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관상기도의 핵심 요소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11 장  관상기도의 핵심요소        
                                     제1절 기도 안에서
                                     제2절 관상기도의 핵심요소
                                     제3절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


제 11 장 관상기도의 핵심 요소

 

제1절 기도 안에서

1). 기도는 분심-잡념과 묵상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지만, 아무리 앉아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생각이 흐트러지고 집중이 안 됩니다. 이럴 때 흔히 분심 또는 잡념이 든다고 합니다. 분심이나 잡념이란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려 할 때 그것과 관계없는 생각이 나타나서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분심을 없애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심이나 잡념들을 멈추거나 없애려고 애쓰지 않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저절로 멈춰지게 됩니다. 즉 그것들이 그대로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면 본심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지나가게 놔둔다는 것은 그러한 생각들을 "소 닭 보듯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객관적으로 보게 될 때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보게 됩니다. 결국 분심이나 잡념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 안에 무엇인가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집착을 버리면 그런 분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거룩한 생각과 감정까지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최상의 선(善)을 물에 비유하였습니다. '물이 좋은 까닭은 온갖 살아 있는 것들에 은혜를 끼치되 스스로는 싸우지 않을 뿐더러, 모든 사람이 천하게 여기는 장소에 만족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성향이 있다면, '높은데서 낮은 데로' 가는 방향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낮은 데에 가라앉아 낮음을 즐기려는 것도 아닙니다. 영처럼 승화하여 구름까지 높이 오릅니다. 그러나 하늘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시 땅에 내려 섬기기 위함입니다. 물은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합칩니다. 또한 물은 추우면 돌같이 얼고, 따스하면 흐르며, 뜨거우면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오르듯이 계속 변모하고 환경에 순응합니다.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됩니다. 그렇지만 물은 언제나 물이지 그릇이 아닙니다. 물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물은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아는, 자유자재하고 변화무쌍한 지혜의 상징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물의 본성을 따라야 합니다. 컵에 있는 물을 버리면 버릴수록 다른 것을 더 담을 수 있듯이, 우리도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께서 내 안에 더 많이 머무실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면 드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비워지고, 그 비워진 곳에 하나님을 받아들일 여지가 커져서 하나님의 현존이 더 크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매달리고 붙잡는 태도야말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그것을 모두 버릴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나중에는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완전한 기도를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성인은 "완전한 기도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하는 기도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물 위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입니다. 물이 바람을 만나면 파도가 되지만, 바람이 사라지면 파도는 사라지고 물만 남습니다. 파도의 근본은 고요한 물입니다. 파도는 일시적 현상으로, 언제나 밝고 고요한 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사람도 외부의 영향으로 화를 냅니다. 사람의 본성은 그대로인데 외부의 영향으로 분노가 작용합니다. 물과 파도처럼 본성과 분노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파도가 물의 본성이 아니듯이, 분노도 사람의 본성이 아닙니다. 물이 바람에 대응하지 않으면 파도가 일어나지 않듯,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 분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이 고요하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대상을 왜곡시키지 않지만, 바람의 영향을 받아 파도가 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시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나 화가 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 조건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마음을 밝고 고요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파도가 잠들어 물결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분심이나 잡념을 흘려보내어 머리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가슴과 머리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머리가 커질 때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 가슴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머리가 작아질수록 내면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에 가득 차 있는 관념들을 비워야, 그 빈 공간을 하나님-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자신이 내면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머리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머리로 찾는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리' 입니다. 정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정리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에 계신 하나님 가슴속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생각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의 머리를 휘어잡고 그 생각의 줄기를 따라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그와 관련된 갖가지 기묘한 생각이나 추억 또는 궁리를 하게 되면 그것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기도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잡다한 사념들에 빠져들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은 강물위에 나뭇잎이 떠내려가듯이 그런 생각들을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주의를 집중시킬 대상은 오직 강물뿐입니다. 정신이 어떤 소리나 생각, 어떤 계획, 또 수천 가지 생각 중의 어느 하나에 쓸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강물과 물의 흐름 그 자체로 생각을 되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묵상 주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기도시간은 분심과 잡념, 묵상 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이랄 수 있습니다. 분심이나 잡념이 들면 묵상주제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묵상주제로 돌아간다는 것은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주 속에 정련제를 넣어 정련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정련제는 포도주 표면에 막을 형성하여 포도주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점차적으로 가라앉힙니다. 이와 같이 분심과 잡념이 들면 다시 정련제 구실을 하는 묵상주제로 돌아가 분심과 잡념이 흘러가케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2). 기도는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는 시간

두 번째로 기도시간은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는 시간입니다. 시야의 독재성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주관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마음은 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상에 이끌려 순순히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청각은 소리를 넘지 못하고 시각은 모양을 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서는 시야의 독재성을 없애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조각가 카미옹카는 자존심이 강하고 스스로를 훌륭한 예술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쇠약한 몸으로 어두침침한 작업실의 밝은 침대에 누워 창 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미옹카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갑자기 창 밖에서 강한 광채가 휘몰아 들어오더니 작업실을 삽시간에 녹여 버렸습니다. 그 순간 자신은 허공에 떠 있었습니다. 카미옹카는 시원한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언덕 기슭에 한 마을이 보이고 회벽으로 된 낡은 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 창가에 누워 있는 한 비참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입을 쩍 벌린 채 이미 굳어버린 시체였는데 그가 바로 자기 자신이란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꿈을 깨고 말았습니다.

(쿠오바디스)의 작가인 센레비치의 (검은 바위 속에 비치는 빛)이란 단편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작가가 자신의 실존을 객관화시킨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주인공인 내가, 굳어 있는 시체인 나 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정을 나와 동일시해 버리거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 속에 있는 '거짓된 나' 만 볼 뿐 '참나' 는 보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화를 낸다'고 합시다.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화라는 감정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화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자신이 그 '화'라는 감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의미입니다. '화를 내고 있는 나' 와 '화를 내고 있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나'를 구분한다는 말입니다. 화가 날 때 대상에게 그 화살을 돌리지 않고 그 감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화는 지나가고 맙니다. 물이 바람에 저항하지 않으면 파도가 일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흘러가도록 만들 때 '참나' 에 머무르게 됩니다.

폴란드의 피아노 연주가이며 작곡가이자 정치가로 유명한 파데레프스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보스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는데 열두 세살 되어 보이는 구두닦이 소년 하나가 다가와 인사를 꾸벅하고는 구두를 닦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누추한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솔을 들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구두약이 묻어 더러웠지만 귀여웠습니다. 그래서 파데레프스키는 "내 구두는 지금 당장 닦지 않아도 좋은데 네 얼굴은 좀 씻어야 하겠다. 네가 얼굴을 닦고 오면 이 은전을 주마' 하고는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년은 "네" 하고 대답하고는 즉시 세면소로 가서 얼굴을 깨끗이 씻고 돌아왔습니다. 파데레프스키는 웃으면서 소년을 한 번 안아 주고는 약속대로 은전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돈을 받았다가 잠시 후 다시 돌려주면서 "이번에는 제가 이 은전을 드릴 터이니, 아저씨, 머리 좀 깎고 오세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파데레프스키의 모자 속에는 긴 머리칼이 단정치 못하게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긴 머리칼을 예술가의 자랑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흉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어린아이에게 망신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동정적으로 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하게 판단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빛을 때 두 개의 자루를 목에 걸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앞에 건 자루는 타인의 결점으로 채우고, 뒤에 건 자루는 자신의 결점으로 채우도록 한 그 때부터, 인간은 타인의 결점은 십리 밖에서도 잘 볼 수 있지만 자기 결점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은 쉽게 보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정작 바뀌어야 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나의 태도가 바뀔 때 세상이 변하는 것이지 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주관적으로 보는 나'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나' 로 전환되어야 새로운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객관화' 의 시각입니다.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 줄기를 타고 물 위로 올라간 수많은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 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물 위에 떠있는 넓은 연꽃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자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못 바닥에 있던 애벌레와 같은 저차원의 사람이 잠자리와 같은 고차원 세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문제를 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사고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느끼려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기 자신에게만 가려져 있던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달릴 때 앞에 장애물이 생기면 그것을 치우거나 돌아가야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 치울 필요도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객관화시켜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삶이고, 잠자리가 되듯 승화된 고차원의 삶입니다. 그것은 밖에 있는 사물, 즉 대상에 끌려 다니며 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파악하고 알게 되면서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거울 속에 비춰진 얼룩진 내 얼굴을 보고 거울을 깬다고 해서 내 얼굴의 얼룩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안에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문제가 밖의 대상에게 있다고 여겨 밖의 것을 없앤다 해서 내 안에 있는 슬픔, 화, 분노 등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저차원의 삶은 계속문제가 생겨 그 사람의 앞을 가로 막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느끼는 삶으로, 고차원의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즉 높은 창공으로 올라가면 저차원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고차원의 사람이 되면 내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이론적이고 사고적인 데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느끼며. 생각으로 문제를 푸는 삶에서 가슴으로 느끼는 삶으로 서서히 변화되고 전환되어 갑니다. 이처럼 '저차원의 삶에서 고차원의 참으로 넘어가는 것이 삶의 전환이며, 사고의 전환이고 자기객관화이자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즉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객관화이고 고차원의 삶입니다. 이때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물이 잔잔해지면 물 속을 올바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생각들을 천천히 흘려보내면 '참나'를 자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현존을 더 잘 체험하게 됩니다.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면 그것을 주시하면서 그 주시함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이 사라지면 그 사라짐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면 객관화시키게 되고 고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보십시오. 여전히 대상에게 핑계를 대면 아직도 저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 대상에 핑계를 대지 않고 받아들이면 고차원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3). 기도는 하나님께 내맡기는 시간

끝으로 기도 시간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 '내맡김' 안에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사고방식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아는 것이 많고 머리는 명석하지만 얼굴이 몹시 못생긴 랍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랍비는 로마 황제의 딸인 공주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공주는 랍비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습니다.

"오, 그토록 뛰어난 실력이 이토록 못생긴 얼굴에 들어있다니!"  랍비는 그 소리를 듣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궁궐에 술이 있나이까?" 공주가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요, 좋은 술이 있지요." 그러자 랍비가 물었습니다.

"그 술은 어떤 그릇에 들어 있나이까?" 공주가 말하였습니다.

"그야 질그릇으로 된 술항아리에 들어 있지요." 공주의 대답을 들은 랍비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왕실이면 금이나 은그릇이 많을 터인데 그렇게 좋은 술을 질그릇에 담아 놓다니요?"  공주는 당장 시녀를 불러,
"지금 당장 궁궐 안에 있는 모든 술을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에 옮겨 담도록 하라!"    
고 일렀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술을 마시다가 화를 벌컥 냈습니다.

"아니, 술맛이 왜 이 모양이냐?"

신하가 공주의 명령을 받고 술을 옮겨 담은 일을 소상하게 아뢰었습니다. 황제는 공주를 불러서 호되게 꾸중했습니다. 꾸중을 들은 공주는 그 못생긴 랍비를 불렀습니다.

"그대는 술을 금이나 은그릇에 담아두면 맛이 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을텐데 왜 알려주지 않았소."

랍비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다만 사람이든 물건이든 내용보다는 겉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유다인들의 속담에 "지식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오만한 마음에는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식을 얻으려면 겸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물은 나무 그릇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나무 그릇에는 물이 촉촉히 배어들지만, 금이나 은, 쇠그릇에서는 물이 부패하고 맙니다. 나무그릇처럼 자신을 내맡길 때 그 속에 있는 것이 부패하지 않듯, 하나님께 내맡길 때 우리의 영혼도 부패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돈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는 지식이 들어가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돈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잘 들어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부잣집 자식이 반드시 학문의 세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도 낮은 자가 받아들입니다. 무엇인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그 가능성이 점점 적어진다는 것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처음 할 때는 "내가 무엇인가 얻었다"라는 생각이 없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무엇인가 성취했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잡게 되어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잃게 됩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에 근거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얻으려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얻으려는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바다의 평균 수면보다 400m가 낮은 이스라엘의 사해는 염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어떠한 물체도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뜨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위험과는 무관할 것 같은데 물에 들어갈 때 지켜야 하는 안전수칙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수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력이 높아서 일단 바닷물에 들어가 힘을 빼고 가만히 눕거나 엎드리면 저절로 몸이 뜨지만, 혹시라도 물에 빠질까봐 걱정하면서 몸에 힘을 주면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그러면 몹시 짠 사해물이 눈에 들어가 매우 쓰리고 아픕니다. 따라서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자신이나 또는 옆 사람의 눈에 바닷물이 들어가 오히려 위험해지기 때문에, 수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아이가 어머니 품에 가만히 안기듯이 그저 바닷물에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사해에서는 사해 물에 자신을 맡기듯이, 우리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에서 행하는 것 역시 내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중에 이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면, 묵상주제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단지 기도에서 행하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즉 내 생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내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하나님께 내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며 가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어떤 이상이나 목표를 두어서도 안 됩니다. 목표가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두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정신적, 신체적인 기쁨이나 좋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쁨의 감정에 휩싸여 하는 것이 좋은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할 때는 어떤 생각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곤란함을 발견해도 포기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려는 생각도 없고, 성취에 대한 고정관념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내맡기는 것. 이것에 전념하는 것뿐입니다.

하루는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스승이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배고플 때 먹고, 잠자고 싶을 때 자고, 기도할 때 기도하면 된다.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스승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지,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야. 보통 사람들은 오만 가지 욕망을 떠올리며 먹고,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하고, 기도할 때도 오만 가지 생각을 떠올리면서 하니까 말일세. 그저 깃털처럼 가볍게 마음을 허공에 풀어놓을 수 있어야 하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만 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입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을 억제하기보다 흘려보내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단순해집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의 마음은 바쁘고 복잡합니다. 우리가 단순하고 밝은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하면 그 행동은 강하고 직선적이지만. 복잡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우리 행동도 복잡해집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행동이 복잡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조정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나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복잡한 생각이 생기고 그 생각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얻게 되면 그냥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취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얻고자 노력할 때 우리의 기도 자세는 틀어집니다. 처음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체득되어 내면화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노력하다 보면 노력이 사라지고, 호흡하다보면 호흡도 사라지듯, 묵상주제에 집중하다 보면 묵상주제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내적 침묵이고 내적 평화입니다. 내적 침묵은 지나가는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않는 상태, 즉 이러한 것들이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리라는 기대 또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놓아두면 그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목표를 세우고 은총을 청하는 일도 처음에는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내 바람이나 목표가 사라져야' 하나님과 더욱 일치하게 됩니다.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을 성취하려는 것에서 성취하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기 자신까지 잊을 떼가 하나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실 때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때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대로 내맡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정화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각을 흘려보내어 생각을 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체험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①생각의 정화

어떤 사람이 많은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명한 수도승을 찾아가서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끝없이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을 들어도 끝이 없었습니다. 수도승은 가만히 상대방의 찻잔에다 물을 부었습니다. 이미 가득 차 있는 찻잔에 계속 물을 부었습니다. 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야기 도중에 물었습니다. "아직 잔을 비우지 않았는데 어째서 자꾸만 물을 붓습니까?" 수도승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당신 생각으로 짝 차서 이제 내가 할 말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내 말을 들을 여지도 없고 빈방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 찻잔과 같습니다. 그 마음의 잔을 비우지 않으면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가르쳐 드린다 해도 다 넘쳐버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고정관념, 내 편견, 내 욕심으로 꽉 차 있으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쌓은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짧을 통해서 미인과 추녀, 더러움과 깨끗함, 행복과 불행 등을 끊임없이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내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마음대로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닙니다. 생각은 모든 것을 선과 악, 행복과 불행 ,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 등으로 갈라놓고 대립과 충돌을 일으켜 우리자신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경험과 지식, 성향 등으로 꽉 차 있어 우리 자신의 본성, 즉 '참나'를 찾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제한해 왔던 짧의 장벽 (생각의 장벽)을 부수어 본래의 '참나'를 찾아야 합니다. 대상을 아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드나들게 하려면 기도를 통해서 생각을 정화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은 '생각(관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자신에 대한 의식에 매여 있는 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바깥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으려면 우리의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모든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절로 오십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며 기도에 잠길 것입니다. 성서를 묵상하면서 열정과 헌신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선행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흔히 하는 '묵상 기도'는 추리와 사고로 나타나는 기억, 이해, 의지라는 영혼의 세 가지 힘이 행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다 기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일부러 애써 하던 노력을 멈추어야만 할 때가옵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버려 둘 때가 오게 됩니다. 노력하더라도 꼭 얻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결실을 전혀 원하지 않고 초연해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성적 추론은 줄어지고 산만한 지적인 노력이 없어지면서 하나님과 함께 고요히 머무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때에는 머리로 생각하는 모든 추론과 사고와 노력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면 하나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추론과 생각으로 이해하고자 애쓰지 말고, 실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고통 속에서만 하나님과 하나 되는 부활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생각을 버려라. 추론적 지식을 사용하지 마라. 이성의 판단을 중지시켜라. 참다운 앎은 그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그대 정신의 다른 차원에서 개발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지식과 개념과 사유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기도에서 얻는 위안이나 황홀경과 같은 일체의 모든 욕구나 욕망까지도 단호히 버린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대로 머물기 위해 내가 행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 3:22)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잡혀갔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마 10:19)는 태도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눅 1:38) 하고 말한 마리아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맡김의 흐름 속으로 합류되어 가는 태도는 오랜 시련과 시행착오, 성공과 실패를 겪은 후에만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과 집착과 이기심을 떨쳐 버리려고 애쓸 때, 추론적 방법으로 대상을 분석하기 위해 그 대상을 향해 의식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을 관상하고 그 대상과 동일시할 때 가능한 태도입니다. 이것만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참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마음입니다. 기도를 통해 생각을 정화하여 이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이성과 사고, 주관과 객관적 판단에서 초월하게 되고, 모든 이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물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편견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마 10:20)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② 과거 경험(무의식)의 정화

버릇이 쌓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쌓이면 인격이 된다고 합니다. 본능과 동기들은 무엇에 의해 금지되면 무의식으로 들어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 행동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는 항상 말이나 이미지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행동을 올바르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무의식 속에는 억압된 기억. 과거의 추한 경험, 상처 그리고 공포와 고통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형성된 좋지 않은 무의식적인 것들을 정화함으로써 과거의 잘못된 경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 기도가 잠심상태로 이어지면서 깊어지게 되면, 보통 때는 무의식에 있어 자각하지 못하던 많은 상(相)들이, 곧 과거의 체험과 감정들이 마음의 표면인 의식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무의식에 가두어 놓았던 증오, 질투, 두려움, 노여움, 불안, 자기중심적 욕망 좌절, 투사 등이 의식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의식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의식의 지평을 확대하며 무의식의 요소를 의식에 통합시키는 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무의식의상이 의식으로 끌어 올려지면 그것을 정화해야 하는데,그 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릅니다. 일단 그 고통을 이겨내어 "감각이 정화되면 그 영혼은 혹독한 감옥 생활에서 벗어난 자와 같이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방되어도 "처음에는 평화와 기쁨을 주는가 싶다가 다음순간 두렵고 공포스러울 정도의 무미건조함을 또는 걷잡을 수 없는 내면의 사나운 폭동을 초래하다가 다시 평화를 안겨다" 줍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무의식을 올바로 이해하고 행동 습관의 질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행동 방향을 설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정신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도와주는 정화 기도는 무의식을 의식으로 떠올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갈등을 없애고, "우리를 단절하는 무의식의 장벽들을 허물도록 이끌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또 과거의 경험들을 정화함으로써 대상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21).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사는 일과 죽는 일, 건강과 질병,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아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아픔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과 추억(Prince of Tides)>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감정의 억압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이 영화만큼 잘 보여주는 영화는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13살 때, 근처 교도소에서 탈옥한 죄수들이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주인공을 성폭행하였습니다. 이때 밖에서 돌아오던 형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엽총으로 죄수들을 쏴서 죽입니다. 그런 뒤 주인공의 가족은 죄수들의 시체를 묻고, 벽에 묻은 피를 닦아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도중 주인공의 어머니는 내내 자녀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나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월이 흘러갑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의 형은 자살했고, 여동생도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다가 병원에 입원했으며, 주인공은 착한 아내, 건강한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도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여 이혼 수속을 밟고 있었습니다. 13살 때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억누르면서, 부정적 감정의 사슬에서 풀려 나오지 못한 주인공과 그 가족들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준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잊어버렸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계속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미래까지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정화시키지 않으면 왜곡된 나의 모습을 강화시키는 격이 됩니다. 그것은 '참나'가 아닙니다. 볼록거울이나 오목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왜곡된 모습은 어떤 때는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 상상력 그리고 자아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을 정화시켜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색안경을 끼면 다른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지만 색안경을 벗으면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색깔을 구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과거 경험이 정화되면 영혼의 기능이 자유롭고 순수해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결국 과거 경험의 정화로 우리의 마음은 오감에 끌리지 않게 됩니다. 사고활동이 정지된 밝고 고요한 마음에서 사물을 관찰하면 마음을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외부 지향적이고 대상을 향해 흐릅니다. 우리의 정신 활동은 욕심과 집착 때문에 대상을 찾아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물을 볼 때 그 바라봄이 외형적인 것에 끌리게 되면 진실은 왜곡됩니다. 영혼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안을 보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을 보는 눈입니다.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영혼의 내적 눈이고, 그것이 눈의 진정한 기능입니다. 영혼의 외적 눈은 피조물을 향하고 있으며, 그 피조물의 외면적 형태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으로 눈을 돌려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외적 눈을 버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즉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과거의 경험들을 온전히 정화한다면, 마침내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며 진정한 내적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눈을 가질 때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내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참나'를 인식하게 되고, 바로그때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과 과거의 경험이 정화되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즉 일을 하면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결과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목숨을 건 검술 대결에서 승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전심전력하게 됩니다. 이것은 목석처럼 무감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결과에 대한 생각까지 잊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과거의 경험이 정화되면 될수록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어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 2:20)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이 기도 단계에 이른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빼앗길 수 있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로 결합하게 됩니다. 어떤 곳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니, 그 마음은 하나님과 일치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각자가 자기의 사랑과 자기의 의지와 이권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모든 영신 사정에서는 더욱 진보할 것"(영신수련 189번)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자기 사랑, 자기 의지, 자기 이권에서 멀어질수록 생각과 과거의 경험은 정화되고, 이것이 온전히 정화될 때가 바로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때입니다.

제2절 관상기도의 핵심요소

관상 기도가 무엇인지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우선 무엇이 관상 기도가 아닌지를 밝혀 보도록 하자. 관상 기도는 영적 주의성을 깨우치는 시발점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술은 아니다. 그것은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마술의 담요(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영적인 행복의 시간(하루 일이 끝난 직후인 초저녁에 차 한 잔을 나누며 피로를 푸는 시간 : 편자 주)도 아니며, 환각적 약물이나 자기 최면, 혹은 황홀경을 대신하려는 어떤 것도 아니다.

관상 기도는 성령의 은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사도 바울이 열거한(고전 12:7-12)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 지식의 말씀,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지혜의 말씀, 말씀을 전하는 직책, 성령의 활동을 가려내는 힘 등을 말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 모든 은사는 그 지방 크리스찬 공동체에 용기를 주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그 일차적인 목적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이익이 되거나 그 사람을 성화하려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은사들이 관상 기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거나, 거룩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표시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해 무작정 선망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아마도 가장 눈에 띠는 은사는 예전에 "성령 안의 죽음"이라고 불렸던 성령 안의 쉼이다. 이것은 기름 바름이나 축복을 통해, 때로는 치유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달되었다.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쉬도록 이끌리는 경험을 한다. 그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만일 동의하면 그들의 외적인 감각은 잠시 정지되고 바닥에 미끄러져 내려간다. 거기에는 즐거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바닥에 누워 있으면서 그 경험을 연장하려 하거나 아니면 치유자에게 다시 돌아가 다시 한번 받으려는 인간적 경향이 있다. 요즈음 같이 이러한 성령 은사가 늘어나는 때에는, 올바로 균형 잡힌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들이 이런 특별한 선물들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영적 여정을 시작하라는 부르심이지, 가급적 여러 번 큰 행복감을 가지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후자의 것은 영적으로 탐식하는 행위이다.

많은 사람들이 매우 의미 있고 때로는 아주 강력한 신비적 은총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면 언제나 우리에게 손을 뻗으시어 우리를 당신 현존으로 이끌어 주실 수 있다. 또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계신 그분이 당신의 비밀 장소에서 살며시 향기를 피우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 때로는 특별한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러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 일반적인 크리스찬 교육에서는 크리스찬의 신비적 경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경우, 보통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이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표현하지도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은총들은 최상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르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가 바닥에 그냥 누워 있기를 원하면 잠시 잠을 잘 수도 있다.

때로 관상 기도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는 다른 종류의 경험은 일련의 심령 선물이나 유사 심리 현상이다. 요즈음 이러한 것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어느 인류학자는 인간 가족이 전반적으로 정신 자아의식에서 직관적 의식의 수준으로 옮겨 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의 두뇌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단지 인간 성장에 따르는 부산물인 것이다. 만일 이 에너지가 노래, 도(道) 수련이나 요가 수련 운동, 빠르게 걷기, 적당한 뛰기, 혹은 수공예나 정원 가꾸기 등과 같은 가벼운 일들을 통하여 육체에 잘 자리 잡고 있으면 육체는 이 증가하는 에너지를 적당히 분산시켜 준다. 그러나 만일 이 자연적인 에너지가 육체 어느 부분이나 신경 계통에 묶여 버리면 이것들이 심령이나 신체적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직관적 수준의 의식에서도 거짓 자아는 작용한다. 직관적 수준이 제공하는 것(그것은 인간 잠재력의 성장에 매우 의미 깊다)은 새로운 에너지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에너지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영적 에너지는 자신을 과시하는 데에 그리고 비상한 은사에 홀린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우선, 거짓 자아가 상당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 은사나 심령의 힘들은 쉽게 머리로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자부심이 생기고 자기도취로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물들을 행사하기 전에 영의 밤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신비적 현상을 보자. 이러한 것들은 심령 현상으로서 하나님 현존과 활동으로 영감을 받은 것인데, 육체적 황홀경, 들려진 말씀(상상이나 영안에 외적으로 주어진 말씀), 외적 혹은 내적 환시 등이 있다. 파티마나루르드의 발현은 그것들이 근거가 있는 한, 환난과 전쟁과 박해의 시대에 크리스찬들에게 용기를 부어 주려는 은사일 것이다. 그것들은 곧,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힌두 전통에는 예수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인 파탄잘리라는 사람이 백 가지도 넘는 siddhis, 즉 심령의 힘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힘들은 의식 수준의 진전에 맞추어 융화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영적이라 해도 어느 단계에 고착되어 더 성장하지 않으면, 그 단계에 적절했던 은사들이 썩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처음에 이익을 주며 시작했던 그 은사는 영적인 자부심에 빠짐으로써 자신에게 해롭게 되고,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남을 이용하면 그들에게 역시 해가 된다.

모든 시대 중에서 가장 크게 부양(浮揚)했던 사람은 17세기 카푸친회 수사인 쿠페르티노의 성 요셉일 것이다. 영적 여정의 어느 기간에 요셉은 앞에서 묘사한 대로 매우 기쁨에 찬 신비를 경험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여도 공중에 떠올랐다. 그는 대부분의 부양자들처럼 몇 피트 정도가 아니라 천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것은 수도자들이 성무일도를 바칠 때 문제가 되었다. 장상들은 요셉의 은사에 대하여 좋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워낙 모범적인 수도자였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관망하기로 하였다. 어느 날 0.5톤이 넘는 거대한 십자가가 교회 첨탑 위에 놓여지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그 당시에는 기중기도 없었고 발판은 결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첨탑까지 끌어올리기에는 너무 위험하였다. 수도자들이 대책 없이 손을 비비면서 서있는 동안에 요셉은 그 일을 하라는 성령의 영감을 느꼈다. 그는 떠오르면서 조금 소리를 지르고는 그 큰 십자가를 쥐어 잡고 첨탑으로 올라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는 사뿐하게 땅에 내려왔다 그 외에도 요셉은 다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예수의 이름이 나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심장에 매우 큰 고통을 받았고, 내적으로 하나님 안으로 녹아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심코 다른 수도자를 잡으면 둘 다 떠오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장상들이 보기엔 지나친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요셉에게 떠오르지 말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요셉은 그것이 자기에게 올 땐 자신도 저항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지만 장상들은 중지하라고 고집하였다. 그는 매우 순명하는 수도자였기 때문에 떠오르는 것에 저항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요셉은 결국 우울증에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비슷한 증세를 나타내는 영의 밤을 말하는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영의 밤이 그를 변형시킨 것이지 그 부양이 변형시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유사 심리 현상은 관상의 부산물이기는 하지만 그 핵심 요소는 아니다. 어떠한 생산업자도 부산물을 얻으려고 생산업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만일 심령의 혹은 영적인 부산물에 더 관심을 가지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며, 우리가 그것들에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하면 그것은 영적여정에 장애가 된다. 우리는 영의 밤에 정화 작업을 거친 후에라야 자신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은근한 만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시대엔 특히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들이 크리스찬의 관상적 전통, 기도의 단계들, 그리고 여정 중에 일어나는 함정들에 온전히 익숙해야 감각의 밤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 이처럼 영의 밤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미 관상 기도를 체험한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그들은 또한 심령이나 신비적 현상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도록 영적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주의를 받을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케이크 장식용 크림만으로는 살 수 없고, 순수한 믿음의 단단한 음식을 필요로 한다. 관상 기도의 핵심 요소는 외적이거나 내적인 현상에 있지 않고 순수한 믿음에 있다. 이것이 생명으로 이르는 좁고도 어려운 길이다.

관상 기도를 느껴지는 체험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깊이 뿌리박혔고, 불행하게도 점점 그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근세의 영성 작가 중에는 관상을 느껴지는 하나님의 현존이나 영적 감각의 표현으로 알아보려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 감각이란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대상을 경험하듯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신학을 다루는 교과서에도, 관상은 그것이 진실한 것이려면 느껴져야 한다는 가정들을 직접 간접으로 볼 수 있다.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물론, 관상 길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관상기도에 투신하면서도 아직 아빌라의 데레사나 다른 신비가들이 말한 유형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 들어오는 것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덜 관상적이란 말인가? 루스 버로우는 '신비적 기도의 지침'이라는 그녀의 저서에서 서로 잘 알고 있는 두 수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 수녀는 가르멜 수녀였고 다른 한 명은 세속에서 바쁜 활동을 하는 수녀였다. 활동적인 수녀는 기쁨에 찬 신비가였다. 하지만 다른 수녀는 전형적으로 단조로우며 믿음이 깊고 순명하는 수도자로서 30-40년 동안 매일 관상 기도를 수련하면서 대부분의 기도 시간 동안 고됨과 싫증, 끊임없이 떠오르는 원치 않는 생각들로 꽉 찬 경험을 하였다. 그녀는 감각의 밤에서 나오는 대신에 전환기를 겪지 않고 영의 밤에 머물러 있거나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루스 버로우는 이 두 사람이 거의 같은 때에 변형하는 일치를 하였다고 말하였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온전한 일치의 기도가 변형하는 일치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라고 썼다. 그것이 이 기도의 참 목표인 것이다. 그 기도가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보통의 과정을 촉진하는 특별한 길일지도 모른다. 루스버로우는 환희적 신비는 은사일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숨은 계단으로 이끌리는 대부분의 관상 기도자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관상의 여러 단계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렇듯 필요한 심리적 경험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 같다.

이는 결국 관상 기도는 근본적으로 어둠의 빛이라고 한 십자가의 요한의 훌륭한 성찰로 이르게 한다. 거듭거듭 그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데에는 순수한 믿음이 첩경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즐기는 어떠한 신성함의 경험에서 느끼는 것도,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거나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빛을 발산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믿음만이 모든 인간적인 경험을 초월하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에게 접근하게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만일 한줄기의 빛이 완전한 진공속을 통과할 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빛으로 지나가는 물리적 에너지를 반사할 먼지가 완전한 진공 속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신성한 빛을 우리의 전 존재(몸과 영혼과 영)로 계속해서 비춰 들어온다. 영적인 감각들마저도 그 핵심인 신성한 에너지의 헤아릴 수 없는 순수성과 힘을 감지하지 못한다.

요한의 첫번째 편지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어둠 속에서 그분을 아는 것에 동의할 수 있으며, 그 어둠 속에서 신성한 현존에 대한 보이지 않는 확신을 가진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의 요한의 성찰을 이해할 수 있으면,우리는 여정 중에 일어나는 커다란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우리 문계의 대부분은 비현실적이고 충족될 수 없는 기대를 하는 데서 온다.

순수한 믿음의 좁은 길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십자가의 요한의 이러한 가르침은 마천루에서 급행 승강기를 타는 것과 완행 승강기를 타는 것 사이에 있는 차이를 묵상함으로써 예증될 수 있을 것이다. 완행 승강기는 층마다 서기 때문에 한층 한층 멈추어 서서 보면 경치가 더 좋아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경치에 매혹되다 보면 승강기에 다시 올라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심령 현상을 받아들이거나 실제적인 체험을 바라는 것을 금하였다. 후자의 것은 신성한 일치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지는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음성을 듣거나 향기를 내거나 내적 외적 환시 등을 경험하면, 그것에 저항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그 은사가 높은 것일수록, 우리의 거짓 자아의 잔재와 영적 자부심의 잔재에서 보호받기 위해 감각의 밤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다. 우리가 영적자부심의 낚시에 물리면 영적 여정의 진전은 갑작스럽게 정지한다. 맨 위층에 도달하기 위하여 급행 승강기(즉 순수한 믿음의 길)를 타는 지혜가 무의식을 덜어 내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기는 신비 현상을 피하는 길이다. 순수한 믿음의 길은 우리의 영적 여점이 어디쯤 와 있는가를 염려하지 않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선물이 나의 것보다 더 좋다고 판단하지 않는 마음으로 관상 기도에 전념하게 만드는 길이다. 우리의 기도에 어떤 심리적인 내용이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신성한 활동에 승복하면 이 모든 넌센스를 절약할 수 있다. 순수한 믿음 속에서는 완전히 성장한 사람들에게도 여정의 결과들이 감추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제 흘러 들어온다고 느껴지는 은총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수녀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자신의 원시적 감정과 아동기 초기에 받은 정서적 상처들을 덜어 내느라 무서운 투쟁을 해 나가면서도 그 수녀는 무료하고 습관적인 관상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수녀원의 정원에 들어서며,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음을 갑작스럽게 인식하였다. 자신의 자아동일시에서 "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커다란 "있는 자"가 그녀의 인식의 중앙무대로 들어온 것이다. 그녀의 동일시의 원천은 더 이상 자기가 알고 있던 자신이 아니고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이 그녀가 잠자고 걷는 모든 행동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또 그 생명이 지칠 줄 모르는 결단을 가지고 그녀의 성소를 완성할 힘을 그녀에게 넣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변형하는 일치로 이끄는 것은 영적인 체험이 아니라 여정에 투신하면서 수련을 충실히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체험들이 우리를 투신하도록 도와준다. 때때로 우리의 상처와 어릴 적의 정서적 고통이 치유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 치유가 일어난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어른처럼 다루며 일하시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리는 좁은 길, 즉 순수한 믿음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우리가 동의하고 승복할 수 있도록 이제 믿음의 신성한 빛이 온전히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깊은 상처들을 치유해 주고 또 다른 이와 치유를 나눔으로써 전(全) 생애에 있었던 상처들을 치유하고 변형하는 빛으로 우리를 이끌며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만일 매순간 은총의 신성한 에너지가 우리의 존재의 밑바닥으로 침투해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에 영향을 갖게 한다. 변형하는 일치에 이른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다. 그러나 그 변화를 자신들은 자각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조용히 살고세속에서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자신들은 수도자들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상 기도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근세에 와서 관상에 대한 오해로 이해 자신들은 관상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이든 수도자들이 관상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해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흥분하지 않을 만큼 실제로는 거룩한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이 곧 숨은 길로써 얻어지는 승리인 것이다.

제3절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들

매일 한 시간씩 하는 관상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그 필요성을 제시해 주는 실질적인 이유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는 좋은 지향을 가지고도 극복할 수 없는 습관적인 결점들과 약점들을(예를 들면, 조급한 비판, 화내기, 심한 말들, 적대감, 우울증에 빠지기)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결점들은 우리 자신과 이웃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침묵과 승복 중에 성실하게 하나님을 추구한다면, 이런 결점들의 영향력이점차로 약화되고, 결점들 자체도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지의 구름」에서 말하는 대로 "관상에서는 영혼이 제아무리 성스러운 일에 열성인 사람일지라도 고백이후까지 반드시 남게 되는 죄의 뿌리와 근원을 제거하게 됩니다."

둘째, 같은 식으로, 이런 관상기도는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을 크게 줄여 준다. 특히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대비하고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공동체 생활에서는 이런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런 관상기도의 실천이 진정한 공동체 생활의 건설을 위해서 아마 잦은 대화(물론 대화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화에서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침묵의 기도에서는 사랑과 평화의 추구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문제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할 때일지라도 우리는 충돌하는 일이 없이 잘 진행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셋째, 우리는 잠을 자고 깨어 있기, 일하고 쉬기,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기를 매일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치유'와 사랑의 움직임을 점검하기 위해서도 매일 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활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균형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넷째, 많은 목회자들과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처음 소명을 느꼈을 때와 수련소나 신학교에서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상적인 의무와 영신 수련이 지속적인 개인 기도를 밀쳐 버리고 말았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좀 더 철저한 개인 기도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반길 것이며, 이 철저한 개인 기도를 자신들의 소명과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끝으로, 이 관상기도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행한 다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이 관상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아주 개인적인 계약을 맺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 계약의 외적 표지는 매일 행하는 한 시간의 기도이다. 이 계약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계약은 우리가 세례 때에 한 약속의 완성된 열매이고, 주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새로운 계약의 성체성사에서 영원히 거행되고 쇄신된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