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관상의 전통


1.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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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의 탄생,

삶, 죽음과 부활

(약 BC4-약 AD29)

 

 

 

 

 

 

 

 

 

 

교회의 탄생(1세기)

 

 

 

 

 

 

 

 

 

 

바티칸 공의회

(325-787)

 

 

 

 

 

 

 

 

 

 

교황의 주도권(5세기)

 

 

 

 

 

 

 

 

 

 

 

1000

1054

 

 

 

 

 

 

 

 

 

 

 

 

 

 

 

동방정교회

 

천주교

 

 

 

 

 

 

십자군

(1096-1291)

 

 

 

 

 

 

 

동방정교회의 선교확장

(14-현제)

 

 

 

신교도

 

1517

 

 

 

 

 

 

 

 

 

 

 

 

 

 

천주교의 선교활동들(16세기-현제)

 

 

 

 

 

 

 

 

 

 

신교도의 선교 폭발

(17세기-현제)

 

 

 

 

 

 

 

 

 

 

 

 

 

 

표 :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들

 

 

2. 관상의 전통(觀想의 傳統)

관상의 전통

주목할 인물 0 중요한 운동

나사렛 예수

(BC4 - 약 AD.29)

사도 요한(1세기)

 

 

 

 

 

 

 

이집트의 안토니우스(약 251-356)

 

 

사막의 수사와 수녀들(4세기)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약 480-약 547)

 

 

베네딕토회 수도사(6세기-현제)

 

 

 

 

 

 

 

 

 

1000

동방교회 (예수기도의 발전)

 

 

 

 

아시시의 클레어(약 1193-1253)

 

 

가난한 클레어 수녀회(13세기-현제)

 

 

 

 

라도네주의 세르기우스(1314-1392)

 

 

공동 생활 형제 자매회(14-15세기)

노리지의 줄리안(약 1342-1413)

 

 

 

 

 

 

무지의 구름(14C후반-15C),부정의 기도

닐 소르스키(1433-1508)

 

 

모라비아 주의의 운동(16세기-현제)

* 마틴 루터(1483-1546)

1517

종교개혁(쯔빙글리: 1484-1531

존 칼빈 : 1509-1564)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예수회(제수잇) 가톨릭 최대교단. (역개혁=도덕주의, 절대론)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갈멜 수도회(개혁)

십자가의 요한(1542-1591)

 

 

갈멜 수도회(개혁)

 

 

 

 

로렌스 형제(1611-1691)

 

 

 

 

 

 

경건주의 운동(17세기-현제)

귀용부인(1648-1717)

 

 

 

 

 

 

 

토마스 머튼(1915-1968)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노리지의 줄리안

헨리 나우웬(1932-1996)

 

 

 

 

 

 

 

표 : 관상의 전통

◎ 종교개혁과의 관계

“마르틴루터가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한 것은 개신교와 개신교-가톨릭간의 관계에 있어서 불행한 일이었다. 실제로 신비주의 전통에서 많은 지혜를 얻은 루터에게는 신비적인 것이 있었다. 루터는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증거가 결여된 것처럼 보인 중세시대 말기의 경건을 거부했다. 그러나 루터가 신비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개신교는 신비주의 전통에 접근하지 못했고, 이 전통이 개신교 신비가들이 유입되지 못했다.”

※ 주) Lawrence S. Canningham & Keith J. Egam, 'Christian Spirituality" 엄성옥 역, 「주제별 기독교 영성」 (서울: 은성, 2004), pp210-211. *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우리 모두는 기도로 충만한 삶과 보다 풍성하고, 보다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대한 관상의 전통의 강물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준다. 이 현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1) 관상의 모범.
   관상의 모범을 먼저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도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 평생동안 관상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관상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계시록은 강력한 예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것은 관상의 전통이 가져다 부는 변치 않는 선물이다.
   다음으로 역사에서 관상의 모범을 찾아본다면 “안토니우스”이다. 그의 필생의 소명은 오랜 세월을 거쳐 관상한 사도행전에서 근거하였다. 어는 주일 복음서를 공부하던 중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다. 안토니오는 그 말씀대로 상속받은 재산 중 어린 여동생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의 격려의 말씀이 있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 두 말씀에 힘입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의 유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적훈련(askesis)이 더욱 중요하다. 사막의 생활은 강력한 내면적인 집중을 얻기 위한 고독과 금식, 영적교제를 깊게 하기 위한 관상과 기도, 마음의 변화를 얻기 위한 성경공부와 관상, 아버지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육체노동과 귀신 좇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28)
   이런 영적생활 훈련들의 목적은 육체와 영혼을 의로움 안에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험을 받을 때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이런 삶에서 이런 종류의 인격 형성이 풍부했다. 안토니오의 전기에는 “그의 육체적 측면들이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킨 것은 아니다. 인격의 확고함과 영혼의 청결함이 그를 구별시켜 주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혼란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외적 감각들도 평정을 유지했다.  혼의 기쁨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쾌활하였다.”29)  안토니우스는 “관대한 성격과 겸손한 영혼”을 소유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변화는 너무나 놀랄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기를 열망했다” 이것이 사막에서 오랜 고독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맺으신 열매이다. 20년의 광야생활을 후에 하나님은 그 시대에 띄어난 사역을 하도록 그를 세상으로 내어 보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30) 그의 삶으로부터 우리는 관상하는 삶과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의 시선을 돌리는 것에 대해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사부 안토니우스와 사도요한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많은 영감을 준다해도 현제와는 거리가 먼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관상적 삶을 현대에도 경험할 수 있을까? 특히 일상의 요구들과 압박들을 끊임없이 받고 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절박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작품들을 읽고 관상할 필요가 있다.


2) 관상의 전통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자" 이것은 확실히 관상적 물줄기, 즉 기도로 충만한 생활에 관한 가장 깊이 있는 묘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가 이 묘사에 미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가슴 시리도록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을까? 경건한 믿음의 권위자들은 이 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관상의 이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불 ‥‥ 이 불타는 사랑 ‥‥ 이 강력한 사랑의 불과 상처 ‥‥  바로 이 사랑의 불 ‥‥ 불타오르는 사랑 ‥‥ 성스러운 사랑의 불" 등31) 뿐만 아니라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은 불과 사랑이다. 제거하고 정화하는 불, 감싸고 위로하는 사랑, 이것이 관상적 생활의 요소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한결같은 응시이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친구들 간의 친밀한 나눔"인 것이다.32)

   사랑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섬세하고도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은 업적이라기보다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사랑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기 때문에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평안하고 사랑스러운 유입"이라고 했다.33)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왜냐하면 기도 생활의 초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며, 처음에 우리는 강도에 있어서 큰 변동을 경험한다. 높아졌다 낮아지고, 뜨겁다가도 차가와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사랑은 좀 더 깊고, 좀 더 강하고, 좀 더 안정되게 자란다.

   공허(어두움)
   관상적 생활과는 반대되며, 거의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공허가 있다. 사랑스러운 기쁨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에, 우리는 강렬한 갈망과 동경과 추구-추구하지만 발견 못함-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완전한 발견은 아니어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다. 아마도 불만스러운 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것을 "생생한 갈증 ‥‥ 사랑을 향한 긴급한 갈망"이라고 부른다.
   많은 경우, 공허는 어두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경험한다. 건조함, 곧 마음의 사하라 사막 또한 경험한다. 이 모든 경험을 하는 동안 고독은 고마운 동행자가 된다. 우리는 홀로 계신 분과 함께하면서 혼자 있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 공허, 이 어두움 이 건조함이 곧 기도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것은 고행적인 부류의 천국의 교제이다. 기쁨이 잔치라면 공허는 금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

   변형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점차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내면의 기능들을 '사로잡으신다.' 처음에는 마음과 의지를, 그 다음에는 생각을, 그리고 상상력을, 그리고 정열들을 사로잡으신다. 그 결과는 인격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되는 변형이다. 우리는 점점 예수님의 습관들과 감정들과 소망들과 믿음과 사랑을 갖게 된다.


3. 관상의 중요한 장점.

   관상의 전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강점들을 가져온다. 그 중에서 네 가지를 살펴본다.

1) "처음 사랑"(계 2:4)의 불길에 계속해서 부채질을 한다. 
    이것은 관상의 가장 기본적인 공헌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마음-사랑밖에 가진 것이 없다."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항상 우리의 처음으로 부르고, 항상 뿌리를 찾도록 하고, 항상 우리의 기초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거듭 거듭 거듭해서 사랑에 빠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메시지가 단순하다고 쉽게 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처음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빨을 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2) 우리를 단지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한다.
   지성적 공식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끈질기게 강조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적인 사람은 ‥‥ 위험을 각오하고서 자신의 마음을 언어와 관념 너머의 사막에 내어 놓은 사람이다. 그 사막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순수한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듯이,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옥죄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미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34) 라고 말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개 믿음을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하려는 영속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하면 우리의 객관성과 시각을 잃을 수 있다.

3) 기도의 중심을 강조한다.
   관상적인 사람들은 기도가 선한 것이거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필수적인 것, 곧 제1순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방교회의 은자(隱者) 테오판은 이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일 기도가 올바르면 모든 것이 올바르다."35)
   하지만 관상의 전통은 기도의 중추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 이상을 제안한다. 기도를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을 제안한다. 관상의 전통은 ①침묵을 강조하고 ②쉬지 않는 기도를 말한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토마스 머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지속적으로 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저는 중보기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으로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삽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끊임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제 영혼의 은밀한 체험입니다."36)

4)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삶의 고독을 강조한다.
   옛적의 영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외로운 골짜기'를 홀로 지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그 곳을 지날 수는 없다. 내가 가야만 한다." 고독은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역사를 써 가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또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또한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의 고독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험하고 사막 같은 영성이다. 우리는 영혼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탐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땅은 악몽 속에서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애쓰는 곳이다. 그 곳은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소망은 절망과 소망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안 후에만 찾을 수 있다. 그 곳은 십자가가 잔혹이 아니라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곳이다. 이것들은 관상의 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4. 잠재하는 위험에 대한 이해

   관상의 전통의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운동들에는 고난과 위험들이 있고, 관상의 물줄기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사전 경고를 받게 되면 우리는 미리 무장을 하고, 위험한 여울과 강한 역류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위험들은 전통이 왜곡된데서 나오는 것이지 전통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이기 원한다. )
1)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다. 
   이 분야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을 수도사들이 저술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기저귀 가는 일이나 애 봐 주는 사람 구하는 일이나 사친회 모임에 참석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물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며 관상적인 삶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들과 가정과 직장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지내는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를 쌓아 간다. 우리에게는 모든 일상의 삶이 기도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개발해야 하는 장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하는 '신성한 장소들'에 포함된다.
   교회 출석과 성경 읽기와 또 다른 '종교적' 활동들이 우리의 전체 경험 중 일부를 차지하겠지만 진정한 성스러운 장소는 우리의 사무실이나 작업대, 우리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놀이터, 배우자나 아니면(미혼이라면) 깊은 고독 가운데서 지내는 우리 집이나 아파트의 조용한 지성소이다.
   형태는 미묘하지만 동일한 위험은 관상적인 생활에 열정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 문제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37) 기도와 경건이 우리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질 때,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영성이 사기꾼임을 폭로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은 깨어지고 피 흘리는 인류에 대한 관심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를 타락한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부정과 연결시켜 준다.

2) "지나친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asceticism)는 단순히 말하면 '훈련'이라는 뜻을 가졌다. '선수'(athlete)라는 영어단어가 이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삶 가운데서 훈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운동에 지나치게 빠지듯 '영적 포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도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유혹의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우리는 이와는 반대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위험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았다. 예를 들자면, 유명한 이집트인 '기둥 성자' 시므온 스틸리테스는 30년 동안 18미터 높이의 기둥에서 살았다. 그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둥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밧줄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그 주위가 썩어 악취가 나고 구더기들이 우글거렸다. 시므온은 상처 부위에서 떨어진 구더기들을 주워 상처 위에 다시 놓으며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을 먹으라'고 벌레들에게 말했다.38)
   유럽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지나친 금욕주의의 예들을 볼 수 있다. 모든 행태들이 이전 것에 비해 훨씬 더했다. 시아란 성자는 빵을 모래와 섞어 먹었다. 케빈 성자는 7년 동안을 서 있었다. 핀추아 성자는 7년 동안 철 족쇄로 겨드랑이를 채우고 공중에 매달려 지냈다. 이테 성자는 딱정벌레들이 그의 몸을 뜯어먹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나친 모습에 질겁을 한다. 물론 질겁할 일들이었다. 하지만 현대 시대의 지나친 행태들과 그 모습이 많이 다를까?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들의 일생이 '철로 만든 방들'을 획득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나친 금욕주의와 과도한 운동은 같은 집착에서 비롯된 극과 극이다.
   금욕적인 실행의 진정한 목적과 올바른 위치를 이해함으로써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다. 영적인 삶에서의 훈련을 통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지 금식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는 잔치를 배우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훈련들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목적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 :17). 목적은 자유롭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의 즐겁고 유쾌한 사랑 관계이다.

3) "반지성주의 경향"이다. 
   믿음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지적인 노력의 가치를 감소시키려는 경향이다. 이것은 때로 반 지성주의에 가까워지게(혹은 적대심으로 빠져 들게) 된다. 이런 경향을 확고한 신학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신비주의 종파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전통에 충실한 정통 작가들도 마음-믿음을 강조하려다가 고의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한 몫을 더하게 된다.
   왜 이런 위험이 나타났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들은 모두 의지를 끌어들이지 못하거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차갑고 둔감한 신학을 보아 왔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지성주의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올바른 합리와 명확한 생각의 결여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성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 둘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이 위험은 많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4)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체스판 위험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관상적인 이들은 사랑이 가득하고 양육하는 책임을 지는 모범을 보일 의도를 가진 공동체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 번에 걸쳐 보게 되겠지만 전통의 가장 큰 강점은 심각한 약점이 될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상적인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귀 기울여야 할 그 메시지가 특히 서구 문화에서는 '하나님과 나' 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로 인도될 수 있다. 특정 신비주의적 표현들, 특히 반(反)제도적 정신에 물든 것들은 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 때로는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반 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과거에 활발했던 신학 저술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빈번하게 무지한 이단을 낳는 교리적 순진함이다.

   우리에게 관계가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 엘리야나 세례 요한을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는 규칙을 증명해 줄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믿음을 고립되어 행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자신의 통찰을 전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천국의 공동체- '성도들의 친교' -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용기에서 힘을 얻고, 그들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도받음으로써 우리는 능력을 받는다.


5.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 할 수 있는가?

   각 전통들을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관상적인 수단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의 일부분으로 경험될 수 있는지 물어야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1) 고독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들을 정해 놓고” 실험해보라.
   새벽에 산책을 나가 당신의 세상(도시든지 교외든지)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어 보라. 하루 동안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 공항이나 버스터미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 알아보라. 혼자만의 하루-아니면 3일, 또는 7일- 침묵 수도회를 가지라. 도심으로 가서 사회 정의 수도회를 가져 보라. 다음 비행기나 버스 여행이 당신의 개인 수도회가 되도록 해보라. 한 달 동안 차의 라디오를 끄고 출퇴근하며 작은 수도회를 가지라. 새벽 2시에 일어나 그리스도의 임재를 상기시키는 촛불을 하나 켜고 한 시간 동안 밤의 소리를 들으라. 당신을 위한 광야의 시간을 가질 많은 방법들을 생각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 얼마 동안은 평상시의 성경 읽는 시간을 접어 두고, 그 시간에 “성경 말씀으     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시간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지성과 영혼을 신적인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돌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외적 내적 감각들이 나침반의 바늘처럼 성령님이라는 북극성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가며 성령님이 인도하신다고 느끼는 단어나 문장에 이르렀을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다.
   성경을 읽던 중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라고 말한 느헤미야의 멋있는 말씀을 찾았다고 하자. 우리는 멈추고 기다리고, 포기하고 잠잠히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성령께서 우리의 약점을 속속들이 이해하시고, 힘이 부족한 이유들을 드러내시고,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주위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 힘을 갈망하게 하신다. 우리는 성경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주님, 당신의 기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들, 예컨대 음식과 피상적인 대화들과 쓸데없는 것들 속에서 기쁨을 얻을 것을 갈망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기쁨에 완전히 젖게해주소서." 성령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 아니면 찬양을 하고 춤을 출 수 있다. 아니면 의식적인 지성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언어로 기쁨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 외에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단지 힌트만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성경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3) "신성한 여가"를 즐기고 싶은(끊임없고 영속적인) "인간적 갈망을 꺽으라" 
   낮잠을 자라.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이웃을 찾아가 한 시간이라도 같이 보내라. 해가 지는 광경을 보도록 서로 도우라. 산보를 하라.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물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산보를 즐기기 위해 산보해 보라, 기도를 하루쉬어 보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노래를 들어 보라. 샤워 대신에 목욕을 하라.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낭비해 보라. 아이디어들은 무한하다.

   토마스 머튼은 “나는 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꾸밈없음과 진지함과 겸손함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그것의 통합을 끈질기게 주장했다"39)고 기록했다. 사랑스럽게 하나님을 주목하고 점점 자라가는 하나님과의 연합(일치. 합일)을 통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탐구하는 모험에 당신을 초대한다.


6. 장애물 뛰어넘기(Overcoming Obstacles)40)

1). 침묵하는 법을 배우라.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 30~60분)
   우리 습관에서 다른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침묵에 들어가는 법을 배우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하는 편이 더 쉽다. 따라서 침묵의 공간과 시간을 구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처음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새로운 노력이든 첫걸음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일단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경험하게 되면, 기꺼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무한한 공간의 하나님은 무한한 침묵의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침묵은 그분의 임재를 잉태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침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 어떤 장애물을 예측한다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정신을 산만케 하는 물리적인 것에는 전화벨 소리,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 다른 사람의 말소리 등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 최선의 해결책은 그러한 환경을 피해 보다 덜 소란스런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정신 집중을 요하는 긴급한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조용한 침실로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활동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피하기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장애물, 곧 불신앙, 죄책감, 피로, 낙담, 정신을 산만케 하는 생각들 등이다.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도 가운데 이것들을 하나님께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이것들은 잠긴 문이 아니라 다리가 될 수 있다. 비록 이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말씀드려야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
   낮이나 밤 시간에 침묵을 위한 스케줄을 짜는 일이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케줄 없는 활동들은 물거품이 되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는 습관이 되면, 낮 동안에 혼자만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장소에 대해 그렇게 엄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단과 훈련이 필수적인 열쇠이다.

앞서 살았던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독을 하나의 훈련으로 개발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경우,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지고 혼자 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 마음이 일상생활의 다급함을 잊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우리 마음에서 그분을 가로막는 것들을 정리할 때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사막이나 동굴로 은둔할 수 없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41)

준비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 -30분에서 1시간-을 떼어 놓아라.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바쁜 일들이 엄습하기 전인 이른 아침에 이런 시간을 갖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잠들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갖길 좋아한다.

묵상
   침묵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자연의 아이콘이다.

2).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 (천천히 묵상하는 독서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일정 시간 기도하지만 침묵이 그들의 기도 생활에 줄 수 있는 유익을 완전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침묵에 관한 매혹적인 구절을 볼 수 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계 8:1). 문맥에서, 침묵은 일련의 대재앙의 전주곡이다. 이 경우에서는 침묵이 폭풍전야를 상징한다.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침묵은 중요한 사건들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침묵은 말하자면 무대를 세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로 물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기도 시간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무대를 세우고 싶어 한다.

준비
   앞에서 말한 천천히 묵상하는 독서를 해보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복음서 가운데 몇 구절을 선택해서 저어 보라.

묵상
   "오 하나님, 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을 알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게 하소서. 그분은 주님과 성령과 함께 영원히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42)

3). 침묵과 묵상에 대한 관심이 비기독교적인 행위로 이어지는가?
       (외형은 비슷하나 목적이 다르다. 선 불교는 개달음이 구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려 섞인 말로 이 질문을 하곤 한다. 오늘날 묵상(명상)이라는 말은 기독교보다는 뉴에이지 운동이나 동양 종교들과 관련하여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묵상이 다른 유형들과 얼마나 다른지 살펴보고 나면, 비기독교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허 자체를 조장하는 명상 학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한쪽으로 제쳐두는 것은 하나님이 첫째가 되시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비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 세밀히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단계이다. 이 단계를 성취하고 나면,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데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능적으로 동양의 신비주의를 꺼리는 것은 동양 종교들은 기독교와 정반대되기 때문이다. 동양의 비기독교 종교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다르다.
   선불교도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명상을 하고, 논리적인 생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자기의식을 버림으로써만 만물의 거룩을 알고 만물과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식을 낳는다. 명상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선불교도들은 자신이 죄와 고통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 이들의 구원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음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선불교도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왜 버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몰랐으나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한 선불교 대승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선(禪)에 대해 배우고 싶어 스승을 찾아온 제자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 스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스승이 차를 따랐다. 그는 제자의 잔이 넘치는데도 계속해서 차를 따랐다. 제자가 잔이 넘친다고 불평하자, 스승은 제자도 그 잔처럼 이미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제자가 빈 잔을 내밀지 않으면, 채워지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는 똑같이 하나님(신)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비 체험은 혼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동양인들에게 있어, 신비 체험의 목적은 거룩, 정결, 지혜의 통일된 의식을 갖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힌두 신비주의는 존재의 부정과 무위(無爲) 자체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기독교 신비주의는 보다 활동적이며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목적이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포용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이다.43)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마 16:2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까지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침묵 속에서 묵상할 때 기적적인 체험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율을 구하는 것이 침묵의 목적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신비주의까지도 환상이나 무아지경(자신 밖에 있다는 느낌) 같은 체험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일치한다.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가장 큰 목적은 아무런 기대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불교는 묵상(명상)과 깨달음을 가장 크게 강조한다. 어떤 저자는 어느 한쪽도 묘사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면서 선불교도의 명상 체험을 수영에 비유했다. 그러나 묘사는 인간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실제적인 이해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는 또한 수련을 통해, 명상 중에 얻어진 고요는 일상생활로 옮겨진다고 했다. 조용한 영혼과 자신의 본성과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것도 명상의 목적이다.44)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목적 모두가 훌륭하다는 데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목적이 명상의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평안과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존경받는 수련회 강사인 앤드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우리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진짜 이유는 침묵하며, 피조물의 소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이다."45)
※ 주) 덧붙이는 말
    : 선불교의 명상(묵상)은 깨달음(깨달음이 곧 구원이라 함)이 목적이고, 관상은 하나님과 하나 됨(일치, 연합)이 목적이다. 수도하는 외적 모습은 비슷하나 수도하는 그 목적이 다르다.

준비
   그리스도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라. 당신이 노력해야할 일은 영혼이 영양분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평온히 침묵시키는 것뿐이다. 하나님께 평안과 지혜를 달라고 구하라.

묵상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동기를 아신다. 개인 기도에 묵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한다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4). 나의 발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래 점검표로 점검하고 평가하라)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주시는 것을 잴 수 없다. 자신이 통제권을 가지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기도 생활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보자. 웨인 오츠는 자신의 책에 "침묵 실천 테스트"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실었다. 다음 질문들에 답하면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라.

1. 당신이 매일 반복되는 일과들 가운데 침묵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장소나 시간은 어디며 언제인가?
2. 당신의 삶에서 누가 가장 큰 소란과 혼란과 스트레스를 야기하는가?
   당신은 이것을 바꾸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당신은 소란과 침묵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3. 당신은 보다 조용히, 보다 느긋하게 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      당신의 일과 중에 신경을 거스르는 과도한 짐들을 내려놓으려고 애쓰는가?
4. 당신의 일터 중에서 침묵의 장소들을 열거해 보라.
5. 최근에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경     우였는가?
6. 당신이 첫말과 끝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 결코 말싸움에서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바뀌었는가?
7. 당신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어떤 잡담을 하는가? 또 당신은 당신 자신이나 다     른 사람들을 위해서 소음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8. 청각뿐 아니라 다른 네 감각-시각, 촉각, 미각, 후각-까지 동원해서 귀를 기     울여 본 적이 있는가?
9. 텔레비전, 전화, 라디오, 오디오 등에 대한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발전이 있었는가?
10. 친구, 가족 등에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가?
11. 단절된 자신의 과거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연결되었는가?
12.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깔보거나 얕보는가?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은가?
13. 피로에 지치고, 객관적인 시각을 잃으며, 형편없는 판단을 내리고, 혼란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 즉시 자신을 위해 침묵의 시간을 가졌는가?
14. 고독감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침묵을 구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을 형성할 권리를 행사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는        가?
15. 개인적이며 혼자만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와 의식을 만들기 위해 어      떤 자발적인 행동을 취했는가?
16. 시끄럽고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 침묵을 경험하기 위해 하던 일을 제쳐두      고 한적한 곳으로 피한 적이 있는가?
17. 자신이 덜 보기 싫은가?  자신을 더 존경하는가?  왜 그런가?
18. 가족의 침묵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는가?
19. 일터에서, 예전에는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전혀 말이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왜 그 사람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20. 최근에 분명한 이유도 없이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적이 있는가?
21. 자신의 이상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비판하기에 바쁜가?
22. 개인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침묵의 임재를 알고 있는가?

"염려는 흔들의자를 흔드는 것과 같다. 염려는 당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만 당신은 그 어느 곳에도 이를 수 없다."

침묵
   테스트를 해보라. 당신의 대답들을 살펴보고 어느 부분에서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보라. 당신을 제지하는 것이 관계인가 습관인가?

묵상
   앤드류 신부는 초연함을 고무풍선에 비유한다. 그는 모든 실이 잘려지지 않은 채 한 가닥이라도 풍선에 매여 있으면, 바람이 불 때 풍선은 터지고 만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불만과 분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야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46)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