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영신 식별 영성지도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10 장. 영신 식별과 영성지도

              제1절. 영적 식별(분별)
                           1. 영신 식별
                           2. 영신 결정
                           3. 영적 전쟁
                           4. 사랑과 식별
                      제2절. 영적 지도



10 장 영신 식별 영성지도

  

제1절 영신 식별

1. 영신 식별하기

영신식별의 관상적인 측면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관상은 선물로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기보다는 주님께서 내안에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은총입니다. 반면에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긴 하지만 식별은 일종의 기술과 같습니다. 기술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식별의 기술을 배우는 데 도움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영신식별' 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구분해야 합니다.

 1). 영신 식별의 은사

'영신식별' 이라는 말은 어떤 은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평상적인 그리스도교의 어떤 실천사항을 뜻하기도 합니다. 때로 이 말은 영신식별의 은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다른 은사들과 함께 이 영신식별의 은사를 언급합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12:4-7). 그리고 이어서 여러 은사들을 열거합니다 :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능력,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 등 등. 과연 은사란 무엇이고,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이란 무엇입니까?

은사란 무엇입니까? 은사란 특별한 선물 혹은 은총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1. 은사는 모든 이가 아닌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2. 은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며 "공동이익"(고전 12:7)을 위한 목회와 봉사의 선물입니다.
3. 은사는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는 은사 역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주로 이러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특히 기도 중에 가르침의 은사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이것은 봉사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교사가 가르치는 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끔 해 줍니다(엡 4:11 ; 롬 12;7참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복음선교의 은사를 그리스도교의 울타리를 넘어 복음선교에 투신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면서, 그들이 당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해 주십니다(엡 4:11).

영신식별의 은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특별한 선물로서,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말씀이고 어떤 현시들인지를 알고, 또 성령에게서 오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특별히 이 은사가 기도 중에 공동체에 전해지는 예언의 말씀이 진실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영신식별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 바로 다음에 열거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식별의 은사는 악령의 현존을 식별해 축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은사를 매우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영신식별의 은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삶 속에서 무엇이 성령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하기 위해 영신식별의 지혜를 사용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2). 모든 이를 위한 선물인 영신식별

신약성서는 영신식별이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영신식별에 있어서 더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지를 식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사용한 "영신식별"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은사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요한의 편지들에 나타나는 "영신식별"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선물을 의미해서 모든 이가 식별로 불리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요일 4:1). 신약성서에서 영신식별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는 두 번만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 영신식별은 복음서 전체와 사도행전을 비롯한 신약성서 전체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 안에서 성령의 힘과 악령에 대한 승리를 인식하는 데 식별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는 장면(눅 1:35)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식별하셨고, 후에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마 1:18-20). 엘리사벳과 시므온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알아보았습니다(눅 1:41, 2:26). 마태복음 11장과 12장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거기에 깔려 있는 가르침은 영신식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에서 식별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 속에서 성령의 현존을 식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식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비유들은 식별을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고통당하는 형제들 속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식별하도록 요구하기도 하고(마 25:31-46),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식별해서 현명해지라고 요구하기도 하며(마 25:14-30), 모래 위가 아니라 바위 위에 집을 세우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마 7:4-25). 사도바울은 여러 공동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영신식별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식별을 설교합니다(빌 1:11).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십시오"(롬 8:14),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 내십시오"(엡 5:8-10 ; 5:17 참고). 바울 사도의 주요 식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고전 12:3; 23:,3).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하나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요일 4:2-3).

영신식별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약성서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 전통 중에서 특별히 16세기의 관상가이며 예수회를 창립한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고전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규칙들은 식별에 관한 실천적 지침으로서 그 어느 것보다 뛰어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3). 영들을 식별함

영신식별이란 사랑과 신앙의 빛 아래 자기가 한 체험의 성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이러저러한 생각이나 충동, 혹은 이러저러한 계획이나 작전, 흑은 이러저러한 말들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인가? 어느 특정한 생각이나 계획, 혹은 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 실천하고, 그렇지 않으면 피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영신식별을 위한 규범들"(영신수련 313-336)에서 '선신(good spirits)' 과 '악신(bad spirits)' 을 구분합니다. '선신' 이란 성령과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양상으로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선신' 이라고 부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악마적인 것들로서 전통적으로 유혹의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오는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악신'이라고 부릅니다. 영신식별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특별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상념, 생각, 계획, 충동, 내적 이끌림 등이 과연 선신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악신에게서 오는 것이지를 판단하고 싶습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 하나? 나의 내적체험을 판단하기 위해 어떤 규범을 적용해야 하나? 여기에는 주관적 규범과 객관적 규범이 있습니다. 객관적 규범은 나를 넘어서 내 밖에 있습니다. 주관적 규범은 나의 양심과 내적 느낌들, 생각들, 충동들입니다.

객관적으로 주님께서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교의, 내가 따라야만 하는 교회의 합법적 권위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며 삶의 지침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생각이나 충동들이 객관적인 규범들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면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서나 교회를 통해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나의 마음 속에선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모순을 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종종, 나의 생각이나 느낌들을 판단하기엔 객관적 규범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객관적으로는 매우 좋은 생각인 듯하지만, 과연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인가 하고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악신도 역시 객관적으론 좋은 일이지만, 합당하지 않은 시간에, 적당치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로 하여금 하도록 이끌 수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주관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혹시 내 양심이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충동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종종 나의 양심이 거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것이 선하고 죄가 아니며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생각이나 충동이 과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생각 또는 충동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내적 혹은 '주관적' 규범은 임의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주관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신식별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객관적 지평에 뿌리를 둔 신뢰할 만한 규범이어야 합니다.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첫째 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혹시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심각한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분명 악신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그래서 내가 이미 나아가고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생각이나 충동에서 특정한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선신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접근해서, 양심에 고통과 가책을 일으켜 부정적 느낌들과 불편함 혹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선신은 나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에 '거슬러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내가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고, 주님의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악신은 오히려 슬픔과 불편함, 장애물에 대한 두려움 등을 일으켜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따르려는 나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선신은 나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죄에 대한 슬픔과 눈물, 영감, 주님을 섬기는 일이 쉬워짐, 평화스런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무엇이 악신에게서 오는지를 알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결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선에서 좀 더 나은 선으로 전진하는 자들의 경우, 선신이 이런 영혼을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마른 행주나 스펀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부드럽고 가볍고 달콤하지만, 악신이 그를 대할 때는 마치 물방울이 돌 위에 떨어질 때처럼 우악스럽고, 요란하며, 불안하다. 그러나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타락하는 영혼에게는, 선신도 악신도 그 반대되는 모양으로 접촉한다. 그 까닭은 이러하니 선신이나 악신이나 간에 자기와 반대되는 상태의 영혼과 접촉할 때에는, 그가 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소리를 내면서 요란스럽게 들어오고, 자기와 비슷한 상태의 영혼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 집에 들어가듯이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간다"(영신수련 335).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영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있는가?

4). 위안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하고픈 행동, 혹은 내적 충동의 기원을 판단하는 데 최상의 기준은 이냐시오 성인이 "위안"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위안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오를 때, 창조주이신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이 지상의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 및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 나는 위안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주님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신뢰와 사랑의 덕이 자라고, 영적인 사물로 마음을 끌리게 하며 주님 안에서 내적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모든 내적 즐거움이 커갈 때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생각이나 계획, 느낌, 혹은 내적 충동이 나를 주님과 더 가까이 이끌어 주고, 주님과 더 순조롭게 관계를 맺도록 해 주고, 그분을 알아보고 일치시켜 준다면 그것은 위안입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위안은 내적 체험들을 평가하는 데 매우 유용한 기준입니다. 기도 중에 주님을 대면하고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특정한 생각, 계획, 충동들이 얼마나 나를 편하게 만들어줍니까? 예수님을 관상하면서 이러한 생각과 충동들을 그분께 봉헌하면, 그분과의 관계에서 나는 얼마나 편안함을 느낍니까? 관상 중에서 이런 특정한 것들을 주님께 바칠 때 그것이 옳다는 생각이나 평화로움, 혹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까? 이냐시오가 말하는 위안을 갖게 된다면, 그 위안은 분명 주님에게서 온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주님에게서 나를 멀리 떼어 놓는 것을 "고독"(desolation, 황량함)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향한 유혹, 어떤 양상으로든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마음속의 그늘진 우울함, 혼란스러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 믿음과 희망의 부족, 사랑의 냉담함 등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고독이란 위안과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고독이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둔 밤의 기도 속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에 위안도 체험할 수 있고 고독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둔 밤은 주님 안에서 참다운 평화로움과 쉼을 누리는 시간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 깊이 일치하게 되기에, 사실은 위안의 시간입니다.

5). 식별을 위한 몇 가지 규칙

먼저 영적고독의 시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위안의 시간에 정했던 목적이나 결정을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혹시 자신이 지닌 선량한 지향을 바꾸도록 유혹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 유혹과 반대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단식하면서 말입니다. 고독 속에서는 마음을 겸손하게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약해서, 비록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많이 그분께 의지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독 속에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께서 다시 나를 위로해 주실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위안의 시기에는 다가올 고독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서 힘을 모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분의 위안 없이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식하면서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위안은 주님과의 더 깊은 일치와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고독은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악마로부터 오는 것인데,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나쁜지 생각하게 해서 악마가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고독을 허락하실까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냐시오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영신수련 322). 첫째는 내가 주님과의 관계와 기도 생활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기에 나의 잘못으로 위안이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나를 시험하시고, 마치 달리기 선수를 계속 훈련시키는 감독처럼 나에게 시련을 주셔서 원수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나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께 의존되어 있는지, 나 혼자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겸손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고독은 나로 하여금 나로의 덕과 의로움, 선함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게 해주고, 오히려 내 삶의 바위이신 주님 위에 견고하게 집을 짓도록 이끌어 줍니다.

6). 가능한 속임수에 대한 문제

식별에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식별 자체를 다시 심사하고, 검토하고, 평가해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종종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냐시오가 이미 말한 것처럼, 악신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신은 처음에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후 차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거기에 숨겨진 거짓과 죄를 향하여 나를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떠오른 생각의 시작뿐 아니라 전개 과정 및 그 끝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완전히 선해서 올바른 것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선신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선한 생각이 그 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악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덜 선한 모습으로 끝맺는다면, 혹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주님 안에서의 평화를 앗아가 버린다면, 그것은 악신에게서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악신도 그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처음에 주님에게서 오는 듯한 좋은 생각과 계획을 불러일으켜서 점차로 자신의 목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위안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신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을 심어주지는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위안이 갑자기 나에게 생기고, 혹시 같이 떠오르는 생각이나 인식이 그러한 큰 위안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같지도 않아 도무지 그 위안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으면, 나는 확실히 그 위안이 선신에게서나 혹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쇄신 모임에 참여해서 성령을 넘치게 받을 때(소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 것을 받을 때) 커다란 위안과 기쁨, 강렬한 평화. 주님과의 친밀함을 체험합니다. 혹시 이 위안이 그 순간의 기쁨과 그 상황의 기도를 넘어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에게서 오는 위안이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혹은 기도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그분에게서 온다고 확신하는 강한 사랑의 열정이 일어나고, 때로는 이와 더불어 어떤 인식이나 행동에 대한 계획이 떠오르거나, 혹은 그 '손길'이 기도하는 그 순간을 넘어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에게서 오는 위안입니다. 악신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 안에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나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악신은 먼저 떠오른 생각을 약간 수정해서 선하게 보이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짓으로 나를 속이고,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특별히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식별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고 미리 있을 원인이 없는 위안이 있더라도, 후에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감안해서 그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작에서 뿐 아니라 중간과 끝을 조심스럽게 평가해야 합니다. 식별 자체를 식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식별 할 때, 특별히 식별 자체를 식별할 때는 기도의 동반자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목회자, 혹은 영성지도자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영신식별의 결정하기

이냐시오 로욜라는 영신식별의 규범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 적용합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때 악신에게서 오는 생각과 충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선신에게서 오는 생각과 자극에 따라 결정을 내리기 원합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경우 혹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도록 부르고 계신가? 나에게 제시된 여러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까? 영신식별은 바로 이러한 특정한 상황에서,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을 식별하기 위한 기반이 됩니다. 나는 중요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영신식별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 결정을 내리기

이제 내가 어떤 중요한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기를 원한다고 합시다. 나는 이미 관련된 정보와 타당한 사실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필요에 의해서 한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문제에 관해 주님께서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기도하면서 주님께 빛과 인도하심을 구하였고, 마련된 정보들을 숙고해 보았으며, 문서나 책이나 사람에게 의견도 물어 보았고, 찬성 반대의 이유들도 적어 보았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결정을 내립니다.

예수께서는 내 삶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분께 나의 결정을 가져가 그분의 주권 앞에 그 결정을 펼쳐 놓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아주 짧은 관상의 시간에 그분과 함께 그 문제를 검토합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담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치 그분을 관상하고 바라보는 눈으로 주어진 여러 대안들을 바라보고, 내가 선택한 결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내릴 수 있는 다양한 결정들을 예수님께 들어 올립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 주님과 나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십시오.

이러한 방법으로 나에게 열려진 가능성 하나하나에 대해 영신식별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별과정은 어떠한 가능성과 결정들이 주님의 영감에 따르고, 당신의 성령에 기원을 두며, 그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통으로는 제기된 문제의 중요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결론에 도달합니다. 매일 몇 분 동안 한 번 혹은 두 번씩 모든 가능성을 주님께 들어올려, 각각의 원천이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합니다. 이를 행할 때에는,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진심으로 찾아내기를 원하고, 진지함과 신뢰심을 지니고 그분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하면, 때로는 처음부터 그 결정에 대한 위안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그 가능한 선택에 관해 주님의 눈을 바라보면, 일관성 있게 옳다는 확신이 듭니다. 혹은 꾸준한 평화와 조화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혹시는 마음속에서 기쁨과 참다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 특정한 가능성이 선신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2). 결정과정에서의 핵심적 열쇠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각각의 가능성들에 대해 얼마나 바르고 편안한가? 하지만 얼마나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렸어야만 하는 그 특정하고 가능한 결정을 결론으로 며칠 동안 지내며 시험해 보고, 그것이 진실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주님께서 확인해 주시도록 기다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위안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얼마 동안 나의 식별을 조사해 봅니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을 실행에 옮깁니다.

나는 주님을 신뢰해야 하고, 나의 마음속에 계신 그분의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내적 체험의 본질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나에게 인식시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내 머리와 마음에 있는 어떤 생각이 당신의 영감을 따르는 것인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본성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맛, 두려움, 편견, 느낌들을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들로부터 구분하여 가려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고 때로는 며칠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나의 결정이 옳았다고 완전하게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혹시 그럴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내가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내가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행하면, 혹시 거기에 나를 위한 그분의 뜻이라는 완전한 확신이 없더라도, 나는 분명히 나를 위한 그분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나의 결정에 다른 사람이 관여되는 것이라면, 그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과 부인이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각자가 식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고, 함께 기도하면서 각자 기도 중에 식별한 결과를 모아야 합니다. 단체가 결정하는 것인 경우에도 구성원 각자가 식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 공동식별의 과정은 다음과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기도하며 식별합니다. 이제 함께 모여, 토론이 아니라 함께 모으기 위하여 돌아가며 각자가 기도 중에 내린 결론을 듣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합니다. 만장일치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혹은 어떤 종류의 투표에 다다를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3). 식별과 결정의 기반

주님께서는 나의 내적 체험 속에서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식별에 기반을 두고 당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부르십니다. 하지만 영신식별을 위해서 나의 삶에서 성취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특별한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상적 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신식별은 아주 강한 관상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신식별의 과정에서 근본이 되는 관계는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관상적 관계입니다. 내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정기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영신식별과 식별에 기반을 둔 결정과정에 꼭 필요한 주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서, 영신식별을 실천하기 위해서 나는 매일매일 관상적 기도를 해야 하고, 나의 삶에서 관상기도의 시간과 마음의 자유, 주님과의 관계 속에 깃든 어린이다운 단순함 등과 같은 관상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데 정기적으로 충실하게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면,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식별하기 위해 필요한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가 도무지 없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면, 무질서한 애착에 사로잡혀 식별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나의 소유욕이 나를 사로잡아 내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가능성에 나를 묶어버리고, 그것들이 선신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택에 대한 올바른 위안과 꾸밀 수 없는 평화를 체험하지 못하게 되고, 선신에게서 오는 위안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린이다운 단순함을 지니지 못하면 어떻게 내가 신앙과 신뢰와 사랑의 눈으로 조용하고 단순하게 그분을 바라볼 수 있겠으며, 어떠한 생각이 진정 그분에게서 오는지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생활 중에 습관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고 있다면, 나의 내적 체험들을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영신식별을 통해 올바른 결정에 다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신식별은 삶 전체 속으로 스며들고 그것을 넓혀 줄 것입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내 마음 속에서 활동하는 영들을 식별하고 선신에게서 오는 것을 식별해서 행동한다면, 오랜 시간 후에는 내가 무엇을 하건 무엇을 선택하건 나는 늘 선신이 이끄는 삶을 따르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이끄시는 방법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나는 관상적으로 살고, 내 눈은 늘 주님을 향하고, 당신의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전체는 예수님을 위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4). 성령과 함께 걸어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5, 참조 5:16).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새 생명을 지닌다는 것, 새 창조물로서 새로운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특정한 양식으로 행동한다는 것, 그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과 함께 거닌다는 것은 매일의 행동 속에서 영신식별을 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성령에 따라 살게 되면, 나는 정말 자유롭습니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은 결코 나의 행동을 규정하고 나를 얽매는 규칙이나 법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법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롬 8:3). 법이 나를 강요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힘을 주셨기에 나는 법이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나의 선택은 무엇이 옳다는 지식에 바탕을 둔 '머리에서의 선택' 이 아니라,주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부르시는 그것을 사랑으로 아는 것에 기반을 둔 '마음에서의 선택'입니다.

나는 성령의 내적 법에 따라 행동합니다(롬 8:2). 그래서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롬8:5~6) 성령께서는 기도할 수 있게 나를 도와주십니다 :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롬 8:26).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나는 주님께 나의 선택을 이끌어 주시도록 청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시길 청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롬 8:14)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에 의해 새로워지고 "새로 태어났기에"(벧전 1;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엡 2:10) 생긴 새로운 창조물이기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신비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에,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향해 조율되었습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놓여졌기에, 나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즉각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지를 알게 되고, 언제 성령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 5:22) 등 성령의 열매인 위안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3. 영적 전쟁

이냐시오 로욜라가 「영신수련」에서 사용하는 여러 은유들 중에서 그리스도교적 삶을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것은 아마 전쟁의 은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벌이는 전쟁으로 보는 이 비전은 "영신식별의 규범들"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고, 특히 "두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영신수련 136-148)에서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은 사탄과 예수님이 각각 자신들의 깃발 아래 나름대로의 작전과 계략 및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지닌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전개되는 묵상입니다. 이 묵상을 하는 사람은 묵상을 마치면서 정식으로 모든 것 안에서 예수님을 본받기를 원하고 그분의 깃발 아래 받아들여지도록 청합니다(영신수련 147).

전쟁의 은유를 통해 이냐시오는 주님께 대한 충성심 관대하게 희생을 바침, 자기를 아끼지 않는 봉사, 어둠과 어려운 시기에 지니는 용기와 신실함 등 그리스도교적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은유는 악마의 존재와 흉계를 실제적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마는, 대화의 주제가 악마나 악마적인 것으로 옮겨갈 때, 나는 악마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그들은 악마나 악신들을 중세시대의 유물로 여기고, 단지 세상의 악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악에 대해 조금밖에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를 놀라게 합니다. 그들은 죄와 악을 분명히 만났습니다만, 죄악의 신비 그 핵심에 자리 잡은 개인적 악의 힘을 체험하진 못했습니다. 반면에, 악마의 활동을 무시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위험합니다. 그들은 마치 적의 존재도 모른 채 아무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부상을 당하게 되고, 그들을 보호해야만 하는 주위 사람들마저도 부상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엡 6:12).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충고를 따라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엡 6:10). 이 무기는 바로 믿음, 희망, 사랑, 진실, 의로움, 평화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 등입니다. 또 이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상적인 목회 실천들로 구성됩니다. 이 전통에 있는 중요한 요소로서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축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에 익숙해져 우리의 삶에서 악의 현존에 대항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1). 악신의 존재

신학은 그동안 신약성서에 나오는 축사의 현대적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 주는 데 등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힘이 당신과 함께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악령을 몰아내셨고, 그분께서 행하신 축사의 기적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알리는 행적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물아내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마 12:28) 더욱이 예수께서는 악마를 물아 내도록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압도적인 성서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그동안 사탄과 악신의 존재와 인격화된 악의 존재를 등한시했지만, 교회의 가르침은 악마 혹은 악마들의 존재에 대해 줄곧 언급해 왔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 바울 6세가 1972년에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

"악은 결코 어떤 것의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변절되어 있어 변절시키기 위해 효과적으로 활동하는 살아 있는 영적 실체입니다. 끔직한 실체로서, 신비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둡고 불행스러운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그것은 단지 교활함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는 인간이 역사에 오류와 불운을 심는 보이지 않는 원수입니다.‥‥그것은 단지 하나의 악마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수의 악마들의 문제입니다.·… 악마와 그가 개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인간 전체의 사회, 사건들에 끼치는 영향이란 이 문제는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972년 11월 23일). 

악신은 세상에서 약간 애매하긴 하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자' 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주로 개개인 안에서 행사합니다. 그는 유혹자이고, 농락꾼이며, 악을 권하는 자이고, 악한 일을 꾸미는 자입니다. 그는 속이고 눈을 멀게 하며 타락시킵니다. 그는 거짓말장이의 '아비' 이며 살인자로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학자들은 개인에게 미치는 악마의 영향에 관해 귀신들림(possession), 압박(oppression), 유혹(temptation) 등으로 구분합니다.

귀신들림에 관해서는 전에 배우지 않은 언어를 알아듣거나 말하는 것, 미래나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힘 등으로서 이것들이 합쳐서 나타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귀신 들리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어느 교구의 공식 축사 담당신부인 한 예수회 신부에 의하면 20년 이상이나 축사를 행해 왔으나 귀신들린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압박은 한 악마 혹은 여러 악마가 한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여 조종하는 것을 말하는데, 때로는 괴롭히고 때로는 엄청난 힘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완전히 혹은 거의 완전하게 빼앗지는 못하는 경우입니다. 드물지만 이 압박이 심한 경우는 귀신들린 상태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조금 덜 심한 경우는 흔한데, 증오심이나 분노, 후회심 , 탐욕, 성욕 등의 습관적 죄의 경우에 나타나는 명백한 충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대개의 경우는 습관적 두려움, 슬픔, 비합리적인 죄책감, 걱정, 세심 증 등으로 설명할 수 있기도 합니다. 유혹이 갑작스럽거나 강하고 견고해서 자연적 방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악마가 특별히 간섭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악마의 간섭을 '압박' 이라고 합니다.

유혹은 세상에서 올 수도 있고, 육적인 것에서 혹은 악마에게서 올 수도 있습니다. 악의 행위에서 오는 부분적 혹은 전폭적 유혹은 일시적인 방법으로 왔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혹은 압박과 비슷한 양상으로 짜증날 정도로 꾸준하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질성이라든가 비합리성 혹은 이상함 등이 섞인 충동적 힘으로 나타나기에 유혹의 악마적 기원(부분 혹은 전부)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이전에 악마적 기원이라고 부른 많은 행동들의 심리적 기원을 밝혀주지 않았습니까?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것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악마의 영향이고 무엇이 정신질환 혹은 신경증세 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혹시 정신질환을 악마의 압박이라고 진단해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는 않을는지요?

정신질환과 악신의 영향은 분명히 다릅니다. 모든 악마적 영향을 정신질환으로 축소해서도 안 되고, 모든 정신질환을 악마의 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실제적으로 문제의 기원을 정확히 알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정신질환과 악마적 영향은 서로 엉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목회적으로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해야 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듯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심리치료에도, 정신치료에도, 악신을 향해 권위를 행사할 때에도 적용됩니다.

2). 악신을 제어하는 권위

악마와 그 앞잡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예수 부활의 승리가 보여준 빛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공생활 기간을 통해서 뿐 아니라 특별히 부활을 통해서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압도적 승리를 보여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악마에 대한 마니교적 이원론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셨고, 악마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나눕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 지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분의 승리가 가져다준 은총을 나누어 받고 있기에, 악신을 제어하는 권한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권한을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악마와 악신들을 제어하는 이 권한은 그 권한을 주신 바로 그분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권한을 치장해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악신과 대면하기위해 이것저것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권한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차분하고 조용하고 간단하게 사용하면 됩니다.

기독교의 오순절 전통에서는 때로 악을 제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권한을 마치 연극을 하듯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양상이 새 오순절 운동이나 가톨릭 성령쇄신운동의 여기저기에서 이따금 보입니다. 이교도의 종교, 특히 범신론적 종교에서 이러한 축사는 대단히 연극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저는(로버트 훼리시) 우간다의 무당이 축사를 행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노래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북을 치더군요. 아마 악신을 놀라게 해서 몰아내는 모양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와 가톨릭 전통은 좋은 취향에 따라서가 아니라, 경험에 입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지니신 권위에 대한 믿음의 입장에서, 늘 온건한 형태를 취해 왔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한을 치장할 필요가 없고, 그분께 대한 신앙으로 그 권한을 확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3). 악마를 좇아냄

악신이 인간을 공격하는 가장 평범한 방법은 유혹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혹들이 다 악마에게서 오는 것은 분명히 아니고, 어떤 유혹들이 그렇습니다. 악마에게서 오는 듯한 유혹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냐시오 로욜라가 「영신수련」에 제시한 "영신식별의 규범들"의 충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는 악마를 "인간 본성의 원수"라고 부릅니다. 이냐시오는 결코 악마와 그 앞잡이들에 대해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시한 악신을 다루는 규범들은 그 자신의 체험과 교회의 목회적 전통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가 행한 축사의 장면이 로마의 예수회 신학원 건물 '이냐시오 방' 바깥 복도에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악마를 쫓아내는 이냐시오와 서너 개의 검은 나무 조각 같은 것을 토해 내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천진스럽기도 한 이 그림에는 악마를 다루는 이냐시오의 모습을 냉혹하리만치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냐시오는 "영신식별을 위한 규범들"에서 "인간 본성의 원수"가 군대의 사령관처럼 행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모든 덕행 즉 믿음, 소망, 사랑의 삼덕, 슬기로움과 의로움과 용감함과 절제함 및 일반 윤리덕을 차례대로 조사해서, 어느 부분이 제일 약하고 또 어느 부분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보다 필요한지를 발견하면, 그 부분을 공격해서 우리를 정복하려고하는 것이다"(영신수련 327). 우리는 약한 부분에서 유혹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귀신은 또 자기를 숨기고 발각되지 않으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마치 연애 사기꾼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치 불량배가 나쁜 의향을 가지고 달콤한 말로 행세하는 가정의 아가씨나 유부녀를 꾀낼 때, 자기의 말이나 권면이 비밀에 붙여지기를 원하고, 또 마음먹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염려하여 아가씨가 부친께 또는 아내가 장부에게 그의 꾀는 말이나 야심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처럼, 인류의 원수도 착한 영혼에게 음모와 유혹을 꾀할 때 그것이 비밀로 받아져서 간직되기를 원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혼은 경험이 풍부한 자기 지도신부나 혹은 귀신의 엉큼한 꾀와 나쁜 마음보를 잘 아는 영신 지도자에게 자기 사정을 밝히 알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의 흉계가 드러나게 되면 계획했던 나쁜 뜻을 이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영신수련 326)

이냐시오는 우리의 목적에 가장 잘 들어맞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원수의 귀신이 행동할 때는, 여인과 비슷한 점이 있으니, 즉 힘은 약하지만 발악을 쓰는 데는 강하다. 왜냐하면, 여인은 보통 어떤 남자와 싸울 때에 남자가 무서운 태도를 보이면 용기를 잃고 도망치지만, 반대로 남자가 용기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여인을 더욱 골을 내고 욕질을 하면서 극도로 사나와져서 그칠 줄 모른다. 그와 같이 귀신도, 영신 수련을 하는 사람이 원수의 유혹에 대하여 정면에서 반대하면서 용감한 기색을 보이면, 용기를 잃고 도주한다. 그러나, 반대로 수련하는 이가 겁을 내고 또 유감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용기를 잃기 시작하면, 인류의 원수는 세상에도 없을 맹수처럼 사나와져서 비열한 수법으로 흉악한 의도를 추진시키는 것이다"(영신수련 325) 이냐시오가 여인의 다투는 모습을 어떻게 평가했건 간에, 그는 분명히 악마의 특성을 이해했고 그의 충고는 실제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은 오늘날에도 예전처럼 유효하고 쓸모 있습니다. 간단히 기도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거기에 어떤 형태의 악마 혹은 악신이 있건 단순하게 명령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나에게서 떠나거라", 또는 "두려움의 영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나에게서 떠나거라", 혹은 "분노(혹은 탐욕 등등)의 영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신을 제어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은 효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악마에게서 오는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권한을 사용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매우 심각한 죄에 빠져 있었고, 몹시 부끄러워했을 뿐 아니라 그 문제 때문에 대단히 허약해졌습니다. 죄에 대한 이상한 분위기 외에도 충동적 요소, 그리고 그 사람 자신이 점점 자존심을 잃어가면서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는 사실로 인해(악마는 바로 이것을 노립니다), 나는 그가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다음에 그런 유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권한으로 악마를 향해 '떠나라'고 명령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했고, 그 후로는 어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개개인 혹은 어느 단체나 특정한 장소에서 악신의 현존을 느낄 때 또는 악신의 영향이 예측되는 이유가 있으면, 그것이 유혹의 양상이건 압박의 양상이건 간에, 언제라도 예수께서 주신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 간단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고는 "악령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떠나거라" 하고 명령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나에게 혹은 유혹을 당했거나 압박을 당한 그 사람에게 성령의 넘치는 은총이 새로이 부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악신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당신이 이미 그들을 제어해 승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안에서 당신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4. 사랑과 식별

사랑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기본적이고도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사랑은 지식보다 중요하며, 가장 높은 지식은 사랑을 통한 관상적 지식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 육화되어 드러났던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은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1). 예수님의 사랑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나를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며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빰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 대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며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고,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 6:27-31).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이러한 근원적이고 도달키 어렵고 극단적인 사랑의 방법이 바로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 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눅 6:32-35).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당신께서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특히 당신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고 계신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완전하고 관대하게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계시이신 예수께서는 성부의 사랑이 어떠하신지를 보여주십니다 :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눅 6:35). 성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예수께서도 사랑으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눅 6:36 참조).

예수께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눅 6:3) 하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서 나를 비판하지 않으실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기에, 그분께서 나를 비판하지 않으실 것이 확실합니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눅 6:37). 그래서 나의 태도가 얼마나 나쁘거나 나의 행동이 어떠했거나 간에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는 결코 나를 단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눅 6:37-38). 예수께서는 관대하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시고, 더 넓게는 모든 것에서 관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용서하시고 주시면서,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주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고, 또 그 사랑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고전 13:4-7). 나는 사랑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묘사를 통해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분께서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요한복음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압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정확하고 훌륭한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에 대한 바울의 묘사에서 '사랑' 대신에 '예수님'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의 인격 명세서가 작성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친절하십니다. 그분은 자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교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무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욕을 품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성을 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앙심을 품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모습이고 특성입니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속에 사랑이신 당신 성령을 담아 보내 주십니다.

2). 성령

성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육화되시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부와 예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롬 5:5).

예수님과 성부의 상호적 사랑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사랑하시고,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분 상호간의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그 위격이십니다. 이 위격이 성령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부께서는 나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머무시면서, 성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성부의 사랑 속에 나를 사로잡으십니다. 하나님의 내적 삶 속으로 나를 데려가시고, 성삼위가 이루시는 사랑의 공동체적 삶 속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성삼위의 신비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내가 예수님과 성부와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상호적 사랑이시기에, 그분께서는 나를 사랑 안에서 그분들과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기에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랑 안에서 성부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나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기에 사랑과 신뢰심을 지니고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을 통한 식별

영신식별은 항상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부와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의 마음속에 주시는 선물인 사랑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도록 힘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이 사랑의 선물은 관상 속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신앙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의 눈이 예수님을 향해 집중되도록 나를 이끌어 줍니다. 관상이란 사랑을 통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영신식별이란 사랑을 통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관상의 맥락에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식별은 관상적 판단이고 관상적 평가입니다. 그러기에 늘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사랑과 식별에 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바울 사도는 편지를 쓰셨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기에 식별력이 없어졌고, 식별력이 없어졌기에 그릇되게 내린 평가나 판단에 의해 더 어려운 문제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은 아마 그리스도교다운 지식은 사랑을 통한 지식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다운 지식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졌기에, 불행하게도 재난을 초래하는 행동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바울 사도가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편지를 통해 판단해 보건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특별한 선물, 특별히 신비스럽고 비밀스런 지식을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예언하는 것과 같은 지혜나 지식의 선물을 높게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에서 바울 사도는 그 교회가 지니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 찬양하지만, 고린도인들에게는 "언변과 지식에 뛰어난"(고전 1:5)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는 그들의 덕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은사에 대해 찬양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편지 전체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언변과 지식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린 후, 바울 사도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지혜가 부족했음을 암시하는 가르침을 줍니다. 사도는 인간의 말재주와 십자가의 말씀을 비교합니다(고전 1:17-18; 참조 2:2). 바울 사도는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을 드려내려고 하였습니다(고전 2:4). 뒤에서 혹시 누가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적합니다(고전 13: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고전 1:20).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고전 1:25). 하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편지를 계속 읽어가면, 확실히 고린도인들에게 지혜가 부족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들에게는 올바른 판단과 그리스도인다운 식별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그들을 영적인 사람들이라 부르지 않고 육적인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고전 3:1) 그들 사이에는 질투와 다툼이 가득했습니다. 일치가 깨어져 누구는 바울파 누구는 아볼로파 누구는 베드로파하며 서로 싸우면서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고전 1:11-16; 고전 3:3-23). 그들은 또 여인들이 모임에서 머리를 가려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갈라져 싸운 듯합니다(고전 11:2-16). 그래서 결국은 세속 법정에 서로 고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고전 6:1-7). 그들은 서로가 억울하게 해 주고 속여 먹기도 했습니다(고전 6:7).

고린도인들은 단지 지혜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신중함과 상식마저 부족했습니다. 주님의 성찬에서 "각각 자기가 가져 온 것을 먼저 먹어 치우고 따라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고전 11:21). 그들은 성윤리에 관해서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듯싶습니다(고전 5:1-13). 그리고 매춘행위까지 자주 벌어진 듯합니다.

기도회들은 분명 혼란스러워져 이상한 언어의 예언이 있었지만 해석은 거의 혹은 전혀 없었고, 때로는 여러 명이 이상한 언어로 예언을 하기도 한 듯합니다(고전 14장). 오순절 모임이나 성령쇄신 기도회에서 이상한 언어의 예언을 들어본 사람은 고린도교회의 모임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언변과 지식의 선물들로 거만하게 되었고, 자부심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고전 4:6; 참조 4:18; 5:2; 13:5). 이런 맥락에서 고전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헌장을 읽는다면, 고린도 교회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들이 바로 4절부터 7절의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불친절했고, 인내심이 없고, 시기심에 빠져 있고, 교만함에 빠져 무례했으며 앙심을 품었으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핵심은 바로 이 13장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부족했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은사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을 위해 기도하라고 그들을 격려합니다. 사랑은 은사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길이며 삶의 방식이고 생명으로 가는 통로입니다(고전 12:31). 사랑이 없이는 은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편지의 첫머리에서 찬양한 바와 같이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함양하고 사용하길 원하였습니다. 사랑을 통해 형성되지 않은 지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지니지 않은 지혜는 세속적 지혜일뿐입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을 통해 형성되고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참다운 지식이 없었기에 그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영신식별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영신식별은 사랑을 통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식별력이 부족했기에 그릇된 것을 선택했고, 그래서 바울 사도가 편지에서 지적하는 그러한 문제들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4). 예수께 귀를 기울임

'예수님을 아는 것'은 단지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뜻합니다. '예수께 귀를 기울인다' 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또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여러 소음들로부터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 즉 식별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 10:14-15). 어떻게 예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그분을 압니까? 성부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께서 성부를 아시는 것처럼 아십니다. 예수님과 성부께서는 사랑이시며 신적 본성을 하나로 엮으시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서로가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나도 우리를 한데 읽으시는 사랑이신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서로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7-30).

예수께서는 당신 손으로 나를 감싸 주십니다. 나는 그분께 속합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아시고,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하고 인식하도록 나를 인식을 향해 이끌어 주십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통해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식별의 은사를 주십니다. 내가 성부의 손 안에 있고 성부께서 나를 예수께 주셨기에, 나는 예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습니다.



제2절. 관상기도 자들의 영적 지도

학문적인 교육과정을 밟는 것만으로는, 그 과정이 영적 지도를 해주는 데 대하여 관념적 배경으로서 아무리 쓸모가 있다 하더라도,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인 배경이 매우 쓸모가 있기는 하지만, 일차적으로 이것은 단지 좋은 심리 상담가가 되기 위한 것이다. 영적 지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향심기도(집중기도, 마음의 기도)는,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관상기도를 준비하게 만드는 하나의 특수한 방법이다. 이렇게 수련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 대하여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때로 그리스도교의 관상 전통에 대한 문헌으로 훈련받은 영적 지도자나 피정지도자들이 향심기도에 관하여 몇 개의 책을 읽고서 향심기도를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향심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특수한 훈련과 오랜 동안의 정규적인 수련을 필요로 하는데, 그 훈련과 수련 없이는, 그 섬세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어서 그것을 남에게 적절하게 전수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수용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에 따르면 심리적인 효과들을 지도자가 미리 내다보고 있어야 한다. 어둔 밤이 이 수련 중에 아주 일찍 올 수도 있는데, 이러한 때에는 지도자는 잘 듣는 이가 되고 확신을 많이 줄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관상기도의 지도자는 특수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감수성 중에 하나는 내적, 외적 활동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대한 특수한 민감성이다. 순수한 심층적 기도는 영적 독서, 전례, 아니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의 기도의 상태를 대상으로 하는 강론이나 강의를 듣는 것 등을 통하여 관념적인 지식을 얻지 않는다면 아마도 침체될 수도 있다. 이 기도에는 지적, 정감적 그리고 직관적 요소들의 균형이 필요하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로 가는데 우리의 기능을 이용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기능의 이용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것들을 올바르게 이용하면 지혜, 이해, 지식의 은사를 온전히 얻도록 해주며, 이것들은 관상기도가 온전하게 되도록 도와준다.

향심기도는 묵상과 정감적 기도로 발달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그 이상으로 진전시키게 하는 차원을 가지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에 다르면 그것은 ‘하나님 안의 휴식’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기도가 휴식을 준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휴식만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쉬는 동안에 얻어진 믿음과 사랑의 태도로 생겨난 활동이 따라야 한다. 향심기도로 얻는 휴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기도든지, 특히 위안을 주거나 평화를 주는 것이면, 고도의 신경안정제 역할로 퇴보하고 만다. 즉, 자기중심적 목표에 집착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형편에 무감각했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과 기도의 상호작용은 우리를 복음의 관상적 차원에 동화하게 만드는데, 복음의 관상적 차원은 기도는 물론 좋은 행실도 함께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선생이시다. 하나님을 아빠,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그분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관상기도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것을 향하게 하는 것이 영적인 지도가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는 신성한 치료에서 기본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된 은총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는 전례에 대하여, 그리고 그 회중과 특히 성체 안에 현존하는 신적인 전달을 받을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의 정을 깊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관상기도와 행동으로 더 준비가 잘 될수록 사람들 가운데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와 닿을 것이고 우리를 각 수준에서 변형시켜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근거를 두지 않는 한, 관상기도는 변형하는 일치로 향하는 길의 일부분만 얻게 할 뿐이다.

관상기도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기도하고 싶은 열망뿐이고 때로는 내적 정화의 시작과 겹쳐서 일상생활의 굉장한 어려움 속에 묻혀 버리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기도하고 싶은 열망 자체도 기도라는 사실을 거듭 되새겨 줄 필요가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위대한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어떤 굉장한 것을 느끼느냐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상당히 초연해지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선택의 문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둔 밤이라고 부른 나선형 층계를 오르는 과도기 동안에 시험을 받는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원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그가 자신의 기도와 일상생활 중에 거룩한 치료자에게 자신을 계속 내어 드리는 한 그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무기력하고 메말라 있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 힘겨운 여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힘 있게 그리고 끊임없이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일들은 진전의 표시이지, 퇴보의 표시가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현존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으로 아주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 우리가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우울증에 빠졌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병적인 우울증과 우울한 느낌의 차이를 분간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감각적인 위로를 경험해 온 사람으로서 지금은 이익, 도움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등의 결핍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는 느낌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오는 결과이다.

어둔 밤과 우울증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어둔 밤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시험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에게 대하여 무비판적인 태도가 자라고,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더욱 초연해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과 같은 면들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둔 밤의 열매를 알아 볼 수 있다. 병적인 우울증에서는 아무 진전 없이 한 곳을 맴돌며 어떠한 수준에서도 아무런 이익을 발견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이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 사람은 우울증에 대하여 심리학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단순히 어둔 밤에 있는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수면제나 안정제를 투여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은총의 진전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특별한 분별을 하려면 판단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야 한다.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믿을 만한 지표는 정상적인 기능의 수준에 관한 것이다. 어둔 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내적으로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직업이나 대인관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일반적인 성향은 때로 심각할 정도로 자기 몰입을 하는 병적인 우울증과 아주 대조를 이루는데, 이 우울증에서는 세상과 접촉하는 삶의 기능들이 정지되어있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통하여 보여 주었듯이, 향심기도는 심리학과 상당히 중복되어 있다. 사실상 그것은 특히, 현대 심리학적 모델과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도정에 관한 고전적인 언어 사이에 대화를 이루려고 발전시킨 것이다. 향심기도의 방법에서, 그리스도교 정화의 핵심은 무의식적 동기들과의 투쟁에 있는데, 기도 그 자체는 이전에 억압한 무의식 속의 내용들이 솟아오르도록 격려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신치료자의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때를 알아서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임상심리학자이면서 영적 지도를 위한 샬렘 연구소의 공동 창설자인 제랄드 매이(Gerald May)는 심리적 카운셀링, 목회적 카운셀링 그리고 영적 지도를 잘 구별했다. 이것들이 어느 정도는 서로 중복되기는 하지만, 각각은 독특한 중요성과 온전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들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심리학과 영적 지도 사이에 아주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 신경증적이거나 정신병적인 증세들이 영적 여정 도중에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심리학적인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게 영적인 여정이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인 발전 도중에 과거의 정서적 손상이 표면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특별한 돌봄이나 치료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자라나면서,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경험을 할 때에는 더욱, 자신의 성격의 어둔 면을 대면할 수 있는 능력도 그와 비례하여 증가한다.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을 때에는 모든 자기 방어가 무너진다.

어려움이 생길 때에, 지도를 받는 사람은 그 수련에 계속 정진하도록 격려되어야 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향심기도는 그 수련의 기본으로서 사고와 감정을 떠나보내도록 되어 있어서, 감각의 밤이 와도 충격적인 부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가 짜여 있기 때문에 커다란 이익을 보게 해준다. 향심기도의 경험을 쌓은 지도자는 피지도자가 나아지는 대신에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도 겁먹는 일이 없이, 그 피지도자에게 이 과정에 대해 마음을 편히 갖고 신뢰를 갖도록 하는데 필요하고 중요한 격려를 해줄 수가 있다.

아주 드물게 위험 신호가 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 밑에 깔린 정서적 취약성이나 이 과정을 떠맡고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는 거짓 자아에 의해 동기가 된 고집의 결과로 온다. 정신은 건강에 대해 엄청난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보편적으로는 그 사람이 심리적으로 대할 수 있는 이상으로 덜어 내지 않는다. 덜어 내는 과정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면 기도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심각한 우울증이나 정신병 전기(前期)의 증상들이 있을 때에만 기도를 완전히 중단하게 한다. 하루에 20, 30분간 두 번씩 하는 기도수련은 그 기도가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상적인 시간인 것 같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을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경험 있는 지도자가 감독해 주거나 집중 향심기도 피정의 형식을 따라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어두운 면과 거기에 대해 필요한 것들과 함께, 자신의 성격에 대하여, 그 역동을 잘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에 관하여 더 알기 위하여, 혹은 이것들로부터 자신의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심리적인 카운셀링을 시작한다. 기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심리학적 관계에서도 두 가지가 관여한다. 즉 치료자와의 결속, 친밀 혹은 우정의 발달, 그리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도록 건강을 되찾는 치유 혹은 치료다. 과다하거나 잘못된 우정이 치유과정에 개입될 수 있다. 혹은 치료가 너무 벅찰 수 있다. 그러므로 관상기도 자를 영적으로 지도하려면 스스로가 섬세하게 균형을 유지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자신의 심리적인 역동이 작용하고 있거나, 자신에게 충족되지 않은 정서적 욕구가 있으면, 영적 지도자는 자신이 지나치게 관여하게 되거나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영적 지도를 받고 있던 사람이 다른 지도자를 찾아가기로 결정했을 때에 우리가 상처를 받으면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그 영적 여정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신호다.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도 지도를 사양할 때가 되었거나 자신이 심리적인 도움을 받아야 될 때가 되었다는 확실한 신호다. 때로 지나친 개입은 우리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성적인 감정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아니면, 지도를 받으러 오는 젊은 사람을 우리가 가져 보지 못했던 아들과 딸로 여길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피지도자의 경우를 보면, 만일 지도자가 어느 시점에서 피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하여 개인적인 책임을 갖게 하도록 강조하지 않을 때에, 전이의 관계가 의존의 관계로 변할 수 있다. 지도자는 피지도자의 영적인 온전성을 존중해야 하며, 피지도자에게 정서적, 지적 그리고 훈육적인 짐들을 지워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책임감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피지도자는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갈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로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양육에도 주의를 주어야한다. 우리 자신은 관상기도를 성심껏 하고, 자신의 여정의 경험을 깊게 하기 위하여 여러 날의 연중 피정을 정규적으로 하면서 지도 자격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 시간을 냄으로써 자신이 자격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여정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의 여정을 더욱 잘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전통에 깊이 관여해 왔으면서 향심기도를 가르치기 원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 권고하고자 한다. 자신의 이전의 경험으로 보아서 이렇게 원하는 것은 자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히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난 경우에, 자신의 뿌리로 돌아오고자 하는 욕망를 느낀다. 동양의 수련으로 그들의 정서가 평정을 찾고 어릴 적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가졌을지도 모르는 울분들이 잠잠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면들에 대한 욕구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때로 아주 능력도 있고 동양의 묵상에 대해 집중적인 수련의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좋은 선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많은 시간을 내어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개념적 배경에 동화하고 전통을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이에, 그들이 깊이 관여했던 이전의 전통으로부터 몇 가지원칙과 태도들을 인용하거나, 향심기도 방법을 온전하게 가르치기보다는 이전의 묵상 방법들의 요소들과 혼동을 일으키게도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혼자서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경험을 많이 가진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영적인 지도는 지도받는 사람의 현재 처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수련의 초보자들에게는 수련을 정기적으로 할 것, 간단한 생활 수칙, 영적 독서 등과 같이 확고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기도 수련이 정착된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독서나 공부 그리고 매일 기도할 것 등과 같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적절한 수련들이 '사랑에로의 초대' 의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졌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목표는 관상 중에 동의하는 태도들을 갖도록 격려하고 일상 중에 괴로운 정서가 일어나면 그것들을 즉시 떠나보내게 하는 것들이다. 물론, 어둔 밤이 전개될 때에 용기를 돋워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영적인 여정에서 많이 앞서간 사람들에게는 우정으로 하는 지원과 이해가 우리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우리는 어둔 밤과 수동적 정화의 경험에 대한 자신의 경험 범위 안에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도정을 지나가 본 사람이 주는 용기와 확신, 그리고 자신의 경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타당성은 경험 있는 지도자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아주 커다란 선물이다. 가장 좋은 지도는 피지도자가 종래에 가서 모든 문제에서 성령의 더욱 세련되고 섬세한 지도에 따를 수 있게 성장하도록 도와 주고 힘을 주도록 목표를 두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여정에서 동료 여행자이며 친구가 되고, 지도자와 피지도자는 서로 사랑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서로를 지탱해 준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