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2 장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
            
                  제1절 하나님에 대한 태도                   
                      1. 영성의 서양적 모델
                      2. 영성의 성경적 모델
                      3. 하나님에 대한 태도
                  제2절  향심기도의 신학적 기초
                  제3절  신학에서 현존(임재)체험으로


제 2 장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

 

제1절 하나님에 대한 태도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길은 하나님에 대하여 깊어지는 신뢰 위에 기초를 둔다. 어둠 속에서 처음 도약을 하여 우리의 더 깊은 내면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뢰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모습을 은밀히 다시 가다듬도록 이끌어 주고, 우리의 고통과 상처와 무의식적인 동기들을 변형시키시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러한 사람으로 우리가 변형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 또한 이 신뢰이다.

신뢰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렸을 때에 하나님에게 가졌던 부정적인 태도는 우리의 영적 여정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화난 아버지의 상, 의심쩍게 바라보는 순경, 아니면 지독한 판사의 상으로 본다면, 여정에 대하여 열성을 갖거나 어쩌면 흥미를 갖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어렸을 적에 종교적인 훈련으로 우리 안에 뿌리 내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실상 지난 세대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성서의 가치에 대한 왜곡 -때로는 180도로 왜곡- 을 보여 주는 종교적 가치관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렇게 뿌리 내린 가치관들이 가톨릭에서 특별히 더 생생하게 느껴져 왔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6) 이전에는 '서양적 영성의 모델'이라고 별명이 붙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의 증세를 교리시간과 그 외의 종교교육에서 가르쳐 왔다. 이 용어는 크레이튼 대학교의 교수인 예수회 신부 리처드 하우저(Richard Hauser)의 책 「그의 성령 안에서」(in his Spirit)에 사용되었다. '영성'이란 말은 따옴표 안에 넣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전수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성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18세기 이성의 시대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적 이원론이 주도하는 사상과 하나님은 '저기 멀리' 계시면서 이 천체를 기계적으로 관리하신다는 뉴턴의 물리학으로 형성된 관점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우저 신부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하나님 밖에 있는 자아'와 '자아 밖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딱딱한 이원론을 이루는 것이다. 이 이원론은, 이 지구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히 결별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찾고 고통을 받으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저 멀리 천국에서 우리를 감시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신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 영성의 서양적 모델

영성의 서양적 모델에서 나온 세 가지 태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외적인 행동들이 내적인 행동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외적인 행동'은 의식에 참여한다든지, 단식과 자선과 육체적 보속행위와 같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내적인 행동'은 이러한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내적인 동기를 뜻한다. 앞의 것은 자부심이나 자기중심적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에서 올 수도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잔 속을 먼저 닦아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2). “나 자신이 모든 선행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갚아 주신다는 것이 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펠라기안 이단(Pelagian,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펠라기우스가 퍼트린 이단설)의 주장에 아주 근사해진다. 그래서 이것은 어느 경기장의 관중석에 하나님이 앉아서 관람하시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혹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아 내기 위해 하나님을 회유하려는 싸움을 벌이는 것과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잘하면 하나님은 엄지손가락을 쳐드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엄지손가락을 내리신다. 그와는 반대로 복음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영감으로 모든 선행이 시작되며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을 주의 깊게 듣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3).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강조하신 가르침처럼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 대신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말하자면 저 세상에서 상을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공로를 쌓는 노력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다음과 같은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6) 이전에 '선한' 가톨릭신자로 인정받는 서양 모델의 희화(戱畵)다. 주일 미사에 충실하게 나가고 금요일에는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으며 주일마다 헌금을 넉넉하게 낸다. 그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적어도 일 년에 한번은 하고, 그가 죽을 때에 신부님이 병상 곁에 와서 병자성사를 베풀어 주어 최소한 연옥에 가고, 어느 정도 정화를 한 다음 그 영혼을 위해 바친 미사의 덕분으로 정화의 기간이 줄어들고, 마침내는 내세에서 그의 모범적인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에게는 자기 부인을 화나게 하거나 억압한 일, 아이들에게 소리 지른 일, 종이나 종업원에게 임금을 적게 지불한 일, 자신의 주변이나 본당의 가난한 사람들을 소홀히 대한 일들이 죄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해, 그는 교리를 지키고 가톨릭 신앙의 외적인 것들은 지키면서도 복음을 실천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살아가야 하는 삶이지, 지키기만 하면 되는 수칙 조항들이 아니다.

이러한 희화는 그리 지나친 것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말하자면 지옥을 피하고 연옥의 기간을 줄이려고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소위 공로가 되는 행위는 너무나 과장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순진하게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좋은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 주는 성서의 말씀을 외면했다. 예를 들어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똑같이 무조건 사랑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미래에 받을 상이나 벌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일반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일차적인 의무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래의 보상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정의의 의무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임을 지난 수세기 동안에는 거의 모두를 수도회에 떠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희생은 오직 한 가지, 즉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고 성서에 명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희생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기를 더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외적인 종교 수련에 전심하는 그 밑바닥은 하나님이 저주하시어 지옥으로 보내실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이포닉(Typhonic) 의식으로서 원시시대의 사람들이나 2살에서 4살 사이의 어린이에게 알맞는 의식의 수준이다. 이러한 종류의 수칙 생활에는 확실히 어떤 종류의 마법적인 접근이 있다.

"만일 내가 매주 미사에 꼭 참석하고 내 죄를 고백하면, 이러한 태도를 갖게 한 그 가치관 자체는 결코 바꾸지 않더라도 만사가 잘 될 거야." 하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 안에도 이러한 사상이 많이 침투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외적 성장 지향적이고 천국과 천국상급을 강조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2. 영성의 성서적 모델

신학자들이 근년에 재발견했고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 명시된 영성의 성서적 모델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순수한 성서적인 근원에서 인정하고 재조명하고 새롭게 하도록 하기 시작했다. 성서가 기록된 언어의 원래의 의미와 문화적 맥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덕으로, 첫 사도들이 죽은 이래, 우리 시대에 성서 저자들의 진정한 의도를 아마도 더욱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서적 모델은 서양의 모델과 백팔십도 다른 것을 보여 준다.

1). 영성의 성서적 모델은 “외적인 행동보다도 내적인 동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 라고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전통들을 따랐지, 모세가 정해 준 율법과 예언자들이 영감을 준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성전(聖傳: Tradition)은 이 전통들(traditions)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교 성전은 복음의 살아 있는 체험이었다. 이 성전을 실천에 옮기면 거짓자아 체제를, 그리고 거짓 가치체계와, 또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상처받은 감각과 이를 보상하려는 욕구에 기초를 둔 지나친 요구들을 함께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전을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반응에서 이것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응답인 것처럼 이 성전을 살아간다. 전통들은 인간적인 해석을 말하며 이것을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상으로 치켜세워 온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를 통렬히 비난하셨다. 그분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는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 놓고 너희들은 손가락 하나 거들지 않는다. 너희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마 23:4,13) 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착한 도덕가들이고 그것으로 남보다는 두드러진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종교적 수칙은, 적어도 4복음사가에 따르면, 지나친 허영과 자부심이 동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사려고 지나친 행동들을 했는데, 예를 들면 자선을 할 때에 그것을 알리려고 나팔을 불기까지 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들의 위선의 가면을 벗기면서도 창녀나 그 당시 착취자의 대명사인 세리들에게 지극한 동정심을 보이셨다.

2). 영성의 성서적 모델은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모든 좋은 일을 하도록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시며 우리는 그것에 동의를 하는 것”이다.

진정 하나님에게서 영감을 받은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 밖에 있는 자아'라는 서양적 모델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아'와 '자아 안에 있는 하나님'인 것이다. 영성의 성서적 모델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모든 좋은 일을 하도록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시며 우리는 그것에 동의를 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성령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응답하라고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뒷받침 하리라고 기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영성생활의 출발점이 '신성한 내재' (Divine Indwelling : 하나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동떨어진 것이었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저 밖에 계신다'라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이 '저 밖에', 특히 먼 하늘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가 몇 발자국 안 가서 넘어진다면, 으레 그렇듯이, "이것은 나에게 맞지 않아. 하나님과 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야." 하며 결론을 지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수백만 마일이나 떨어져 계시고 그곳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영성생활 중에 부딪치는 시험들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3). 성서적 모델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발전시키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을 위해 봉사할 것”을 강조한다.

서양적 모델에 대해 공평하게 말하자면, 성령의 중요성을 아주 추상적으로 인정해 왔을 뿐이며, 일반 교리교육에서는 잘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토마스 키딩)의 어린 시절에는 성령을 '잊어버린 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마치 50년 동안 결혼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결혼 50주년을 맞아 가족들이 축하해주는 자리에서, '이 낮선 사람이 내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성령이 나의 삶 속에 현존하시면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영적 여정을 촉진해 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대개는 "영적 여정은 관상 수사나 수녀들에게 맡긴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당연한 결과는 "그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편지를 쓰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지키라는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기만 하면 마음 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고 충실한 그리스도인이란 매일의 생활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이지, 복음을 읽기만 하고 자신이 필요한 욕구대로 하나님을 갖다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성의 서양적 모델에 따르면, 우리가 좋은 일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시리라는 생각으로 표현되곤 했다. 이렇게 복음에 대하여 무식하고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가를 받아서, 그들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아무 걱정할 것 없고, 그들이 하는 세상일들에 성공으로 축복받을 것이며, 시련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정당화하곤 했다. 복음의 어떤 말씀이 그 신념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이러한 보편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가 자선을 하는 것과 같은 좋은 일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에서, 그리고 저 세상에서도 대가를 주시리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고, 전문직에서나 사업에서나 성공을 거둘 것이며, 우리의 목회활동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성서적 모델은 어디에서도 이러한 약속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 예수님께서 행복의 이상을 표현하신 진복(眞福: Beatitude)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백배의 상은 물질적인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고통을 견뎌 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이 시편 저자의 끊임없는 관심거리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귀중한 보배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시편작가와 예언자들의 글은 하나님을 위해 고통과 어려움들을 겪는 사람들의 복지와 보호와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다.

4). 영성의 성서적 모델은

“미래의 보상을 바라거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보장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할 필요성이다”.

보상과 처벌이라는 생각의 증세는 아동기 때에는 정상적이었던 태도에서 생겨난 하나님에 대한 견해이지만, 만일 그들의 종교교육이 정말로 적절한 것이었다면, 성인이 되면서는 이 견해가 성숙한 견해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교육을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학생들에게 기도 방법을 수련하고 덕을 수련하도록 가르침으로써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 관상적 차원은 기도와 활동 모두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인도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하는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저 세상에서 우리를 잘 보살피시리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지 않는 장래를 우리가 왜 바라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현재의 순간에서 더욱 찾아야 한다. 이 현재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래에서 찾아지지 않고 현재에서 찾아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특히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는 절대 진리이신 분과의 관계를 맺는 일- 에 집중하도록 적절한 수련을 시켜야 한다. 아빠는 모든 피조물에게 애절한 관심을 갖고 계시며, 특히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도록 부르신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취적 탐험의 일부이다.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조건과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러한 계시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것이지, 다음 세대에 가면 바뀌어 버릴지도 모르는 철학적 사유나 과학적 발견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에 대한 태도

이 세대는 바티칸 공의회로 말미암아 㰡”얀센주의㰡•라고 부르는 파괴적인 가르침으로부터 마침내 구해졌다. 이 얀센주의는 복음을 왜곡한 하나의 이단설로서 신학교와 가톨릭 가르침의 주류에 교묘히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육신은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누구에게나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의 상징은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는 고상(苦像)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소수를 끌어안으신다는 것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속성이 절망적으로 타락했다는 부정적인 견해로 해서 극단적인 보속의 행위를 수련하도록 만들었다. 이 가르침은 프랑스에서 퍼져나와 프랑스 혁명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의 이민과 함께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그것은 아일랜드 신학교로 스며들었고 이민 오는 사제들과 함께 미국에도 오게 되었다. 교회의 당국에 의해 오래전에 얀센주의가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대한 만연된 불신과 하나님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이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대부분의 가톨릭 교육기관을 지배했다.

1). 서양적 모델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해 희화적인 태도를 갖는 경향을 만들어 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자아'의 서양적 모델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해 희화적인 태도를 갖는 경향을 만들어 냈다. 어릴 적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좋은 의도로 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관념으로 가르친 종교교육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무조건 즉시 복종하도록 요구하는 폭군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인간적으로 꾸며낸 하나님의 모습이다. 신화나 동화를 통해 아동들은 폭군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다. 하나님을 폭군으로 보는 아동은 강제적으로 떠밀어 넣기 전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망치를 들고 있는 준엄한 판사의 이미지이다.”

아동들이 받은 또 다른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망치를 들고 있는 준엄한 판사의 이미지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과 심지어는 공포를 갖게 만들도록 하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을 아주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잡으려고 언제나 뒤를 밟고 있는 경찰처럼 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아동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교회에서 무어라고 말해도, 이 하나님은 아주 위험한 존재야. 하나님은 폭군이고, 언제나 뒤를 밟고 있는 경찰이고, 언제나 영원한 지옥불로 판결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판사야!" 하고 정서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변하기 어렵고 오래 간다. 신학적인 훈련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에 이미 프로그램으로 기록되어 버려 그 후에 복음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이는 능력까지 깊게 조건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 신학적 훈련이 그 프로그램화된 정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념체계는 마치 우리의 발목에 쇠사슬과 쇠공(죄수처럼)을 달고 다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러한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보내셔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부모와 선생이 잘 보살핌으로써 모범을 보여 주고 잘 키워 나갈 수 있도록 하였어야 되는 것이다. 부모의 성소(聖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가지신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히 혼인으로 받는 주된 은총 중의 하나다.

물론 여기에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잔인하거나 악의에 찬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으로서 그들의 폭력, 억압, 여러 가지의 계획된 악행에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따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에게 회두하고 영적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소용이 없다. 이것은 믿음이 확대되면서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무한한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라는 것을 뜻하는 기술적인 용어이다. 이것은 싸우거나 도망가도록 자동적으로 신체를 준비시켜 주는 것과 같은 정서적인 무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 무서움이란 그 성격상 그 사람을 하나님에게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지고 싶도록 만들어 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게 사랑으로 봉사를 하려고 노력하고 그 관계를 깊게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신뢰가 점점 성장한다. 우리가 정말로 정서적으로 하나님을 무서워할 때에는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진 많은 부정적인 태도들을 잘 살펴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영적 여정을 잘 시작하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환경이나 유혹들로 말미암아, 아주 유치하고 하나님에게 맞지 않은 옛날 수준의 관계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자주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쉽게 판단을 내리는데, 이것은 우리의 아동기의 의식을 투사(投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주변에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모델을 하나님께 투사할 수도 있다. 만일 아버지가 지배적이고 전제적이었으면 하나님은 쉽게 지배적이고 전제적인 분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결과로 오는 영향이 위협적이면 후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게 된다. 아동기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고 그것을 떨쳐 버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평가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과 우정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제2절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

 

1.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이시다.

관상기도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원천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삼위일체이시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에 뿌리를 둔다. 우리가 이 사실을 충분히 묵상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례 때에 아버지, 아들, 성령의 가장 거룩한 삼위가 온전하게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는 단지 살아 있다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인간으로서 참여하고 있지만 은총을 통하여 더욱 참여한다.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과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아들 사이에 오가는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분은 자신을 비워 서로 내어 주신다. 말하자면 사랑의 영이 그분들을 다시 채워 주시기 때문에 그분들은 영원히 서로에게 자신을 비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생명 속에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이러한 신적인 사랑의 흐름이 은총을 통하여 우리 안에 스며들어 온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는 이것을 안다. 이 열망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아무리 지치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기도의 삶과 그 기도로 침투되는 활동의 삶을 발전시켜 나가려고 하는 그 노력 속에 드러난다.

삼위일체적 생명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소망 속에 일차적으로 나타나 있다. 관상기도는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이시다.

 

2. 관상기도의 초점은 그리스도론적이다.

관상기도의 초점은 그리스도론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욱 깊은 관계를 우리에게 형성시켜 준다. 신성한 독서(기도적으로 성서읽기)와 다른 헌신행위, 그리고 특히 성사를 통해 시작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관상기도의 수련이 성장해 감에 따라, 더욱 새로운 깊이와 더욱 새로워진 친밀의 수준으로 움직여 간다.

 

3. 관상기도의 효과는 교회적이다.

관상기도의 효과는 교회적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다른 모든 이들과 전 인류 가족과 연대를 맺게 된다. 개인기도라는 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 가족, 특히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안지 않으면서 이러한 깊은 수준에서 기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와 일치의 감각을 어떤 형태의 공동체 안에서 표현할 필요를 우리는 또한 느낀다.

이러한 점들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 관상기도는 삼위일체적 관계의 심층으로 나아가는 길로서 그리스도와 갖는 실존적인 관계로부터 나온다. (원천)

우리가 앉아 관상기도를 할 때 스스로를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한 생명과 연결을 짓는다. 거룩한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을 동의하는 몸짓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의지가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아서, 말하자면 우리의 유기체 안에 있는 전류(거룩한 생명)가 돌게 하고 거룩한 에너지가 흐르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에너지는 이미 내 안에 있으면서 활성화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현존 안에 앉아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펼쳐진다.

거룩한 독서 및 여러 헌신행위의 수련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도 록 준비시켜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서 친해지며 친구가 되는 것과 같이 어떤 관계가 진전하는 과정을 거친다. 관계의 진전에서 마지막 단계는 우리가 그 관계에 투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을 더욱더 알도록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마침내는 그 사람에게 투신하는 관계로까지 자라는 경험들을 잘 알고 있다. 투신은 친구관계를 정의하는 특성이다. 그냥 안면 있는 관계에서는 그 관계를 언제나 끝낼 수 있지만 친구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어느 쪽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끝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기도하는 생활을 정진하기로 결심했거나,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워지고 삼위일체적 사랑의 삶 속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매일의 생활 프로그램을 꾸미기로 결심했을 때에, 그리스도와 친구의 관계는 이제 투신의 관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앉으면 그저 그리스도와 마주보고 앉는 것만은 아니다. 내심에 있는 신성한 내재로 움직여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갖는 우리의 관계가 내적인 것임을 말하며, 특히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 속으로 넣어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참으로 파스카의 신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매번 신학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자동적으로 우리의 기도 내용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의자나 바닥에 앉아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관련을 짓는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 안 가서 사막에서 유혹받으시는 그리스도와도 동일시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고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마침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도 동일시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죄스러움을 모두 짊어지셨다. 이 죄의 결과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아주 어릴적부터 가져온 누적된 상처들과 생존하기 위해 썼던 유치한 방법들을 가진 거짓 자아이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앉으면 성령으로부터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몇 년 하고 나면 언제나 사막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릴적 상처로부터 나아지는 길은 십자가를 통하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십자가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어릴 적부터 가지고 온 우리 자신의 아픔이다. 우리 자신의 상처들, 우리 자신의 한계들, 우리 자신의 성격적 결함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끼친 손상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고유하게 경험하는 인간조건의 아픔들, 이것들이 우리의 진정한 십자가이다. 이러한 십자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청하시고 그분과 나누라고 청하시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중에 우리의 아픔을 이미 경험하셨고 우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만드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일어난 어떤 상황 안으로 단순히 들어가는 것인데, 이 상황이란,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그 일치가 의미하는 모든 것, 즉 우리의 모든 아픔, 불안, 공포, 자기증오, 그리고 좌절감과 같은 것들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외침이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도 그의 모든 사명과 활동의 근본을 이루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도망쳤고 그의 메시지는 갈기갈기 찢긴 휴지 조각이 되었다. 그분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정부의 저주 앞에 마주서야 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메시지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순간이 구원의 순간이다. 왜 그런가? 이 십자가의 외침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절망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의 외침이며, 이 외침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외침으로 삼아 부활로 변형해 주셨던 것이다. 기도하려고 앉아서 애를 쓰면서 아픔이 올라오도록 허용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

2) 관상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고난, 죽음, 부활)의 핵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기독론)

우리의 약점과 무력함에 대하여 새로운 빛이 던져지는 것에 동의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 더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다. 왜 그런지 나는 말할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이시다. 단순한 겸손, 완전히 자신을 비우는 자세, 온전한 봉사, 무조건의 사랑, 강생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러한 사랑이 완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 자신을 떠나보냄으로써 그 무한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단순히 겸손한 방법이다. 거룩한 말씀으로 상징하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동의는 자아승복과 신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3) 신학적 덕들이 어떻게 이 거룩한 문맥들과 부합하는지 보라. 거룩한 삼위일 체가 우리 안에 내재하심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효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희망을 두고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맡겨 드린다. 자아에 관한 지식을 점차로 깨우치면서 인내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상당한 정도로 표현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맥락에 다른 면이 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앉아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결별되면서 생긴 모든 결과들을 받아 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과 우리를 동일시하면서, 우리의 정서적 상처들과 양심에 받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내적인 부활의 순간들을 통하여 우리의 거짓 자아가 마침내 떨어져 나가고 영원한 부활을 이룩하면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자유를 늘 누릴 수 있게 된다.

4) 성령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 안으로 부어 넣어 주심으로써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도 이룩된다. (효과)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인간 가족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우주에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된다. 이 우주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여정이 아니라 세상에 상당히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성령이 기도 중에 우리에게 부어 주신 사랑을 세상 속으로 부어 줄 수 있게 된다. 전쟁과 폭력으로 부서지고 있는 세상의 다른 곳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고통이든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고통 받으시는 하나님과 같은 연민을 우리가 갖는다. 전쟁과 폭력이 무서운 것은 바로 하나님이 부서지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아주 동일시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 중에 가장 미소한 자에게 베푼 것이 곧 나에게 베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폭력은 고쳐져야 한다. 우리의 침묵 중에 우리 자신을 떠나보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시기를 허용할 때에 사랑이 생겨나는데, 위와 같은 불균형은 바로 이 사랑을 필요로 한다.

5) 관상기도로 받는 큰 특권은, 하나님으로부터 결별되었다는 개인적인 경험과 이에 따라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나누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탄식을 통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데에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시하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효과)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바로 평화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세상에 가지고 오게 하려는 우리의 열망인 것이다. 이러한 열망을 갖게 한 원천인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 이미 부어지고 있으며, 이 상처들을 은밀하게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업에 우리가 참여한 결과를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연대를 맺으면서 동시에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누구와도 연대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6) 어떤 사람이 비평하듯이, 관상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긍정적이고 심오한 방법으로 확인된다. (효과)

예수님의 신성한 인성이 하나님의 신격을 온전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살아 있는 믿음을 관상기도는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 알고 있는 아버지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 덕분에 우리는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영과 진리 속에서 예배하라고 초대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아버지의 가슴으로 다가드는 것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신적인 원천에 자신을 내어 드리면서 그 원천에서부터 성령의 사랑 안에 영원히 솟아나고 또 다시 그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제3절 신학에서 현존체험으로

여기에서 관상기도의 신학적 3원칙들을 좀 더 자세히 다루어서 그것들이 신학에서부터 우리의 삶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경험으로 어떻게 옮겨 가는지를 보고자 한다. 영적인 여정은 이와 같은 초월적인 현실로 옮겨가는 움직임이며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것에 점차로 동화되는 것이다.

 

1.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다.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 즉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세례 때에 아니면 우리가 은총의 상태(거듭 남)에 들어갔을 때에 시작되었다. 가장 거룩한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고 계신다는 교리가 영성생활의 모든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음을 뜻하며, 현대과학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이 전달이 높은 주파수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인 기능의 수준을 넘어서 이 전달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너무나 주파수가 높아서 순수한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현존에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서는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관계를 말하는데, 전통은 이들을 아버지, 아들(아버지의 영원한 말씀) 그리고 성령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의 기본적인 신비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아버지'는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한 모든 인간관계를 품어 안으시는데, 특히 돌보심, '원천이 되심'의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수세기에 걸쳐, 삼위일체 교리는 여러 가지 많은 신학적 모델들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모델들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잠재력의 근거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삼위일체 안에 있는 그 잠재력이 활성화(actualization)된 것이 말씀이다. 그 말씀은 아버지이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 주신 아버지 자체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분은 아들 안에서, 당신 자신의 내적인 말씀 안에서만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아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시면서, 흐르는 사랑의 공동연대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비우심은, 즉 무한한 잠재력 속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활성화하는, 삼위일체 안에 표현된 영원한 말씀 속에서 완전히 드러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에게 부어 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도 거의 말할 수 있다. 삼위의 상호내재(circumincession :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 안에,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 안에,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안에 살고 있다는 신학적 용어)라고 부르는 교리의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아버지는 자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산다고 한다. 아들은 다시, 완전하고 자유로이 자신에게 넘겨진 이 엄청난 선을 대하면서, 끌어안음과 같은 것으로 자신을 아버지께 돌려 드린다. 이것을 교회의 어떤 교부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가장 달콤한 입맞춤' 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며, 말하자면 그분들이 공유하는 가슴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자아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자아포기이다. 모든 것이 선물이며 모든 것이 사랑이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무조건 선언했다.

아버지께서 영원한 말씀 안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과 같은 움직임으로, 모든 창조물은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적인 원천이며(요한복음의 서문 참조), 그 원천은 창조의 여러 가지 수준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창조는 무한한 실재의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닳아 없어짐이 없다. 강생하심으로써 말씀이 자신을 비우심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내적인 말씀을 표현하시면서 언제나 하시는 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표현이 창조 안에서 일어날 때에는 어떤 비우심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안에 들어오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어떤 의미로 돌아가시지 않고는 그 사랑이 이 창조세계의 어떠한 모양으로도 온전하게 표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조시에 하나님은 어떤 면으로는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셨다. 최소한, 하나님은 창조시에 창조 이전의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표현의 절대적인 충만이신 영원한 말씀의 어떤 아름다움, 선함, 진실을 표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온전하게 개입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비상한 사랑의 가장 충만한 표현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무조건적 사랑 혹은 신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비의 핵심이다. 이 신비는, 지적인 퍼즐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경탄과 경외라는 뜻으로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전달하면서, 유일하고 적절한 우리의 응답으로서 우리의 온전한 포기를 요구하신다. 삼위일체의 관계는 그 본성 때문에, 무조건적이고 온전한 자아포기인, 신적인 사랑의 흐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러한 끝없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아들에게 들어가고, 아들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전달된다. 신적인 사랑의 강물로 들어오라고 모든 사람이 초대되었고, 아니면 최소한 영원한 생명의 강물에 뛰어드는 모험을 하라고 부르셨다. 우리가 거짓 자아를 떠나보내면, 우리는 이 사랑의 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강은 언제나 흐르면서 끝없는 은총의 선물을 내어 준다. 더 받으면 우리는 더 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줄 때에 더 많이 받을 공간을 우리가 자신에게 여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과제가 피조물, 특히 인간의 생명 안으로 옮겨졌을 때에, 우리는 어려움 속으로 빠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현존과 조건 없는 사랑을 친밀하게 경험하지 못한 채, 온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Thmas Keating이 「영적 여정」이라는 비디오테이프와 「사랑에로의 초대」라는 책 속에서 강조해 온 점들 중 하나이다. 즉, '하나님과 친교의 경험 없이, 그리고 신적인 생명을 의식 안에서 나눔이 없이, 온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앉아서 사고와 감정들의 일상적인 흐름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시키는- 을 떠나보내면서 관상기도를 하면, 우리의 지향성(intenconality) 때문에 우리 안에 이미 현존하시는 신성한 영에게 우리의 가슴이 열린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시작한다. 신적인 생명은 실상 하루에 24시간 우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훈련적이고 정규적인 기도의 수련 없이는, 이것에 대한 접근을 지극히 어렵게 만드는, 거부하고 반대하는 습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관상기도의 원천은 어떤 열망이나 기대나, 아니면 아주 멋진 이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신적인 생명이 주시는 초월적 실재(transcendent reality)가 그 원천이다. 세례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열망 안에서도 이 놀라운 선물이 주어진다. 이 후자는, 내가 감히 말하거니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지만,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일치로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많은 사람들(즉 비그리스도 신앙인들 : 역자 주)에게도 해당한다.

우리가 앉아서 관상기도를 할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실상 모든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존재로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의 독특한 표현이며, 성령께서 만들려고 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삶이란 우리 자신을 맞춰 들어가는 어떤 전략이나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어떤 종류의 짜인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은총의 활동으로서 내적 자유 -성 아우구스티노가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가졌다." 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을 자유란 전혀 거짓 자아에 의해 기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들의 자유이다.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적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본부와 연락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본부는 객관적으로, 즉 진정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생명이며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신적인 사랑으로 거기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삼덕(고전 13:13. 믿음, 소망, 사랑)을 훈련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더욱 깊은 수준의 신적인 인식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변형적 역동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했다. 이것은 자아포기를 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가 느끼거나 알 수 있기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보이지 않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슴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그러므로 관상생활을 준비시키는 것으로서의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의 생명 그 자체로서, 그 생명은 우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바라고 진리를 찾고 기도하려는 우리의 욕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2. 관상기도의 초점은 그리스도론이다.

은총의 이끄심은 여러 가지 많은 모양과 측면들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리스도인 생활이라는 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믿음으로 앉아 기도하면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우리를 열어 드리면, 우리가 파스카 신비의 역사(役事)를 나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관상기도 중에 의도적으로 침묵과 고요 속으로 들어가면서 거짓 자아와 그리고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으로 행동하기를 중단할 때에, 우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파스카의 신비 속에 잠기는 것이다. 파스카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서는 최선으로 표현된 것이다. 예수님의 비우심은 -정말로는 이 비우심은 창조 안에서 활성화이다- 절대 실재이신 분께서 무한히 비우시는 것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상징 혹은 표시이다. 무한하신 선(Infinite Goodness)께서는 사랑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리시는 것이다.

모여서 관상기도를 하고 있는 공동체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눈이나 상상에나 감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지만, 때로 우리가 거룩한 경당을 방문했을 때에 그 경당 안에 아니면 우리의 가슴 속에 그분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듯이, 우리는 영적인 수준에서 그분의 현존을 직감한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깨우쳐 주는 어떤 단어나 사고 너머에 현존하신다는 깊은 확신이 바로 우리 안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우리의 사랑이 식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 통찰의 불꽃 아니면 행복의 불꽃을 우리의 허기진 기능 속에 떨어뜨려서 하나님 사랑의 불길을 일깨워 준다.

사랑을 거부하고 이기심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세계 속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사회로부터의 압력이 우리의 양육, 교육, 그리고 문화를 통하여 교묘하게 스며들고 있다. 이 사회는 전체가 비(非) 신적인(non-God) 요소로 포화되어 있다.

맨 먼저 우리는 모든 세속적인 유혹 앞에서 우리 자신, 혹은 우리가 바라는 우리가 되려는 내적 자유를 재확인해야 한다. 심지어 영적 여정에도 이 유혹이 끼여든다. 우리는 이 여정 속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의 거짓 자아를 가져온다. 아마도 여러 해 동안 하나님과 가졌던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아동기의 특성인 마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흥정을 해왔기 때문에, 상호의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상기도의 아주 중요한 열매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아동기적인 생각이 정화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면서, 거기에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나 방법이나 몸짓 같은 것들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침묵은 실상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이다.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는 침묵이다. 삼위 안에는 영원한 말씀 이외는 아무 말도 없고 이 영원한 말씀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것은 딱 한 번 말해졌는데 그것도 절대 침묵 속에서 말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만 그것을 듣는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침묵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 언어는 인간이 가르치는 어떠한 언어교육으로도 가르칠 수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르쳐야 한다. 관상기도의 일차적인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아주 단순한 것이어서 두 음절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라"이다. 그러면 그것은 당신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를 짓누르는 다른 영향들을 고려할 때에 이것은 극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삶 중에 때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기도의 기본적인 초점으로 삼은 이상, 더 이상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은 없고, 좋은 것(good), 더욱 좋은 것(better), 가장 좋은 것(best) 사이의 선택만이 남는다. 처음 시작했을 때에 우리가 사용한 훈련이나 방법은 더 좋은 도구가 요구될 때에 이것을 버려야 하고, 더욱이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의 기능이 갈 수 있는 끝까지 간 후에는 마침내 가장 좋은 도구로 옮겨 가야 한다.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침묵이 모든 것을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관상기도의 초점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기도할 때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어떠한 다른 사건들보다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낸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상기도 중에 그리스도의 현존에 동화를 한다. 기도 중에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고 어떠한 사고들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현존에 동일시하려고 지향하는 한에는 그 동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 인류의 비참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분은 자신이 인간 조건의 모든 결과들을 스스로 짊어지셨는데 그 중의 가장 큰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결별했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그분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셨을 때에 가장 절망적으로 느끼셨던 정서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무의식을 정화하면서 우리가 체험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서이다. 우리 인격의 어둔 면과 우리가 무서운 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점진적으로 알게 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 거짓 자아가 부서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 진행되고 있는 거룩한 생명이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깨달음 안에서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깨어지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어두운 면과 악의 가능성을 마주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심리학에서 나선형의 계단으로 비유된 예는 우리가 겸손으로 더 내려갈수록 우리는 그와 상응하게 내적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내면에 쌓인 정서적 정크들의 밑바닥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거룩한 생명이 충만해지는 일이 영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하게 거짓 자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화 안 된 정서적 자료들이 신성한 치료자에 의해 처리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받아들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 조건의 그 모습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이란 우리의 죄악에 그저 옷을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동기를 그리스도의 마음과 가슴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관상기도 중에 은밀하게 진행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기도를 하려고 앉아 그분과 동일시하면서 거룩한 생명이 자유로이 우리 안에서 흐르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들을 떨쳐 버리는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부활의 증거가 우리의 기도 중에 나타나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서 경험된다. 우리의 신앙체험이 정말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판단기준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자라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 열망은 이런저런 것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점차로 더욱 건강해지고 든든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가 그룹으로 관상기도를 하면, 이미 각자 안에 이루어진 현존과 서로 접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룹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다. 우리가 공동체로 모여서 기도하면 각자가 공동의 내적침묵에 공헌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현존은 더욱 강화된다. 그렇게 저장된 내적 침묵의 강함은 우리가 혼자서 기도할 때보다도 더욱 깊은 수준에 이르도록 각자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3. 관상기도의 효과는 교회적이다.

관상기도가 기초를 두고 있는 세 번째의 신학적 원칙은 관상기도가 그 효과에서 교회적이라는 것이다. 이 교회적이란 말은 사회적 차원과 사회적 기능과 사회적 현실을 가르킨다. 우리가 일단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고 나면 거기에는 단순히 개인적인 기도라는 것은 없다. 우리의 기도는 인간 가족의 모든 지향과 욕구를 대신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시간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관상기도를 하는 시간에 은총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인간 가족과 하나라는 감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때로 기도 중에 우리는 이러한 연대를 실제로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연대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핵심이고 정신이다. 이러한 것 없이는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효과적인가에 대하여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우리가 모여서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면, 관상기도의 모임은 언어가 없는 전례가 되고,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축하하며, 삼위의 내적 생명에 동참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된다. 아주 작은 그러한 체험들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지만 공동적으로는 그 공동체를 광범위하게 초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안에 각자가 동참해서 얻어지는 거룩한 에너지는 모든 인간 가족의 필요를 위해 드리는 일종의 보편적인 (혹은 범 세계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이 세상에 전달한다는 뜻에서 진정으로 사도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개인적인 창조적 에너지가 일깨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그 잠재력을 충만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단 파스카의 신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내적 부활로 이르게 하는 정화과정에서 오는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하면, 우리는 어떤 목회 활동을 하라는 또 하나의 부르심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바울이 열거한 목회활동과 카리스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의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우리로 하여금 이 사랑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도록 힘을 준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때가 이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러한 일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일찍 시작한다면, 아마도 우리 생애 중에 여러 번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재에 현존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그들은 모두 지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우리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어떤 무엇보다도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현실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시간을 내어 살펴본다면, 아마도 당신을 절대 신비로 이끌어 가는 위대한 힘 같은 것을 느꼈던 특별한 은총의 어떤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이 어떤 목표에 도달했거나 적어도 일생 동안 붙잡고 늘어질 만한 정도의 무엇에 도달했다고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 특수한 은총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들은, 실제로 신비가 진행되고 있는 내부를 가리운 커튼을 잠시 열어 보여 줌으로써 그 신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 신비란 삼위께서 우리 안에서 신성한 생명을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과 믿음으로 하는 우리의 동의가 -마치 전기 배선이 다된 건물에서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이- 우리의 어둠에 신성한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사실이다. 신성한 빛이 우리 안에 현존한다는 믿음, 즉 체험이라기보다는 확신이 관상기도의 일차적인 기초이다.

관상기도의 공동체에서는 우리는 그 방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도 하나가 된다. 즉 자연, 예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를, 즉 비록 둘만의 공동체라도 형성하고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이러한 연대는 또한 다른 여러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을 존중하려는 감각을 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관상기도가 어디서 왔는가를 알고 싶은 열성 등과 같은 것이다. 일단 관상기도 수련이 형성되고 나면 연대과정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공동체 생활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체험을 깊게 만드는 여러 가지 집중피정을 뜻하기도 한다. 또 어떤 행정적 기구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들이 남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게 힘을 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연대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영적 체험을 나누는 가능성을 또한 열어 주는 차원이 있는데 이 나눔은 동료 의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사적인 체험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는 자신의 영감을 따를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또한 신중하고도 겸손하게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사람들의 체험에 귀를 기울여서 단지 부수적인 영향만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여정에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지도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관상적인 공동체는 체험을 과장하여 체험을 머리로만 올려 보내거나 어린아이처럼 해석하는 것에서 보호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수많은 정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길은 우리의 거짓 자아에게 계속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연대의 과정은 우리의 취향과 편이를 떠나보내려는 의지를 갖게 하며 어떤 상황이나 우리의 일차적 의무가 요구할 때에는 그것들을 희생하려는 의지도 갖게 한다.

 

4. 요점

“기도는 그것에서 솟아난 활동 없이 혼자 서지 못 한다”.

활동 없는 관상기도는 침체되게 하고 관상기도가 없는 활동은 지쳐 버리거나 한 곳을 맴돌게 만든다. 관상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관상적 시각이나 아이디어를 가려 준다. 그것은 그 둘을 한데 묶어 줄 수 있게 하며 우리의 관상적 투신의 정신을 우리의 일상생활 안으로 가져올 수 있게 한다. 삼위는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기도 중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기도를 하는 동안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동안이나, 우리의 일자리까지도 따라 다니신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이 일상생활 중에 그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일종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당신의 농담 한 마디로도 당신은 그 분위기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안으로 은총을 부어넣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우리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관상기도는 자신의 영적인 본질에 접근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참 자아를 표현하도록 해주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삶은 점점 우리의 내적 자유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의 열매나 진복이 솟아나고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 주게 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의 원천, 즉 우리 안에 있는 삼위의 생명을 향하여 더욱 깊이 들어감에 따라 그 효과는 강력하게 우리를 밖으로 향하게 하여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부르는 연대로 향하게 한다. 이 성인들의 통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관계를 맺어 가는 능력을 말한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