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관상생활(일상생활의 영성)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12 장  관상생활
                        제1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제2절  관상과 활동        
                                     1. 관상에서 활동으로                
                                     2. 활동 안에서의 관상
                                     3. 일상생활의 영성
                                제3절 성령쇄신과 관상  
                                제4절 삶과 성장과 변형을 위한 지침
       
  

제 12 장 관상 생활

제1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한 시간 동안의 침묵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이나 사제나 수도자로서 당신의 생활 전체와 당신 자신에게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성소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는 삶으로 불린 것이라고 체험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삶을 약속하신 것으로 안다.

한 시간의 관상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약속을 지켜 주시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은총을 위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 마음과 정신의 비폭력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기로 굳은 결심을 해야만 한다. 이 결심이야말로 이 관상기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고 이관상기도의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를 움켜잡고 있는 악한성향과 칠죄종(교만, 질투, 분노, 폭식, 육욕, 태만, 탐욕)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그 중에서도 분노의 열기가 우리의 평화를 방해하는 주요 요소인 듯하다.

적어도 폰투스의 에바그리오(Evagrius of pontus, 345-399)는 그렇게 말했다.

분노(원한, 의심, 반감, 쓰라림, 역정, 비장함)에 이끌리거나 굴복하면 기도할 때에 그 값을 치러야만 한다. 기도는 우리 내심의 평온이나 폭풍을 지시해 주는 유용한 척도이다. "기도는 분노의 부재(不在)이며 온순함의 결과이다." (에바그리오) 분노의 뿌리에는 세속적인 것과 세상의 가치에 대한 애착과 욕망이 있다. "사람이 음식이나 재산이나 명성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화를 별 일이 없을 것이다." (에바그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그분의 성령이 증거 해 주시고, 복음에 계시되고, 산상 설교에 선포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폭력과 증오와 악한 욕망과 비판이라고는 전혀 없는 예수님의 마음, 관대하며 연민으로 가득 차 있고, 주고 싶어 하고 나누고 싶어 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

우리는 폭력적인 것으로부터 비폭력적인 것과 평화로운 길로, 모든 종류의 거짓으로부터 참된 진실과 내적인 조화로, 자기주장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권리와 느낌으로, 자기 관용으로부터 마음과 정신의 순결에 대한 직감으로, 소유와 욕심으로부터 주기와 나눔으로 그리고 진지함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옮겨감으로써 우리의 지속적인 자기 봉헌과 순명을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한 사랑, 성령 안의 기쁨, 마음속의 평화, 인내하는 태도, 모든 이에게 대한 친절, 지향의 선함, 모든 일을 진실하게 처리함, 내적이거나 외적인 행동의 부드러움, 마음과 정신의 자기 통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환영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예수님의 성령께로 열어 드리는 그 만큼 이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 만큼 우리는 지속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나는 또한 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해서는 소박하고도 착실한 생활을 하고, 소설이나 책을 충동적으로 읽거나 텔레비전과 영화를 보는 등의 현실 도피적인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자유롭게 지키면, 우리는 때때로 좋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거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관상기도는 정신에 과중한 부담을 주고 마음을 묶어 버리는 현실 도피적인 습관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키우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처음부터 그분이 약속해 주신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우리 열망의 강도가 언제나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께로 끌리는 매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 사람과 동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만약 이 일(하나님께 대한 관상적 사랑)에 대하여 듣고 읽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당신이 잠을 자러 갈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하루 종일 당신이 다른 일들을 할 때에도, 늘 이 일만을 생각하게 되어, 당신을 당신의 일상적인 활동으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만약 관상작업에 대한 이 매력이 당신의 열망과 합쳐져서 당신의 유일한 열망이 되고, 당신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외모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입술에 즐거운 웃음을 가져다준다면, 만약 이렇게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모든 것에서부터 위로를 받고 아무것도 당신을 방해할 수 없다면, 만약당신이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려고 일천 마일이나 달려가서 그를 만났을 때, 그도 진실로 당신과 똑같이 느꼈다면, 만약 당신이 그곳에 갔을 때에 누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든지 상관없이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만 한 가지 그것뿐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면, 만약 당신의 말은 몇 마디 안 되면서도 불과 기름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만약 당신의 짧은 말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나 이성을 초월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라면, 만약 당신의 침묵이 평화롭고 당신의 말이 교훈적이고 당신의 기도가 은밀하고 당신의 긍지가 올바른 것이고 당신의 행동이 겸손하고 당신의 웃음이 부드러우면, 만약 당신의 즐거움이 놀이를 하는 어린이의 것과 같다면,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는 따로 떨어져서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면, 만이 당신이 오직 이 한 가지 외에 다른 아무것에 대해서도 읽거나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이러하다면·…."

당신이 언어와 사고를 초월하는 참다운 관상기도에 몰입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Jesus, dulcis memoria(감미로운 예수님 생각)이라는 성시의 가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하나님께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예수님 생각 그리워라. 참된 기쁨 주시도다
그러나 내 옆에 모시오면 얼마나 복되리

예수님, 성자 예수님보다 아름다운 이름 없네
노래도 사모도 오 주 예수님 더없이 즐겁네

예수님, 회개자의 희망이요 청하는 이 은혜 주며
찾는 이 반가이 맞으시니 모시면 어떨고

예수님, 예수님 사랑 어떠한지 혀와 글이 부족하고
사랑을 맛본 이, 그이만이 믿을 수 있으리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런 말로도 묘사할 수 없고, 어떤 책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다만 체험으로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당신이 내 마음을 찾아오실 때,
내 마음은 진리의 광채로 목욕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맛을 잃어버리고,
내 안에서는 사랑이 불타오릅니다.

당신을 맛본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굶주리고
당신을 마셔 본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목말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내가 받을 상이오니,
지금 벌써 나의 기쁨이 되어 주소서.
당신의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히 내 안에 거하소서. 아멘.

하나님께 대한 이런 매력과 열망을 키우고 강화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성서묵상(Lectio Divina)'이다

이 묵상법은 영적 독서를 통한 묵상법의 일종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과 기도로 이끌어 주리라고 우리가 느끼는 성서의 구절들을 영성적으로 읽는 것이다.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의미를 깨우치며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께 다가가게 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비록 짧은 부분만 읽어도 말씀이 우리 정신과 마음을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열망으로 채워 준다.

이런 영적 독서는 우리를 관상으로 인도하면서 우리 정신이 경건한 묵상에 잠기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관상하고 싶은 열망으로 타고 있다면, 경건하고 지속적인 묵상을 해야 한다. 이것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영혼은 거룩한 속성을 가진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거룩한 성서가 모든 것의 첫째가는 그리고 가장 순수한 원천이다. 또한 진실로 잠심하는 독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이제 이런 평온한 상태에서 영혼은 많은 빛을 받게 되고, 전에는 감추어져있던 의미들과 미세한 변화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감미로운 체험이 되는 실체로서 일종의 비추심과 같이 힘들이지 않고 명백해진다. 그러면 영혼은 이 빛을 주시는 현존이 바로 성령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 대한 더 높은 사랑의 지식이며, 그분의 성서에 대한 더 깊은 믿음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기도의 은사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침묵의 기도로 당신을 알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성령을 제 안에 넘치도록 채워 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성령께서 저를 온전히 차지하시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께서 제 안에서 다스리시고, 당신께서 저를 통하여 다스리시게 해주십시오. ‥‥‥"

첫째,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청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이 기도로 청하는 것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을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경건한 노래를 경솔하게 부르지 말 것이다.

말을 경솔하게 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도는 경솔하게 시작하지 말 것이다. 기도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기도를 시작하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필요로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 올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이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절대로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실 것이며, 당신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분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제2절 관상과 활동

1. 관상에서 활동으로

몇 년 전에 '미션'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그것은 17세기에 남미의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접경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다룬 것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이 자급자족하게 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원주민들은 여러 해 동안 그들의 땅을 통치하려는 유럽의 정치력에 희생 되어 왔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의 복지와 자주성을 이루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이 공동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 지 역에서의 노예 거래와 식민지 확장에 위협이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는 이 선교사들과 공동체들의 저항에 직접 부딪치지 않으면서 줄어들고 있는 노예 거래를 다시 확대해 보기 위해 교회에 상당한 압력을 넣었다. 정부의 관리들은 만일 교황이 이 선교를 끝내지 않으면 자국 내의 모든 예수회를 문 닫게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전에 예수회 회원이었던 교황 사절이 유럽과 전 세계의 예수회를 살리기 위하여 이 선교 사업을 닫으라는 교황의 밀명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 사절이 처한 딜레마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예수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을 전하고 대학과 피정의 집들을 전 세계에 만들어 가고 있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교회의 개혁에 대한 이 모든 노력을 끝낸다는 것은 중대한 손실이며 나아가 큰 재난인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사절은 이 지역 예수회가 선교 사업에서 하고 있는 훌륭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정글에서 나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크리스찬 신앙과 함께 계몽된 사회적 가르침을 받아들인 행복스럽고 부지런한 원주민들을 만났다. 내적으로 괴로운 싸움과 많은 기도를 한 다음 그는 이 선교 사업을 끝내라고 명령하였다. 원주민들은 떠나기를 거부하고 몇몇 예수회 회원들도 그들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교 사업의 창설자는 이 사업을 옹호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유럽의 권력가들은 용병을 사서 대포로 이 무기력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모든 원주민과 선교사들을 학살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사들은 그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사절을 만났다. 사절은 그 학살의 정돈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끓어오르는 모욕감을 가지고 "정말로 이런 학살이 필요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이 사절의 분노와 격정을 진정시키려고 한 대사가 달래듯 "각하, 너무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여하튼 지금 세상은 이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니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란 말이오"라고 그 사절이 대답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가서는 밖에 있는 무엇을 응시하면서 자신에게 더 정확히 말하려는 듯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세상을 만들어 간 것이 바로 '나'야!" 그리고는 눈에 눈물방울이 어른거렸다.

이 '미션' 이라는 영화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와 우리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불의의 책임에 대한 질문이다. 무죄한 사람들이 세계 권력자들의 경제나, 지역권 이익에 장애가 될 때 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신화적 회원의 의식 수준에서 그 대답은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이다"이다. 누구든지 돈이나 힘을 많이 가진 자가 이긴다. 국가적인 이익이 언제나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크리스찬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무력으로 무죄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억압은 엄청난 정도의 집단적 죄이며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 같은 엄청난 악에 어떻게 내가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신화적 회원 의식의 한계성은 특히 특정한 문화나 이익 집단의 가치에 충성을 다할 때에, 그리고 복음의 가치에 온전히 응답하려고 하는 데에 우리에게 장애가 된다.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 우리 안에 깊이 깔려 있는 미리 포장된 가치관이나 선입견으로 그것을 대한다. 정의를 위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진복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지구의 환경과 우리 시대의 광범위하고 악화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짊어지라고 우리를 촉구한다.

그 시대의 문화적 조건화의 영향을 받은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 해방령에서 명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임기의 처음 여러 달 동안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헌법이 각주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남부 주들에게는 노예가 그들의 권리였기 때문에 그 노예법이 새로 편입하는 서부 주들에게까지 확대되지 않는 한 링컨은 남부 주들의 노예 제도를 옹호하였다. 후에 그는 노예 제도의 악습이 남북 전쟁의 일차적인 문제임을 안 뒤에야 노예 해방령에 서명하였다.

근래에 들어서며 인종 차별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어 왔다. 모든 종류의 망상적인 논리의 지원을 받아 백인이 흑인보다 우세하다는 주의를 펴면서 부당한 정치적 구조를 뻔뻔스럽게 지지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상황에서 자라나면 그들은 이런 정신 자세를 무조건 흡수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비단 남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식민주의의 인종적인 색깔은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의 병든 사고방식을 반영하여 왔다. 우리가 불의한 상황에 일단 동의를 하고 나면, 이성이 여기에 협력하여 그것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도록 논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여러 종파들은 유럽의 식민주의적 정신 자세를 가지고 아시아에 선교사를 보냈다. 선교사들은 서방의 문화가 동방의 문화보다 더 나으며, 아시아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 무리들이라는 관점에서 설교하였다. 사실 상 많은 경우에 아시아인들은 교회가 회두시키려고 했던 중세 유럽의 야만인들보다 훨씬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고방식은 자신들의 선입견이나 고정 가치관에 대해 의문을 품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4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도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 문화 안에서 복음대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몬차닌 수도원장, 헨리 르소, 베데 그리피스 신부 같은 분들은 인도에서 후자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리피스의 사원에서는 힌두 경전의 구절들이 인도의 수도 제도인 산야시의 관습과 함께 전례에 삽입되었다. 크리스찬 수도 생활의 가치가 현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활화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그들의 창조력을 자유로이 발휘하고, 또 자신들이 받은 종교 교육과 세속의 철학적 국가주의적 가치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탈피한 사람들의 천재성이다.

만일 가톨릭 대중들이 신화적 회원 의식의 수준에서 탈피하여 나치 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감을 가졌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묵묵히 그 운동에 따랐을 것인가? 프란츠 야거스테터는 그 전쟁이 부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징병을 거부하였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으나 그것이 그에게 최고의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그의 양심은 "너는 이렇게 불의한 정부나 그 전쟁을 지원할 수 없어!"라고 말하였다. 그는 독일 군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여 감옥에 갇히고 결국 참수 당하였다. 그가 양심을 위해 순교하였으므로 그는 종교에 대해 순교한 것과 같다.

일곱 번째 진복에서 예수는 "행복을 사랑하는 사람은 복되다"라고 하시지 않고 "행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되다"라고 하셨다. 앞의 사람들은 자신이 탄 배가 흔들리기를 원치 않고 그리하여 당혹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자들은 노숙자들에게 당황하여 그들을 숨겨 버린다. 최근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은 반대자들에게 당황하여 그들을 숨기려 하였다. 모든 고정 관념과 편견과 선입견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독재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이나 다른 사람들의 비참함 때문에 그들의 생활이 동요되지 않기를 바라는 욕구에 미끼를 던져 줌으로써 그들을 다룰 수 있다. 신화적 회원의 고정 관념은 다른 추들의 권리와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불의를 가져온다.

신화적 회원 의식을 초월하여 나아가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전 인간 가족이 정신 자아의식 수준에 이른 것이 기원전 3000년경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책임을 지는 성숙함은 우리 각자가 내면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성숙은 우리의 퇴행적 경향과 소속감과 자아 가치감을 주는 국가, 인종, 종족, 종교적 집단에 대한 과잉 동일시로 인해 강력한 저항을 받는다. 이러한 퇴행적 경향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이름으로 지속되는 불의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것을 방해한다.

국가들은 아직도 신화적 회원 의식의 수준에서 국가 간의 차이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다음의 이야기로 이것을 살펴보자. 네다섯 살 먹은 아이가 모래성에서 친구와 놀고 있었다. 그 애는 갑자기 그 성을 독차지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는 친구에게 말했다. "내 모래성에서 나가." 다른 아이가 대답했다. "싫어." "나가." "싫어." '나가." 이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아이는 마침내 친구를 몰아냈다. 이것이 너무 재미있어진 아이는 그 모래사장에 있는 다른 모래성에도 가서 다른 아이들을 하나씩 밀어내기를 거듭한 끝에 10개의 모래성을 차지하였다. 왕국을 만든 셈이다.

국가들 사이에 있는 이견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 들면 이것은 불합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무기가 큰 파괴력을 가졌을 때 적에게 이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 자기 자신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정당한 전쟁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죄한 사람들을 상하거나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용되는 무기의 위력을 보면 이러한 조건을 지키는 것이 사실 상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금세기의 전쟁들은 군인보다 시민들을 몇 배 더 살해하고 있으며, 이 비율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종교들의 책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들이 심각한 폭력, 전쟁, 편견, 편협성 그리고 끝없는 분열을 조장하여 왔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기구들보다 더 세계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 가치를 강조하면서 상호간에 나누고 선언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그들의 집합적인 양심은 세계 권력 국가들의 국가적 이익에 도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인간의 기본적 가치들, 특히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는 연락망의 구축이나 장소가 없다. 우리는 군대가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은 그들의 직업인 것이다. 전쟁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거부되는 것이다. 만일 세계 종교들이 인간 가족들에게 그들의 공동근원과 모든 인간들이 신성으로 변형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면, 무죄한 사람들 나아가 전 인류 가족을 대신하여 함께 아주 큰 도덕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관심 없이는 아무도 크리스찬이 될 수 없다. 누구든 하루라도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 자원이 있는데 왜 수백만이 굶주려야 하는가? 그것은 탐욕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바른 질문을 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세계관을 묻지 않는다는 고정 관념에서 나온 무의식적 탐욕 때문인 것이다. 정신 자아의 의식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대화와 조화, 협력과 용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자각한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에 비추어서 우리의 윤리적 원칙을 재조명하는 내적 자유를 가지고 우리 시대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가 가꾸고 있는 이 지구와 우리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최소한 이 환경을 더 이상 손상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위성에 잠시 머무는 길손이며 우리가 간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해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넘겨 줄 때에 우리는 인간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분명히 갖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에 대해 가진 태도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마 25:31-46)의 의미이다. 우리의 어떤 형태의 인도적 행위는 죽은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미소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한 일들 혹은 하지 못한 일들은 영원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왕국을 차지할 사람들을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는 찾아 주었고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는 찾아 주었다"(마 25:35-36 참조).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 속에서 같이 고통 받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우리가 가능한 범위에서 그들을 도와주게 된다.

억눌린 자들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은 정신 자아 기간 동안에 심어진 씨가 완전히 자라난 직관적 의식의 열매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평균적 의식 수준은 신화적 회원의 수준에서 성숙한 정신 자아 수준의 의식으로 아직 넘어가지 못한 상태이다. 관상의 여정은 그 성격 자체가 성령의 은사의 감도를 받아 온전한 인간적 방법으로 행동하도록 나아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은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함은 물론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바꾸도록 은총의 신성한 에너지를 준다. 용기의 은사는 정의에 대해 배고픔과 목마름이 생기게 한다. 이러한 성향이 우리의 퇴행적 경향의 끌어내림과 문화적 조건화의 지나친 영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안토니오의 경우에서처럼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인간 가족은 아직 기원전 3000년경에 일어난 부계적 문화에 머물러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현대의 세계적 문화에서 동등하게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문화의 진보 과정에서 어느 정도에 있는가에 따라서 차별이 더욱 심하다. 진복에 대하여 구조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신하는 것만이 중독성을 가진 사회의 특징인 착취에 대한 조직적인 투신을 상쇄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의 가치가 이 지구의 누구에게나 도달하게 하려는 성령의 움직임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정신 자아의식에 맞추어진 구조를 통하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메시지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말로써는 아무 소용이 없는 실제적 관심의 실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크리스찬의 의식 속에 섬세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한 생활 방식, 내적 성덕, 권위에 대한 무조건의 순명 등 나사렛의 이상은 4세기 순교 시대의 종지부와 함께 크리스찬 거룩함의 기본적 모델이 되어 왔다. 전 인간 가족의 의식 수준이 정신 자아와 직관적 수준으로 옮겨 가면서 이러한 거룩함의 모델이 바뀌고 있다. 중요한 일에 있어서 단순한 순명만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적 상황, 전문적인 조언, 다른 사람들의 욕구, 은총의 내적 이끌림, 영적 지도, 시대의 징표 등 다른 요인들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개인적 책임을 지도록 정신 자아적 의식이 우리를 촉구한다. 그 책임은 지역 본당, 교구, 혹은 수도 단체의 전통적인 도덕에 국한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전 교회와 인류, 가족에 대하여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당국과 전통에 대한 존경이 진실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책임감은 특히 관상적 차원과 복음의 사회적 적용 등과 같은 복음적 도전을 더 잘 알려지게 하고, 더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시작하라고 재촉한다. 

2. 활동 안에서의 관상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남미와 중미에서 "기초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지라고 가르친다. 어떤 정부의 정책에는 불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때로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 기초 공동체 회원들은 복음을 읽을 때에 자신들이 그 복음의 일부를 이루는 것처럼 하고 그 말씀에 나오는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복음의 원칙을 일상생활에 적용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이 그룹의 사람들이 "우리가 진복(마태복음의 팔복에 해당함 : 편자 주)을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첫 번째로 하였다. 만일 거기에 대헌장(영국의 민주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실 : 역자 주)과 같은 제도적 힘이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 세계도 바꾸었을 것이다.

나는 1984년 10월 7일에 뉴욕의 신성한 성 요한 대성당에서 가졌던 세계 종교 회의에서 돔 헬더를 소개하는 특권을 얻었다. 그는 작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으며 그의 두 눈 밑에는 살이 커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아무도 그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모습만 봐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가를 알기에 충분했다. 그 회의의 초점은 참석자들이 우리 시대에 종교의 핵심적 측면으로서 평화에 대해 투신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고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종교 대표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늘날의 전쟁은 막기 어려울 만큼 위험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무기들이 필연적으로 많은 시민들을 살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들이 자국의 영토와 이익을 방어하기 위하여 도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은 비폭력적인 저항 방법뿐이다. 이러한 입장은 국제적 중재 기구, 특히 유엔과 같은 기구를 지원하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 유엔의 교회 센터에서 세계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의 사적인 모임이 있었다. 브라질의 가난한 처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돔 헬더가 초대되었다. 전 생애에 걸쳐 그가 봉사해 온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결핍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결핍된 사람들이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결핍된 사람들은 우리의 책임이다. 돔 헬더가 가난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였을 때 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눈 밑에 주머니처럼 축 늘어진 주름 속에 샘처럼 눈물이 고이더니 주름진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다음 5분간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을 실룩거렸고 우리는 그가 말을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를 간절히 기다렸으나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절망적인 곤경에 대한 기억은 그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의 반응, 즉 눈물을 흘리도록 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표정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함"의 뜻을 나에게 확실하게 알려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다루어 온 자신의 고정관념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배고픔과 억압과 평화 등등의 세상 문제가 중대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내가 단지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할 수도 있다. "내가 더 많은 쾌락과 더 많은 안전과 같은 이기적인 욕구들에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그리고 내 인생을 컨트롤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영향을 받고 살면서, 내가 어떻게 평화와 정의 같은 일에 공헌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자. "내가 완전히 정화될 때를 기다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자비의 활동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 하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마 25:35). 이 말씀에서 보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큰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한 잔의 물, 웃음,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우리는 유엔에 가서 연설하거나 정상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로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서든지(바로 이웃집에, 우리 가족 안에, 버스 안에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그들이 아주 먼 곳으로 가서 활동하기 전에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가르치라고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성공을 감당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여행에서 돌아와 기쁨에 차서 이렇게 외쳤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까지 복종시켰습니다!"(눅 10:17). 그들은 예수가 등을 두드려 주리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예수는 "그런 성공에 마음이 들뜨지 말라. 누구든지 조그만 심령의 에너지와 신성한 도움만 있으면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운명을 지녔으며, 너희가 사랑하고, 그리고 내가 보내는 그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가치를 전달할 운명을 지녔다."

봉사하려는 노력에 실패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온전히 신성한 영감에 의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3. 일상생활의 영성

일차적인 영성 수련은 일상생활 중에 자신의 투신에 충실하는 것이다. 고루한 반복, 실패, 어려움, 그리고 유혹들이 끝없이 일어나서 아무 진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을 통해서 여행시키신 것은 일상생활에서 하는 우리 영적 여정의 거울이 된다.

우리가 관상 기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서 성서적 사막을 알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에 투신하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와 활동 안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초석이다. 우리 영혼의 토양은 딱딱한 지반 같아서 정서적 잡초를 뽑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은총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 해로운 물질을 배출시키는 자연적인 능력을 우리 육신에 재충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육체적, 정신적 휴식이 필요하다.

관상 기도는 인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접근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 조건의 결과를 치유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 결과란 기본적으로 신성한 현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 병을 앓고 있다. 만일 우리가 심각한 병세를 가지고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영적 여정을 출발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병세란 단순히 이런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경험도 못한 채, 완전한 사색적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버티어 주고,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아픔을 방어해주는 다른 방법들을 우리의 연약한 자아는 절망적으로 찾는다. 관상 기도는 이 질병을 고쳐 주는 신성한 치료법이다.

이집트의 안토니오는 관상 생활에 네 가지 기본 요소를 구성하였다. 그것은 고독, 침묵, 단순성, 기도와 활동의 훈련이다. 수도원 생활이란 영적건강을 위한 이러한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수련을 지원하는 환경이다.

관상 기도는 이러한 요소들을 캡슬에 넣어 하루에 두 번 복용하도록 한 것이다. 깊은 기도 기간은 이 캡슬과 같이 인간 조건의 정신적 독소를 치유하는 항생제로 작용한다. 관상 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 속에 작용하게 하여 기도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얻게 하는 방법들이 있다. 다음은 이렇게 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 것이다.

①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림

인간 조건의 질병은 앞서 보았듯이 거짓 자아이다. 그것이 충분히 좌절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욕구는 물론 자신의 참된 선함까지도 짓밟으면서 자신의 아픔을 덜고 또 얻고 싶은 것을 가지려 든다. 거짓 자아를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는 단지 증세가 아닌, 질병 자체를 치유한다. 정서프로그램은 행동이 반복하여 생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서 무너진다. 일상생활에서의 좋은 수련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주된 정서 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를 자주 혼란케 하는 정서를 알아내고 또 정서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사건이나 기억 등을 주의해 봄으로써 우리는 원인이 되는 프로그램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피하고 싶거나 무엇을 갖길 원하는 욕망을 고의적으로 떠나보내면, 이것은 우리가 습관적 정서 반응들을 파헤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련은 죽은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의 뿌리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이며, 그 뿌리란 바로 우리의 행동 동기를 뜻한다. 우리가 적의를 품고 있으면 좌절의 근원이 되고 있는 무의식의 가치 체계를 바꿀 때까지 자극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화가 나게 된다. 그 무의식적 가치는 좌절의 원인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분노가 충실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우리가 결코 화내지 않겠다고 어떠한 결단을 내린다고 해도 그 문제의 원인을 다루기 전에는 아무것도 바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관상 기도 극기의 핵심이다. 일단 문제의 뿌리가 치유되고 나면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의 좌절이 있어도,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더 이상 고통스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수련을 다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일 흥분하는 어떤 정서가 일상 중에 반복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에 대해 분석하거나 반성하지 말고 그 정서가 무엇인지 알아내라. 그리고 그 정서를 일으킨 사건을 알아보라. 이러한 방법으로 좌절된 정서 프로그램을 추적해 낼 수 있다. 때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관계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라. "나는 통제하려는 욕망을 포기한다‥‥. 나는 인정과 애정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나는 안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물론 이러한 수련이 거짓 자아를 단번에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쉬지 않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것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의 반응, 판단,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 결과 어떤 정서가 일어나면 즉시 그것을 떠나보내려는 깊은 동기를 갖게 된다.

정서가 일어나서 거기에 따른 어떤 습관적인 비평이 동작하기 전에 그 정서를 떠나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비평이 시작되면 그것은 고통스런 정서를 강화시키고, 일단 정서의 주전자가 끓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이 식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고통스런 정서는 우리 몸에 화학 물질을 분비하게 하는데, 몇 시간이 걸려야만 간(肝)이 이 화학 물질을 청소할 수 있다.

우리에게 아동이나 친구처럼 누구인가를 교정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의 정서가 가라앉은 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당장 해주어야 하는 긴급한 경우가 아니고는, 흥분된 상태는 상황을 교정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다. 이런 상태는 친구를 질타하거나 아동에게 소리쳐서 우리의 나쁜 습관을 강화할 뿐이다.

② 집단 충성을 초월하기

우리가 받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충성을 느끼거나 특별한 연관이 있는 문화적 조건화에 대하여 과잉 동일시하는 데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 또 다른 수련이다. 이러한 성향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내적 자유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더 많은 책임을 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보듯이, 정신 자아의식의 특징은 자신의 정서생활에 개인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며, 남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핑계대지 않는 것이며, 어렸을 적에 무조건 받아들인 부모와 또래 그룹의 가치들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③ 능동적 기도 문장

일상생활에서 하는 또 다른 수련은, 우리가 주의 집중을 요하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여섯 내지 열두 음절(한국어로는 아홉 내지 열다섯 음절 정도) 정도의 능동적인 문장으로 기도하여 우리의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이것을 넣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 말씀이거나 우리가 선택한 어떤 기도어 일 수 있다. 동방 크리스찬들이 "예수의 기도"로 하는 특유한 영적 기도의 수련은 이 훈련의 한 표본이다. '순례자의 길'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예수의 기도"를 매일매일 긴 시간 되풀이하면 그것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혼자서 그 기도가 자연히 되풀이된다고 한다. 사막의 교부들은 시편의 구절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것들 중에 몇은 매일의 일과에 들어 있다. "오, 하나님! 오시어 도와주소서! 주여, 빨리 오시어 구해 주소서" 혹은 '나의 도움은 주의 이름에 있노라" 등이다. 이 문장을 반복해서 함으로써 우리의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넣으려면 큰 결단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꼭 하려고 마음먹으면 시간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워한다든지, 접시를 닦는다든지, 차를 운전한다든지, 일하러 걸어간다든지, 버스나 전화를 기다리면서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별 생각하지 않으면서 보낸다.

일단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저장되면, 이 새로운 테이프는 이미 저장된 테이프를 지워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서 프로그램이 좌절될 때마다 아픈 정서는 그 사실을 즉시 녹음하고 우리의 이미 저장된 테이프에서 적절한 비평이 나온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잔혹하게 구는 거야‥‥! 나는 좋지 않아" 등등 우리 비평의 평균적인 길이와 비슷한 길이의 문장을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넣어 두면 이것은 먼저 녹음된 것들을 지워서 흥분시키는 정서의 힘을 삭혀 준다. 이렇게 비평이 사라지면 정서적 소란이 쌓이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중립 지대가 형성되고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우리의 정서가 결정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이성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능동적 기도 문장의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어떤 여인이 시골길을 운전하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탄 소년을 치지 않으려고 길 가운데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 남자가 운전하며 오고 있었는데 그는 몹시 급해서 그녀를 추월하길 원하였다. 그는 자전거를 탄 소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왜 가운데로만 가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길 좀 비켜요!" 하는 뜻으로 계속 경적을 울려 댔다. 그 여자가 비켜 주지 않자 그에게 격분의 프로그램이 비평과 함께 일어났다. 패달을 있는 대로 밟고 그 여자 옆으로 확 지나가면서, 그는 창문을 내리고 그 여자에게 속된 욕을 퍼붓고는 그 여자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분노와 부끄러움과 상한 기분과 슬픈 마음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밀려왔다. 동시에 저장된 비평도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실까…? 남자들은 모두 짐승이야!"

이 여인이 억제력을 잃게 될 즈음에 그녀에게 능동적 기도 문장이 떠올랐다. "일치를 이루며 함께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달고 기쁜가!" 그러자 새로운 테이프는 낡은 테이프를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의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은 중립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 비어 있는 공간 안으로 성령이 급히 들어와 말하였다. "그 자를 사랑하라!" 평화의 파도가 그녀의 전 존재로 흘러 들어왔다. 그녀의 마음은 사랑과 기쁨과 다른 모든 성령의 열매로 찼다. 그녀는 그 남자를 가슴속에서부터 용서하고 마치 장미 한 다발을 받은 기분으로 그 길을 계속 달려갔다.

이것은 관상 기도의 효과가 일상생활에 가져오는 모든 여러 가지 방법들의 실용적인 목적을 특별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중립 지역 혹은 공간을 만들어 주어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 중립 지역은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모든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절제 그리고 온유)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신다.

④ 자기 수용

일상생활 중에서 하는 다른 수련은 자신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다. 메리지 엔카운터 그룹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전에 감정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기 시작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만일 우리 존재의 어느 수준이 어릴 적에 손상을 입었다면 이 엔카운터 그룹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이 프로그램이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미화하면 이것은 잘못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 그룹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억압해 온 감정들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서를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경험이 너무 좋아 그 과정을 거의 신앙화하였다. 하지만 한 수준의 것을 치유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다른 모든 수준의 것도 치유하지는 못한다. 다른 수준은 또 다른 치유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동정심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정서프로그램이 4살이나 5살 그리고 늦어도 7살이나 8살이면 완전히 다 자리 잡히며 따라서 이것들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에 무분별한 대접을 받아서 손상이 클수록 우리의 보상적 욕구도 커지며 정서프로그램도 더욱 굳게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어려서 신체적으로 학대받은 사람은 약 80퍼센트가 자기 아이들을 학대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아동의 구타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7살 이하 아동의 사망 원인 중에 가장 큰 원인이다. 깊은 치유를 받지 않으면 학대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그처럼 학대하는 일은 계속된다. 분노를 억압한 사람들은 가장 무력한 사람인 유아에게 그 분노를 더 쉽게 터뜨릴 것이다. 우리가 당한 것을 되돌리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우리의 문제를 누구에겐가 씌우게 되는데, 우리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그 무기력한 유아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손실로 고통을 받거나, 우리의 행동이 아동을 손상시켰다고 느끼거나 아주 중요한 관계가 깨어진다는 경험을 하면 커다란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내가 이것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경험을 통해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말할 때이다. 자주 그렇듯이 우리가 그 손상을 고칠 만한 길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고 고통의 결과를 줄여 달라고 청해야 한다. 그러면 그 비극의 원인이었던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발생한 잘못을 옳게 만드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 자신 안에 변화를 가져오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보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장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그대로 감수할 필요가 있다. 죄의식, 외로움, 그 외로움과 함께 아마 지루함도 경험할 것이다. 만일 고통스런 정서를 감수해야 한다면 그 정서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들을 느끼고, "그래,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분노를 느낀다. 고통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끌어안는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여라. 그러면 우리의 정서를 가라앉힐 수 있다. 우리가 이 고통스런 정서를 끌어안을 때에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닥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끌어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총이 흘러나와 아픔을 줄여 주기 시작한다. 우리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나눌 친구가 필요할 것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약이나 정신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모든 종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급진적인 치유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그 이유는 거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서 나을 길을 제공하신다. 우리가 조용히 앉으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에서 나오려고 감정을 발산하면, 우리는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인간의 비참함 속에 악마는 살아 있다. 우리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관련된 사람들을 용서하면 그 즉시 악마는 손을 든다. 악마와 그의 영향은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용서하려 들지 않을 때에 존재하고 더 커진다.

⑤ 내심을 보호하기

관상 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로 가져오는 다른 수련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내심의 보호"이다. 이것은 어떤 정서적 혼란이든지 그것이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기 전에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복잡한 방법인데 그것은 전 인생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심의 보호는 지향에 의해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때에 오는 내적 평화의 감각에 그 기초를 둔다. 평화의 기초적인 감각이 혼란을 겪으면, 즉시 어떤 단순하고 적절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겠다는 지향을 재확인한다. 이렇게 뜻의 일치 속에 머물러 있겠다는 주의(注意)성은 비행기를 유도하는 전파와도 같다. 만일 비행기가 항로에서 이탈하면 신호가 바뀌어서 조종사에게 그 방향을 바꾸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항로 안에 머물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이다.

첫째는 혼란한 사고들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하나님의 품에 던지거나 아니면 예수께 선물로 드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혼란스런 생각이 올라옴을 알아차리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즉 지금이 순간에 하고 있는 활동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혼란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면 책을 집어 들거나, 하려고 계획하였던 일로 돌아가, 흥분하게 하는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면서 내적 혼란을 일으키거나 혼란을 강화하게 만드는 비평의 시작을 피한다.

⑥ 거룩한 독서

또 다른 수련은 '거룩한 독서' 로서 사색적인 수준과 자발적 기도의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매일 하는 '거룩한 독서'는 하나님 안에 쉬는 관상 수련으로 이끌어 주고 관상기도의 개념을 계속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교회의 교부들은 관상기도를 전통적으로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관상은 듣는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서 오는 자연적인 결과이다. 다른 형태의 영적 독서도 여정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고 또 여정을 지속하려는 동기에 공헌한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이 '책자'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서에서 자기들이 좋아하거나 도움이 되는 구절을 몇 줄씩 적는다. 전화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위를 무료하게 둘러보는 대신, 그들은 주머니나 지갑에서 "소책자"를 꺼내 몇 줄 읽는다. 놀랍게도 우리는 자신이 세운 최선의 결단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말하자면 상업 선전과 같이 자꾸 되풀이하여 우리가 진정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반복해서 알려 주는 것과 같다.

⑦ 지원 단체에 참여

매주 하는 지원 단체는 어떤 형태의 관상 기도를 수련하여 일종의 전례처럼 침묵을 한데 모아주고, 서로 간에 용기를 북돋아 준다. 이러한 단체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지 기도를 빼먹는 경우에 기도에 항구하도록 우리의 결단을 새롭게 해준다. 특히 침묵 속에서 기도를 나누면 믿음을 증가시킨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은 복음의 관상적 차원에 대한 투신이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상태에 있든지 관계없이 이러한 투신은 우리의 전 존재와 전 활동에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인 여정에 온전히 승복하는 것이 요구된다. 일상생활의 부분으로서 메우는 정도의 훈련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삶의 여러 가지 면에 침투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관상으로 가는 길로서 향심 기도의 프로그램으로 여정의 길을 진지하게 시작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과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役事)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기도와 함께 이러한 수련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를 따르라"고 하신 초대에 전 인격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평신도나 능동적으로 목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관상에 투신하는 것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이다. 순교의 시대가 끝날 무렵에 안토니오에게 수도원 생활의 비전을 일깨워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신 성령께서, 이제는 이러한 사람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관상가가 되게 하고, 이기심의 제한된 세계를 초월하여 그들의 공동체에 봉사하게 하고, 그리고는 가난, 배고픔, 억압, 폭력, 무엇보다 사랑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온 지구 문제를 좋은 뜻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짊어지라고 부르신다.

 

3절 성령쇄신과 관상

성령쇄신의 결과로 생겨난 수많은 기도 모임들에서, 어떤 것은 근본주의적인 방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근본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면 어디서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전서 12장에 열거한 성령의 은사적 선물,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적인 영향을 우세하게 지키는 모임에서는 성령칠은에 대하여 알고 이해하려는 열망이 솟았다. 이것들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선물들이다. 그와 더불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 기초를 두고 개념적 배경을 제시하려는 신중한 노력도 있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이 쇄신과 과거의 그리스도인 영성의 여러 가지 형태, 특히 관상기도와 신비 생활의 관계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었다. 쇄신이라는 맥락 안에서 계속적인 영적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관상적 전통은 중요하게 할 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교회의 전통에 자신을 열기 전에, 쇄신 자체는 쇄신이 가지고 온 영감에 충실해야 한다. 이 영감이란 성령께서 힘을 주시고 위안을 주시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영감으로 우리를 이끄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 쇄신의 덕분에,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 묘사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자발성이 이 시대에 재발견되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초기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위에 공동체로 모여, 성서로 그의 말씀을 듣고, 전례 안에서 이 의미를 기념하며, 성찬으로 사람이 되신 말씀 안으로 변형되었다. 성령의 현존은 은사라는 수단으로 이 회중 안에 생생하게 나타났다. 방언의 은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세례를 받는 것과 함께 그 믿는 개인을 격려하기 위하여 함께 주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공공 예배 때에 방언의 사용을 규제했다. 방언의 해석, 예언, 기적, 영감을 받은 가르침, 말씀을 전하는 직책, 그리고 다른 선물들이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적, 육적 욕구들을 위해 제공되었다(고전 12:8-10 참조). 그렇지만 이러한 선물들은 보통 각 공동체에서 직접 혹은 원로들과 사목자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분별을 받도록 되었다.

관상기도와 신비적 생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발전시키는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은 이제 성령쇄신으로 되살아난 이러한 성서적 모델 안에 정립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지난 2, 3세기 동안 제시된 이러한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 관상의 위대한 스승들의 지혜를 충실하게 보여 준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영성적 전통이 온전하게 쇄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오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이다. 대부분의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수녀들이 신학교나 수도원에서 받은 금욕에 대한 가르침은 지난 수세기를 통하여 교회에 해독을 입힌 이단적 가르침(특히 얀센주의 : 역자 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교회의 영적 스승들의 신비주의에 대한 가르침은 무시되어 왔다. 그 결과로 교회는 지난 수세기 동안 영적인 사막이었고 그 자녀들을 단단한 음식인 관상기도로 양육하지 못했다.

이러한 것을 보여 주는 의미 있는 표시는,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의 종교적 훈련과 환경 안에 미흡한 관상적 차원을 찾아 동양 종교로 향했던 많은 무리의 가톨릭 신자들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여정의 원칙들이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언어로 이해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될 것이 긴급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형식은 과거에 이단적인 사상에서 받은 부정적 영향을 철저하게 피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이단적인 것들은 마니교(아우구스티노의 금욕적 가르침에 침투되었음), 얀센주의(17세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프랑스와 아일랜드 신학교에 암울한 영향을 미쳤음), 칼테시안주의(데카르트의 철학으로서, 서양 문명에서 극단적인 이원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 율법주의(교회가 현대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지연시켰음) 등이다. 새로운 형식은 신학과 성서연구에 관해 이루어진 현대적 발전을 전반적으로 고려에 넣은 것이라야 하며, 특히 인간의 발달과 그에 따른 영성생활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심리학과 사회학적 통찰들을 철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향심기도의 방법과 개념적 배경을 발전시키면서, 나는 이러한 긴급한 욕구들을 다루려고 시도했다.

교회는 전해 받은 교리와 실천 사항들에게 그때 그때 당시의 지식과 경험을 융화시켜야 하는 과제에 언제나 당면해 왔다. 새로운 과학이 급격히 확산되고 정보가 폭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이러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시대의 표지에 신속하고도 영감적으로 반응하는 능력과 모든 문화의 진정한 인간 가치들을 흡수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이 확대되어 가는 지구 사회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계발해야 할 카리스마들이다. 서기 15년경의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카리스마가 작용한 하나의 예이다. 그들의 결정에 성령께서 직접 영감을 주신다는 것을 사도들은 확신한 것이다.

이제 방향을 돌려 성령쇄신의 영성과 관상기도와 신비생활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시작하시는 성령세례가 카리스마적인 경험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분명한 준비 없이도 이 은총를 받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저 우연히 참가했다가 처음 모임에서 성령의 현존과 예수님의 현존에 부딪치면서, 많은 경우에 혼란과 당혹감을 겪는다. 이러한 경험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즉각적인 회두를 생각나게 한다. 성령세례는 이전에 예수님과 성령께 가졌던 관계에 극적인 변화를 분명히 가져왔다. 개개인의 회두는 매우 다양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들을 보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강한 인상, 자신의 죄가 완전하게 용서받았다는 확신, 예수님이 옛날의 역사 속에 남아있는 추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진정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 덕을 실천하기가 더 쉬워졌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전례를 더욱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절실한 욕망,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싶은 열정 등이다. 이것들과 유사한 다른 징조들은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말하자면 신비적인 은총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출중한 성향에 이르는 데에 점진적으로 가는 길도 있다. 이와 유사한 효과들이 수도원의 좋은 수련 도중에 진실한 회개를 하고 나서, 그리고 집중적인 종교적 훈련을 장기적으로 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회개의 중요한 징조는, 그것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즉각적으로 왔든, 아니면 꾸준히 덕을 수련해서 왔든, 그리스도교 수련이 추구해야 할 목표에 대하여 심오한 직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라는 계기이다. 성령 안에서 세례가 영성 발전에서 진전된 상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오라는 부르심을 나타낸다. 만일 방언의 은사를 성령세례 때에 받는다면, 관상기도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이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 드린다는 것을 인식할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단순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를 드리는 것이 바로 관상기도의 시작이다.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하는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진전이라고 교회의 관상 전통은 가르친다.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로 읽으며 묵상하는 것들은 자연히 내적인 침묵과 기도로 이끌어 간다. 기도 모임이나 개인도 이러한 진전을 경험한다. 어떤 회두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투신한 후에 처음 경험하는 열정과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로 흘러 들어오는 처음의 열정이 점차 자리를 잡아 가면 기도와 헌신의 수련들이 차츰 메말라 가는 경향이 있다. 논리적 묵상이 어려워지고, 영적인 수련이 지루해지고,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나 기도 모임의 기도에 대해 안절부절한 마음이 눈에 띄게 된다. 이러한 징조들은 으레 감각의 어둔 밤으로 들어간다는 표시이며, 이것에 관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란 책에서 고전적인 묘사를 했다.

영적 여정의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죄의 뿌리로부터의 정화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기도 모임의 회원들에게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도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렇게 마냥 건조한 시기를 경험할 때에는, 그들이 자신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는 데에 이러한 시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향심기도 안에 발전된 모델에서 볼 때에, 이러한 메마름의 기간은 무의식을 정화하는 여정의 부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정화가 없으면 우리가 회두했을 때에 처음 겪은 경험들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바위에 떨어진 씨와 같은 운명을 겪어야 한다. 이러한 메마름의 시기를 바라보는 다른 방법은 파스카의 신비를 더욱 가깝게 나눈다는 것이다. 바울이 빌 2:5~10 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의 비우심이 그들 안에도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의 비유와 같다. 겸손이 자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께 대한 복종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자라면서 자아포기로 이끌어 준다.

영적인 발전에서 이와 같이 중대한 시기에는 방언과 예언과 치유 등과 같은 성령의 은사들과 성령 칠은 사이에 있는 구별을 명백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에 따르면 은사들은 (방언의 은사를 제외하고) 지역 공동체의 건설을 위하여 쓰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거룩하다거나 그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거룩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집착하면 은사들은 오히려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하나나 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화시키시겠다는 하나님 계획의 일부인 것이 분명하므로 여기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연해지고 자기네가 이러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자만을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인간적인 성향을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외적인 시험을 주신다. 예언자나 치유자나 전교자들은 반대에 부딪치면서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은사를 황홀하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신을 겸손하게 지키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행복선언은 성령의 더욱 심오한 표현이며 믿음과 하나님 사랑의 확장과 함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서 성장을 한다. 행복선언의 변형적인 길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인간 이성의 주저함을 신적인 영감의 확실성으로 바꾸어주신다. 성령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수단으로 성령의 열매와 행복선언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성령만이 거룩함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변형은 신덕, 망덕, 애덕 등 삼덕의 힘 아래에서 일어난다.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이러한 덕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기능하도록 높여 준다. 즉 하나님께서 보고 느끼고 분별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보고 느끼고 분별하고 사랑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의식적 생활과 활동의 원천이 된다. '나'는 더 이상 동기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변형된 우리의 인간 속성 안에서 그리고 그 속성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신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주어진 성령은사와 하나님 사랑의 풍부한 선물 사이의 구분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사를 가진 사람이 또한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 13:1-3). 그러므로 성령기도를 하거나 은사를 행사하는 것은 신덕, 망덕, 애덕이 성장하도록 지향해야 한다. 성령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과의 일치로 부르시는 분명한 초대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영적 발전의 이차적인 표현들로 말미암아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가장 진실된 성령은사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분별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나 공동체의 대표들은 이러한 은사들이 은총에서 왔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무의식의 자연적인 에너지에서 나왔는가를 분별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선익을 위하여 이러한 분별에 기쁘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사를 행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공동이익을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적인 발전의 수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성령은사 외에, 소위 '신비현상' 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투시, 말씀을 듣는 것, 환시, 부양, 황홀경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존재론적인 무의식 상태에서 하나님과 접촉하면서 영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주어지기도 한다. 이것들은 내적 변형의 은총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비적' 현상이 비상하고 때때로 남의 눈에 띄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그 사람들을 미성숙한 신비가로 만들 위험이 있다. 영적 성장에 앞선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현상에서 어떤 자기만족을 갖기를 피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성령쇄신도 영적인 길에서 무엇이 필수적이며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를 구분하기 위하여, 관상기도의 지식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철저히 자격을 갖춘 영적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 영적 지도자들은 누가 내적 침묵과 고독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는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며, 고독에서 나와 어느 특정한 사목활동이나 봉사를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때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내적 침묵으로 기도하라는 이끄심에 따르도록 격려해 주어야 하는데, 비록 이것이 어느 기간 동안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않음을 뜻하는 경우라도 말이다. 자신의 삶의 의무 때문에 기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관상기도를 수련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특히 더 필요한 것이다. 기도회원의 기도가 성장하고 있는 모임에서는 전례 중이나 기도 중에 침묵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간에 복음의 관상적 차원이 발달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투신하는데 긴요한 부분이다.

현대 교회의 영성의 쇄신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헌의 하나는 성서에 대한 열성이다. 성서 읽기는 쇄신과 관상기도의 고대 전통사이에 다리를 놓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교 관상의 원천이다. 말씀을 깊은 주의의 수준에서 경청하는 것이 관상기도의 전통적인 실습 방법이다. 신성한 독서의 고전적인 수도원 수련에서, 주의 깊고 유순한 태도로 성서를 읽으면 거룩한 말씀에 깊이 침투하도록 만들고, 믿는 이의 가슴을 움직여 자발적인 기도로 응답할 수 있게 만든다. 정기적인 수련을 통해 주의(attention)가 지향(intention)으로 바뀌어 가면(즉 적극적인 자세에서 수용적인 자세로 기도의 자세가 변해 가면 : 역자 주), 하나님의 사랑은 사색의 흐름과 특정한 헌신과 같은 행위들을 하나님 안에서 쉬는 하나의 단순한 행위로 대치해 주시는 경향이 있다. 신성한 독서에서 하나님 안에서 쉼으로 옮겨 가는 움직임은 깊은 기도생활의 역동의 하나이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성령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서로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더 깊게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말씀이 자신 안에도 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과 내적인 말씀 사이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확인해 주고 강화시켜 준다. 내적 말씀은 고요 속에서 사랑의 지시를 받아 말씀하신다. 복음 선포나 성서를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외적으로 표현된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침묵에서 울려 와 나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 현존하는 그 말씀과 같은 말씀이며, 그 존재 안에서 그분은 성서가 가르키고자 하는 거룩한 신비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현존에 잠기라는 이끄심에 끌릴 때에 사고를 넘어서 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초연해지는 것인데, 그 이유는 성서는 하나님이 이해할 수도 없고 무한하시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무엇에다 비기려느냐?" (사 40:18 참조)

이 이사야의 예언에 주석을 하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지나치게 관념에 의존하면 인간적인 투사(投射)에 빠질 것이며,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단죄를 하셨던 우상을 만들기와 같은 잘못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떠한 개념에 대한 집착에서 정화된 믿음, 그리고 가장 영적인 위안이라 하더라도 그 위안에 대한집착에서 정화된 사랑만이 하나님을 신적인 일치의 즉시성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신적인 일치로 가는 데 가장 좋은 수련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떠나가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으로 증명하는 순수한 믿음, 순수한 신뢰, 순수한 사랑의 훈련이다. 이것은 바울의 말씀대로 '낡은 인간'을 떠나보내고 '새 인간'을 건설하는 일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영적인 인상에 내적으로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밖으로부터 말씀하신다. 관상적 삶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뿐 아니라 현존 밖에서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루어지는 변형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우리의 존재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제4절 삶과 성장과 변형을 위한 지침

다음의 원칙들은 크리스찬의 영적인 여정을 현대적 용어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이것들은 향심 기도의 수련의 개념적 배경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다음 것들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하는 방식처럼 읽어야 한다.

1). 삼위 일체, 은총, 육화의 신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좋은 본성을 가졌다고 믿는 것은 크리스찬 신앙의 근본 요소이다. 이 선함의 핵심이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 즉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신성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기초이다.

2). 우리의 선함의 기본적 핵심이 참 자아이다. 그 참자아의 가장 중심이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받아들임이 영적 여정의 첫 도약이다.

3).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별개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4). 원죄란 말은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상태는 각자가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보편적인 체험이며 이체험이 우리의 사색적인 자아의식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불완전, 분열, 고립, 죄악감 등을 일으킨다.

5). 원죄는 우리 각자가 잘못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 참 자아로부터 떨어졌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격리감이 문화 속에 팽배하여 우리가 어렸을 적에 우리 안에 심어졌으며 다음 세대에 계속 이것이 넘겨질 것이다. 원죄의 상태에서 생긴 깊은 불안감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긴급한 욕구가 일어나고 이 욕구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쾌락과 소유와 권력을 찾는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사회적 수준에서는 이것이 폭력과 전쟁과 구조적인 불의로 나타나게 된다.

6). 원죄의 특별한 결과는, 잉태한 때로부터 인격 속에 끼여 드는 여러 가지 습관, 어릴 적부터 자라면서 환경으로부터 받아 온 정서적 손상,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알게 모르게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그리고 지금은 무의식으로 들어갔지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의 고통을 막기 위하여 발달시킨 방법들을 들 수 있다.

7). 이와 같은 이성적 판단이 결핍된 반응들이 합쳐져서 거짓 자아의 기초를 이룬다. 이것은 참 자아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며, 거짓자아의 중심이 바로 거짓 자아 그 자체이다.

8). 은총은 우리 삶의 순간순간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이다. 성사란 예식적 행위로서 그 예식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시어 크리스찬적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위탁을 확인하시고 지탱해 주시는 것이다.

9). 세례로써 우리의 거짓 자아는 예식상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죄에 대한 승리가 우리의 임의에 맡겨진다. 우리의 각 개인의 독특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채,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이 죽음을 이기고 삶을 주는 세례의 물로 무너지게 된다.

10). 성체는 삶을 축하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적 요소들이 함께 모여 와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 떠오르고 인간의 의식을 신적인 의식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이것은 크리스찬 공동체 안에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신적인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성체가 되기 위하여 성체를 받아 모신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곤경과 중요한 사건들 속에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12). 개인적 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것(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진정한 욕구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시킨다.

13). 우리의 선함의 가장 중심 부분은 아주 역동적이며 스스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성장은 거짓 자아의 착각과 정서적 고착 때문에 방해를 받는데, 이것들은 문화적 조건화와 개인적 죄로부터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4). 성서를 읽고 전례 중에 말씀을 들으며, 기도 중에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그분이 주시는 영감에 우리가 응답하면, 어떤 상황에서 이 두 자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15). 하나님은 피조물이 즉시 완전해지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값어치 있는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시면서 멀리 계시어 우리가 도저히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공포로 복종을 시키는 폭군도 아니고. 감시하는 경찰도 아니고 쉽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무서운 재판관도 아니시다. 우리는 그분이 상과 벌을 주시는 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사랑의 활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6). 하나님의 사랑은 동정적이고, 부드러우며, 빛을 비추고, 완전히 내어 주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사랑이다.

17).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의 거짓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게 하며, 그리하여 참 자아로 가는 여정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안에 있는 참 자아로 가는 여정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는 길이다.

18). 이 체험에서부터 깊은 영적 평화와 기쁨이 넘쳐흐르면서 참 자아에 대한 자각이 성장하는데, 이것은 거짓 자아가 무너지고 죽어가는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이겨 낼 수 있게 한다. 거짓 자아를 움직이던 힘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참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의 작용과 더불어 새로운 자아를 세워 나간다.

19). 새로운 자아의 건설에는 수많은 실수가 있고 때로는 죄로 점철된다. 이러한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다 하더라도, 무한히 좋은 참 자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우리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한 마음가짐으로 새로워진 신뢰감과 힘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20). 끈질기게 없어지지 않으며 무기력하게 만드는 죄악감은 거짓 자아에서 온다. 참 자아는 개인적인 죄나 사회적 불의 때문에 용기를 잃게 하지는 않으며 그 대신 삶을 바꾸도록 이끈다. 이것이 바로회개로의 부르심이다.

21). 영적 여정이 진전하면 다른 사람들을, 특히 함께 사는 사람들을 무조건 받아들임이 나타난다.

22). 믿음의 공동체는 영적 여정 중에 표양과 시정과 상호 관심이라는 지원을 준다. 무엇보다도, 성찬이라는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참하면서 침묵의 기도를 함께 하면, 변형과 하나님과의 일치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일에 그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준다. 그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각자에게 나타나 눈에 뜨이게 되는데,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공동으로 봉사하거나 기도회와 전례를 위하여 모여서 함께 할 때 특히 더욱 나타난다.

23). 인간이 생존, 안전, 애정, 존경, 지배, 권력 등과 같은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적 욕구가 초점 안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욕구들 중 원천적인 욕구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을 이루려는 욕구이다. 친밀이란 사고와 감정과 문제와 영적인 영감과 같은 것들을 서로 나눔으로써 점차로 영적인 친구로 발전해 가는 것을 말한다.

24). 영적 친구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혼 관계에서나 독신 생활에서도 행복으로 이끄는 기본적 요소이다. 몇 사람과 친밀 관계를 유지하는 경험을 쌓으면 하나님과 또는 어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 능력을 확대시켜 주고 깊게 해준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적 에너지는 보편적인 동정으로 변형시켜 준다.

25). 내적인 여정과 상호간에 위탁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영적인 빛이 드러난다. 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서로 간에 자리를 마련하고 내어 주는 것이 이 위탁의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26). 관상 기도는 전통적 의미로 볼 때에 변형의 과정이 완성되도록 시작시키고 완성시키게 하는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다.

27).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우리의 과거 삶 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묵상이 관상 기도의 기초다. 기도 중에 사고와 감정을 자발적으로 떠나보내게 되면 이것이 관상 기도에서 진전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관상기도는 얼마나 사고와 감정이 기도 중에 일어나지 않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고 것들로부터 이탈할 수 있느냐에 있다.

28). 육체와 정신과 영의 좋은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올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참된 영적 수련의 목표다. 어떤 인간적인 성질이나, 과거 삶의 어떤 부분들은 결코 거부되어서는 안 되며 이것들을 각 단계에서 펼쳐지는 자아의식 속으로 융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각 발달 단계에서 좋았던 것은 간직하고 부족했던 것만 뒤에 남겨 둘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길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도 된다.

29). 영적 여정의 초기에 영적인 수련은 삶의 관상적 차원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봉헌하고 헌신하는 삶) 기초를 쌓는 데 아주 기본적이다. 매일 하는 수련에는 관상 기도 시간과 거짓 자아를 떠나 보내는 프로그램을 포함해야 한다.

30). 정기적으로 고독 속에 침묵으로 들어가면 정신이 평정되고, 내적 침묵이 형성되며, 자아 지식의 역사(役事)가 시작된다.

31). 고독이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드리는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게 되면, 자신의 삶과 은총을 점점 더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

32). 영적 가난의 지복(至福)은 참 자아를 더욱더 인식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태도이며 동시에 모든 것과 일치한다는 느낌이다. 많이 갖든 적게 갖든 내적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삶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영적 가난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이다.

33). 순결과 독신 생활은 다르다. 독신 생활은 우리의 성욕을 성기로 표현하는 것에서 금욕하겠다는 위탁이다. 순결이란 성적 에너지와 여기서 오는 남성 혹은 여성적 자질을 받아들이면서 이 에너지를 영성 생활에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적 에너지의 사용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34). 순결은 사랑하는 힘을 증진하고 확대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고결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의 품의를 존중하며, 그 사람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데 이용하지 않게 된다.

35). 순명이란 하나님을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또 그분이 우리 삶 안에 나타내신 것을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온순한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내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우리의 분별력이, 우리 내면으로 이끌어 주시는 은총의 빛을 받아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증거를 가려내게 하고 또 결정하게 한다.

36). 겸손이란 하나님과 자신과 또 모든 현실에 대하여 갖는 솔직한 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력함 속에서 평화를 느끼고 우리의 소홀함 속에 쉴 수 있게 해준다.

37). 희망은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을 계속 경험하여서 솟는다. 인내는 희망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인내는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린다.

38). 우리의 거짓 자아를 해체하고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신 사랑의 힘으로 해주시는 변형으로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세우는 것이 그분의 부활하신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39).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정서적 장애들이 우리의 자유를 묶어 두기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자라는 것에 방해가 된다. 그 뒤에는, 자기 조절에서 우러나는 미묘한 만족감으로 해서 오는 영적 자만심이 큰 방해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아 성찰이 하나님과의 순수한 일치를 막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

40). 인간적 노력은 불러 주시는 은총에 힘입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에 다다른 정도는 우리의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의 순전한 선물이다.

41). 예수께서는 상상과, 기억과, 정서를 다스리는 어떠한 묵상이나 신체 단련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체질이나 자연적인 성향에 따라서 알맞은 영적인 수련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그분의 직접적인 인도에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요구하실 때에 이 방법(묵상이나 신체 단련 방법)들을 버릴 용의가 있어야 한다. 성령은 어떠한 방법과 수련도 능가하신다. 그분이 주시는 영감에 따르는 것이 완전한 자유로 이르는 완전한 길이다.

42). 예수께서는 당신의 표본으로 제자들에게 길을 보여 주셨다. 즉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라 하신 것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

 


God Bless You !