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관상기도의 심리학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영적 성장에 관한 위대한 모델은 그리스도의 우정이었다. 우정이란 굉장한 예인데, 그 이유는 우정은 확신과 사랑과 자기 노출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친근함이 우정으로 발전하고 아주 깊은 투신의 관계로 발전하면서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정의 모형에서는 인간 조건의 두드러진 특성인 정서적 질병의 측면이 언제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우정은 인간의 취약함과 결핍이라는 현실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이 가지는 한 가지 특성은 방어(자기방어: self defense)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우리의 방어가 줄어들 때에 우리 인격의 어두운 면이 고개를 쳐든다. 진정한 우정의 중요한 면은 우리가 이 내용(어두운 면)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려는 용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에, 최소한 서양 사회에,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다른 모델이 있는데, 그것은 현대 심리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온 것이다. 키딩은 영적 성장에 대한 이 모형을 '신성한 치료'라고 부른다. 이 치료라는 말은 아주 우수한 치료자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우정과 신뢰의 환경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여러 가지 정서적 또는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치료자를 찾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모두 질병을 앓고 있는 종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 얼마나 자신의 병이 깊은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인간 조건, 특히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적절한 진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도움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쓰는 열두 단계의 프로그램이 갖는 강한 힘은 자신의 질병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가를 강조하는 데 있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스스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알며, 이 열두 단계를 실천하지 않는 한 결코 자기의 인생을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의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앤 월슨 세프(Ann wilson schaef) '중독 과정'이라고 부른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특별히 서양 사회에서는 최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98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이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키딩은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나머지 2퍼센트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리학적인 용어로 '중독 과정'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신학적으로 '원죄의 결과'라고 부르는 것과 상응하며 이것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중독과정은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중독 현상 중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데, 요즈음에는 여러 가지의 '열두 단계'로 중독이 치료될 수 있다. 중독된 사람의 이점은 그들이 도움 없이는 결코 회복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평균적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서 지니고 있는 어느 정도의 존경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중독 현상이 아주 악화되고 외적으로도 기능이 파손된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에게 실제적인 질문은 우리가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가'이다.

전통적인 신학에 따르면 원죄의 결과가 세 가지가 있다. 즉 착각, 탐욕, 약한 의지 등이다. 착각이란, 우리 인간의 본성에 맞는 방법으로 무한한 행복을 갖도록 인간이 프로그램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탐욕이란,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거나, 아니면 옳은 곳에서 찾더라도 너무 많은 행복을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한 의지란, 우리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에 도달했어도, 의지가 너무 약하여 그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 가르침과 단주 모임에서 가르치는 열두 단계 중 첫 단계로 "내 인생은 다루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선언하는 것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원죄의 결과라는 전통적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삶을 다루는 자유가 심하게 제한받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졌다는 완전한 무기력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전 개념은 원래 하나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내 인생은 다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보편적인 진단을 일단 알고 나면, 우리의 질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자신이 완전히 무너지는 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즉시 중독 과정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그 과정을 진전시키는 뿌리를 치유하도록 만들어진 예방적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복음은 인간 조건을 있는 그대로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복음에서 치유 과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부르는 근본적인 부르심인 '회개하라'라는 말은 "네가 행복을 찾고 있는 방향을 바꾸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동 초기부터 가져온 여러 가지 방향의 행복추구의 방법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서서히 우리를 죽게 한다. 만일 거룩한 의사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말씀하신 회개하라는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을 하면, 우리는 신성한 치유의 이익을 즉시 얻을 수 있다.

치료는 앞에서 보았듯이, 우정의 관계와 치유의 관계라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 정신치료학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으면 질병의 자세한 진단을 얻게 된다. 관상기도와 관상 활동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사는 삶-은 인간의 건강, 온전함, 그리고 변형을 위하여 복음이 제시한 프로그램이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나 어록들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무의식의 수준에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을 향해 하신 말씀들인데,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은 도저히 충족시키지 못할 요구를 계속 더 증가시키면서 우리를 결국 부서지게 만든다. 만일 어떤 사람이 통제나 존중이나 안전에 대한 본능적 욕구에 부여한 정서에게 지배를 받고 있으면,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그것들을 이 에너지 중심(energy center : 행동동기의 중심 : 역자 주)으로 넣고서 그러한 프로그램의 관점으로 이 경험들을 해석할 것이다. 이것이 만일 만족을 주는 것이면 일시적인 기쁨이 있을 것이며, 욕구를 좌절시키는 것이면 비탄에 잠기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처음부터 이러한 정서 프로그램에 붙잡히게 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아직도 조사 중에 있다. 세계 종교들은 심각한 결함이라고 보편적으로 경험되는 인간 조건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창조 이론을 제시해 왔다. 이제는 심리학과 과학이 이에 대하여 공헌하고 있다. 피아제(Piaget)와 그리고 근대의 잔 브래드셔(John Brad놈w)와 같은 발달 심리학자들은 그 원인이 아동기 초기에 부모들의 양육의 실패와 정서적 상처들 때문이라고 했다. 초월심리학자(혹은 심층 심리학, transpersonal psychologist : 인간의 신비적인 체험을 다루는 심리학 : 역자 주)인 마이클 워슈번(MichaeI Washburn)은 그의 저서 「자아와 역동적 근거」(The Ego and the Dynamic Ground)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독립된 자아 동일성을 발달시키는 첫 단계로서 인간 존재의 원천 -이것을 그는 '역동적 근거'라고 불렀다- 과 자신이 하나라는 감각을 억제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억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행복을 절망적으로 찾기 시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원인이었든지 간에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우리의 성장체험에서 빠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인식이 진정한 안전, 진정한 인정, 진정한 독립을 가져다주지만 이렇게 안심시켜 주는 현존과 행복하다는 감각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의 발달에서 빠져버렸던 것이다.

안심을 줄 만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 없이는 세상은 잠재적으로 적의에 찬 것으로 보이게 된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강하기 때문에 아주 어릴 적에 썼던 여러 가지 대리적 방법에 매달리게 된다. 발전 과정이 진행되면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상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행복 프로그램들은 결코 이것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 정서적 고통을 억압하려 하고 그것을 보상하려고 하는 노력의 결과로 거짓자아가 형성된다. 복음은 거짓자아가 치유될 수 있는 질병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신성한 의사 -이 모형에서 볼 때에는 신성한 치료자- 로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치유과정은 기본적으로 관상기도로 하는 일이며, 관상기도를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숙제를 하는 것이 신성한 치유를 하게 만든다.

내가 신성한 치료라고 부르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 조건의 질병에 대응하는 것인지를, 그리고 그 진단이 신학적이며 심리학적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것을 한번 살펴보자. 관상기도의 기간을 하나의 시발점으로 하면서, 수년간의 정규적 수련이 이 하나의 기도기간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기로 하자. 관상기도가 습관화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성령의 관상적 선물, 즉 지식, 이해 그리고 지혜에게 점점 더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를 할 때에 우리의 심리적인 체험은 아래 그림(그림5)에 나타낸 것과 같다. 우리가 거룩한 단어를 도입하면 네 가지 큰 순간들로 이루어진 원형을 만든다. 첫 번째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도입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부드럽게 형성했을 때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인식을 가득 채우는 끝없는 사고들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수련을 하고 나면 이것은 보통 비교적 빨리 지나가고 고요와 쇄신된 기분과 안식의 깊은 감각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관상기도에서 두 번째의 순간이다. '휴식'이란 평화, 내적 침묵, 만족감, 편안한 감각, 행복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 등 광범위한 심리적 인상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휴식이 아주 깊으면, 기도 중 어느 지점에서는 지나가는 사고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강한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아마도 1,2년간 수련을 하고 나면 이제는 누적된 깊은 휴식의 경험으로 해서 육체가 자동적으로 쉬도록 만들고 나아가 잠자는 것보다 더욱 큰 정도의 휴식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깊은 휴식의 느낌은 특히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감각을 동반할 때에 일종의 하나님과의 심리적 전이로 이끌어 준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치료자가 되시는 것이며, 어릴 적에 부모와 같이 중요한 인물로부터 우

                              



리가 받아 보지 못했다고 느끼는 신뢰와 사랑을 이 전이 속에서 치료자에게 기대하게 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정서가 저장해 왔고, 새로이 거부당할 적마다 다시 느끼게 되는 거부의 고통을 치료자에게 투사하면, 그 치료자는 우리가 아동기에 적절히 경험하지 못한 받아들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아무리 많은 신학적 성찰을 하더라도 되지 않던 상처의 치유가 일어난다. 정서는 이성의 법칙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이 결핍된 내용과 양에 맞게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거의 누구나 우리가 유아기에 필요로 했으나 결핍되었다고 느꼈던 애정과 안전감에 대한 정서적 고통의 잔재를 품고 있다.

깊은 휴식은 사고에 대해 집착하거나 혐오감을 갖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결과일 뿐 아니라 신성한 신비(즉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 데서 온 결과이다. 우리 자신 안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교의 교리로는 신적 내재(Divine Indwelling : 혹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현존(임재)에 대한 인식이 재 각성되기 시작한다.

휴식이 자라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깊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정서적 불신 -우리가 어린 시기에 여러 가지 거부로 말미암아 혹은 지나친 형제간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심어진- 이 풀리기 시작한다. 휴식이 아주 깊기 때문에 육체도 전에 할 수 없었던 정도로 깊이 휴식하게 된다. 육체는 어릴적의 정서적 아픔과 그 아픔을 억압과 같은 방어기제나 보상적 활동으로 다루려고 노력해 온 결과들을 저장하는 창고이다. 그 휴식의 결과로, 일생 동안 지녀 온 정서적 잡초 주위에 있는 단단한 방어기제들이 부드러워지고, 건강을 지키려는 육체의 비상한 능력이 재생되며, 정신은 그 쓰레기들을 내버리기 시작한다. 기도시간 동안에 육신이 신체적 배설의 통로가 되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의 인식은 정서를 배설하는 통로가 된다. 정신은 이제 일생 동안 가졌던 소화 안 된 정서적 내용들을 토해 내는데 이러는 중에 '정신적 메스꺼움'이라고 불리는 충격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릴적의 정신적 충격은 결코 온전히 소화되거나 흡수되거나 배설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유아나 아동은 자신의 아픔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데, 만일 표현할 수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적절한 언어가 없거나 우리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용기가 없다. 충격적이면서도 표현 안 된 정서적 경험들은 무의식에 넣어져서 그 에너지가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정서는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표현함으로써만 소멸된다.

키딩은 관상기도의 원 운동 중에 이러한 세 번째 순간을 '무의식을 덜어 냄'이라고 부른다. '덜어 냄'이란 일종의 정신적인 메스꺼움의 경험을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전에 지나간 사건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고나 감정이 폭우처럼 우리의 인식 안으로 마구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스런 사고나 감정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다면 그것들이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원시적인 정서적 내용들을 배설하는 것이 원의 네 번째 순간이다. 이러한 정서적 아픔이 20년이나 30년(아니면 더 오래) 지녀온 것일 경우에는 배설하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관상기도와 같은 수련을 매일 훈련하여 준비했을 경우에는, 신성한 치료자에 대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단지 그 폭풍을 견뎌내면서 우리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원 운동과정을 다시 한 번 시작하면 된다.

이러한 덜어 내는 과정이 어떤 사람에게는 관상기도를 시작한 후에 바로 시작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처럼 극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성령께서는 밖에서부터 일을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만일 외적 자극이 있을 경우에는 이과정이 좀 더 즉각적이고 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는 비극이나 사고가 발생하거나, 정신치료 같은 것들의 도움으로 이 내용들을 느슨하게 풀어 주어서 아마도 우리의 인식의 표면에 가깝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에는 단 한 번의 관상기도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의 방어기제를 뚫고 완전히 인식 속으로 올라올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바로 그 환경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지적했다.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과 가까이 지내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심리적인 덜어 냄을 하는 이 순간에 우리와 가까이하시면서, 의식 속으로 올라오는 것들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것이며 그것을 마주 본다고 해서 우리가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해 주시려고 애를 쓰신다. 치료자는 고객의 복지를 위하여 일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때로는 고통스런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치료자가 우리를 기다리기 지쳐서 "누구누구하고 아주 절망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이때에 우리는 "다음 주까지 기다립시다."라고 대답한다. 이와 비슷하게 신성한 치료자가 "이제 괴로움을 주는 감정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보자."라고 제안하시면 우리는 기가 죽어서 천당으로 가는 더 좋은 길이 아마도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우리는 진짜 문제에 대면하기를 피하면서 영적인 책과 수련, 일, 오락이나 몰두할 활동을 찾아서 정신없이 파묻힌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관상기도를 끈기 있게 하면 진짜 문제는 스스로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라난 신뢰로 말미암아 치유의 과정을 참아 낼 수 있게 될 것이다(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도 이와 아주 비슷한 역사가 일어난다).

이렇게 원을 한 번 다 돌고 난 후에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 우리는 시작한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육체의 어디엔가에 갇혀 있던 내용들을 덜어 냈기 때문이다. 원을 돌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와 우리의 참 자아이심을 알아보게 된다(그림 4 인식의 수준 참조). 우리

                                         



의 정상적인 의식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나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지배적인 우리의 인식의 주변에 주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그 등장인물과 너무나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영화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정상적인 심리상태는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들에게 지배를 받는다. 외적인 사건들과 다른 사람들이 나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의 선택을 결정짓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관상기도 수련은 이와는 반대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좋지 않은 영화를 보러 가서, 자신을 배우와 동일시하지 않고, 우리가 영화관 안에 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일어나 영화관을 나올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집착되어 있으면 그리 쉽사리 일어나 걸어 나가게 되지 않는

다. 우리의 영적인 자아의 수준에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그저 목격할 뿐이며,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그 외적 사건에 붙잡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 5)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의 정서적 아픔이 배설되고 나면, 우리 안에 그만큼 내적 공간이 생겨난다. 우리는 우리존재의 영적 수준에 보다 가까이 있고, 우리의 참 자아에 보다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존재의 원천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데도, 이존재의 원천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중심에서, 전 생애 동안 쌓인 정서적 쓰레기 밑에 묻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고 있던 내용들을 덜어 내는 과정을 통하여 배설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상기도 속에서 이 원 운동을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의 중심에 더 가까이 간다. 그 결과로 더욱 깊은 휴식을 할 수 있게 되며 다시 정서적 정크들을 더욱 덜어 내게 된다. 이러한 정크들은 원시적인 정서나 정서로 채워진 사고들의 형태를 띠면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들은 가까운 과거와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과정을 새로이 시작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중심에 그만큼 더 가까이에 가 있다. 휴식하는 것, 정서로 채워진 사고나 원시적인 정서의 형태로 짐을 덜어 내는 것, 그리고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 등의 원 운동은 계속해서 우리를 우리의 중심으로 더 가까이 가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 운동은 사실상 나선형의 계단과 같은 역동적인 과정으로 되어진다.

덜어 내는 과정은 처음에는 육체의 어느 부분의 통증, 뒤틀림 혹은 가려움 등과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육체의 표면에 가까이에 있던 정서적 매듭이 아마도 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잠시 그 아픈 곳에 주의를 주고 난 다음에는 불편함이 비교적 빨리 사라진다.

기도의 깊은 휴식으로 신체의 표면에 있는 매듭들이 어느 정도 풀리고 나면 성령은 더 내적인 것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그러면 눈물이 흐르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적인 이유나 개인적인 이유로 인생의 많은 슬픔을 억압해 왔다. 이제 육체는 이전에 하지 못하도록 거부당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처음으로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상기도를 시작한 처음에는 우리가 지쳐 있기 때문에 육신은 잠을 청하게 된다. 잠자는 것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지만 육신은, 이전에는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던 것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면, 더 좋은 기분을 갖는다. 우리가 충분하게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그렇게 자주 잠에 떨어지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우리의 정서 생활에서 이전처럼 지치게 하는 실수들을 거듭해서 저지르지 않는 한 말이다.

정서가 정상적으로 되어 가면서 슬픔이 가장 먼저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눈물의 홍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인 이유로 남자들은 그 상태에 도달하는 데에 여자보다 좀 느린 것 같다. 초대의 사막교부들은 이 눈물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눈물에 대한 심리학적 지식이 없으면서도, 눈물이 가슴을 열어 주고 날카로운 감정을 부드럽게 해주며 쓰라림을 씻어 주기 때문이었다. 눈물은 값진 선물이다. 만일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이 최근에 있었던 슬픈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위의 그림(그림 5)의 설명을 완결하자면, 만일 우리가 수련을 중단 없이 수련하기만 하면 -그것을 느끼지 말고 그저 실행할 것을 나는 강조한다- 그 나머지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로 계속 돌아가고 휴식하고 더 많은 정크들을 배설하고, 그러면서 내적 자유를 더욱 즐기게 된다. 우리가 오래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중심에 이를 것이다.

우리가 중심에 다다르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릴 만한 정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내재(Divine Indwelling)를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련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면, 하나님의 현존은 영원히 숨은 채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과정을 수직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키딩은 고고학자들이 매우 좋아하는 중동 유적의 비유를 사용하였다. 고대에는 한 도시국가가 적국을 정복하면 군대는 그 도시를 태워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를 세웠던 것 같다. 그 결과 우리는 한 문명이 같은 곳에서 다른 문명 위에 세워진 것을 발견한다. 이 유적지는 그저 하나의 언덕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이 무시해 왔다. 이제는 이것들이 고고학적 보물로 간주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맨 먼저 할 일은 유적의 맨 위를 깨끗이 치우고 잡초들과 돌맹이들을 걷어 낸 다음에 그 자리에 번성했던 마지막 문명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들은 재와 쓰레기들은 쓸어버리고, 모자이크나 도자기 같은 것들은 영국의 박물관으로 보낸다. 그런 다음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발견한 것에 대한 만족감을 어느 정도 즐기고, 큰 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을 불러 모으고, 어떤 인도주의 단체의 기금에서 자금을 거둔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그 이전 도시국가의 유적을 파낸다. 이 과정은 여러 해가 걸린다. 한 단계 한 단계, 고고학자들이 파 내려가면서 한 문명과 다음 문명을 파헤치면 마침내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간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우리는 성서 구절의 자의적(字意的) 의미에 대하여 더욱 많고 완전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상업에 관한 것 뿐아니라, 거룩한 저서들도 발견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들 초기문명에 대하여 많은 측면들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고고학자처럼 이와 비슷하게 일하신다고 말하고 싶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연령에 있든지 간에 우리의 현재 상태를 들추어내신다.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의 현재 인간관계와 중독 행동에서 가장 파괴적인 측면들을 치유하시는 일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좋은 일을 남에게 해주면서도 어느 정도 내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도 형성된다. 그리고 성서에 대한 열성도 경험할 것이다. 헌신생활, 영성생활, 영적 독서, 봉사들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이 기간은 때로 '영적 여정의 봄'이라고 불린다. 나는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실수를 한다면, 여정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첫 단계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단계가 너무나 즐거워서 사람들이 여기에서 떠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디쯤에서인가, 성령은 영적인 봄을 이제 충분히 길게 즐겼다고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는 이것을 '수련자의 열정'이라고 부른다. 성령은 이제 다음 층을 파 내려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실제로, 성령은 우리의 전 인생 역사를 조사하려고 해서, 한층 한층 파 내려가면서 정크들은 던져 버리고 인간의 각 발달단계에서 적절한 값어치 있는 것들은 보존한다. 우리의 연대(年代)를 차례대로 따라가지 않고 성령은 우리 인생의 단계들을 거꾸로 파 내려가는 것 같다. 말하자면, 노년기(우리가 거기에 도달했다면), 위기의 중년기, 청장년기, 사춘 후기, 사춘 전기, 청소년기, 아동 후기, 아동 전기, 유아기, 출생시기, 심지어 출생 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순서는 일반적으로 우리 정신의 정서적 연대기와 상응한다. 가장 깊고 가장 어렸을 때의 상처들이 가장 힘들여 억압되는 경향이 있다. 성령은 마침내 가장 어린 시절의 정서적 삶의 바닥을 파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거부되었다는 감정, 불안전감, 애정의 결핍 혹은 실제적인 신체적 충격들이 처음으로 경험된 곳이다. 그 당시에는 분노, 공포, 슬픔 등과 같은 원시적인 정서만이 가능한 반응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원시적인 감정들이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중심을 향해 나아갈 때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래서 영적 여정은 성공담도 아니고 출세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다. 이것은 오히려 거짓자아가 연속적으로 모멸당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초기에 있는 정서적 아픔을 다루기 위한 방어수단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 쌓아 온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함께 거짓자아가 축소되어 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동적 경험이기 때문에 앞에서 본 평면적인 그림들로는 이 경험이 표현되지 않고, 여기 다른 그림이 도움이 될 것이다(그림 7 참조).

나선형 계단은 수평과 수직을 조합시킨 것이다. 이 계단의 맨 위(실제로는 가운데)는 우리가 앞으로 기도의 삶을 살겠다고 투신했던 처음 회두의 때를 나타낸다. 그때에는 보통 어느 특정한 유혹들, 실패들, 중독들 혹은 강박적 행동들을 다루어야 하는 시기이다. 영적인 여정의 봄 동안에는 영적인 열성이 피어나면서 생기는 새로운 가치관 때문에 이러한 다루기 힘든 상황을 일시적으로 잠잠하게 한다. (거기에 떨어졌던 씨들 때문에) 분뇨더미 위에 피어난 꽃들이 그 분뇨더미를 덮고 있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이때에 우리는 밑에 있는 분뇨더미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꽃을 경험할 것이다. 이 봄의 상태에서 진정한 영적 여정의 작업으로 옮겨 가는 것은 우리가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처음의 열정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치료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우리 삶의 다음 수준으로 초대하시고, 그 수준 또한 그 한계들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지를 보도록 하신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이성적인 기능들과 정서에 주어졌던 처음의 은총들이 사라진다. 고전적인 영적 여정의 경험에서는 이것을 '감각의 어둔 밤'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성과 정서의 수준을 통하여 작업하시던 은총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주시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헌신과 활동에 대한 열정도 사라진다. 하나님 또한 우리가 비탄에 잠기거나 놀라게 하시려고 사라지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기도시간에 현존하시는 대신에 더 이상 나타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별로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 이전에 아주 만족스럽고 흥분하게 만들며, 아주 위안을 주는 경험을 가졌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메마름이 극단적으로 되면, 신성한 독서는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 같고 영적 훈련은 지겨워진다.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용기를 잃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삶의 빛이 꺼져 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데 여러 해가 걸렸는데도 그 하나님은 이제 가 버리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의 유혹이 계속 일어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와 비슷하게 허물어져 갈 때에 갖는 느낌, 말하자면 절망과 같은 감정을 하나님께 투사(投射; project)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에게는 가장 불공평한 판단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항복하면서 "영적 여정은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영적 여정의 다음 단계로 옮겨 가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즉 이 세상은 끝났다는 절망적인 감각을 갖는다. 그렇지만 나의 세상은 이 세상 자체가 아니다. 나의 세상은 다만 이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 상항에서 떠나가 버린다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손상되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로 혼자 남겨 두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버리셨다면 우리의 존재는 흔적만 남고 이미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영적나선형 계단에서 더욱 친밀한 곳으로 '내려가셔서', 거기서 더욱 성숙하고 신뢰하는 수준에서 그분과 함께하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감각의 밤에 아주 조용히 침묵에 잠기면, 아주 섬세한 평화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순수한 믿음이라는 더욱 실속 있는 음식을 즐기기까지 할 수도 있다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다. 우리가 만족스럽게 여겼던 이전의 수준을 떠나보내면, 더 깊은 수준의 믿음으로 옮겨 가는데, 이것은 영적 여정에 아주 신뢰를 더해 주고 힘도 더욱 주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이러한 기초적인 경험을 이집트에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여정으로 비유했다. 성서상의 사막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역사의 여러 단계를 정화하는 것을 상징한다. 정화란 결코 무엇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밀에서 겨를 골라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통해 성령은 우리 발전의 각 단계에서 해로운 것에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고, 밀은 곳간에 모으고 우리의 어릴 적 발전 단계에서 형성되었던 한계들을 뒤로 남겨 두신다. 그래서 유아기의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은 다시 살리고, 아동기의 무지와 난폭한 행동만을 뒤로 남겨 두신다.

사춘기 때에 가졌던 정서적 난폭함과 이 시기의 특징인 절망적인 정체성의 추구 같은 것은 버리게 하시고 사춘기의 모험 정신은 살려 두신다.

우리의 아래 수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다시 연결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졌던 제한된 관념에서부터 자유를 경험하고, 영적 여정은 다시 꽃을 피우고,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아주 새로운 장이 열리는 평원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곳에서도 또다시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성령께서 "자, 이제 다음 수준으로 가 보자."하고 암시를 하시고 우리는 다시 또 하나의 과도기 단계 혹은 어둔밤에 빠진다.

20년이나 30년간 영적 여정을 해온 사람들에게 가장 당혹한 일은 우리가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넘어갈 때에, 이전에 여정을 시작했을 때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유혹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아무래도 진전되지 않아, 나는 그저 그 모양이야."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모든 것이 끝났고 여정을 시작한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평들은 이전에 녹음한 우리의 기억 저장소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들은 허황된 것일 뿐이다.

이전과 똑같은 유혹이 다시 일어날 때에 생기는 절망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될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이전에 가졌던 어려움에 대하여 이미 해결을 완전하게 보았다고 생각했던 어려움이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경우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예전과 같은 유혹이 아니다. 영적인 나선형 층계라는 구조 안에서 우리가 그것을 다시 만나면 수평적으로 볼 때에는 똑같이 옛날 문제를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수직적으로는 우리는 더욱 성숙한 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집착이나 혐오감을 이전보다 더 완전하게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일 처음 여정을 시작할 때에 성령께서 어려운 사람이나 상황에 모두 승복하라고 요구하셨다면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일들이 되어가는 것처럼) 신뢰와 겸손의 성장을 통하여 우리를 점진적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심으로써, 우리는 더욱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내적 자유의 새로운 수준, 더욱 깊어진 가슴의 정화, 성령과 더욱 향상된 일치에 도달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라지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인가? 하나님은 중심으로 향해 가는 이 여정에서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계신다. 우리가 그분을 찾아냈다고 생각하자마자, 그분은 우리 손아귀에서 살며시 빠져나가신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경우는 우리가 오아시스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종려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계속 성장하는 도전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신약성서에서 볼 때에 큰 죄란 성장하기를 거부하면서 현재 있는 곳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다. 영적 삶은 아주 역동적이다.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가 자아포기와 믿음과 사랑의 새로운 수준으로 오라고 부르신다.

거룩한 치료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치료를 계속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우리의 삶 안에 가져오시고 가져가시면서 우리 자신에 관하여 우리가 보아야 할 또 다른 면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관상기도와 일상의 삶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용의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 이 두 가지가 함께 일하면서 서로 치료과정을 강화시켜 준다.

우리가 나선형 층계의 맨 밑바닥에 도달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온전히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 일어난다.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값있게 여기던 것들이 전혀 다른 빛 속에서 나타날 것이며 이전에 가졌던 많은 확신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 단계씩 내려갈 때마다(나선형의 모델 상에서), 우리는 동시에 성령의 영향 아래에(그림 7 참조) 믿음, 소망, 사랑에서 새로운 자유의 수준과 성장의 수준이라는 반대방향으로(말하자면 위로) 움직여 간다. 한 수준씩 내려갈 때마다 한 수준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갇혀 있던 우리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풀어 준다. 거짓자아를 굴복시키면 겸손으로 이르게 하고 겸손은 확고한 신뢰로 이끌어 준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열거되어 있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후에는 행복 선언(마 5:3-10)도 삶 속에 나타난다.

변형적 일치는 우리 삶의 매 단계를 재정비하는 일을 포함하는 것 같다. 이것은 삶의 내용을 다루어서가 아니라 각 단계에 가졌던 가치들을 다시 살림으로써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의 초기에 어떤 것들을 거부한 것은 잘못된 지식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하나님은 삶에서 좋았던 것을, 그리고 우리가 불필요하게 거부한 정당한 즐거움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초대하신다. 삶에서 좋았고 참된 가치를 가졌던 모든 것을 성령의 영향 아래 재정비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발달단계를 다시 거쳐 가도록 이끌리는 것과 같은데, 삶의 각 수준에서 적절한 가치관은 소유하고, 우리가 다룰 수 없었거나 우리의 인간 조건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들을 떠나보내게 한다.

우리는 결국 거짓자아와 모든 정크들을 비워 내는 데까지 도달할 것인가? 키딩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대한 결과와 같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사랑하게 하는 바로 그 능력은 우리가 고통을 받아 내는 능력도 늘어나게 할 것이다.

여정, 아니면 여정의 과정 자체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자신의 질병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이나 상황에 의해 우리의 삶에 끼쳤던 손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 자신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정의 시작일 뿐 아니라 그 여정의 과정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여정을 끝냈는가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정에 들어서면 이미 왕국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약한 점을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질병이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하찮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삶 등이 그 기본을 이루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장 기능을 잘하는 것이다. 왕국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와 결심과 다른 모든 불확정적인 삶의 요인들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나선형 층계를 다룰 수 있게 해주심에 따라 우리의 현실에 대한 태도도 향상되어 간다.

우리 자신이 지금 나선형 층계의 어디에 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어둔 밤에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과정 자체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 더 좋다. 일반적으로는 어둔 밤들이 도움이 되는 지침이기는 하지만, 어둔 밤은 사람에 따라서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속에서 활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외적인 시련이 더 두드러지고, 고독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적 시련이 더 두드러진 것 같다.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같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둔 밤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 밤에 더 오래 머무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은 그 밤에 들락날락 하거나 동시에 그 두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완덕이나 거룩함은, 내가 보기에는 어떤 특수한 목적을 얻는다는 것보다, 나선형 층계의 영적 여정에 얼마큼 투신하고 있는가로 가늠되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을 가는 사이에 약진도 하고 평원에 머물기도 하는데 그 평원 안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우리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지만, 이전보다는 더 평온한 마음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기도 할 것이며, 이 일치의 경험이 우리의 모든 기능들과 관계들과 신체 속에 살아 있게 하는 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고 여정은 계속된다. 우리는 더욱 깊은 겸손으로 오라는 부름을 받으며, 이것은 다시 더 큰 신뢰와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라나게 한다. 어떤 면에서는 바닥과 꼭대기가 서로 만나거나 서로 한데 섞이는 것이다. 겸손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합쳐지고, 그 여정은 점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여정으로 되어 간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