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관상기도의 열매

 

1. 관상기도의 열매

   관상기도의 열매에 대해 논의할 때 명심할 것은 관상기도를 무슨 특별한 내적?외적 효과를 기대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기도는 어떤 원인(기도를 얼마나 해서)을 제공하여 예상된 결과(또는 드러난 현상)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관상 기도를 꾸준히 실천하게 되면 그 유익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부산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 체험적인 면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기도 중의 체험과 그 효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항상 유의해야 한다. 

   관상기도가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하는 것은 관상기도를 추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매일의 관상기도의 열매와 은혜는 기도하는 시간에 일어나기보다는 기도시간 밖에서, 즉 일상생활에서 확인되며, 그렇기에 이 기도는 신자의 세상 속에서의 삶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어서 영성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신자 자신의 기도가 빈약하다고 느끼더라도, 기도시간 밖에서도, 때때로 저절로 하나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될 때가 그런 순간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자신 속에 깊은 고요와 평화가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 기도를 지속적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의 과제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고, 사람들과도 더 원만하게 관계해가게 되며, 주님께 더 충실히 봉사하려고 애쓰고,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만 하려고 애쓰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영혼의 기쁨이다. 그래서 토마스 키딩은  관상 기도의 평가 기준은 일상의 삶에서 “큰 평화,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들”라고 주장한다.82)  관상기도로 익은 열매는 기도시간에서 뿐만 아니라,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생활에로 돌아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사건이나 현상의 저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며 사는 데에 있다.

 

2. 관상기도의 지속적 실천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영성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루를 관상기도로 시작하고, 삶 속에 함께하는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삶이 요청된다. 또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평범한 일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셨는가를 감사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관상기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내적 눈을 항상 깨어있게 하여, 현장에 있는 것을 ‘보고’ 이 실재에 관하여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성장을 지속해가야 한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는 인간의 외부적인 일에 마음이 집중하는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집에 계신다. 밖에 나가서 돌아다는 것은 우리들이다”라고 말했다.  관상기도는 믿음의 선물을 발전시키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며, 이런 인식은 신자에게 현실을 보는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영적 성장의 적은 이러한 하나님이 현존하는 현실보다는 자기중심적 경향인 자기중심성에 있다. 영성 성장을 위해서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지향에 도전하려고 먼 곳에서 그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상들은 우리의 가정이나 단체 생활 안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우리의 스승은 우리가 처한 바로 현실적 ‘상황임’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가 추구해야 할 관상은 우리 영혼이 궁극적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움직임이다. 다음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 한 랍비가 한번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새 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양인지 개인지 분간할 수 있을 때 새 날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또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무화과 나무인지 복숭아 나무인지 분간할 수 있으면 새 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음, 그렇다면 무엇인지요?”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의 대답은?? “너희가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너희의 자매 형제로 다가올 때, 그 때가 새 날이다. 만약 너희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시간이 언제든지 상관없이, 여전히 밤이다.83)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모든 남녀’를 ‘형제’요 ‘자매’로 보는 것은 신비가의 믿음의 비전에 함께 하는 것이다. 신비가의 핵심적 직관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일치(unity)하고 하나(oneness)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 상태에로의 진전을 통해 나타나는 관상(contemplation)의 은혜로운 효과로서 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야기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84)  관상기도는 실재(reality)를 보는 우리의 눈을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변형시켜가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신자가 추구하는 비전은 비현실적이거나 허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점점 드러나고 있는 산업화·정보화 사회의 진전으로 야기되는 환경적 위기 속에서 지구의 생존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호 연대하는 일을 실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종교적인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에 임재(presence)하여 활동하고 계신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글자 그대로 신비적(mystical)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칼 라너는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무게 있게 다가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