리는 이는 사색, 논리적인 추론, 상상이나 정서를 넘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의 침묵상태에 이르게 된다.
  교회전통에는 다양한 형태의 단순기도들이 있다. 관상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드리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능동적인 기도가 관상에 이르는 기도이다. 관상에 이르는 기도를 일반적으로 관상기도라 한다. 여러 번역자들에 의하여  유사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기도의 형태에 따라 침묵기도. 마음의 기도, 단순기도, 향심기도, 구심기도, 집중기도, 관상기도, 이 모든 이름들이 관상에 이르기 위한 기도들이다.


3. 주부적 관상기도

  관상기도는 관상을 목표로 하고 시작하게 되는데, 이 관상 자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독교 전통에서 볼 때 진정한 관상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적이고도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주부적인 관상을 의미한다. 주부적인 관상은 “하나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하나님 인식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영혼에 부어지는 은혜로서, 관상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 주는 것이다.”19)
  갈멜 전통의 대표적인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 요한에게 있어서 관상은 아주 구체적이며 명확한 구분을 한다. 관상은 수동적인 어둔 밤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경험이다. 그것은 신비적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획득할 수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체험 안에서 일상적인 추리나 사고는 없다. 침묵의 깊이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관상기도는 어떤 형태의 기도를 드리는가 하는 것보다 어느 수준에서 이 기도가 드려지는가 하는 점과 누가 이 기도를 주도하고 있는가이다.
  주부적인 관상의 수준에서는 우리가 어떤 형태의 기도를 드리든지, 성령이 전적으로 주도하시고 우리는 오로지 그 분의 인도에 동의하는 수동적인 차원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4.  거룩한 독서와 관상기도

  관상과 관상기도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네 단계20)로 이루어진 구조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관상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경험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의 네 번째 단계가 주부적인 관상이기 때문이다. 앞의 세 단계는 분명히 능동적이다. 하지만 네 번째 단계인 관상은 쉼, 고요, 수동성을 나타낸다.
  귀고 2세는 “관상은 정신이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져 거기에 머무르는 단계로, 이때 한없이 감미로운 환희를 맛봅니다.”21) 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주부적인 관상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관상은 동시에 렉시오 디비나의 일부로서 기도에서의 일상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이다.22)
  그렇다면 관상기도는 이 네 단계 중에서는 어디에 속하는가? 라킨이나 키팅 그리고 페닝턴은 공통적으로 그것을 렉시오 디비나의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 사이에 둔다. 관상기도는 일종의 고안된 능동 기도의 형태이지만 동시에 ‘관상적인(Contemplative)’ 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 안에서 쉼을 그 목적으로 시작되며 곧 그것에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능동적인 차원의 기도와 주부적인 차원의 기도 사이의 기도라 하겠으며, 일상성과 주부적인 은혜, 이 둘의 역동적인 관계를 이어주고 설명해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묵상과 관상 사이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에서는 rumanatio(되새김, 반추)의 방법이든, 이성의 기능을 강조하는 스콜라적 묵상이든, 묵상은 관상을 지향한다. 비록 이성과 추리적인 기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묵상을 할지라도 지적 깨달음의 수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영혼에게 다가와서 깊은 일치를 이루시는 관상의 선물을 갈망한다.


5. 묵상과 관상

  일반적으로 묵상23)은 능동적인 기도이며, 관상은 수동적인 차원의 기도 또는 수동적 차원의 영적 상태를 말한다. 묵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만 실제적으로 기도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 하에서 능동적으로 주도해 나가게 된다. 로랜스 커닝햄과 키스 이건의 공동저서에 의하면, 묵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일깨워주는 반추적인 기도요, 기도자로 하여금 관상의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이다. 반면에 관상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변화시키는 경험”이다.24) 십자가 요한에 의하면 관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지식(loving knowledge of God)이며,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될 때에 순수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묵상이란 은혜를 입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노력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관상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다.

  관상은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묵상의 여파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 영 안에 남겨지는 것이다. 라킨은 모든 묵상에 이런 관상의 순간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상의 순간에서는 묵상 안에서 추구했던 사고나 상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묵상과 관상에서 관상기도는 어디에 속하는가?  관상기도인 센터링 기도나 그리스도교 묵상은 사고나 추리, 또는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능동적인 묵상이나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나타내는 관상의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관상기도는 수동적 관상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면서 드리는 기도이다. 그런 면에서 관상과 관상기도는 구별된다. 하지만 관상기도의 흐름 안에서 관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관상과 관상기도는 구별되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더불어 묵상과 관상의 관계에서 살펴 본대로 관상기도는 분명히 묵상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되 관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관상 이전의 단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묵상과 관상 어디에도 속한 것은 아니다. 다만 능동적이되 단순화된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이어가는 기도이다. 즉, 우리의 사고나 의지가 단순하게 되어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 바로 관상기도인 것이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6. 관상이 아닌 것25)

   관상기도가 새로운 영역이면서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에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또한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동양종교의 수행모습과 차이가 없으므로 오해와 혼동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므로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고 경험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신자들이 “기도 중에 겪는 경험과 기도의 내용”을 구별해 보지 않으면, 기도 중에 여러 가지 현상적 경험이 많은 사람이 관상기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또는 반대로 심리적 경험이 적은 사람은 기도의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도 중 겪은 경험이나 기도 내용은 구별해 보아야 한다.

   토마스 키딩은 그의 책『마음을 열고 마음을 열고』1장에서 ‘관상과 관상이 아닌 것’을 구별한다.

1) 관상은 긴장해소 훈련이 아니다. (목표가 다르다)
   불교나 동양에서 행해지는 명상의 일종인 요가, 천천히 달리기, 초월적 명상(Transcendent Meditation)이 아니다. 이것들은 마음의 휴식이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목표이다.
   토마스 키딩은 그의 저서에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는 사다리의 ‘첫 다리’로 본다.26) 깊은 기도를 행하는 신자의 지향이 관상기도의 첫 사다리인 향심기도를 포함하여 그 다음 단계까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통적 관상기도인 주부적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필자는 향심기도를 포함한 침묵기도를 "관상기도"라 한다.

2) 관상은 은사가 아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 선물이다)
   은사(charismatic gifts)가 아닌 관상기도의 선물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관상기도는 믿음, 소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 까지 이르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순수한 믿음이란 내 자아가 관여하여 지적인 토론을 주로 하는 명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3) 관상은 의사(疑似) 심리현상(초감각 심리현상과 같은)이 아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간다)
   관상은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는 것과 같은 소위 예시의 은사나, 육체이탈경험, 초감각 경험, 심리 현상들인 몸 밖의 경험(out of body experience), 또는 죽음에 임박한 경험(death experience)이 아니다.
   심령의 선물은 “케이크 위의 아이스크림”과 같다. 이러한 선물을 가지게 되면 당사자는 겸손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지도자들은 이러한 선물을 가능한 한 피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인격의 변형(transforming) 과정은 심리적 신비 경험이나 능력 그 자체 보다는 믿음, 소망, 신적인 사랑의 성장에 좌우된다. 관상기도는 믿음, 소망, 사랑이 3가지가  자란 열매이고 이것들을 더 나아가게 한다. 이에 비해 심리적 경험이나 능력은 하나님과의 거룩함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들을 영적 발달의 표징으로 보는 것은 오해(mistake)이다.

4) 관상은 신비 현상이 아니다.
       (주님의 일치를 이루는 것에 관심, 체험은 부산물)
   신체탈혼,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시는 음성, 사람의 영 안에 새겨주시는 말씀 등이 아니다. 순수한 믿음만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지름길인 것이다. 신자는 관상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이 있지, 심리적·신체적 느낌이나 경험에 쏠리게 되면, 목표를 잃어버리기 쉬움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의 진술을 종합하면, 관상기도를 하는 중에 경험하게 되는 관상기도의 체험과 관상기도 그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관상기도의 정수는 관상기도를 하면서 무슨 체험적 경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데 있다. 관상기도 중의 체험은 하나의 부산물과 같은 것이지 관상기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인간의 체험이나 인식능력으로 영혼에게 다가오는 ‘빛’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키딩은 인간은 “자신의 삶 안에 맺어진 열매를 보고 그 현존을 짐작할 뿐” 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나아가서 “관상기도의 기본은 순수한 믿음의 길이다. 그 외는 아무것도 없다”27)고 결론 짖는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