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내적정화와 하나님의 치료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7 장. 내적정화와 하나님의 치료        
        제1절. 내적정화
                     1. 수동적 정화
                     2. 참 자아 와 거짓자아  
                       1). 참 자아
                       2). 거짓자아
                       3). 에너지 중심
                     3. 적극적인 정화
                     4. 여행을 위한 태도

                제2절. 하나님의 치료
                     1. 무의식의 짐을 들어냄



제 7 장 내적정화와 하나님의 치료

제 1 절 내적 정화

관상의 길을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로 가는 영적 여정은 우리 인격 안에 있는 어두움(거짓자아 : 죄책감, 수치심, 이기적 동기, 방어기제, 편견 등)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만일 어두움을 인정하지 않고 여정을 시작한 사람이 아주 진지하게 이 여정에 들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드리면,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이러한 자신의 결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며, 이러한 어두운 면에서 해방되는 길도 열어 주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한 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화(purification)해 주시는 과정을 말한다. 영적여정이란 바로 이러한 정화의 여정이다.

1) 거짓자아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거짓자아(false self)를 가지고 있다. 거짓자아란 어려서부터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로 행복을 추구하며 형성시킨 습관과 태도, 관념과 가치관들이 혼합된 것이다. 여기에 사회에서 제공하는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에 동조하고 자신의 과오와 결함을 옹호하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심리기제들을 모두 합한 자아의식이다. 이 거짓자아는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 대신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만든 이러한 잘못된 자아의식(거짓자아)으로 살아간다. 누구든지 “나는 별로 죄지은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거짓자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짓자아가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짓자아가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짓자아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방해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영적여정의 시작이며 영적여행 중에 계속 다루어야할 문제이다. 이러한 자각 없이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각에 부딪치게 된다. 이때에는 이러한 자각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진정한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거짓자아의 형성

인간에게는 생존/안전, 애정/존중, 권력/통제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를 좌절시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분노, 슬픔, 두려움, 자부심, 탐욕, 부러움, 허영심, 무감정 등의 쓰라린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욕구의 좌절들은 그 욕구를 채워줄 대상을 찾게 된다. 이 정서들은 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자신들의 지력을 사용하여 정당화, 합리화, 미화, 변명, 투사, 대치, 부인, 억압과 같은 심리적 방어기제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인 동기들이 자신의 인격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이고 불합리한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선입관과 고정관념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와 동기들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형태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양심에 거리낌을 받지 않기 위해 발달시킨 가치관과 태도들이다. 토머스 키딩은 이것을 소속집단이나 사회에 대한 과잉집단 동일시라고도 하며 심리학적으로는 초자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3) 쓰라린 정서의 자각

관상기도 중에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들을 직시하여 억압하지 말고 그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내가 과거부터 쌓아놓은 감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통스러운 감정, 아픈 마음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심이나 분한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담아놓은 감정이 올라온 것임을 인정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어야 한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쓴 뿌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심층으로 들어가 '감정의 자각' 이라는 세제를 사용하여 마음의 모든 얼룩을 닦아내야 한다. '내 안에 이런 아픔이 있구나.' 라고 자각하며 쓴 뿌리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아픔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의 치유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을 주는 이러한 동기들과 자신을 억압하고 감추는 자신의 여러 가지 심리기제에서 해방하라는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poor in spirit)은 영적으로 많이 치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방어기제를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또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pure heart)은 이기적 동기를 가지지 않고 가슴이 순수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내적 정화를 통해 이기적인 동기들을 버리고 잘못된 집단편견과 집단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내적 자유를 얻게 된다. 자신의 자아를 초월하고 이탈할 때 거짓자아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1. 수동적 정화

영적 여행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이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우리는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 여러 단계를 따라 이동시키는 것을 허락하며 각 단계에서 요구되는 일을 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 포함된 요소들 중 수동적 정화(passive purification), 참 자아와 거짓자아, 그리고 능동적(적극적) 정화(active purification) 그리고 영적 여행을 위한 태도 등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도, 특히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향심기도, 구심기도, 마음의 기도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된다) 중에, 자신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할 때, 우리는 관상의 은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 정화는 관상의 은사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열광적인 신앙이 표준이 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수동적 정화를 인식하려면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수동적 정화란 덕이 아닌듯하다. 특히 수동적이라는 단어가 의심스럽다. 결국, 수동적이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것과의 일치, 특히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는가?

부정의(apophatic) 전통에서는, 우리가 수동적일 때에 하나님은 수동적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은 적극적인 행위자이시다. 우리가 수동적이 되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며 수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창조주께서 행하시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해가 떠오르게 하거나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 영적인 진리를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 생활을 재건하는 일도 그리 효과적으로 행하지 못한다.

수동적 정화와 관련하여 Carl J. Arico, 「A Taste of Silence」에서 인용된 토마스 머튼의 고전인『관상의 새로운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중 일부를 재인용 한다 : 

관상이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그 개념의 범위 안에 제한하며, 하나님을 죄수처럼 그 안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관상이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자유 안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는 보잘것없고 추론적으로는 보다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음과 순수함에 의해서 어디든지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순수하고 순결한 지식이다.

관상의 은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다시 말해서, 영적 여행에 관련된 것을 보고 듣는 일상적인 방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조건으로 보게 해준다. 『관상의 새로운 씨』에서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관상 안에서 갈등이나 번민이나 의심으로부터의 도피를 발견하기를 바라지 말라. 관상적 경험의 표현할 수 없이 깊은 확실성은 번민을 일깨워주며, 마음 속 깊은 곳에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상처처럼 많은 질문들을 일으킨다.

종종 사람들은 평안과 안식을 기대하면서 집중기도에 이끌린다. 그러나 평안과 안식이 집중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집중기도의 정신과 중심은 내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의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개방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대면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한 조건에서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 지극히 관대한 제안을 충분히 이용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디트로이트 출신의 사제이자 작가인 에드 파렐(Ed Farrell)은 종종 "당신이 요청하는 것에 주의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특히 샤를르 드 푸꼬오(Charles do Foucauld)의 "나 자신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나를 당신의 뜻대로 처리 하십시오" 이 포기의 기도에 관해 수동적 정화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논평한다.

2. 참 자아와 거짓자아 (자아)

죄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본성(벧후 1:5, 요일 3:9 참조)인 참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짓자아에 따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저지른 죄이며 낙원을 잃게 한 죄입니다. 이 원죄는 우리 개개인의 죄라기보다는 인류가 갖는 공통적인 거짓자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판단의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고 세상과 육정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육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현대의 영성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우리의 자아를 참 자아라 부르고 원죄에 물든 자아를 거짓자아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숨결을 넣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생겨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심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inmostbeing)을 만들어 주셨습니다(시 139:13).

그러므로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며 그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참된 나' 안에 계십니다.

겉으로는 영적으로 성장해 보이는 사람,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인격적인 성숙의 결여로 참다운 영적 성숙과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참된 행복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서도 이러한 인격적 미성숙으로,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면서도 인간적인 나약함을 드러낸 사실들 또한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격적 성숙과 영적인 성장을 다르다고 생각하면 십중팔구 혼동과 실패를 가져올 것입니다.

수도의 길은 다름 아닌 인격완성의 길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러한 인격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어 주신 자아와는 달리 자신을 주인으로 삼은 자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인격체, 원죄의 모습을 가진 인격체, 즉 거짓자아의 인격체입니다. 이렇게 참 자아와 다른 자아를 갖게 된 것이 원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자아에 따라 사는 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이 거짓자아가 사도바울이 말하는 '외적 인간(outer self)'(고후 4:16 참조)이며, '낡은 인간(old self'(롬 6:6, 골 3:9-10 참조)입니다. 그리고 참 자아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적 인간(inner self)'(고후 4:16 참조), '새 인간(new self)'(롬 6:6, 골 3:9-10 참조)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런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롬 4:23 참조). 참 행복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자아'로 살지 않고 '거짓자아'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거짓자아에서 참 자아로 가는 것이 회개(Metanoia)입니다.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는"(골 3:9, 10) 것이 회개이며 외적 인간에서 내적 인간으로 가려는 것이 회개입니다. 잘못된 행복 추구의 길에서 참된 행복 추구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변형입니다.

인류의 죄(원죄)를 없애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짓자아를 없애기 위하여 거짓자아를 십자가 위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짓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우리의 참 자아는 우리 안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삶이며, 자녀답게 사는 삶이며, 새로운 삶이고, 하나님과 일치하며 하나님을 뵙는 삶이며 참 행복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라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속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자아(自我, ego)

정신분석이론에서 '자기' 또는 '나'로서 경험되며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성격의 일부분.

자아는 기억 · 평가 · 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 · 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 정식분석이론에서 자아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인간 정신의 역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제시한 3가지 요인의 하나로서, 이드 · 초자아와 공존한다. 프로이트의 용어에 따르면 자아(Ego:라틴어로 '나'라는 뜻)는 성격을 실행하는 기능을 하며 이드와 초자아의 통합자이자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통합자이다. 자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행위 및 기대와 상상 속에 나타나는 미래의 행위와 관련된 개인적 준거를 제공함으로써 행동에 지속성과 항상성을 부여한다. 신체 개념은 자신의 초기 경험이 중심이 되지만 자아는 성격이나 신체와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 · 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

자아발달

신생아는 자극에 반응하기는 하지만 외부적 자극이든 내부적 자극이든 그것을 통제 · 예상 · 변경할 수 없다. 지각은 원초적이고 산만하며 운동은 둔하고 어색하며,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학습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자극-반응으로 제한되어 있다.

유아의 자아는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며, 정신분석학에서 강조하듯이 무력하며 의존적인 유아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자극을 변경시키거나 완화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유아는 이 자극을 바꾸거나 완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아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찾는 동안에 긴장을 통제하기 위한 기제를 발전시키며 이 기제들은 점점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간다. 음에는 지각과 운동이 밀접하게 연관된다. 자극이 오면 곧바로 운동이 따른다. 계속되는 긴장을 견디면서 행동을 늦추는 것은 보다 발달된 자아 기능의 기초이며 나중에 형성되는 성격 기능에서 자아가 수행하는 역할의 원형이다. 자극과 반응의 학습된 분리를 통해 사고 · 상상 · 계획과 같은 보다 복잡한 지적활동이 개입된다.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자아는 제3자적 입장에서 현실을 검증하고 어떤 행동과정의 결과를 그려보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고 유지하는 것은 내적인 사고와 판단과정에 필수적이다. 2~3세 때 시작되는 언어습득은 의사전달 및 주변 환경의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며 논리적 사고과정의 발달을 위한 강력한 방편을 제공한다.

개인이 지속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자아는 더욱 분화되며 초자아가 발달한다. 초자아는 부모와 사회의 기준을 통합함으로써 본능의 억제와 충동의 통제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자아가 지각하는 도덕적 기준은 성격의 일부가 된다. 성격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필수적인 갈등이 대두된다. 자아는 방어기제를 구축함으로써 초자아와 이드(원초적 충동)를 매개한다.

2). 참 자아

참 자아에 적용된 정화의 과정에 대한 머튼의 묘사를 소개해 보겠다. 머튼은 참 자아를 "내적 자아"라고 부른다.

하나님만큼 은밀하고 하나님을 닮은 내적 자아는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려 하는 모든 개념을 피한다.

관계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친구를 소유하려 하면 쉽게 그 친구를 잃게 된다.

그것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고 연구될 수 없는 삶이다. 그것은 묵상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떤 과정에 의해서 도달하거나 감춘 곳에서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영적 훈련에 의해서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 내면에 침묵, 겸손, 이탈, 깨끗한 마음, 이탈 등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내적 자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없이 표명하려 할 때에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가 말하는 참 자아란 무엇인가?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

나의 정체성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실존과 평화와 행복과 관련된 문제는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발견함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발견한다면 나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내가 참 자아를 발견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참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감추어져 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면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할 것이며,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토마스 키팅은 Open Mind, Open Hert에서 참 자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의 기본적인 선(goodness)의 핵심은 우리의 참 자아이다. 그것의 무게 중심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여행에서의 도약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동일하다.

자기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여행이다. Carl J. Arico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네 부분으로 구성 된다.

첫 부분은 자기 인식에 대한 욕구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만일 내가 자신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나 자신의 밖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므로, 나 자신의 밖에만 있는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 단계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운 후의 단계)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self-acceptance) 것이다. 만일 내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리고 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곤경에 빠진다. 키팅은 "우리의 기본적인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여행에서의 도약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려운 과정이다. 우리는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인정받지 못한 것과 관련된 기록들이 내면에서 작용하면서 인정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치료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제공하는 큰 선물은 "자기 인식" (self knowledge) 뿐만 아니라 "자기를 받아들임"(self-acceptance)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표현하셨다. 자기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사랑이 흘러나온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자기 개방'(self-opening)이다. 이것은 내 안에서 일하는 영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인도하도록 자신의 개방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차 상황의 또 다른 본보기이다. 나는 내 자아를 알며 나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고, 다른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영적 발달의 차원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전진해야 한다. 정착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령께 마음을 열고, 내가 받아들인 참 자아와 거짓자아에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나의 존재 전체로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침체에 빠질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포기(self-surrender)이다. 자기 인식에 동의하고 자기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사역에 자신을 개방한 후에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 현재 의식하고 있는 것을 계속 추진하여 완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네 단계 모두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다루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종종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사람들이 우리를 잘못 판단할 때, 우리는 충격을 받고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보다 더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잘못 판단할 때에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과정을 망칠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받아들일 때에 참 자아가 발견된다. 거짓자아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알려져 있는 것을 감출 수 있다. 성령은 이러한 긴장 속에서 일하신다. 내가 연약함 속에 있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곳이야 말로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곳이다. 나에게서 연약하고 매력적이지 못한 것들을 아는 것과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가 나의 은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은사들 안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한다. 나의 장점, 매력적이고 재능이 있는 측면을 아는 것과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Thomas Keating은 그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방금 주말 피정과 플로리다의 Contemplative Outreach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쳤다. 열흘 동안 치밀하게 진행하여 결실을 얻었다. 참석자들은 피정과 교육을 잘 받아들였고, 훌륭하다고 평가해 주었다. 많은 참석자들이 나에게 와서 감사를 표명했다. 이 기간에 나와 함께 일한 동료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세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럼요.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대답했다. 동료는 계속해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은사를 주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이 훌륭하게 일한 것을 칭찬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말을 듣고 있지 않군요. 당신은 존재의 핵심을 찌르는 비판이라면 들으실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듣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를 찬양하는 것을 허락 할 수 없었다. 나는 찬사는 듣지 않았지만, 비판적인 평가였다면 듣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이다. 우리는 성령께 자신을 개방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

3). 거짓자아

머튼은 거짓자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것은 내가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의 거짓되고 개인적인 자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현실을 벗어난 곳과 삶에서 벗어난 곳)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그러한 자아는 존재할 수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모든 망상들(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죄의 뿌리에 양분을 공급해 주는 망상들)중 작은 것도 식별하지 못한다.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거짓자아만큼 주관적인 실체는 없다. 그러나 거짓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그림자를 숭배하는데 바쳐진 삶을 죄의 삶이라고 부른다.

"나의 거짓되고 개인적인 자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현실을 벗어난 곳과 삶에서 벗어난 곳)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강력한 말이다. 거짓자아란 우리가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자아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자아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식, 명예, 권력, 사랑 등의 중심점들이 있다. 우리는 여정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외적인 피조물이나 자신에 대한 내적인 망상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토마스 키팅은 거짓자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거짓자아는 참 자아와는 반대로 발달한다. 그것의 무게 중심은 그 자체이다‥‥ 우리의 선의 기본적인 핵심은 역동적이며 저절로 자라는 경향이 있다. 이 성장은 거짓자아의 망상들과 감성적인 문제들, 문화적인 제약과 개인적인 죄에서 기인하는 부정적인 요인들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우리는 불안, 두려움, 거짓자아의 무절제한 욕망 등에서 해방되어 참 자아를 되찾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무의식 안에 살아 있는 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것을 표면으로 올라오게 하는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키팅은 Open Miend, Open Heart에서 그 과정에 대해서 논평하지만, 여기에서는 관상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실제로는 집중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무의식의 짐을 더는 일이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끝없는 분심의 흐름을 경험하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할 수 없다. 실제로, 당신이 진정으로 분심을 원하지 않는 한, 관상기도 안에 분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들의 수효와 본질은 당신의 기도의 순수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의 기도가 사고의 수준에 머문다면, 당신의 깊은 숙고와 관계가 없는 생각들이 당신을 산만하게 만들 것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믿음 안에서 당신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에 동의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충전된 생각들은 무의식이 정서적인 쓰레기들을 몰아내는 주된 방법이다. 당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당신의 무의식 안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당신의 결정에 영향을 주던 많은 정서적인 갈등이 이런 방법으로 해소된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당신은 보다 큰 행복감과 내적 자유를 느낄 것이다. 기도하는 동안에 당신이 탄식하던 생각들은, 당신의 신경 조직 안에 축적되어온 손상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켜 준다.

집중기도에서는 생각과 침묵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은 치유되어야 할 것을 운반해오며, 침묵은 치유가 이루어질 공간을 만들어 낸다. 전통적으로 이것이 거짓자아의 수동적 정화라고 이해된다. 우리가 관상의 은사를 적용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고 복종할 때에 거짓자아가 치료된다. 집중기도는 이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무대를 설정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을 관상적 은사, 즉 성령이시다.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무슨 일인가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고,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물으신다. 마르다는 자기 오빠에 대해서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악취에 개의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면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는 이 "풀어 놓으라"는 명령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또는 그 일이 나사로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묶여 있다. 우리는 삶의 어느 부분에서 묶여져 있으며, 묶인 것을 푸는 것이 수동적 정화이다. 우리가 완전히 묶여 있으면, 아무리 꿈틀거려도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묶인 것을 풀 수 없다.

무엇을 풀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대면하고 있는가? 우리의 내면에는 성장하면서 심겨진 정서적인 프로그램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서적인 프로그램이란 부모, 교사, 교회 지도자, 공동체, 매스 미디어, 동료 등이 제공한 "옳지 못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람들이 심어놓은 기록들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는 요금을 넣고 희망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구식 자동전축이 들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노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연주한다. 심지어 자신의 노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버튼을 누르면 녹음된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부모인가? 선생님인가? 코치인가? 아니면 TV 광고인가? 참 자아는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또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는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아무 것도 기록해 두지 말라", "사람들은 모두 평범하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나보다 열등하다(또는 우월하다)" 등이다. "제6계명과 제7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계명을 범하라"와 같은 무서운 메시지도 있다. 이처럼 미리 녹음된 기록들은 교묘하며, 우리의 판단이나 정서적인 반응이나 세계관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문화적 조건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교적인 태도에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복음의 모범이 아닌 서방 세계의 모범을 본받아 살고 있다. 서방 세계의 모범은, 모든 일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이며 하나님은 상을 주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고 가정한다. 성공은 우리가 노력하여 얻는 것이고, 금전도 우리가 노력하여 얻는 것이며, 천국도 우리가 노력하여 얻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서로 그것을 강화해준다 우리가 그것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적인 정체성이다.

서방세계에서는, 내적인 행동보다 외적인 행동이 더 중요시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의 내적 의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연한 결과-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를 기대할 수 있다. 마음속에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선한 것처럼 보이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우리의 종교적인 태도에도 적용된다.

서방의 종교적 모델에서는 장래의 상과 형벌을 강조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선이 돌아올 것이고, 악을 행하면 악이 돌아올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해서 살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천국에 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상을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서, 장차 받을 상이라는 주장을 채택 한다.

복음적 모델은 시대적으로 산업적·기계적인 혁명과 의식 이전의 것이다. 우리의 문화적 성향은 복음적 모델의 권면들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 권면들을 듣거나 따르기가 더욱 어렵다. 그것들 중 몇 가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복음의 가치관에서는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어온 것보다 받아온 것이 더 많다. 우리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제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DNA유전 형질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받았다. 우리의 삶도 받은 것이다. 새로운 생태학적 의식에서는 그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강조한다. 우리가 받아온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주위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첫 조처를 취하신다.

복음의 틀 안에서는 내면의 행동이 외적 행동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행동에 반영되지 않을 때에 우리 안에 내분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내분"이라는 단어는 아주 적절한 단어이다. 그것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영혼이 나누어진다는 것, 즉 거짓자아의 부름과 참 자아의 부름으로 나누어진다는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은 행한다고 말했다.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너의 태도가 개선된다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비록 "강압적인 사랑"으로 표현되더라도, 우리는 항상 사랑해야 한다. 복음의 가치관과 서방 문화의 가치관 사이에는 예리한 이분법이 존재한다. 복음의 말씀대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방 문화에서는, 누가 우리를 해치면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복수를 한 후에 용서를 요청한다. 우리 시대, 우리 문화에서는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구절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 안에서 서방의 자동 전축이 들어 있어, 복음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흥미로운 음악을 연주한다.

 4). 에너지 중심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아기는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욕구를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소유하는 본능적인 욕구라고 부른다. 그러한 욕구에는 생존을 위한 욕구,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 지배하려는 욕구 등이 있다. 이것들에 대해 살펴보자. 세상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안전과 생존의 욕구가 있었고, 그 욕구는 부모님께서 먹여 주고 입혀주고 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줌으로써 충족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가정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도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받는 사랑, 우리의 자부심이 존중되는 방법, 우리 스스로가 가족들 중 일부라고 느끼는 분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가정의 중심이 아니라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 때 우리는 세상에는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안 돼", "이렇게 해", "훌륭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라", "한 번만 더 하면 벌을 줄 테다" 등의 말을 듣는다.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들은 성장 과정에 무척 중요하다. 성장하면서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지 않거나, 우리가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보상 욕구와 프로그램들의 체계를 만들게 되는데, 나는 그것을 "에너지중심"(energy center)라고 부른다. 이 에너지 중심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항상 지배하려는 욕구, 또는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기가 받아야할 명성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존재한다.

버튼을 누르면, 우리의 자동 전축에서 선율이 흘러나올 뿐만 아니라, 군악대도 연주를 시작한다. 우리는 권력과 지배, 애정과 존경, 안전과 생존 등의 에너지 중심에 의해 충족되는 이러한 반응들을 위해 많은 정보와 에너지를 동원한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보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균형을 잃은 반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순간에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통제의 문제이지만, 특별한 사람이나 집단에서는 평생의 문제가 된다. 자랄 때에는 왜 사이좋게 지내온 형제와 자매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중 둘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중에 병든 부모님 때문에 문제가 생겼는데, 병든 부모를 보살피는 일을 도맡으라는 요청을 받은 형제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분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이것은 부모의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 때문이었을까? 누가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형제들 중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어딘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균형을 잃은 반응은 피조 된 보상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공을 계획하는 방법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받아온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해라.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받은 메시지가 아닌가? 부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더 성공하라는 의미인가? 성공하는데 적용되는 규칙과 규정들이 있다. 언제나 되어지는 것을 지배하라 : 다른 사람이 당신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며, 당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지배하라. 다시 말해서 힘, 지배력을 가져라. 중요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라.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특히 실수를 범하지 말라. 만일 실수를 범한다면, 반드시 그것에서 벗어나서 체면을 세우라.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있었다.

이것들은 누구의 가치관인가? 복음의 가치관인가? 아니면 서구문화의 가치관인가? 한 번도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 항상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 항상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영적 여행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만일 그것이 여행이라면.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여행이지,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신 여행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는 분으로 간주된다. 그 분은 특히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때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중요한 인물들은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예수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지배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읽어보라.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라. 예수님은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시키셨는가? 자신이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중요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하는 법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충분히 호감을 받고 접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삶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면 된다.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하여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애착의 정도, 또는 권력이나 애정이나 안전과 관련된 것들이 부족할 때에 비정상적으로 반응하는데 있다.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우리는 무슨 일을 잘못하거나 도전적인 말을 하면 무척 당황한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해주지 않을 때, 또는 불안을 느낄 때에, 우리는 괴로워한다. 우리는 마치 자신이 홀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만일 이것이 학대의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그 시기에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종종 떨어져 나가는 것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닐 수도 있다. 나사로를 묶었던 붕대처럼 풀어지는 것은 우리의 거짓자아를 이루는 경솔한 문화적 가르침이다. 주님이 우리를 묶었던 것을 풀어 주시지만, 처음에는 우리의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반응은 매우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어렵다. 이 내면의 기록들은 우리의 허락이 없이 활동하는 듯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가 규칙적으로 기도, 특히 기도를 시작하면, 그것들은 서서히 지워진다. 이것은 완전히 옳은 표현은 아니다 : 집중기도를 할 때에는 우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용하신다. 우리가 내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면(집중기도는 우리의 동의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물려받거나 습득한 거짓자아를 제거해 주신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이 없이 혼자의 힘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요청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존과 안전, 지배, 사람들의 존경 등을 바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들을 원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가 중독증처럼 될 때, 이러한 욕구들이 너무 중요한 것이 되어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 할 때, 이러한 욕구들은 해로운 것이 된다. 우리가 그것들이나 다른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느낄 때,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 여행을 방해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중독이다. 이 일은 교묘하게 발생한다. 무척 교묘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공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절제한 욕구들을 제거하고 삭제하는 것은 수동적 정화의 은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께 복종하고 모든 일을 맡길 때에 발생한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인 정면 공격에 의해서 이러한 중독 증세들을 제거하려 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사유 과정과 가정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배욕을 제거하는 일을 지배해야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지배욕을 만들어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안전에의 욕구를 제거하면서 안전해야 한다면, 더 많은 안전에의 욕구를 만들어 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존경받으려는 욕구를 제거하면서 존경심을 확보해야 한다면, 존경받으려는 욕구를 더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가 자멸적인 활동의 순환을 만들기 시작하면, 영혼의 상태는 전보다 악화된다. 겸손을 자랑하는 종교 공동체가 있었다. 영적 여행에서 이 부분은 매우 교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거짓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친한 친구 네 사람을 불러서, 당신의 작고 사소한 잘못들에 대해이야기해 보라.

우리는 동료들과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태도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 또는 부모와 학교와 교회와 국가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랑스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것은 영적 여행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복음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한다. 늙었다고 해서 그것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산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 삼은 거짓 가르침들 -우리의 거짓자아- 을 변화시킨다.

수동적 정화는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들을 쇠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적이 능력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해진다. 질서, 안전, 즐거움 등을 향한 건전한 성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러한 능력들에 집착하여 필요한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고 방심하게 되고 호전적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하여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될 때, 이러한 애착들은 우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또 우리는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끼거나 또는 사소한 이유 때문에, 또는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유가 없이 크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정욕적인 욕망을 예리하게 의식하며, 우리는 정욕적인 느낌과 감각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완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열등한 것처럼 여기는 이상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해결책은 바쁘게 활동하는 것, 부인하면서 미소 짓는 것, 애완동물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등이 아니다. 이러한 일회적인 해결책을 사용하는 것은 잡초를 뿌리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윗부분만 잘라주는 셈이 된다.

다음은 1987년에 Carl J. Arico가 캘리포니나의 멘로 파크에 있는 Vatican II Institute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이오아 주에서 온 사제는 성찬 예배를 주재 설교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

나는 매년 여름 우리 집 농장에서 경작하는 일을 돕습니다. 어느 날 나는 트랙터를 몰다가 우리 집안에서 수백 년 동안 경작해온 밭 한 가운데 있는 무엇인가를 들이받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트랙터에서 내렸습니다. 밭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밭 가운데 0.5톤짜리 바위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영적 여행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마음을 열어놓고, 인생에서 성령의 사역에 자신을 개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이 닥치든지 그것에 초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거룩한 농부가 새로운 씨앗을 심을 공간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혼자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을 개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하는 느낌과 반응은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치유나 용서, 또는 찬양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리고 매일의 활동 안에서 수동적 정화가 행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삶 안에 있는 에너지 중심들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보게 하시며, 그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통제하는지 보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 대해 질문을 시작하면, 내면에서 성령의 사역이 시작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은 어떤 것인가?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나의 삶을 지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예상한 방법으로 성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자신이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을까?" 에너지 중심들은 온갖 잡음과 유익하지 못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이 세 가지 중심은 모든 동경, 모든 두려움, 모든 욕구를 확대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게 만든다.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은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 있는 에너지 중심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그 세 가지 중심들의 신경과민적인 욕구들을 모두 충족시켜 주기로 작정한다. 우리는 완전히 지배할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이고, 모든 감각적 인 변덕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몇 가지 실수를 더 범할 것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만일 우리가 항상 안전하고 올바르기로 결심한다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두번째 전제와 관련하여,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밖에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좋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간혹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일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항상 지배한다고 생각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해 보자.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행하는가? 우리의 방식이 항상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가?

지배, 존경, 안전 등의 영역에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우리의 반응은 여러 가지이다. 정치적인 원동력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주제들 중 하나는 "경제"였다.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 모든 것은"지배"에 집중된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통제할 수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책임을 지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의 초점은 "존경"이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으로부터 하찮게 여김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충분한 관심을 받기를 원한다. 여기에서의 초점은 "안전"이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불안하게 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한다. 지배하거나 안전하게 느끼거나 존경을 받지 못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후퇴이다. 우리는 "내 장난감을 가지고 집으로 가련다. 더 이상 이 공동체에서 놀지 않겠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 "아무도 내 음식을 맛있게 먹지 않으니, 다시는 요리를 하지 않겠다" 등의 말을 한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나를 방해하면, 물에 빠뜨려 버릴 테다." 자신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공격적이지는 않다. 그렇다면, 수동적-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여, 필요할 때에 자신의 관심을 억제하고 얼음처럼 냉담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 역시 다른 형태의 공격이다. 실제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공격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머튼은 우리가 앉아서 묵상하면서 자신의 개혁 욕구가 바른 마음에서 생겨난 것인지 확인해야한다고 말했다. 개혁은 우리의 분노와 공격성을 합법화해줄 수 있다. 지도자에 대한 불만 때문에 소란스러운 국가들을 보라. 개혁을 위한 운동이 비폭력 운동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폭력은 정당화되고 합리화되고 필요한 것으로 찬양된다. 새 지도자들도 옛 지도자의 행태를 답습하며, 폭력의 순환은 계속된다.

또 다른 방법은 매우 의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욕구를 보살펴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첨을 한다. 자신의 가문이 훌륭한 가문이기를 원한다. 만일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지 않거나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그 사람(상관, 주교, 손윗사람, 코치 등)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착한 어린이처럼 쓰다듬어 주기를 원한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는 존경받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권위 있는 사람의 미미한 모욕이 우리의 내면에 혼돈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파괴할 것이다.

다음으로 조건부 항복(capitulation)이라고 불리는 가장 미묘한 방법이 있다. 우리는 항복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협상을 한다.

위에 말한 반응들, 또는 방법들 -후퇴, 공격성, 의존성, 조건부항복- 은 미봉책이다. 그것들은 문제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즉 권력과 존경과 안전에 토대를 둔 성공과 행복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게 하지 못한다. 균형을 잃고 그것들에게 집착할 때, 우리는 변화를 향한 여행에 커다란 장애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해보자. 정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적극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동적인 것은 우리의 삶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도에 충실함으로써, 즉 영적 독서와 집중기도를 실천하여 성령이 우리 안에서 보다 깊이 역사하시는 것을 허락하며 진정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의원이 필요한 일을 행하시는 것을 허락한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며, 우리의 기도는 "주님, 당신에게 필요한 일을 행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위에서 말한 밭을 경작한 이야기는 드러내야 할 것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는 데 대한 훌륭한 예이다. 수동적인 정화는 근원에 이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방법에 이르는 길을 마련해 준다.

 

3. 적극적인 정화

적극적인 정화(active purification)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하여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감연히(과감하게) 맞서야 한다. 예를 들자면, 밭을 간 후에는 새 생명의 씨를 뿌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인가? 분명하게 생각을 할 수 없거나,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 휘말렸다고 느낀다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하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달라고 성령께 요청하라.

첫째, 그 상황을 분류하라. 그 느낌을 식별하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에너지 중심이 무엇인지 확인하라 : 때로 세 개의 에너지 중심 모두가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것에 어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화하지 말고, 핑계를 대지 말라. 우리는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호감을 받지 못하면 슬퍼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한다. 그것을 분류하여 명칭을 붙이라. 그것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맛보라. 그것을 가로질러 걸어가라. 우리가 무의식중에 그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내면에 있는 거짓자아가 지금 이 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녹음기가 그처럼 크게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첫 단계를 취한 후에, 기도하라. 간단하게 "환영합니다"라고 기도하라. 그 기도를 원하는 만큼 자주 되풀이 하라. 당신은 무엇을 환영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치유, 용서, 또는 찬양에게 당신의 관심을 이끌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을 환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의 사건들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도구로 하여 역사하신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이 상황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환영한다. 그 사건 자체를 환영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사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환영한다.

그 다음에는 "이 상황을 지배하려는 나의 욕구를 버립니다"라고 말하라. 그리고 기다리라. 당신이 종국에는 이 상황을 지배하기를 원하겠지만, 이 순간에는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하나님께 지배해 달라고 요청하라. 장황하게 "주님, 나는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을 지배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을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의 뜻대로 행하십시오"라고 표현하지 말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서 "이 상황을 지배하려는 나의 욕구를 버립니다.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라.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당장에는 해결되지 않지만, 몇 분 동안 그 사건을 둘러싼 잡음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주께서 오셔서 필요한 일을 행하실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해 일상적인 방법으로 반작용하기 보다는 응답하는데 도움을 준다.

4. 여행을 위한 태도

정화, 참 자아, 거짓자아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토마스 키딩은 그것들을 "여행을 위한 태도들"(attitudes for the journey)라고 부른다.

첫째, 우리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환영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이다. 그것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고 살아야 하는 것의 일부이다. 이것 대신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인하는 것이다. 부인과 진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항상 그렇듯이,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어두운 측면의 에너지가 완전히 자유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데 필요한부분이 된다. 자기 인식과 자기 용납은 본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나는 우리 자신의 어두운 자아를 보고 웃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테가 영적 여행을 다룬 서사시의 제목을 『신곡』(The Divine Comedy)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두운 측면을 다룰 때, 우리는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실제로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의 자동 전축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어두운 부분을 끌어내어 우리가 그것들을 인정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때에 우리의 자동 전축 안에 녹음된 것들은 기도를 통해서 성령에 의해 지워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관상 여행 중 일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키딩은 정상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키딩은 이 공식을 학대의 상황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단순히 포기하는 것 이상의 분명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포기는 학대의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도 그들이 특정한 상황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자유롭게 할 행동 계획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학대 속에서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느낀다).

두번째 태도는, 모든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 편이심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성장과 고결함을 촉진하는 것을 즐겨 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피조 되었다. 어린이들이 노력하지만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사랑하는 부모는 제대로 행하고 싶어 하는 자녀의 소원을 보고서 그 아이를 돕기 위해서 힘이 닿는 한 모든 일을 한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과 고결함을 볼 때에 가장 깊은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 우리를 비난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한 기록들은 변경하거나 없애야 한다.

세번째 태도는, 치료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욕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을 의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계속하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신의 허물들을 보려 하며 치유되어야 할 것을 보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나의 미소 속에는 엄청난 분노가 놓여 있다. 그 분노는 되풀이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나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분노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에게는 정욕이 있으며, 그것을 교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오는 순간을 가다리면서 여러 해 동안 지켜보셨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하나님의 자비를 접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확신을 갖지 못했지만,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기억해야 할 네번째 태도는, 신뢰는 완전한 사랑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신뢰하면, 신뢰가 생긴다. 두려움은 무익한 것이다. 두려움은 주로 우리의 머리속에 존재하며 상황의 실체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신뢰가 성장하면, 사랑도 성장한다.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능력만 바라본다. 이것은 치유되고 용서받아야 할 태도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이미 충분하다. 너는 언제 나를 바라보려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곳에 도착한다. 인생은 우리가 걱정과 염려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마스 키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의 참 자아를 의식하는 것, 그리고 이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평안과 기쁨을 깊이 의식하는 것은 거짓자아의 해체와 죽음에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상쇄해준다. 거짓자아를 움직이게 하던 힘이 쇠퇴하면, 참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의 동력으로 "새로운 자아"를 세운다. 

새로운 자아를 세우는 일에는 무수한 잘못이 따르며, 때로는 죄도 따른다. 그러한 잘못들은 참 자아의 침범할 수 없는 선에 비하면 지극히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우리가 해친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구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확신과 활력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떻게 무덤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은 이미 수동적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묶고 있던 것들을 풀어 주고 계시다. 우리의 전통에서는, 우리가 침묵 속에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도 시간이 아닐 때에 드러나는 것들을 식별할 수 있으며, 지배, 존경, 안전 등 세 가지 중심을 바라본다. 이것을 심리학으로 축소하지 말라. 이것을 식별하는 것은 심리학의 일이 아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쓸데없는 일이 된다. 이 세 가지 중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예는 팔복 중 처음 세 가지 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상자는 팔복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팔복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문화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그것들은 실질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에는 영적 독서 기도와 팔복을 함께 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의 가르침 이다.

제 2 절 하나님의 치료

우리는 영적 여정이 시작되면서 자신의 영적인 결함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결함들을 신학적으로는 원죄의 후속결과라고 한다. 현대 심리학의 표현을 빌리면 원죄의 후속결과란 우리 인격 속에 들어있는 심리적, 병적인 요소이며 중독현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심리학자는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 98%가 중독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병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깊이 병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병적인 요소( 죄책감이나 영적 결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맡겨드리는 것이다. 토머스 키딩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성한 치유자"(Divine Theraphist)라고 부른다.

1) 무의식의 짐을 덜어 냄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된다. 개인 무의식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과거에 체험한 것들이 들어 있다. 이 무의식 속에 경험들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그것을 찾아 정화시키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좋은 보물이 될 수 있다.

무의식, 잠재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이 작업은 고통스럽고 힘들다. 고통을 직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 고통이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함을 주는지를 이해한다면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관상기도 중에 과거의 경험이 의식으로 올라오도록 과거경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인생사에서 떼려도 뗄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화시키느냐에 따라서 영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고난과 갈등이나 어려움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과거를 살펴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과거가 정화되어야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 과거의 경험이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대상을 아무 선입견 없이 깨끗하고 맑은 유리창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2). 내적 정화의 과정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우리를 정화시켜 달라고 맡겨드리는 것으로, 자아 인식의 과정을 마주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루하고 견디기 어렵다고 사고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빗줄기 속에 우산도 없이 서서 몸이 흠뻑 젖는 것과 같다. 투덜거리지 말고 사고의 폭우 속에 빠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비를 즐겨야 한다. 기도가 좋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않았을 때 그 기도는 잘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영적인 인식이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이 되도록 하신다.  

3). 무의식이 비워지게 되면 생기는 변화들

무의식이 완전히 비워지게 되면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참 자아의 지배 아래 살아가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외적인 사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어떤 상황이나, 외적 사물, 감정, 사고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더 발전하게 되면 자신의 내부에 대한 심오한 인식이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 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4). 내적 자유와 하나님 현존 의식

내적 자유는 우리의 집착과 혐오, 고집과 정서적 프로그램을 떠나보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란 어떤 사건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점점 더 자아를 실현하는 동기로 살아가기 시작하며 더 이상 존중받고, 통제하며 안전감을 바라는 습관적인 욕망의 지배에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관상기도 수련들을 통해 우리를 내적 자유로 인도해 주신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드리면 하나님은 사고를 넘어선 고요한 장소 속에서 휴식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이러한 장소는 정서적으로 혼돈스러운 날에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누리기 위해 매일 생활 속에서 침묵과 고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관상기도의 수련이 형성되면 기도 중에 우리의 기능들이 비교적 잠잠해지고 조용한 휴식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사고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지만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을 배운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감각을 즐기기 시작한다. 우리의 사고와 정서적 체험 저편에는 우리 존재의 영적 수준이라는 깊은 현실이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심리적인 인식과는 다르며 진실을 아는 또 다른 길이다. 그 결과 생활의 평범한 관심들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고요와 휴식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체도 휴식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휴식은 잠자는 것보다 더 깊은 휴식이다.

하나님 현존 의식은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관상기도 수련을 통해 영적 인식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 속에서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전에는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인내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인내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비한 자가 될 수 있다.


1. 무의식의 짐을 덜어 냄

키딩은 관상기도에 들어가려 할 때, 의식에 떠오르는 사고를 비유하여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 오는 배들과 같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오르는 첫 번째 종류의 사고는 시시한 공상들이다. 두 번째 종류의 사고는 눈에 뜨이는 보트로서 당신의 주의를 끌어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 배위에 오르고 싶게 한다.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당신이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네 번째 종류의 사고는 우리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다섯 번째의 사고는 “우리의 의식을 비우고 장애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과 정서와 신체에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각자에게 적합하게 맞추어진 것이다.”고 말한다.

관상 기도의 정규적인 수련을 통하여 내적 정화의 작업이 진행되면 다섯 번째의 사고가 떠오른다. 이 작업은 일종의 신적인 치유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비우고 장애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과 정서와 신체에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각자에게 적합하게 맞추어진 것이다.

어렸을 적에 가졌던 충격적인 정서적 경험들의 후유증이 우리의 신체와 신경 계통에 긴장, 불안, 기타 각종 심리적 방어 체제 등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점점 증명되어 가고 있다. 일상적인 수면과 휴식으로는 이것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적 침묵과 이 깊은 침묵이 가져다주는 깊은 휴식 중에 이러한 정서적 장애 요소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신체에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 -즉 인간을 해롭게 하는 요소들을 배설해 내는 능력- 들이 이 장애들을 없애기 시작한다. 정신은 물론 인간의 신체는 자신의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비우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기도 시간 동안에 무의식 속에 있던 정서적 쓰레기들이 사고의 형태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데 이 사고들은 어떤 긴급성과 힘과 감정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당신은 이것들이 어떤 근원들로부터 떠오르는지 알지 못한다. 보통은 뒤죽박죽인 사고나, 애매하면서도 긴급한 불편함을 동반한다. 그것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면서 그것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관상 기도로 해서 흘러나오는 깊은 평화가 우리의 정서적 장애를 털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인격의 어두운 부분이 우리의 자아 성찰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늘어 간다. 우리는 우리 가족에게 친구에게 직장의 동료들에게 아주 잘해 오고 있다고 행복스럽게 믿지만, 위와 같은 역동적 상황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이와 같은 소위 좋은 뜻으로 가졌던 관계가 아주 더러운 행주더미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믿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은 신성한 빛이 우리의 마음을 더 밝게 비추어 주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면 그 사랑으로 해서 우리가 사실은 이기적임을 깨우쳐 준다.

마치 우리가 희미한 불빛의 방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장소는 왜 깨끗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 1kw짜리 전등 100개를 켜고 방 전체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자. 그러면 수많은 종류의 작은 미물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은 너무 놀라 거기 꼼짝 못하고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면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전압을 올리시면 우리의 동기는 아주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만일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길 말고도 하나님께로 가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을 거야." 하면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할 것이다.

크리스찬 금욕주의 전통에 있는 자아 지식은 우리 내면의 감추어진 동기, 정서적 욕구와 요구 등에 대한 성찰이며, 이러한 동기와 욕구와 요구들은 우리 내면에 침투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활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수도원의 수도원장은 그 수도원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인데, 어떤 젊은 수도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나를 자신의 진짜 아버지처럼 대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어렸을 때에 가졌던 권위적 존재와 정서적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나의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표면적 사고들에서 떠나면 자신의 동기에 대해 더 날카로운 지각을 갖게 되고, 그 때에 당신이 늘 의존하며 살던 가치 체계가(이전에는 솔직하고 완전하게 부딪쳐 보지 않았던) 어렸을 적의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신경질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관상 기도를 정규적으로 실천하면 당신의 정신적 건강에 대한 자연적 자원이 다시 살아나 당신의 삶에 해를 끼치는 거짓 가치관을 알아보게 된다. 당신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어릴 적의 정서적 반응 체제가 이제는 아주 명백하게 인식 속에 떠오르게 된다.

만일 당신의 정신 안에 당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떠나보내면 당신은 점차 하나님의 현존을 만나게 되고 또 그 현존을 즐기게 된다. 관상 기도가 주는 내적 역동은 자연적으로 당신의 전인격이 변형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 목적은 당신의 도덕을 향상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고 당신이 현실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변화도 가져다준다. 이러한 과정은 의식의 구조적인 변화도 포함한다.

당신의 내적 평화로부터 오는 안도감을 경험하면서 당신은 당신인격의 어두운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더욱 갖게 된다. 모든 인간은 거룩해질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낮은 의식의 수준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더 큰 삶,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자연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동물과 같은 본능적 행동의 성향, 그리고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자기 파괴적 성향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퇴행 상태에서 아무런 행복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인간 조건의 그러한 면은 늘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 풀턴 쉰 대주교는 "야만성은 우리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래에 있다."고 늘 말하여 왔다. 다른 말로 하면, 난폭함이나 다른 본능적 충동들이 씨앗으로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갖가지 악마처럼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은총이 우리 안에 완전히 흘러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성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관상기도는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신 분석에서, 환자는 과거의 충격적 경험들을 상기함으로써, 그것들을 더 건강하게 사는 행동 체제로 완성해 가게 한다. 당신이 관상 기도를 매일 충실히 하다 보면 이러한 정신적 상처는 당신에게 다시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치유될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기도를 여러 달하고 나면 어떤 강하고도 정서적인 사고들이 떠오름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당신의 어린 시절에 가졌던 충격적인 경험처럼 다시 나타나지도 않고 또 현재에 풀리지 않은 문제처럼 경험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기도 시간에 당신을 괴롭힐지라도 인간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사고들은 아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무의식의 내용들의 짐이 내려지기 시작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이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경험하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 산만뿐이어서 관상 기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실상은 당신이 그 정신 산만의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일어나서 기도를 끝내 버리려고 하지 않는 한 관상기도에 정신 산만 같은 것은 없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가졌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분심이 얼마나 많든, 어떠한 것이든 당신의 기도의 진지성에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이다. 만일 기도가 '사고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신의 묵상과 관계없는 이 사고들이 정말로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상은 사고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상은 순수한 믿음 속에서 당신의 의지가 하나님이 현존하심에 동의하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정서적 찌꺼기들을 털어 내는 데는 정서적으로 충전된 사고들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빈번한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으면서 당신의 결정에 많은 영향을 주던 정서적 갈등들이 당신이 지각하지 않은 사이에 풀린다. 그 결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당신은 아주 더 큰 행복감과 내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당신이 기도 시간 중에 안타깝게 느끼던 바로 그 사고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신경계에 쌓였던 마음의 상처에서 당신의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사고들과 침묵 그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설프긴 하지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어느 셋집에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제때에 쓰레기를 잘 치워 가지 않는다고 치자. 어떤 세든 사람은 부득이 아파트의 목욕탕에 쓰레기를 두게 된다. 이때에 목욕을 하려면 이 쓰레기들을 먼저 옮겨 놓아야 한다. 기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을 하면 성령께서 제일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정서적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을 완전히 채우시고 우리의 전 신체-영적 유기체를 변형시키고는 이 유기체를 하나님 사랑의 융통성 있는 도구로 삼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장애물이 있는 한은(그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를 온전히 채우지 못하신다. 그의 사랑과 열정으로 그분은 우리의 욕탕을 치우기 시작하신다. 이러한 일을 하시는 하나의 방법은 관상 기도의 작업으로 시작한 수동적 정화의 방법이다.

향심 기도(집중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화를 당신의 손으로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 지식의 과정을 마주 대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접촉하고 나아가서는 나의 참 자아와 접촉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당신이 지루하고 견디기 어렵다고 느껴서 조용히 앉아 사고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보다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더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이것은 마치 빗줄기 속에 우산도 없이 서서 몸이 흠뻑 젖어 드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투덜거려 봤자 소용이 없다. 당신은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길은 당신이 사고의 폭우 속에 빠져 드는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라. "비에 젖어도 좋다." 그리고는 그 비를 즐겨라. 어느 기간 동안의 기도가 좋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는 당신의 기도는 잘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생각할 때에는 그 기도는 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많은 사고들로 흠뻑 젖어서 어떻게 달리 할 수 없을 때, 그날의 기도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순순히 받아들여라. 당신이 몸부림을 덜 칠수록 그것은 더 빨리 지나가고 만다. 내일이나 며칠 후에는 더 잘될 것이다.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수련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당신 기도의 심리적 내용들을 중화시키는 태도를 개발하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사고를 가졌다 해도 거기에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기력을 하나님께 바치고 평화 속에서 그분의 현존을 기다려라. 당신이 참고 기다리면 그 사고들은 지나가고 만다.

여기에 기억할 만한 것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무의식의 짐을 덜어 내는 과정 중에 때로 특정한 미소나, 고통, 가려움, 혹은 강한 감정들이 일어나는데 당신은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심성 어디에서 오는지 알기를 원하고 또 이것들이 당신의 이전의 어떤 시절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덜어 내는 과정에서는 어떤 특정한 옛날 사건들과 관련짓지 않는 것이 이 과정의 특징이다. 말하자면 이 과정은 모든 찌꺼기들 그리고 복합적으로 떠오르는 심리적 폐기물들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이것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쓰레기 속에 있는 달걀 껍질과 오렌지 껍질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단지 그것들 전부를 던져 버려라. 아무도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하거나 그것들을 평가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 것을 하나의 쓰레기 자루에 넣어서 버리기만 하면 된다.

당신의 영적 성장과 직접 관련되어서 당신의 삶에 어떤 외적 어려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갖게 하고 또한 다른 가족과 친구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동정을 갖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하나의 길인 것이다.

무의식의 짐을 덜어 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한 안절부절못함, 육체적 고통,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정서들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일이 분 동안 그 고통스런 감정 위에 쉬면서 그 고통이 당신의 기도어가 되도록 허용하라. 다른 말로 하면, 정서를 떠나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하게 그 정서를 느끼는 것이다. 고통스런 정서들이나 심지어 어떤 육체적 고통도 그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에 소멸되는 경향이 있다.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다른 현상들은 가려움, 눈물, 웃음 등이다. 어떤 사람들은 향심 기도 중에 웃음의 발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전에 농담(joke)을 들었지만 그 때에는 어떤 마음이나 성격 상태 때문에 웃지 못했던 것이 이제 다시 생각나고 이제는 겸손해졌거나 자유로워져서 그것을 웃을 수가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옛날의 어떤 슬픔이 그 때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표현하도록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관상 기도는 당신의 삶에서 끝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끝내도록 도와서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감정이나 사고의 형태로 그 정서들이 표출되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정화의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다. 강하게 느끼는 두려움, 불안, 혹은 노여움 등이 현재의 경험과 무관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앉아서 견디어 내는 것이 그것들을 위로하는 것보다 더 이롭다. 「향심 기도(집중기도, 마음의 기도)의 목적평화를 체험하는 데 있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있는 장애를 비워 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영원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가 목적이 아니라, 관상의 상태가 수련의 목적이며, 어떠한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경험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신비스럽게 재구성하여서 오는 하나님 현존의 인식을 항구하게 지속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 삶의 어떤 시점에서, 한밤중일 수도 있고, 전철 속에서 혹은 기도 중에, 신경 계통과 정신 안에 마침내 필요한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 특정한 단계의 영적 여정은 그 스스로 해결을 가져와서 당신은 이전에 가졌던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의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정규적인 수련에서 오는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특정 체험을 목표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의식의 상태를 당신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를 기대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수련을 계속하면 결국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여정의 이 단계에서 가장 의미 있게 일어나는 일은 인격의 정감시스템에 평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정서가 왔다갔다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를 얻는데 그것은 그 정서의 변화를 갖게 했던 당신의 거짓자아(false self)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정서들은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나타나면서 그것들이 당신을 흥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참으로 내적 혼란에서의 놀라운 해방인 것이다.

어떤 정서적 경험 때문에 당신이 안절부절 못하고, 흥분을 느낄 때, 그냥 기다리는 것보다 더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은 없다. 언짢은 정서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밀어내려는 유혹을 크게 받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당신의 주의가 부드럽게 그 정서로 옮아가도록 허용하면서 그 정서 속에 잠기면 당신은 좋은 자쿠지(Jacuzzi : 물이 분출하도록 만든 욕조)에 들어간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껴안아 주시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느끼기만 하라.

당신이 만일 장님이었다가 시력을 회복하였다면 당신은 아주 추한 것도 감사하게 볼 것이다. 당신이 아무런 정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가 어느 정서를 느끼게 되면 유쾌하지 못한 정서라도 감격스럽게 느낄 것이다. 사실상 언짢은 정서란 없다. 다만 당신의 거짓자아가 그렇게 해석할 뿐이다. 극단적으로 정서가 교차하는 일은 그것을 그저 받아들임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이것을 실습하려면, 먼저 그 정서들을 알아보고 분간하여야 한다. "그래, 나는 화났다. 공포에 떨고 있다. 몹시 두렵다. 불안해하고 있다." 등등. 어떠한 감정이든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므로 어떤 점에서는, 죄 의식도 하나님에게서 온다. 만일 당신이 고통스런 감정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인 양, 껴안으면 당신은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떠나보냄"이란 말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떠나보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중요한 뉘앙스를 가진다. 만일 어떤 사고가 당신을 산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떠나보냄은 그 사고에 마음 쓰지 않음을 뜻한다. 만일 그 사고가 당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사고는 쉽사리 떠나가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그 사고에 파묻혀서 그 사고를 분간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계속 노력하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라. 관상 기도의 기본적인훈련은 떠나보내는 훈련이다.

이 다섯 번째 종류의 사고에 대하여 말한 것을 종합하면, 「관상 기도는 관상 기도가 지향하는 어떤 큰 실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성하는 전 과정의 일부인데, 이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의 수준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드릴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때는 평화롭지만 어떤 때는 사고와 정서들 때문에 매우 억눌리게도 된다. 두 가지 경험은 모두 완성과 치유의 같은 과정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경험들은 똑같이 평정과 감사의 마음과 또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모두는 변형의 과정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사고들이 계속 폭포처럼 쏟아져 괴로움을 당할 때, 거룩한 단어를 애써서 당신의 상상에 떠올리려고 하거나, 당신의 정신에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힘겹도록 그 단어를 되풀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정신 속으로 스며드는 어떠한 다른 사고들을 다루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그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어떠한 사고에도 저항하지 말구 매달리지 말고 또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라." 이것이 당신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다섯 가지 사고들을 다루는 적절한 반응들이다"


기도 중의 성찰

기도 중에 기도에 대한 어떤 체험이나 성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 후에 그것들을 되돌아 볼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눈물이 흐르거나 입에 미소를 띠었다든가, 눈썹이 씰룩하든가, 가려움이나 통증을 느끼게 되면 그것들을 다른 사고들과 똑같이 취급하라. 그래서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라. 이 기도는 내적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 위하여, 사고에 의존하는 우리의 인간적 성향을 떠나보내는 기술 습득이다. 그것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털어 버려야 한다. 우울하다는 생각이나, 기분이나 감정이 며칠 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의 심령이 일생동안 쌓였던 처리 안 된 정서적 잠재들을 비우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이 지나면 우리의 심리 상태는 호전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토하는 것과도 같다. 저녁 식사 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물론 불쾌하겠지만 토하고 나면 기분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물론 기도 시간 내내 어떤 신체적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당신은 실제로 어떤 병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의사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때로 이것들은 정서적인 것들이 당신의 신체 안에 꽈리를 틀고 있다가 풀어지면서 일시적인 통증이나, 눈물이나, 웃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기도 중에 폭소를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이전에는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무의식 속의 어떤 것에 부딪치고는 이제야 마침내 그 농담의 뜻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깊어지면서 자신의 인격 속에 숨어 있던 어두운 면을 인정할 능력이 각자의 알맞은 리듬에 따라서 생긴다. 좋은 정신 치료자는 환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상대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겸손과 신뢰가 깊어지면 인격의 어두운 면을 더 쉽게 인정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인간적인 가난함과 무기력함의 중심에 다다르게 되고 거기에 다다른 것을 즐겁게 생각하게 된다. 그때에 당신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의 자유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자신의 인격이나 재주에 대해 이기적이거나 집착적인 태도를 더 이상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다. 내적 자유가 바로 기도의 목표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자유, 참 자아로 사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변형되는 자유, 바로 그 자유 말이다.


마음의 상처의 치유

어떤 사람은 치유할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에 정적의 기도는 이러한 상처를 진정시키는 고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 그것이 중요한 효과의 하나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내적 침묵 속에서 성령은 은밀하게 우리의 영혼에 기름 발라(塗油)주시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신다고 가르쳤다.

영혼뿐이 아니고 신체도 치유하신다. 정신 신체적 질병(psychosomatic illness : 정신적 원인에서 생기는 신체적 질병)은 확실히 정서 생활에 평화가 왔을 때에 치유될 수 있다. (요삼 2절 참조)


향심기도(집중기도, 마음의 기도, 구심기도)

향심 기도의 방법은 단지 관상 기도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일 뿐이다. 일단 관상 기도의 경험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말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인 정신적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영장 물 속의 광선들을 상상해 보자. 그것들이 물에 닿을 때까지는 하나로 합쳐진 광선이었으나 물 속에서는 그것들이 한줄기 빛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물 속의 빛은 여기저기서 온다(난반사를 통해 : 역자 주). 그와 비슷하게, 관상기도 속에서 얻은 하나님 체험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해서 말하기 어렵다. 그것에 대해 말할 것이 적을수록, 더 하나님의 현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시야(視野) 밖에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경이롭게 보이지만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정서적인 먼지를 일으키지는 않게 된다. 영적인 여정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관상 기도가 매우 신비하게 보인다. 그 경험이 그들에게는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경험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구들의 거룩함을 남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감추시기 좋아하신다.


신적 일치

신적일치는 는 항상 일어난다. 무의식이 비워지면서 좀 더 성숙한 인간적 성품의 덕이 쌓아지고 결과적으로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감으로써 눈에 뜨이는 태도의 변화가 나타난다. 관상 기도에서 체험한 신적 일치는 항상 일어난다. 매일 생활에서 침묵의 순간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현실은 더욱 투명하게 보이고 하나님은 침묵의 순간들을 통하여 비추일 것이다.

무의식이 비워진 다음에는 기도 초기에 머리 속을 지나가던 사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그것을 방해할 장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며,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장애로 인해 현실을 적절히 연관 짓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 안의 모든 장애가 걷힌 다음, 하나님 현존의 빛이 언제나 우리의 영을 비추는데, 심지어 우리가 활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압도당하는 대신, 이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참 자아의 지배 하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마도 관상 기도의 발달 중 첫 단계는 우리의 일상적 심리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는 자각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단지 신체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또 사고와 감정으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말이다. 이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외적인 사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성질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영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다른 모든 현실의 부분을 이루어서, 열심히 활동하는 중에서도, 상황이나, 외적 사물이나, 혹은 우리의 감정과 사고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외부 현실에서 독립하고 또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경험은 절대적 독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참 자아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더 발전하면 또 다른 자각이 생긴다. 무의식의 창고가 비워졌을 때, 우리 내부의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은 모든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에도 이르게 한다. 이것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기초가 된다. 당신이 만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당신은 참 자아가 당신 안에서 표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인식하게 되고, 더 나아가 모든 이가 이러한 잠재력을 향유하고 있다는 자각도 얻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의 그리스도" 이것이 성숙한 크리스찬 공동체를 나타내는 좋은 표현이다. 당신보다 더 큰 어떤 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그 아름다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원천도 반영하게 된다. 이제는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어떠한 것과도 일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자발적으로 사랑을 보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인격, 인종, 국가, 성별, 신분 혹은 다른 특성들로(당신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보는 대신에, 이제는 아주 깊은 것, 즉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잠재적 초월성이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동정심을 가져온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사랑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만들고, 우리의 새로운 독립감은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가는데, 이 관계란 보통 일반적 관계와 같이 의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더 큰 자유로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닥치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적인 사랑은 옷을 입듯이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에 대해 반응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존재들(하나님이 존재이신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과 모든 섭리: 역자 주)과 맺는 올바른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계인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것 이상의 사랑을 가지지는 못한다. 일단 그 사랑을 받으면 현재 상황에 알맞은 방법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이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적 일치의 유지

하나님과의 일치의 상태를 하루 종일 유지하는 것이 관상 기도의 목적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기도가 발전하면서 후에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더욱 일치에 가까워 가고 있다는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감각에 영향을 주는 회상(回想)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의 상태로 몸을 준비시키라고 내가 하는 말의 뜻이다. 육체적 황홀경은 신체의 허약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의사소통에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감각의 포기 상태에서 신체로부터 탈혼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이미 거친 신비가는 신체적 황홀경을 경험하는 일이 적다. 그들은 신체적 상태와 이루는 영적인 교신 (communi- cation)을 잘 조화시켜서 이전처럼 불편한 상태를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하나님께서 주시는 교신)을 받아들일 만큼 신체가 강하게 된다.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만일 당신이 선(禪)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를 알고 있다면 열 번째의 소는 대오 각성(大悟覺醒)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것을 뜻함을 알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처음 시작한 삶과 이루게 된 삶 사이에 어떤 구별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며 다른 점은 이 평범성 안에 완전한 변형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된 것은 은총이 승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회상 속에 잠겨 드는 그러한 순간이 온다. 그 후 이 모든 것이 잘 조화를 이룬 다음에는 잠겨 드는 은총을 의식적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같은 은총이 주어진다. 이전에 하나님과 일치했던 정도 혹은 그 이상으로 평범한 일상 활동을 자유스럽게 영위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을 때에는 온전한 의미의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무슨 방법을 써야 한다.

존재함(being)과 행위함(doing)에는 차이가 있다. 일단 자신의 존재가 그리스도로 변형을 이룬 다음에는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내적 변형으로 도유(기름 부음)된다. 키딩은 이것이 마더 데레사의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카메라가 그분을 좇아가는 것은 그분의 신체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신비스런 마력을 발산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지만 그분의 영적 상태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그분의 행함이 아니라 그분의 변형된 존재의 상태가 그분의 매력이라는 뜻이다 : 역자 주). 이것이 바로 관상 기도가 이끌어 주는 변형의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인 발전의 낮은 수준에서는 매우 쉽게 지쳐 버린다. 그러나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도전이 따르는데 우리가 이 도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성모님보다 더 영적으로 성장하신 분은 없다. 그 이유는 그분의 성장을 막을 아무런 내적 장애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있어서 은총 안에서의 성장이란, 끊임없는 시련을 받으면서, 일상적인 인간적 조건 상태에서 성장하셨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분은 가장 무거운 시련을 받으셨다. 변형으로 일치하면, 덜 발전한 크리스찬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일 영적인 성장을 하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영적 성장을 쌓아가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이 거룩해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으시리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거룩해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거짓자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면 거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셨을 것이다.

이제 누가 내적 부활, 변형으로 일치함에 이르고, 더 이상 정서적 혼란을 겪지 않고 그것들이 모두 성덕으로 바뀌었다고 하자.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람들 속에 경이스러운 방법으로 살고 계시며, 그들 또한 그분과의 영원한 일치를 인식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각성의 상태를 버리고 이전에 그들이 감당했던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시련을 받으라고 하셨다고 치자. 그들의 하나님과의 일치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들의 정신 수준에서는 이 일치가 완전히 감추어진다. 이것이 대리적 고통(vicarious suffering)의 형태이다. 변형적 일치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짜표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완전한 고독과 적막의 생활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신적일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도적 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어떤 특수한 지향이나 혹은 전 인류를 위한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뜻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분의 신성한 위엄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신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의 변형된 인류애 때문에 그들의 고통들은 커다란 가치를 갖게 된다.

소화 데레사는 최후의 병상에서 그 때까지 큰 즐거움이었던 천국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즐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은 것으로 보아 변형적 일치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어렴풋이 인식했듯이 그녀는 그 당시의 불신자들 때문에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다. 데레사는 이성주의의 와중에서 살았고, 그 때는 인간적 지력을 숭배하는 데서 오는 오만함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영적 여정의 가장 큰 시련은 변형적 일치를 이룬 다음에 올 수 있다. 그렇다고 일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데 그것이 아주 순수하면, 빛줄기가 진공관을 통과하듯 그것을 감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닳는 가장 심오한 길인데, 바울이 말하듯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상태의 결과를 짊어지시려고 하나님이시기를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약함을 스스로 체험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려고 하나님과의 고유한 일치의 관계의 특권을 포기하셨다. 이러한 희생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요청에 따라 이 상태를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견디기 힘든 시련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의해서만 닳아질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신비가와 성인들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한번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면 그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삶이 된다. 그 삶은 경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확실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당신이 영적 여정에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당신의 모든 기대를 포기함으로써만이 아메리칸 인디언의 관상 기도 용어인 치유의 호수(Medicine Lake)에로 이끌릴 것이다.

관상 기도는 여러 가지 단계와 변천을 거치게 된다. 당신을 혼동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책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혹은 당신 자신의 인내를 통하여 도움을 주실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기도 한다. 어쩌면 불가능한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도록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상황을 평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영적 여정에서 상당히 앞설 것이다. 당신은 고독과 실존적 처절함에 부딪칠 것이다. 이 세상에 당신을 이해하거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며 하나님은 몇 억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준비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농부와 같이 당신 영혼의 땅에서 40배 60배가 아니라 100배의 수확을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신다. 그것은 땅이 잘 갈아져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위를 트랙터로 한 방향으로 그 다음에는 다음 방향으로 또 그 다음에는 빙빙 돌면서 땅을 가시는 것과 같다. 그분은 그 흙이 고운 모래같이 잘 갈아질 때까지 그러기를 거듭하신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씨를 뿌리신다.

아니면 자라나는 나무를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나무 기둥과 가지뿐이다. 그 후에 잎이 돋는다. 이때에 나무는 아름답게 보인다. 이때를 당신이 처음에 내적 침묵에 들어가기를 배운 때에 생기는 즐거움에 비길 수 있다. 잎이 난 뒤에 꽃이 피는데 이때가 깊은 만족의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꽃은 곧 시들고 땅에 떨어진다. 열매는 계절의 마지막에 열리는데 그것도 나무에서 익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나뭇잎이 돋아나고 꽃이 필 때 여정의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하지 말라. 영적 여정은 멀고 먼 여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여정은 당신의 체험이 순환함(cycling)을 보게 되는데, 이때에 처음에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가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느끼기도 할 것이다. 순환함은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당신이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층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독수리는 태양을 향해 빙글빙글 돌면서 제자리에 오지만 실은 수직상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른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으로 들어오는 거룩한 빛은 어둠의 빛줄기이다. 어두운 방에 비치는 빛줄기가 보이는 것은 먼지 때문이다. 만일 먼지가 없다면, 그 방을 통과하는 그 빛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관상 기도가 완전히 발전했다는 상징인데, 그 상태가 너무 순수해서 그것을 받는 이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변형이 진전하여 외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더 잘 나타낸다.

"관상 기도는 관상 상태에 이르게 해주는 학교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가 일치의 상태에 머물도록 해주신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 들어옴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어 주신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