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영 분별과 규범

 

1.  영 분별72)

1. 영 분별하기

  관상은 선물로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기보다는 주님께서 내안에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은총입니다. 반면에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긴 하지만 분별은 일종의 기술과 같습니다. 기술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분별의 기술을 배우는 데 도움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영분별' 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구분해야 합니다.

1). 영 분별의 은사

  '영분별' 이라는 말은 어떤 은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평상적인 그리스도교의 어떤 실천사항을 뜻하기도 합니다. 때로 이 말은 영분별의 은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그리고 이어서 여러 은사들을 열거합니다. 은사란 무엇입니까? 은사란 특별한 선물 혹은 은총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73) :
1. 은사는 모든 이가 아닌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2. 은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며 "공동유익"(고전       12:7)을 위한 목회와 봉사의 선물입니다.
3. 은사는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입니다.

  영분별의 은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특별한 선물로서,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말씀이고 어떤 현시들인지를 알고, 또 성령에게서 오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아마 분별의 은사는 악령의 현존을 분별해 축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은사를 매우 중요시했을 것이다. 우리 중 대다수는 영분별의 은사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삶 속에서 무엇이 성령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위해 영분별의 지혜를 사용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2). 모든 이를 위한 선물인 영분별

  신약성서는 영분별이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영분별에 있어서 더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지를 분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바울의 주요 분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고전 12:3; 23:,3).74)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영분별에 대한 기독교 전통은 신약성서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 전통 중에서 특별히 16세기의 관상가이며 예수회를 창립한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고전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규칙들은 분별에 관한 실천적 지침으로서 그 어느 것보다 뛰어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3). 영들을 분별함

  영분별이란 사랑과 신앙의 빛 아래 자기가 한 체험의 성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이러저러한 생각이나 충동, 혹은 이러저러한 계획이나 작전, 흑은 이러저러한 말들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인가? 어느 특정한 생각이나 계획, 혹은 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 실천하고, 그렇지 않으면 피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이냐시오의 "영분별을 위한 규범들"75) (영신수련 313-336)에서 '선신(good spirits)' 과 '악신(bad spirits)' 을 구분합니다. '선신' 이란 성령과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양상으로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선신' 이라고 부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악마적인 것들로서 전통적으로 유혹의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오는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악신'이라고 부릅니다. 영분별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별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상념, 생각, 계획, 충동, 내적 이끌림 등이 과연 선신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악신에게서 오는 것이지를 판단해야한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 하나? 나의 내적체험을 판단하기 위해 어떤 규범을 적용해야 하나? 여기에는 주관적 규범과 객관적 규범이 있습니다. 객관적 규범은 나를  넘어서 내 밖에 있습니다. 주관적 규범은 나의 양심과 내적 느낌들, 생각들, 충동들입니다.
  객관적으로 주님께서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교의, 내가 따라야만 하는 교회의 합법적  권위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며 삶의 지침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생각이나 충동들이 객관적인 규범들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면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서나 교회를 통해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나의 마음 속에선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모순을 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종종, 나의 생각이나 느낌들을 판단하기엔 객관적 규범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경우에 주관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혹시 내 양심이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충동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종종 나의 양심이 거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것이 선하고 죄가 아니며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생각이나 충동이 과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생각 또는 충동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내적 혹은 '주관적' 규범은 임의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주관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분별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객관적 지평에 뿌리를 둔 신뢰할 만한 규범이어야 합니다.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첫째 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혹시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심각한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분명 악신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그래서 내가 이미 나아가고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생각이나 충동에서 특정한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선신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접근해서, 양심에 고통과 가책을 일으켜 부정적 느낌들과 불편함 혹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선신은 나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에 '거슬러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내가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고, 주님의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악신은 오히려 슬픔과 불편함, 장애물에 대한 두려움 등을 일으켜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따르려는 나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선신은 나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죄에 대한 슬픔과 눈물, 영감, 주님을 섬기는 일이 쉬워짐, 평화스런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무엇이 악신에게서 오는지를 알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결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선에서 좀 더 나은 선으로 전진하는 자들의 경우, 선신이 이런 영혼을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마른 행주나 스펀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부드럽고 가볍고 달콤하지만, 악신이 그를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돌 위에 떨어질 때처럼 우악스럽고, 요란하며, 불안하다. 그러나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타락하는 영혼에게는, 선신도 악신도 그 반대되는 모양으로 접촉한다. 그 까닭은 이러하니 선신이나 악신이나 간에 자기와 반대되는 상태의 영혼과 접촉할 때에는, 그가 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소리를 내면서 요란스럽게 들어오고, 자기와 비슷한 상태의 영혼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 집에 들어가듯이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간다"(영수련 335).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영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있는가?

4). 위안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하고픈 행동, 혹은 내적 충동의 기원을 판단하는 데 최상의 기준은 이냐시오 성인이 "위안"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위안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오를 때, 창조주이신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이 지상의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 및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 나는 위안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주님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신뢰와 사랑의 덕이 자라고, 영적인 사물로 마음을 끌리게 하며 주님 안에서 내적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모든 내적 즐거움이 커갈 때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생각이나 계획, 느낌, 혹은 내적 충동이 나를 주님과 더 가까이 이끌어 주고, 주님과 더 순조롭게 관계를 맺도록 해 주고, 그분을 알아보고 일치시켜 준다면 그것은 위안입니다.
  고독이란 위안과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이냐시오는 주님에게서 나를 멀리떼어 놓는 것을 "고독(desolation, 황량함)"이라 한다. 그렇다면 고독이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둔 밤의 기도 속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에 위안도 체험할 수 있고 고독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둔 밤은 주님 안에서 참다운 평화로움과 쉼을 누리는 시간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 깊이 일치하게 되기에, 사실은 위안의 시간입니다.

5). 분별을 위한 몇 가지 규칙

  먼저 영적고독의 시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위안의 시간에 정했던 목적이나 결정을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혹시 자신이 지닌 선량한 지향을 바꾸도록 유혹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 유혹과 반대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위안의 시기에는 다가올 고독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서 힘을 모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분의 위안 없이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식하면서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위안은 주님과의 더 깊은 일치와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고독은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악마로부터 오는 것인데,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나쁜지 생각하게 해서 악마가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고독을 허락하실까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냐시오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76)(영신수련 322) 첫째는 내가 주님과의 관계와 기도 생활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기에 나의 잘못으로 위안이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나를 시험하시고, 마치 달리기 선수를 계속 훈련시키는 감독처럼 나에게 시련을 주셔서 원수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나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께 의존되어 있는지, 나 혼자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겸손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고독은 나로 하여금 나로의 덕과 의로움, 선함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게 해주고, 오히려 내 삶의 바위이신 주님 위에 견고하게 집을 짓도록 이끌어 줍니다.

6). 가능한 속임수에 대한 문제

  분별에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별 자체를 다시 심사하고, 검토하고, 평가해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종종 있습니다.77)  이 문제는 이냐시오가 이미 말한 것처럼, 악신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신은 처음에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후 차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거기에 숨겨진 거짓과 죄를 향하여 나를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떠오른 생각의 시작뿐 아니라 전개 과정 및 그 끝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완전히 선해서 올바른 것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선신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선한 생각이 그 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악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덜 선한 모습으로 끝맺는다면, 혹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주님 안에서의 평화를 앗아가 버린다면, 그것은 악신에게서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악신도 그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처음에 주님에게서 오는 듯한 좋은 생각과 계획을 불러일으켜서 점차로 자신의 목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위안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신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을 심어주지는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위안이 갑자기 나에게 생기고, 혹시 같이 떠오르는 생각이나 인식이 그러한 큰 위안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같지도 않아 도무지 그 위안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으면, 나는 확실히 그 위안이 선신에게서나 혹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쇄신 모임에 참여해서 성령을 넘치게 받을 때(소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 것을 받을 때) 커다란 위안과 기쁨, 강렬한 평화. 주님과의 친밀함을 체험합니다. 혹시 이 위안이 그 순간의 기쁨과 그 상황의 기도를 넘어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에게서 오는 위안이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혹은 기도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그분에게서 온다고 확신하는 강한 사랑의 열정이 일어나고, 때로는 이와 더불어 어떤 인식이나 행동에 대한 계획이 떠오르거나, 혹은 그 '손길'이 기도하는 그 순간을 넘어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에게서 오는 위안입니다. 악신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 안에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나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악신은 먼저 떠오른 생각을 약간 수정해서 선하게 보이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짓으로 나를 속이고,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특별히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분별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고 미리 있을 원인이 없는 위안이 있더라도, 후에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감안해서 그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작에서 뿐 아니라 중간과 끝을 조심스럽게 평가해야 합니다. 분별 자체를 분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분별 할 때, 특별히 분별 자체를 분별할 때는 기도의 동반자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목회자, 혹은 영성지도자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영분별의 결정하기

  이냐시오 로욜라는 영분별의 규범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 적용합니다. 나는 중요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영분별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 결정을 내리기

  예수께서는 내 삶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분께 나의 결정을 가져가 그분의 주권 앞에 그 결정을 펼쳐 놓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아주 짧은 관상의 시간에 그분과 함께 그 문제를 검토합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담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치 그분을 관상하고 바라보는 눈으로 주어진 여러 대안들을 바라보고, 내가 선택한 결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내릴 수 있는 다양한 결정들을 예수님께 들어 올립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 주님과 나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십시오.
  이것을 어느 정도 하면, 때로는 처음부터 그 결정에 대한 위안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그 가능한 선택에 관해 주님의 눈을 바라보면, 일관성 있게 옳다는 확신이 듭니다. 혹은 꾸준한 평화와 조화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혹시는 마음속에서 기쁨과 참다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 특정한 가능성이 선신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2). 결정과정에서의 핵심적 열쇠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각각의 가능성들에 대해 얼마나 바르고 편안한가? 하지만 얼마나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렸어야만 하는 그 특정하고 가능한 결정을 결론으로 며칠 동안 지내며 시험해 보고, 그것이 진실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주님께서 확인해 주시도록 기다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위안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얼마 동안 나의 분별을 조사해 봅니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을 실행에 옮깁니다.
  만일 나의 결정에 다른 사람이 관여되는 것이라면, 그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과 부인이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각자가 분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고, 함께 기도하면서 각자 기도 중에 분별한 결과를 모아야 합니다. 단체가 결정하는 것인 경우에도 구성원 각자가 분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 공동분별의 과정은 다음과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기도하며 분별합니다. 이제 함께 모여, 토론이 아니라 함께 모으기 위하여 돌아가며 각자가 기도 중에 내린 결론을 듣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합니다. 만장일치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혹은 어떤 종류의 투표에 다다를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3). 분별과 결정의 기반

  주님께서는 나의 내적 체험 속에서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분별에 기반을 두고 당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부르십니다. 하지만 영분별을 위해서 나의 삶에서 성취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특별한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상적 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분별은 아주 강한 관상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분별의 과정에서 근본이 되는 관계는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관상적 관계입니다. 내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정기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영분별과 분별과 분별에 기반을 둔 결정과정에 꼭 필요한 주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생활 중에 습관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고 있다면, 나의 내적 체험들을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영분별을 통해 올바른 결정에 다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분별은 삶 전체 속으로 스며들고 그것을 넓혀 줄 것입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내 마음 속에서 활동하는 영들을 분별하고 선신에게서 오는 것을 분별해서 행동한다면, 오랜 시간 후에는 내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선택하건 나는 늘 선신이 이끄는 삶을 따르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이끄시는 방법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나는 관상적으로 살고, 내 눈은 늘 주님을 향하고, 당신의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전체는 예수님을 위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4). 성령과 함께 걸어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5, 참조 5:16).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새 생명을 지닌다는 것, 새 창조물로서 새로운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특정한 양식으로 행동한다는 것, 그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과 함께 거닌다는 것은 매일의 행동 속에서 영분별을 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성령에 따라 살게 되면, 나는 정말 자유롭습니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은 결코 나의 행동을 규정하고 나를 얽매는 규칙이나 법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법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롬 8:3). 법이 나를 강요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힘을 주셨기에 나는 법이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나의 선택은 무엇이 옳다는 지식에 바탕을 둔 '머리에서의 선택' 이 아니라,주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부르시는 그것을 사랑으로 아는 것에 기반을 둔 '마음에서의 선택'입니다.
  나는 성령의 내적 법에 따라 행동합니다(롬 8:2). 그래서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롬8:5~6) 성령께서는 기도할 수 있게 나를 도와주십니다 :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롬 8:26).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나는 주님께 나의 선택을 이끌어 주시도록 청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시길 청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롬 8:14)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에 의해 새로워지고 "새로 태어났기에"(벧전 1;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엡 2:10) 생긴 새로운 창조물이기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신비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에,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향해 조율되었습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놓여졌기에, 나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즉각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지를 알게 되고, 언제 성령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 5:22) 등 성령의 열매인 위안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2.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78)

1.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 I (위안, 3독, 악신)
   이것은 영혼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을 깨닫고, 또 분별해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기 위한 규범이다. 이 규범은 첫째 주간의 피정에 더욱 알맞은 것이다.

2. 첫째 규범 :
   대죄에 대죄를 거듭하는 자들에 대하여 원수인 마귀는, 그들로 하여금 악덕과 죄 중에 잠겨서, 더욱 죄를 더하도록 하기 위해서 관능적인 오락과 쾌락을 상상하게 하여서, 그들에게 표면적인 향락을 제시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착한 신은, 이성의 판단력을 써서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악신과는 반대되는 방법을 사용한다.

3. 둘째 규범 :
   자기의 죄를 정화하고 우리 하나님께 봉사하는 데에 있어 더욱 완덕으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첫째 규범의 방법과는 반대되는 방법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이런 때는 영혼이 선행하는 데 진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공포와 슬픔을 일으키고, 장애물을 마련하고, 거짓 이유로써 영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악신들의 상투적 수단방법이며, 착한 신은 언제나 영혼에게 용기와 힘과 위안을 주고 눈물과 좋은 느낌과 평화를 주어서 모든 것을 쉽게 해주고 모든 장애물을 치워줌으로써, 영혼을 선행에 더욱 향상하게 한다.

4. 셋째 규범 :
   영신적 위안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영신적 위안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에 일종의 내적 감동이 일어나서, 영혼이 자기와 창조주의 사랑으로 불타기 시작하고, 따라서 영혼이, 지상의 아무 물건도, 그 물건 자체를 위해서는 사랑할 수 없고, 오직 그 모든 것들의 창조주 안에서만 사랑하게 되는 때를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죄에 대한 통회에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아픔에서나 또는 직접 하나님의 봉사와 영광에 관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신적 위안이란 신덕, 망덕, 애덕을 더하는 모든 것과 사람을 천상의 일들과 자기 영혼의 구원으로 부르고 이끄는 모든 마음의 기쁨을 말하는 것인데, 그 결과 영혼이 자기 창조주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5. 넷째 규범 :
   영신적 고독에 대하며, 셋째 규범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영신적 고독이라 한다. 즉, 영혼의 어두움과 어지러움과 비열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기울어짐과, 또 희망도 사랑도 없이 영혼을 실망으로 밀어 넣는 여러 가지 흔들림과 유혹에서 오는 마음의 불안 따위를 말하는 것인데, 결국은 영혼이 게으르고 냉담하고 비통해져서, 마치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 이유는 마치 위안이 고독에 반대됨과 같이, 위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도 고독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는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6. 다섯째 규범 :
   영혼이 고독할 때에는 결코 어떠한 변경이라도 해서는 안된다. 오직, 고독한 상태에 빠지기 전에 결정한 것을 굳게 지킬 것이며, 또는 전에 위안 상태에 있을 때에 한 결심을 끝까지 고수한다. 왜냐하면, 위안 상태에서는 주로 선신이 우리를 지도하고 권고함과 같이 고독한 때에는 주로 악신이 책동하는데, 악신의 권고를 따라서는 결코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7. 여섯째 규범 :
   고독할 때는 전에 결정한 것을 바꾸어서는 안되지만, 고독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예를 들면, 더욱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찰하고 또 고행 같은 것을 더욱 많이 행함으로써 고독을 극복한다.

8. 일곱째 규범 :
   고독한 상태에 있는 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러를 시련하시기 위하여 우리 본성의 능력으로 원수의 여러 가지 선동과 유혹에 대항하도록 버려두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명백히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그에게 상존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저항할 수 있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전에 당신이 주셨던 불타는 열심과 감각할 수 있는 뜨거운 사랑과 넘치는 은총은 앗아갔지만, 아직도 선행과 영혼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은총은 남겨두셨기 때문이다.

9. 여덟째 규범 :
   고독 중에 있는 이는 자기가 받고 있는 괴로움과 반대되는 인내를 지속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여섯째 규범에 설명한 바와 같이, 고독과 싸우면서 오래지 아니하여 위안이 올 것을 생각할 것이다.

10. 아홉째 규범 :
   영혼이 고독하게 되는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영신수련에서 염증을 내거나 게으르거나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탓으로 영신적 위안이 우리를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하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와 찬미를 드리는 데 있어서 풍부한 위안이나 은총에 의지함이 없이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지, 어느 정도의 진보를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시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신 사정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식을 주시기 위함이니, 즉 큰 열심과 강한 사랑과 눈물 그리고 또 다른 어떠한 영신적 위안을 일으키거나 보존하는 것은 우리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란 것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동시에 또 혹시 우리가 그러한 열심이나 영신적 위안이 우리 자신에서 오는 것같이 생각하고 오만이나 허영심을 일으켜서, 구령길에서 탈선함이 없도록 하심이다.

11. 열째 규범 :
   위안 중에 있는 이는 이 다음에 겪어야 할 고독한 처지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생각하고, 그때를 위하여 새로운 힘을 마련할 것이다.

12. 열한째 규범 :
   위안 중에 있는 이가 고독할 때에, 즉 이러한 은총이나 위안이 없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겸손하게 자신를 낮추고 억눌러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독 중에 있는 이가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원수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충분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과 또 나아가서는 은총과 더불어 자신의 창조주께 의지함으로써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13. 열두째 규범 :
   원수인 마귀가 행동할 때는, 여인과 비슷한 점이 있으니, 즉 힘은 약하지만 발악하는 데는 강하다. 왜냐하면, 여인은 보통 어떤 남자와 싸울 때에 남자가 무서운 태도를 보이면 용기를 잃고 도망하지만, 반대로 남자가 용기를 잃고 도망하기 시작하면, 여인은 더욱 골을 내고 욕설을 하면서 극도로 사나워져서 그칠 줄 모른다. 그와 같이 마귀도, 영신수련을 하는 사람이 원수의 유혹에 대하여 정면에서 반대하면서 용감한 기색을 보이면, 용기를 잃고 도망한다. 그러나 반대로 수련하는 이가 겁을 내고 또 유혹에 대항하는 데에 용기를 잃기 시작하면, 인류의 원수는 세상에도 없을 맹수처럼 사나워져서 비열한 수법으로 흉악한 의도를 추진시키는 것이다.

14. 열셋째 규범 :
   마귀는 또 자기를 숨기고 발각되지 않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마치 연애 사기꾼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치 불량배가 나쁜 의향을 가지고 달콤한 말로써 행세하는 가정의 아가씨나 유부녀를 꾀낼 때, 자기의 말이나 권면이 비밀에 붙여지기를 원하고, 또 마음먹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염려하여 아가씨가 아버지께 또는 유부녀가 남편에게 그의 꾀는 말이나 야심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처럼 인류의 원수도 착한 영혼에게 음모와 유혹을 꾀할 때, 그것이 비밀로 받아들여져 간직되기를 원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혼이, 경험이 풍부한 자기 지도자나 또는 마귀의 엉큼한 죄와 나쁜 마음보를 잘 아는 영성 지도자에게 자기 사정을 밝히 알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의 흉계가 드러나게 되면 계획했던 나쁜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15. 열넷째 규범 :
   마귀는 또 적을 정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약탈하고자 하는 전쟁의 두목과도 비슷하다. 즉 사령관이나 부대장이 진을 치고 적군의 힘과 방비 상태를 살펴보아서,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함과 같이, 인류의 원수인 마귀도 우리의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모든 덕행 즉 ?신덕, 망덕, 애덕의 향주 삼덕, 슬기로움과 의로움과 용감함과 절제함의 사추덕 및 일반 윤리덕?(설명: 가톨릭에서는 ? 이런 ? 규정이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없다)을 차례대로 조사해서 어느 부분이 제일 약하고 또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더욱 필요한지를 발견하면, 그 부분을 공격해서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16.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밤들 II
   이것은 둘째 주간에 더욱 알맞는, 선신 악신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규범들이다.

17. 첫째 규범 :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움직임에서는, 마귀가 밀어 넣는 모든 근심과 불안을 멀리함으로써, 참된 기쁨과 영신적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특징이고, 마귀는 표면적 이유와 궤변, 그리고 끝없는 속임수를 씀으로써 이러한 기쁨과 영신적 위안을 방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18. 둘째 규범 :
   미리 있을 원인 없이 영혼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홀로 우리 주 천주께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드나드는 것이나 영혼 전체를 지존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끌어당기면서, 그 안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조물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원인 없이'라고 한 것은, 영혼이 지력과 의지의 활동만으로 이러한 위안을 마음에 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요소를 미리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 것을 말한다.

19. 셋째 규범 :
   까닭이 있는 위안은 천사도 마귀도 줄 수 있으나, 그 목적은 서로 반대된다. 착한 신은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즉 영혼이 좋은 상태에서 더 좋은 상태로 성장하고 향상하게하려는 것이고, 악신의 목적은 그와 반대로 영혼을 제게로 끌어당겨서 그 음모에 빠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20. 넷째 규범 :
   안식의 특성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하고서 영혼에 들어갈 때는 열심을 가지고 들어가서 나을 때는 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즉, 마귀는 흔히 착한 영혼의 심리에 맞추어서 처음에는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선동하고 나서는, 차츰 그 영혼을 은밀한 계교와 흉악한 음모에 빠지게 하여,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21. 다섯째 규범 :
   우리들의 생각의 진행에 대하여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시작과 중간과 끝이 다 좋아서 온전히 좋은 것으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선한 신의 표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생각하다가 도중에 악한 것, 탈선된 것 또는 전에 행하기로 결심한 것보다 덜 좋은 것으로 기울어지거나, 전에 영혼이 갖고 있던 평화와 안정과 안식을 빼앗음으로써, 영혼을 약하게 하고 요란스럽게 하고 당황하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러한 생각들이 우리의 영신적 진보와 구령의 원수인 악마로부터 오는 표시인 것이다.

22. 여섯째 규범 :
   인류의 원수가 나쁜 행각에서 꼬리를 잡히거나, 또는 그가 지향하는 나쁜 목적으로 인하여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에는 그한테 시달린 영혼은 즉시 자기에게 권유된 좋은 생각들의 경로를 생각해보는 것이 퍽 유익하다. 즉, 그러한 생각이 처음에 들어온 동기를 살피고, 그 다음에, 마귀가 어떻게 나를 전에 누리던 착한 마음과 기쁜 영신적 분위기에서 차츰 식어지게 해서 마침내 그 흉칙한 유혹에까지 빠지게 하였는지를 추궁하여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체험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서, 이 다음에는 마귀의 상투적 음모에 대하여주의 하기 위함이다.

23. 일곱째 규범 :
   선에서 좀 더 나은 선으로 전진하는 이들의 경우에는, 선신이 이런 영혼을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마른행주나 스펀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부드럽고, 가볍고, 달콤하지만, 악신이 그를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돌 위에 떨어질 때처럼 우악스러우며, 요란스럽고, 또 불안스럽다. 그러나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타락하는 영혼과는, 선신도 악신도 반대되는 모양으로 접촉한다. 그 까닭은 선신이나 악신이나, 자기와 반대되는 상태의 영혼과 접촉할 때에는, 그가 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소리를 내면서 요란스럽게 들어오고, 자기와 비슷한 상태의 영혼에 들어갈 때에는 조용히 자기 집에 들어가듯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24. 여덟째 규범 :
   까닭 없이 위안이 올 때는, 위에(18. 330 둘째규범) 설명한 바와 같이 그것이 온전히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아무 거짓은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위안을 받은 사람은 충분한 경계와 주의를 기울여서, 그러한 위안이 있는 바로 그 찰나와 뒤따라오는 시간, 즉 영혼이 아직 열심한 상태에서 지나간 위안의 혜택과 그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동안을 잘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안을 받은 이가 흔히 위안 뒤에 따라오는 둘째 시간에서, 선신에 의하든 악신에 의하든 간에, 행습이나 개념 또는 판단의 결론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추론해서 직접적으로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여러 가지 결심과 계획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에 완전히 합의하거나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 철저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