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잠심과 분심

1. 잠심(내적 침묵)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 '하나님 현존'을 인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잠심' 뿐입니다.2) 잠심하여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 가슴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새겨지면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면서 살아갑니까? 예수님이 내 옆에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우리도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은 예수님이 얼마나 깊이 내 안에 현존해 계시는가를 느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1).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음 좋은 통치자가 되려면 들리지 않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상인으로 성공하려면 들리지 않는 소비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가능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슴속에 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면,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더욱 깊은 수준에서 경청할 때 더 잘 듣고 더 잘 볼 수 있으며, 더욱 깊은 수준에서 침묵할 때 하나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 그것은 풀포기에서 듣는 소리, 산과 강과 하늘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그 속에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잠심 상태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생각과 고민에서 벗어나 내부의식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2). 하나님의 현존 체험을 위한 잠심 생각이 너무 많으면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생각을 멈추어야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TV로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TV, FM, AM방송의 주파수 영역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뇌파                                           심신의 상태
22Hz 이상 14-21Hz                       불안 및 흥분
7-14Hz                                                     깨어 있는 평상시의 뇌파 외계와 대응하여 긴장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의식적인 활동 상태.
                                                  물질계(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간, 공간)를 인식함.

4-7Hz                                                        주의 집중과 약간의 긴장(14Hz근처). 정신통일 상태 자연의 소리 청취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기도할 때.

1-4Hz                                                       
깊은 명상 또는 졸음 상태 (4Hz 근처)깊은 수면(무의식)표 : 뇌파에 다른 심신의 상태

기독교방송은 93.9MHz, 98.1MHz 교통방송은 95.1MHz로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주파수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 주파수가 바로 잠심상태입니다. 바로 위 뇌파에 따른 심신의 상태 표와 아래의 상태별 뇌파비교 그림을 참고바랍니다.

fig_뇌파비교.jpg


잠심상태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식 수준의 뇌파에 머물면 잠심 상태의 뇌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리를 느끼기 위해서는 잠심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림 상태별 뇌파 비교 그림과 뇌파와 기도 상태 비교 그림을 참고바랍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각, 촉각, 미각, 청각, 후각 등 다섯가지 감각(오감)이 있습니다. 물질세계를 판단하는 기능으로 볼 때 이 다섯 감각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감각기능 망에 하나님이 잡히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미각은 맛밖에 모르고, 청각은 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듣지 못합니다. 수신기가 있어야 먼 곳에서 날아오는 전파를 잡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실존을 감지하려면 이 다섯 감각기능이 아닌 잠심 상태에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힘듭니다. 뇌파와 기도상태 그림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미흡하지만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fig_뇌파와 기도상태.jpg



잠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잔잔한 호수 같은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한 것뿐이고, 비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밝게 보일 뿐입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고 비가 쏟아지면 그런 평안은 사라집니다. 진정한 잠심은 목포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잠심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잠심 상태에 지속적으로 잘 머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조건을 살펴보겠습니다.

3). 잠심을 위한 외적 조건 잠심 상태에 잘 머물러 있기 위한 외적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입니다.

(1) 인내 우리에게는 한두 번 기도하고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너무나 급한 성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솟구쳐 오르면 몇 번 기도해 보고, 아무 느낌이 없으면 그 열망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뜻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가야합니다. 인내는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리며 땀 흘려 밭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역할 혼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역할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잠심 상태에 머무는 데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2) 여유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여유입니다.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기도하면서도 수 만가지 일을 떠올리게 되어 머리로 생각하고 정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멈추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둘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가볍게 허공을 나는 깃털처럼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때 진정한 침묵의 상태에 머무르게 될 수 있습니다.

(3) 갈망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세 번째 요소가 갈망입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의 울음소리를 식별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우리의 간절한 소리를 얼마나 잘 구별하시겠습니까! 누구든 간절한 열망이 있으면 쉽게 잠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 울음소리와 같이 건성으로 임한다면 잠심에 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잠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할 때 여유를 가지고 되도록 천천히 잠심에 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갈망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슴에 간직하여 기도에 임한다면 날로 깊은 잠심에 이를 수가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 현존 체험이 깊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현존 체험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과의 관계가 더 친밀하게 변화됩니다.

결국 잠심을 위한 외적인 조건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인데,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체득해야 합니다. 체득할 때 더 이상 우리는 인내할 필요도 없고, 여유를 가질 필요도, 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체득하면 내가 하는 행위 자체에서 인내와 여유와 갈망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버려라"고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는 사라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체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체득할 때 잠심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자연스럽게 체험될 수 있습니다.

4). 잠심을 위한 내적 조건 침묵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인데, 그것은 심리적인 것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 사고(思考)와 소음이 일어날 때 그것에 대꾸하거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고 나의 감정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기도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와 여유와 갈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내적 사고와 소음이 줄어든 내적 침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 중에 흥미를 끄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이것들이 기도 중에는 아주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 같아서 그것을 좇아서 생각하고 상상하게 되는데, 끝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 보이는 것들도 흘려보내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 현존을 체험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면서 어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생각과 상상이 끊임없이 나에게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는 하나님의 현존만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가 애쓸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고 애쓰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생각이나 상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 현존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렇게 되는지를 걱정합니다. 이 걱정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걱정은 기도를 못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케 합니다. 우리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면 하나님의 현존이 체험되는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思考)나 상상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대로 일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과의 일치도 한층 완전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기대도 집착도 욕망도 전혀 없습니다.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영적인 위안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영적인 위안이란 없을 것입니다. 집착과 욕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위안이 당신에게로 밀려옴을 느끼고, 그 때가 바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순간입니다.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완전하게 하나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2. 잠심의 걸림돌 - 욕심

우리의 잠심 상태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은 우리의 내부의식을 분리시켜 우리가 잠심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궁수가 재미로 활을 쓸 때 그의 온 기술을 다해서 쏩니다. 만일 금메달을 얻기 위해 쓴다면, 신경과민 증세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금메달에 마음을 쏟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술은 변함없으나 금메달이라는 상 때문에 그는 활을 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에 신경을 더 써서 스스로 분열됩니다. 그래서 이겨야 할 필요성이 그의 힘을 고갈시켜 버립니다. 이처럼 욕심은 우리 자신을 분열시킵니다. 만일 사람이 돈이나 명예 등을 위해 경쟁한다면, 또 성취해야 할 어떤 결과에 지나친 욕망을 갖게 된다면, 그는 어느새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잠심하려면 걸림돌이 되는 이 욕심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욕심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단 욕심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욕심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뿌리를 알게 됩니다. 그 뿌리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3) 첫째는 '과거의 경험'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한(恨)으로 바뀌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됩니다. 두 번째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납니다. 세 번째는' 경쟁과 비교' 인데, 비교 대상이 아닌 인간을 서로 비교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1). 과거 경험 과거 경험이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형성된 자신의 틀이나 관념을 말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틀 안으로 대상이 들어오기 때문에,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려면 내 틀을 버려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형성시킨 틀 즉 과거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화, 치유 또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껍데기만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상대의 속을 보아야 하는데, 겉에 나타나는 껍데기에 신경을 쓰고 껍데기를 보고 껍데기만을 판단하면, '참다운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과거 경험에서 해방되어 선입견을 버리고 그 속에 있는 알맹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 껍데기를 알아차리면 우리의 유리창에 있는 얼룩이 닦이는데, 그 때에 바로 정화되고 치유된 상태인 '참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대상이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고, 사랑이 시작되며,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였듯이, 우리 자신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즉 우리 행동에서 얼마만큼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는 완전한 자아포기(kenosis)입니다. 이 자아포기는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 같은 인간적인 기능을 넘어서 단순히 하나님 안에 머무름을 의미하며, 욕심이 사라지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 그 자체가 중요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많은 활동으로 말미암아 기도 안에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버리는 것이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정보사회에서 발생되는 관념화 때문에 우리는 관념에 의존하게 되어 인간적인 투사(投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관념화나 투사는 하나님을 하나님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자신의 관점이나 개념이나 상상에 비추어 보는 위험이 따릅니다. 이러한 과거 경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관념화 등은 우리와 대상 사이에서 필터(유리창의 얼룩)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들어오고, 있는 그대로 대상 쪽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바로 과거 경험을 통해 오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2).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 욕심이 생기는 두 번째 뿌리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자신의 신체조건, 능력, 재능, 본능, 문화, 전통, 종교 등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사회의 요구와 내가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월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자신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감이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고,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맞는 땅을 찾고 거기에 맞는 식물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나(껍데기)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알맹이)를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미소하다 할지라도 감사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없는,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유함을 찾을 때 더 이상 환경으로부터 오는 욕심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3). 경쟁과 비교 세 번째 뿌리는 경쟁과 비교로, 나와 다른 것을 비교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남을 비교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비교하고, 행복과 불행을 비교하고, 슬픔과 기쁨을 비교합니다. 이러한 비교로 물질적인 진보나 어느 정도의 영적인 향상을 이를 수도 있지만, 한층 깊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나가는 것을 잡거나 흘러가는 것을 멈추게 하지 않고 나를 투과해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연한 태도가 비교와 경쟁을 없앨 수 있습니다. 물결이 없는 고요한 물처럼, 또는 물 위에 나무토막을 띄어 놓고 그냥 그 물결에 맡기듯이, 그렇게 내 가슴속에서 나오는 것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욕심은 더 이상 내 안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삶에서 그 욕심을 다스리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욕심을 없애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태풍에 비유한다면, 욕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마음을 밖으로 향해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는 것입니다.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음을 안으로 향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태풍의 눈, 즉 고요함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두어 욕심을 없애야 합니다. 태풍의 중심에는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고요한 중심이 있어야 태풍이 존재할 수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 지어내는 온갖 생각도 그것들의 중심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일어날 때 욕심을 억눌러서 없애려고 한다면, 그것은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욕심이 존재하도록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거기에 휩싸이지도 말고, 그것을 억압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놔두십시오, 즉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모욕할 때 그 말을 듣고 있는 당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단지 듣기만 하십시오. 그 사람은 당신을 욕하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당신을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욕이든, 칭찬이든, 명예나 불명예든 단지 듣기만 하십시오. 그것이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이 안으로 향하는 것이며, 고요함을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주변은 반응을 일으키며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 역시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그 상태를 바꾸지 말고, 그저 바라보십시오. 태풍의 중심에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의 중심에 깊이 들어앉아서 말입니다. 아무리 모욕적인 일을 당한 순간이라도 거기에 개입하지 말고 사람들이 당신에게 모욕을 주는 장면을 느긋하게 구경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객관화'시키는 것이고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태풍의 안에서 상승기류가 일어나듯이, 홀로 존재하는 의식을 깨닫게 되면 초월이 일어납니다. 모든 욕심들이 사라지는 그 때가 기도의 진정한 맛을 들이는 때이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도에 맛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욕심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2. 분심(다양한 사고)

1). 보통 종류의 사고들 관상의 이 초기 단계에서 사고(思考)들 때문에 큰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과 그 사고들의 형태들을 분간하는 것이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하여 중요하게 된다.

(1) 가장 쉽게 분간되는 것은 보통의 산만한 상상들이다.4)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으려고 목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내적 침묵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상대적 침묵을 말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적 침묵을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에 정진하다보면 당신은 새로운 습관 새로운 능력이 개발될 것인데 그중의 하나가 동시에 두 개의 의식 수준에서 의식하는 능력이다. 당신은 주위의 소음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주의가 어떤 깊은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터인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곤란하겠지만 결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은 멀지 않아 외부의 소음에 대하여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둘레에 벽을 쌓을 수 있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소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소음은 당신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이것들과 싸우고 씨름하고 혹은 그 소음들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면 당신은 어떤 특정한 소음에 사로잡히고 말게 된다. 당신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겠지만 점차로 당신 주변에서 소음이 일더라도 깊은 수준에서 즐거운 침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상상들에 대한 가장 좋은 반응은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짜증이나 불쾌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감정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응답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순간에 실제로 있는 일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만한 상상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당신이 평정으로 들어가기를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사고들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결책은 마음을 완전히 공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관상기도의 전 기간 중에 우리는 내적 침묵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한다. 기도자의 내적 주의(注意)는 바람이 자는 날에 풍선이 땅에 닿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오고 그러면 풍선은 다시 떠오른다. 이와 비슷하게 침묵기도 중에는 가장 즐거운 침묵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에 감질나게 튀어나오는 순간을 맛보는 경우들이 있다. 이때가 바로 어떤 원치 않는 사고들이 의식 속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이때에 침묵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언짢게 생각하지 말고 사고를 받아들이는 데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 그저 단순히 다시 시작하라. 이와 같은 끊임없는 인내와 평정과 받아들임은 우리 전 인생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 만든다.

(2) 침묵기도 중에 의식의 흐름 속으로 두 번째 종류의 사고가 끼어드는데, 그것은 당신의 산만한 상상 중에 어떤 특정한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침묵기도 중에, 당신이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단순히 그 주의를 하나님께로 돌린다. 이러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표시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거룩한 단어가 마치 마음을 비워 주는 요술이나 되는 것처럼 이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거나 이 단어를 당신의 의식 속에 강제로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옴으로써 당신은 하나님과의 대화로 돌아오고 그분과의 일치를 바란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복(承服)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어떤 기능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임을 명심하라. 이 기도에서 침묵으로 당신을 준비시켜라. 그러면 기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당신의 문제로 삼으면 당신은 즉각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무엇보다도 순수한 믿음이 당신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체험에 매달리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인 것이다. 관상기도 시간은 당신의 모든 사고 -심지어 아주 좋은 사고라도 그것을 떠나보내는 시간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좋은 사고였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2).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의지의 행위 중에 가장 으뜸가는 행위는 노력이 아니라 동의(同意)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비결은 그 어려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지란 유효성이라기보다는 정서성이다. 어떤 일을 의지의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적절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기적인 습관들이 의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자유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심에, 그리고 은총이 흘러 들어옴에 대해 더욱 동의하도록 의지는 활동한다. 하나님이 더 활동하시고 당신이 덜 활동할 수륵 기도는 더 잘된다. 처음에는 거룩한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여야함을 의식할 것이다. 이것을 더 잘 표현하려면, 이러한 의지의 황동은 단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 혹은 인식 속에 거룩한 단어를 살짝 얹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의지가 섬세하게 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상징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에 계속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이미 내 안에 현존하시므로 그 분을 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상징이다. 결국에 가서, 의지는 그 상징이 없이도 동의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기도 중에 의지가 하는 일은 정말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을 받아들임, 이것이 관상 기도 중에 하는 으뜸가는 일인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승복시키는 일은 동의 중에서도 더욱 발전된 동의라 할 수 있다. 변형(變形)은 완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변형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변형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은 할 수 있다. 이 기도가 습관화되면, 신비스러우며 분간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평화스런 하나님의 현존이 당신 내면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 일단 한번 형성되면 그 고요한 현존은 항상 거기 머물러 계시며 그 현존이 바로기도의 방법이 된다.

이것은 '절대 신비이신 분'을 기다린다는 단순한 태도이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믿음이 순수해지면 이것을 알려고 들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인간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그분을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무엇을 기대하는 일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여정은 무지(無知, unknown)로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모든 정신 구조와 심리적 안전장치와 심지어 지주(支柱) 노릇을 하던 영적 수련도 떠나서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이다. 거짓 자아 체제를 구성하는 것 모두를 뒤로 남겨 두고 떠나는 여정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다.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가셨다. 거기서 그분은 자신의 신?인적 자아(Divine-Human Self) 마저 희생하셨다. 그리스도와 개인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나머지 여정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우리의 영적 훈련은 먼저 거짓 자아를 부숴 버리려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진지한지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화(淨化)를 손수 다루시고, 깊이뿌리 박은 우리의 거짓 자아를 불러내시어 우리가 그것을 버리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들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덕(德)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당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그와 비슷하게 다루신다. 가나안 여인의 경우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감각의 어두운 밤을 거치는 사람의 훌륭한 예(例)이다.(마 15:26~27를 찾아 읽어라) 어떤 때는 아무런 사고도 없다. 다만 나의 자각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 사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그 인식이 곧 사고이다. 그 때에 당신이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그 인식마저도 잊어야 한다. 순수한 의식(pure comsciousness)에서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당신은 잠을 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일상적인 심리적 기능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평화로운 기쁨의 감각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이 자고 있지 않았다는 좋은 표시이다. 그곳에서는 인식(awareness)만 남는다. 인식하는 자는 사라지고 이와 함께 의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일치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이 경험이 당신을 관상상태로 이끌어 간다. 당신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어떤 사고가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다’라는 인식을 갖고 싶어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 자신을 떠나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어떠한 사고도 떠나보내려고 하지 않고는 떠나보냄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 우리는 관상에서 떠나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떠나보내는 수련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어떤 사고든지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한번 하나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영적인 소통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 신적 일치가 사라지게 된다. 환시, 탈혼, 내적 음성, 영적교감, 심령 선물 등에 매달리지 말아라. 이것들은 순수한 의식보다 가치가 덜한 것들이다. 영적 위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기란 매우 힘들다. 특히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을 때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내적 침묵에 접근하고 충분한 시간 수련하면 당신은 매달리는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점차로 당신은 내적 침묵에 익숙해질 것이다. 관상 기도의 초기단계에서 당신이 느꼈던 기쁜 평화는 점차 정상적인 경험이 된다. 인생의 어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관상 기도에 익숙해져서 당신이 받은 커다란 선물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만일 사고들이 지나가는데도 당신이 그것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침묵의 기도 속에 들어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모든 기능들이 하나님에게 맡겨졌을 때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적 여정의 끝은 아니다.

3). 더 섬세한 종류의 사고들 (1) 관상기도에 들어가려고 할 때 처음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오르는 첫번째 종류의 사고는 시시한 공상들이다. 이것들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하던 일이나 하고 있던 일에 관한 것들일 수도 있다. 혹은 외부의 소음이나, 분명한 기억들, 혹은 앞으로의 계획들이 나의 주의를 끌어당길 수 있다. 키딩은 비유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뜨 내려오는 배들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이것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 안에 들어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사고로부터 그 단어가 재 확인시키는대로 일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여 나가라. 그래서 그 보트를 떠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리고 다른 보트가 와도 또 떠내려 보내라. 한 무리의 보트가 떠 내려와도 그것들을 또 떠나보내라. 당신은 고요함을 원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것들이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조금씩 당신에게 두 가지의 주의(注意)가 형성되어 갈 것이다. 당신은 표면적인 사고를 의식한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동시에 당신을 끌어당기는 신비적이며 분간할 수 없는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깊은 내면의 의식이며 영이 갖는 주의성이다. 당신은 동시에 두 가지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다. 표면의 사고들을 걱정하는것보다 내면의 깊은 의식이 발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표면적인 사고들은 얼마 안 가 당신의 마음을 끌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두 번째로 당신의 의식을 타고 내려오는 사고는 눈에 뜨이는 보트로서 당신의 주의를 끌어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 배 위에 오르고 싶게 한다. 거기에 끌리어 배에 오르면 당신은 그 배와 함께 떠내려가게 된다. 당신은 어떤 정도든 그 사고와 동일시한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에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원래의 지향으로 돌아가라. 거룩한 단어는 마음에 끌리는 사고에 집착하는 경향에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당신이 거기에 말려들었거나 막 말려들려고 함을 알아차리면 즉시 그러나 부드러운 내심의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떠나보내라. 어떤 종류이건 저항하는 것도 일종의 사고이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을 수반하는 사고이다. 감정이 수반된 사고는 하나님의 신비하신 현존을 기다리는 당신의 의향에 방해가 된다. 모든 사고들을 떠나보내라. 그리고 어떤 사고에 끌리는 유혹이 생기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당신이 조용히 자리 잡고 어떤 평화를 누리고자 할 때, 당신은 어떠한 사고도 원치 않는다. 당신은 단지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러면 다른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 여정에 대한 아주 밝은 아이디어이거나 당신의 과거 삶에 대한 심리적 반성일 수도 있다. 당신이 가족과 가지고 있던 문제에 대해 갑자기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친구와의 논쟁에서 완벽한 논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물론 당신이 기도에서 나왔을 때에 그 밝은 아이디어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침묵의 깊은 물 속이라는 어둠에서 볼 때에는 놀랄 만하게 보였던 것들도 밝은 빛 속에서 볼 때에 그것들은 당신에게 던져진 미끼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당신은 누구를 위해 아주 긴급하게 기도할 마음이 솟구쳐 올라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때는 그러한 기도를 할 때가 아니다. 이때에는 어떠한 노력도 역생산적이다. 이때는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시는 기회이다. 이것은 당신께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과 같다. 당신의 친구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 기도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의 침묵을 듣는 것이다. 이때에 당신이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고를 떠나보냄으로써 내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든지 아니면 외적으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일이다.

설교자나 신학자들은 좋은 생각들 때문에 특히 문제를 안고 있다. 침묵을 지키고 앉기만 하면 어떤 기막힌 영감이 떠오른다. 여러 해 동안 씨름하던 신학적 문제들이 갑자기 수정(水晶)을 보듯 명백해진다. 그 사람들은 이때에 "이 문제를 몇 초만 더 생각해 보자. 그래야 내가 기도를 끝냈을 때 이것을 잊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야말로 그들의 내적 침묵이 끝나 버리는 때이다. 그들이 기도를 끝내고 난 다음에 그 명석한 아이디어들을 기억조차 못한다. 사람이 깊은 침묵에 들어가면, 아주 밝은 지적 빛을 받기가 쉬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착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서 우리와 가장 잘 소통하실 수 있다. 이 수준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 안에 흔적이 없다. 우리의 심적 기능으로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 적절하게 그분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만 그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신비가들이 무지(無知, unknowing)5)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금 그분을 우리가 아는 대로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다. 환시, 내적 음성, 황홀경 등은 케이크에 얹어 놓은 장식 크림과 같을 뿐이다. 영적 여정의 본질은 순수한 믿음이다.

관상 기도에는 인식의 즉시성(卽時性, immediacy)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어린이의 단순성을 재발견하는 하나의 경로이다. 어린아기가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어린이는 자기가 본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본다는 행동 때문에 기쁨을 갖는다. 성장하면서 우리가 분석적인 판단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있는 대로 즐기는 것, 즉 단순히 존재하는 것과 단순히 행하는 것의 가치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관상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심리적 체험을 무시하면서 일어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신이 평화를 느끼면 그대로 좋다. 그것에 대해 생각지 말라. 그것을 그대로 즐기면서 그것을 성찰하지 말라.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당신은 거기에 대해 더욱 말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관념화하려 들면 당신은 상상과 기억과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깊이나 즉시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이와 같은 태도가 더 의미 있다.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예수의 팔에 안겨 쉬어라. 이것은 행위(doing)하는 수련이 아니라 존재(being)하는 수련이다. 그러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더 큰 효과와 기쁨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게 만든다. 관상 기도는 성령의 힘에 자신을 열어 드린다. 그러면 당신을 내어 줄 능력이 하루 종일 유지할 수 있게 늘어난다. 당신은 어려운 삼황에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며, 때로는 불가능한상황도 견디어 낼 것이다.

(3)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당신이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그래서 그 사고가 아무리 멋지고 좋아 보이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잊어야 한다. 그 밝은 생각은 나중에 다루라. 그러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동기의 순수함을 계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려는 태도, 심지어 자신의 사고와 감정 같은 것들도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본능적 태도는 털어 버려야 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영적인 체험에 굶주려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해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체험을 잡으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쓰라리게 체험하면서 그것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깊은 평화를 갈구하는 태도에 집착하는 것을 떠나보내고 나면, 더 이상 영적 체험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게 되면서 내적 자유와 정련된 기쁨을 얻는 체험으로 옮겨 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제야 우리는 그것을 얻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즉시 떠나가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마음 없이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의식을 흘러 내려가는 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하나님의 체험도 모두 지나가 버리도록 떠나 보내야한다. 일단 우리의 목표가 어떠한 영적인 체험 이상의 것임을 안 이상 우리가 여정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것에도 매달려서는 안 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기어가면서도 여정을 계속하면 마침내 성령께 순종하는 데서 오는 열매인 내적 자유에 도달할 것이다.

영적인 위안은 그 현존에서 나오는 빛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현존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알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직접 아는 일은 다음 세상에서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그래도 좀 더 가깝게 아는 것은 순수한 믿음에 의해서이며, 순수한 믿음은 사고와, 감정과 자아 성찰 저 너머의 것이다. 순수한 믿음은 심리적 체험이 없는 곳에서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감각과 관념적 체험 너머의 분이시다. 순수한 믿음의 상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것 너머에 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현존이 어디에나 계심을 깨닫는다. 단지 그뿐이다. 우리 자신을 충분히 활짝 열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임을 인식하게 된다.

(4) 네 번째 종류의 사고도 우리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일종의 빛나는 어둠과 같은 신비한 충만감이 우리를 감싸 주고 우리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에는 비록 원하지 않는 일상적 사고들을 희미하게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깊은 고요를 즐길 수 있다. 이 사고들에 붙잡히면 즐기던 평화에서 빠져 나오게 되기 때문에 이때의 사고들은 기분 나쁘게 만든다. 때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마음조차 없다. 이때에 우리는 나의 깊은 존재를 부드럽게 도유하는 것 같은 빛과 사랑에 잠기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가운데 커다란 입맞춤을 하고 계시며, 이와 동시에 모든 상처와 의혹과 죄악감을 송두리째 치유하시는 것과 같다. 궁극적 신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체험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수와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말끔히 용서받고 잊혀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 침묵 속에서, 그 무사고(無思考)와 무념(無念)과 무한한 평화의 상태 속에서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마침내 내가 어느 곳에 도달하였구나!", "이 평화는 아주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잠시 시간을 내어서 기억해 두면, 내일은 지체 없이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 텐데."와 같은 사고(思考) 말이다. 이런 사고가 들면 마치 번개처럼 당신은 그 속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당신은 "하나님 맙소사! 뭐가 잘못된 거야!"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4).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가끔 분심이 문제가 된다. 우리가 편히 긴장을 풀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을 드릴 수도 없을 때가 있다. 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곤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이런 약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을 위해서 쏟아 붓는 '희생 제물'로 생각하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전부이고 자신은 아무것도아니라는 사실에 전적인 신뢰와 기쁨을 느낄 때에, 진정하고 유일한 평화를 향유하게 된다.

여기에 분심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의식을 최대한으로 그분의 현존에 계속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 두 가지가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분심들은 묵상자가 즉시 물리쳐버리는 것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는 지성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게으름을 부리는 반면에 상상력은 혼자서 방황하며, 의지는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 이런 분심은 무해한 것이다. 둘째 번 종류의 분심이 기도 동안에 내내 계속되었다 해도, 그 기도는 잘된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더 좋은 기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지는 하나님께 일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불만을 느끼고 더욱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께 고정되어 있는 동안 '무해하게' 방황하는 우리의 공상이다. 여기서 이 공상은 방안에 있는 우리의 애완용 신상(神像)과 같다. 우리는 이 신상이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를 바라지만, 이 신상은 계속 돌아다닌다. 규칙적인 숨쉬기와 반복기도, 이 두 가지가 개목걸이처럼 공상이 너무 심하게 또는 너무 멀리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막아 줄 것이다!6)

규칙적인 숨쉬기나 반복기도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기도 중에 숨쉬기나 반복기도를 위해서 마음 쓰는 것 또한 분심거리가 된다. 애서 노력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중에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라. 분심이 아주 심해서 도저히 더 이상 기도하기 힘들 경우에는 규칙적인 숨쉬기나 반복기도를 도구로 사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


3. 무지의 구름과 이탈

14세기 말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 -ing)7)에서는 집중기도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하며, 그 기도의 기초를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안에 둔다. 버젤 페닝턴(Basil Pen- nington)은 『무지의 구름』의 주요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8)

*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은 모두 잊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이것이 바로 관상의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하나님 체험을 하게 하신다.* 활동적인 봉사 생활의 소명을 받은 신자들도 이따금 활동을 중지하고 묵상과 하나님의 교제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무지의 구름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랑 안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 사랑은 다른 모든 소원과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만들만큼 강해야 한다.*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당신이나 현재의 당신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장차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신다.* 우리 영의 굶주림과 동경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변화된 영은 사랑에 의해 하나님을 포용할 수 있다.

간단한 단어 사용과 이탈(detachment)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기도하는 동안에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생각, 모든 개념, 모든 심상을 "망각의 구름"(cloud of forgetting) 밑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9)만일 당신의 모든 소원을 정신이 보유할 수 있는 하나의 간단한 단어 안에 모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긴 단어보다는 짧은 단어, 한 음절로 된 단어를 선택하라. 하나님이나 사랑 등의 단어가 적절하다.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정신 속에 담아두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곳에 머물게 하라. 당신이 갈등할 때나 평화로울 때에, 그 단어가 방어물이 되어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어두움의 구름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 단어를 사용하라. 모든 분심을 억제하며, 그것들을 당신 밑에 있는 망각의 구름에게 맡기라.

그 단어가 분명한 생각이나 현실적인 소리가 없는 완전히 내면적인 것이면 좋다.

그 단어로 기도할 때에는, 그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며, 그 단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 다만 그 단어와 함께 거하라. 저자는 무지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 속에 집어넣는 것을 구분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거나, 그것들이 처한 상황이거나 행동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모두 망각의 구름 밑에 묻어야 한다.

이것이 관상적인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요구되는 이탈의 정신이다.

어떤 생각이 계속 당신을 괴롭히면서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오직 한 단어로 대답하라. 만일 당신의 정신이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 단어의 가치는 단순성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렇게 하면, 그러한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생각들을 발전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즉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집중기도와 관련하여 크게 도움이 될 놀라운 통찰들이다. 집중기도의 세번째 지침은 "어떤 생각을 의식하게 될 때마다 부드럽게 가만히 그 거룩한 단어를 상기하라"이다. 여기에서의 통찰은 부드러움, 하나의 단어, 그리고 이탈의 중요 점에 있다.10) 예를 들어 보자 : 만일 내가 방 안에 있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정중하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나는 그저 대화를 추진한다. 거룩한 단어의 역할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를 하나의 일에 집중시켜주며, 다른 모든 것을 지나치거나 당분간 한쪽으로 밀어두게 한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기도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쳤었고, 그 방법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기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된 방법론을 알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 관습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을 대한다. 저자는 독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워크샵이나 개인적인 발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다음 그림의 기도의 주기(네 순간)이다.

fig_기도의 주기(네 순간).jpg

위 그림에서 보면 기도를 시작할 대는 평온한 상태이나 곧 사고(분심)가 의식의 강을 타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고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나타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한번 나타나는 과정을 표로 표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한 번의 사고뿐만 아니라 기도의 전 과정 중에 연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할 때마다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간다. 이 일이 반복되는 동안에 우리의 의식은 정화의 과정을 거치며 내적치유가 일어난다. 이러한 기도의 한 주기를 거칠 때마다 중심(신적임재)에 더 가까워진다. 그것은 억압된 장애들이 배설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의 주기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적일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무의식의 정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사고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사고는 처리의 대상이지 매달릴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고(분심)가 떠오르는 것을 인식하거든 즉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처음상태로 돌아감으로 더욱 하나님의 현존에 다가가야 한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한겹 한겹 벗기듯이 말이다. 이 길은 그저 수도하는 것뿐이다. 지름길이 없다 차분히 수도하며 신적일치를 사모하자.

 

4. 정신집중과 기도 방법11)

정신 집중과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들에 의해서 영혼이 들려 올려지고 앞으로 움직이거나, 버림을 받고 죽습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을 제 때에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옳지 못한 때에 지혜롭지 못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몸이 영혼에 연결되듯이, 정신집중도 기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정신집중이 마치 정탐꾼처럼 앞에서 나아가면서 원수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영혼 안에 들어오는 악한 생각들을 대적하는 데 우선적으로 채택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는 기도로서, 전부터 정신집중이 대적해온 악한 생각들을 근절하고 죽입니다. 정신집중만으로는 그것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정신집중과 기도에 의해서 생각들을 대적하는 이 싸움에 영혼의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집중에 의해서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하면 우리는 진보할 것이며,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는 상태로 버려둔다면 기도는 악한 생각으로 더럽혀지고 우리는 실패한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기도와 정신집중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므로, 구원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각 방법의 특징을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1). 첫째 방법 첫째 방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서서 기도하면서, 두 손과 눈과 정신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며, 하늘의 축복과 천사들의 계급들과 성도들의 거처를 상상하며, 성경에서 배운 모든 것을 정신 안에 모아들이며, 기도하는 동안에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경하게 만들며, 이따금 눈물을 흘리며 운다면, 이것이 정신집중과 기도의 첫째 방법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방법만 선택한다면, 그는 점차 무의식중에 마음속으로 자신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행하는 것은 그에게 주는 위로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듯합니다. 그는 자신이 항상 이러한 행동 안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즉, 이러한 기도 방법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방심과 기만의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이라도 바르게 행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 선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완전한 침묵에 자신을 바친다면(즉, 헤시카스트가 된다면), 미치는 것을 간신히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정신이 나간다면, 그는 덕이나 무정념을 획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방법에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눈으로 빛을 보거나 달콤한 냄새를 맡거나 어떤 소리를 듣거나 그 밖에 이와 비슷한 현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그것에 도취되어서 미친 상태에서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게 가장하고서 나타난 마귀를 빛의 사자로 알고서 길을 벗어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끝까지 그런 상태에 머뭅니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마귀의 부추김을 받아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목을 매 자살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심과 기만의 형태는 다양하고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집중과 기도의 첫 번째 방법으로부터 어떤 해로움이 오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살기 때문에 첫째 방법을 실천하는 동안에 이러한 악을 유발하는 일을 피한다 해도, 그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평생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2). 두 번째 방법 두 번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지각된 대상들로부터 정신을 떼어 내어 자신의 내면으로 인도하며, 자신의 감각을 지키고 생각을 집중시켜 이 세상의 헛된 것들 사이를 배회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각들을 성찰하고, 자신이 입으로 하는 기도의 표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마귀에게 강탈되어 악하고 헛된 것을 향해 날아가는 생각들을 거두어들이며, 어떤 정념에게 사로잡히고 정복된 후에 크게 수고하고 노력하여 정신을 차립니다. 이 방법의 특징은 머리속에서 발생하며, 생각이 생각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며, 진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덕을 실천할 시간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두움 밤에 원수들과 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원수들의 음성을 듣고 그들의 공격을 받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오는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공격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악한 생각들은 마음에서 발생하는데, 그는 머리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 원인은 그의 정신을 덮고 있는 어두움과 그의 생각에서 사납게 날뛰는 폭풍우입니다(그것들은 그가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자기의 원수인 귀신들에게서 빠져 나오거나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이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자신이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불쌍한 사람은 헛수고를 하는 것이며, 영원히 상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교만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판하며, 자신이 사람들을 먹이고 인도하는 목자의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그는 소경들을 인도하는 일을 맡은 소경과 같습니다. 이것이 정신집중과 기도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은 이것이 영혼에게 주는 해로움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달이 없는 어두운 밤보다는 달빛이 비추는 밤이 낫듯이, 이 방법은 첫째 방법보다 좋은 방법입니다.

3). 셋째 방법 세 번째 방법은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천해보지 않은 사람은 믿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으려합니다. 실제로 우리 시대에는 이 방법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축복은 순종과 함께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것 같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영적 아버지에게 완전히 순종한다면, 그는 그분의 어깨에 자신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모든 염려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심과 기만에 예속되지 않은 참된 영적아버지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적인 애착을 멀리하고, 부지런히 세 번째 방법을 실천하려 할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여 모든 염려를 하나님과 영적 아버지에게 맡긴 사람,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거나 자기의 의지를 따르지 않으며 세상적인 애착과 자기의 몸에 대해서 죽은 사람을 이 세상의 비본질적인 것이 정복하여 노예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런 사람에게 무슨 걱정이나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유혹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귀신들이 사용하는 궤계와 전력들은 이 세 번째 방법에 의해서 파괴되고 와해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의 정신은 방해를 받지 않고서 귀신들이 도입한 생각들을 조사할 시간이 있으며, 그것들을 쉽게 배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된 영성생활의 시작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방법의 출발점은 두 손을 들거나 정신을 하늘의 것들에게 집중하고서 하늘을 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첫째 방법의 속성들이며, 방심이나 기만과 상관이 없지 않습니다. 또 그것은 정신으로 감각을 지키는 일에 집중하여 내면에서 영혼을 공격하는 귀신들의 공격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그런 사람들은 머릿속에서만 노력하기 때문에 방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둘째 방법의 속성이며, 그것들 실천하는 사람들은 귀신들의 노예가 되며, 복수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원수들이 공개적으로든 비밀리에든 항상 그들을 공격하여 교만하고 허영심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시작하십시오: 마음으로 영적 아버지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깨끗한 양심으로 행동하십시오. 순종하지 않고서는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이웃에 대한 관계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영적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그분이 말하는 것만 행하며, 그보다 더 많이 하거나 덜 하지도 않고, 오직 그분의 뜻과 의도에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당신이 싫은 것을 그들에게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들과의 관계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며, 당신이 제대로 행하지 못하여 양심이 상처를 입거나 당신을 비난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당신 스스로 세 번째 방법으로 가는 참된 지름길을 평탄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의 특징은 정신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정신은 마음을 지켜야 하며, 항상 내면에 머물면서 마음속을 맴돌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보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맛보는 것이 허락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일하십시오.) 정신이 마음 안에서 마침내 주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보고 기뻐할 때(수고는 우리가 하지만, 이것을 맛보는 것은 겸손한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작용입니다), 정신은 마음 안에 있는 이 장소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정신은 베드로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말할 것입니다), 항상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머물면서 마귀가 심어놓은 로든 악한 생각을 쫓아낼 것입니다(이것이 세 번째 방법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볼 때에, 이것은 어렵고 답답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의 사랑스러움을 맛본 사람은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한 교부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 19,20)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또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6)는 가르침을 들으면서 모든 다른 영적인 일들을 포기하고 온전히 마음을 지키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모든 덕을 쉽게 획득할 수 있지만 이것이 없으면 단 한가지의 덕도 굳게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을 마음의 침묵이라고 부른 교부도 있고, 정신집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또 냉정과 생각들을 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생각을 살피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두 그것을 탁월하게 실천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전도자는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깨끗한) 마음에 원하는 길로 좇아 행하며"(전 11:9), 모든 악한 생각을 마음에서 몰아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전 10:4). 여기에서 자리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도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눅 12:29)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정신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세상에 애착하지 않고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이것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글을 읽고 성 마가(St. Markthe Wrestler)나 사다리의 요한,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Hesychius), 시나이의 필로테우스(Philotheus of Sinai), 사부 이사야(Abba Isaiah), 대 바르사누피우스(Barsanuphius the Great) 등의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해 말해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할 수 없으며, 눈물을 흘리고 통회할 수 없고, 온유하고 관대할 수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없고, 긍휼할 수 없고, 화평하게 할 수도 없고,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집중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덕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을 경험하여 알려면, 무엇보다도 이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을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앞으로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세 가지를 준수해야 합니다: 첫째, 좋지 않고 헛된 것에 대한 염려뿐만 아니라 선한 것에 대한 염려 등 모든 염려로부터의 자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둘째, 모든 일에 있어서 양심이 깨끗하여 어떤 일에 있어서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정욕적인 애착이 전혀 없어야 하며, 그리하여 생각이 세상적인 것으로 기울이 않아야 합니다. 내면에 정신을 집중하십시오(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집중하십시오). 정신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정신이 항상 마음에 거하기 위해서 마음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씨름하는 동안, 정신은 마음이 있는 장소를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 안에서 은혜가 사랑스러움과 따뜻함을 만들어낼 때에 발생합니다. 그 순간부터는 어떤 측면에서 생각이 등장하든지 간에, 정신은 그것이 들어와서 하나의 생각이나 영상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여 몰아냅니다. 또 그 순간부터 귀신들을 미워하고 항상 그것들과 싸워 이깁니다. 이 활동에서 비롯되는 다른 결과들에 대해서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이 직접 경험하여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어느 거룩한 교부는 "당신의 수실에 앉아 있으면 이 기도가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12)

질문: 기도와 정신 집중의 첫째 방법과 둘째 방법이 이러한 결과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우리가 그 두 가지 방법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 방법들은 네 개의 가로장을 가진 사다리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념들을 억눌러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 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인 기도를 실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관상기도를 행합니다. 이 가로장들에 의해서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됩니다. 첫째 가로장에 첫 걸음을 딛고, 다음에 둘째 가로장, 그 다음에 세 번째 가로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가로장을 딛어야 합니다. 사다리에 의해서 세상에서부터 천국으로 올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의 정신과 씨름하고 정념들을 정복해야 합니다. 둘째, 시편 기도를 실천해야합니다. 즉 입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념들이 정복되면, 자연히 기도는 혀에까지도 달콤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정신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관상기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단계는 초심자들에게 적절하며, 둘째 단계는 어느 정도 기도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고, 셋째 단계는 마지막 가로장에 가까이 간 사람들에게 적절하고, 넷째 단계는 완전한 사람들에게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은 정념들을 줄이고 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지키고 정신을 집중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지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정념들을 대적하여 완전히 정복하면, 정신은 하나님을 갈망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는데 보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동경하고 기도함으로써, 정신은 힘을 얻어 마음의 주위를 돌면서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생각들을 몰아내며, 기도로 그것들을 공격합니다. 그리하여 전쟁이 시작됩니다. 악한 귀신들은 사납게 소리치며 일어나고, 정념들을 통해서 마음에 폭풍과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서 마치 불길 속의 밀납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추방되어 쫓겨난 귀신들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감각을 통해서 외부에서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정신은 곧 회복되며, 원래의 고요함을 다시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정신의 깊은 곳을 어지럽게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에 표면만 뒤흔듭니다. 그러나 정신은 자신을 전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거나 악한 귀신들의 공격에 의해 동요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사람들, 모든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마음에서 쉬지 않고 집중하는 사람들만의 특성 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각기 정해진 시기에 순서대로 실천하여 마음이 정념들로부터 정화된다면, 그는 완전히 시편 찬송에 전념하고 생각들과 싸우고 육신의 눈으로 천국을 올려다보거나 영혼의 눈으로 천국을 보고 순수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중에서 발견되는 악한 마귀들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천국을 응시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다양한 형태의 방심과 기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공중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오직 한 가지, 즉 정신집중에 의해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만 요구하십니다.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6). 그러나 눈과 정신을 들어올려 천국을 응시하며 위에서 말한 순서대로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사람의 마음은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을 볼 것입니다. 정신집중과 기도의 첫째 방법과 둘째 방법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집을 지을 때에는 먼저 기초를 쌓고 나서 지붕을 덮어야 합니다. 먼저 기초를 쌓고 건물을 지은 후에 지붕을 덮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행해야 합니다. 먼저 기초를 쌓아야 합니다. 즉 마음을 지키고 모든 정념들을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영적 인집을 짓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영들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며,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러한 공격을 근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후에 지붕을 덮어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집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