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관상의 기원과 전통적 방법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1절. 관상기도의 기원과 역사        
                      1. 기독교 관상의 전통
                      2. 기독교 전통에서 관상기도의 역사
         제2절. 관상기도의 방법
                      1. 예수기도,
                      2. 거룩한 독서,
                      3. 향심기도(구심기도)



제 4 장 관상의 기원과 전통적 방법

 

제1절. 관상기도의 기원과 역사

먼저 초기부터 현대가지의 관상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 후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기도의 역사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1). 초기 :

관상기도는 AD 300년경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영성사를 보면 성 안토니(AD 250 -330년)가 최초로 사막에 들어가 관상기도를 한 수도사인데, 그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친밀함을 누리며 살았다.

2). 3~4세기 :

3 -4세기는 관상기도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에바 그리우스 폰티커스는 “기도는 개념이 아니라 안식이다.” 라고 했고, 수도원 운동의 개척자인 J. 케이샨은 “간단한 기도문의 반복이 중요하다.”고 했다.

3). 5~6세기 :

5 -6세기는 관상기도의 탐색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성 베네딕트는 순명, 침묵, 겸손을 토대로 “거룩한 규칙”을 만들었으며. 이 규칙은 오늘날에도 수도원의 규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J. 클리마쿠스는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자리는 고요함이다.”고 했다.

4). 12~13세기 :

12 -13세기는 관상기도의 태동기로 평신도 수도사였던 귀고는 관상기도의 정화, 조명, 일치의 삼 단계와 사다리를 구체화시켰으며, 끌레르보 베르나르도는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때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불꽃을 주셨다. 이 불꽃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다.”고 했다.

5). 14~15세기 :

14 -15세기는 관상기도의 개화기로 관상기도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을 통해 관상기도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쥴리안은 “기도는 어머니같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고 했다. 이 시대에 이그네시우스(로욜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방법이 등장하는데, 회개, 묵상, 예수님의 고난 묵상,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4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6). 16세기 :

16세기는 관상기도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의 언어는 침묵이다.”라고 했으며, 아빌라 테레사는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와 같은 것이다.”고 했다.

7). 17~19세기 :

16세기에 절정의 꽃을 피웠던 관상기도는 종교개혁과 함께 잠적해 버리게 되었다. 관상기도가 잠적해 버렸던 17 -19세기는 영성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기였다.

8). 20세기 :

그러나 종교개혁과 함께 사라졌던 관상기도는 20세기에 와서 토머스 머튼에 의해 현대적 관상기도의 기초를 놓았으며, 토머스 키딩(향심기도, 집중기도)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종교개혁과 함께 카톨릭에서도 사라졌던 관상기도가 개신교 안에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1세기의 영성가인 리차드 포스터나 유진 피터슨은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관상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1. 기독교 관상의 전통.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끊이지 않고 내려오는 유산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일차적인 원천인 복음과 성서 신학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이다. 성서의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생이 그리스도교 관상의 윈천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은 인간 가족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인간 가족이 하나님에게 개입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하시어 한 본성을 이루며 절대 신비(Absolute Mystery)와 절대 진실(Absolute Reality)이 되신다. 그분들의 완전한 증여와 받아들임의 내적 관계는 신성한 생명 자체이며 이것을 우리와 나누려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그들의 강론 중에 성서를 자주 관상적 견해에서, 그 당시의 말로는 '영성적 감각 속에', 설명하곤 했다. 어떤 성서 부분은 유의(喩意, Allegerical)적으로 해석할 때보다는 영성적 감각으로 볼 때에 더 많은 뜻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진 성서가 여러 수준의 의미를 드러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를 통하여 사람의 믿음을 강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점차적으로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신다. 정기적으로 기도를 더 깊이 수련하고 믿음이 성장하여 관상이 점점 깊은 단계로 발달해 갈 때에, 성령의 여러 은사들이 온전하게 활성화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어 왔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16세기 동안에는 관상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는 관상이라는 말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와 뜻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이 핵심적인 단어인 관상의 완전한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것이 두 개의 독특한 원천, 즉 성서와 그리스의 철학에서 나왔음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의 다아드(da'ath)를 그리스 성서는 그노시스(gnosis, 靈智)로 번역했는데, 이 da'ath는 인간의 지력뿐 아니라 전 인격으로 아는 지식을 뜻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시 139:1-6).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쓰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말로 gnosis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전한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인 것으로 자신의 제자들이 이것을 갖추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했다.(엡 3:14-21, 골 1:9)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오 같은 분들은 신플라톤주의 학파에서 데오리아(theoria)라는 말을 가져와 사용했다. 이것은 원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시각(視角)'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인간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그리스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뿌리에 몰두한 그리스 교부들이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지식이라는 히브리어의 da'ath의 뜻을 여기에 첨가했다. 이렇게 확대된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던 theoria가 후에 라틴어의 콘템플라시오(contemplatio)라는 말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전통으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 말에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정리했다. 그는 관상(contem -plation)을 '사랑으로 가득히 충만 된 하나님에 대한지식'이라고 설명했다. 성 그레고리오에게 관상은 성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묵상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 안에 쉼'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쉼'의 상태에서는 처음에 찾던 '하나님을 맛봄'과 같은 체험을 마음과 가슴이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이 상태는 모든 상태가 정지된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많은 활동과 사고들이 하나의 활동과 사고로 합쳐져서 이 기도의 시간에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서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자신이 동의한다는 것과 같은 하나의 단순한 활동과 사고로 집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친밀한 체험에 바탕을 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뜻으로 관상을 이해하는 것은 중세까지 계속되었다. 극기 고행(단식, 밤샘기도, 오랜 고독, 자주 하는 침묵, 금욕적인 순종, 단순한 생활 방식 등)과 영적인 수련(논리적 묵상, 정감적 기도, 성화의 흠숭, 시편 낭송, 노래 기도, 묵주 기도 등)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목표의 일부로서 언제나 관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룩한 독서는 관상기도를 계발시키는 데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다. 거룩한 독서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근간을 이루었고, 그것은 성서의 내용을 마치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토론의 주제를 선택해 주시는 것처럼 말씀을 신중하게 듣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깊은 수준의 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자발적인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성장하면서 정상적으로 나타나며, 관상의 은총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상적으로 주시는 응답이다.

거룩한 독서에서 성서 내용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색 부분은 meditatio, 즉 논리적 묵상이라고 한다. 이 사색에 따라 의지가 자발적으로 움직여서 응답하는 것을 oratio, 즉 정감적 기도라고 한다. 사색들과 의지에 따른 어떤 활동들이 단순화되면서 하나님 안에 쉬게 되는데 이것을 contemplatio, 즉 관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 활동 -논리적 묵상, 정감적 기도, 관상- 은 기도시간 중에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서로 얽혀 있다. 경우에 따라서 아주 중요한 면담을 나누는 것처럼 주님께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의 묵상이나 의지의 행동 혹은 침묵으로 여기에 응답할 수도 있거나 관상에 몰입할 수도 있다. 관상기도 수련은 우리의 마음을 공백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사색이나 정감적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려는 것인데 이것은 더욱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깊어지면, 때로 두 친구가 아무런 언어를 나누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심정을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그저 앉아 침묵 속에서도 체험을 나누기도 하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채 서로의 현존을 그저 즐기기도 한다. 그저 손을 잡고 있거나 가끔 한 마디씩 함으로써 아주 깊은 의사소통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관상기도 중에 진전되는 내적 침묵을 나타내고 있다. 관상기도의 목표는 사고나 대화를 없애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 중에 우리는 사색이나 의지의 활동을 반복하기를 멈춘다. 사랑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게 되는 특별한 종류의 지식이 생겨나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고질적인 성찰을 바꾸어 간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체험을 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 우리의 버릇에서 해방된다. 신비가들이 '공허(空虛)다 무(無)다' 하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비우심을 실천하셨다. 즉 자신의 특권과 그에 따른 거룩한 위엄을 버리셨다. 무는 진공과 같은 뜻의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무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의 사색이나 의지의 활동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초월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완전한 자아포기(빌립보인에게 보낸 편지의 Kenosis, 즉 자기를 비움)를 특징으로 하는- 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관상기도는 세례의 은총과 거룩한 독서를 정기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정상적으로 발전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 -그리고 우리의 전 존재를- 사고나 언어나 정서를 넘어서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인식을 하나님께 열어 드릴 수 있게 된다. 그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우리의 호흡보다 더 가까이에, 우리의 사고보다 더 가깝게, 우리의 선택보다 더 가까이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보다도 더 가까이에 계심을 우리의 믿음으로 알고 있는 분이시다. 관상기도는 내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관계이며, 우리가 동의만 한다면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관상을 정신적(katophatic) 관상과 심층적(apophatic) 관상으로 구분하며 이것들은 때로 via positia, 혹은 '긍정적 길'이나 via negatia, 혹은 '부정적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처럼 구별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신적 관상은 오히려 관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함이 옳다. 이것은 거룩한 상징에 대한 정감적인 반응이며 이성과, 상상과 기억과 정서의 사용을 수련해서 믿음의 진실에 자신을 동화시키면서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계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는 시각적 명상이나 성화 등의 경배들이 포함된다.

심층적 관상은 그 관계에서 더욱 진전된 단계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것이며 단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선물을 받은 사람에 따라서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관상'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종류의 기도에 제한하여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층적 관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는 아주 잘못된 오해를 수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심층적 방법에서 말하는 '도무지 알 수 없음'은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인데, 즉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과 같은 인간적인 기능들을 넘어서 단순히 하나님 안에 쉼을 뜻한다.

그러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 다른 종류의 기능들이 동원되는데, 이것은 좀 더 인식의 섬세한 수준의 기능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기능들을 '영적인 감각'이라고 가르친다.

심층적 관상에서 이성적인 지력으로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은 동서간의 대화에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이것은 우리 경험을 서로 이해하게 하는 공통적인 언어를 구성할 수 있게 하며 이것 없이는 더 높은 수준의 의식에 관하여 대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지혜를 찾아 동양으로 갔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인간의 사고와 감정보다 더욱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이해하는 그 무엇이 그리스도교 관상의 전통에 있다는 것을 듣고서 자신의 옛날의 신앙으로 그들이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상적 전통에 대한 혼동과 논쟁을 일으키는 다른 문제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아빌라의 데레사로부터 오는 것인데, 우리가 어떠한 관상의 상태를 받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에 대한 생각만은 결코 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가르침에서 오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전체의 기본이 사고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절한 수련으로서 과연 심층적 관상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고, 이것이 때때로 그렇게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즉 논리적 묵상에서 관상기도로 넘어갈 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사랑이 발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적 여정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오직 생각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관상의 영역을 아주 깊게, 그리고 무아의 경지까지 알고 있던 데레사는, 그 당시의 어떤 과장된 경향, 즉 하나님의 왕국은 고통 받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에 바탕을 두고 세워진다는 그리스도의 비전을 상실한, 즉 왜곡된 개인적 신비주의에 대하여 반응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지 간에 복음으로부터 영감을 얻지 않은 기도의 방법들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정상적인 발전이나 관상기도로 일어나는 좀 더 친밀한 차원, 즉 사고나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 쉰다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의 가슴 안에 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관상기도가 자라면서 이러한 은총의 움직임에 온전히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현존이 충만해지면 사고나 감정이나 어떤 특별한 행동들로 이루는 디딤돌들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적어도 습관적으로는 말이다. 데레사와 같은 시대 사람이면서 교회의 동료학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저서 「사랑의 살아 있는 불길」에서, 사랑으로 찬 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상태로 성령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끌림에 이끌리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잘못된 영적지도자의 위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일단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상, 기도 중에 우리의 주의(注意)는 그 신비 안에 머물고 계신 거룩한 위격의 현존 안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일상생활로 돌아와서는 이 변형된 의식을 지닌 채 성령의 열매와 진복(참된 행복)을 생활 속에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아주 오래면서도 존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의 에바그리오, 요한 카시안, 그리고 성 요한 클리마코 등과 같은 사막의 교부들이 수련했고 가르쳤으며 모든 세대에도 이 전통을 대표하는 분들이 있었다.

교부시대에는 서양에 성 아우구스투스와 성 대 그레고리오, 그리고 동양에 유사 디오니시오와 헤시카스트들이 있었다.

중세기에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티에리의 월리암, 카투시안인 귀도, 그리고 라인랜드의 신비가들인성 힐데가르다, 성 메헤틸트, 마이스터 에카르트, 루이스브뢰크 그리고 뒤에 준주성범을 쓴 타울러 등이 있으며, 영국의 14세기 신비가들로서 「무지의 구름」을 쓴 저자와 월터 힐튼, 리처드 롤, 그리고 노르위치의 줄리앙 등이 있었다.

종교개혁 후에는 가르멜수도회의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리지외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 역자 주)가 있었고, 프랑스 학파의 영적인 저자로서 프란치스코 드 살, 샹탈의 성 제인, 그리고 베룰 추기경들이 있고, 예수회 소속으로 드 코사드, 랄르몽, 수린 신부들이 있으며, 베네딕토 소속으로 아우구스티노 베이커 신부, 요한 차프만 신부, 그리고

현대 시토회 중에는 비탈 르호디 신부와 토마스 머턴 등이 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관상기도를 계발시키는 방법들이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이름들은 그들이 각각 선택한 방법들에 따른 것이다. 그 중에는 순수한 기도(카시안), 믿음의 기도, 가슴의 기도, 단순의 기도, 단순 주목(注目)의 기도 등이 있다.

우리 시대에는 수도회에서 주도했는데 그 중 예수회와 개혁 가르멜회가 주목할 만한 수도회로서 그들은 그들의 창시자의 관상적인 지향을 쇄신하면서 그들의 영성을 평신도들과 나누려고 했다. 베네딕토회의 요한 메인 신부(Dom John Main)는 관상기도를 계발하는 한 가지 방법을 새롭게 했는데 그는 이것이 카시안의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14세기의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것은 이전의 가르침들을 현대화한 형태로 만들고 거기에 어떤 순서와 절도를 가미하여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관상의 발전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내면의성'에서 그것들을 4궁방부터 시작하여 묘사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관상의 발전을 기술하면서 두 가지 길 -즉 데레사가 말하는 환희의 길과 그가 '믿음의 숨겨진 사다리'라고 부른 길- 로 분별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발전에 관상기도가 끼치는 중대한 역할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영적인 여정을 제시하면서, 이성을 통해 얻어지는 믿음이 점차로 자라면 나중에는 관념과 상징의 도움은 사라진다고 했다. 이에 따라 믿음이 점점 순수해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그리고 무조건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할 수 있는 기초를 이 믿음이 든든하게 형성해 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실상, 하나님과의 일치가 자라려면 우리의 인간적인 활동이 점차 줄어들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감각의 밤에 감각적 기능들이 점차로 정화되고 영의 밤에 영적인 기능들이 점차로 정화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리적인 체험들이 때때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관상적 길의 요체는 하나님에 대한 심리적인 체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의 요체는 신뢰하면서 사랑으로 갖는 믿음이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들어 올려 주시면서 복음의 가치와 성령의 역사에 역행하는 우리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장애를 정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고전적이고 엄격한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이다.

 

2.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기도의 역사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15세기 초엽까지는 관상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교회 가르침을 특징지었지만, 16세기부터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부정적인 태도가 서서히 유포되기 시작했다. 종교적 경험에 관하여 오늘날 교회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관상기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봄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초기 기독교시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평신도와 수도자에게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고 불리는 기도의 방법이 권장되었다. 이 Lectio Divina는 글자 그대로 "거룩한 독서"로서 성서를 읽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 경청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수도자들은 거룩한 말씀의 단어들을 입술로 계속 반복함으로써 신체도 이 기도 과정에 함입되도록 하였다. 그들은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더 깊은 내적 주의(注意)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 힘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기도란 그들에게는 성서로 말씀을 듣고 전례로 찬양드리는, 바로 그 하나님께 대한 응답인 것이다.

성서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성찰의 부분은 meditatio(묵상)라고 불렸다. 그리고 자발적인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성찰한 것에 반응하는 것을 oratorio(응답)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찰과 의지의 활동이 단순화되면서 하나님 현존 안에서의 쉼 상태로 옳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contemplatio(관상)를 뜻한다.

묵상과 응답과 관상의 이 세 가지 행위는 한 기도 시간 동안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얽혀 있다. 천사들이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주의는 의식(意識)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할 것으로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때는 입술로 주님을 찬미하고 어떤 때는 생각으로 어떤 때는 의지의 행위로 또 어떤 때는 황홀한 관상으로 찬미할 수 있다. 관상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연적으로 발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논리적 묵상, 응답(기도), 관상 등으로 분명하게 독립된 부분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특징을 갖는 정신기도(Inental payer)라는 말은 16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2). 종교 사상과 기도의 발전.

12~13세기.

12세기경부터 종교적 사조에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신학의 큰 학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개념이라든지, 일반화와 특수화의 구분이라든지, 정의(定議)와 분류 같은 개념들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시도를 탄생케 한 것이다. 분석의 능력이 성장한 것은 인류 정신의 의미 깊은 발전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분석에 대한 열정은 그 이후에 기도에도 전염되어서 관상으로 이끄는 거룩한 독서에 기초를 둔 단순하고도 자발적인 중세의 기도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글레르보의 베르나르도, 후고, 성 빅토러의 리처드, 그리고 성 티에리의 월리엄 등과 같은 12세기의 영성 지도자들은 이에 따라 기도와 관상의 신학적 이해를 발전시키려 노력하였으며, 13세기에 이들의 가르침에 따른 묵상의 방법들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14~15세기

14~15세기에는 그리스도교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흑사병과 100년 전쟁으로 도시와 마을과 수도 공동체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고 그 사이에 유명론(唯名論, = 명목론,名目論)과 대분열(the Great Schism)이 일어나 도덕과 영성의 퇴폐가 대중화되었다. 데보시오 모데르나(Devotie Moderna)라고 불리는 쇄신의 운동이 1380년경 로우 지방에서 일어나고 그 당시 만연하던 개혁의 요구에 따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으로 번져 갔다. 모든 수도 단체와 모든 조직체들이 휘청거리던 이때 Devotio Moderna는 기도로부터 나오는 도덕적 힘을 자기 훈련의 방법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15세기 말경에 소위 정신기도 방법이 자세히 기술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복잡해지고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이 체계화된 기도의 방법이 자리를 확산되는 동안에도, 관상기도는 여전히 영성 수련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16세기

16세기로 들어가면서 정신 기도는 사고(思考)를 주로 하는 논리적(추론적) 묵상, 의지의 행위를 중점으로 하는 정감적기도, 하나님에게의 몰입(주입된 은총)을 위주로 하는 관상으로 나뉘어졌다. 묵상과 정감적 기도와 관상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도 속에서 발견되는 다른 행위가 아니라, 각각 다른 지향과 방법과 목표를 갖는 완전히 다른 기도가 되었다.

기도의 지속적인 발전에 힘입어 기도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단위체로 나누어지면서 사람들에 따라 다른 기도를 하게 되고 관상기도는 몇몇 사람들에게나 주어진 비상한 은총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상기도를 하게 되는 기회는 점점 멀어져 갔다. 당시에 인정된 기도 항목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상으로 이끄는 기도의 조직화는 진전되지 못하고 거부 되었다.

3). 영성생활의 르네상스의 도래

그리스도교 관상의 살아 있는 전통이 사라짐과 동시에 문예 부흥은 영성 생활에 새로운 도전을 가지고 왔다. 사회적 분위기와 종교 단체들은 더 이상 개인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당시에 그리스도교 세계를 침범하는 이교도적 요소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의 세계를 재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기도가 나타나 사도적 활동에 주입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도적 삶을 강조하는 새로운 풍조는 지금까지 수도자나 삭발승들에 의해 전수되어 온 영성 생활의 형태에 변형을 요구하게 되었다. 특히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비범한 재능과 관상적인 경험은 그나마 당시에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는 관상의 전통을 그 당시의 시대에 알맞은 형태로 변형하기에 이르렀다.

1522년에서 1526년 사이에 저술된 이냐시오의『영성수련』(The Spiritrual Exercises)은 현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성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영성수련』에서는 세 가지 기도 방법이 제시되었다. 첫째 주간에는 기억, 지성, 의지의 세 가지 힘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논리적 묵상을 한다. 기억은 논리적 묵상의 주제로서 미리 선택한 어떤 지점을 회상하기 위함이다. 지성은 그 지점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교훈을 숙고하기 위함이다. 의지는 교훈을 실행에 옳기기 위하여 그 지점에 바탕을 둔 결심을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삶의 개혁을 가져온다.

『영신수련』에서는 관상이란 말이 전통적인 의미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는 어떤 상상의 구체적인 사물을 응시하며, 성서 속의 인물이 실제로 현존하는 것처럼 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 반응하듯 하는 행동 등으로 구성되었다. 두 번째 주간을 위하여 제시된 이 방법은 정감적 기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영성수련』에서 세 번째 기도의 방법은 우리의 오감을 응용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이것은 묵상의 대상에 대하여 영 안에서 오감을 연속적으로 응용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수련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전통적 의미의 관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며, 기도에 진보한 사람들에게는 영적 감각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냐시오는 하나의 기도 방법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불행히도 '영성 수련을 묵상의 방법으로 격하시킨 것은 예수회원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1574년 예수회의 총장 신부인 에버라드 머큐리안(Everard Mercurian)은 스페인 지부에 보낸 지침서에서 정감적 기도와 오감의 응용으로 하는 기도를 금지시켰다. 이 금지는 1578년에도 거듭되었다. 그러므로 예수회의 영성 생활의 중요한 부분은 세 가지 힘(기억, 지성, 의지)에 따른 묵상으로 한정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를 거쳐 지적 성격이 우세한 이 묵상은 계속해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영성을 위한 대부분의 안내서는 금세기까지도 논리적(추론적) 묵상의 방법 설명서로 국한되어 왔다.

근세 로마 가톨릭 역사에 이러한 현상의 발전이 끼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예수회가 반종교개혁의 뛰어난 대표자 예수회원들이 교회 내에서 파급시킨 광범위한 영향력에 주목해야한다. 이 시기의 다음 세기에 창설된 많은 수도회들이 예수회의 헌장을 채택하였으며 그들은 동시에 예수회가 가르치고 실행하던 영성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냐시오 자신이 아닌 덜 깨우쳐진 후계자들에 의하여 부가된 제한조치 또한 받아들였다.

이냐시오는 문예 부흥 시대의 새로운 사조인 세속적이고 개인주의적 정신을 교정하기에 적합한 영성 형성과, 그 당시의 사도적 요구들에 적응하는 관상기도의 형태를 제공하기 원하였다. '영성 수련'은 활동하는 관상가들을 형성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예수회가 좋은 일을 위하여 끼친 상당한 영항을 생각해 볼 때, 만일 그 회원들이 이냐시오의 원래의 의도에 따라 '영성 수련'을 하도록 허락되었거나, 아니면 예수회 자체의 랄르망(Lallemant), 시랭(Surin), 그루(Grou), 드 코사드(de Caussade)신부들과 같은 관상 지도자들의 탁월성에 눈을 돌렸더라면, 오늘날 로마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영성의 상태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4. 정적주의 논쟁

관상기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미온적 입장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중 하나는 정적주의(Quietism)와 관련된 논쟁이었다. 이 영성 가르침은 인노센트 12세에 의하여 잘못된 신비주의라고 단죄되었다. 이 단죄된 가르침은 실상 교묘한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치겠다는 의도로 일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한 이상 이러한 주님께 대한 자아 포기의 행위는 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완전히 속한다는 의도를 취소하지 않는 한 신적 일치는 확립되었으므로 이를 위해 기도나 혹은 어떤 외적 노력을 더 이상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번의 의도(얼마나 진지하든 간에)를 표현한다는 것과 그것으로 영구한 의탁이 성립된다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17세기 후반에 위의 가르침보다 온건한 가르침이 반(半)정적주의(Semi Quietism)로 알려지게 된다. 루이 14세의 궁정 사목자인 부쉬에(Bossuet) 주교가 좀 순화된 이 정적주의의 선두 반대자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프랑스에서 이를 단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가 이 가르침을 얼마나 과장해서 이야기했는지는 알 바가 없다. 여하간 그 논쟁은 전통적 신비주의까지도 나쁜 평판을 갖게 만들었다. 그로부터는 신비주의에 관한 독서조차 신학교와 수도 단체에서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다. 앙리 브레몽(Henri Bremond)의 저서『프랑스 종교 사상 문헌사』(The Literary History of Religious Thought in France)에 따르면 그 후 몇 백 년 동안 눈에 뜨일 만한 신비주의 저서는 하나도 없다. 과거의 신비주의 작가는 망각되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문장까지도 정적주의의 색채가 있다고 하여, 편집자들이 오해받거나 단죄되지 않기 위하여, 내용들을 부드럽게 고치거나 삭제하게 만들었다. 그 작품이 쓰여진지 400년이나 지난 금세기에 와서야 그의 저서가 삭제되지 않은 채 나타나게 되었다.

19세기~금세기

17세기에 원동력을 얻었던 이단 얀센주의(Jansenism)도 크리스찬 영성을 뒤로 퇴보시킨 한 요인이 되었다. 그것 또한 종국에는 단죄되기는 했지만, 그것의 반인류적 태도는 널리 퍼져서 그 영향이 19세기와 금세기까지 오래 지속되었다. 얀센주의는 예수의 구원 행위의 보편성과 더불어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로 인해 생긴 비관적 신앙 태도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난민들이 영어권의 아일랜드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널리 퍼졌다. 이 나라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대부분 아일랜드와 프랑스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얀센주의의 편협성과 거기에서 오는 왜곡된 금욕주의가 이 나라 신학교와 수도원의 심리적 환경에 깊이 영향을 끼쳤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그들이 받은 금욕주의 형성 과정에서 스며들었던 부정적 태도의 잔재를 아직까지도 떨쳐 버려야하는 형편이다.

현대 교회에서 또 다른 하나의 불건전한 경향은 사적(私的) 헌신행위, 발현, 사적 계시를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전례의 가치를 절하하고 그와 더불어 좋은 전례가 안겨 주는 공동체적 가치와 초월적 신비의 감각의 가치도 절하하게 만들었다. 관상을 성인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아주 소수인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보편적 생각이 계속되었다. 부양(浮揚), 영적 대화(혹은 환청), 오상(五傷 : 예수님이 받았던 다섯 상처와 같은 상처를 몸에 지니는 것 : 역자 주), 환시 등과 같은 현상들은 우연히 일어날 뿐이지만 이러한 현상들 때문에 관상의 본질이 더욱 혼동되고 애매하게 되었다.

19세기 동안에 많은 성인들이 있었지만 소수만이 관상에 대하여 말하고 썼을 뿐이다. 이때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영성의 쇄신이 일어났지만, 로마 가톨릭의 주류에서는 중세기에 대하여 또 그 당시에 교회가 과거에 행사하여 왔던 정치적 영향에 대하여 향수를 가졌기 때문에 법적인 쇄신만이 있었을 뿐이다.

커스버트(Cuthbert Butler) 아빠스는 『서방 신비주의』(Western Mysticism)라는 책에서 18세기와 19세기 동안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금욕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몇몇 특수한 성직, 수도자들을 제외하고는, 관상 수도자와 수녀들, 주교, 사제, 평신도들의 정상적인 기도는 다음의 네 가지 체계적인 기도들 중의 하나였다. 즉 1) 성 이냐시오의 '영성 수련'에 열거한 세 가지 힘에 따른 묵상, 2) 성 알퐁소(St. Alphonsus)방법('영성 수련'을 약간 수정한 것), 3) 성 프란치스코 드 살레(St. Francis de sales)의 『신심 생활 입문』(An introduction on the Devout Life)이 제시하는 방법, 4) 성 술피스(St. sulpice)의 방법이다.

이것들은 모두 논리적(추론적) 묵상 방법이다. 관상은 특이한 것으로 여겨졌고 특이 현상과 동일시되었다. 달리 말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경배되어야 할 신비한 것, 그러나 위험하고 함정 투성이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사제·수도자들이 추구하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되어 버렸다.

이미 죽어 버린 전통적 가르침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관상기도를 열망하는 것은 교만한 짓이라는 태도였다. 수도 입문생이나 신학생에게는 영성생활에 대하여 너무나 잘못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이러한 견해는 성서와도, 전통과도, 또 기도의 성장의 정상적 체험과도 맞지 않는 견해였다. 만일 누가 논리적 묵상 끝에 성령께서 으레 하시듯 묵상의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성령께서 부르시는데도 불구하고 논리적 묵상에만 계속 매달리려고 고집하면 그 때에는 극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만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하여 여러 번 묵상하면 정신이 움직여서 전체 주제에 대한 하나의 관상적 견해로 인도되고, 그리고는 진리를 단순히 바라보는 하나의 쉼 상태로 정신이 넘어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헌신적 신앙인들도 그들의 기도가 이런 발전 단계로 자발적으로 옮겨 가다가도 그들은 관상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그만 부딪치고 만다. 그들은 관상의 위험에 대하여 받은 경고로 인하여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꺼려한다. 그들은 종래에 가서 정신기도 마저도 분명히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기도를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끈기 있게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

어떻든 간에 관상에 반대하는 종교 개혁 이후의 가르침은 바로 초기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처음 15세기 동안 중단 없이 가르쳐 온 전통에 따르면 관상은 진정한 영성생활이 정상적으로 진전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크리스찬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요인들은 어떻게 근세기에 와서 서방 교회의 전통적 영성이 상실되었으며, 또 왜 바티칸 공의회가 영성 쇄신의 응급한 문제들을 다루어야만 했는가를 설명해 준다.

5. 신비신학의 부흥

최근 들어 관상기도가 새로운 관심을 끄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신학적 연구에 의해 십자가의 성 요한과 다른 영성 지도자들의 완전한 가르침이 재발견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차 대전 이후에 동양에서 밀려온 도전 때문이다. 크리스찬 전통의 관상과 유사한 동양의 묵상 방법들이 급증하면서 좋은 결과를 맺으며 널리 보도되었다.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2차 바티칸공의회)에 따르면 현세의 다른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동양의 영적 훈련은 매우 발전된 심리학적 지혜를 담고 있다. 오늘날 대중이 처한 상황의 요구에 대처하기 위하여서는 크리스찬 지도자와 교사들은 그들(동양)간에 관하여 배울 필요가 있다. 진리를 진지하게 찾는 많은 사람들이 대학과 대학원에서 그 강의를 들으며 동양의 지도자들이 권장하고 가르치는 명상법들을 실제로 수행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비 신학이 1896년 소드루 아빠스(Abbe saudreau)의『영성 생활의 단계』(The Degrees of the Spiritual Life)가 출판되면서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 근거하였다. 그 뒤에 나타난 연구들은 성 요한의 가르침을 선택한 것이 지혜로운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은 그가 감각의 밤이라고 부르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감각의 밤은 자신의 활동과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 사이에 있는 영역으로서 이 영역은 감각적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생각이 불가능해지는 영역이다. 이것은 논리적 묵상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경험들이다. 어느 때가 되면 새로운 생각이나 말이나 느낌이 전혀 없는 시점에 이른다. 만일에 이때에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기도의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어찌해야 되는지 몰라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 것이다. 감각의 밤은 어린이가 사춘기로 넘어가듯 영적 성장에 필요한 과정이다. 어린 시절의 정서성과 감각성은 하나님과 더욱 성숙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옆으로 젖혀 두게 된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감각이나 이성을 도와주지 않게 되므로 어느 기간 동안 이 기능들(감각과 이성)이 쓸모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욱더 이상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런 때에 오직 할 일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의 평화 속에 남아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잠겨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라고 한다.

『사랑의 산 불꽃』(The Living Flame of Love)이라는 책 중에 감각적 헌신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로 넘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 대목에서, 그는 기도 중에 논리적으로 묵상할 수 없거나 만족할 만한 의지의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거든, 이러한 상태를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직접 양식을 주시며, 그의 의지에만 은총을 주시고, 당신에게로 그 영혼을 신비하게 끌어들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평화와 평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의 기도가 거꾸로 가는가 두려워 불안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들이 처음 회두했던 몇 년 동안에 경험했던 모든 좋았던 경험들이 이제 끝장난다고 생각하여, 만일 이때 누가 그들의 요즘 기도 생활이 어떤지 묻는다면 절망적으로 두 손을 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캐물어 볼 때, 기도하는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지 매우 알고 싶어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과 홀로 같이 있고 싶어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길은 영혼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밀히 끌어당기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관상기도가 갖는 주입(注入)의 요소이다. 거룩하신 사랑이 바로 주입된 요소이다. 거기에서 고요한 쉼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랑은 조그만 방전과 같은 사랑에서 살아 있는 사랑의 불길로 커질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이 감각의 밤에 매우 빨리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태를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러한 내적 사막이 바로 관상기도의 시작이다. 이것이 기도자 자신의 행동에서 오는 것인지 하나님의 은총이 주입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보통은 이것을 즉시 알아보지 못한다. 감각의 밤이 자주 일어나면, 이러한 진전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또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시한 징표를 알아보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변환을 지나면 그 사람은 헌신적이고 능률적인 크리스찬이 되어 전적으로 성령의 선물의 인도로 살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매우 빨리"는 얼마나 빠른 것을 말하는 것일까? 몇 년인가 몇 달인가 몇 주인가? 그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관상에 대한 열망을 갖기 전에 몇 년 동안 초인간적 시험을 당해야 한다든가, 수도원의 높은 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든가, 수많은 고행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다시피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얀센주의의 태도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크리스찬 전통을 잘못 제시한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관상기도를 빨리 경험할수록 영적 여정이 지향하는 방향을 빨리 감지할 것이다. 그 여정에 꾸준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모든 희생을 바치고자 하는 동기를 그 직관으로부터 얻게 된다.

 

6. 영적 쇄신에의 도전

오늘날 교회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관상기도를 배우려는 독실한 이들은 많으나, 경험적 확신을 지니고 그것에 대해 설명해 줄 목회자는 적다. 그 다양한 역사적 이유들이 앞서 그려졌거니와, 관상기도로 인도하는 성령의 선물을 온전히 계발할 길이 대개 신학교와 수도생활과 교단과 교회 수준에서는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진실로 필요한 것은 전통적 가르침에 대한 광범위한 쇄신과 실제적 관상 체험이다. 특히 사제와 목회자들이 그래야한다. 신학과 성서 연구가 지속적인 체험에 바탕하여 그리스도교 신비에 대한 깊은 이해로 통합되지 않는다면, 설교와 다른 직무들은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많은 도전 중 가장 큰 도전은 영적 쇄신에의 도전이다. 이것 없이 다른 것들은 충족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의 영적쇄신의 도전을 위하여 몇 가지 의문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의문 1 : 관상기도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 : 무지의 구름이라 이미 번역되어 있으나 실상은 앎을 버린다는, 앎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더욱 알맞을 것이다.) 이 관상기도로 향한 이 운동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려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거기에서는 모든 이가 관상기도로 불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관상기도에 불리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표징이 주어진다. 그렇지만 오늘날 관상기도가 향심기도의 교사들은 물론, 동방의 묵상 교사들에 의해서도 제공되고 있다. 마치도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것 같다.

평신도들이 영성의 길을 따른다는 생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천 년 동안 보편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동양과 서양의 세계 종교들의 영성 전통으로는, 관상을 좇는 사람들을 분리시키어,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고는, 그들을 세속에 살고 있는 가정과 전문직과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대편 평행선에 갖다 놓았다. 그러나 이 구별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인도의 현자들은 자신의 비결을 일반인들과 나누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이러한 현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숲으로 가야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지금은, 찾아오는 거의 누구에게나 진보된 기술을 가르치는 여러 동양 영성 전통의 뛰어난 교사들을 만나기 쉬워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전통들에 관한 부정적 견해들도 물론 있다. 어쨌거나, 지금 동양종교들에서는 세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 비상의 원리를 널리 보급하려는 운동이 일고 있다.

크리스찬 전통에 관하여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의 대표자인 4세기의 오리게네스는 금욕의 적절한 장소는 세속 속의 크리스찬 공동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적인 일치를 구하는 길을 가려는 크리스찬들은 세속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표준이 되어 버린 것은 안토니오 성인의 실례와 아타나시오 성인의 보고 때문이었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의도는 없었지만, 그분의 은둔 생활에 따르려는 대중적 운동이 일어나고 또 이것이 대중화하면서 이 운동이 고정화되었고 심지어 풍자적으로 묘사하게 되었다. 필요로 하는 구별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영성 쇄신의 새로운 파도가 일어야 했다. 이러한 새 물결은 이러한 운동이 공공 단체의 형태를 취하게 됨으로써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수도원 생활의 핵심은 그 구조에 있지 않고 내적 수련에 있으며, 그 내적 수련의 중심은 관상기도이다.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즈음하여 쓴 '개인적 상담 편지'에서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관상기도에의 부르심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실제상으로는, 사람들에게 성서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하여 이 묵상한 말씀에서 고무 받은 열망으로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도록 하게 함으로써 관상기도로 향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중세의 수도원에서 실행한 거룩한 독서의 방식이다. 향심기도에서는 이 독서의 마지막 단계를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근세에 와서 가장 잊혀진 것이 바로 이 단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비 관념적 기도(영성적 기도 : 역자 주) 체험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근세의 지나치게 지적 성향을 강조하는 서구 문명과 반(反) 관상적인 크리스찬의 가르침 때문에, 전혀 그러한 기도를 통해 개인 스스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다고 토마스 키딩은 강조한다. 실상은, 내적 침묵을 경험으로 다소 맛보기만 해도 무엇이 관상기도인가를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근대의 금욕에 관한 가르침은 극단적으로 신중하여 왔다. 또한 관상기도는 봉쇄 수도자들에게 국한된 것으로 간주하는 강한 경향이 있어 왔다.

관상기도에는 아주 중요한 의문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기다리는 대신에 우리 스스로가 관상의 선물을 준비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는가? 동양과 서양모두의 영성 수련에는 관상기도의 바탕을 마련해 주도록 마음을 평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의문 2 거룩한 독서와 관상기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거룩한 독서는 성서 구절을 읽기 시작하여서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는 관상적 방법의 하나다. 성서 내용을 묵상하면 자발적 기도(읽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림, 즉 응답)로,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 현존 안에서의 쉼으로 쉽게 옮겨간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세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 안에서 쉼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논리적 묵상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 수련 능력을 거두실 때 이외에는 그 묵상을 중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관상기도는 그 전통과 어떻게 적합하도록 하겠는가?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하여 신앙의 진리를 어느 정도 묵상하는 것, 즉 논리적 묵상은 관상에 필요한 기초이다. 관상기도를 너무 빨리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데카르트-뉴턴적 세계관에서부터 발전되어 온 정신 자세로 인해 모든 사물을 분석하려고만 하는 고정 관념이 생겨서, 인간의 직관적 능력을 억압하려 하였기 때문에 서방 세계에서의 우리의 관상은 논리적 묵상에 대하여 문제를 안고 있다. 서구 사회는 묵상에서 자발적 기도(응답)로, 그리고 자발적 기도에서 내적 침묵(경이와 감탄)으로 자발적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연결하여 기도하면서도 거룩한 독서의 전통 안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독자가 거룩한 독서를 이미 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특별한 순서나 시간표를 따를 필요는 없다. 당신은 그저 은총의 영감에 따라서 성서 내용을 이리저리 생각하며 단지 어떤 의지의 행위만 하거나 아무 때고 관상기도로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가 처음에는 우세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적 침묵의 순간도 나타난다. 만일 성서를 묵상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기며 그리고는 관상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사람들을 권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한 독서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이제 많은 것이 명료해졌다. 현대 사람들이 거룩한 독서에서 관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결점을 향심기도가 일종의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현대 문제에 대한 성찰이며 동시에 관상기도에 관한 전통적인 크리스찬의 가르침을 재생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단지 재생하기 위한 이론적인 노력 이상의 것이 여기에 요구된다. 현존하는 지적 편견을 넘어가기 위하여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도록 하는 어떤 방법들이 절대 중요하다. 이미 관상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이 편견을 발견하면서, 나는 그 편견이 우리 문화 속에 생각보다 뿌리 깊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동양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면 서양에서는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서양에서는 영적 배고픔이 만족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에 찾아갔던 사람들이 크리스찬 종교 안에도 관상기도의 전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위안을 받는 것을 본다.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준비로 향심기도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 누가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의 전통적 가르침을 다시 획득하는 방법이며 이 가르침을 더욱 알리고 더욱 쉽게 접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것을 방법적으로 알려주려고 노력한다는 것뿐이다. 누구나 그 안에 들어가고 유지하는 길을 따르며 그 안에서 성장하려면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관상기도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지속적이고도 질서 있는 양식(樣式)을 따름으로써 더욱 내적 침묵을 계발해 갈 수 있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바로 이 내적 침묵의 계발이라는 안목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제2절 전통적인 관상기도방법

관상기도를 말할 때 보편적으로 이해 할 것은 대부분의 관상기도는 주부적 관상기도(수동적 관상)이다. 이 주부적 관상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관상을 허락하시기도 하신다. 어떤 경우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짧은 순간 관상의 상태를 허락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운 여행자에게 희망을 주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이다." 관상기도의 방법과 실제에 앞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관상기도를 하기 위해 매일 정규적으로 참되고,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선수가 경기를 위해 규칙적인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듯이 영적생활의 진보를 위해 기도의 장소와 시간은 반드시 필요 하다.

둘째, 관상기도를 하는 동안 일상적인 일들이나, 어떤 환상, 해야 할일, 등 관상기도와 다른 것들이 떠오를 때에는 그것들을 없애려고 애를 쓰거나, 누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관상기도에 집중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셋째, 관상기도의 실천으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관상은 긴장해소 훈련, 은사, 초감각적인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심리현상, 신비체험이 아니다. 관상은 어떤 것을 의식하는 것이나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순수한 믿음으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적이다. 신비주의의 특징은, 첫째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의 하나 됨은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계시, 진리의 심오성을 갖는다. 세 번제, 신비체험은 영속적이지 않고 순간적이다. 오래가는 경우가 30분이다. 네 번째, 수동성을 가진다. 초자연적이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인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그것은 기독교 관상기도의 원천은 예수의 신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 예수기도(The Jesus Prayer)

1) 예수 기도의 기원과 발달

예수 기도에 대한 기도의 방법과 경험들을 서술한 책은 '순례자의 길'이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1855년부터 1861년, 혹은 1851년부터 1863년 사이에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저자를 알 수 없고 어느 수도자가 기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름 없는 한 러시아 순례자에 의해 서술된 예수기도(The Jesus Prayer)는 기독교의 2천년 역사 동안 화살기도의 베스트셀러로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이름 없는 순례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라는 말씀을 듣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순례를 시작하였다. 여행길에서 만난 한 노인 은둔수도(隱遁修道)자가 순례자에게 항상 기도하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방법은 예수의 기도를 하루에 3천번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6천번, 나중에는 1만 2천번하는 것이다. 얼마 후 예수의 기도가 저절로 입에서 나와 끊임없이 기도하게 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 후 순례자는 은수자의 결을 떠나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기도를 가르친다. 그 후 예수기도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외워지는 내심의 기도로 변하면서 여러 가지 은혜롭고 신기한 일을 체험하게 된다. 마침내 순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매일 43마일을 걸으면서 이 기도를 드렸다. 그린데 나는 조금도 걷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인식되는 것이 없다. 심한 추위가 나를 엄습할 때 나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여 내 몸이 따뜻해 졌다. 배가 고파 올 때 나는 주님의 이름을 더 자주 부른다. 그러면 음식에 대한 욕구를 잊어버리게 된다. 나의 등과 다리에 관절염의 통증이 있어도 기도하는 동안 그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나를 해롭게 하여도 나는 '예수기도'를 드릴 때 상함을 느끼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이것은 자연적 은총으로 받은 예수의 기도가 특별한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 기도를 매일 시간이 나는 대로 10분에서 15분 정도 '예수기도'를 계속해서 드린다면 삶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2) 예수 기도의 본질

예수기도는 신약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어, 예수님으로부터 치료와 구원을 얻었다. 사도행전에서 계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일상생활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대화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며 사랑했다. 그 후 예수기도는 동방교회에서 은둔자들의 관상법으로 채택되었고, 중심적인 수련 방법이 되었다. 현대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순간 '주여', '예수님'하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이것 또한 예수 기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기도가 계속적이고 신학적으로 적립된다면 삶 속에서 관상이 이루어 질 것이다.

예수 기도의 기본 형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더 단순하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여, 불상히 여기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또는 "예수"라고만 부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이며, 예수 이름을 뺀다면 예수 기도가 아니다.

예수기도 안에는 기독교의 모든 계시와 신비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에 신론과 삼위일체론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기독론, 속죄론, 부활의 의미가 들어 있다. 또한 '죄인'이란 단어에 원죄론, 인간론이 들어 있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에는 속죄론이 들어 있다.

3) 예수 기도의 방법

< 준비 단계 >

① 기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일들과 생각들을 정지하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자리에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②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③ 눈을 감은 채 시선을 가슴으로 향하고,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바라본다. 심장의 모양과 움직임, 소리 등을 보고, 듣는다. 이것은 대단한 집중력을 요한다. 집중을 하면서 꾸준히 심장의 움직임과 소리에 주위를 집중하게 되면 심장의 움직임과 소리가 보이고, 들리게 된다. 그 때 자연스럽게 예수 기도를 한다.

< 예수기도 >

①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그분이 자신 앞에 계신다고 상상한다.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좋은 곳에 계신다고 상상한다. )

② 잠시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공기를 느낀다.

③ 숨을 들이 쉴 때 기도의 첫 부분인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하고 부른다. 이때 자기 몸속으로 주 예수의 사랑과 은총과 현존, 그분의 모든 사랑스러움(또는 성령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호흡을 들이 쉰다.

④ 잠시 동안 허파 속에 숨을 그대로 간직한다. 이때 들이 쉰 그분의 현존과 은총이 자기 안에 간직되어, 자신의 온 존제에 가득 퍼져나가고 있다고 상상한다.

⑤ 숨을 내 쉬면서 기도문의 두 번째 부분인, "죄인인 저를 불상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을 하며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그분의 은총을 입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내 뱉는다고 상상하며 천천히 숨을 내 쉰다. 이때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은총과 사랑어린 친절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비를 청할 때, 그리스도의 인자하심과 사랑어린 친밀과 그리고 그분의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 효과적인 호흡 방법 >

① 호흡을 들이 쉴 때는 거칠고 짧게 들이 쉰다.
② 호흡을 들이 쉰 후 정지 상태로 있어야 한다. 이때 생각이 척추의 골수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상상을 한다.
③ 호흡을 내 쉴 때는 아주 천천히 내 쉰다. 척수를 통해 내려간 상상을 다시 끌어 올리듯이 천천히 호흡을 내 쉰다.
④ 호흡을 들이 쉴 대를 2, 붙들고 잇을 때를 6, 내 쉴 때 4 정도로 분배한다고 생각하고 호흡을 한다.
⑤ 이렇게 호흡하면서 예수 기도를 10번 정도 한 후 거룩한 독서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4) 예수 기도의 효과

예수 기도를 실천하기를 계속하게 되면 자신이 기도를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성령이 기도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예수기도의 효과가 나타난다.

< 일반적 효과 >

①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욱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세상일에 대한 흥미 보다 더 크게 주님의 일에 흥미를 갖게 된다.
② 마음은 항상 평안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쁨이 법치고 근심, 걱정, 불안이 없어진다.
③ 생활의 희, 노, 애, 락, 질병 등을 심하게 느끼지 않는다. 분함과 괴로움도 사라지고 추위, 더위, 피로, 배고픔, 아픔 등을 잊게 된다.
④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친형제처럼 느끼게 된다. 그들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친절하게 해 주는 것 같이 느낀다. 그리고 남의 모욕이나 비판을 달게 받게 된다.

< 특별한 효과 >

예수의 기도가 마음 속 깊이 들어가 내면의 기도가 될 때 다음과 같은 효과가 생긴다.

① 세상이 매우 아름답게 보이고 꽃, 새, 나무, 하늘, 땅, 공기, 햇빛,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보이게 된다.
② 자연을 친밀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짐승과 식물도 형제처럼 느끼게 된다.
③ 모든 만물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존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느낀다.
④ 피조물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들과 친교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⑤ 몸과 정신이 거뜬하고 경패하여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정신은 감미로움과 신선함과 젊음이 약동하고 기쁨과 위로가 넘칠 정도이다. 심장이 따뜻해지고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⑥ 정신이 밝아져 여러 일들을 낱낱이 꿰뚫어보는 능력이 생긴다. 지혜가 비추어저서 순수한 사고력을 갖게 되고 세상의 목적과 성경의 내용을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⑦ 하나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1)는 말씀을 몸소 체득한다.
⑧마음이 차츰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 느껴 하늘의 복을 동경하게 된다.
⑨ 여러 형태의 황홀 상태와 탈혼 상태를 맛보게 된다. 예수 기도의 효과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체험 후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고백하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그분과 동행 할 수 있는 것이다. 짧고 간결한 예수기도를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삶 속에서 이를 수 있다.

 

2.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1). 거룩한 독서의 역사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유대교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겸손한 아음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에 맛들이라고 한다. 랍비들과 그 제자들은 정신과 마음에 거룩한 말씀을 넣으려고 벌이 꿀을 빨아 먹을 때처럼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성경이 정경화 되기 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말씀을 외우고, 실천하여 그것을 온전하게 이해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마치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토론의 주제를 선택해 주시는 것처럼 말씀을 신중하게 듣는 태도를 갖고 있있다.

거룩한 독서의 원형은 구약성경(출 24장, 신 6:4-9, 수 24장, 왕하 23장, 느 8장)과 신약성경(눅 4장, 16;16-21, 24:13-35)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3세기의 오리게네스(185-250)는 처음으로 테이아 아나그노시스 즉, Lectio Divina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거룩한 독서는 3세기 말과 4세기 초에 일어난 수도승 운동에서 계속 실천되었으며, 어느새 수도자들의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5세기 성인에게 있어서 수도규칙과 수도생활은 성경말씀을 말씀 그대로 철저히 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6세기에는 거룩한 독서의 폭이 넓어져 수도 성인들의 생애와 여러 성경 주석가들의 작품들까지 포함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까지 보편적으로 실천되었고, 카르특시오 수도회의 아빠스였던 귀고 2세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실행해 오던 거룩한 독서를 네 단계 곧 독서(lectio), 명상(meditatie),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로 체계화하였다.

13~14c부터 거룩한 독서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논리를 앞세운 신학이 거룩한 독서를 대치하게 되었고, 14~15c에는 내적이고 심리적인 기도와 묵상방법이 거룩한 독서를 대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C 중교개혁(1517)의 영향과,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성경을 자국어로 읽는 것을 금하게 되면서, 점점 더 일반 신심서적을 읽는 '영적 독서'가 거룩한 독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응답하게 되며, 말씀은 각자를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로 이끌어 간다. 그런데 이러한 통로인 거룩한 독서가 끊어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 갔으며, 신자들 역시 말씀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내적 신앙의 확신을 잃게 되었다.

2). 거룩한 독서의 본질

렉시오 디비나는 글자 그대로 "거룩한 독서"로 성경을 읽는 방식이다. 거룩한 독서는 수도원의 환경에서 발전된 관상기도의 방범으로 기본적으로 성경을 경청하는 것이다.

거룩한 독서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키우는 가장 전통적 및 기도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화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대화의 주제를 알려 주시듯 성서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사색하면, 그저 안다고 하는 관계를 넘어 우정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발전시켜 준다. 대화는 단순해지고, "하나님 안에서의 쉼"이라는 합일(communion)의 상태로 이른다. 16세기까지 관상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거룩한 독서의 순서는, 귀고 2세가 체계화 한 네 단계로 나눈다. 독서(loctio)로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성경을 주의 깊게 살피고 말씀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사색(meditatio)은 논리적 묵상의 단계로 본문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감추어진 신앙의 진리를 찾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찾는 것이다. 정감적 기도(oratio)는 의지가 사색에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여 응답하는 것, 즉 묵상을 통하여 알아들은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거나 갈망을 청하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사색들과 의지에 따른 어떤 활동들이 단순화되거나 중단되면서 하나님께 끌려 올라가 영원한 즐거움과 감미로움을 맛보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쉬는 상태로 관상(contemplaio)이라고 한다. 이 네 단계를 과일을 먹는 방법에 비유하면 loctio는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 입에 넣는 단계이다. moditatio는 과일을 입으로 베어 문후 씹어서 가루로 만드는 것, 소화 시키는 단계이다. 그리고 oratio는 입안에 있는 과일을 삼켜서 맛을 보는 단계이며, contemplatio는 과일을 삼킨 후 그 향을 느끼는 단계

로 비유한다. 관상기도는 정감적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과 합일(Communtion)을 이루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다.

3) 거룩한 독서의 방법

< 기도 순서 >

① 독서(Lectio)주어진 성경의 본문이 영혼 속으로 스며들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귀와 마음으로 듣는다.
② 사색(Meditatio)주어진 본문을 읽다가 마음에 부딪혀 오거나 생각이나 통찰이 떠오르면 조용히 그것과 함께 머물러 깊이 음미한다.
③ 정감적 기도(oratio)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명상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 음성에 대하여 자발적인 응답을 하도록 요구 받는다. 이때 정직하게 반응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기도가 시작된다.
④ 관상(contemplatio) 주님과의 깊은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으로 들어가는 상태를 말한다. 위의 단계보다 수동적인 체험이다. 이 단계의 체험은 기쁨, 평안, 확신, 만족, 충만, 불안, 분노, 혼란, 당황, 항거 등의 감성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⑤ 반추(反芻)하기

-기도의 시기를 기록한다.
-당신에게 특별히 부딪혀 온 단어나 말씀들이 무엇인지 기록한다.
-무슨 느낌인지 기록한다. 그 느낌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기록한다.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계가 없었는지 기록한다.
-다음 기도에서 다시 돌아가 반복하고 싶은 부분이 확인되면 그것이 무엇인지 기록한다.

< 거룩한 독서의 지침 >

① 기도하고자 하는 본문을 선정한다(초보자에게는 사복음서가 좋다).
②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몇 분 동안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평정을 되찾고 마음 중심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하는 "예수기도" 해도 좋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적인 자세로 조용히 준비한다.

③ 내면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천천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선택한 말씀을 읽는다.
-어떤 특정한 단어나 구가 떠오르면 그것을 평화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반복하면서 말씀을 감각과 지성과 감성을 통하여 내면 깊은 곳으로 끌어들인다. 마음에 부딪힘이 오는 것을 중심으로 주님과 대화를 시작한다. 잡념이나 염려 등 분심이 떠오를 때는 처음 시작한 말씀으로 거듭거듭 돌아가서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한다.

④ 끝날 때는 기도 동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도 밖으로 나온다.
⑤ 기도가 끝난 후에는 기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반추한다.

-반추에서 특히 관심을 기울일 부분은 나의 심령상태가 어떻게 움직여가고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반추한 내용을 기록한다. 거룩한 독서는 예수 기도나 향심기도와 같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방법이 다르다. 다른 두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거룩한 독서는 말씀을 통해 말씀 속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짐으로 말씀이 우리 안에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실천적인 삶을 살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3. 향심기도(向心祈禱, Centering Prayer)

1) 향심기도(집중기도, 구심기도, 마음의 기도)의 기원과 발달

향심기도는 오늘날 누군가가 새로 만들어 낸 기도가 아니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의 전통적 가르침을 다시 찾은 것으로,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널리 알리고 더욱 쉽게 접하토록 방법적 측면에서 만든 것이다.

향심기도는 미국의 영성신학자들이 많은 수도자나 평신도들이 동양적명상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신비적 기도에 대해 목말라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독교 전통에 있는 관상기도를 대중화 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1970년 초 미국의 코네티컷의 스펜서에 있는 토마스 키딩 신부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동양적 명상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기독교적 전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궁리하였다. 이것을 월리엄 메닝거 신부가 받아 들여 '무지의 구름'의 방법을 도입하여 시험적으로 시도한 것이 큰 호응을 얻었고 실천되기 시작했다. 그 후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읽었던 이들이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토마스 머튼의 표현을 따라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로 부르자고 제안하여 1976년부터 '무지의 구름'의 방범의 기도를 '향심기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비전 선언문을 중심으로, 가톨릭 수도자, 성직자, 평신도들과 토마스 키딩 신부가 뉴저지에 관상지원단(Contemplative Outreach)을 설립하여 관상기도에 대한 지원을 하면서 기독교 전통의 관상기도가 연구되고 실천되기 시작 했다.

2). 향심기도의 본질

향심기도는 무지의 구름을 현대인에게 적용하기 위해 시작된 관상기도이다.

< 무지의 구름 >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신학과 영성에 깊은 지식을 가졌다. 무지의 구름은 중세 신비주의 대표작(1360년경 작품으로 본다)으로 영국 교회의 고전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며, 15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널리 애독한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고, 13, 14세기의 탁월한 신비주의가들의 작품들과 겨룰만한 책이다.

무명의 저자는 24세의 젊은 제자에게 쓴 책으로, 제자의 내적 생활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보통 단계(평범한 삶)로 제자가 세속에서 살았던 상태, 둘째는 특수 단계(특수한 삶)로 일반수도 생활의 상태, 셋에 독특 단계(고독한 삶)로 관상생활, 마지막으로 완전 단계(완전한 삶)는 하나님의 사랑에 완성되는 상태이다.

 

< 수동적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관대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의한 자,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실천과 관상생활의 준비에 오랫동안 노력한자, 활동생활에 종사하면서도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부르심 받은 자, 진정한 관상자로서 계속적이 아니라 해도 가끔 관상의 최고 단계에 참여하는 자.

반대로 그 책을 결코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육적인자, 자기 자신을 공공연히 찬양하는 자, 남을 공공연히 비방하는 자, 소문을 퍼뜨리는 자, 남의 흠을 들추어내는 자, 호기심으로 시비가리기를 좋아 하는 자, 활동생활을 하는 선량한 자(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이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능동적 관상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 관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

< 내용 >

인간은 무한히 초월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고 다만 의지의 활용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성 자체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하는 의지의 지향은 순수한 의지의 행위를 뜻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순수한 본성 그 자체로 향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훌륭한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고찰하는가? 하나님의 본성 자체란 무엇인가?' 그 답은 '나도 모른다. 다만 당신의 이 질문과 나의 이 대답은 당신과 나를 함께 무지의 구름 속에 끌어들였다.'고 자문자답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늘 구름, 즉 무지의 구름이 끼어 있어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지의 구름을 꿰뚫을 수 있는 합법은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운동으로 가능하다. 즉, '사량의 날카로운 화살'로 구름을 쏘는 것이다.

이때 지성에서 수많은 질문들, 그것이 거룩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운동으로써 하나님만을 지충하며 그 모든 것을 발밑에 힘차게 밟아버려야 한다. 처음부터 지성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 무지의 구름에 소개된 관상기도 방법 >

사랑의 날카로운 화살로 구름을 쏘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짧은 단어를 되풀이하여 외우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또는 '사랑' 등의 단어나, 각자에게 뜻이 있는 다른 짧은 단어를 마음에 새겨 계속 외우는 것이다. 가능한 한 음절로 된 단어가 좋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단어를 외우는 행위를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 짧은 기도의 효과 >

첫째는 무지의 구름을 쏘는 사랑의 운동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지향하고 동경한다. 둘째는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 밑으로 내던져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관상자는 영의 넓이(하나님의 사랑)와 높이(하나님의 힘)와 깊이(영지-英智에서 전지-全知에 통하여 일치한다. )와 길이(하나님의 무한한 계속성)에 있어서 전심전력을 다할 수 있다고 비유한다. 즉 하나님의 영원에 통하여 그 영원과 일치한다. 짧은 단어는 마치 날카로운 화살과 같이 하나님의 귀를 꿰뚫어 그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인다. 어떤 기도보다도 힘이 있다. 무지의 구름에서의 짧은 단어의 기도는 쉬지 않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며 어린아이처럼 기도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기도"이다.

< 유의 사항 >

① 온갖 힘과 주의를 집중시켜 '하나님' 또는 '사랑'이란 단어를 반복하되 하나님의 본성자체에만 마음을 돌려 그분만을 추구해야 한다.

② 얼마 동안 짧은 단어를 외운 후 순수관상 상태에 머물게 되었으면 더 이상 단어를 외울 필요는 없다. 단어의 반복은 하나님 안에 머물기 위한수단일 뿐이다. 목적에 도달하면 직접 관상하는 것이 좋다.

③사랑의 맹목적인 운동을 하는 동안 지성의 활동을 물리치기 위해 끈기 있고 단호한 자세가 필요한 동시에 간단없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

④ 관상의 초기에는 얼마 동안 고생해야 하고 교통도 감수해야 한다.

⑤ 모든 잡념과 죄에 대한 충동을 모른 체 무시하고, 오직 위에 있는 하나님께 집중한다.

⑥ 잡념과 죄에 대한 충동이 강할 매 자신을 하나님 앞에 패배한 겁쟁이로 생각한다. 또한 자신을 무(無)보다 가치 없고 비참하고 악한 자로서 인식한다. 이것이 겸손의 행위이다.

⑦ 관상은 하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므로 하나님의 활동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관상을 하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장난치는 듯한 심정을 갖는 것도 좋다.

⑧ 하나님을 동경하고 갈망하는 열성을 하나님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늘 듯이 내면화하여 감추어야 한다. 순수관상 상태에서 인간은 모든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상황과 감각적이고 육신적인 상태애서 벗어나 순수한 영적 감각과 영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 영적 감각과 영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불타는 사랑의 영적결합을 및게 된다.

3) 현대적 향심기도의 방법

토마스 키딩의 비유를 통해 향심기도의 실제를 들어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일상적 사고(思考)가 우리 의식의 후면으로 물러나게 하여 우리가 그 사고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의 의식이라는 강 위를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고, 우리 의식의 강 자체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데 있다. 우리 자신을 강가에 앉아서 배가 떠가는 강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우리가 읹아서 배 보다는 강을 바라보다 보면, 의식 위에 흐르는 사고(배와 같은)에는 더 이상 주의(注意)를 주지 않는 습관이 발전되면서 좀 더 깊은 주의 집중이 생겨날 것이다…. 내적 의식의 스크린에 비춰지는 어떠한 지각(知覺)도 사고라고 본다‥. 정서, 영상, 기억, 계획, 외부에서 오는 소음, 평화스런 감정, 심지어 영적 교감일 수도 었다. 즉, 내적 스크린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도 "사고"라고 간주 한다. 이 향심기도의 방법은 기도 중애 일어나는 어떠한 사고, 심지어 아주 신앙심 깊은 사고라 할지라도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향심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다 떠내려 보내고 오직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만을 모시는 것이다.

< 향심기도 지침 >

①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상징하는 거룩한 단어(무지에 구름에서 말하는 짧은 기도)를 선택한다.

② 편안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정리한 다음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마음에 떠 올린다.

③ 어떤 사고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인식하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④ 기도시간이 끝나면 눈을 감고 약 2분간 침묵 속에 머문다.

< 실천 방법에 주의 사항 >

① 향심기도는 최소 시간 20분으로, 아침과 오후나 이른 저녁에 한번, 하루 두 번 규척적으로 꾸준히 해야 한다.

② 조용한 장소, 방해 받지 않는 아침 시간에 몸에 대한 사고(思考)가 일어나지 않도록 편안한 자세를 갖는다. 이 때 자명종 소리가 너무 요란하거나 길게 울리지 않는 것이 좋다.

③ 거룩한 단어는 한두 음절이나 한 단어로 선택한다. 거룩한 단어는 단지 상징일 뿐이다. 또한, 기도자가 가고 싶은 어떤 곳으로 가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기도자의 지향을 하나님께 향하게 함으로 영적성향이 이끌리는 그 무엇에 대해 더욱 깊은 의식을 갖도록 개발하는데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줄 뿐이다.

④ 향심기도는 스위치를 켜듯 하나님의 현존을 켜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 기도자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며 결과의 결정도 하나님이 하신다.

⑤ 향심기도의 주된 효과는 기도 중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된다.

⑥ 신체적 증상으로 기도 중 신체 여러 부위에 약간의 통증. 가려움, 뒤틀림을 느끼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체 속에 있는 정서적 매듭이 풀어지는데서 온다. 또한 사지 끝이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짐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영적 주의(注意)가 깊은 수준으로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그것에 주의를 두지 말 것이며, 아니면 그 감각에 잠시 머문 다음에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무지의 구름을 바탕으로 한 향심기도는 현대인들을 위한 것이다. 향심기도는 짧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여 외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어떤 구체적인 방법보다는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고 정한시간에 집중적으로 짧은 기도, 향심기도를 해 간다면 예수기도와 같이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상으로 관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관상기도의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예수기도 후에 거룩한 독서를 하든가 또는 향심기도 후에 거룩한 독서를 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