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관상에 이르는 길 (관상의 단계)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5 장  관상에 이르는 길(관상의 단계)
         제1절 두 종류의 관상의 길 (무념적 방법, 유념적 방법)
         제2절 관상기도의 단계 (정화, 조명, 일치)        
            1). 그리스도인의 세단계의 삶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2). 데레사의 관상의 단계 (주입된 평정, 평정의 기도, 일치의 기도)
         제3절. 관상기도의 열매
            1). 관상기도는 “인격적 변화를 가져온다.”
            2). 관상기도는 “자신에게 더욱 더 진실하게 된다.”
            3). 관상기도가 “기도 생활에 주는 영향”
            4). 관상기도는 “하나님화(化) 한다.”
         제4절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향심기도)의 열매          
            1).  외적인 열매-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2).  내적인 열매-내면에서 경험 되는 것


제 5 장 관상에 이르는 길

 

제 1 절 두 종류의 관상의 길

영성사에서 말하는 관상의 길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의 관상은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혹은 수동적 관상으로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다. 특징은 일체의 영성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의 경험을 주장하는 전통이다. 관상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 영성의 흐름은 안토니오,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성 요한, 토머스 머턴에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 번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은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혹은 능동적 관상으로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이다. 특징은 모든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전통으로 이야시오식 관상이 여기에 해당된다.

1). 무념적 방법 (Apophatic way)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체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는 전통이다. 관상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운 밤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이미지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만큼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에게만 속한 무한한 속성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우리에게 있다. 이 비유사성을 제거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피조물이나 인간의 개념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나 속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것이다.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달려갈 때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깊은 심연은 결코 감각으로도 지적인 인식작용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전한 영의 세계요, 절대적인 세계이다. 이 순수한 속에서 개념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

2)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으로 능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상력이나 갖가지의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유념적 방법의 이론의 기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일지라도 그것을 깊이 관상한다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한다는 데 있다.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 가장 하찮은 속성으로부터 한 단계 한 단계씩 관상해 간다면 피조물이 지닌 가장 고상한 속성에로가지 이르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이 지닌 거룩하고 가장 고상한 속성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단계적으로 관상해 가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영적 여정의 패턴이다.

유념의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 상상력을 사용하여 관상경험에 이르는 기도를 '이냐시오식 영신수련'을 들 수 있다. 로욜라 이냐시오는 회심과정이나 그 이후의 영성수련과정을 볼 때 그의 영성적 경험에 있어서 그의 풍부한 상상력이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냐시오식 관상기도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1)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공적사상에 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2) 상상력은 정화되지 못한 우리의 비이성적인 내면세계에 대한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상상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 반대하거나 경계만 할 일은 아니다. 상상력의 극치 그 자체가 관상체험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관상으로 들어가는 좋은 길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하나씩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1. 기도 (Prayer)

“기도는 주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현존해 계시며, 우리 안에 생명을 부어 주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지탱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심장의 모든 박동. 호흡, 육체적·성적·심리적 에너지. 모든 생각과 희망과 소원, 모든 결정 안에 계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과 주위에 계심을 의식할 때에, 우리는 기도 안에 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 안에서 움직이고 사랑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에, 우리는 기도 안에 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길과 가까이 계심을 의식하게 하실 때에. 우리는 기도 안에 있는 것이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지지하거나 풍성하게 하라는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힘을 주신다.”

이 글은 알만드 니그로(Armand Nigro) 신부가 기도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 무척 흥미롭다.

여기에서 초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만남을 주도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기도를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역할은 그에 반응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우리의모든 활동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와 교제하시도록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만물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나님 임재의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만물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새로운 눈과 귀로 세상을 본다.

당신은 기도의 습관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보다 훌륭하고 진지한 시각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개선의 여지가 있다. 당신은 "기도가 당신으로 하여금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깊이 의식하게 만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실제로 신적인 것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지만, 전과는 다르게 보고 듣는 경험에 이를 수는 있다. 우리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대신에 세상을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제 나는 거룩한 일, 즉 기도를 하련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생존에 필요한 일을 해야겠다. 서둘러서 그 일을 마치고 나서, 다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분리하는 좋지 않은 방법이다.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활기차게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실체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스며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잠재적인 기도의 운동장이다.

 

2. 기도하는 긍정적 방법과 부정적 방법

기독교 전통에서 기도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기도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긍정적인(kataphatic)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부정적인(apophatic) 방법이다. 이 단어들은 생각처럼 무시무시한 단어는 아니다.

첫째 방법, 긍정적인 방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어, 개념, 이미지, 결단 등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기도하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며, 자신의 양심을 성찰하며, 더 선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세상에 나가서 기도한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kataphaic"이라는 단어는 "아래로"(down)라는 의미를 가진 Kata와 "연설"(speech)라는 의미를 지닌 phasis라는 두 개의 헬라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적인 전통에서는 우리의 지식과 단어와 이미지와 감각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상대방을 말로 꼼짝 못하게 함" (talking down)으로써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신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긍정적인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긍정하는 방법이다. 이 전통에서는 기도를 하나의 관계로 간주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속한 것을 연구하여, 그 원리들과 통찰들을 우리의 기도 관계에 적용한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에, 우리는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을 확인한다. 그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보고 아는 모든 것을 능가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전통은 개념과 이미지와 상징 등을 인정한다. 이 전통을 증거하는 표준적인 인물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St. Ignatius of Loyola)이며, 우리 시대의 주도적 인 옹호자는 테이야르 드 샤르뎅(Thilhardde Chardin)이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며, 하나님은 피조 세계 안에 현존하신다.

다른 방법은 부정적인 전통이다. 긍정적인 전통과 균형을 이루는 또 다른 방법이다. 헬라어 apophαni는 어떤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 전통은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을 지닌다. 이 전통에서는 우리가 육안으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말로는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고 의식한다. 이것은 무한한 것에게 굴복하는 방법, 자신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그것을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이것은 역설, 언어의 절제, 궁극적으로는 침묵의 방법이다. 이것은 복종,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수용의 방법이다.

부정의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하는 부정의 방법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상징이나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망각에 의해서, 무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이런 방법에 의한 하나님 이해에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내가 어떤 예를 사용해도, 나의 말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묘사할 수 없고, 나의 지성과 유한한 기능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쉬는 것,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뿐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지에 대해서 더 잘 안다. 우리의 정신은 개념이나 이미지나 상징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두워진다. 이 전통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의 저자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역시 이 전통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물론 긍정적 전통이나 부정적 전통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두 전통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하면서도 인간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긍정하기 위해서 성경에 계시된 단어나 성례전이나 상징을 의지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두 전통은 기도에 대해 총제적으로 묘사한다.

긍정의 방법은 우리가 기도 생활을 제한하는 이미지들을 방출할 수 있게 해준다. 부정의 전통은 우리가 이미지들을 포기해야한다는 것, 그것을 초월하는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준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방법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의지하며,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가 필요하며,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에 의존한다. 긍정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이다. 부정의 방법과 관련하여, 나는 영적 고전인 『무지의 구름』과 "집중기도"(Centering Prayer)에 초점을 두려 한다.

 

3.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

관상이라는 단어의 표준적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쉼"이다. 관상에는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과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이 있다.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던 과거의 용어였으나 이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관상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두 용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집중기도라는 관습을 묘사하는 데에도 이 용어들은 도움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습득적 관상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기 위해 성령의 감화 아래서 기울이는 노력을 말한다. 이 노력은 매우 집중적인(concen- trative) 것일 수도 있고, 매우 수용적인(receptive) 것일 수도 있다. 집중적인 노력의 본보기는 추론적인 묵상, 묵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14개의 장소, 성상 숭배, 심상을 사용하는 시각적 묵상, 감성기도(affective prayer) 등이다. 집중적인 노력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는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의 기능들(상상력, 지성, 의지)을 사용한다. 수용적인 노력의 예로는 예수기도(Jesus Prayer), 간단하게 갈망을 반복하는 것, 기독교적 묵상 기도, 집중기도 등을 들 수 있다.

약간 혼란스러운 듯하지만, 한 가지 비교를 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집중적 습득적 관상을 할 때에는 주의를 집중하지만, 수용적 습득적 관상을 할 때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집중적 습득적 관상을 할 때에는 적극적이지만, 수용적 습득적 관상을 할 때에는 주로 수용적이며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다. 집중적 습득적 관상을 하면서 어떤 통찰을 얻으면, 우리는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며, 상상력을 사용하며, 의식하며,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며, 통제한다. 수용적 습득적 관상에서는, 우리는 크게 수용적이 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무엇을 느끼려 하지 않으며, 복종하고 동의한다. 혹시 어떤 통찰을 얻어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의 쉼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다.

이러한 종류의 관상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단순한 형태의 기도를 편안히 행할 수 있게 되면서,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에서 행하는 말을 사용하는 기도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추론적 묵상(discursive meditation)을 버리는 과정이다(추론적 묵상은 자기 성찰에서부터 시작되어 하나의 영적 주제를 전개하고 도덕적 행위를 증진시킬 결단으로 끝맺는 구조를 취한다), 추론적 묵상을 버린다는 것은 추론적 묵상이 나쁘다거나 부적절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추론적인 기도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기도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말을 많이 하는 기도나 많은 성경 구절로는 만족하지 못하며, 그것들을 단순화하는 일이 시작된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주부적 관상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때,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기 위해 행하는 노력을 본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까지만 갈수 있다.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맡으셔서 우리를 보다 깊은 쉼으로 인도하신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집중을 하는지, 그리고 성령께서 얼마나 그 기도를 지배하시는지에 입각하여 보면, 기도에도 단계가 있다.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한다 :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말. 생각. 감정, 특별한 행동들의 증가를 초월하게 되는 것 : 하나님을 기다리는 단순화된 행동(수용적 습득적 관상)에서부터 우리의 기도의 원천이신 성령의 은사가 지속적으로 주도하게 되는 단계로 이동하는 과정(주부적 관상).

습득적 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쉽다. 그것을 행하여 이러한 효과를 거두었고, 앞으로 그것을 행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된다. 주부적 관상과 관련하여,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어느 수준의 친밀함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알지 못한다. 시나 이미지나 알레고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느 수준의 의사소통이 발생한다. 아마 밤늦게 음악에 취해서 춤을 추는 것처럼, 우리는 편안하게 경험의 영 안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흠 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기도의 춤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이 사랑의 연합에서부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의 지식이 흘러나온다. 이 사랑의 지식의 주부적 특성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임을 가리켜 준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자신이 이러한 하나 됨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선물이다.

테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것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것 안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 다함이 없는 것 속에 뛰어드는 것, 썩지 않는 것 안에서 평안을 발견하는 것, 끝없는 깊음을 가진 분에게 자신의 가장 심오한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제2절 관상의 단계

감각의 밤에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 감각, 기억, 상상, 이성과 같은 우리의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내면에서 영양을 채워 주신다. 관상기도에서 이러한 기능들이 잠재워짐으로써 우리의 직관적 기능, 수동적 지력, 하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정점(靜点: still point)에 이르는데, 이 정점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식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그 뿌리를 두는 곳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인간 조건의 두드러진 착각이다. 영적 여정은 이것을 치유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기도가 메마른 것을 하나님께서 부재하셨기 때문으로 생각 한다. 침묵은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이다. 그 외의 것은 어설픈 번역인 것이다. 그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감각의 밤에 이르렀다는 하나의 표시는 고독과 침묵을 더 좋아하게 되고 우리가 그 안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면서도 하나님 하고만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한 욕구를 갖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관상적 선물, 특히 지식의 선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지식의 선물은 다른 모든 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면서 감각의 밤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내적 고요에로 이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이 아니고 직관적 기능에 넣어 주시는 순수한 믿음이라는 음식의 결과에서 온다. 처음에 우리는 건조함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반응이 일어나 정신 이완을 위해 혹은 정신을 몰두할 일을 하기 일해 모든 기도 과정을 포기하려 들게 된다. 그러나 순수한 믿음의 훈련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겸손이라고 하는 두 가지 열매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겸손은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좋아 보이는 행실에도 이기적인 동기가 끼여 있으므로 아무도 그 동기를 들추어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이기적인 동기를 가졌으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고통을 느끼며 인식한다.

 

1. 그리스도인의 세 단계의 삶 (관상기도의 단계)

아주 오래된 기독교 전승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을 탐구하며 성숙해 가는데 세 단계 또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정화의 길, 조명의 길, 합일의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 단계는 두 번째 단계에 포함되고 첫째, 둘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에 포함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실상 삶의 대부분을 이 세길 사이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위에 말한 길 중에 둘이나 심지어는 세 가지 길을 동시에 밟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에 있는 단계는 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정화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끌리면서도 세속의 유혹과 죄의 습성, 윤리적 약점 또는 단순한 무지로 말미암아 사랑을 찾는 길에서 어떤 때는 뜨거워지고 어떤 때는 차가워집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엇 무엇을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로 드러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작입니다. 걸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기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요. 이 길을 정화의 단계(사랑하기)라 합니다.

성경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마5:8)고 했다. 우리가 자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존재의 정화를 의미한다. 회심 자체가 매우 급작스럽게 혹은 매우 감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화의 작업은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기를 힘써야 한다. 정화의 단계는 외적 감각의 정화, 내적 감각의 정화, 정욕의 정화, 지성의 정화, 의지의 정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유혹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영성생활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내면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알려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조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두 번째 단계인 조명의 길에서 사실상 관상기도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열심히 찾게 됩니다. 종교는 문화 이상이며 진정한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도중에 잠시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정화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필요하면 언제라도 자진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달릴 수 있으려면 먼저 걷기부터 해야 합니다. 이 길이 조명의 단계 (사랑하도록 맡기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총의 능력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죄악의 길로 다시 빠질 수도 없고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맑고 밝은 내적인 평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정반대로 내적인 소동을 경험한다. 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범죄의 가능성과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적인 비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지하며, 여전히 그 길을 걷는데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기 포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정화단계에서의 정화가 능동적인 것이라면, 조명단계에서의 정화는 수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합일의 길입니다. 조명의 단계를 지나며 자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거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바로 완성의 단계인 일치의 단계(사랑 나누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마치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나는 구름처럼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상상과 기억이 점차로 사라지면서 깊은 평정의 감각을 갖게 된다. 모든 기능이 잠잠해지고 하나님 안으로 빠져들어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일치의 기도'이다. 이것은 성인들의 길이지만 우리 모두 부름 받은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길에 한 발을 (아니면 두 발을 모두) 들여놓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어쩌면 그대는 이처럼 높은 단계에 그대 자신을 올려놓기가 두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마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 하거나 “이 세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특별한 벗들만을 위한 자리”라고 말하겠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세 번째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특별한 벗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대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벗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그저 솔직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거룩함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그대가 획득해야 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미 그대를 위해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 팔을 벌려 주님을 향해 달리십시오. 세 번째 길에 걸맞는 특별한 종류의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 이 작은 책은 그대를 이 같은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합일로 차분히 인도하여 그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2. 데레사의 관상의 단계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내면의 성채(Interior Castle)' 에서 기술한 것들을 보자. 그녀는 영적인 여정을 기도의 단계라는 관점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여정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영적 여정의 설명 방법들도 있기는 하지만, 우선 데레사의 예를 살펴보자.

1). “주입된 평정”(注入平靜 : infused recollection)

감각의 밤이 완성에 이르려 할 때에 솟아나는 첫 번째 은총은, 마치 신선한 공기가 자신의 영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은 신비스런 깨달음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뿜어내시는 향기가 우리의 영의 기능 안으로 도달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것을 “주입된 평정”(注入平靜 : infused recollection)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다소 혼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모든 기도에는 주입의 요소들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감각의 밤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전에 메마르다고 느꼈던 것이, 이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어떤 맛좋은 영적 풍미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때에 영적인 위안은 외적인 감각을 통하여 오지 않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것은 샘에서 솟아서 감각으로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만 그것을 솟아나게 하는 원천은 감각이나 지적 활동이 아니다.

주입된 평정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일어나 나갈 수 있다. 보통은 그 감정이 유쾌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계속 더 머물러 있고 싶어진다. 이러한 은총은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 안으로 잠입하는 기도인 평정(平靜)의 기도(prayer of quiet)로 확대되어 가기도 한다. 기억과 상상의 기능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때로는 이 기억이나 상상과 유희를 한다. 이럴 때, 의지는 자신이 원치 않는 활동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 데레사는 이러한 기억과 상상의 방황을 "미친 자의 광란"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에 주의를 주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사고들이 폭우처럼 들어오는 경험을 하더라도, 동시에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현존으로 향하게 하는데, 이것은 잘 분별되지 않는 일치의 감각이나 혹은 성삼위 중 어떤 위에 대해 특히 주의를 집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2). 평정(平靜)의 기도(prayer of quiet)

다음 단계로서 "평정의 기도"는 주입된 평정보다 더 깊어지는 기도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신성한 활동이 우리의 의지를 영적인 끌어안음 같은 형태로 꼭 잡아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는 거기에서 떠날 수 있어도 그러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사실은 위안 받는다는 감정에 우리가 쉽게 집착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기도가 즐거워지면 그것을 더욱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영적인 탐식의 덫에 걸린 우리는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더더욱 많은 쾌락을 얻어내고자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게 된다.

3). 일치의 기도

만일 평정의 기도에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상상과 기억이 잠시 정지된다. 하나님은 이 기능들을 당신에게로 불러들이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 곁에 모여 더 듣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는 조용한 중에 하나님 현존을 즐긴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은 더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그것은 우리 편에서 저항이나 비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치의 기도"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실재하는 무엇이 현존함을 인식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나 영상이나 개념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고 서서히 우리를 휘어잡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나는 구름처럼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든 상상과 기억들이 점차로 조용해지면서 깊은 평정의 감각을 갖는다. 그것들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모든 의지가 하나님 안으로 빠져 들면 그 안에서는 자아 성찰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이 "온전한 일치의 기도"의 체험이며, 여기서 모든 기능들이 잠잠해지고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되는 것이다.

4). 변형하는 일치

십자가의 요한도 이러한 과정을 묘사하였다. 그러면서 여기에 다른 길, 즉 순수한 믿음의 길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두 가지 길 모두 변형하는 일치의 목표로 이끄는 길이며, 변형하는 일치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성 요한은 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의 길을 "숨은 사다리"라고 불렀다. 이것이 영적 여정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적 기도로 이끌리기는 하지만, 성녀 데레사가 기술한 잠입(깊이 잠김)의 수준들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때로 그들은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 안에 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늘 끝없는 상상의 방황을 동반하는 메마름을 경험한다. 감각의 밤 중에 진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기도는 눈에 뜨일 만한 변화 없이 계속되기도 한다.

어떤 영적인 작가는 관상 기도와 함께 얻어지는 하나님의 "느껴지는" 체험이라는 것들을 지적하였는데 이들은 그러한 체험이 없을 때에는 관상 기도도 없다고 가정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체험한다는 것과 이 이론을 모두 부정하였다. 여기에는 빛으로 가득 찬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기쁨에 찬 접근의 길도 있고, 또 짙은 어둠으로 접근하는 길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내심의 성채의 정문으로 초대받을 수도 있고 후문으로 초대받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 있는 계단으로 오르라고 초대받을 수도 있고 뒤쪽의 계단으로 오르라고 초대받을 수도 있다. 뒷 계단이라 함은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감춰진 사다리와 상응한다. 어떤 것이 더 나은가?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 길이 모두 변형하는 일치로 이끌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재가 그러한 것과 같이 그분은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위안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정화를 통하여 변형하는 일치로 이끌리는 것이다.

변형하는 일치란 어떤 경험들을 연속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에 네 번째의 차원이 되어 주신다. 변형하는 일치의 관점에서 보면, 관상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련 자체이지, 그에 따라오는 심리적인 내용들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면, 영적인 여정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여정을 처음 시작할 때에 무슨 일이든 생겨야 한다는 기대와,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평들이 결국 우리에게 불안과 실망을 가져다주는 원인들이 된다.

기쁨으로 가득 찬 신비의 길을 즐기는 사람에게나 숨은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에게나 영의 밤이라는 정화의 단계가 다가온다. 기도의 단계를 거치는 경험을 하더라도(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말하는) 거짓 자아가 작용하여, 자신도 모르게 만족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에서부터 영적 여정 상에 놓여있는 선한 일들로 그 만족의 대상을 바꾸어 간다. 이 마지막 말은 관상 기도가 주는 영적 위안의 가치를 손상시키려는 뜻이 아니다. 특히 아동기에 정서적인 손상을 크게 입은 사람들에게는 이 위안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서 쓰다듬어 주시고 깊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시어, 그들이 즐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쾌락이나, 즐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온 쾌락을 즐겨도 좋다고 확인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아동기의 정서적 판단을 재평가하고 인생의 좋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감사함은 영적인 여정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은 어디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가를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겸손을 체험하면, 거짓 자아와 문화적인 조건화로 미화했던 프로그램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것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 늘 작용하던 환상도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게 된다.

 

3. 관상에 나타나는 특징

오먼은 완전한 관상(주부적 관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 현존의 체험이 현저하다.

2).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하는 느낌을 받는다.

3). 본성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 있다.

4).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이다.

5).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 잡스러울 수 있다.

6). 관상자가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을 갖는다.

7). 관상자가 은총상태에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갖는다.

8). 신비적 체험은 그 체험의 서술이 매우 어렵다.

9).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과 동시에 존재적 변화를 가져온다.

10). 신비체험은 흔히 신체에 반응을 일으킨다.

11). 신비적 기도는 흔히 기능정지나 결박을 가져온다.

12). 실천적 삶에 대한 큰 충동을 느낀다.

* 기도의 본질은 많이 생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

- 아빌라의 데레사 -

*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지 마시오.

오히려 하나님 마음 안에 당신이 있다고 말하시오. - 칼릴 지브란 -

 

 

제3절 관상기도의 열매

경험에 따르면 매일의 관상기도의 열매와 은혜는 기도하는 그 시간에 받는다기보다는 기도 시간밖에, 즉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 삶의 질을 높여 준다.

기도하는 시간 동안에 정신적인 방해나 졸리움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추구하는 마음과 의지, 그리고 내게 현존하시는 그분의 진정한 현존의 은혜로운 효과는 나를 더욱 깊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기도가 빈약하다 할지라도, 기도 시간 밖에서도, 때때로 저절로 하나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또는 하나님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가 그런 순간들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깊은 평화가 있다. 우리는 일도 더 잘할 수 있고, 사람들과도 더 잘해 나갈 수 있고, 그분께 더 충실히 봉사하려고 애쓰고,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만 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내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매일의 기도가 우리의 생활 전체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1). 관상기도는 “인격적 변화를 가져온다.”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관상기도는 인격을 훌륭하게 변화시킨다. 우리의 기도와 영성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효력'을 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와 영성은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날이 가고 달이 가도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기도' 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교묘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숨기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 삶 안으로 못 들어오시도록 막는 것이다. 진정한 관상기도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점점 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선물, 그분의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분의 성령의 살아 있는 물로 치유된다. 그리고 우리 구세주의 완성된 인격으로 성장한다.

중세의 관상에 관한 논문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아주 유쾌한 방법으로 묘사했다.

"관상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관상이, 보는 이들 모두의 눈에 그들을 매력적으로 비치게 만드는 만큼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에도 좋은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가장 추한 사람도 은총으로 관상가가 되면 자신이(이 역시 은총으로) 갑자기 달라지면서 그가 만나는 선한 사람마다 즐겁고 기쁘게 그와 우정을 나누고자 할 뿐 아니라, 그와 사귐으로써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같은 선물을 은총으로 얻어 누리도록 노력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실로 이 선물을 소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덕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소유 모두를 훌륭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필요할 때에 사람들의 품성과 요구를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을 그에게 부여합니다. 또한 그의 이야기 상대가 누구든 간에, 상습적인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그 자신은 죄를 범하지 않은 채로 모두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는가 하면, 놀랍게도 남들에게 자석 같은 효과를 발휘하여 은총으로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바로 그 영적 일에 남들을 끌어들이게 합니다.

"그의 얼굴과 말은 영적 지혜로 충만하며, 강렬하면서도 풍성하고, 확고하면서 조금도 거짓에 매이지 않고, 가식적으로 겉치레를 일삼는 위선자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그런가 하면 겸허한 탄식과 몸짓으로 수없이 신심을 과시하면서도 남의 비웃음을 사지 않은 채 무게 있게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는 데 온 힘을 쏟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과 편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도 그처럼 편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안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가장 불쾌한 동반자들이다. 우리는 안정성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 더 나아가서 ‘나의 성격과 나의 필요’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보고 만나기를 좋아한다.

성녀 데레사는 관상기도의 '효과'에 대해 자신의 체험을 증거로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일 년 동안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살고 또 노력한다면, 일 년이 끝날 무렵이면, 당신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완덕의 정상에 도달해 있음을 알게 죌 것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우리 시대의 증거는 좀 사소한 것 같지만 확실하고 긍정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년 조금 못 되게 관상기도를 성실히 하면서 노력한 끝에, 나는 내 안에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온갖 종류의 불안, 두려움, 긴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쁨, 평화, 고요함이 있다. 어려운 상황 중에서나 또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도, 아주 평화스럽게 가장 뜻밖의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낸다. 그렇게 좋은 해답이 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만 그런 해답이 나온 것을 나는 깨달을 뿐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성령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자란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희미하게 감지(感知)한 것과 그분이 나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전에 내 안에 있던 자기-증오와 부정적인 느낌은 없어지고, 이제는 나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느끼고 있다.

나의 힘든 일과 무거운 의무와 나에 대한 비판도 평화로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승복하게 된다. 더욱 인내하며, 화를 덜 내며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내게 교만한 성격과 기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얼마나 많은 비극에서부터 구해 주셨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점차 헛된 자기-우상을 발견하게 되고, 진실을 더욱 열망하게 되었다. 많은 심리적 약점들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나는 더욱 자유롭게 되었다.

성소의 선물을 더욱 감사하게 되고, 성소를 더욱 진실하게 살려고 항구히 노력하게 되었다. 다른 기도와 신심 행위들도 더 의미 깊은 것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더 커졌다. 전에는 자기-연민과 낙담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더 용감하게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 소망, 사랑이 깊어진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이 보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2) 관상기도는 “자신에게 더욱 더 진실하게 된다.”

이 관상기도의 또 다른 건전한 열매 또는 '효과'는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충만하고 더 진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그분의 현존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진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우리의 크고 작은 속임수들과 겉치레와 허세, 그리고 관습이라는 가면 뒤에 있는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배운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거짓 태도와 거짓 자아의 인위적인 것들을 점차로 벗어나서, 성실과 진실 안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게 성실하면 할수록, 더 성실한 인간이 되고 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진실하게 될 때, 주위의 사물에게도(예 : 지식의 추구와 정보의 평가) 더 진실하게 되고,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도 더 진실하게 된다. 진정한 대인 관계를 위한 우리의 능력도 더 강해진다. 진정한 애덕(다른 사람들의 감정, 상황, 요구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애덕)은 진정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 개방적이고 진실할 수 있는 능력은 진정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한 성 요한의 말은 얼마나 진실 된 말인가!

세바스티안 템플(Sebastian Temple)도 자신의 '행복한 사람' 이라는 노래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방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절대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주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준다‥‥ 그는 황금을 얻으려 하지도 않고, 이익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칭찬도 명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표어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은 행복하다.'이다. 열정적으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수가 필요 없는 봉사를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사람은 바로 자신의 영혼을 찾은 것이다. 이런 모든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사람은 행복하다!"

3) 관상기도가 “기도 생활에 주는 영향”

관상기도가 다른 기도들에게 주는 중요한 영향은 새로운 의미와 일치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미리 규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판에 박힌 일상적인 기도문들을 읽는 대신에, 우리는 모든 기도에 '관상적인' 자질을 주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고, 점차로 모든 기도를 관상적인 기도로 만들 능력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일상의 규정된 기도를 단순히 노래하거나 읽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기도로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는 일련의 구송기도를 줄이고, 반복을 피하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되는 대로 서둘러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읽어치우는 것 같은 기도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적으로 구송기도, 특히 반복적인 기도(예 : 묵주기도, 화살기도, 예수기도, 등)로 좀 더 자주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처하게 하고 '그분과 함께 방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관상기도가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들을 위해 유익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수도자들이 거룩한 미사의 신비와 교회의 공적 기도인 성무일도에서 더 많은 유익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내적 생활이 더욱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가지 기도들보다는 묵상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수도 공동체들은 보존되어야 하고, 그 수도회원들이 수도 생활의 방법을 옳게 배우도록 배려해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가 미사와 성무일도를 더 짧고 단순하게 개편한 이유는, 우리가 두 가지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즉, 첫째,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를 더 참되고 의미 있게 하도록, 그리고 둘째, 개인으로 하는 관상기도를 위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4) 관상기도는 “하나님 화(化) 한다.”

인도의 종교적 상황에서는, 매일의 관상기도 실천은 우리를 '하나님을 현실화'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일편단심으로 그분의 '거룩한 현존(darshan)'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점점 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과 하나가 된다. 완전히 그분이 된다.

 

 

제4절 집중기도(Centering Prayer)의 열매

집중기도(Centering Prayer)의 열매는 무엇인가? "결과"라고 말하지 않고 "열매"라고 말한 데 주목하라. 집중기도의 열매에는 인과율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집중기도의 핵심은 "동의",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한 결과를 기대하지 않으며, 특별한 열매를 바라지도 않는다. 집중기도는 단순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동의이다. 기꺼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주님께 맡기는 것은 무척 심오한 행동이다. 집중기도의 열매는 동의하는 힘의 결과로서 생겨난다. 집중기도는 주님에게 동의하려는 우리의 의도를 담는 그릇이다.

다시 한 번 집중기도와 관상기도와 관상을 구분해 보자. 열매들은 집중기도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집중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관상기도의 은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열매를 생산하는 것은 관상기도의 은사이다. 기도하는 동안에 그러한 열매들을 반드시 경험하는 것은 아니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일상생활의 사건들 안에서 경험한다.

토마스 키팅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집중기도는 관상기도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갱신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그 전통을 현대적인 형태로 제공하며 질서와 방법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집중기도라는 용어도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집중기도라는 용어는 관상의 은사를 준비하는 특수한 방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며, 보다 직접적인 성령의 감화 아래서 이루어지는 그것의 발달을 묘사할 때에는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 관상기도는 내적 변화의 과정,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대화로서, 우리가 동의할 경우에 신적 합일로 이어진다.

우리의 전통에서, 이러한 변화의 역사는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우리 내면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갈라디아서 5:22-26에 성령의 열매가 열거되어 있다 :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목록에 언급된 것들은 모두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 다음 세 가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마지막 세 가지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와 관련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 열매들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표현한다. 바울은 "열매들"이라고 복수로 사용하지 않고 "열매"라고 단수로 표현한다. 그것들은 한 분이신 주님의 여러 측면이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에게는 이 열매를 맺을 잠재적인 씨앗들이 주어진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허락할 때, 그 씨앗들은 부름을 받아 싹트기를 기다린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허락하는 데에는 두 가지방법이 있을 수 있다. 집 주인과 임차인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한겨울이다. 집의 창문 모두에 서리가 끼었기 때문에, 임차인은 창문에 긴 서리를 긁어내야 했는데, 그 일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창문 하나를 깨끗이 하고 나서 다른 창문의 서리를 긁어내다 보면 먼지 깨끗이 해놓은 창문에 다시 서리가 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주인이 집에 들어오더니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난로에 불을 피우면 곧 서리는 녹아버릴 겁니다"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영적 여행은 이렇게 창문에 긴 서리를 제거하는 일과 같다고 여겨져 왔다. 우리는 내면에 난로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난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난로는 성령이시다. 바울이 에베소서 4:22-24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의 열매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여기서 "새 사람"(새로운 자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그것을 통하여, 그것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관계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부어주는 의식의 재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거짓 자아를 다루면, 새로운 자아가 나온다. 이 과정을 마칠 때, 우리는 그것을 "참 자아"라고 부른다. 결단력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몇 가지의 도덕적인 업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면서 자유로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왕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이 원하는 모든 곳을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나는 성령께서 이 순간 보이고 싶지 않은 곳까지도 내 영혼 속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동의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시도록 허락한다.

칼 J. 아리코의 어머니는 뉴 저지에 있는 멋진 집에서 살고 계시다. 그의 어머니는 그 집을 훌륭하게 관리하는 일을 자랑으로 여기신다. 최근에 집을 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칼 J.는 교회에서 추천한 사람에게 어떻게 수리해야 할지 살펴보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은 어머니의 동의를 받은 후에 집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수리해야 할 곳을 지적했다.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과정에는 초청, 견적, 수리계획에의 동의, 계획대로 실천함, 공사비 지급 등의 요소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동의하시지 않았으면, 집수리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서의 모든 변화와 개선에는 대가가 따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를 불러야 하는 일들이 있다.

1). 외적인 열매 -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주부적 관상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집중기도에 따른 수용적 습득적 관상을 행하는 데 따른 결과로서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는 어떤 것이 있는가? 물론 그것은 사람들마다 다르지만, 충실히 기도하여 관상의 은사를 경험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열매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열매는 포기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임시방편적인 말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포기는, 지배와 존경과 안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는 우리가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삶에서 시작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물건을 구입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단순한 일일 수 있다. 내가 식품점에서 일곱 가지 물건을 카트에 실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오늘 시간이 무척 바쁘다. 그래서 12개미만의 물건을 구매한 사람들이 계산하는 계산대에 가서 줄을 선다. 그런데 내 앞에 선 사람의 카트에는 19개의 품목이 들어 있다. 나는 눈을 의심한다. 여러 해 동안 훈련을 받고 기도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고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12개 품목보다 7개나 더 구매한 사람이 소량 계산대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큰 소리로 "숫자를 셀 줄 모르는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심오한 정의 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삶이란 작은 것들이 없어질 때까지 포기하고, 다음에는 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가? 주님은 큰 도전에 대비하여 작은 것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지 결코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열매는 항상 주는 것보다는 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받는 법을 배우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주는 데 익숙해져 있다. 받는 것, 사람들이 우리를 섬기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놀라운 은사이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 등은 모두 성령의 은사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받기 위해서는, "예" "아니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등 네 가지 중 하나의 대답을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면, 상황은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위의 네 가지 답변 중 하나로 대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조종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평생 동안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왔다.

우리는 사람들의 조건에 따라서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데, 그것은 매우 심오한 존경을 표현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져야 하지만, 서로를 대신하여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예고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행하게 만들 수도 없다. 우리는 가능한 최선의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 메시지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받는 사람이 선택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을 던져주는 테니스 파트너처럼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집중기도는 우리가 행하는 다른 형태의 기도와 헌신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침묵을 맛보기 위해서 집중 기도를 행하기 때문에, 자신이 행하는 독서, 묵상, 중보기도 등이 다른 에너지를 갖기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대상이 새로운 방법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기도가 지니는 관계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이제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교회나 기도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에도 영향을 미친다. 집중기도에 따르면 우리의 삶에는 내적 침묵의 위대한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침묵은 우리의 기도와 예배 행위 모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성장시키고 확대해 준다. 우리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말씀을 듣고 거룩한 의식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마치 처음으로 그것을 다시 듣고 경험하는 듯하다. 결국, 관상적 차원이란 우리의 전통의 "남은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의 대부분은 강박관념이나 습관에 따라서 행해진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아무런 관심이나 의도를 기울이지 알고 행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하루를 몽유병자처럼 지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동정심이나 강박감에 의해서 자신의 일이나 책임을 수행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태도나 접근방식을 바꿀 기회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강박관념 때문에 일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그 일의 책임자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제안은 우리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그 일을 마쳤을 때에 치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자신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소임이었음을 안다. 우리는 일은 하고 인정받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일을 완벽하게 행하며, 한마디도 비판을 받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강박관념이다.

동정심이 많은 사람은 "그 일은 내가 맡고 있지만, 독창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거나 주도한다면, 그것을 운영할 권한을 그 사람에게 주겠다. 당신은 모든 일을 나에게 점검받을 필요가 없다. 당신이 감사를 표할 때에 내 이름을 틀리게 써도 상관하지 않겠다. 또 어떤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거나 오해해도 괜찮다. 그 프로그램을 경험한 사람들의 유익만 생각하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그래야 할른지도 모른다. "당신이 경험한 강박관념의 열매는 무엇이며, 동정심의 열매는 무엇인가?"

세 번째 열매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이란 거짓자아를 버림으로써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말한다.

변화에 대해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 언젠가 캐나다의 해밀튼에서 피정을 행한 적이 있었다. 칼 J. 이리코는 교회당에서 약100명 정도의 수녀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었다. 병동에서 방송으로 내 강연을 듣는 수녀들도 40명이나 되었다. 피정을 마칠 무렵, 병동에 있는 40명의 수녀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나는 회의실에서 20명을 만났고, 그 다음에는 움직일 수 없는 수녀들을 만나러 병실로 만나러 갔다. 병원은 꼭대기에 있었고, 병실들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은 캐나다 연금과 의료보험 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한 병실에는 뇌졸증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나이 많은 수녀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그 수녀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수녀는 한 마디로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상냥함을 직관적으로 느꼈다. 그 병실에서 조금 떨어진 병실에 같은 증세로 입원한 수녀가 있었다. 그 병실에 들어가서 나와 그 수녀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 수녀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나는 그 병실에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수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수녀의 분노, 우울함, 즐겁지 못함 등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병원을 떠나면서 나를 안내해주던 수녀에게 이 두 수녀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그 수녀는 내가 그 짧은 시간에 그러한 사실을 직관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수녀는 공동체 안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수녀였다. 그녀는 항상 어려운 일을 맡아서 무척 기꺼이 행해왔다. 화를 내고 누워 있던 수녀는 공동체 내의 거물이었다. 그녀는 병이 들어 맡은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한 수녀는 병들어서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변화되었고, 또 항상 지배하는 위치에 있던 한 수녀는 병이 들었을 때에 지배력을 포기하려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흉하게 변화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독자들 자신이 생각해 보라.

변화된 사람의 내면에서는 그의 인격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닌 빛이 내면에서부터 임한다. 이러한 수용성의 표명으로 성령이 내면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기도의 열매이다. 사람들은 이것의 임재를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발생한다. 우리는 "네가 큰 소리로 말하여도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흔히 우리는 부정의 문맥에서 이 말을 듣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말과 행동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네 번째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에 보다 민감하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 New Seeds of Contemplation을 저술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를 무척 사랑했지만. 머튼이 핵무기, 전쟁과 평화, 가난과 인종차별주의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헨리 나우웬이『상처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를 저술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라틴 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장애인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그를 떠났다. 변화된 사람이 기도에 충실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보게 되며,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게 된다. Food for the Poor의 창시자인 퍼디 마후드(Ferdie Mahfood)는 집중기도가 자신의 눈을 활짝 열어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만 보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그는 카리브 해 지역, 특히 하이티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억 불 어치의 식량을 제공해온 기관을 세우게 되었다.

우리가 관상적인 방법을 실천한다고 해서 배꼽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안전한 것을 보게 해준다.

2). 내적인 열매-내면에서 경험되는 것

집중기도를 할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집중기도의 세번째 지침에서는, 우리가 어떤 생각(주석, 이미지, 감각 인식, 기억, 감정 등)을 의식할 때마다, 조용히 우리가 선택한 거룩한 단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도 안에서 포기하는 것은 기도 밖에서의 포기라는 파급 효과를 낳는다. 이것은 많은 것들과 관계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께로 간다. 우리가 그 지점에까지 이르는 데에는 생각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있었다는 직관적인 느낌을 갖는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소유했던 느낌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제로 항상 하나님과 함께 거했었다. 그것은 연애하는 두 사람과 흡사하다. 얼마 후면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저 사랑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이것들은 독특하고 무척 상이한 두 개의 경험이다.

우리의 거짓 자아는 죽기 시작한다. 내면의 이기적 성향들이 감소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항상 증가시켜야하는 태도 대신에 점차 자아의 소멸이 시작된다. 우리는 자신이 이동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기도의 발자국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유이다.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 하나님의 발자국과 나의 발자국이다. 내 인생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모래 위에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하나님, 그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느냐?"고 대답하셨다.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나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안고 다니신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다.

거짓 자아가 죽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크게 의식한다. 우리가 계속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은 순수한 직관이다. 그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주위와 내면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정신이나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 나는 10일 간의 집중적인 집중기도 피정을 하면 내안에, 그리고 내 주위에 하나님이 어떻게 임재하시는지를 의식한다. 그것은 마치 새로 두 눈을 갖는 것과 흡사하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적 의식과 흡사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것은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깊은 상처의 치유가 진정한 인간적 성장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큰 위로를 발견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하나님에게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전환기가 지난 후,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치유가 발생할 때, 살면서 입은 상처가 치유되는 곳에서, 우리는 장대한 부활 사건들을 본다. 죽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소생한다. 치유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많다.

한 가지 털어놓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정치적인 주장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인 접근 방법으로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정치적인 말로 보지 않고 정치적인 용어를 사용한 본보기라고 본다. 이것은 내가 의도하는 방법으로 이해해 보자. 지금 나는 우리 각 사람의 일부로서 상황에 의존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 각 사람의 내면에는 공화당원, 민주당원, 그리고 신비가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도와주신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공화당원은 "나 혼자서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능력과 힘이 있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민주당원은 "누군가 나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과는 다른 환경, 다른 배경, 다른 동반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졌을 텐데"라고 말한다. 신비가는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보다 역동적인 것이 진행되고 있다. 이 원동력,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과 태도를 훨씬 능가 한다"라고 말한다.

영적 여행을 하는 우리에게는 이 세 가지 태도와 사고방식 모두가 필요하다. 우리의 내면에는 독립된 영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 것을 지탱해줄 수 있는 은혜, 우리의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토마스 머튼은 독립심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독립심은 자신이 믿는 것을 지지하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려는 데서 생겨났다.

우리 안에는 협동과 의존의 영이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 은사와 재능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일부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내면에는 신비가의 영이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냄새 맡는 것을 초월하는 보다 큰 것의 일부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머튼은 그것을 우주적 춤(cosmic dance)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와 함께 춤을 추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 세기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의 죄악 됨과 이기심이 세상과 우주에 미친 영향을 가르쳐 주신다.

이 세 가지 태도와 사고방식 때문에 "태초에 계셨으며,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이라는 기도가 한층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집중기도의 열매 중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들은 성령께 대해 마음을 열어 놓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발견된다. 앞에서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집중기도의 핵심은 동의-우리의 삶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대한 동의이다. 그 기도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게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헌신하기로 동의하는 것은 매우 심오한 일이다. 이 기도의 열매는 동의하는 힘의 결과이다. 집중기도는 동의하려는 우리의 의도, 동의할 뿐만 아니라 찬양하려는 의도를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 찬양 안에서 성령이 오셔서 관상기도의 은사를 주실 것이다. 그 은사가 주어질 때에 토마스 키팅이 말한 "내적 변화의 과정,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우리가 동의할 경우 신적 합일로이어질 대화"가 시작된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