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잠심과 분심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9 장 잠심과 분심

                       제1절 잠심(내적 침묵)        
                    1. 내적 침묵(잠심)의 필요성
                            2. 잠심의 걸림돌(욕심)        

                       제2절 분심(다양한 사고)
                            1. 보통 종류의 사고들
                            2.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3. 더 섬세한 종류의 사고들  
                            4.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1). 규칙적인 숨쉬기
                              2). 반복기도        
                              3). 몇 가지 실제적인 요점들


제 9 장      잠심과 분심

제1절 잠심(내적 침묵)        



제 9 장 잠심과 분심


제1절 잠심(내적 침묵)

1. 잠심 (침묵)

아프리카 어떤 곳에서는 성년식을 이렇게 행한다고 합니다. 성년식을 하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 그 아들을 두고 옵니다. 그 소년이 혼자 밤을 이겨내면 성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밀림 속에 혼자 남은 소년은 온갖 무서운 소리에 두려워 떱니다. 어둠이 깊어가면서 무섭고 두려운 마음은 점점 커져 갑니다. 소년은 그 긴긴 어두운 밤 내내 긴장하며 '일각이 여삼추' 같이 새벽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마침내 멀리서 동이터올 무렵에 어렴풋하게 누군가 옆에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칠까봐 밤새 움직이지도 않고 몰래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그 긴긴 밤 동안 자기 혼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자기와 함께 있었음'을 뒤늦게 알고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아들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아버지가 늘 자기와 함께 있음을 느끼며 두려움을 이겨 내면서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년식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늘 함께 있음'을 가슴에 새겨 주듯이, 예수님은 우리 곁에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을 우리 가슴에 새겨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 '하나님 현존'을 인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잠심' 뿐입니다. 잠심하여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 가슴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새겨지면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면서 살아갑니까?

이것을 좀 더 깊이 인식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살펴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위로입니다.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 위로해 주셨습니다(요 20:1-18). 둘째는 평화입니다. 문을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요 20:19-29). 셋째는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 28:19~20)고 약속하며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시고 그들을 파견하기 전까지 계속하셨던 또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성년식에서 소년의 아버지가 원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한 확신을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홍길동처럼 계속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현존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사도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확신시키는 데 40일이 걸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최소한 이만큼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늘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의식한 소년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듯이, 예수님이 내 옆에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우리도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은 예수님이 얼마나 깊이 내 안에 현존해 계시는가를 느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1).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음

중국의 한 황제가 왕자에게 통치자 교육을 시키기 위해 유명한 고승을 찾아서 아들을 맡겼습니다. 그 고승은 왕자를 산 속에 있는 암자에 두고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듣고 오너라" 하고 일렀습니다. 몇 년 후에 그는 스승을 찾아 "저는 이제 모든 소리를 듣고 동물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동물이 울면 그것이 어떤 동물인지, 새가 노래를 하면 어떤 새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불면 어떤 종류의 바람인지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또 다른 종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고 오너라" 하며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 그는 다시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다시 그는 스승을 찾아 "이제 저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스승은 "그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풀잎에서 이슬이 마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새싹이 움터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은 "바로 그것이니라. 좋은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들리지 않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느니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통치자가 되려면 들리지 않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상인으로 성공하려면 들리지 않는 소비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가능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슴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면,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더욱 깊은 수준에서 경청할 때 더 잘 듣고 더 잘 볼 수 있으며, 더욱 깊은 수준에서 침묵할 때 하나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들으면서 성장하는데, 첫째 다른 사람의 말을 귀로 듣는 일차적 들음이 있고, 둘째 자기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데, 그것은 모름지기 양심의 소리, 자기 소리를 스스로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소리는 초월한 저쪽으로부터 오는 소리.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소리 없는 소리, 그것은 풀포기에서 듣는 소리, 산과 강과 하늘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그 속에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잠심 상태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생각과 고민에서 벗어나 내부의식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침묵에 관심을 가지고 침묵에서 들으려 하는 자에게 더 잘 들리고, 보려 하는 자에게 더 잘 보이고, 사랑하려는 자에게 더 잘 느껴지는 하나님의 현존은 거듭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점차로 내면화되면서 더 높고 깊은 수준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옛 관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변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2). 하나님의 현존 체험을 위한 잠심

그러면 잠심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스코텍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누군가와 대화하려면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대화하기 힘듭니다. 그 속에서 대화를 하려면 음악보다 더 큰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상대방의 귀에 대고 말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생각을 멈추어야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TV로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TV, FM, AM방송의 주파수 영역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AM방송은 몇 백에서 몇 천KHz, FM방송은 몇 십에서 몇 백 MHz, TV방송은 몇에서 및 십 GHz에 맞추어야 듣고 볼 수 있습니다. 평화방송은 105.3MHz, 음악 방송은 93.IMHz, 교통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95.1MHz로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주파수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 주파수가 바로 잠심상태입니다.

잠심 상태에서는 우리의 뇌파가 낮아집니다. 보통 깨어있는 상태, 즉 물질계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느끼거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동 하고 의식할 때의 뇌파는 14- 2IHz 정도입니다. 반면에 긴장이 풀려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말하는 잠심 상태의 뇌파는 7-l4Hz이며, 기도나 무엇에 집중할 때 측정됩니다(그림 5. 6와 표 참조). 14Hz가까운 뇌파, 즉 몸이 긴장된 의식 집중상태에서는 영감이나 유연한 동작을 기대할 수 없고, 뇌는 긴장하는 방향으로 집중해 있으므로 조만간 불안하게 되어 많은 경우 잠심상태를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7Hz에 가까운 뇌파는 몸이 이완되어 기분도 안정되나 4Hz에 가까이가면

뇌파

심신의 상태

22Hz 이상

14-21Hz

 

 

7-14Hz

 

4-7Hz

1-4Hz

불안 및 흥분

깨어 있는 평상시의 뇌파 외계와 대응하여 긴장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의식적인 활동 상태. 물질계(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간, 공간)를 인식함.

주의 집중과 약간의 긴장(14Hz근처). 정신통일 상태 자연의 소리 청취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기도할 때.

깊은 명상 또는 졸음 상태 (4Hz 근처)

깊은 수면(무의식)

표 : 뇌파에 다른 심신의 상태

때로는 멍하게 되고 의식이 저하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뇌가 휴식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어 곧 수면 상태의 뇌파로 변하여 졸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5Hz에 가까운 뇌파에 머물러 있어야 몸도 이완(안정)되고 머리는 밝아 의식이 살아 있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잠심에 들었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화를 내면 21Hz이 넘어갑니다. 화를 내는 상태에서는 주위에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말해도 들리질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성적인 말로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제 정신으로, 즉 일상의 의식수준(14-21Hz)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내가 너무 화를 많이 냈지", 아니면 "화를 내서 미안하다"라는 식의 말을 건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식 수준의 뇌파에 머물면 잠심 상태의 뇌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리를 느끼기 위해서는 잠심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각, 촉각, 미각, 청각, 후각 등 다섯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물질세계를 판단하는 기능으로 볼 때 이 다섯 감각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북극의 자력을 감지하는 것은 나침반 밖에 없고, 먼 별에서부터 날아오는 에너지는 레이다 망원경이라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에는 지구 저편 어느 골방에서 진행하는 대화도 전파를 보내서 도청하고 촬영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감각기능 망에 하나님이 잡히지 않는다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미각은 맛밖에 모르고, 청각은 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듣지 못합니다. 수신기가 있어야 먼 곳에서 날아오는 전파를 잡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실존을 감지하려면 이 다섯 감각기능이 아닌 잠심 상태에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힘듭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며 서로 논의하였습니다. 논의 끝에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자"고 결정했습니다. 한 사람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은빛을 발하며 잔잔하게 뻗어 있는 밝은 호수가 마음의 평안을 상징한다고 그렸습니다. 다른 한사람은 이것과 대조되는 엉뚱한 그림을 그렀습니다. 그것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였습니다. 그 폭포 밑에 자작나무 숲이 있는데, 그 나무 위에 둥우리를 짓고 로빈새 한 마리가 물보라에 흠뻑 젖은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화가는 이 새의 모습이 바로 마음의 평안을 나타낸다고 그렸던 것입니다.

잠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잔잔한 호수 같은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한 것뿐이고, 비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밝게 보일 뿐입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고 비가 쏟아지면 그런 평안은 사라집니다. 진정한 잠심은 목포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잠심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잠심 상태에 지속적으로 잘 머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조건을 살펴보겠습니다.  

3. 잠심을 위한 외적 조건

잠심 상태에 잘 머물러 있기 위한 외적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입니다.

(1) 인내

우리는 소위 '자판기 문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서도 자판기 문화에 영향을 받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자판기에 돈을 넣고 내가 원하는 것이 나오면 고장이 나지 않은 것같이, 기도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으면 손이나 발로 차고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고장이라 생각하고 가듯이 기도하고 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고장 났다고, 즉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해 냉담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한두 번 기도하고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너무나 급한 성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솟구쳐 오르면 몇 번 기도해 보고, 아무 느낌이 없으면 그 열망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연속되는 실패를 마침내 성공으로 바꾼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832년에 실직자가 되었고, 그 해 하원의원 선거에 낙선하였습니다. 1833년에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836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도 그 해에 신경성 질환으로 고생했습니다. 1838년에 의장 출마에 낙선하였고, 1844년에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또 낙선했습니다. 1849년에 토지 등기소 직원으로 취직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854년에 부통령 지명권을 상실하였고, 1856년과 1858년 상원의원선거에서도 모두 낙선했습니다. 또 부통령 지명전에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860년 그는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우리가 뜻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가야합니다. 인내는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리며 땀 흘려 밭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역할 혼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역할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잠심 상태에 머무는 데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2) 여유

우리가 무엇이든 서두르는 문화권에 살기 때문에 일을 할 때는 빨리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는 되도록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느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정보만을 원하고 그것도 빨리 대답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기도에서는 정반대로 여유를 가지고 느리게 가야 잠심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즉석 사진 현상소에 달려가 사진을 뽑는 사람들이나, 한 시간 속성 세탁소에 가 옷을 세탁하는 사람들, 그리고 차를 탄 채로 식당 창구에서 아침 식사를 사 먹는 사람들이 여유를 갖기란 무척 힘들 것입니다. 하루 밤 사이에 배달되는 편지는 너무 늦는다고 생각하고, 팩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초조해하는 우리에게는 거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유를 갖고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현대는 무엇이든지 빨라야 하고 즉석에서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참고 기다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먹는 음식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낟알을 절구에 넣어서 껍질을 깐 다음 밥을 짓는 등 오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요즘은 만들어진 것들을 적당히 사서 상에 올리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편리함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귀한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도둑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의 온갖 축복을 다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다림 없이 귀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라도 기다림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자녀를 얻기 위해 어머니는 열 달 동안 말할 수 없는 기다림의 날들을 채우면서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목재를 얻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지나야 하고,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달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지만, 사람에게 인내의 고귀함을 가르치려고 기다림에서 열매를 얻도록 하십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늘 바쁘게 사느라 즐거움이 없다면 속도를 늦추십시오. 먼저 여유를 갖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 마음을 조급하게 하여 서두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오래 끄시는 것 같지만 결코 늦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여유입니다.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기도하면서도 수만가지 일을 떠올리게 되어 머리로 생각하고 정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멈추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둘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가볍게 허공을 나는 깃털처럼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때 진정한 침묵의 상태에 머무르게 될 수 있습니다.

(3) 갈망

아이를 넷이나 키운 어떤 부부는 아이 울음소리를 식별하는 데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이 두 가지를 '가짜 울음'과 '진짜 울음'으로 구별하여 부릅니다. 가짜 울음은 어린 아이가 잠자다가 뒤척거리면서 칭얼칭얼 울어대는 소리입니다. 이러한 울음소리는 별로 크지 않고 간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부모는 즉시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칭얼거리다가 곧 잠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울음은 다릅니다. 이 울음소리는 아주 크고 진지하며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이렇게 울기 시작하면 이 부부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급하게 일어나 아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이 경우 어린 아이는 자기 바람이 만족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큰 소리로 울어대기 때문입니다.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세 번째 요소가 갈망입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의 울음소리를 식별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우리의 간절한 소리를 얼마나 잘 구별하시겠습니까! 누구든 간절한 열망이 있으면 쉽게 잠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 울음소리와 같이 건성으로 임한다면 잠심에 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왕을 찾아가 자신은 쉽게 흔들리고 유혹을 참지 못하니 그것을 이겨 내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에 있던 포도주 잔을 그 젊은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그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르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이제 이 젊은이가 포도주 잔을 들고 거리를 한 바퀴 돌텐데, 너는 칼을 들고 그 뒤에 있다가 만일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그 즉시 목을 베어 버려라!" 거리로 나간 젊은이가 진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걸어 무사히 왕궁까지 돌아오자 왕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거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해 보아라."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왕은 다시 "거리에서 떠드는 아이들, 시장에서 떠드는 장사꾼들 그런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하며 성이 난 뜻이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는 말했습니다. "예,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제야 왕은 인자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그에게 충고했습니다. "그것이 네가 알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는 비결이다. 네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포도주 잔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인생의 곧은 길을 자신 있게 나가려고 노력한다면 유혹의 손길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너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포도주를 흘리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온 정신을 한 곳에 쏟는다면 잠심에 한층 쉽게 들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잠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할 때 여유를 가지고 되도록 천천히 잠심에 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갈망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슴에 간직하여 기도에 임한다면 날로 깊은 잠심에 이를 수가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 현존 체험이 깊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현존 체험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과의 관계가 더 친밀하게 변화됩니다. 신앙이 성장했는가 또는 우리의 신앙체험이 정말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판단기준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자랐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열망은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일반적인 열망이고 하나님에 대한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잠심을 위한 외적인 조건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인데,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체득해야 합니다. 체득할 때 더 이상 우리는 인내할 필요도 없고, 여유를 가질 필요도, 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체득하면 내가 하는 행위 자체에서 인내와 여유와 갈망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버려라"고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는 사라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체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체득할 때 잠심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자연스럽게 체험될 수 있습니다.

4). 잠심을 위한 내적 조건

이제 잠심 상태에 잘 머물러 있기 위한 내적 조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침묵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인데, 그것은 심리적인 것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 사고(思考)와 소음이 일어날 때 그것에 대꾸하거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고 나의 감정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기도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와 여유와 갈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내적 사고와 소음이 줄어든 내적 침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 중에 흥미를 끄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이것들이 기도 중에는 아주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 같아서 그것을 좇아서 생각하고 상상하게 되는데, 끝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 보이는 것들도 흘려보내야 합니다.

옛날 한 수도승이 올리브 묘목을 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연약한 뿌리가 자랄 수 있는 비가 필요하니, 단비를 내려 주소서." 하나님께서는 단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 수도승은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나무는 태양이 필요합니다. 당신께 기도드리오니 해를 주소서." 그러자 검은 구름을 몰아내고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오! 하나님, 이 나무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서리가 필요하니, 서리를 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작은 나무에 서리가 않아 번쩍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저녁에 죽어버렸습니다.

그 수도승은 동료 수도승의 방을 찾아가, 자신의 이상한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도 작은 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있습니다." 동료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나무는 잘 자랍니다. 나는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분은 나무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한정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이 나무에게 필요한 것을 주소서. 햇빛이든, 바람이든, 비든, 서리든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주소서. 주께서는 이것을 만드셨고, 그리고 잘 아시나이다'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올리브 묘목에 아무리 단비와 서리가 필요해 보여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기도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붙잡고 싶어도 붙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까운 생각이 들더라도 무관심하게 흘려보내면 모두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려 하거나 없애버리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들어오면 들어오게 하고, 나가려고 하면 나가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생겨날 때 다시 잠심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현존 아래 대화를 청하고 그분과의 일치를 깊이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현존 아래 있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 모욕, 멸시와 업신여김을 당하더라도 자책감이나 복수심이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러한 훈련, 즉 하나님 현존을 체험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면서 어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생각과 상상이 끊임없이 나에게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적절한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 해결하려고 파헤치면 나오기가 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나 상상이 흘러가게끔 노력하고, 이것이 어느 정도 체득되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겨 내려는 노력 속에는 이기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거룩한 욕심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조차도 버려야 합니다. 이것들이 사라지면 기도 중에는 하나님의 현존만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가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고 애쓰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생각이나 상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 현존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렇게 되는지를 걱정합니다. 이 걱정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영국의 어느 병원에서 환자 5백 명을 조사한 뒤 시각장애의 30% 가량이 정신적인 긴장으로부터 유발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포스딕 박사는 걱정하면 침의 분비가 억제되고 그로 인해 입 속의 타액이 자연적으로 중성이 되지 못함으로써 충치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또한 21개의 대학에 다니는 5천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걱정하는 학생은 성적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걱정은 기도를 못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케 합니다. 만일 우리의 근심거리를 구체적인 목록으로 작성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모호하고 무익한 것을 가지고 근심했는가 이해하게 되어 쉽게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근심하는 것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지고 근심하는 것이 전체의 40%, 근심한다고 해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일을 가지고 근심하는 것이 30%, 불필요한 건강 걱정이 12%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시한 잡동사니에 대해서가 10%라고 합니다. 진실로 근심해야 될 일을 가지고 근심하는 경우는 8%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면 하나님의 현존이 체험되는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思考)나 상상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소년이 무거운 돌덩이를 들어 올리려고 한참이나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옆을 지나던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아들의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있는 힘을 다 쏟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예, 아버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 속에는 격분 같은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니다. 너는 힘을 다 쏟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한 일이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하기에 앞서 잠시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협력을 청하면,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능히 이를 타개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대로 일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과의 일치도 한층 완전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기대도 집착도 욕망도 전혀 없습니다.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영적인 위안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영적인 위안이란 없을 것입니다. 집착과 욕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위안이 당신에게로 밀려옴을 느끼고, 그 때가 바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순간입니다.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완전하게 하나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2. 잠심의 걸림돌 - 욕심

우리의 잠심 상태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은 우리의 내부의식을 분리시켜 우리가 잠심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어떤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던 그 선생님은 그 사람을 창가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길이 보이고, 나무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모습만 보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창유리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의 유리에는 그대의 모습만 보일까요? 그것은 거울의 유리 뒤에 칠한 은분 때문에 남을 못 보고 나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뒤에 칠해진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고 우리 마음을 창의 유리처럼 밝게 닦아야 이웃이 보이고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새로운 세상이란 마음의 창, 즉 내면의 유리창을 깨끗이 닦고, 그 창을 통하여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보는 그런 세상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깨끗한 유리창과 같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리창에 하나씩 얼룩이 지기 시작합니다. 타인이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상처받을 때마다 유리창의 얼룩은 늘어납니다. 그러면 그 깨끗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던 빛은 점차 투명한 빛이 아니라 얼룩진 빛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즉 사물을 볼 때 투명하고 깨끗하게 보지 못하고 얼룩을 통해 보게 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유리창의 얼룩을 지워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상처가 정화되고 치유되어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리창에 얼룩이 처음 묻었을 때는 쉽게 지울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룩은 굳어져서 지우기가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신념이 내면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룩진 유리를 통해서 보면 제대로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게 되고, 소리도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게 됩니다. 나아가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파당이 생겨 갈라지고 찢겨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때 각자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거나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첫째 얼룩이 있음을 인식하고, 둘째 그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즉 화, 분노, 자애심, 자존심, 욕심 등 어느 것으로 인해 얼룩이 생겼는지 그 뿌리를 보는 것입니다. 뿌리를 보았으면, 셋째 그 얼룩을 지우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얼룩을 지우는 일은 얼룩이 생긴 시간의 두 배는 족히 들 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얼룩이 지워지면 새로운 빛이 나에게 밀려옴을 느끼면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들어오게 됩니다.

본래 깨끗한 유리창 같은 우리 마음에 먼지가 묻어 있다 해도 먼지가 유리의 순수함을 파괴하진 못합니다. 단지 그 순수함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마음 상태이고 모습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묻은 먼지와 자신을 동일시 해 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경험, 과거의 기억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먼지들입니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경험 이전의 상태, 지식도, 기억도, 과거도 없는 순수한 본래의 상태로 가서 '참나'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은 먼지이지만 그 지식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이 없는 '참나'입니다. 과거의 노예가 되어 지식과 경험이 마음을 덮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현재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얼룩진 유리창을 통해서 밖을 제대로 볼 수 없듯이, 우리의 과거 때문에 현재의 실상을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불변하는 본질인 바다위에서 파도는 여러 모습과 크기로, 갖가지 파장으로 반복하여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모든 현상의 본질, 하나의 바탕은 바다입니다. 마음속은 티끌 하나도 없는 깨끗하고 고요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마음에 욕심이 일면 세계는 욕심의 세계가 되고, 분노가 일면 세계는 분노의 세계가 됩니다. 고통도 내 마음속에 있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좋아하는 것을 얻으면 쾌락을 느끼고, 싫어하는 것을 만나면 고통을 느낍니다. 따라서 마음속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두지 않고 행하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청정하게 되어 온갖 것이 없어지면 악한 것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 의식만이 또렷이 있을 때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마음속에는 탐욕도 분노도 없으며 편견도 고집도 없습니다. 일체 사물이 평등하여 아름답고 추한 것도 차별하지 않으며 선하고 악한 것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티끌도 없고 사념도 없는 '참나'를 찾게 됩니다. 결국 사랑 안에서 내 중심적인 모든 세속적인 감각과 욕심과 애착이 정화되면 '참나'를 알게 되고,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맛(느낌)에 머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일치하게 됩니다.

궁수가 재미로 활을 쓸 때 그의 온 기술을 다해서 쏩니다. 만일 금메달을 얻기 위해 쓴다면, 신경과민 증세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금메달에 마음을 쏟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술은 변함없으나 금메달이라는 상 때문에 그는 활을 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에 신경을 더 써서 스스로 분열됩니다. 그래서 이겨야 할 필요성이 그의 힘을 고갈시켜 버립니다. 이처럼 욕심은 우리 자신을 분열시킵니다. 만일 사람이 돈이나 명예 등을 위해 경쟁한다면, 또 성취해야 할 어떤 결과에 지나친 욕망을 갖게 된다면, 그는 어느새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잠심하려면 걸림돌이 되는 이 욕심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옛날 함경북도 성진시 앞바다에는 자석광구가 있어서 그곳을 지나가던 배가 자주 침몰하거나 큰 위험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 근방에 오면 배의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아 방향을 잃고 배회하다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다는 것입니다. 철광이 많은 곳을 통과하거나 해저에 큰 철물이 있을 때에는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작은 배가 인생 항해를 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하는 양심이 황금의 자석 광구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욕심의 철광 사이를 통과할 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배는 좌초되거나 큰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침반에 자화방지 장치를 하듯이,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라는 우리의 욕심을 끊어버릴 때 우리의 인생은 좌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욕심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단 욕심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욕심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뿌리를 알게 됩니다. 그 뿌리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경험'입니다 과거의 경험이한(恨)으로 바뀌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됩니다. 두 번째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납니다. 세 번째는' 경쟁과 비교' 인데, 비교 대상이 아닌 인간을 서로 비교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1). 과거 경험

과거 경험이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형성된 자신의 틀이나 관념을 말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틀 안으로 대상이 들어오기 때문에,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려면 내 틀을 버려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형성시킨 틀 즉 과거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화, 치유 또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진주를 선물로 주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진주를 흔히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눈물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진주는 땅에서 캐내지 않는 유일한 보석으로 진주조개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진주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진주조개는 '나카'라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게 됩니다. 만약 진주조개가 모래알의 침입을 무시하고 나카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시련이 없는 인생이 쉽게 병들듯이, 진주조개 역시 곧 병들어 죽고 만다고 합니다.

진주조개가 모래알을 진주로 바꾸듯이, 과거의 경험이 잘 정화되면 거룩한 경험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과거 경험을 진주로 만드느냐 돌로 만드느냐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먼저 진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일은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분하여 껍데기를 없애는 일입니다. 내 경험으로 형성된 것들은 껍데기이고, '참나'는 알맹이입니다. 껍데기를 없애 버릴 때 알맹이를 볼 수 있듯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경험에서 해방될 때 '참나'를 만나게 됩니다. 과거의 경험이 거룩한 경험으로 승화될 때 우리는 과거 경험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러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있는 그대로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들어오면 측은한 마음이 내 안에 생기고 대상을 위한 사랑의 행위가 자연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껍데기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내 안에서 욕심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욕심에서 해방되는 때가 바로 그 경험 이전의 나, 즉 '참나'를 발견하게 되는 때입니다. 내가 불행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은 껍데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껍데기만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상대의 속을 보아야 하는데, 겉에 나타나는 껍데기에 신경을 쓰고 껍데기를 보고 껍데기만을 판단하면, '참다운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과거 경험에서 해방되어 선입견을 버리고 그 속에 있는 알맹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 껍데기를 알아차리면 우리의 유리창에 있는 얼룩이 닦이는데, 그 때에 바로 정화되고 치유된 상태인 '참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대상이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고, 사랑이 시작되며,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결국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려면 껍질은 깨져야합니다. 곡식이 부서져야 방이 되고, 포도주나 향수도 열매가 부서져서 만들어집니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을 갖추려면 충분히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낟알(참나)을 얻으려면 껍질을 깨뜨려야 하는 고통이 따르듯이, 영원한 생명의 짝이자 하나님의 씨앗을 얻기 위해서도 과거 경험이라는 껍질을 깨뜨려야 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과거 경험이라는 껍질 속에 감추어진 거대한 힘, 즉 하나님의 씨앗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 의지를 포기하고 내 자신의 뜻을 가지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떠한 일에나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을 부인하면서 하나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기적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한다면, 부든 명예든 무엇을 갖고 있든지 간에, 그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 16:24)고 하였듯이, 우리 자신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즉 우리 행동에서 얼마만큼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완전한 자아포기(kenosis)입니다. 이 자아포기는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 같은 인간적인 기능을 넘어서 단순히 하나님 안에 머무름을 의미하며, 욕심이 사라지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 그 자체가 중요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많은 활동으로 말미암아 기도 안에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버리는 것이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정보사회에서 발생되는 관념화 때문에 우리는 관념에 의존하게 되어 인간적인 투사(投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관념화나 투사는 하나님을 하나님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자신의 관점이나 개념이나 상상에 비추어 보는 위험이 따릅니다. 이러한 과거 경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관념화 등은 우리와 대상 사이에서 필터(유리창의 얼룩)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들어오고, 있는 그대로 대상 쪽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바로 과거 경험을 통해 오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2).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

욕심이 생기는 두 번째 뿌리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자신의 신체조건, 능력, 재능, 본능, 문화, 전통, 종교 등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요즈음 수세식 화장실, 욕조와 샤워 등은 필요한 최소한의 문화시설로 꼽히며, 우리는 이것들이 골고루 갖추어진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일부 왕족이나 귀족들이 아니면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조선 시대의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는 왕이나 왕비들까지도 궁궐 후원에 차일을 치고 하늘을 지붕 삼아 목욕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특권 계층만 풍요로운 문화시설을 즐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다수 사람들이 그 옛날 어떤 특권 계층의 사람도 누리지 못했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밟기만 하면 붕붕 날아갈 듯 치달리는 승용차를 진시황제인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회의 요구와 내가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월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자신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감이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고,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맞는 땅을 찾고 거기에 맞는 식물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나(껍데기)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알맹이)를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미소하다 할지라도 감사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없는,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유함을 찾을 때 더 이상 환경으로부터 오는 욕심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3). 경쟁과 비교

세 번째 뿌리는 경쟁과 비교로, 나와 다른 것을 비교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남을 비교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비교하고, 행복과 불행을 비교하고, 슬픔과 기쁨을 비교합니다. 이러한 비교로 물질적인 진보나 어느 정도의 영적인 향상을 이를 수도 있지만, 한층 깊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본디 하나였던 것을 구분하게 되면 그 구분이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어느 도시에 경쟁 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온 신경을 썼습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어느 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는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천사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 열 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이십 개를 얻게 될 것이오." 그 다음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니 이제는 화해하시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지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위의 예는 비교와 경쟁이 빛어낸 최악의 상태일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쟁과 비교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고 나로부터 흘러가고 지나가게 해야 합니다. '새옹지마' 고사에 나오는 노인의 태도처럼 슬픔과 기쁨이 지나가고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을 잡거나 흘러가는 것을 멈추게 하지 않고 나를 투과해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연한 태도가 비교와 경쟁을 없앨 수 있습니다. 물결이 없는 고요한 물처럼, 또는 물 위에 나무토막을 띄어 놓고 그냥 그 물결에 맡기듯이, 그렇게 내 가슴속에서 나오는 것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욕심은 더 이상 내 안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삶에서 그 욕심을 다스리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때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듯이, 우리 삶의 모든 에너지는 낭비 없이 새롭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뀌게 됩니다. 욕심의 지배를 받을 때 상처를 받지만, 내가 욕심을 지배할 때 욕심은 사라집니다. 그때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서 하는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고, 슬픔과 기쁨이 없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일이고 내 할 일이고, 그것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의 내가 아닌 알맹이의 나를 알게 되면, 경쟁과 비교에서 욕심은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욕심에서 제대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비움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육화 사건에서 예수님의 '비움의 삶'은 드러납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개를 구원하기 위해 개가 될 사람이 있으며, 뱀을 구원하기 위해 뱀이 될 사람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은 우리를 동요시켜, 현재에는 우리 마음의 표면에 파도를 일으키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욕심을 없애야 우리는 비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욕심을 없애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태풍에 비유한다면, 욕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마음을 밖으로 향해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는 것입니다.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음을 안으로 향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태풍의 눈, 즉 고요함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욕심 그 자체에 초점을 두어 욕심을 없애야 합니다. 태풍의 중심에는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고요한 중심이 있어야 태풍이 존재할 수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 지어내는 온갖 생각도 그것들의 중심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일어날 때 욕심을 억눌러서 없애려고 한다면, 그것은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욕심이 존재하도록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거기에 휩싸이지도 말고, 그것을 억압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놔두십시오, 즉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모욕할 때 그 말을 듣고 있는 당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단지 듣기만 하십시오. 그 사람은 당신을 욕하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당신을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욕이든, 칭찬이든, 명예나 불명예든 단지 듣기만 하십시오. 그것이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이 안으로 향하는 것이며, 고요함을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주변은 반응을 일으키며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 역시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그 상태를 바꾸지 말고, 그저 바라보십시오. 태풍의 중심에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의 중심에 깊이 들어앉아서 말입니다. 아무리 모욕적인 일을 당한 순간이라도 거기에 개입하지 말고 사람들이 당신에게 모욕을 주는 장면을 느긋하게 구경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객관화'시키는 것이고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태풍의 안에서 상승기류가 일어나듯이, 홀로 존재하는 의식을 깨닫게 되면 초월이 일어납니다. 모든 욕심들이 사라지는 그 때가 기도의 진정한 맛을 들이는 때이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도에 맛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욕심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제2절 분심(다양한 사고)

1. 보통 종류의 사고들

관상의 이 초기 단계에서 사고(思考)들 때문에 큰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과 그 사고들의 형태들을 분간하는 것이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하여 중요하게 된다.

가장 쉽게 분간되는 것은 보통의 산만한 상상들이다.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으려고 목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내적 침묵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상대적 침묵을 말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적 침묵을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도시의 번화가의 7층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누구와 대화를 한다고 치자.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동차 소음이 들려온다. 아마도 당신은 이 소음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때에 이 소음에 지겨운 생각이 들어 "왜 조용히 하지 못할까?"라고 한다든지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당신들 조용히 하시오!" 하고 소리친다면 결과는 당신의 대화가 중단되는 것 이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만일 당신이 그 소음을 무시하고 대화를 계속한다면 그 소음에 주의를 주지 않는 힘이 길러질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상상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그 상상들이 당신의 내적 세계의 현실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만일 그렇게 받아들이면 그 상상들은 당신의 내면에서 점점 의미를 잃어 갈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그 소음이 출퇴근 시간에 더욱 커지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 당신은 이때에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당신은 때때로 무수한 잡된 상상으로 기도 시간 내내 시달리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기도가 좋지 않았다거나 내적 침묵으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에 정진하다보면 당신은 새로운 습관 새로운 능력이 개발될 것인데 그중의 하나가 동시에 두 개의 의식 수준에서 의식하는 능력이다. 당신은 주위의 소음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주의가 어떤 깊은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터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는지는 몰라도 이것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은 멀지 않아 외부의 소음에 대하여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둘레에 벽을 쌓을 수 있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소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소음은 당신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이것들과 싸우고 씨름하고 혹은 그 소음들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면 당신은 어떤 특정한 소음에 사로잡히고 말게 된다. 당신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겠지만 점차로 당신 주변에서 소음이 일더라도 깊은 수준에서 즐거운 침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토마스 키딩) 뉴욕의 제3가 전철이 헐리기 얼마 전에 그 전철 위에 사는 어떤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아파트에서 철로가 내려다보였고 때때로 전철이 큰 소리를 내며 거기를 지나가곤 하였다. 나는 정신이 아찔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철이 마치 거실로 달려드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가족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철이 지나갈 때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를 잠시 멈추곤 하였다. 전철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하던 바로 그 내용을 이어 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귀를 막는 습관을 자신의 생활 속에 형성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화의 중단뿐만 아니라 대화의 끝장도 가져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머리 속에서 소란을 피우는 상상들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때는 아주 좋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들은 "내적 침묵과 관상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도저히 내 머리를 지나가는 끝없는 잡념을 참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리를 걷고 일어나고 만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일 조금만 더 참고 기도에 매달리면 그들도 소음에 익숙해질 것이다.

향심기도를 습관적으로 계속하면 점차 내적 소음이 줄어들 것이다. 처음에는 끝없는 사고들로 해서 지치기도 할 것이다. 향심기도나 다른 마음의 평정 방법을 써 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실재로 얼마나 많은 사고들을 가지고 있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평정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 우리의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우스꽝스런 사고들이 들어차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 사고들 때문에 겁을 먹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일상적으로 흐르는 그들의 피상적인 사고들을 참아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가장 알맞은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하루 중에 전화라든가 기타 예측할 수 있는 다른 방해가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택한다. 예수님께서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 충고를 받아들인다. 만일 집안에 어린 아이들이 뛰어 돌아다닌다면 조용한 시간이나 장소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욕탕만이 가장 조용한 곳일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당신은 가장 방해를 적게 받을 시간과 장소를 택하라. 잔디 깎는 기계나 비행기의 소음 같은 것들은 내적 침묵에 통합될 수 있지만, 큰 소리로 하는 대화와 같이 지성과 상상을 요구하는 소음들은 다루기가 몹시 힘들다.

요약하여,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상상들에 대한 가장 좋은 반응은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짜증이나 불쾌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감정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응답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순간에 실제로 있는 일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만한 상상이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당신이 평정으로 들어가기를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사고들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결책은 마음을 완전히 공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향심기도의 전 기간 중에 우리는 내적 침묵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한다. 기도자의 내적 주의(注意)는 바람이 자는 날에 풍선이 땅에 닿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오고 그러면 풍선은 다시 떠오른다. 이와 비슷하게 향심기도 중에는 가장 즐거운 침묵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에 감질나게 튀어나오는 순간을 맛보는 경우들이 있다. 이때가 바로 어떤 원치 않는 사고들이 의식 속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이때에 침묵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언짢게 생각하지 말고 사고를 받아들이는 데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 그저 단순히 다시 시작하라. 이와 같은 끊임없는 인내와 평정과 받아들임은 우리 전 인생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을 취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 현실을 바꾸어 버리거나 통제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이 기도 중에 의식의 흐름 속으로 두 번째 종류의 사고가 끼어드는데, 그것은 당신의 산만한 상상 중에 어떤 특정한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정서로 충전된 사고나 상상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왔건 당신의 상상으로 왔든 간에 당신의 식욕 계통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일으킨다. 그 상상이 유쾌한 것이냐 불쾌한 것이냐에 따라 동시적으로 좋아함과 싫어함의 감정이 일어난다. 만일 당신이 어느 특정한 사고나 거기에 따른 감각을 알아차리게 되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감이 적절하다. 이렇게 하여 당신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드리고 그분께 맡겨 드리려는 원래의 지향을 도로 찾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의식은 흐르는 큰 강과 같아서 피상적인 사고들이나 경험들이 마치 배나, 잡물이나, 수상 스키하는 사람들이 그 표면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 강 자체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존재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주신 것이다. 우리의 바로 그 부분에 다른 모든 기능들이 머물고 있지만, 우리가 강의 표면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에 이것을 평소에 잘 인식하지 못한다.

향심기도 중에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강 표면의 보트나 다른 물건들에서부터 그 강 자체로 돌리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우리의 모든 기능들이 지탱하고 있으며 또 거기에 원천이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강은 어떤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며 한계가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배에 흥미를 느끼고 그 배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고 한다. 당신은 애초의 지향(하나님께로 향하는)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이때에 당신은 강의 표면에서 강 자체로 특수 부분에서 전체로 유형에서 무형으로 그리고 상상(想像)에서 무상(無像)으로 당신의 주의를 계속해서 돌려야 한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는다는 나의 원래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제 시내 중심가의 7층 사무실에서 친구와 대화하는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출퇴근 시간에는 경적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당신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궁금해 하면 당신의 주의는 대화에서부터 떨어져 나온다. 예의상 당신은 주의를 새롭게 대화로 돌려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실례 한다" 혹은 "내가 말하던 것처럼"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 친구를 바라본다. 다시 말해 당신의 대화로 돌아간다는 간단한 동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투거나, 소음을 멈추게 하거나, 소음을 막아 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원래의 지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향심기도 중에, 당신이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단순히 그 주의를 하나님께로 돌린다. 이러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표시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거룩한 단어가 마치 마음을 비워 주는 요술이나 되는 것처럼 이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거나 이 단어를 당신의 의식 속에 강제로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옴으로써 당신은 하나님과의 대화로 돌아오고 그분과의 일치를 바란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복(承服)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힘겹게 애쓰면서 하지 말라. 과잉 반응은 역 생산적이다. 아무도 잔디를 불도저로 깎지는 않는다. 파리를 쫓기 위해서는 당신의 손만 흔들면 되는 것이다. 향심기도에서 당신의 지향을 참을성 있게 새롭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어떤 기능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임을 명심하라. 이 기도에서 침묵으로 당신을 준비시켜라. 그러면 기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당신의 문제로 삼으면 당신은 즉각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무엇보다도 순수한 믿음이 당신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체험에 매달리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인 것이다. 향심기도 시간은 당신의 모든 사고 -심지어 아주 좋은 사고라도 그것을 떠나보내는 시간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좋은 사고였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신비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 약물을 쓰는 것은 어떤가?

어떤 이들은 영적인 경험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취하게 하는 약물을 쓰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어떤 수련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데 약물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떤 동방적 묵상의 강력한 방법들처럼 약물이 자신의 감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것들을 무의식에서 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LSD를 흡입한 어떤 사람들은 약물로 인해서 자신의 무의식에서 풀려 나온 어떤 심리 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2.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의지의 행위 중에 가장 으뜸가는 행위는 노력이 아니라 동의(同意)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비결은 그 어려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지란 유효성이라기보다는 정서성이다. 어떤 일을 의지의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적절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기적인 습관들이 의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자유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심에, 그리고 은총이 흘러 들어옴에 대해 더욱 동의하도록 의지는 활동한다. 하나님이 더 활동하시고 당신이 덜 활동할 수륵 기도는 더 잘된다. 처음에는 거룩한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여야함을 의식할 것이다. 이것을 더 잘 표현하려면, 이러한 의지의 황동은 단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 혹은 인식 속에 거룩한 단어를 살짝 얹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의지가 섬세하게 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상징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에 계속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이미 내 안에 현존하시므로 그 분을 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상징이다. 결국에 가서, 의지는 그 상징이 없이도 동의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기도 중에 의지가 하는 일은 정말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을 받아들임, 이것이 관상 기도 중에 하는 으뜸가는 일인 것이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360도로 하나님에 우리를 열어 드리는 방법이다. 자신을 하나님에 승복시키는 일은 동의 중에서도 더욱 발전된 동의라 할 수 있다. 변형(變形)은 완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변형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변형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은 할 수 있다.

이 기도가 습관화되면, 신비스러우며 분간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평화스런 하나님의 현존이 당신 내면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 일단 한번 형성되면 그 고요한 현존은 항상 거기 머물러 계시며 그 현존이 바로기도의 방법이 된다.

처음에는 우리는 기도를 할 때 기대감과 선입견을 가진 우리의 거짓 자아를 기도 속에 불러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도를 가르치면서 노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노력(effort)이라는 단어는 즉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기준이 애써서(try) 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해 버린다. 애쓴다(try)함은 관상 기도의 성장에 있어서 필요한 수용성(受容性, receptivi)이라는 기본적 조건을 무산시켜 버린다. 수용은 무위(無爲, inactivity)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활동이지만 통상적 의미로 생각하는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닌 활동이다. 당신이 이것을 구태여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노력은 다른 종류의 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이것은 '절대 신비이신 분'을 기다린다는 단순한 태도이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믿음이 순수해지면 이것을 알려고 들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은 죽도록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그분을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무엇을 기대하는 일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여정은 무지(無知, unknown)로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모든 정신 구조와 심리적 안전장치와 심지어 지주(支柱) 노릇을 하던 영적 수련도 떠나서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이다. 거짓 자아 체제를 구성하는 것 모두를 뒤로 남겨 두고 떠나는 여정이다. 겸손이란 자신을 잊어버림이다. 자신을 잊는 것이 이 땅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거짓 자아를 끝나게 해주실 수 있다. 거짓 자아는 허상(虛像)이다. 이것(거짓 자아)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상은 어떠한 것인가를 인지(認知)하는 방식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그것을 완전하게 얻을 것이다. "(마 10:39)라고 하셨으며 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즉 거짓 자아)을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 16:24)고 하셨다.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가셨다. 거기서 그분은 자신의 신․인적 자아(Divine-Human Self) 마저 희생하셨다.

크리스찬이 그리스도와 개인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나머지 여정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크리스찬의 영적 훈련은 먼저 거짓 자아를 부숴 버리려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진지한지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화(淨化)를 손수 다루시고, 깊이뿌리 박은 우리의 거짓 자아를 불러내시어 우리가 그것을 버리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들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덕(德)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인생의 어떤 발달 단계에서 인간은 위기(crisis)를 경험한다. 예를 들면 이른 사춘기에서 청년기 바로 전까지를 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발전에서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의 의식으로 넘어가려 할 때 우리는 위기를 경험한다. 위기가 시작할 때 삶의 애착 때문에 거짓 자아에 매달리게 된다. 그 때에 우리가 만일 영적 성장의 길을 저항하면 더 낮은 수준의 상태로 후퇴하게 되거나, 당분간 그 상태를 맴돌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성장하거나 후퇴한다. 만일 후퇴하면 거짓 자아가 더 강화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힘을 주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하게도 그분은 당신대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당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그와 비슷하게 다루신다.

가나안 여인의 경우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감각의 어두운 밤을 거치는 사람의 훌륭한 예(例)이다. 이 위기는 감각과 이성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성령에의 순화(馴化)에로 움직여 가기 시작하게 한다. 다른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이 여인도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려고 예수께 다가간다. 이 여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으리라고 예측하지 않았다. 이 여인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이 여인은 이번에는 얼굴을 흙에 묻은 채 몸을 땅에 엎드렸다. 그런데도 별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아무도 이 여인처럼 예수께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땅에 엎드려 비굴하게 청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15:26)였다. 이 말씀의 뜻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놀랍게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마15:27) 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감동하셨다. 그분의 이 이상한 행동은 그 여인의 믿음의 수준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대화의 끝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으리라!" 우리도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으로부터 질책, 무응답, 혹은 분명한 거부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 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어야만 하는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해서 그분은 우리의 가장 큰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 즉 우리의 변형이라는 응답을 실제로는 해주시는 것이다. 그 변형이 가나안 여인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어떤 때는 아무런 사고도 없다. 다만 나의 자각만 있었을 뿐이다. 이것을 떠나보내야 하는지 그 자각을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이 아무 사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그것도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사고였다. 그 때에 당신이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그 인식마저도 잊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여 순수한 의식(pure comsciousness) 거기에서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당신의 일상적인 심리적 기능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평화로운 기쁨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신이 자고 있지 않았다는 좋은 표시이다. 우리가 가는 곳이 아는 자, 알고 있는 자, 알려지는 자 이 모두가 하나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곳에서는 인식(awareness)만 남는다. 인식하는 자는 사라지고 이와 함께 의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일치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이 경험이 당신을 관상상태로 이끌어 간다. 당신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어떤 사고가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경험이 너무 희미해서 당신은 잠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감각과 같은 자아 성찰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수준에서 일치를 이룸은 순수한 의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지식의 유입(流入, infusifnl: 하나님에 의한 것 : 역자)이며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 거기에는 성찰 같은 것은 없다.

우리 마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다라는 인식을 갖고 싶어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 자신을 떠나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어떠한 사고도 떠나보내려고 하지 않고는 떠나보냄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 우리는 관상에서 떠나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적인일치가 겁나는 일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치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의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일 의식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면 떠나보내는 과정을 억제하는 것이 된다.

향심기도는 떠나보내는 수련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향심기도는 어떤 사고든지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한번 하나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영적인 소통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 신적 일치가 사라지게 된다. '금강경(Diamond Sutra)'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떠한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정신을 길러라"거기에는 환시, 탈혼, 내적 음성, 영적교감, 심령 선물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순수한 의식보다 가치가 덜한 것들이다.

영적 위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기란 매우 힘들다. 특히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을 때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내적 침묵에 접근하고 충분한 시간 수련하면 당신은 매달리는 방법(떠나보냄과 반대되는)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용기를 잃거나 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길을 열어 준다. 당신에게는 언제든지 억만의 기회가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회를 없애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시고 잡아당기시곤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시고 아니면 우리를 밀어 주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바라시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점차로 당신은 내적 침묵에 익숙해질 것이다. 관상 기도의 초기단계에서 당신이 느꼈던 기쁜 평화는 점차 정상적인 경험이 된다. 인생의 어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관상 기도에 익숙해져서 당신이 받은 커다란 선물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습관적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침묵 속에 들어가고 그러면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말은 당신이 더 이상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그러한 침묵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사고들이 지나가는데도 당신이 그것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침묵의 기도 속에 들어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모든 기능들이 하나님에게 맡겨졌을 때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적 여정의 끝은 아니다.

3. 더 섬세한 종류의 사고들

향심 기도에 들어가려고 할 때 처음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오르는 첫번째 종류의 사고는 시시한 공상들이다. 이것들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하던 일이나 하고 있던 일에 관한 것들일 수도 있다. 혹은 외부의 소음이나, 분명한 기억들, 혹은 앞으로의 계획들이 나의 주의를 끌어당길 수 있다. 우리는 비유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 내려오는 배들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이것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 안에 들어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사고로부터 그 단어가 재확인시키는대로 일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여 나가라. 그래서 그 보트를 떠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리고 다른 보트가 와도 또 떠내려 보내라. 한 무리의 보트가 떠 내려와도 그것들을 또 떠나보내라.

당신은 고요함을 원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것들이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조금씩 당신에게 두 가지의 주의(注意)가 형성되어 갈 것이다. 당신은 표면적인 사고를 의식한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동시에 당신을 끌어당기는 신비적이며 분간할 수 없는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깊은 내면의 의식이며 영이 갖는 주의성이다. 당신은 동시에 두 가지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다. 표면의 사고들을 걱정하는것보다 내면의 깊은 의식이 발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표면적인 사고들은 얼마 안 가 당신의 마음을 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당신의 의식을 타고 내려오는 사고는 눈에 뜨이는 보트로서 당신의 주의를 끌어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 배 위에 오르고 싶게 한다. 거기에 끌리어 배에 오르면 당신은 그 배와 함께 떠내려가게 된다. 당신은 어떤 정도든 그 사고와 동일시한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에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원래의 지향으로 돌아가라. 거룩한 단어는 마음에 끌리는 사고에 집착하는 경향에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당신이 거기에 말려들었거나 막 말려들려고 함을 알아차리면 즉시 그러나 부드러운 내심의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떠나보내라. 어떤 종류이건 저항하는 것도 일종의 사고이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을 수반하는 사고이다. 감정이 수반된 사고는 하나님의 신비하신 현존을 기다리는 당신의 의향에 방해가 된다. 모든 사고들을 떠나보내라. 그리고 어떤 사고에 끌리는 유혹이 생기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그러나 풀잎에서 이슬방울이 떨어지듯 부드럽게 하라. 당신이 즐기고 있던 물에서 갑자기 끌려 나온 것 같은 기분으로 마음이 상하면 당신은 여지없이 배를 따라 떠내려가게 된다.

당신이 조용히 자리 잡고 어떤 평화를 누리고자 할 때, 당신은 어떠한 사고도 원치 않는다. 당신은 단지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러면 다른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 여정에 대한 아주 밝은 아이디어이거나 당신의 과거 삶에 대한 심리적 반성일 수도 있다. 당신이 가족과 가지고 있던 문제에 대해 갑자기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친구와의 논쟁에서 완벽한 논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물론 당신이 기도에서 나왔을 때에 그 밝은 아이디어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침묵의 깊은 물 속이라는 어둠에서 볼 때에는 놀랄 만하게 보였던 것들도 밝은 빛 속에서 볼 때에 그것들은 당신에게 던져진 미끼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당신은 누구를 위해 아주 긴급하게 기도할 마음이 솟구쳐 올라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때는 그러한 기도를 할 때가 아니다. 이때에는 어떠한 노력도 역생산적이다. 이때는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시는 기회이다. 이것은 당신께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과 같다. 당신의 친구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 기도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의 침묵을 듣는 것이다. 이때에 당신이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고를 떠나보냄으로써 내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든지 아니면 외적으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일이다.

설교자나 신학자들은 좋은 생각들 때문에 특히 문제를 안고 있다. 침묵을 지키고 앉기만 하면 어떤 기막힌 영감이 떠오른다. 여러 해 동안 씨름하던 신학적 문제들이 갑자기 수정(水晶)을 보듯 명백해진다. 그 사람들은 이때에 "이 문제를 몇 초만 더 생각해 보자. 그래야 내가 기도를 끝냈을 때 이것을 잊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야말로 그들의 내적 침묵이 끝나 버리는 때이다. 그들이 기도를 끝내고 난 다음에 그 명석한 아이디어들을 기억조차 못한다. 사람이 깊은 침묵에 들어가면, 아주 밝은 지적 빛을 받기가 쉬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착각에 불과하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비우기를 싫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이 기도에 진전하는 것을 마귀가 보면, 마귀는 질투로 해서 당신을 어느 지점에서건 낚아채려는 유혹을 하게 된다. 당신의 진보를 방해하려고 그들은 당신의 상상들 앞에 여러 가지 그럴싸한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마치 조그마한 물고기가 깊은 물속에서 온 주변에 하나님께 둘러싸여 있는데 갑자기 당신의 평화스런 공간에서 당신 눈앞에 미끼가 드리워진 것과 같다. 당신이 그것을 물기만 하면 당신은 그만 잡힌 것이다.

내적 침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확신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관상기도를 하려고 한다면 그 기도를 하는 오직 한 길은 모든 사고를 잊는 것이다. 그 시간은 오로지 내적 침묵의 시간이 되게 하고 그 이외는 모두 잊어버려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려 한다면 하루의 나머지 23시간 동안에 그렇게 하시도록 맡겨 드려라. 그러나 당신이 그분의 침묵을 듣는 것을 그분은 더 기뻐하신다. 이 기도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귀에, 당신의 감정에, 당신의 머리에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영에 그리고 당신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the inmost being)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듣고 이해할 어떠한 정신적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일종의 도유(塗油)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 도유의 열매는 나중에 간접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음의 안정, 평화,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태도 등과 같은 일에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내적 성찰보다도 내적 침묵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당신을 많은 문제에서 구해 줄 것이다.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곧은 지름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떠한 영적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혹은 스스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 체험들을 회상하고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지점까지 이러한 체험을 기억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이 체험들은 내적 침묵 자체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기도 중에 이것들을 성찰하지 말라. 만일 이러한 사색들이 참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들이 나중에 다시 회상될 것이다. 당신의 침묵이 깊을수록,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당신 안에서 심오하게 일하실 것이다. 순수한 믿음은 궁극적 신비이신 분을 그분의 있는 그대로에게 -즉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의 그분, 아니면 남이 일러 준 대로의 그분이 아닌 그분 안에 있는 그분 자신에게- 우리를 맡겨 드리는 것이며 또 그분의 현존하심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서 우리와 가장 잘 소통하실 수 있다. 이 수준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 안에 흔적이 없다. 우리의 심적 기능으로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 적절하게 그분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만 그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신비가들이 무지(無知, unknowing)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금 그분을 우리가 아는 대로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다. 환시, 내적 음성, 황홀경 등은 케이크에 얹어 놓은 장식 크림과 같을 뿐이다. 영적 여정의 본질은 순수한 믿음이다.

우리의 일상적 정신 자아가 조용해지면 어떤 특별한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만일 당신이 포도주를 만들어 보았다면 포도주를 찌꺼기에서 분리시킨 다음 술통에 넣고 소위 정련(精練)이라는 과정을 밟게 됨을 알 것이다. 정련제는 액체로서 술통의 표면에 엷은 막을 형성하고 점차로 포도주 안에 있는 불순물을 붙잡아 2, 3개월 후에는 바닥으로 가라앉게 되어 있다. 관상기도 중에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이와 비슷하다. 거룩한 단어는 이 정련제와 같으며 당신이 잠기는 침묵은 당신의 의식을 맑게 해주는 과정이다. 당신의 의식이 맑아지면 그 의식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가치와 빛으로 공명(共鳴)할 것이다.

관상 기도에는 인식의 즉시성(卽時性, immediacy)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어린이의 단순성을 재발견하는 하나의 경로이다. 어린아기가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어린이는 자기가 본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본다는 행동 때문에 기쁨을 갖는다. 나는(키딩) 언젠가 어머니의 보석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부잣집의 어린 소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엄마가 집에 없는 동안에 보모가 잠시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그 아이는 엄마의 다이아몬드를 모아서 변기 안에 쓸어 넣곤 하였다. 그 아이는 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들이 물에 떨어져 들어가면서 내는 물소리를 듣기 좋아하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후에 자라면서 변기의 물을 빼는 것도 배웠다. 이때에 집안 식구들은 자기 머리를 뜯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 아이의 나쁜 버릇을 고쳐 줄 수 있었겠는가. 그 아이는 보석의 가치 따위는 흥미가 없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아주 값진 것이었지만. 그 아이는 단지 다이아몬드가 물에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와 같은 체험의 즉시성을 즐겼던 것이다. 그 아이는 집착하지 않는 참다운 자유와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우리가 분석적인 판단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있는 대로 즐기는 것, 즉 단순히 존재하는 것과 단순히 행하는 것의 가치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복음에서 예수는 우리를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부르시며, 그들의 정직함, 신뢰, 실재(trality)를 직접 관계하는 모습을 배우라고 하신다. 물론 예수가 우리에게 미숙하게 굴거나 성화 부리는 것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의 가치관이 값을 매기지 않고는 어떠한 것을 즐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아름다움의 큰 부분을 상실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가치관을 기도에 도입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머나, 내가 하나님을 즐기고 있구나!" 하고 성찰한다. 그러면 바로 우리는 그 체험의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모든 성찰은 실재(leality)의 사진과 같다. 그 사진은 우리의 원래의 체험이 아니고 단지 그 체험을 반영한 것이다. 사진이 실재의 근사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성찰은 실재로 체험한 것의 한 단계 물러난 체험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때 우리가 그것을 생각(think)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 체험 위에 쉴 수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굶주린 사람과 같아서 한참 동안 그 영적인 위안에 매달리게 된다. 이와 같이 소유코자하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우리를 정말로 단순하게 어린이와 같은 체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막는 요인인 것이다.

관상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심리적 체험을 무시하면서 일어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신이 평화를 느끼면 그대로 좋다. 그것에 대해 생각지 말라. 그것을 그대로 즐기면서 그것을 성찰하지 말라.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당신은 거기에 대해 더욱 말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관념화하려 들면 당신은 상상과 기억과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깊이나 즉시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이와 같은 태도가 더 의미 있다.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예수의 팔에 안겨 쉬어라. 이것은 행위(doing)하는 수련이 아니라 존재(being)하는 수련이다. 그러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더 큰 효과와 기쁨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게 만든다. 많은 시간 우리는 기름기 없거나 녹슨 실린더로 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내어 줄 힘은 정오경에다 떨어지고 만다. 관상 기도는 성령의 힘에 자신을 열어 드린다. 그러면 당신을 내어 줄 능력이 하루 종일 유지할 수 있게 늘어난다. 당신은 어려운 삼황에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며, 때로는 불가능한상황도 견디어 낼 것이다.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당신이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그래서 그 사고가 아무리 멋지고 좋아 보이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잊어야 한다. 그 밝은 생각은 나중에 다루라. 그러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동기의 순수함을 계발하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가는 길에 동기가 모든 것이다. 빛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안에 아무 장애가 없다면 항상 빛나는 그 빛은 우리 위에 빛날 것이다. 우리가 거짓 자아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 우리를 장막으로 가리운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청한다고 거짓 자아가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끝내라."라고 말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거짓 자아는 매우 섬세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그것에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앞을 막는 시험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려는 태도, 심지어 자신의 사고와 감정 같은 것들도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본능적 태도는 털어 버려야 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영적인 체험에 굶주려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해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체험을 잡으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쓰라리게 체험하면서 그것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깊은 평화를 갈구하는 태도에 집착하는 것을 떠나보내고 나면, 더 이상 영적 체험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게 되면서 내적 자유와 정련된 기쁨을 얻는 체험으로 옮겨 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제야 우리는 그것을 얻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즉시 떠나가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마음 없이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의식을 흘러 내려가는 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하나님의 체험도 모두 지나가 버리도록 떠나 보내야한다. 일단 우리의 목표가 어떠한 영적인 체험 이상의 것임을 안 이상 우리가 여정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것에도 매달려서는 안 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여정 중에 있는 오아시스의 종려나무 밑에 주저앉고 마는 일이 없다. 오아시스는 새 힘을 주지만 그것이 여정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기어가면서도 여정을 계속하면 마침내 성령께 순종하는 데서 오는 열매인 내적 자유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가 깊은 평화로 들어가려 할 때 세 번째 종류의 사고가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를 아주 깊은 데서부터 끌어내는 미끼와 같은 좋은 아이디어를 잡으려 들게 된다. 거룩한 단어는 엄격히 말해 만트라는 아니다. 만트라처럼 우리가 무의식에 들어갈 때까지 그것에 끝까지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설정한 조건, 환경이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현존이 이끄시는 힘에 승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환경이다. 영적인 위안은 그 현존에서 나오는 빛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현존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알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직접 아는 일은 다음 세상에서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그래도 좀 더 가깝게 아는 것은 순수한 믿음에 의해서이며, 순수한 믿음은 사고와, 감정과 자아 성찰 저 너머의 것이다. 순수한 믿음은 심리적 체험이 없는 곳에서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감각과 관념적 체험 너머의 분이시다. 순수한 믿음의 상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것 너머에 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현존이 어디에나 계심을 깨닫는다. 단지 그뿐이다. 우리 자신을 충분히 활짝 열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임을 인식하게 된다.

네 번째 종류의 사고도 우리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일종의 빛나는 어둠과 같은 신비한 충만감이 우리를 감싸 주고 우리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에는 비록 원하지 않는 일상적 사고들을 희미하게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깊은 고요를 즐길 수 있다. 이 사고들에 붙잡히면 즐기던 평화에서 빠져 나오게 되기 때문에 이 때의 사고들은 기분 나쁘게 만든다. 때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마음조차 없다. 이때에 우리는 나의 깊은 존재를 부드럽게 도유하는 것같은 빛과 사랑에 잠기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가운데 커다란 입맞춤을 하고 계시며, 이와 동시에 모든 상처와 의혹과 죄악감을 송두리째 치유하시는 것과 같다. 궁극적 신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체험은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수와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가 말끔히 용서받고 잊혀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 침묵 속에서, 그 무사고(無思考)와 무념(無念)과 무한한 평화의 상태 속에서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마침내 내가 어느 곳에 도달하였구나!", "이 평화는 아주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잠시 시간을 내어서 기억해 두면, 내일은 지체 없이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 텐데."와 같은 사고(思考) 말이다. 이런 사고가 들면 마치 번개처럼 당신은 그 속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당신은 "하나님 맙소사! 뭐가 잘못된 거야!"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4.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가끔 분심이 문제가 된다. 우리가 편히 긴장을 풀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을 드릴 수도 없을 때가 있다. 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곤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이런 약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을 위해서 쏟아 붓는 '희생 제물'로 생각하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실패감은 기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욕을 버리기를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당신 얼굴을 감추실 때나, 그분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할 때에라도 그분을 찾고 사랑한다.

좀 더 일반적인 실패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위한 필수적 조건인 겸손을 위해서는 실패뿐 아니라 죄까지도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할 수 없이 완전히 부서지고 무능하게 되었다고 느끼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만 온전히 의존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기도를 위해서는 최선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전부이고 자신은 아무것도아니라는 사실에 전적인 신뢰와 기쁨을 느낄 때에, 진정하고 유일한 평화를 향유하게 된다.

여기에 분심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의식을 최대한으로 그분의 현존에 계속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 두 가지가있다.

1) 규칙적인 숨쉬기

긴장, 걱정, 흥분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호흡(숨)을 얕게, 짧게 만든다. 반면에, 우리가 일부러 좀 더 규칙적으로 천천히 숨을 쉬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긴장감을 좀 더 잘 풀고, 안정감과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맥박이나 심장의 고동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도록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심장의 고동의 속도에 맞추어 1, 2, 3, 4, 5, 6까지 세면서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잠깐 동안 (몇을 셀 정도로) 숨쉬기를 정지하고 있다가, 들이쉴 때와 같은 방법으로 천천히 숨을 내쉰다. 숨을 내쉬기를 끝낸 다음에 잠깐(몇을 셀 정도로) 중단한다. 기도 시간 이외에, 산보를 하거나 누워 있거나 누워 있는 동안에도 이런 숨쉬기를 연습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런 숨쉬기를 하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여서 조절을 해야 하지만, 점점 습관처럼 되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될 것이다.

2) 반복기도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쉬기를 하는 동안에 적당한 반복기도(또는 화살기도)를 하면 큰 도움이 된다. 기도의 말을 조용히(입술로 하든지, 또는 정신으로 하면 더 좋다) 숨을 들이쉴 때에 하거나 숨을 내쉴 때에 하거나, 들이쉴 때에도 하고 내쉴 때에 해도 된다. 규칙적인 호흡이라는 면에서 볼 때, 숨쉬기의 리듬에 맞추어야 하니까, 이 반복기도에는 운율이나 리듬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반복기도는 예수의 기도이다. 기도문은 단순히 예수, 예수, 예수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도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로 된 것도 있다. 우리의 의식이 구세주께 머물러 있는 동안, 조용히 숨을 쉬면서, 이 반복기도를 규칙적으로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3) 몇 가지 실제적인 요점들

어디서 기도할 것인가?(기도의 장소)

기도자가 완전히 혼자서 사사로이 있을 수 있는 장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장소,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시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도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언제나 뜻대로 외딴 곳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장소에 있다거나한 방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벌써 심리적으로 강한 분심이 되고, 완전한 긴장 이완에 방해가 된다. 이상적으로, 최상의 기도 장소는 우리 사이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이신 성체 대전이다. 이것이 바로 봐욤 신부가 샤를 드 푸코의 제자들에게 권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체를 모신 성당이나 경당에서는 방해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 현실적인 우리의 체험이다.

레르카로 추기경 (Cardinal Lercaro)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만약에 가능하다면, 성당이나 자기 방에서 기도할 것이다. 보통으로 성당에서는 사목자로서 이러저러한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기 방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옥외에서 좋은 장소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중단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어야만 한다."

얼마 동안 기도할 것인가? (기도 시간의 길이)

매일 한 시간을 온전히. 매일 한 시간의 '묵상'기도가 대부분의 수도규칙들이 전통적으로 규정한 시간이다.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는 말하기를, "기도 시간이 너무 짧으면, 여러 가지 공상을 버리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시간이다 지나간다. 막 준비가 되어서 정말로 기도를 시작해야 할 때에 벌써 그만두게 된다." 하루의 한 시간은 우리 삶의 시간 전체의 약 4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책 든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활동적이고 바쁠수록 그만큼 더 '하나님 앞에서 긴장을 풀고 쉬기 위해서는' 온전한 한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의 이 기도가 우리의 신경과 정서에 꾸준히 영향을 미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약 바쁜 생활을 한다면, 고요와 침묵 속에서 매일 우리 '영혼을 치유하고' '성령께 우리를 열어' 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선행보다도, 이런 식의 매일의 침묵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히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신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에, 계속적으로 완전히 한 시간을 사용하는 대신에 30분씩 두 번 기도하는 것은 권할 만한일이 못 된다. 처음에는, 처음 몇 주간 동안, 또는 처음 몇 달 동안은 한 시간을 지독히 길게 느낄 것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기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점차로, 우리는 기도 시간의 길이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일에 전력을 다해 열심히 매달리십시오. 이 드높은 무지의 구름에 열심히 파고드십시오. 휴식은 나중에 취하십시오! 이 일은 관상가 지망생에게는 힘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한 은총 덕분이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에 걸쳐 익숙해진 덕분에 좀 더 수월해지기전까지는 참으로 무척 이나 힘든 일입니다."

언제 기도할 것인가(기도의 때)

실제로 언제 기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소임과 임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이들은 이른 아침을 좋아한다. "이른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물러가서는 거기서 기도하셨다." 만약 이른 새벽에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깨어있을 수 있다면, 새벽의 고요함(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시고!)은 정말로 큰 보상이 된다. 어떤 이들은 잠자기 전, 저녁의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간에는 긴장을 풀기가 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 지킬 수' 있어서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온전히 한 시간을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희생해야 할것이다. ‥‥. 장거리 버스 여행 중이나 기차 정거장에서도 한 시간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수도 규칙에 따라서 묵상기도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은 장상과 함께 또는 서로 의논해서 기도 시간을 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언제가장 잘 기도할 수 있는지를 때때로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상기도는 수도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묵상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대신해 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묵상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특별한 기도로서의 묵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묵상기도가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상 중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큰 관심을 가지고 성서를 읽고 듣기 때문이며, 전례와 다른 영적 독서들로 성찰을 하며, 하나님의 길과 그 신비를 계속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동안의 자세

몸의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몸의 자세가 긴장을 풀고 집중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몸은 긴장을 풀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몸의 자세는 편안해야 하고, 긴장이나 피로의 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등을 똑바로 했을 때에, 피로감이 가장 적다고들 말한다. 머리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사람처럼 수직의 자세로 등과 머리를 똑바로 한다.

전통적으로, 무릎을 끊는 것(똑바로)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앉은 자세(또다시 똑바로)가 긴장을 푸는 데에는 더 좋다. 등받이가 없는 얕은 걸상(약 10인치 높이의)이 좋을 수도 있다. 방바닥에 않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면,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않는 것이 더 유효할 것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