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관상에 이르는 길


"신앙생활의 핵심은 그 원리나 조직에 있지 않고 내적 수련에 있으며,
그 내적 수련의 중심은「관상기도」이다"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서 기도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일치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철함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heart-felt) 경험이요, 정감적인(affective)인 경험이요, 분석적인 경험이 아니라 직관적인 경험이다.


1. 관상에서 일치의 정도에 따른 단계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이 그 사용되는 상활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먼저 기독교 영성사에 나타난 영성가들이 사용하는 '관상'이란 내적인 영적 여행의 극치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했다. 그것은 방법이라기보다는 단계적인 의미에서의 극치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영성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일치성을 이루었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의미이다. 일치성의 정도에 따라 나누는 기본형으로 추리적 묵상(discursive meditation), 정감기도(affective prayer), 불완전한 관상(inchoate contemplation), 완전 관상(perfect contem- plation)48) 등이다.

   추리적 묵상은 초자연적 진리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리가 끝나면 묵상은 끝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정감적 기도나 명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묵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성이 제시하는 초자연 진리에 대한 의지적 사랑의 행위이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고 했다.49) 의지가 사랑의 행위로 부풀어 오를 때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영혼은 참으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추리작용은 단순히 사랑을 일으킬 준비에 불과하다.

   정감의 기도란 의지작용이 지성의 추리작용보다 우세한 형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지성보다 사랑이 우세한 단순화된 묵상이다. 추리에서 의지의 활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추리적 묵상과 영적 독서는 정감의 기도 실천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것이 의지적 행위를 자극하는 자료가 된다. 정감기도의 실천은 묵상재료를 하나하나 고찰해 나가다가 의지의 정감이 유발되는 매순간 추리묵상을 잠시 멈춤으로써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정감의 기도를 적절히 활용하면 많은 영적유익을 얻는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정감의 기도는 추리적 묵상에서 오는 무미건조함에서 잠시 벗어나 쉬게 한다. 정감기도는 지나친 내성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의 노력에 너무 의탁하지 않게 한다. 정감기도는 본질상 의지의 작용이고 따라서 사랑의 행위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갖게 도와준다. 그것이 주는 마음의 위로와 감미로움 때문에 기독교적인 실천에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불완전 관상은 지극히 단순화된 수덕적 기도의 한 형태이다. 먼저 묵상에서 사용된 추리는 이제 단순한 지적 응시로 바뀌고, 정감기도에서 체험한 정감들은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애정 어린 관심과 합일된다. 이 기도는 수덕기도와 신비적 기도50) 간의 다리 노릇을 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가 수동적으로 영혼 안에 작용하기 직전의 최종적 단계이다. 그렇기에 단순함의 기도에서는 습득적(active) 요소와 주부적(infused) 요소가 혼합됨을 흔히 체험하게 된다. 습득적 관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도자가 충실하면, 주부적 요소는 점차 증가되어 마침내 기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완전 관상기도에서는 습득적 요소가 점점 줄어들면서 주부적 요소가 확대되고, 기도자는 여기에서 추리적 지식이나 탐구적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사랑의 지식을 맛보게 된다. 그 맛은 즐거움과 찬탄과 감격이다. 특별히 지성적인 활동보다는 사랑의 정감이 활발하게 작용하게 되는데, 그 사랑의 활동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사랑은 집착에서 자유롭고 오히려 사랑하는 분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활동이다. 자연적 관상의 가장 본보기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볼 때 자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기적인 혜택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에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 그것을 바로 관상적인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 자신과의 일치체험이 바로 자연적 관상과 매우 흡사한 현상을 지닌다.  

오먼은 완전한 관상(주부적 관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51)
  1). 하나님 현존의 체험이 현저하다.
  2).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하는 느낌을 받는다.
  3). 본성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 있다.
  4).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이다.
  5).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        잡스러울 수 있다.
  6). 관상자가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을 갖는다.
  7). 관상자가 은총상태에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갖는다.
  8). 신비적 체험은 그 체험의 서술이 매우 어렵다.
  9).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과 동시에 존재적 변화를 가져온다.
  10). 신비체험은 흔히 신체에 반응을 일으킨다.
  11). 신비적 기도는 흔히 기능정지나 결박을 가져온다.
  12). 실천적 삶에 대한 큰 충동을 느낀다.


2. 관상기도에 접근하는 전통적 방법

  기독교 전통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이르는 두 종류의 관상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이며, 다른 하나는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이다.52) 이 두 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신학자는 오리겐과 니사의 그레고리이다.53)
  오리겐(Origen, ca. 185-255)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빛'의 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적은 타락 이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이란 인간이 본래의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요, 관상이라는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리겐은 인간이 세 단계를 거쳐 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 중 첫 단계는 도덕적인 조명인데 그것은 죄로부터 떨어져 나와 덕을 실천하는 삶(praxis)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둘째는, 자연관상(테오리아, theoria, natural contemplation)이며 마지막은, 하나님 관상(테오로기아, theologia)이라고 부른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여기에서 오리겐이 말하는 움직임은 빛에서 더 밝은 빛으로의 움직임이며, 오리겐은 어둔 밤이나 무지를 통한 앎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념적인 방법(긍정의 길, kataphatic )은 개념이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 개념, 상징, 이미지를 포함하여 -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54) 모든 피조물이나 인간의 모든 선한 경험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엿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기도자의 능동적 활동을 인정할 뿐 아니라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갑바도기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중 하나인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ca. 335-395)는 관상 이해의 다른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특히 그의 대표작인 『모세의 생애』에 잘 나타난다. 이 『모세의 생애』에서 그레고리는 오리겐이 했던 것처럼 세 가지 단계를 말하고 있으나, 그 방향은 오리겐의 것과 정반대이다. 즉, 빛에서 어두움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의 첫째 단계로, 모세의 빛의 경험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불타는 수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다음 두 단계는 깊은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중 첫 번째는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어두운 구름(nephele)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두 번째는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 짙은 어두움(gnophos)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성으로는 인지되지 못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주신다. 도리어 이 어두움 안에서 가장 분명한 하나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에서는 긍정의 길은 제한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줄 뿐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내면의 실재에 이르도록 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어떠한 생각이나 사유, 단어, 상징도 인간을 하나님 실재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무념적인 방법(부정의 길, apophatic)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 이미지, 상징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 주시고 알려주심을 직접 체험하여 그 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의 개념적인 ‘장갑’을 벗어던지고 ‘빈 손’어둠 속으로 가야한다.
  기독교 영성전통에서 무념적인 접근의 성향을 가진 영적 작가로는 14세기 『무지의 구름』의 저자, 마이스터 에카르트, 16세기의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20세기의 토마스 머튼 등이 있다. 그리고 유념적인 접근의 성향을 가진 작가로는 아빌라의 테레사, 그리고 로욜라의 이냐시오 등을 말할 수 있겠다. 테레사의 주요 작품들인『천주자비의 글』, 『영혼의 성』, 『완덕의 길(the way of Per- fection)』은 유념적인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테레사는 말이나 개념을 넘어서는 무념적인 영적 체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반대로 무념적인 전통에 뿌리를 둔 머튼이나 십자가의 요한이 많은 이미지나 개념, 또는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위-디오니시오도 그의 저서 『신의 이름들(the Divine Names)』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긍정하는 유념적인 접근을 사용하지만, 이 긍정의 길을 통해 언제나 하나님을 완전하게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무념적인 접근과 유념적인 접근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과 접근에서 서로의 방향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찾아감이라는 목적에 있어서는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이 두 개의 길은 우월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서로 조화를 이룰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목표를 위해서 말이다.55)

  긍정적인(kataphatic) 방법은 단어, 개념, 이미지, 상징, 결단 등으로 이루어지는 기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기도하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며, 자신의 양심을 성찰하며, 더 선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세상에 나가서 기도한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긍정적인(kataphaic)"이라는 단어는 "아래로"(down)라는 의미를 가진 Kata와 "연설(speech)"라는 의미를 지닌 phasis라는 두 개의 헬라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적인 전통에서는 우리의 지식과 단어와 이미지와 감각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상대방을 말로 꼼짝 못하게 함(talking down)"으로써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신성에 대해 말한다.
  긍정적인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긍정하는 방법이다. 이 전통에서는 기도를 하나의 관계로 간주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속한 것을 연구하여, 그 원리들과 통찰들을 우리의 기도 관계에 적용한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에, 우리는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을 확인한다. 그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보고 아는 모든 것을 능가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개념과 이미지와 상징 등을 인정하는 이 전통의 대표적 인물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St. Ignatius of Loyola)이며, 이 시대의 주도적인 옹호자는 테이야르 드 샤르뎅(Thilhardde Chardin)이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며, 하나님은 피조 세계 안에 현존하신다.

  부정적인(apophatic) 전통은 긍정적인 전통과 균형을 이루는 또 다른 방법이다. "부정적인(apophαni)"이라는 헬라어는 어떤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 전통은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을 지닌다. 이 전통에서는 우리가 육안으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말로는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고 의식한다. 이것은 무한한 것에게 굴복하는 방법, 자신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그것을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이것은 역설, 언어의 절제, 궁극적으로는 침묵의 방법이다. 이것은 복종,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수용의 방법이다.
  부정의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하는 부정의 방법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상징이나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망각에 의해서, 무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이런 방법에 의한 하나님 이해에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내가 어떤 예를 사용해도, 나의 말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묘사할 수 없고, 나의 지성과 유한한 기능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쉬는 것,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뿐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지에 대해서 더 잘 안다. 우리의 정신은 개념이나 이미지나 상징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두워진다. 이 전통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의 저자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역시 이 전통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물론 긍정적 전통이나 부정적 전통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두 전통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하면서도 인간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긍정하기 위해서 성경에 계시된 단어나 성례전이나 상징을 의지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두 전통은 기도에 대해 총제적으로 묘사한다.
  긍정의 방법은 우리가 기도 생활을 제한하는 이미지들을 방출할 수 있게 해준다. 부정의 전통은 우리가 이미지들을 포기해야한다는 것, 그것을 초월하는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준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방법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의지하며,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가 필요하며,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긍정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이다. 부정의 방법과 관련하여, 영적 고전인 『무지의 구름』과 "집중기도"에 초점을 두려 한다.56)


3.  관상의 두 길

  영성사에서 말하는 관상의 길은 전통적으로 주부적 관상과 습득적 관상 두 종류57)로 크게 나누고 있다.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혹은 수동적 관상은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다. 특징은 일체의 영성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의 경험을 주장하는 전통이다. 관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 영성의 흐름은 안토니오,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요한, 토머스 머턴에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이미지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만큼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에게만 속한 무한한 속성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우리에게 있다. 이 비유사성을 제거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피조물이나 인간의 개념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나 속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것이다.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달려갈 때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깊은 심연은 결코 감각으로도 지적인 인식작용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전한 영의 세계요, 절대적인 세계이다. 이 순수한 속에서 개념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58)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혹은 능동적 관상으로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이다. 특징은 모든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전통으로 이야시오식 관상이 여기에 해당된다.59)
  유념의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 상상력을 사용하여 관상경험에 이르는 기도를 '이냐시오식 영신수련'을 들 수 있다.  로욜라 이냐시오는 회심과정이나 그 이후의 영성수련과정을 볼 때 그의 영성적 경험에 있어서 그의 풍부한 상상력이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냐시오식 관상기도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1)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공적사상에 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2) 상상력은 정화되지 못한 우리의 비이성적인 내면세계에 대한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상상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 반대하거나 경계만 할 일은 아니다. 상상력의 극치 그 자체가 관상체험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관상으로 들어가는 좋은 길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초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만남을 주도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우리의 모든 활동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와 교제하시도록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주를 사랑하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만물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나님 임재의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만물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새로운 눈과 귀로 세상을 본다.
  당신은 "기도가 당신으로 하여금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깊이 의식하게 만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실체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스며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잠재적인 기도의 수도장이다.
 
  습득적 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쉽다. 그것을 행하여 이러한 효과를 거두었고, 앞으로 그것을 행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된다. 주부적 관상과 관련하여, 기도자가 실제로 아는 것은 그곳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어느 수준의 친밀함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알지 못한다. 시나 이미지나 알레고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느 수준의 의사소통이 발생한다. 우리는 편안하게 경험의 영 안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이 사랑의 연합에서부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의 지식이 흘러나온다. 이 사랑의 지식의 주부적 특성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임을 가리켜 준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자신이 이러한 하나 됨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선물이다.


4. 관상에 이르는 길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인간 조건의 두드러진 착각이다. 영적 여정은 이것을 치유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기도가 메마른 것을 하나님께서 부재하셨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침묵은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이다. 그 외의 것은 어설픈 번역인 것이다. 그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내적 고요에로 이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이 아니고 직관적 기능에 넣어 주시는 순수한 믿음의 결과에서 온다. 처음에 우리는 건조함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순수한 믿음의 훈련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겸손이라고 하는 두 가지 열매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자신의 글에서 기도의 단계를 7궁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영성신학자 조던 오먼은 데레사의 7궁방을 9단계로 세분화하여 기술하고 있다.60)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4단계를 말하나 마지막 단계는 천국에서 이루어질 일로 이 땅에서의 3단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기도의 3단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관상에 이르는 데는 세 단계의 삶(정화, 조명, 일치)이 있다.
                 
  아주 오래된 기독교 전승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을 탐구하며 성숙해 가는데 세 단계 또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정화의 길, 조명의  길, 합일의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 단계는 두 번째 단계에 포함되고 첫째, 둘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에 포함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실상 삶의 대부분을 이 세길 사이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위에 말한 길 중에 둘이나 심지어는 세 가지 길을 동시에 밟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에 있는 단계는 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1) 정화의 길이다.  (능동적. 자신을 비우기)
   우리는 하나님께 끌리면서도 세속의 유혹과 죄의 습성, 윤리적 약점 또는 단순한 무지로 말미암아 사랑을 찾는 길에서 어떤 때는 뜨거워지고 어떤 때는 차가워집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엇 무엇을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로 드러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작입니다. 걸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기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요. 이 길을 정화의 단계(사랑하기)라 합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고 했다. 우리가 자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존재의 정화를 의미한다. 회심 자체가 매우 급작스럽게 혹은 매우 감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화의 작업은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기를 힘써야 한다. 정화의 단계는 외적 감각의 정화, 내적 감각의 정화, 정욕의 정화, 지성의 정화, 의지의 정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유혹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영성생활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내면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알려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조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2) 조명의 길이다. (수동적, 사랑하도록 맡기기)
   조명의 길에서 사실상 관상기도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열심히 찾게 됩니다. 종교는 문화 이상이며 진정한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도중에 잠시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정화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필요하면 언제라도 자진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달릴 수 있으려면 먼저 걷기부터 해야 합니다.  이 길이 조명의 단계 (사랑하도록 맡기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총의 능력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죄악의 길로 다시 빠질 수도 없고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맑고 밝은 내적인 평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정반대로 내적인 소동을 경험한다. 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범죄의 가능성과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적인 비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지하며, 여전히 그 길을 걷는데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기 포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정화단계에서의 정화가 능동적인 것이라면, 조명단계에서의 정화는 수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3) 일치(합일, 하나 되는)의 길이다.  (사랑 나누기)
   조명의 단계를 지나며 자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거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바로 완성의 단계인 일치의 단계(사랑 나누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마치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나는 구름처럼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상상과 기억이 점차로 사라지면서 깊은 평정의 감각을 갖게 된다.  모든 기능이 잠잠해지고 하나님 안으로 빠져들어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일치의 기도'이다.  이것은 성인들의 길이지만 우리 모두 부름 받은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길에 한 발을 (아니면 두 발을 모두) 들여놓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어쩌면 그대는 이처럼 높은 단계에 그대 자신을 올려놓기가 두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마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 하거나 “이 세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특별한 벗들만을 위한 자리”라고 말하겠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세 번째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특별한 벗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대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벗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그저 솔직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거룩함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그대가 획득해야 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미 그대를 위해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 팔을 벌려 주님을 향해 달리십시오. 세 번째 길에 걸맞는 특별한 종류의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 이  작은 책은 그대를 이 같은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합일로 차분히 인도하여 그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